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81화
29. 벽 너머로(4)
생각보다 훨씬 많은 약초 값을 정산받은 기념으로, 나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간식을 푸짐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준비한 것을 가지고 작은 슬라임들을 만났던,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향했다.
-몽. 몽. 몽.
-몽. 몽. 몽.
우리가 언덕에 도착하자 작은 슬라임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에워싸고 반가움을 표현했다.
나는 준비해 왔던 간식들을 하나씩 작은 슬라임들이 먹기 좋게 펼쳐놓았다.
나를 따라 왔던 두 녀석이 좋아하던 간식들이었다.
녀석들은 처음에는 내가 준비해 온 것들을 보고 약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미 경험해 본 두 녀석이 먼저 나서 먹으니 나머지 녀석들도 따라서 먹기 시작했다.
“많이 먹어라.”
티아와 퓨이 그리고 모렛도 작은 슬라임 곁에 앉아 사이좋게 간식을 나눠 먹었다.
나는 조금 떨어져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져온 캔맥주 하나를 땄다.
-푸쉬이익!
터져 나오는 탄산 빠지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맥주 향이 느껴졌다.
나는 그 향마저 같이 마시듯 빠르게 캔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꿀꺽.
부드러운 맥주의 목 넘김과 기분 좋은 탄산의 톡 쏘는 느낌. 구수한 맥주의 뒷맛을 느끼며 자연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스스스슥!
잔잔한 바람이 언덕 위 잔디를 가볍게 휩쓸며 나에게 도달했다.
선선한 바람과 풀 내음이 뒤섞여 기분 좋게 내 몸을 휘감았다.
“아, 좋다.”
벽 너머에 세상을 발견해 값비싼 약초를 구할 수 있어서 좋은 것도 있지만, 언덕 위에서 즐기는 여유로움과 평화로움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마치 어린 시절 나만의 비밀기지를 만들어 설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언덕 아래에 바람을 따라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 밑바닥까지 보일 것 같은 투명한 수면을 통해 자유로이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감상했다.
‘다음에는 정말 낚싯대를 준비해봐야겠어.’
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우는 상상을 하며 다시 맥주캔을 입으로 가져갔다.
평소에 낚시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실제로 낚시를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렸을 적에 우연히 만났던 낚시꾼 아저씨를 본 뒤로 나도 저렇게 해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
바쁜 생활에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실제로 낚시를 하기 위해 행동으로 옮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호수 근처 적당한 곳에 텐트를 치고 여유롭게 낚싯대를 드리우며 시간을 보내는 상상을 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즐거운 상상을 하며 호수 근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도중에 언덕 아래 호수와 약간 떨어진 공터가 보였다.
“저기에 별장 하나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햇볕도 잘 들어올 것 같은 위치에 내가 별장을 짓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
“후모?”
“어? 모렛. 간식 다 먹었어?”
“후모. 후모?”
간식을 다 먹었는지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모렛이 뭔가를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방금 내가 혼잣말하는 걸 들었던 것 같았다.
집요할 정도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모렛에게 살짝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으응, 별일 아냐. 그냥 저기 보이는 공터에 별장 하나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애초에 별장이라는 단어가 내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느낌상 그렇게 표현해 보았다.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경치 좋은 곳에 언제든 놀러 올 수 있는 나만의 별장을 상상하니까.
내 대답을 들은 모렛은 활짝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후모! 후모!”
그리고 갑자기 언덕 아래로 신나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엇. 모렛, 어디가?”
모렛의 돌발 행동에 나는 당황하며 녀석의 뒤를 따랐다.
작은 체구에도 어찌나 빠른지 녀석은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모렛과 나는 방금 전에 내가 말했던 공터에 도착했다.
녀석은 공터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모렛. 뭐 하는 거야?”
“후모!”
모렛은 내 질문에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멈추고, 털 안에서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그러더니 스케치북에 뭔가를 쓱쓱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궁금증에 뒤에서 슬쩍 훔쳐보니, 그림을 그려나가는 모렛의 솜씨가 범상치 않았다.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모렛은 완성한 그림을 나에게 보여줬다.
새하얀 스케치북에는 2층 규모의 통나무 별장이 그려져 있었다.
“설마?!”
“후모!”
나는 공터와 스케치북을 번갈아 바라보다 놀란 표정으로 모렛을 쳐다봤다.
“여기에 별장을 지으려는 거야?”
“후모.”
모렛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가 내 입으로 별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거라는 뜻은 아니었다.
상상 이상으로 화끈하고 과감한 모렛의 추진력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모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모?”
“그러니까 싫은 건 아닌데…….”
뭔가 모렛을 이해시킬 만한 변명을 떠올리려다 불현듯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망설이는 거지?’
조금 전에 별장을 가지고 싶다고 말해놓고선, 진짜 만들려는 모렛의 행동에 당황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모렛이 그려놓은 스케치북 속 별장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내 머릿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내가 꿈꿔왔던 별장의 모습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었다.
“모렛. 정말 이 그림 속 별장을 지을 수 있겠어?”
“후모!”
모렛은 내 질문에 자신이 넘치는 듯 단호한 소리를 내며 손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한번 만들어 보자.”
“후모! 후모!”
녀석은 새로운 일거리가 생겨서 기쁜지 내 주변을 신나게 뛰어다니며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모렛이 그려놓은 스케치북 속 그림을 보며.
공터에 지어질 나만의 멋진 별장 생각에 벌써 가슴에서 설레기 시작했다.
* * *
첫 번째 C등급 균열을 도전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난 뒤.
나와 정 씨 가족은 두 번째로 C등급 균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같이 들어가는 인원은 저번과 마찬가지.
오성 길드의 조장인 서율희와 부조장 윤동현의 지휘 아래, 아직 부족한 경험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전투에 임했다.
