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82화
30. 새로운 생활(1)
-쓰윽, 쓰윽.
커다란 통나무 하나를 열심히 손질하는 모렛.
모렛은 저번에 봐두었던 공터에 기초 토대 작업을 전부 끝내고, 집의 중심 기둥을 세우는 작업에 들어갔다.
도대체 저 작은 몸집으로 어떻게 사람보다 무거운 통나무를 옮기고, 작업하는지 신기했다.
처음에는 모렛이 굉장히 바쁘고 힘들어 보여서 일을 도와주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포기하고 지켜보는 중이다.
나도 조금 더 젊었을 때, 꽤 고된 일도 경험해, 어디서 방해가 될 만한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모렛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빠르고 정확한 모렛의 실력에 내 어설픈 도움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멀리서 지켜보며 맥주나 넉넉하게 챙겨주는 일뿐.
“모렛. 여기 맥주 놔두고 갈게.”
“후모!”
잠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작업에 열중하는 모렛.
처음에는 나를 위해 저렇게 혼자 일하는 모습을 보면 약간 안쓰럽기도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게 모렛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모렛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나는 조용히 공터를 빠져나왔다.
-몽. 몽. 몽.
-몽. 몽. 몽.
나는 품속에서 작은 슬라임을 땅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얘들아. 그럼 가볼까?”
녀석들은 내 말을 알아듣고 바로 몸을 움직여 숲길을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숲을 돌아다니는 게 익숙지 않아 녀석들을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지금은 능숙하게 슬라임의 뒤를 따를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걸으면서 여유롭게 약초라던가, 숲 열매를 찾아내는 눈도 생겨났다.
작은 슬라임들이 안내해 주지 않으면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가격이 비싼 약초는 슬라임의 안내가 없더라도 먼저 찾아낼 정도가 되었다.
-몽. 몽. 몽.
연두색 슬라임이 부르는 소리에 그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녀석이 부른 곳에는 풀들 사이에 작은 보라색 들꽃이 앙증맞게 피어 있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꽃잎 하나부터, 땅속의 뿌리까지 캐내 약초 가방에 보관했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들꽃이지만 포션 제작과 건강식품에 사용되는 꽤 비싼 약초였다.
“잘했어.”
-몽. 몽. 몽.
내 칭찬에 연두색 슬라임이 기쁜 듯 몸을 통통 튕겼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슬라임마다 찾아내는 약초의 종류가 달랐다.
연두색 슬라임은 약초 종류를 잘 찾았고, 노란색 슬라임은 열매 종류를 잘 찾아냈다.
아무래도 비싼 건 약초 종류지만, 최근에는 신선한 열매를 따서 먹는 것에도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다 퓨이나 티아가 내가 따온 열매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돈이 안 될지라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열매는 꼭 챙겼다.
굉장히 넓은 숲속을 돌아다니며 느긋하게 챙기다 보니, 어느새 가방에는 갖가지 약초와 열매들로 가득했다.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약간 멀리서 아스타나 약초가 눈에 들어왔다.
숲속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비싼 약초인 아스타나 약초.
쉽사리 구분할 만한 큰 특징은 없지만, 가격이 워낙 비싸다 보니 이렇게 본능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도 이렇게 한 건 하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아스타나 약초를 캐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몽몽몽!
-몽몽몽!
작은 슬라임들이 다급하게 나를 부르며 내 걸음을 멈추게 했다.
경고의 의미를 담은 울음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발걸음을 되돌려 고개를 숙이고 슬라임에게 물었다.
“저기도 가면 안 돼?”
-몽. 몽.
-몽. 몽.
“흐음.”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 넓은 숲과 산맥, 호수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경계선에서 더는 나가지 말라는 슬라임의 경고를 들을 수 있었다.
딱히 위험해 보이지도 않고, 지금껏 봐왔던 평범한 숲처럼 보이는데도 슬라임은 내가 절대 가지 못하게 했다.
‘조금만 더 가면 캐낼 수 있는데.’
나는 ‘그림의 떡’이 되어버린 아스타나 약초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두 슬라임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아스타나 약초는 포기하기로 했다.
아주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이미 약초 가방도 많이 채웠고 녀석들을 걱정시키면서까지 무리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
-몽. 몽. 몽.
-몽. 몽. 몽.
나는 아스타나 약초를 뒤로하고, 슬라임과 함께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갔다.
이번에는 약초나 열매를 찾지 않고, 조금 더 주변 풍광에 집중하며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숲속을 거니는 기분이, 마치 온몸을 정화하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을 때.
“…….”
-휙!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빠르게 뒤로 돌렸다.
“…….”
보이는 것은 평범한 숲속의 풍경.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부턴가 숲속을 다니다 보면 이렇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다행히 적의를 가진 것 같지는 않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따라다니며 지켜본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숲에만 들어오면 계속해서 이런 느낌을 받게 되자 본격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행동을 보여서 그런지 계속 느껴지던 시선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몽. 몽.
-몽. 몽.
“그래. 가자.”
나는 재촉하는 작은 슬라임을 따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전세진이 숲길을 따라 사라지자, 절묘하게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정체불명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존재는 전세진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다, 숲 깊숙한 곳으로 빠르게 몸을 움직여 사라졌다.
