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86화
31. 이엘(2)
나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잔뜩 주문해 함께 먹을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
평소에 퓨이와 티아가 좋아하는 메뉴부터, 내가 좋아하는 메뉴까지.
모두 아이들과 나눠 먹을 수 있게 넉넉하게 주문했다.
치킨, 피자, 파스타, 샐러드. 그리고 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언덕 위에 자리를 펴고 주문한 음식들을 올려놓았다.
“와아…….”
이엘은 맛있는 냄새와 처음 보는 음식들의 모습에 귀를 쫑긋거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여러 음식을 시키느라 금액적으로 조금 무리하긴 했지만, 기대감으로 가득 찬 엘프 소녀의 모습에 뭔가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이엘 뿐만 아니라 퓨이와 티아, 작은 슬라임들도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벌써부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음식이 식기 전에 얼른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한 가지 생각.
‘엘프는 육식을 못 하는 게 아닌가?’
물론 소설 속의 내용이지만 엘프라는 종족은 보통 채식주의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던 거로 기억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엘. 근데 너 이거 먹어도 돼?”
정신없이 음식들을 구경하던 이엘이 내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엘은 이거 못 먹는 거 아니야?”
거듭 묻는 내 질문에 이엘은 설렘과 흥분으로 가득했던 얼굴을 흐리며 귀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먹으면 안 돼요?”
“아니. 먹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내 말뜻을 잘못 이해한 이엘이 실망한 표정을 짓자, 나는 황급히 두 손을 내저으며 그 사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최대한 달래는 말투로 좀 더 자세히 물어봤다.
“엘프인데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궁금해서.”
“……?”
내 질문에 이엘은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엘의 반응에 나는 더 이상 물어보는 것을 포기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 생각했나 봐. 그럼 이제 먹어볼까?”
“와아!”
“퓨이!”
티아와 퓨이는 능숙하게 음식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이엘은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나는 웃으며 피자 한 조각을 들어 이엘에게 건네줬다.
“자. 이렇게 잡고 먹으면 돼. 조금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이엘은 기대감으로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피자 한 조각을 받아들었다.
조심스럽게 받아든 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피자 위에 듬뿍 올라가 있던 치즈가 쭈욱 늘어지며 이엘이 눈동자를 크고 동그랗게 떴다.
나는 이엘이 당황하지 않게 옆에서 피자를 잡아줬다. 늘어진 치즈까지 전부 입안에 넣으니, 이엘의 볼이 귀엽게 빵빵해졌다.
이엘은 부풀어 오른 볼을 움직이며 피자를 맛보더니, 기다란 귀를 연속적으로 쫑긋거렸다.
그리고 놀람과 충격으로 가득한 눈동자로 나와 피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맛있어?”
-끄덕끄덕.
맛을 물어보는 내 질문에 이엘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뭇해진 나는 이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고, 소녀는 배시시 웃음 지었다.
나는 식사시간 대부분을 이엘을 챙겨주거나, 작은 슬라임들을 위해 음식을 잘게 썰어줬다.
이엘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내가 건네주는 음식들을 하나씩 맛봤다.
다행히 가리는 음식 없이 준비한 모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꽤 많은 양의 음식을 준비했는데, 아이들은 순식간에 모든 음식을 먹어치웠다.
나는 챙겨주느라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포만감에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건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이야.”
“민트…… 초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디저트라고 할 수 있지.”
티아는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챙겨와 이엘에게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을 보여줬다.
엘프 소녀는 아이스크림을 처음 보는지, 알록달록하면서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아이스크림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자. 한번 먹어봐.”
티아는 오늘 처음 만난 이엘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스푼 떠서 소녀에게 내밀었다.
“…….”
이엘은 살짝 망설이다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마치 먹어도 되는 것인지 나에게 허락을 맡으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져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살짝 겁먹은 것 같은 엘프 소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꼭 감고 스푼 위의 아이스크림을 덥석 입안으로 넣었다.
입안에서 아이스크림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는지, 커다란 귀가 파르르 떨렸다.
차가운 느낌이 사라지고 뒤이어 달콤한 아이스크림 맛이 느껴지자 이엘은 꼭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와아. 맛있어요.”
“그치. 맛있지?”
“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에요.”
이엘은 귀를 쫑긋거리며 아이스크림의 신비한 맛을 칭찬했고, 티아는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을 했다.
-몽. 몽. 몽.
-몽. 몽. 몽.
작은 슬라임들도 아이스크림을 맛보고 싶었는지 티아와 이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티아는 행복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씩 떠서 작은 슬라임들에게 나눠주었다.
-몽! 몽!
아이스크림을 처음 맛본 슬라임들은 작은 몸을 부르르 떨며 미소를 지었다.
* * *
“퓨이.”
-몽. 몽. 몽.
-몽. 몽. 몽.
배불리 점심을 먹고, 디저트까지 맛있게 먹은 뒤.
퓨이와 작은 슬라임들은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옹기종기 모여 낮잠을 즐겼다.
티아와 이엘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점심 때 준비했던 음식 중 미리 남겨놓은 음식들을 챙겨 들었다. 지금도 별장을 만드느라 일에 열중하고 있을 모렛을 챙겨주기 위함이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티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엘이 쪼르르 내게 다가왔다.
“아저씨. 어디 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며 아저씨라 부르는 이엘의 모습이 무척 자연스럽게 보였다.
아저씨라는 호칭이 약간 생소하긴 했지만.
“여기 근처에서 혼자 일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점심 챙겨주러 가는 거야.”
“나도 따라가도 돼요?”
“그래. 따라와도 상관없어.”
이엘은 내 허락이 떨어지자 내 옆에 달라붙어 한쪽 손을 붙잡았다.
