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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89화 (89/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89화

32. 신비한 약초밭(2)

조용한 카페에 들어서자, 구석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약초 전문가 김형석이 손을 들어 나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벌써 와계셨네요.”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자신도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오늘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진 씨.”

“아뇨. 선생님에게 도움받은 게 있는데. 당연히 나와야죠.”

최근에 약초밭을 재배하면서 김형석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시간을 내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마실 거리가 나올 때까지 안부 인사와 최근에 내가 판매한 약초에 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주문한 음료가 종업원을 통해 우리 테이블 위에 올려지고, 김형석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세진 씨가 가져오는 약초는 모두 약효가 뛰어나 인기가 많습니다. 최근에 대량으로 가져오신 ‘붉은 초롱’도 금방 팔려나갈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기분 좋은 소식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런 내 모습을 조용히 살피던 김형석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붉은 초롱’ 약초. 전부 직접 채취하신 겁니까?”

“…….”

뭔가 뼈가 있는 질문으로 나를 압박하는 김형석.

‘아직 그에게도, 각성자 협회에도, 직접 약초를 재배한다고 밝힌 적이 없는데.’

속으로 실수를 한 적이 있나 싶어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내가 숨기고 있는 사실을 이미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하아.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백이나 다름없는 내 반응에.

조금 전까지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압박하던 김형석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허.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사실이었군요.”

“딱히 말실수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말실수하신 적이 없습니다. 단지 아직은 세진 씨가 약초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을 뿐이죠.”

“……?”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직접 채취한 약초는 그렇게 일정한 크기와 품질이 나올 수 없습니다. 최근에 판매한 ‘붉은 초롱’은 누가 봐도 인간의 손길을 거친 약초들이었죠.”

“아…….”

김형석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깨닫고 허탈함이 담긴 감탄사를 내뱉었다.

웬만하면 숨기려고 했던 사실을 첫 수확물을 팔자마자 들켜버린 상황이었다.

표정을 보고 내 심정을 꿰뚫어 보았는지, 그는 느긋한 말투로 나를 안심시켰다.

“아직 세진 씨가 균열 약초 재배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각성자 협회 쪽에서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으니, 아직은 저만 알고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내 인사에 허허롭게 웃으며 음료를 마셨다.

그 뒤로는 나의 폭풍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약초 재배 사실을 숨기느라 하지 못했던 직접적인 질문들을 전부 쏟아내었다.

아주 기초적인 질문부터, 이 자리에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까지.

김형석은 최대한 친절하고 자세히 나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오히려 약초 재배 사실을 들킨 게, 잘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익한 질문과 답변 시간이었다.

혼자서 자료를 찾으며 끙끙 앓던 문제 몇 개를 시원하게 해결하고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질문은 다 하셨습니까?”

“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저도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얼마든지요.”

그는 질문에 대답해 줄 때보다, 한층 더 진지해진 얼굴로 내게 물었다.

“혹시 ‘아스타나 약초’ 재배에도 성공하셨습니까?”

“시도는 해봤지만. 실패했습니다.”

“아…….”

“어떤 식으로 시도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내 대답에 김형석은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이제는 비어버린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최근에 세진 씨가 판매한 ‘아스타나 약초’가 굉장한 효능을 냈다는 소식 들으셨습니까?”

“네. 각성자 협회를 통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각성자 협회를 통해 판매한 ‘아스타나 약초’가 사람들에게 팔리고 난 뒤.

구매자들 사이에서 아주 적극적인 재구매 요청이 협회에 쇄도했다고 한다.

불치병이라 알려진 티머시 증후군(Timothy Syndrome)

이 불치병의 유일한 치료 효과를 가진 ‘아스타나 약초’도 증상 악화를 억제하는 정도지, 큰 치료 효과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판매한 ‘아스타나 약초’를 복용하고, 이 불치병의 증상이 크게 호전되었다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약초를 전해줬던 정대훈 아저씨에게서도 아주머니의 상태가 정말 많이 좋아졌다고 말하며, 몇 번이고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 왔었다.

“조금 성급한 생각이지만, 어쩌면 세진 씨의 ‘아스타나 약초’가 이 저주받은 병을 치료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세진 씨. 제가 약초를 공부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이 언제인 줄 아십니까?”

