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92화
33. 결실(結實)(1)
C등급 균열에 도전하여 균열의 벽을 넘고, 새로운 세상에 도착한 지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곳에서 이엘을 만나고, 아르엘과 나무 아저씨도 만나고.
약초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어 공부도 하고, 김형석 선생님과 이준석 어르신의 도움으로 직접 약초밭을 재배하기도 했다.
나무들로 빽빽한 숲의 모습도,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치는 호수의 모습도 처음에는 신비하고 어색했지만.
이제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낄 정도로 많이 익숙해졌다.
그렇게 우연히 시작된 이곳의 생활에서 나는 조금씩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 * *
“정말 믿기 힘들군요.”
김형석은 내가 수확해 온 ‘아스타나 약초’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해내시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모두 선생님과 이준석 어르신 덕분이죠.”
“하하하.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공을 돌리는 모습을 보이자, 김형석은 손사래를 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상태가 약간 아쉬운 것도 몇 개 있지만, 대부분 상품으로 손색이 없는 수준입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경매장에 올려도 될 것 같습니다.”
그를 통해 품질에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타나 약초의 재배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았다.
거의 모든 씨앗에서 싹이 나왔지만, 싹을 키워내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중간에 시들어 버리는 싹도 있었고, 일정 크기 이상으로 자라지 못하는 싹도 있었다.
같은 밭 안에서도 약간의 환경 차이로 영향을 받아 시들어 버리는 아주 민감한 녀석이었다.
시들어 버리는 싹들은 전부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어르신과 연구를 통해, 다음 약초 재배에 적용하기 위한 준비가 벌써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재배한 약초가 직접 채취한 약초와는 다르게 평범한 약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채취한 아스타나 약초는 티머시 증후군 증상 완화에 큰 효능을 보였지만, 재배한 약초는 평범하게 증상 악화를 방지하는 정도에 약효만 가지고 있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겁니다. 세계의 수많은 국가와 기업이 하지 못한 걸 해내신 거니까요.”
“그래도 좀 아쉽긴 하네요.”
김형석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성과라고 나를 추켜세우며 위로했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진 씨. 판매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전처럼 협회를 통하실 생각이십니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조금 상담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
나는 미리 생각해 왔던 이야기를 그에서 풀어놨다.
내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김형석은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때로는 놀라는 표정을, 때로는 어두운 표정, 때로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내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에 그는 의연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거기! 잡초가 남아 있잖아. 똑바로 풀 안 뽑아?!”
힘겨운 김매기 작업 중에 이준석 어르신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밭에 양분을 빼앗고 햇빛과 바람을 막아 재배하는 약초의 성장을 방해하는 잡초를 제거하는 김매기 작업.
허리를 굽혀 일일이 풀을 뽑아내는 작업은 굉장히 고된 노동이었다.
귀찮고 힘든 일이지만, 이렇게 밭을 꼼꼼하게 관리해 주지 않으면 고스란히 약초에 피해가 가기 때문에 신경 써줘야 했다.
나도 처음에 김매기 작업을 할 때는 굉장히 고역이었지만, 지금은 꽤 익숙하게 밭을 돌아다니며 잡초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한편, 어르신의 불호령을 듣고 있는 초심자
“하하하. 너무 화내지 마시죠. 어르신.”
정대훈 아저씨는 시원한 웃음소리와 함께 어르신의 불호령을 받아넘겼다.
그 옆에서 정선우도 땀을 뻘뻘 흘리며 김매기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선우도 아직 김매기 작업에 익숙지 않아 어설펐지만, 어르신의 불호령은 나와 아저씨에게만 떨어졌다.
이렇게 정 씨 가족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내가 일꾼으로 정 씨 가족 모두를 고용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아스타나 약초 재배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나와 어르신은 곧바로 약초밭 확장에 들어갔다.
약초밭이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일의 양이 늘어났다.
준비 과정은 일당백의 실력을 갖춘 어르신이 있어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했지만.
다시 본격적으로 약초를 기르기 시작하면 일손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연세가 있는 어르신에게 무리한 작업량을 드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 씨 가족이 떠올랐고, 나는 곧바로 도움을 요청했다.
사정을 설명하고 약초밭에 도움을 달라는 부탁에 아저씨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대가는 약초밭에서 재배되는 아스타나 약초.
이미 첫 번째로 수확한 약초 중 일부를 선불로 아저씨에게 전해준 상태였다.
“모두 잠시 쉬었다가 하세요!”
멀리서 정아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진아, 아윤이가 새참 가지고 왔나 보다. 잠시 쉬었다 하자.”
“선우야 가자.”
“네. 형!”
나는 땀을 뻘뻘 흘리는 선우를 이끌고 아저씨와 함께 나무 아래 그늘진 평상으로 향했다.
평상에는 아이들이 아윤을 도와 새참 준비가 한창이었다.
새참 메뉴는 얼음이 동동 띄워져 있는 고소한 콩국수! 그리고 막걸리!
그릇에 미리 준비한 소면에 시원한 콩 국물과 고명이 올려지자, 순식간에 고소한 향이 올라오는 콩국수 한 그릇이 완성되었다.
“어르신. 먼저 드시죠.”
“그래…….”
아저씨가 먼저 어르신께 콩국수를 권했고, 어르신을 시작으로 모두 각자의 그릇에 콩국수를 맛보기 시작했다.
“맛있다!”
“맛있어요.”
“퓨이!”