오늘 처음 만난 나에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이엘의 모습에서 아이 특유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이 느껴졌다.
‘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이런 생각도 들어서 이엘의 행동이 걱정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흔들며 잡생각은 날려버리고 모렛에게 점심을 가져다주기 위해 언덕을 내려갔다.
티아도 이엘과 계속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지 곧장 우리를 따라나섰다.
이엘은 내 손을 잡고 허공에 떠서 따라오는 티아와 계속 대화를 나누며 모렛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모렛이 작업하고 있는 공터 가까이 갈수록 작업을 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공터에 도착하자 도끼로 주변 나무를 베고 있는 모렛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후모!”
모렛은 우리를 발견하고 반가운 듯 울음소리를 냈다.
한편, 그 모습을 본 이엘이 표정을 어둡게 만들며 안타까운 감정이 느껴지는 소리를 냈다.
“아…….”
“이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는 곧바로 걱정스럽게 물었다. 티아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엘을 쳐다봤다.
엘프 소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나무를 저렇게 많이 베면 혼날지도 모르는데…….”
“혼난다고?”
-끄덕. 끄덕.
“누구한테 혼나는데?”
“나무 아저씨.”
“나무 아저씨?”
-끄덕. 끄덕.
나는 이엘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장난으로 하는 말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엘.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줄래?”
최대한 이엘이 겁먹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탁했다.
내 부탁에 이엘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줬다.
* * *
이엘이 해준 이야기는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 숲에는 이엘과 그녀의 엄마가 함께 살고 있는데, 두 모녀를 지켜주는 ‘나무 아저씨’라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
나무 아저씨는 이 숲 주변의 모든 일을 꿰뚫어 보고 있으며, 그 힘을 통해 두 모녀를 보호해 주는 중이라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 전에 아스타나 약초를 캐러 가지 못하게 했던 작은 슬라임들의 행동이 떠올랐다.
어쩌면 작은 슬라임들이 넘어가지 못하게 했던 숲의 경계가 ‘나무 아저씨’라는 존재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후모…….”
옆에서 같이 이야기를 들은 모렛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계속 건설 작업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주변의 나무를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엘. 무슨 일이 있어도 나무에 손을 대면 안 되는 거야?”
내 질문에 이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락을 맡으면 상관없어요.”
“그럼 허락을 맡고 오면 되겠네?”
“근데 나무 아저씨는 인간들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것 참.”
인간을 싫어한다는 말에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엘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대신 엄마가 부탁하면 나무 아저씨도 들어줄지도 몰라요.”
“이엘의 엄마한테?”
“네. 나무 아저씨는 엄마의 말이면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주시거든요.”
이엘은 조금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저씨. 저랑 같이 엄마 만나러 가요.”
“어, 어…… 지금?”
“네!”
내가 당황하며 묻자 이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엘은 마치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초등학생처럼 신나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반면 나는 조금 껄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진한 엘프 소녀는 나와의 만남이 마냥 신기하고 반갑게 느껴졌겠지만.
이엘의 부모와 나무 아저씨라는 존재의 관점에서, 나는 이 숲의 침입자처럼 느껴질지도 몰랐다.
초콜릿 과자와 점심 대접으로 완전히 경계심을 풀어버린 이엘과는 달리, 나무 아저씨와 이엘의 부모는 나를 그다지 반길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길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엘은 풀이 죽은 얼굴로 변했다.
“아저씨. 우리 집에 안 올 거예요?”
“그게. 너무 이렇게 갑자기 찾아가면 실례가 아닌가 해서.”
일단 나는 무난한 핑계를 대며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하지만 이엘은 눈을 빛내며 내 핑계를 소용없게 만들었다.
“괜찮아요. 우리 엄마도 분명 환영해 줄 거예요.”
“…….”
“아저씨. 같이 가요. 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티아가 대뜸 내게 말했다.
“세진. 아무래도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저번에 여기로 균열 입구를 열 때 생각나?”
티아의 말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입구를 열기 위해 받았던 엄청난 압박감에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입구 열려고 엄청나게 고생했지.”
“아니, 그거 말고. 벽 건너편 균열에 주인이 있다고 내가 했던 말. 기억 안 나?”
“아…….”
처음에 균열 입구를 열지 못하고 있을 때, 티아가 주인에게서 허락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에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했었지만, 벽 너머의 새로운 세상을 목격하면서 그때의 의심은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 버렸다.
“아무래도 이엘의 엄마, 혹은 나무 아저씨라는 존재가 우리가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게 허락해 준 것 같아.”
“어떻게 알아?”
“세진한테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곳에 온 뒤로 누군가 계속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거든.”
“그건 이엘이 우리를 따라다닌 거 아니야?”
“아니. 이엘 말고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따로 있었어.”
“…….”
“그리고 방금 이엘이 해준 말에 따르면 이 숲에는 그 정도 능력을 갖춘 존재는 ‘나무 아저씨’밖에 없는 것 같아.”
나는 꽤 설득력 있는 티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은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왜 넘어올 수 있게 해줬는지, 어떻게 이 소녀가 아르키트 왕국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궁금하니까.”
평소와 다른 꽤 진지한 티아의 모습에 나도 얼굴을 굳히며 이 상황을 고민했다.
심각해진 분위기에 이엘은 기가 죽었는지 눈치를 보며, 살짝 애처롭게 내 팔을 붙잡았다.
‘어차피 한 번은 만나봐야 할 것 같으니.’
결심을 내린 나는 표정을 흐리고 있는 이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이엘. 우리를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데려다줄래?”
내 부탁에 엘프 소녀는 쳐져 있던 큰 귀를 쫑긋 세우며, 밝은 표정과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알았어.”
나와 티아는 신이 난 이엘의 안내를 받아 그녀의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