그래도 저번에 한 번 C등급 균열을 완료한 경험 덕분인지, 함께하는 인원들의 움직임에는 훨씬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아직은 서율희와 윤동현의 지시가 없이 매끄러운 전투는 힘들었지만, 기초적인 대형 유지와 전투 방식은 일행 모두 어느 정도 숙달된 모습이었다.
나도 다른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한결 여유롭게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이 아니라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균열의 풍경이었다.
‘여기 본 적이 있어.’
벽 너머 세상에서 약초를 채집하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 보았던 주변 풍경이 마치 복사한 것처럼 C등급 균열 안에 펼쳐져 있었다.
물론 약초를 채집할 때는 이런 괴물들이 날뛰는 장소가 아니었다.
가끔 작은 동물들만 구경할 수 있는 평화로운 숲속이었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분명 C등급 균열과 벽 너머 세상 사이에는 뭔가 알 수 없는 법칙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나는 전투에 최대한 집중하면서도 틈틈이 이 기묘한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 *
-키에엑!
“와아!”
균열의 마지막 괴물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일행들 사이에서는 짧은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아직 긴장 풀지 마세요. 주변에 숨어 있는 적이 있을 수 있어요.”
서율희의 경고에 따라 일행은 각자의 위치에서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괴물의 시체와 주변 지역을 확인한 뒤에야 서율희는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일행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그녀의 전투 종료 선언에 모든 일행은 주변 동료와 성공적인 성과의 기쁨을 나눴다.
나 역시 아저씨, 아윤, 선우와 성공의 기쁨을 나눴다.
일행은 균열을 나가기 전 자리를 잡고 마지막 휴식을 취했다.
“세진아.”
“네, 아저씨.”
“집사람이 저번에 네가 준 약초 받고 정말 고맙다고 전해달라더라.”
대훈 아저씨의 말에 나는 민망하다는 듯 대답했다.
“전에 아주머니한테 따로 문자로 연락받았어요.”
“그래도 오늘 아침에 다시 고맙다고 전해달라더라.”
“별것도 아닌데…….”
“집사람이 오늘 아침에 너 전해주라고 반찬 몇 개 준비해 뒀더라. 나중에 받아가.”
아저씨가 반찬을 준비했다는 말에 나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최근에 상태가 많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괜히 나 때문에 무리한 게 아닌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표정을 보고 단박에 내 생각을 읽었는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걱정 안 해도 돼. 우리 집사람 성격 알지? 괜히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먹고 난 다음에 맛있게 먹었다고 문자나 한 통 넣어줘. 집사람한테는 그게 더 좋은 일이니까.”
“알았어요. 아저씨.”
내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웃어 보이자 아저씨는 가볍게 내 어깨를 툭 치며 같이 미소 지었다.
아저씨와 이야기를 끝내고.
균열을 나갈 준비를 하는데 멀리서 혼자 있는 서율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지휘하느라 살짝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깐만 다녀올게요.”
아저씨와 남매에게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혼자 있는 서율희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다가온 나를 발견한 서율희는 움찔 몸을 떨더니, 평소와 같은 살짝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시죠?”
“다른 게 아니라. 저번에 그 슬라임 보고 싶다고 하셨었죠?”
서율희는 살짝 동공이 흔들리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금방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안전을 위해서 확인을 하려 했던 것뿐이에요. 큰 문제가 없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혹시 그때 일로 신경 쓰고 계셨다면 사과드릴게요.”
그녀의 쿨한 반응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저번에 보여줬던 그녀의 애절한 표정을 떠올리며, 잠시 주변을 살피고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줬다.
-몽. 몽. 몽.
-몽. 몽. 몽.
“아!”
서율희는 내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연두색, 노란색 슬라임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 크게 실망하시는 것 같아서 한번 데리고 와봤습니다.”
“…….”
그녀는 당황, 망설임, 기쁨, 설렘 등등.
정말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인 표정으로 나와 손바닥 위의 슬라임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더니 결국.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을 깨뜨리고, 기대감으로 들뜬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만져봐도 돼요?”
“네. 부드럽게 만져주면 좋아합니다.”
격렬한 균열의 괴물들과의 전투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녀가.
정말 조심스럽게 작은 슬라임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나와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는지, 녀석들은 서율희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녀석들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하고, 작은 슬라임들은 기분이 좋은지 몸을 부르르 떨며 향기를 내뿜었다.
“어머!”
주변으로 퍼지는 기분 좋은 향기에 그녀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미소를 지었다.
서율희는 조금 더 과감하게 슬라임 중 한 마리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 품 안으로 가져갔다.
-몽. 몽. 몽.
작은 울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손가락에 몸을 비비면서 친근함을 표하는 작은 슬라임.
녀석의 애교 넘치는 행동에 서율희의 표정이 녹아내릴 듯 변해버렸다.
슬라임에게 모든 관심을 빼앗겨, 환상의 나라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시.
“조장님! 나갈 시간 됐습니다.”
부조장 윤동현의 외침에 서율희는 화들짝 놀라며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지금껏 모든 일에 거침이 없던 그녀가 처음으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은 너무 아쉬운 표정으로 나에게 슬라임을 돌려보내 주었다.
-몽. 몽. 몽.
-몽. 몽. 몽.
그녀는 돌아서기 직전까지도 작은 슬라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율희는 몸을 돌리다 말고 나에게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아이들. 또 만날 수 있겠죠?”
절박함마저 느껴지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켜줬다.
“균열 밖에서는 힘들겠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짓더니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감사의 뜻을 담아 내게 고개를 숙이더니 황급히 윤동현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평소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서율희의 모습에 신선함을 느끼며, 작은 슬라임들을 다시 품 안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