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91화
32. 신비한 약초밭(4)
-푹! 푸욱!
“거참. 똑바로 삽질 못 해! 농사짓겠다는 놈이 삽질도 제대로 못 해서 어디다 써먹으려고.”
내가 어설픈 삽질을 연발하자 지켜보고 있던 이준석 어르신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는 목에 걸어둔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한 번 훔쳐내고 다시 집중해서 삽질을 시작했다.
“쯧쯧.”
어르신은 영 마음에 차지 않는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본인이 직접 삽을 들어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나보다 훨씬 능숙하고, 빠른 동작으로 약초밭 주변의 땅을 삽으로 다져나갔다.
겉으로 보이는 깡마른 체격에 나이도 적지 않으신 분이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미스터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어르신과 첫 만남이 있은 지 벌써 1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약속대로 내 약초밭을 직접 확인한 어르신은 ‘아스타나 약초’ 재배에 도움을 주기로 하셨다.
처음 약속은 ‘아스타나 약초’ 재배를 도와주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어르신의 수제자가 된 느낌으로 농사의 기초부터 약초 재배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까지 배우고 있었다.
내 약초밭 말고도 시골에서 어르신이 직접 관리하는 밭이 있는데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내 약초밭에 방문해 상태를 살피고 아낌없는 조언을 해줬다.
그 결과.
어설펐던 내 약초밭은 곳곳에 어르신의 조언과 손길로 어엿한 약초밭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물론 어르신의 눈에는 아직도 어설퍼 보이는 부분이 많은 상태였지만, 최근에는 욕먹는 빈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처음에 어르신이 일을 봐주기 시작했을 때는 정말 살벌하게 욕을 먹었다.
-기초도 모르는 놈이 뭘 해보겠다는 거야. 운 좋게 생겨난 약초밭으로 어떻게 대충해 볼 생각이면 당장 때려치워!
확실히 어르신의 말대로, 우연히 균열에서 발견한 신비한 약초밭의 능력으로 한 번 성공을 거둬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르신이 약초밭을 봐준 뒤로 밭의 작물은 더 잘 자라나게 되었고, 더욱 많은 수확을 얻었으며, 약효 역시 더 뛰어난 효능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스타나 약초’ 재배 때문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것 외에도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빨랑빨랑 움직여. 해 지겠다. 이놈아.”
“허억. 헉. 네!”
밭 주변 배수로 정리 작업이 한창인 와중에 멀리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약초 할아버지!”
“퓨이!”
아이들이 밭 입구에서 어르신을 부르며 쪼르르 달려왔다.
“허허허. 왔구나.”
지옥 나찰 같은 표정으로 나의 작업을 감시하던 어르신은, 아이들을 발견하자마자 순식간에 부처님과 같은 인자한 표정으로 변했다.
얼른 아이들에게 다가간 어르신은 아이들 하나하나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
“잘 지냈니? 밥은 먹었고?”
“잘 지냈어. 할아버지.”
티아의 반말에 가까운 대답이었지만, 어르신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도! 나도! 잘 지냈어요. 할아버지.”
이엘도 이제는 꽤 능숙해진 한국말로 대답했다.
“그래. 잘했구나.”
“헤헤.”
어르신의 칭찬과 함께 주름진 손이 머리에 닿자, 이엘이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웃음 지었다.
“퓨이!”
“그래. 우리 귀염둥이도 잘 지냈구나.”
마지막으로 몸을 숙여 퓨이까지 쓰다듬어 준 어르신의 표정에는 행복이라는 감정이 가득했다.
아이들과 첫 만남은 어색하고, 데면데면했지만.
이제는 어르신이 약초밭에 와서 아이들과 못 만나면 굉장히 서운해할 정도로 아이들을 좋아하게 됐다
요즘에는 약초밭 때문에 방문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을 만나러 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는 온통 아이들에게 관심이 쏠린 어르신에게 다가가 슬쩍 말했다.
“어르신, 잠시 아이들이랑 쉬고 계시죠. 나머지 작업은 제가 끝내놓을게요.”
“크흠. 그럴까?”
“네. 너무 무리하시면 안 돼요.”
“흠. 흠. 허리가 약간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쉬어야겠네. 그럼 너도 얼른 마무리하고 와라.”
