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85화 (85/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85화

31. 이엘(1)

나와 엘프 소녀는 한동안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를 응시했다.

다행히 소녀의 눈에서는 무서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내 온몸을 살피고 있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어색해진 나는 주머니를 뒤져 초콜릿 하나를 꺼냈다.

“이거 먹어볼래?”

“……?”

엘프 소녀는 내 손 위에 올려진 초콜릿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나와 초콜릿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소녀의 행동을 이해하고, 초콜릿의 포장을 벗겨내 반으로 잘라 그중 하나를 내 입으로 가져갔다.

초콜릿 특유의 향과 달달한 맛이 입안에 퍼져나갔다.

“자!”

“…….”

나는 웃으며 남은 초콜릿을 엘프 소녀에게 권했다. 소녀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아주 조심조심 나에게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까지 아주 천천히 다가온 엘프 소녀.

그녀는 천천히 초콜릿을 집어 들더니 이리저리 둘러보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초콜릿의 달콤한 향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엘프 소녀는 마지막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줬고.

소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눈을 꼭 감고 초콜릿의 끝부분을 아주 조금 베어 물었다.

맛이 날까? 싶을 정도로 작게 베어 문 소녀는 입을 오물거리며 초콜릿을 맛봤다.

“음?!”

엘프 소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동시에 큰 귀를 쫑긋거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초콜릿 맛이 나쁘지 않았나 보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은 초콜릿의 절반을 덥석 베어 물었다.

다시 한번 초콜릿을 맛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을 동동 굴렀다.

마지막으로 남은 초콜릿 조각까지 먹고 난 뒤.

엘프 소녀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표정이나 행동을 보아하니 초콜릿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나는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하나 더 꺼내 엘프 소녀에게 내밀었다.

“아!”

소녀는 깜짝 놀라며 나를 올려다봤다.

이번에도 손위의 초콜릿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반짝이는 소녀의 연두색 눈동자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아까는 처음 보는 초콜릿의 경계심에서 비롯된 망설임이었다면, 지금은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한 망설임이었다.

마치

-나, 이거 또 먹어도 돼요?

라고 묻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괜찮아. 자!”

“…….”

부드러운 어투의 권유와 함께 초콜릿이 올려진 손을 더 내밀자, 엘프 소녀는 조심스럽게 초콜릿을 가져갔다.

소녀는 아까 본 포장지를 벗기는 행동을 따라 어설프게 초콜릿의 포장지를 벗겨내더니, 다시 한번 초콜릿을 코에 대고 향기를 맡았다.

작은 초콜릿을 조금씩 베어 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엘프 소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내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흐뭇한 얼굴로 엘프 소녀가 초콜릿 먹는 모습을 계속 지켜봤다.

두 번째 초콜릿을 다 먹은 엘프 소녀는 아까보다 더 밝아진 얼굴로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귀를 기울여 소녀의 말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지만, 말뜻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겨우 알아들은 단어 하나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엘?”

“이엘! 이엘!”

엘프 소녀는 ‘이엘’이라는 말에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더니 신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아마도 소녀의 이름이 ‘이엘’이었나 보다.

“나는 세진. 세! 진!”

“세…… 진?”

“너는 이엘. 나는 세진.”

“세진? 세진!”

내 이름을 알아들은 이엘은 다시 한번 해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계속해서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

* * *

초콜릿 두 개로 급격하게 거리가 가까워진 엘프 소녀 ‘이엘’.

초콜릿의 위력이 대단한 것인지,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엘에게서는 더 이상 나에 대한 경계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엘은 내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 신기한 듯 의자를 이곳저곳 만지작거렸다.

의자에 슬쩍 몸도 기대보고, 신나게 다리를 까딱거리기도 했다.

길다란 귀만 아니었다면, 행동은 영락없이 쾌활한 소녀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한편. 초콜릿 두 개로 경계심을 아예 없애버린 이엘의 모습에 나는 약간 죄책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물론 나쁜 의도로 접근한 건 아니지만, 초콜릿 두 개로 너무 쉽게 경계심을 풀어버리니. 순진한 아이를 속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부모님들이 아이들한테 맛있는 거 주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하는구나.’

이런 복잡한 내 마음과는 달리, 이엘은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계속 말을 걸었다.

숲을 가리키기도 하고, 호수를 가리키기도 하고, 나를 가리키기도 했다.

아마 자기가 사는 이곳을 나에게 소개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이엘의 곁에서 얌전히 말을 듣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이엘은 처음 보는 휴대폰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나는 휴대폰으로 어제 낚시를 하면서 찍은 이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순진한 엘프 소녀는 처음에 재생되는 화면을 보고 놀라고, 화면에 자신이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모습이 나오자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나는 화면 속 이엘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이엘 맞지?”

“…….”

이엘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였다.

신이 나서 쫑긋 세워져 있던 귀도 축 처져 버렸다. 아마 훔쳐봤다는 사실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이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이엘은 머리에 내 손이 닿자 몸을 움찔 떨었지만,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혼내는 게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 말의 의미가 전달됐는지 모르지만, 이엘은 고개를 들어 올리고 다시 활짝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런 이엘을 마주 보며 같이 웃어주었다.

