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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90화 (90/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90화

32. 신비한 약초밭(3)

노인이 깎아온 사과를 다 먹을 때쯤.

할머니가 다정한 미소와 함께 내게 질문했다.

“그래서. 젊은 총각. 이 시골까지 무슨 일로 찾아왔어요? 보아하니 우리 영감한테 부탁이 있는 것 같던데.”

완고한 노인의 태도에 제대로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지만, 할머니의 질문에 힘을 얻어 처음으로 내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꺼내 놓았다.

“저는 전세진이라고 합니다. 김형석 선생님 소개로 ‘아스타나 약초’ 재배에 관련해 어르신께 도움을 청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노인은 내 말에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옆에 할머니가 있어서인지 참는 모양이었다.

“세진 총각도 길드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 온 거예요?”

“아뇨. 저는 딱히 소속은 없고, 개인적으로 약초밭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소속이 없다는 말에 노인의 표정에서 살짝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원래 약초밭을 재배하던 건가?”

“그건 아닙니다. 원래는 균열 제거 파티에 소속되어서 제거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노인과 할머니에게 어떤 식으로 약초밭을 재배하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할머니는 아련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노인은 살짝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할머니는 촉촉해진 눈을 하고 내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세진 총각.”

“예?! 저…… 무슨?”

“세진 총각같이 젊은 사람들이. 그 무서운 균열에 들어가 고생하는 덕분에 나 같은 늙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사는 거 아니겠어요?”

할머니의 진심이 담긴 감사 표현에 나는 크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 저, 저는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고. 등급이 낮은 균열만 들어갈 뿐입니다.”

“나는 늙어서 등급 같은 건 잘 몰라요. 그래도 위험한 균열에서 일하고 있는 거죠?”

“…….”

“언젠가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정말 수고했다고.”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이 눈에 눈물이 그득해진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노인도 안타까운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봤다.

“임자…….”

“아이고. 바쁜 사람을 내가 너무 붙잡아뒀네. 세진 총각. 우리 영감이랑 이야기 나눠요.”

할머니는 옷 소매로 눈가를 찍어내더니, 이야기 나누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안방으로 향했다.

할머니가 자리를 떠난 후.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슬쩍 노인을 살펴보니,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라 최대한 가만히 있으려, 숨소리도 죽이고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거실에는 벽걸이 시계의 초침 소리만 크게 울려 퍼지고.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아 조금씩 꼼지락거리는데.

“이봐.”

“네?”

“따라와.”

노인은 짧은 두 마디만 내게 남기고, 자리에서 훌훌 일어나 집 현관문으로 향했다.

나는 저리는 다리를 붙잡고 황급히 노인의 뒤를 따랐다.

* * *

노인이 집을 나와 향한 곳은 큰 창고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창고 입구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커다란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드르르륵!

자물쇠를 열어 창고의 입구를 개방하고, 노인이 벽을 더듬어 창고 내부의 불을 켰다.

창고 안에는 여러 가지 기계 설비와 장비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장비들 역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노인은 창고 안의 장비들을 쓸쓸히 둘러보다가 불쑥 내게 말을 건넸다.

“뭐 때문에 ‘아스타나 약초’ 재배에 도전하는 거지?”

“…….”

나는 노인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껏 약초를 캐고, 약초밭을 준비한 이유는 돈 때문이었지만, ‘아스타나 약초’에 한해서는 조금은 다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노인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나는 막내 아들놈 때문에 이 약초 재배를 시작했지.”

“…….”

“각성인가 뭔가 하는 신기한 능력이 생기더니. 우리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도시로 떠나간 불효막심한 놈이었지.”

막내아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면서도 노인의 눈에는 그리움과 쓸쓸함이 가득했다.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고향에도 잘 내려오지 않고 연락이 뜸하더니. 그 망할 불치병에 걸려 돌아왔어.”

“…….”

“제 딴에는 우리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무리했던 모양이야. 억지로 버티다가 우리가 알게 됐을 때는 반송장이나 다름없었지.”

“…….”

“고향에 내려올 생각도 없이 열심히 일하던 놈이었는데. 녀석이 속해 있던 길드도, 정부 기관도 전부 나 몰라라 하더군.”

나는 아까 눈물짓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자연스레 침중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내가 직접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어.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선산도, 논이고 밭이고, 전부 팔아서 이 기계들을 사들였지. 처음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쉽지 않았어.”

노인은 공허한 눈으로 기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겨우 성과가 나려고 할 때쯤. 그놈이 부모를 놔두고 먼저 떠나버렸어. 불효막심한 놈이지.”

“…….”

“그래도 나는 약초 재배 시도를 멈추지 않았어. 그 망할 불치병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담담히 말을 이어가던 노인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푸흐흐흐.”

“……?”

“그런데 웃긴 게 뭔 줄 아나? 아들이 사경을 헤맬 때는 관심도 없던 놈들이, 내가 약초 재배에 성과를 내자 귀신같이 찾아오기 시작하더군.”

“길드 말씀입니까?”

“길드는 물론, 나라에서 높은 사람도 찾아오고, 큰 기업에서도 찾아왔어. 나는 볼 것도 없이 전부 내쫓아버렸지. 그런데 더 웃긴 일이 일어났어. 내가 약초 재배 연구를 이어나갈 수 없도록 누군가가 나를 방해하기 시작하더군.”

“……?!”