아이들이 도착하기 전만 해도 기계처럼 삽질하던 분이, 지금은 엄살 부리는 표정으로 허리를 두드리며 삽을 땅에 꽂았다.
나는 뻔히 보이는 어르신의 행동에 꾹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가서 쉬고 계세요. 금방 마무리하고 갈게요.”
“그래. 그럼 고생해라.”
어르신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아이들을 데리고 밭을 벗어났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마의 땀을 한 번 더 훔쳐내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 * *
혼자서 남은 작업을 끝내고 밭 옆에 놓여 있는 평상으로 향했다.
-우물우물.
-우물우물.
아이들은 전부 떡을 하나씩 입에 물고 볼을 우물거리고 있었고,
어르신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종이컵에 식혜를 따라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요즘 어르신은 항상 이렇게 아이들에게 나눠 줄 간식을 꼭 챙겨온다.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은 어르신의 노력 덕분인지, 아이들은 어르신이 가져온 간식을 정말 좋아했다.
“세진! 이거 먹어봐. 엄청 맛있어.”
일을 끝내고 다가온 나를 발견한 티아가 떡 하나를 집어 들며 내게 말했다.
나는 평상 옆에 걸터앉으며 흙이 묻은 손 대신, 입으로 떡 하나를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쫀득한 식감의 떡을 씹으니, 안쪽에서 달콤한 꿀과 고소한 깨가 팍! 하고 터져 나왔다.
달달한 맛이 입안에 퍼지자 고된 작업으로 힘들었던 몸에 살짝 활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퓨이!”
“아저씨! 저도요.”
이번에는 퓨이와 이엘이 떡 하나씩을 들더니 경쟁적으로 내 입에 떡을 들이밀었다.
아직 입안에 떡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나는 엉겁결에 떡 두 개를 동시에 입안에 넣어야 했고.
자연스레 목이 턱턱 막혀왔다.
“컥. 컥.”
“자. 이거 마셔라.”
타이밍 좋게 어르신이 종이컵에 식혜를 담아 건넸다. 나는 오아시스를 찾은 것처럼 황급히 식혜를 쭉 들이켰다.
“크하.”
시원한 식혜 한잔으로 갈증을 해결한 나는 시원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어르신이 옅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작업 마무리하느라 수고했다.”
아이들을 볼 때만큼 환한 미소는 아니지만, 눈빛에서 잔잔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나무 아래 그늘진 평상 위에서 앉아.
아이들이 집어다 주는 떡을 받아먹으며 시원하게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을 즐겼다.
얼마 남지 않은 떡과 식혜를 보고 혼자 일하고 있을 모렛이 떠올랐다.
“어르신. 남은 떡이랑 식혜 좀 챙겨도 될까요?”
“으응?”
“모렛에게 좀 가져다주려고요.”
“아! 그 털북숭이? 그렇게 해라.”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허락해 줬다.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과 아이들을 뒤로하고, 남아 있는 떡과 식혜를 챙겨 모렛이 일하고 있는 공터로 향했다.
모렛이라는 이름이 어르신에게는 불편했는지 항상 털북숭이라고 불렀지만, 어르신은 꽤 모렛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손자, 손녀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좋아하는 거라면, 모렛은 일을 정말 잘해서 마음에 들어 하셨다.
혼자서 거뜬히 건설 작업을 진행하는 모렛을 보고는.
-쪼그만 녀석이 일은 똑 부러지게 잘하네. 우리 집에 데려가고 싶을 정도야.
집에 데려가 일을 시키고 싶다며 탐을 낼 정도로 좋아했다.
은근히 내게 저런 일꾼 어디서 구해왔냐고 계속 물어볼 정도였다.
-뚝딱. 뚝딱.
모렛이 있는 곳 가까이 갈수록 리듬감이 느껴지는 작업 소리가 들려왔다.
공터 입구에 도착하니 이제는 어엿하게 모양이 갖춰진 2층 규모의 통나무 집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내부 작업이 많이 남았지만,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이 느껴질 정도로 멋있는 외관이었다.
“모렛! 나 왔어!”
“후모!”
공터 입구에서 모렛을 부르자, 작업 소리가 멈추고 통나무집 내부에서 힘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다다다!
