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88화
32. 신비한 약초밭(1)
“나…… 무……”
“퓨이.”
“꼬…… 옷, 푸우울립.”
“퓨이!”
이엘이 어설프게 책 속의 한글을 따라 읽을 때마다, 퓨이가 옆에서 지켜보며 울음소리를 내며 응원해 줬다.
최근에 이엘은 퓨이의 가르침 아래에 이엘은 열심히 한글을 배우고 있었다.
글을 읽는 건 아직 많이 서투르지만, 짧은 문장 정도는 이제 익숙하게 대화에 사용할 정도는 가능했다.
“나 잘했어?”
“퓨이! 퓨이!”
잘했냐는 질문에 퓨이가 환하게 웃음 지으며, 꼬리로 앉아 있는 이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엘프 소녀는 퓨이의 칭찬에 배시시 웃음을 짓더니 벌떡 일어나 내 쪽으로 달려왔다.
“아저씨. 나. 이거 다 읽었어. 빨리 칭찬해.”
어설픈 한국어로 칭찬을 강요하는 엘프 소녀.
그 귀여운 모습에 나도 웃음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잘했어. 이엘은 대단하네.”
“헤헤. 열심히 했어.”
이엘은 몸을 배배 꼬면서 쑥스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저씨. 뭐해?”
“지금 약초 뿌리 손질 중이야.”
“흐응.”
내가 하는 일에 잠시 관심을 보이다가 재미없다고 느꼈는지, 이엘은 다시 퓨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매몰차게 떠나는 이엘이 아쉬웠지만 손질해야 할 약초 뿌리가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최근에 생활은 모두 이런 느낌이었다.
매일 약초밭을 관리하고, 이엘과 놀아주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요즘에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저 귀여운 엘프 소녀와 함께 지내는 것 같았다.1
우리가 이 숲에 오기 전에는 이엘과 아르엘 모녀, 그리고 나무 아저씨밖에 없었으니, 한참 놀고 싶을 엘프 소녀에게는 너무 심심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나와 아이들이 이 숲속에 오게 된 뒤로, 이엘은 행복한 나날의 연속인 듯했다.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이유도 좀 더 우리와 가깝게 지내고 싶어서 그랬다.
나도 귀여운 조카가 생긴 기분이라 딱히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오히려 없으면 섭섭할 것 같을 정도로 정이 든 상태였다.
이곳 생활에 큰 변화 중 하나가 이엘이라면, 두 번째 큰 변화는 바로 약초밭의 성공이었다.
틈틈이 약초 전문가 김형석에게 도움을 구해 약초 재배를 준비했고, 생각보다 손쉽게 균열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약초 재배에 성공했다.
거기다 약초밭이 특이한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심은 약초가 굉장히 빨리 자라났다.
거의 2주에서 3주 사이면 약초가 수확이 가능할 정도로 쑥쑥 자라났다.
보통 약초밭에서 몇 개월이나 걸릴 성장이, 내 약초밭에서는 1주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균열에서 약초를 길러본 경험자가 없으니, 일단 내 나름대로 조사를 하면서 약초 재배를 계속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재배에 도전한 ‘붉은 초롱’의 수확이 최근에 이루어졌고.
협회에 판매를 완료했다. 저번에 나와 아이들이 숲에서 주워 먹었던, 빨간 열매를 맺는 약초의 이름이 ‘붉은 초롱’이었다.
열매뿐만 아니라 줄기와 뿌리도 중요한 재료로 사용된다고 하니, 잘 손질해서 전부 판매했다.
아직 판매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물건을 확인한 김형석이 굉장히 약초의 상태가 좋으니 기대할 만할 거라 말해줬다.
지금은 다시 ‘붉은 초롱’을 재배하기 위해 남겨둔 뿌리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비어버린 약초밭에 손질한 뿌리를 심어 다시 약초를 재배할 계획이었다.
모든 게 순조롭게 풀리는 것 같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바로 ‘아스타나 약초’ 재배였다.
티머시 증후군의 유일한 치료제 재료인 ‘아스타나 약초’는 비싼 약초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비싼 약초였다.
나는 ‘붉은 초롱’ 재배와 더불어 ‘아스타나 약초’ 재배도 동시에 시도해 봤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아스타나 약초’는 다른 약초들에 비해 재배에 시도한 사람이 많았지만 성과를 거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약초 재배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아스타나 약초’ 재배에 더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약초밭에 대해 고민을 하며 ‘붉은 초롱’ 뿌리 손질을 끝내고, 이엘과 퓨이가 함께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둘은 어린이용 한글 교육책을 읽으며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오자 둘은 내 쪽으로 고개를 놀리며 눈을 빛냈다.
“퓨이!”
“아저씨. 다 끝났어요?”
이번에 이엘은 한글이 아닌 능숙한 엘프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아마 지루한 뿌리 손질이 끝나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그래, 다 끝났다. 이제 점심 먹으러 갈까?”
“좋아요. 그럼 빨리 가요.”
“퓨이!”
* * *
점심 식사는 이엘과 아르엘 모녀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집이 큰 편이 아니라 약간 비좁은 느낌도 있었지만, 이런 북적거리는 분위기가 이엘과 아르엘 모녀는 싫지 않은 모습이었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나는 이엘이 직접 타준 차를 대접받았다. ‘엘프 차’라고 이름 붙인 이 차를, 나는 최근에 꽤 즐기고 있었다.
식사 후, 엘프 차 특유의 은은한 향과 맛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아르엘은 침대 끝에 등을 기대앉아 퓨이를 품에 안고 있었고, 의자에 앉은 내 무릎 위에 이엘이 자리했다.