처음으로 콩국수를 맛보는 티아, 이엘, 퓨이가 차례로 감탄을 터뜨렸다.
어르신도 콩국수 맛이 괜찮은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 맛이 괜찮습니까?”
“콩 국물이 진해서 좋구만. 집사람이 한 건가?”
“흐흐. 저희 집사람이 요리를 좀 잘합니다.”
아저씨는 어르신의 칭찬에 팔불출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나와 어르신, 아이들과 정 씨 가족까지 모여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새참 시간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왕성한 식욕으로 빠르게 콩국수 그릇을 비워내고,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어르신이 자신의 그릇에서 콩국수를 덜어내 아이들 그릇에 나눠주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도 얼마 못 드셨는데. 제 것 좀 더 드세요.”
절반도 먹지 않은 콩국수를 모두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어르신의 모습에 아윤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허허. 괜찮다. 나는 이 정도만 먹어도 배불러. 애들이 많이 먹어야지.”
나눠 받은 콩국수를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어르신. 막걸리 한잔 어떻습니까?”
“좋지.”
아저씨는 타이밍 좋게 어르신에게 막걸리를 권했고, 종이컵에 공손하게 막걸리를 따랐다.
막걸리병을 받은 어르신도 아저씨에게 막걸리를 따라주고 나에게도 권했다.
“자. 한 잔 받아라.”
“감사합니다.”
“아윤이도 한잔할 테냐?”
“저는 괜찮아요. 할아버지.”
종이컵을 든 세 사람은 짧게 건배를 나누고 바로 막걸리를 들이켰다.
시원한 막걸리가 뱃속으로 들어오자 밭일의 피로가 사라지는 청량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알딸딸하게 올라오는 취기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가 막걸리 맛을 음미하고 있을 때, 아저씨는 어느새 막걸리병을 들어 다시 잔을 채우고 있었다.
* * *
새참 시간이 끝나고.
남매와 아이들은 평상과 떨어진 나무 그늘로 가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놀고 있었다.
신나게 막걸리를 마시던 대훈 아저씨는 평상에 누워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낮잠에 빠져 있었다.
나와 어르신은 평상에 걸터앉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새참의 여운을 즐겼다.
-드르렁!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에 어르신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일하겠다는 사람이 새참 막걸리에 취해 잠들어버리면 어쩌누.”
“뭐, 오늘 김매기는 거의 다 끝났잖아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어르신이 혀를 쯧쯧 찼다.
“딱 보아하니 사람은 좋은데 여기저기 손해 보고 다닐 놈이네. 자식들은 똘똘하던데 엄마를 닮았나 보구먼.”
“하하하.”
꽤 정확한 어르신의 평가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어제 김형석이랑은 이야기 잘 끝냈고?”
“네. 약초 상태도 좋고 전혀 문제없다고 하셨어요.”
나는 김형석과 어제 만나서 했던 이야기를 하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어르신께 물었다.
“근데 어르신. 정말 안 받으실 생각이세요?”
“돈 말이냐? 필요 없다. 애초에 돈 때문에 시작한 일도 아니고.”
꽤 많은 양의 아스타나 약초 재배에 성공했고, 적지 않은 돈이 생겨날 예정이었지만.
아무리 많은 수입이 생겨나도 어르신은 일절 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솔직히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서 돈을 받지 않겠다는 어르신의 태도가 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너는 나랑 한 약속만 잊어버리지 않으면 된다.”
“…….”
“쯧. 정 부담스러우면 나중에 우리 임자한테 줄 선물이나 하나 구해놓던가.”
마치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어르신의 모습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랜만입니다. 세진 씨.”
“네.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오랜만이네요.”
각성자 관리본부에 최동호 팀장은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내 말에 대답했다.
“좀 더 자주 연락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예를 들면 오성 길드나, 협회에 하시는 것처럼.”
그때 같이 만났던 오성 길드와 각성자 협회는 그동안 꽤 많은 교류가 있었지만, 관리본부와는 교류가 없었던 점을 살짝 꼬집으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하. 농담입니다. 애초에 저희 쪽에서 해줄 수 없는 일들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나는 본격적으로 오늘 만남을 요청한 용건을 꺼냈다.
“잠시 이것 좀 올려놓겠습니다.”
“……?”
-툭!
최동호 팀장과 나 사이에 커다란 가방을 올리고, 그 가방을 열어 보였다.
가방 안에는 얼마 전에 수확한 아스타나 약초가 들어 있었다. 가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꽤 많은 양의 약초였다.
그는 가방 안에 약초가 어떤 물건인지 금방 눈치채고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정보가 사실이었습니까?”
“무슨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사실일 겁니다.”
“허헛. 이건 정말.”
내가 순순히 인정하자 그는 약간 질린다는 표정을 하며 약간 불만이 섞인 넋두리를 늘어놨다.
“세진 씨.”
“네?”
“세진 씨가 이런 일을 벌이실 때마다 제가 굉장히 곤란해집니다.”
“죄송합니다. 최 팀장님.”
“하아아…… 마석, 아티팩트, 이제는 약초까지. 애초에 거짓말하실 분도 아니고. 오늘 또 회의실에 끌려가겠네요.”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최동호 팀장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저희 쪽에 넘기실 생각이라면 환영하긴 하겠지만, 가격은 절대 각성자 협회보다 좋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판매하려고 이걸 가지고 나온 게 아닙니다.”
“그럼……?”
“이 약초들을 모두 기부하고 싶습니다.”
“네에엣?!”
최동호 팀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