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95화
34. 집들이(2)
아주머니와 음식 준비가 한창일 때, 오연우가 통나무집에 도착했다.
“안녕!”
“퓨이!”
티아와 퓨이는 오연우와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터라 굉장히 편안하게 맞이했고.
“후모!”
모렛 역시 평범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오?”
이엘은 조금 쑥스러운 듯 눈치를 보며, 티아와 퓨이를 따라 인사를 했다.
오연우는 이엘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눈만 끔뻑끔뻑했다.
그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인사를 했던 이엘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이엘의 도움 요청을 확인한 나는 황급히 둘 사이로 다가갔다.
“여긴 아저씨 일을 도와주는 사람인 오연우야. 그리고 이쪽은 숲 근처에 사는 엘프 ‘이엘’이야.”
서로를 짧게 소개해 주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오연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뭐해! 애가 불안해하잖아.”
“앗!”
내 속삭임에 드디어 정신을 차린 오연우는 허둥지둥하며 겨우 말을 꺼냈다.
“어…… 안녕? 나는 인간 오연우라고 해.”
친절하게 자신의 종족까지 밝힌 오연우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엘은 잠시 망설이더니 짧게 같이 손을 흔들었다.
이엘이 같이 손을 흔들어주자, 경직되어 있던 오연우의 표정이 조금 풀리며 살짝 미소가 걸렸다.
이엘은 쑥스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 돌아가 버렸다.
이엘이 멀어지자 오연우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푸흡. 인간 오연우래. 크크큭.”
나는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리며 오연우를 놀렸고, 그는 창피한지 얼굴을 붉히며 변명했다.
“아니, 당황해서 그랬어요. 당황해서!”
“알았다, 알았어. 인간 오연우 씨 화내지 마세요.”
“아이씨. 진짜!”
“크크큭.”
오연우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던 아주머니와도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아이들을 위해 가져온 영화 DVD를 틀어주었다.
평소에 영화를 보는 게 취미였던 그는 오늘 집들이 선물로 집에 있던 각종 영화 DVD를 가져왔다.
새로 구매한 거실의 벽걸이 TV에 선명한 화질로 영화가 재생되기 시작하자, 소파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흥분해서 들썩거렸다.
“우와. 엄청 선명하다!”
“퓨우우.”
“…….”
“후모.”
티아와 퓨이는 노트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선명한 화질과 사운드에 감탄했고.
이엘은 그저 이 모든 것이 신기한지, 마치 신비한 마술을 보는 듯 시선을 화면에 빼앗겨 버렸다.
모렛의 반응은 비교적 담담했지만, 화면에 집중해 영화를 감상하는 듯했다.
생각 이상으로 좋아하는 아이들의 반응을 보며 나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가격의 비싼 제품을 구매했는데, 확실히 비싼 값을 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 아이들과 함께 거실에 모여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볼 생각을 하니 절로 흐뭇한 표정이 지어졌다.
내 흐뭇한 표정과는 달리 오연우는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뭐가?”
“아니. 분명 그때는 엘프를 못 만났다고 했으면서! 제가 물었을 때 이미 만나셨던 거죠?”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 진짜!!”
“화내지 마. 미국 여행 다녀와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리고 어찌어찌 그 일은 잘 해결됐잖아.”
인상을 찌푸리는 오연우를 살살 달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도 이엘을 처음 만났을 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일단은 숨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
“아직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
“너튜브에는 출연시킬 생각이 없으신 거예요?”
“티아나 퓨이와는 상황이 다르니까.”
티아와 퓨이는 내가 보호자인 입장에서 데리고 있는 아이들이지만, 이엘은 엄연히 호수 건너편에 아르엘이라는 보호자가 따로 있었다.
물론 보호자 마음대로 그것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거실의 벽걸이 TV를 저렇게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엘프에게 너튜브에 관해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은 아직 힘든 일이었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즐겁게 느껴지는, 이 순진한 엘프 소녀는 너튜브 촬영도 쉽게 허락할 가능성이 컸다.