티아는 옆 테이블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아이들이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눴고, 나와 아르엘은 조용히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특히 아르엘은 병색이 깊은 와중에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며 약간의 생기가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말을 오래 하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 아이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게 그녀의 소소한 행복인 것 같았다.
아르엘이 살짝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나는 빠르게 눈치를 채고 아이들을 이끌고 나갈 준비를 했다.
“얘들아. 이제 나가서 놀까?”
이엘은 좀 더 엄마와 같이 있고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내 말에 따라 이야기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엘은 내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쓸쓸하게 웃었다.
나는 괜찮다는 눈빛을 보내며 아이들과 함께 방을 빠져나왔다.
점점 그녀의 몸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매번 마음이 좋지 못했다.
공터에 집을 지을 수 있게 도움을 받은 것도 있었고, 약초 재배에 대한 도움도 그녀에게 받았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아저씨. 나무 아저씨한테 가요.”
“퓨이!”
“세진, 가자.”
집을 나온 아이들이 차례로 나무 아저씨에게 가자고 졸랐다.
이엘은 그렇다 치고, 퓨이와 티아도 나무 아저씨를 굉장히 좋아했다. 반면 나는 굉장히 불편한 상대였다.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아이들의 등쌀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숲속 깊은 곳으로 향했다.
숲속으로 들어오자, 느껴지는 음습한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반면 아이들은 전혀 그런 기운을 못 느끼는지 시종일관 밝은 표정이었다.
“나무 아저씨!”
“퓨이!”
커다란 나무가 보이기 시작하자 이엘과 퓨이가 빠르게 달려갔다.
-허허. 이엘과 퓨이 왔구나.
커다란 나무 기둥에 얼굴을 드러낸 나무 아저씨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아이들을 맞이했다.
“나도 왔어. 나무 정령.”
-잘 오셨습니다. 티아 공주님.
나무 아저씨는 티아는 꽤 정중하게 대했다. 아무래도 아르엘과 티아를 비슷한 위치로 보는 듯했다.
나무 아저씨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하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 인사를 받은 나무 아저씨는 별다른 말 없이 시선을 아이들 쪽으로 향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적대적인 감정은 없었지만, 소 닭 보듯 하는 시선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가 어디야.’
아이들에 비하면 섭섭한 대접일지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무 아저씨. 오늘 내가 한글을 배웠는데…….”
이엘은 오늘 있었던 일을 신나게 나무 아저씨에게 풀어놨다.
중간에 퓨이와 티아도 끼어들어 고요한 숲속에는 아이들의 이야기 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정신없이 떠드는 아이들의 수다에도 나무 아저씨는 인자한 표정으로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표정이 마치 아르엘의 그것과 닮아 있는 듯했다.
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내일 약초밭에서 할 일과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과 나무 아저씨가 웃고 떠드는 사이.
아무래도 숲속 깊은 곳이다 보니 해가 빨리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고,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나무 아저씨. 다음에 또 올게.”
“퓨이!”
“잘 있어.”
아이들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남기고 되돌아갈 준비를 했다.
나 역시 아까와 같이 고개를 숙여 짧은 인사를 남기고 몸을 돌리려는데.
-인간.
“예?”
나무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번에 보니 약초가 필요한 것 같더군.
“…….”
-필요하면 가져가도록 해라.
나무 아저씨의 담담한 말과 함께, 내 눈앞에 나타난 나무줄기들이 상당한 양의 약초를 건네줬다.
내가 눈앞에 나타난 약초를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채 가만히 있자.
나무 아저씨는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네 녀석이 좋아서 주는 게 아니라. 아이들을 잘 돌봐준 대가로 주는 것이다. 그러니 얼른 받도록 해라.
“아…… 예. 감사합니다.”
-약초를 챙겼으면 어서 떠나라.
나무 아저씨의 재촉에 나는 얼떨결에 약초를 받아들었고, 그는 어서 떠나라는 쌀쌀맞은 말을 남긴 채 기둥의 얼굴을 숨겨버렸다.
“아저씨. 빨리 와요!”
내가 멍해져 있는 사이, 먼저 떠나간 아이들이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아이들을 뒤쫓아갔다.
“세진. 그건 뭐야?”
“퓨이?”
아이들은 내 손에 들린 많은 약초를 보고 물었다.
“그게. 나무 아저씨가 주더라고.”
내 대답을 들은 이엘이 손뼉을 치며 크게 기뻐했다.
“나무 아저씨도, 아저씨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정말 잘 됐네요.”
“…….”
이엘이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침묵을 유지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나와 나무 아저씨의 사이가 좋아진 것에 대해 엄마에게 전해줘야겠다며, 이엘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숲을 빠져나와 모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아저씨.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돼요?”
이엘은 우리와 헤어지기 아쉬운지 자고 가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이엘을 달래주었다.
“일찍 자고 내일 또 놀면 되잖아. 아르엘 님이 걱정하시겠네. 얼른 들어가.”
“히잉.”
“퓨우.”
이엘이 속상해하자 퓨이도 안타까운 듯 울음소리를 냈다.
“다음에 아르엘 님한테 허락 맡으면, 자고 갈 수 있게 해볼게. 그러니까 오늘은 빨리 들어가.”
“정말이요?”
“그래. 약속할게.”
“헤헤. 알았어요.”
내 약속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엘은 나에게 다가와 내 다리를 꼬옥 껴안았다.
귀여운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내 다리에서 떨어진 이엘은 손을 흔들며 집으로 뛰어갔다.
“내일 또 놀러 갈게요!”
“퓨이!”
“내일 . 이엘!”
이엘의 작별 인사에 퓨이와 티아가 크게 대답했다.
나는 더 어두워지기 전에 아이들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