“…….”

“불치병의 진행이라도 막아보겠다고, 저에게 사정하며 약초를 구하는 환자들의 가족을 볼 때였습니다.”

김형석의 나직한 이야기 속에서, 그동안 그가 느꼈을 슬픔과 무기력함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평생을 공부했지만, 아직 그 실마리도 보지 못했는데. 세진 씨가 균열 약초 재배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한동안 부끄러움에 괴로웠습니다.”

“아뇨. 선생님.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그의 자아 성찰과도 같은 고백에 나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김형석은 내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제가 해야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평생 공부해 온 약초에 대한 지식. 세진 씨가 필요로 하신다면 언제든지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

담담한 말투 속에 느껴지는 뜨거운 의지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제발 ‘아스타나 약초’ 재배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진심이 담긴 부탁과 함께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고개 드세요.”

“…….”

“알겠습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고개 드세요.”

김형석은 내 다짐을 듣고 난 후에야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 * *

“아저씨. 어디 가요?”

약초밭에서 뭔가를 챙기는 내 모습을 본 이엘이 물었다.

“응. 오늘은 일이 있어서. 잠시 어디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언제 오는데요?”

“조금 늦게 올 것 같은데. 빨라도 밤이나 돼서야 도착할 것 같은데.”

“…….”

늦게 돌아올 것 같다는 말에 이엘이 큰 귀를 축! 늘어뜨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 살짝 기분이 좋은,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이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운을 차릴 수 있게 달래주었다.

“퓨이랑 티아는 남을 거니까,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고 있어. 오늘 맛있는 간식도 많이 사뒀으니까 사이좋게 나눠 먹고.”

“맛있는 간식?”

이엘은 간식 이야기에 표정을 밝게 하며 눈을 빛내다가, 살짝 내 눈치를 보며 다시 풀죽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아저씨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하하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애교였지만,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두 팔로 이엘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아앗!”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엘은 깜짝 놀라며 내 목에 팔을 두르며 기댔다. 엘프 특유의 싱그러운 향기가 화악 느껴졌다.

“최대한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재미있게 놀고 있어. 알았지?”

-끄덕끄덕.

이엘은 내가 안아주는 행동이 싫지 않은지, 내게 기대어 붉어진 얼굴을 작게 끄덕거렸다.

* * *

“여긴가?”

나는 도시에서 몇 시간 떨어진 시골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전형적인 시골 철문 앞에 서서 몇 번이고 종이에 적힌 주소를 확인하며 두리번거렸다.

초인종을 찾을 수 없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 계십니까? 이준석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월월월!!

내 외침에 철문 뒤에서 경계심 가득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소리 외에는 반응이 없자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여 사람을 불렀다.

“이준석 선생님 안 계십니까?”

-월월월!!!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개도 따라서 울음소리를 높였다.

‘안 계신 건가?’

미리 약속을 잡고 온 게 아니라 매우 난감해하는 사이.

“아니, 이놈이 왜 시끄럽게 짖고 난리야!”

철문 뒤에서 신경질적인 노인의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의 등장과 함께 개 짖는 소리는 잦아들었다.

-끼이이익!

철문 특유의 쇠 긁는 소리와 함께 쇠문이 열리며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요?”

약간 신경질적인 태도와 부리부리한 눈빛. 완고한 성격이 느껴지는 꽉 다문 입매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주름과 새까맣게 탄 피부.

보통이 아닌 것 같은 노인의 등장에 나는 긴장한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여기가 이준석 선생님이 계신 곳이 맞습니까?”

“…….”

“…….”

“내가 이준석인데. 무슨 용건으로 찾아온 거요?”

그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며 되물었다. 나는 품에서 편지 한 통과 명함 한 장을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김형석이란 분의 소개로 찾아왔습니다. 약초 재배에 관해 경험이 많으신 분이라고…….”

-툭!

노인은 내 말을 끊다시피 하며 내 손에 들린 편지와 명함을 휙! 채갔다.

그 자리에서 거칠게 편지를 뜯어 읽어내려간 노인은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거칠게 외쳤다.

“아니. 이놈은 내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 듣는구먼. 이런 쓸데없는 놈들 집으로 보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

“당신. 누군지 모르겠지만. 김형석이고 뭐고 난 모르겠으니까. 당장 돌아가쇼.”