이엘이 조금 더 이 상황을 이해하고,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는 촬영에 대해 언급할 생각이 없었다.
오연우도 내 생각을 이해했는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저씨! 아저씨!”
“응? 왜 그래?”
영화를 보던 이엘이 다급하게 나를 부르자, 무슨 일인가 싶어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저것 좀 봐요.”
흥분한 이엘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화면에는 절묘한 분장과 섬세한 CG로 보정된 엘프가 비치고 있었다.
“엘프가 나와요. 저 엄마 말고 다른 엘프를 보는 건 처음이에요!”
영화의 가짜 엘프를 보고 귀를 쫑긋거리는 귀여운 진짜 엘프.
나는 이엘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작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옆에 있던 오연우도 나처럼 따라 웃기 시작했다.
이엘은 나와 오연우가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 모습마저도 너무 귀여워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순진한 엘프 소녀의 귀여운 행동 덕분에, 나와 오연우는 너튜브에 관한 것은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
* * *
시간이 지나 아윤과 선우 남매가 도착하고, 조금 뒤에 어르신과 할머니도 도착했다.
“약초 할아버지!”
“할아버지!”
“퓨이!”
“후모!”
아이들이 뛰쳐나와 어르신과 할머니를 맞이했다.
어르신은 아이들의 환영에 환한 미소를 지었고, 처음 아이들을 보는 할머니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둘러봤다.
할머니는 준비해 온 간식들을 쉴 새 없이 꺼내며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고, 쉽게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에게 어르신이 다가와 뭔가를 툭, 내밀었다.
“받아라. 선물이다.”
“……?”
“아는 사람이 직접 만든 복분자차랑 복분자주다.”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시끄럽다. 어른이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면 될 것이지.”
“아…… 감사합니다. 어르신.”
“크흠.”
내가 깊숙이 고개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하자, 어르신은 어색한 표정에 헛기침하며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러니까 연우 형이 먼저 하자고 해서 세진 형이 너튜브 시작하신 거네요?”
“그렇지. 내가 애걸복걸해서 너튜브 시작한 거지.”
“와아. 저도 가끔 보는데, 구독자 엄청 많이 늘었던데요.”
“아직 한참 멀었지.”
“연우 오빠. 영상 촬영하는 거 엄청 재미있어 보이던데. 다음에 한 번 구경해도 되요?”
“물론이지. 원하면 직접 촬영에 참여해도 되고.”
오연우는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쉽게 정 씨 남매와 친해졌다.
젊은 사람들에게 핫한 너튜브 이야기를 주제로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세진아, 애들아. 이것 좀 도와줄래?”
부엌에서 아주머니가 도움을 요청했고, 나와 정 씨 남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오연우까지 부엌으로 향했다.
아주머니가 준비한 음식들이 마당 나무 테이블 위에 하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모렛의 솜씨로 만들어진 커다란 나무 테이블 2개에 사람들이 나눠 앉았다.
한쪽에는 어르신과 할머니, 나와 아이들이 앉았고. 나머지 테이블에 정 씨 가족과 오연우가 앉았다.
“자, 뜨거워요. 조심하세요.”
아주머니는 준비해 온 휴대용 가스버너에 보글보글 끓는 밀푀유나베를 올렸다.
갖가지 채소와 버섯이 소고기와 함께 진한 육수를 우려내며 맛있게 끓고 있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잡채, 월남쌈, 돼지고기 수육, 연어 샐러드까지.
딱 봐도 정성이 느껴지는 음식들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유. 고생했겠어요. 내가 미리 와서 좀 도와줄 걸 그랬네.”
할머니는 음식들을 둘러보며 고생했을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여기 세진이랑 아이들이 도와줘서 많이 안 힘들었어요.”
