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94화
34. 집들이(1)
호수가 보이는 공터에 나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완성되었다.
모렛의 밤낮을 가리지 않는 노력 덕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통나무 집이었다.
균열 노숙자의 능력으로 새로운 보금자리에 전기와 수도를 연결하고, 텐트에 있던 짐들을 대부분 이곳으로 가져왔다.
집은 너무 잘 완성되었지만, 아직 가구가 하나도 없어 내부가 전체적으로 휑한 느낌이 들었다.
‘뭐부터 사야 할까? 냉장고도 좀 큰 거로 하나 사야겠고, 침대, 식탁, 커튼도 달아야 하나?”
나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무엇이 필요할지 상상하며 간단히 쇼핑리스트를 작성해 보았다.
1층의 부엌과 거실, 하나의 작은방과 하나의 큰방이 존재하고, 2층에는 세 개의 방이 존재했다.
2층에서 전망이 제일 좋은 방은 내 침실로 사용할 예정이었고, 나머지 방 2개는 일단 비워둘 생각이었다.
1층도 부엌과 거실을 제외한 나머지 방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확정된 건 아니지만 아이들이 모여 놀 수 있도록 놀이방으로 꾸미는 걸 생각해 보는 중이었다.
일단은 위치가 정확히 지정된 부엌, 거실, 2층 안방, 화장실, 욕실에 필요한 가구와 물품들을 정리해 나갔다.
본의 아니게 텐트 생활을 계속하면서 강제적으로 미니멀리즘 라이프를 유지해 왔는데, 집이 넓어지고 뭔가를 채워 넣으려 하니 굉장히 기분이 묘했다.
인터넷을 통해 노트북으로 필요한 가전제품을 알아보는 와중에 귀여운 참견꾼들이 난입을 시도했다.
“세진! 세진! 벽걸이 TV 사자.”
“벽걸이 TV?”
“응. 저기 거실에 걸어두고 보고 싶어.”
티아는 갑자기 벽걸이 TV를 구입할 것을 요구하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벽걸이 TV는 어디서 보고…….”
“드라마에서 봤어. 드라마에 나오는 집에는 항상 커다란 벽걸이 TV가 있단 말이야.”
“끄응.”
“나도 큰 화면으로 영화나 드라마 보고 싶어.”
아무래도 노트북 화면이나, 휴대폰으로 영상을 시청하다 보니 많이 답답했나 보다.
나는 거실을 쪽을 둘러보며 벽걸이 TV와 소파가 있는 공간을 상상해 보았다.
텐트 생활을 할 때도 아이들과 같이 영화나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는 시간이 많았다.
티아에 말대로 조금 더 넓은 거실에서 벽걸이 TV로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확실히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생각해 볼게.”
“헤헤. 알았어.”
확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티아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지 더는 떼를 쓰지 않았다.
“퓨이! 퓨이!”
이번에는 퓨이가 내 노트북의 화면 한쪽을 꼬리로 가리키며, 살짝 흥분한 울음소리를 냈다.
퓨이가 가리킨 것은…….
“으응? 안마의자?”
“퓨이!”
조금 뜬금없게도 값비싼 전신 안마의자였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퓨이와 화면의 안마의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일단 가격을 떠나서 퓨이가 이게 뭔지나 알고 꼬리를 가리키는 건지 궁금했다.
“퓨이야. 이게 뭔지 알아?”
내 질문에 퓨이는 직접 몸을 움직여 안마의자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퓨이! 퓨우우. 퓨! 퓨이!”
의자에 앉는 동작을 보여줌과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퓨이.
확실히 안마의자가 어떤 물건인지는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자금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고 해도, 덜컥 저 비싼 안마의자를 사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퓨이야. 미안해. 이건 사기 힘들 것 같아.”
“퓨우우.”
안마의자 구매 요청이 거절당하자 퓨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축 처진 퓨이를 쓰다듬어주며 위로했다.
“아저씨. 아저씨. 이거 사는 게 어때요?”
“……?”
“숲을 만드는 물건이래요.”
“……?!”
가전제품으로 숲을 만드는 제품이 나왔을 리가…….