* * *
“나 왔다!”
-몽. 몽. 몽.
-몽. 몽. 몽.
나와 작은 슬라임이 텐트 입구를 열며 돌아왔음을 알렸다.
그러자 텐트 안에서 티아와 퓨이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퓨이!”
“어서 와.”
작은 슬라임들은 곧바로 퓨이에게 다가가 뭔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유치원에서 돌아온 어린이가 부모를 보자마자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티아와 함께 오늘 채취한 약초와 열매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티아는 열매에 묻은 흙이나 이물질을 닦아냈고, 나는 약초들의 상태를 확인한 뒤 균열 구석에 만들어둔 건조대에 하나씩 잘 늘어놓았다.
저번에 박선영과 함께 만났던 김형석에게 약초 관리 방법이라든지 보관 방법에 대해 배워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직 전문적인 손질이나 가공은 힘들지만, 나중에 한번 시간을 따로 내서 가르침을 청할 생각이었다.
약초의 정리를 대충 끝내고, 티아가 닦아놓은 열매들을 흐르는 물에 씻어내 예쁘게 접시에 담아 텐트로 가져갔다.
“자, 먹자.”
열매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자마자 아이들은 순식간에 달려들어 열매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나도 접시에서 열매 하나를 가져와 맛을 봤다.
시중에서 파는 과일들처럼 엄청나게 달지는 않았지만.
은은한 단맛에 야생 열매 특유의 씁쓸한 맛, 그리고 부드럽고 깔끔한 느낌이 정말 좋았다.
정말 산처럼 쌓아놔도 물 마시는 것처럼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접시에는 열매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접시에 남아 있는 열매를 잘 포장해 냉장고 안에 넣어뒀다.
남은 열매는 나중에 돌아올 모렛에게 줄 생각이었다.
열매로 맛있는 간식 시간을 가지고, 나는 텐트에 아이들을 남겨두고 어디론 가로 향했다.
균열 벽 쪽에 입구를 통해 들어간 곳은 얼마 전에 두 번째로 클리어한 C등급 균열이었다.
익숙한 숲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숲 사이에 펼쳐진 커다란 규모의 텃밭.
바로 최근에 클리어한 C등급 균열의 소유권을 얻고 발견한 새롭게 개발한 ‘약초밭’이었다.
물론 약초도 아직 하나도 심겨 있지 않고, 밭의 개간도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에 약초밭이라고 발견했을 때는 완전 난장판이었다.
곳곳에 들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고, 밭 구석구석에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박혀 있었다.
아마 약초밭을 발견했다고 알람이 뜨지 않았으면, 그냥 숲속의 어지러운 공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모렛이라도 있었으면 정말 큰 도움이 됐을 텐데, 모렛은 요즘 집을 짓느라 무척 바빴다.
결국, 혼자서 이 넓은 밭의 돌멩이와 억센 들풀들을 겨우 제거할 수 있었고. 그나마 밭의 모양을 하게 되었다.
아직 밭 주변에 조금 더 정리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었지만, 그 부분은 조금 천천히 하기로 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밭에 약초를 심기 위해 개간을 해야 할 차례.
이미 필요한 농기구와 물건들을 주문해놓은 상태였다.
최근에 약초를 판매한 수입으로 자금의 상태가 조금 여유로워져서 과감하게 투자했다.
목표는 이 약초밭에서 고수입을 올릴 수 있는 약초를 재배하는 것!
최근에 값비싼 약초를 판매하게 되면서 궁금했던 점이, 왜 이렇게 약초 가격이 비싼가에 대한 것이었다.
조금 정보를 찾아보자 그 이유는 굉장히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균열에서 발견되는 약초들의 가격이 매우 비싼 이유는 오로지 균열에서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가 약초의 종자를 구해 재배를 시도하고, 최첨단 재배 방식도 사용해 보았지만, 균열이 아닌 곳에서 약초를 재배하는 것에 실패했다.
수많은 시도 끝에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균열에서 구한 약초는 현실 세계에서는 재배할 수 없다!
이런 문제 때문에 약초값은 계속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도 많은 길드의 수입원 중 하나가 균열에서 발견한 약초 판매 수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새롭게 소유권을 얻은 C등급 균열에서 ‘약초밭’을 발견한 순간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였다.
‘이 약초밭은 균열이라는 공간에 속해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했지만, 이 약초밭에서는 재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만약에 내가 모두가 실패한 희귀 약초들의 재배에 성공할 수 있다면?
더 나아가서 지금 부르는 게 가격이라는 ‘아스타나 약초’ 재배에 성공할 수 있다면?
내가 사업을 한번 크게 말아먹었지만, 이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무조건 대박!
균열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약초는 단순 건강식품부터, 높은 등급에서 필수로 사용되는 고급 포션에 이르기까지.
쓰이는 곳은 무궁무진할 정도로 많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직 이곳에서 희귀 약초를 재배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인되지 않았고, 내가 약초 재배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였다.
나는 넓게 펼쳐진 약초밭에 자라날 수많은 약초를 상상하며 달콤한 꿈에 젖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