노인은 살짝 광기 어린 웃음을 지은 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크흐흐. 그 망할 놈들에게 지기 싫어서 악으로 버텼지. 빚을 내면서까지 약초 연구를 이어갔지만, 결국은 성공하지 못했어. 남은 건 감당하지 못할 빚뿐이었지.”

“…….”

“몸이 불편해도 묵묵히 나를 응원해 주던 임자를 위해서라도, 그놈들에게 내 모든 연구 결과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어.”

노인은 나를 돌아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돈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그만둬. 이미 충분히 괴롭힘당했어. 이제 저기 보이는 집에서 임자랑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을 뿐이니까. 나 같은 늙은이는 그만 괴롭히고 다른 사람 알아봐.”

나를 남겨두고 먼저 창고 입구로 향하는 노인에게 다급히 외쳤다.

“이것만 한번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노인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걸음을 멈추고 나를 힐끗 쳐다봤다.

-만약 이준석 어르신이 쉽게 허락을 해주시지 않는다면, 제가 말씀드린 것을 건네드려 보세요. 그분이라면 곧바로 알아보실 겁니다.

김형석의 조언대로 챙겨온 주머니를 품속에서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주머니를 받아든 노인은 무성의하게 주머니 입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 입구를 뒤집어 손바닥 위에 내용물을 털어놨다.

-투두둑.

주머니에서는 평범한 흙이 쏟아져 노인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무심하게 흙을 살피던 노인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물 들어갔다.

노인은 손바닥 위의 흙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말투로 내게 물었다.

“어, 어떻게! 이 흙을?”

김형석의 조언은.

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재배하고 있는 약초밭의 흙을 챙겨가 노인에게 보여주라는 조언이었다.

나는 그 조언을 따라 오늘 아침. 약초밭에서 흙을 조금 챙겨 주머니에 담아두었고.

그의 조언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제가 관리하는 약초밭의 흙을 조금 가져왔습니다. 김형석 선생님께서 어르신이라면 아마 알아보실 거라고 하셔서.”

“……?!”

노인은 내 말을 믿기 힘든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노인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빚이 조금 있어서 돈이 좀 필요합니다. 아마 ‘아스타나 약초’ 재배에 성공하면 큰돈을 벌 수 있겠죠.”

“…….”

“하지만 저도 그 불치병에 걸린 사람과 그 가족들의 아픔은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친한 지인 중에 그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가족이 있거든요.”

티머시 증후군으로 온 가족이 고생하는 정 씨 가족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르신께서 도와주신다면, 그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

“물론 돈도 조금씩 벌고요…….”

내 말을 들은 노인은 흙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잠시 생각에 빠졌다.

노인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조용히 기다렸다.

“좋아.”

기다린 끝에 노인의 승낙이 떨어지고. 나는 기쁜 표정과 함께 외쳤다.

“정말이세요?”

“대신!”

“……?”

“내가 직접 눈으로 봐야겠어.”

“……???”

“정말로 이 흙이 네가 관리하는 약초밭에서 나왔는지. 직접 봐야겠다는 말이야.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도와달라는 부탁 다시 생각해 보겠어.”

노인은 고집이 느껴지는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마 흙을 보여준 것만으로는 나를 믿지 못하는 눈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노인의 제안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노인은 선뜻 대답을 못 하는 내 모습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

“그럼 지금 바로 가보실까요?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

* * *

“여기가 제 약초밭입니다.”

“…….”

“부끄럽지만 약초 재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주 어설픕니다.”

“…….”

균열 입구를 통해 약초밭에 도착한 노인은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계속 둘러봤다.

그의 표정에서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노인은 약초밭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여 흙을 직접 만져보기 시작했다.

“정말 사실이었어…….”

그는 손가락으로 흙을 살짝 맛보기도 하고,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흙을 계속 매만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세진!”

“퓨이!”

나와 노인이 약초밭을 둘러보고 있는 도중에, 나를 발견한 아이들이 큰 소리로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가장 먼저 도착한 퓨이가 내 품에 쏙 안겨들었고, 뒤이어 이엘이 내 다리를 꽉 껴안고 웃으며 나를 올려봤다.

마지막으로 내 곁에 도착한 티아가 신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세진. 오늘 늦게 온다고 하지 않았어? 빨리 왔네?”

“응. 근데 잠시 손님이랑 약초밭을 둘러보고 다시 가야 할지도 몰라.”

“에에? 또 나가는 거야?”

다시 나간다는 말에 티아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또 나갈 거예요?”

다리를 붙잡고 있던 이엘도 미소 짓던 얼굴을 흐리며 내게 물었다.

“일단 아저씨 일 좀 끝내고.”

나는 노인의 눈치를 보며 아이들을 일단 떼어놓았다.

흙을 살피던 노인이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신기한 눈으로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인사해. 나를 도와주러 잠시 오신 분이야.”

“…….”

내 소개에 아이들도 노인을 신기한 듯 쳐다보더니, 저마다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퓨이! 퓨이!”

퓨이는 내 품에 안겨 웃는 얼굴로 꼬리를 흔들며 울음소리를 냈고.

“안녕?”

티아는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짧게 인사를 건넸고.

“아. 안녕…… 하세요오?”

이엘은 조금은 어색한 한국어 발음에 수줍은 미소와 함께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의 인사를 받은 노인은 살짝 당황한 듯 허둥대더니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녕?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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