짧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모렛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털에는 작업으로 인해 먼지와 나무 조각들이 잔뜩 묻어 있었는데,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나는 털에 붙은 나무 조각들과 먼지를 부드럽게 털어주며 말했다.
“어르신이 가져온 떡이랑 식혜 좀 가져왔어. 조금만 쉬었다 해.”
“후모?”
모렛은 내가 가져온 떡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냉큼 하나를 집어먹었다.
“맛있어?”
-끄덕끄덕.
떡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목이 마를까 싶어 식혜를 따라 주려는데, 모렛이 나의 팔을 붙잡고 나를 이끌었다.
“어어. 어디가?”
“후모! 후모!”
모렛은 작은 손에서 느껴지는 강한 힘으로 나를 끌고 가듯 통나무집 현관으로 이끌었다.
생생한 나무 내음이 느껴지는 집 현관을 통과해, 아직 덜 다듬어진 계단을 타고 2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바로 모렛은 2층의 어느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처음 2층에 올라와 방을 둘러보다 창문을 밖 풍경을 확인하고,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아!”
아래로 보이는 숲과 넓은 호수, 그 뒤에 커다란 산맥과 푸른 하늘.
이 모든 환상적인 풍경이 2층 작은 창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는 싱그러운 숲의 향기가 그대로 묻어 있었고, 태양과 호수의 반사된 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방안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후모?”
모렛은 마음에 드냐는 듯 내게 물었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감을 표현했다.
“대박이다. 모렛. 풍경이 너무 좋다.”
“후모. 후모.”
약간 호들갑 떠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감탄하는 내 모습에, 모렛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떡 하나를 집어 먹었다.
나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박물관에 걸린 명화처럼 창밖의 풍경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아. 빨리 집이 완성됐으면 좋겠다.’
이곳에서 지내는 생활을 상상하며, 나는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 * *
모렛에게 간식을 챙겨주고 약초밭으로 돌아갔을 때,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르신 혼자 평상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요?”
“갔어.”
“……?”
“나무 아저씨인가 뭔가 하는 놈이랑 놀러 가버렸어.”
어르신은 나무 아저씨를 언급하며 약간 시무룩해진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랑 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어르신을 독려했다.
“‘아스타나 약초’ 살펴보러 가시죠. 제가 오늘 아침에 살펴봤었는데 상태가 훨씬 좋은 것 같아요.”
“그래?”
아스타나 약초가 상태가 좋다는 이야기에 어르신은 표정 밝게 하며 평상에서 일어났다.
나는 어르신과 함께 아스타나 약초가 심어져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작은 싹들이 겨우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새싹들이었다.
하지만 그 새싹들을 바라보는 나와 어르신의 표정에는 뿌듯함과 흐뭇한 감정이 샘솟듯이 솟아났다.
처음 내 약초밭을 본 한 달 전.
약초밭의 흙을 가지고 어르신은 곧바로 아스타나 약초 씨앗의 발아 작업에 들어가셨다.
씨앗을 밭에 바로 심는 게 아니라, 적절한 온도와 습도 변화를 주면서 씨앗의 발아를 촉진하는 작업이었다.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지만 어르신의 평생에 걸친 경험과 신비한 힘이 깃든 약초밭 흙의 힘을 통해.
씨앗의 발아에 성공했다.
그리고 1주일 전.
발아에 성공한 씨앗들을 약초밭에 심었고, 최근에 씨앗의 싹들이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씨앗 중에 아직 새싹을 틔우지 못한 씨앗도 많았고, 아직 큰 노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굉장히 성공적인 시작이라 할 만했다.
구하기 힘든 아스타나 약초 씨앗을 제공해 주었던 김형석 선생님도, 새싹이 자라났다는 소식에 굉장히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밭을 둘러보던 어르신이 담담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이제 시작인 거 알고 있지?”
“네.”
“새싹을 틔운 건 나도 예전에 성공했었다. 앞으로 과정이 더 험난하고 힘들 테니, 작은 변화도 놓치지 말고 신경 써라.”
“명심하겠습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을 해준 어르신.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더니 마지막으로 질문을 내게 던졌다.
“근데 말이지.”
“……?”
“아이들은 무슨 간식을 제일 좋아하나?”
“…….”
아무래도 어르신은 나무 아저씨에게 아이들을 빼앗긴 게 계속 신경 쓰였나 보다.
내가 살짝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어르신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