생각보다 훨씬 더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들에 나도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밀푀유나베에 고기는 금방 익으니까 채소만 익으면 바로 소스에 찍어서 드시면 돼요. 다 드시면 죽도 준비해 드릴 테니까 말씀하세요.”
“수고했네.”
“잘 먹을게요.”
“아주머니. 잘 먹겠습니다.”
아주머니의 친절한 설명에 우리는 저마다 감사 인사를 전했고, 아이들도 우리를 따라 인사를 했다.
밀푀유나베도 금방 알맞게 끓었고, 어르신을 시작으로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을 챙기며 드문드문 음식을 맛봤는데, 너무 맛있어서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할머니도 음식들을 하나하나 맛보며 감탄을 하셨고, 별다른 반응이 없을 것 같았던 어르신도 생생한 표정을 보여줄 정도였다.
아이들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복스럽게 음식을 먹어대는 아이들의 모습에 어르신과 할머니가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어르신. 이것도 한번 맛보시죠. 제가 호수에서 잡아 온 녀석인데. 맛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식사 전까지 낚시를 즐기다 온 아저씨는 꽤 크기가 있는 물고기 두 마리를 잡아 왔는데, 바로 구워서 한 마리를 이곳으로 가져왔다.
아저씨가 직접 구웠는지 약간 투박한 느낌이 느껴지는 생선구이였다.
옆에 화려하고 맛깔나는 아주머니의 음식들 때문에 솔직히 큰 기대감이 들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어르신이 먼저 생선구이를 한 점 맛봤는데.
“오오!”
“……?”
어르신은 씹자마자 곧바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전혀 예상 못 한 반응에 할머니와 나도 따라서 생선구이를 맛봤다.
‘오오?!’
분명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인데, 민물고기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감칠맛과 기름진 맛이 났다.
아주 투박하게 요리된 음식이었지만 아주머니의 음식과 엇비슷할 정도로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어때? 맛있지?”
-끄덕. 끄덕.
아저씨의 물음에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이들을 챙기며 정신없이 맛있는 음식을 먹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 * *
맛있는 식사 시간이 끝나고, 뒷정리는 나와 아저씨, 연우, 선우가 맡게 되었다.
우리가 뒷정리하는 사이.
고생한 아주머니는 할머니를 모시고 아윤과 아이들과 함께 온천으로 향했다.
“어르신. 음식은 좀 입맛에 맞으셨습니까?”
“자네가 집사람 자랑을 할 만하더구먼.”
“흐흐흐. 그렇죠?”
어르신의 칭찬에 아저씨가 칠칠하지 못한 웃음을 흘렸다.
“저도 진짜 맛있게 먹었어요. 가끔 세진 형한테 놀러 와서 반찬 맛본 적 있었는데, 오늘 제대로 포식했네요.”
정선우도 호들갑을 떨며 아저씨에게 음식을 칭찬했다.
설거지와 자잘한 뒷정리를 끝냈을 때쯤.
온천에 들어갔던 일행이 돌아왔다.
아윤을 포함한 아이들은 얼굴에 윤기가 흘렀고, 할머니와 아주머니도 피로를 제대로 풀었는지 개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음은 남아 있던 사람들이 온천으로 향했다.
나는 같이 온천으로 가지 않고,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이엘을 집으로 데려다주기로 했다.
온천에서 막 나와 촉촉함이 느껴지는 이엘의 손을 잡고 호수 건너편으로 향했다.
이엘은 오늘 있었던 일들이 너무 재미있었는지, 집으로 향하는 길에 내 손이 흔들릴 정도로 몸을 흔들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늘 재밌었어?”
“재밌었어요. 아주머니가 해준 음식도 맛있었고, 할아버지가 준 간식도 맛있었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다른 엘프를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하하하.”
엘프 이야기에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엘의 순수한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기에, 영화에 나온 엘프가 가짜 엘프라는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나중에 아르엘 님에게 말해둬야겠어.’
집으로 들어가는 이엘의 모습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잔잔한 호수에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