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96화 (96/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96화

34. 집들이(3)

이엘을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왔을 때.

집에서는 소소한 술자리가 마련됐다.

마른안주에 인스턴트 어묵탕만 준비됐지만, 술자리를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대훈 아저씨가 주도적으로 술잔을 나눴고, 연우와 아윤이 자리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르신도 이런 술자리가 썩 나쁘지 않은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조금씩 술을 즐겼다.

할머니와 아주머니, 그리고 아직 술을 마실 수 없는 선우는 아이들과 함께 차와 디저트를 즐겼다.

차는 아르엘에게 받아온 엘프 차였는데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신 것 같았다.

‘가실 때 엘프 차 조금 챙겨드려야겠네.’

아저씨가 선우를 불러 술을 따라주려다가 아주머니에게 혼난 것만 빼면은 아주 즐거운 술자리였다.

밤이 깊어지고.

아이들이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살짝 피곤해 보이는 어르신과 할머니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

두 분은 시골의 집이 아닌, 근처에 있는 아들 집에서 며칠 지내실 생각이라고 하셨다.

배웅은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직접 전화로 콜택시를 불러 두 분이 택시에 올라타는 곳까지 배웅해 드렸다.

어르신의 손에는 내가 챙겨드린 엘프 차가 들려 있었다.

두 분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들을 먼저 잠자리로 데려갔다.

여러 사람과 만나면서 피곤했는지 침대에 눕혀 이불을 덮어주자마자 꿈나라로 떠나버렸다.

아저씨와 오연우는 죽이 잘 맞아 내가 없을 때도 계속 술잔을 나누더니, 아이들을 재우고 돌아왔을 때는 둘 다 얼큰하게 취해버린 상태였다.

비틀거리는 아저씨를 선우와 내가 부축해서 집을 나섰다.

“세진아. 우리 집에서 더 마실래?”

아저씨는 혀가 반쯤 풀려 부정확한 발음으로 더 마시자고 권유했다. 내가 쓴웃음을 지음과 동시에 아주머니가 웃으며 아저씨를 제지했다.

-퍼억!

“호호호.”

꽤 살벌한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저씨의 등짝을 후려친 아주머니는 민망한 듯 웃으셨다.

등짝을 맞은 아저씨는 술에 취해서인지 오히려 기분 좋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미안해. 세진아. 이 사람이 오늘 기분이 많이 좋았나 봐.”

“괜찮아요. 그리고 이거 가져가세요.”

“어머. 이건 어르신이 주신 선물 아냐?”

“어르신께 미리 말씀드려놨어요. 저 혼자 먹기에는 많으니까 조금 가져가세요. 안에 엘프 차도 같이 넣어놨어요.”

아주머니는 챙겨드린 복분자 선물과 엘프 차가 마음에 드시는지 눈을 살짝 빛냈다.

“예의상 거절은 안 해도 되지?”

“물론이죠.”

“고마워. 세진아.”

“아뇨. 오늘 아주머니 덕분에 음식도 맛있게 먹었는데요. 뭘.”

나는 아까와 같이 정 씨 가족을 균열 밖까지 배웅했다.

“새로운 집, 너무 좋았어요. 나중에 또 놀러 올게요. 오빠.”

“저도요. 형.”

“그래. 마음껏 놀러 와라.”

정 씨 가족을 태운 차가 출발해 멀어지는 것까지 확인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음냐…….”

거실에는 술에 취해 완전히 뻗어버린 오연우가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오연우! 집에 안 갈 거야?”

“으으으음.”

오연우는 내 목소리에 괴로운 듯 얼굴을 소파에 묻으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집에 연락 안 해도 돼?

“…….”

“야! 오연우!”

“…….”

내 말을 무시하는 건지 완전 의식을 잃은 건지. 대답도 안 하는 오연우의 모습을 한숨을 쉬며 내려다봤다.

나는 어쩔 수 없이 2층 방에서 여분의 이불과 베개를 가지고 내려와 오연우를 챙겨주었다.

그래도 잠자리가 마음에 드는지, 아이같이 편안한 미소를 짓는 녀석의 모습에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조금 남아 있는 부엌과 거실의 뒷정리를 마치고, 씻은 뒤에 나도 침대 위로 향했다.

침대 위에는 퓨이와 티아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고, 침대를 싫어하는 모렛은 침대 아래 푹신한 방석 위에서 털에 파묻혀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깨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올라갔다.

“퓨우우.”

“으응.”

내가 침대 위에 눕자, 마치 자석처럼 퓨이와 티아가 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피식.

품 안에 어리광쟁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뒤척이며 나도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짹. 째짹.

아침이 되어 숲속의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고.

가장 먼저 일어난 나는 약간의 숙취로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 소파에서 잠든 오연우는 마지막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부엌에서 물을 끓여 두 잔의 엘프 차를 준비했다.

은은한 차 향을 맡으며 뜨거운 차를 입안으로 흘려보내자, 몽롱했던 기분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잠들어 있던 몸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머지 엘프 차 한 잔을 소파 앞의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거실의 커튼을 한 번에 걷어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쏟아질 듯 아침 햇살이 들어왔고, 평화로운 숲의 정경이 보였다.

아침 숲 특유의 상쾌함을 느끼는 나와 달리, 오연우는 빛을 본 뱀파이어처럼 고통스러워하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끄어어억!”

나는 한심한 듯 오연우를 내려다보다가 이불 안으로 숨어버리는 녀석을 깨웠다.

“일어나. 일어나서 빨리 따뜻한 차 한잔 마셔.”

“으어억. 형. 속이 메스꺼워요.”

“그러게 누가 그렇게 술 마시래?”

“잔소리 좀 그만 해요. 머리 아프니까.”