“어르신! 잠깐만이라도 이야기 좀…….”

“아아. 난 모르는 일이니까. 다른 어르신이나 실컷 찾아보쇼.”

-쾅!

노인은 거칠게 철문을 닫으며 되돌아갔다. 문전박대를 당한 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영감. 누가 왔어요?”

나긋나긋한 말투의 여자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다른 목소리의 등장에 남자 노인이 당황해 대답했다.

“아니, 임자. 몸도 불편하면서 왜 나왔어. 어서 들어가.”

“손님 온 거 아니에요?”

“…….”

“어젯밤 꿈자리도 좋고, 아침에 까치도 울어서. 귀한 손님이 올 것 같더라고요.”

“알았으니까. 들어가 있어.”

철문 뒤에서 두 사람의 실랑이가 잠시 이어지고.

-끼이이익!

다시 쇠 긁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

“들어오쇼.”

노인의 눈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내가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일단 철문을 넘어 집 안마당을 둘러볼 수 있었다.

-월월월!!!

낯선 손님의 방문에 한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백구 한 마리가 나를 보며 사납게 짖었다.

“시끄러! 이놈아. 손님이야. 손님!”

-…….

노인의 신경질적인 외침에 백구는 귀신같이 알아듣고, 곧바로 땅에 배를 대고 누워 이쪽은 이제 관심 없다는 듯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백구를 진정시킨 노인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향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노인의 뒤를 따랐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평범한 시골집 모습과 함께, 인자한 미소의 할머니 한 분이 거실에 앉아 나를 반겨주었다.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여기, 여기 와서 앉아요.”

할머니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나를 불렀고, 나는 아직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노인의 눈치를 한 번 보고 할머니 옆자리로 향했다.

“저 이거는 선물로 드리려고 사 왔습니다.”

나는 백화점에서 구매해 가져온 과일 세트를 할머니 앞에 내려놨다.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사 왔어요.”

할머니는 옆에 앉은 내 팔을 쓰다듬으며 선물이 부담스러운 듯 말했다.

한편 삐딱하게 선물을 훑어보던 노인은 과일 세트를 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시골에 널린 게 과일인데, 뭐하러 이런걸 사왔누.”

“…….”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는 더욱 환한 미소를 지으며 노인에게 말했다.

“영감. 이 사과가 참 맛있어 보이지 않아요?”

“임자. 사과가 먹고 싶어? 조금만 기다려봐.”

할머니의 말에 노인은 황급히 과일 세트를 챙겨 들더니 부엌으로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노인이 사라지고 거실에는 나와 할머니만 남게 되자, 할머니가 긴장한 나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영감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심술이 많아서 그렇지,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총각.”

“네? 네. 알겠습니다.”

할머니는 노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내 손을 붙잡고 쓰다듬으셨다.

거친 할머니의 손에서 따스한 정이 느껴졌다.

“손이 참 곱네. 여자들한테 인기 많겠어. 결혼은 했어요?”

“아뇨. 아직 못했습니다.”

“그럼 여자친구는?”

“없습니다.”

“아이고. 이렇게 잘생긴 총각을…… 내가 좋은 여자 소개해 줄까요?”

“괜찮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노인이 사과를 깎아 가지런히 접시에 내왔다.

그는 포크에 사과하나를 찍어 할머니에게 건넸다.

“임자. 여기 사과.”

할머니는 노인이 건넨 사과를 받아 들더니 그대로 내게 건넸다.

“손님 먼저 드려야지.”

“아니. 저는 괜찮은데.”

“…….”

자신이 건넨 사과가 내 쪽으로 넘어가자 노인은 굉장히 불편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할머니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우리 영감이 사과를 참 잘 깎아요.”

“허허. 내가 칼질을 좀 잘하지.”

“나도 하나 먹어볼까요.”

“자. 여기 있어.”

“영감도 하나 먹어봐요.”

“으응. 나는 괜찮아. 임자 많이 먹어.”

노인은 할머니의 칭찬에 곧바로 불편한 시선을 거두고, 새롭게 포크에 사과를 찍어 할머니를 챙겼다.

두 노부부가 서로를 챙기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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