다시 기운을 차린 이엘은 내 휴대폰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제 낚시 영상을 보던 이엘은 화면을 가리키며 뭐라 말했다.

화면에는 어제 낚시를 지켜보던 퓨이가 나오는 중이었다.

“퓨이 말하는 거야?”

이엘은 퓨이라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퓨이 보러 갈까?”

내 말에 이엘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재촉했다.

서두르는 이엘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휴대용 의자를 접어 한 손에 챙겨 들었다.

-덥석!

이엘은 자연스럽게 내 나머지 한 손을 잡았다.

나는 스스럼없이 손을 잡아 오는 이엘의 모습에 내심 놀라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작고 부드러운 이엘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며, 퓨이가 있는 곳으로 이엘을 이끌었다.

* * *

퓨이는 처음 작은 슬라임 무리들을 만났던,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놀고 있었다.

최근에 퓨이는 이 언덕에서 작은 슬라임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몽. 몽. 몽.

-몽. 몽. 몽.

나와 이엘이 언덕에 모습을 드러내자 작은 슬라임들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작은 슬라임들은 이미 이엘을 알고 있었는지 경계심 없는 모습으로 품에 안겼다.

이엘도 그런 슬라임들을 익숙하게 받아주었다.

“퓨이?”

한편 퓨이는 내 곁에서 처음 만난 이엘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엘은 작은 슬라임들을 품에 내려놓고 아주 조심스럽게 퓨이 쪽으로 다가갔다.

약간 서로를 어색해하는 모습에 나는 웃으며 두 사람을 소개해 줬다.

“이쪽은 퓨이, 그리고 이쪽은 이엘이야.”

“…….”

이엘은 약간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퓨이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퓨이.”

그러자 퓨이도 꼬리를 흔들며 처음 보는 엘프 소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엘은 인사를 받아주는 퓨이의 모습이 좋았는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슬라임과 엘프는 어색한 첫인사를 시작으로 급격하게 친해졌다.

이엘은 작은 슬라임들처럼 퓨이에게 적극적으로 달려들었고, 퓨이도 싫지 않은지 엘프 소녀의 관심을 받아주었다.

“…….”

“퓨이! 퓨이!”

이엘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엘프 언어로 퓨이에게 말했고, 퓨이는 열심히 대답해 줬다.

서로 말이 통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엘과 퓨이는 웃음을 잃지 않고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귀여운 엘프 소녀와 그 품에 안긴 귀여운 슬라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풍경이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의자를 펴고 앉아 여유롭게 그 풍경을 계속해서 감상했다.

작은 슬라임 몇 마리가 내 무릎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기분 좋은 향기가 퍼져 나오고, 나는 편안한 기분에 또 눈이 스르륵 잠겼다.

‘아. 그러고 보니 약초밭에서 일도 해야 하는데.’

어제의 내가 미뤄뒀던 일이 생각났지만, 몸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퓨이와 이엘의 웃음소리와 슬라임들의 기분 좋은 향기, 언덕 위에 붙어오는 살랑 바람을 느끼며 나의 의식은 점점 가라앉았다.

아주 잠깐 시간이 흐른 것 같은 기분과 함께.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느낌에 의식이 점점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아저씨!”

“으음…….”

“아저씨. 일어나요.”

“……?”

정신을 차린 나는 내 팔을 흔들고 있는 엘프 소녀를 발견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자 이엘은 기쁜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응?’

“이엘?”

“왜요. 아저씨?”

내가 부르자 귀를 쫑긋하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엘프 소녀.

뭔가 비현실적인 모습에 잠이 덜 깼나 싶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이엘 뿐만 아니라 퓨이와 티아, 작은 슬라임들까지 내 주변에 모여 있었다.

“어떻게?!”

“……?”

“이엘. 어떻게 말을 알아듣는 거야?”

내가 깜짝 놀라며 이엘에게 묻자 다른 곳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내가 한 거야.”

“티아가?”

“이엘이 사용하는 말은 아르키트 왕국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비슷하거든. 그래서 내가 세진도 알아들을 수 있게 해줬어.”

“허어.”

티아의 설명에 나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굉장히 놀랐어. 이 엘프라는 소녀가 아르키트 왕국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나도 깜짝 놀랐어.”

티아와 이엘이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나는 아직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어 멍한 표정을 지었고, 이엘은 내 표정을 보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저씨. 아저씨.”

“……으응?”

이엘은 다시 한번 내 팔을 흔들며 나를 불렀고, 나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뭔가 어색해서 순간 늦게 대답했다.

“아저씨. 나 배고파.”

초롱초롱한 연두색 눈망울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애절한 눈빛을 보이는 이엘.

“티아 공주님이 아저씨한테 말하면 맛있는 거 준다고 그랬어.”

“헤헤. 세진 맛있는 거 사줘.”

“퓨이!”

티아와 퓨이까지 합세해 내 곁에 달라붙어 애교를 부렸다.

나는 이 상황이 어이없기도 하면서,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내가 지금 아니면 언제 돈을 쓰겠냐.’

나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새로운 손님도 있으니까 조금 무리해 볼까?”

아이들은 내 선언에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을 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