나는 순간 어머니의 심정을 느끼며 녀석을 더 몰아세웠다.

“어이구. 잔소리 듣기 싫으면 빨리 일어나. 연락도 없이 외박했으면, 아침 일찍이라도 집에 전화해야지.”

“저는 내놓은 자식이라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엘프 차 얼굴에 뿌리기 전에 빨리 일어나!”

결국 내 잔소리를 견디지 못한 오연우가 초췌한 얼굴로 일어났다.

내가 건넨 엘프 차를 반쯤 정신을 놓고 마시던 녀석은 시간이 지나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어제 아주머니가 준비한 음식 중에 남은 것과 냉장고의 밑반찬을 꺼내 아침을 준비했다.

2층에 잠들어 있는 아이들도 깨워 오연우와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단출한 아침 식사가 끝나고.

아이들은 소파에 모여 앉아 TV를 통해 어린이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오연우는 아침 식사 덕분인지 완전히 제 모습을 찾았고, 식탁에 앉아 아이들을 지켜봤다.

“이제 좀 괜찮아?”

“네. 살 것 같아요.”

“그럼 이제 집으로 가라. 남의 집에 눌러앉지 말고.”

“에이. 매정하게 왜 그래요. 형.”

어울리지 않게 아양을 떠는 오연우의 모습에 닦고 있던 그릇을 집어 던질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집들이가 아직 안 끝났는데. 왜 돌아가요.”

“……아직 술 덜 깼냐?”

이해되지 않는 헛소리를 하는 오연우에게 진심으로 물었다.

“흐흐흐. 1차 집들이는 끝났지만, 2차 집들이가 남았죠?”

“……?”

“바로 시청자들과 함께하는 라이브 집들이!”

“……??!!”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는 오연우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쳐다봤다.

“저번에 낚시 라이브 방송하다가 사고 친 뒤로, 라이브 방송 아예 안 했잖아요.”

“그렇긴 한데…….”

“거기다 사고 치시고 수습도 대충했잖아요. 지금쯤 한번 라이브 방송 한 번 해야죠. 거기다 집 소개만 해도 대충 방송 때울 수 있을 것 같고.”

“…….”

나는 저질러 놓은 사고가 있어 화를 내지는 못하고, 불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집주인의 의견은 안 물어보고?”

“형도 저한테 거짓말하고 혼자 엘프랑 꽁냥거리고 있었잖아요.”

“크흠…… 근데 라이브 방송이면 미리 공지 올려야 하는 거 아니야?”

“흐흐. 그럴까 봐 어제 몰래 공지 올려놨죠.”

“치밀한 자식…….”

“그럼 저는 2차 집들이 준비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녀석의 비밀 작전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오연우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텐트에서 가져다 놓은 방송 장비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저 왔어요.”

오연우와 막 이야기를 끝냈을 때, 이엘이 아침 일찍 우리 집에 도착했다.

나와 오연우는 잠시 눈을 마주치고 시선 교환을 했다.

-엘프는 출현 안 시킬 거죠?

-끄덕. 끄덕.

-그럼 알아서 잘 돌려보내세요.

-……끄덕.

순식간에 의견을 나눈 둘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엘을 맞이했다.

“안녕. 이엘.”

“안녕. 나 기억하지?”

“네. 안녕하세요.”

이엘은 어제 낯을 가리며 부끄러워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오늘은 오연우에게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인사에 오연우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에게 인사를 한 이엘은 바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TV를 보기 시작했다.

행복한 여운에 빠져 있던 오연우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방송 장비를 체크하러 갔고.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이엘을 바라보며 어떻게 저 순진한 엘프를 거짓말로 돌려보낼지 고민했다.

* * *

오전에 잠시 약초밭을 둘러보고, 12시에 아이들과 간단하게 점심을 챙겨 먹었다.

공지 사항에 올린 라이브 방송 시작시각은 1시 30분.

이제 슬슬 이엘을 돌려보내야 했다.

아침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나와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게 이엘의 일상이었기에 거짓말로 돌려보내려니 살짝 양심이 찔리는 듯했다.

그래도 이엘의 너튜브 출현은 미루기로 했기에 마음을 다잡고 웃고 있는 엘프 소녀에게 다가갔다.

“이엘?”

“왜요. 아저씨?”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는 이엘에게 나는 떠듬떠듬 말을 꺼냈다.

“저기.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잠시 뭐를 좀 해야 하는데. 오늘은 일찍 돌아가 주면 안 될까?

“…….”

내 말에 이엘은 표정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내게 물었다.

“저도 같이하면 안 돼요? 아니면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게요.”

“으음…….”

떠나기 싫어하는 이엘의 모습에 살짝 고민했다.

‘방송에는 출현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만 보게 할까?’

아주 잠시 고민을 했지만, 원래 계획했던 대로 이엘을 돌려보내기로 했다.

“미안해. 오늘만 부탁할게.”

“…….”

이엘은 더 떼를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귀를 축 늘어뜨린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지만, 나중에 더 재미있게 놀아줄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꾹 참았다.

“집에 데려다줄까?”

“아뇨, 괜찮아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터벅터벅 혼자 통나무집을 떠나가는 이엘의 모습에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옆에서 같이 지켜보던 오연우도 얼굴을 찡그리며 괴로운 듯 말했다.

“형. 이거 진짜 못 할 짓이네요.”

“…….”

“그냥 옆에서 구경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안 돼. 실수해서 저번처럼 또 난리 나면 어떻게 하려고. 일단은 원래 계획했던 대로 가자.”

떠나버린 이엘 때문에 아이들도 살짝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쳐져 있는 아이들을 잘 다독였다.

오늘 방송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고, 최대한 금방 방송을 끝내고 이엘과 같이 재미있게 놀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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