이엘이 가리키는 화면을 바라보니 숲을 만드는 게 아니라, 숲과 같은 공기를 만들어주는 공기청정기였다.
아직 한글이 서툰 이엘이 잘못 뜻을 이해하고, 공기청정기를 숲을 만드는 기계라 오해한 것 같았다.
매일 상쾌한 숲 공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이곳에서, 공기청정기는 이곳에 가장 필요 없는 가전제품일지도 몰랐다.
나는 이엘에게 공기청정기의 뜻과 용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이엘은.
“왜 공기를 정화해요?”
“저쪽 세상에서는 여기와는 달리 공기가 굉장히 탁하거든.”
“……??”
내 설명에도 이엘은 미세먼지나, 공기가 탁하다는 이야기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평생 숲에서 자란 이엘에게는 공기가 안 좋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기 힘든 것 같았다.
그 뒤로도 아이들은 노트북 화면 속 여러 가지 가전제품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 * *
가구들은 정대훈 아저씨 가까운 지인 중에 가구 판매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어서, 싸고 좋은 물건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판매장에서 가구를 고를 때, 아저씨와 아윤이 따라와 도움을 주었다. 특히 디자이너를 꿈꿨던 아윤은 감각을 살려 통나무 집과 잘 조화되는 가구들을 고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배달된 가구를 집 안으로 옮길 때도 아저씨와 선우가 손을 빌려줘서 쉽게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꺄아아!”
“퓨이! 퓨이!”
“꺄르르.”
안방으로 커다란 침대가 옮겨지자, 아이들은 그 위에 올라가 신나게 뛰어놀기 시작했다.
아마 옆에 아저씨와 선우가 없었다면 아이들과 같이 침대에 뛰어 올라갔을 정도로, 뛰어노는 아이들은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와 같이 옆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던 아저씨는 땀을 닦으며 내게 말했다.
“이제 가구는 다 옮긴 거지?”
“네. 고맙습니다. 아저씨.”
“고맙긴 뭘.”
내 감사 인사에 아저씨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충 받아넘겼다.
“그것보다. 집들이는 언제 할 거냐?”
“집들이요?”
“새로 집을 지었는데 당연히 집들이해야지. 집들이를 해야지. 집들이해야 복이 들어온다는 말 못 들어봤어?”
“흐음…….”
아저씨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집들이해야 복이 들어온다는 미신 같은 이야기는 믿지 않지만.
그와 별개로, 주변 사람들을 초대해 집을 구경시켜주고 대접하는 일은 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텐트가 오랜 시간 나의 보금자리로 활약해 준 고마운 곳이지만. 주변 사람들을 자랑스럽게 초대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번에 완성된 새로운 보금자리를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는 겸, 같이 식사 자리도 마련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집들이에 대해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정선우도 말을 거들었다.
“형. 그냥 집들이해요. 저도 초대받아서 정식으로 집구경 하고 싶어요.”
나는 선우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오늘 가구 옮기느라 집안 곳곳을 돌아다녔으면서, 집구경은 무슨.”
“에이. 일하러 온 거랑 손님으로 초대받은 거랑 같아요?”
“암! 다르고말고.”
꽤 논리정연한 선우의 반박에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두 부자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져 허탈하게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한번 준비해 볼게요.”
집들이를 하겠다는 말에 아저씨는 크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리셨다.
생각보다 너무 기뻐하시는 아저씨의 모습에 나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집들이 당일에 풀리게 되었다.
* * *
-퐁당!
낚시찌가 수면에 파동을 일으키며 둥둥 떠올랐다.
대훈 아저씨는 아주 능숙한 캐스팅 솜씨로 아주 멀리 찌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나와는 다르게 숙련자의 포스가 느껴졌다.
“흐흥. 흐음.”
“…….”
아저씨는 캐스팅이 마음에 들었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낚시 의자 위에 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저씨.”
“응?”
“이러려고 집들이하자고 한 거죠?”
“아니, 뭐. 꼭 낚시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겸사겸사…….”
“…….”
“쩝.”
집들이와 낚시.
뭔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동시에 언급되게 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아저씨와 선우의 강력한 추천으로 집들이를 계획하게 됐고,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인 중에는 당연히 정 씨 가족이 포함되었다.
내가 초대의사를 밝히자마자 곧바로 아주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진아. 집들이한다면서?
“네. 새로 보금자리를 마련했는데, 평소에 고마웠던 분들 모셔서 한번 대접하려고요.”
-어머, 초대해 줘서 정말 고맙네.
“아뇨. 당연히 초대해 드려야죠.”
아주머니는 특유의 부드러운 말투로 초대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전화를 건 본격적인 이유를 꺼내기 시작했다.
-근데 음식 준비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아. 웬만하면 제가 직접 준비하고 싶지만, 솜씨가 없어서. 음식점에서 주문배달로 준비하려고요.”
-그러면 안 돼. 기쁜 일을 축하하는 날인데. 배달 음식이라니.
“죄송합니다.”
-세진이가 죄송할 게 뭐가 있니. 안 되겠네. 내가 직접 나서야겠어.
“예?”
아주머니는 집들이에 배달 음식은 절대 안 된다는, 완강한 주장을 펼치며 직접 음식을 준비하겠다고 나섰다.
집들이 손님이 집들이 음식을 준비하다니. 나는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집들이하는 날, 재료 준비만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끝으로 집들이 음식은 아주머니가 준비하는 거로 결정돼버렸다.
그리고 집들이 당일.
양손에 재료를 빵빵하게 챙겨 든 아주머니와 양손에 낚시 장비를 가득 챙겨 든 아저씨가 아침 일찍부터 이곳에 도착했다.
나는 그제야 아저씨가 그렇게 기뻐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주머니가 병에 걸리게 된 이후로, 아저씨는 혼자서 낚시하러 다니는 일을 자제했고.
가족 여행을 가는 경우에만 틈틈이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내 집들이를 가족 여행 삼아 낚시를 할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
거기다 내가 음식 준비를 못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아주머니가 직접 나설 거라는 것까지 예상했다는 사실이 소름 끼칠 정도로 놀라웠다.
“에휴. 저는 가볼게요. 아저씨.”
“어어? 같이 낚시 안 하고?”
“아주머니 요리하는 거 도와드려야죠.”
“흐흐. 알았다.”
아저씨는 혼자서 하는 낚시도 나쁘지 않은지, 미소 가득한 얼굴로 낚시에 푹 빠져버렸다.
나에게는 금방 신경을 끊어버린 아저씨를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통나무집으로 돌아가 부엌에 들어가니, 아주머니는 요리 준비로 매우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계셨다.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어머, 도와주러 왔어? 아저씨랑 같이 낚시해도 괜찮은데.”
“그래도 제가 집주인인데 조금이라도 음식 준비를 거들어야죠.”
“알았어. 저기 감자 좀 씻어서, 껍질을 벗겨줄래?”
아주머니는 내 말에 방긋 웃으며, 나도 할 만한 잡다한 재료 손질을 부탁했다.
“몸은 괜찮으세요?”
“괜찮고말고. 저번에 세진이가 전해준 약초가 정말 좋은 약초였는지, 그 뒤로는 아주 괜찮아졌어.”
내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인지, 아주머니는 일부러 더 과장된 몸짓을 보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이는 지금 혼자서 낚시하는 중이야?”
“네. 제가 가겠다고 했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낚시하시던데요.”
살짝 불퉁한 내 반응에 아주머니가 작게 웃었다.
“후훗. 너무 뭐라 그러지 마. 그이도 나 때문에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오랫동안 참은 거니까.”
“이미 알고 계셨어요?”
“당연하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집들이 가자고 눈을 어린아이처럼 빛내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무래도 아주머니는 아저씨의 계획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나 보다.
아주머니는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가끔은 아저씨한테 먼저 낚시하자고 연락해. 그래야 나한테 네 핑계를 대고 낚시하러 나갈 테니까.”
“…….”
“물론 너무 자주 연락하면 안 된다? 그리고 꼭 나한테 먼저 연락해 주고.”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저씨는 정말 결혼을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집들이 음식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