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80화
29. 벽 너머로(3)
나는 한동안 새로 얻은 C등급 균열과 새로운 세상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모렛은 꾸준히 마력이 흐르는 나무를 찾아 벌목했다.
부지런한 벌목으로 작업장 재료 창고에는 어느새 마력이 흐르는 목재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나는 본격적으로 작은 슬라임을 따라다니며 C등급 균열 안에 남아 있던 약초들을 계속 채취했다.
한쪽 어깨에는 약초를 보관할 배낭도 장만해서, 곳곳에 숨어 있는 약초를 찾는 즉시 배낭에 고이 보관했다.
처음에는 작은 슬라임이 안내해 주지 않으면 눈앞의 약초도 잡초랑 구분 못 하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지만.
조금 익숙해지고 나니 잡초 정도는 구분하게 되었다.
약초를 캐러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인데, 작은 슬라임들의 주식이 이 약초들이었다.
-몽. 몽.
-몽. 몽.
연두색 슬라임과 노란색 슬라임.
작은 두 슬라임이 내 손위에서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가방에서 약초 하나를 꺼내 녀석들에게 주었다.
그러자 두 녀석은 작은 입으로 약초를 조금씩 뜯어 오물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워낙 크기가 작은 녀석들이라 약초 하나를 먹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뭐랄까? 보는 맛이 있다고 해야 하나?’
작은 몸을 움직이며 약초를 조금씩 뜯어 먹는 모습은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슬라임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나를 따라온 두 녀석은 굉장히 나를 잘 따랐다.
다른 슬라임들도 나에게 우호적이긴 해도 이 녀석들처럼 따른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 두 녀석이 왜 이렇게 나를 잘 따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들 덕분에 약초 채취가 굉장히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몽. 몽.
“다 먹었어?”
-몽. 몽.
녀석들은 약초를 배불리 먹었는지 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그럼 다시 갈까?”
나는 다시 두 녀석을 앞세워 약초를 찾아 나섰다.
배가 불러서인지 작은 슬라임들은 아까보다 더 힘차게 몸을 움직이며 약초를 찾아 나섰다.
-몽. 몽.
-몽. 몽.
“오오. 아스타나 약초! 심 봤다!!”
* * *
“흐음…….”
나는 노트북으로 오늘 캔 약초의 시세를 알아보던 와중에 고민이 담긴 침음성을 흘렸다.
일단 내가 캐낸 약초들이 굉장히 희귀하고, 값비싼 약초라는 사실은 충분히 확인했는데. 이걸 어디에 팔아야 할지가 문제였다.
워낙 고급재료다 보니 가격이 비싼 만큼 파는 곳도, 사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아스타나 약초는 특이한 경우라 구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지만 다른 약초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조금 알아보니 희귀한 약초일수록 대부분 주문형식으로 판매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가격이 비싼 만큼 품질을 믿을 수 있는 판매처에서만 거래가 이루어졌다.
나 같은 경우는 개인 판매자인 데다가, 약초를 팔아본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희귀 약초를 원하는 구매자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찾고 있던 번호가 화면에 떠오르고, 잠시 망설인 끝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내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네. 안녕하세요.”
-…….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잠시 형식적인 안부 인사가 오가고.
“아. 오늘 연락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 * *
“잘 지내셨어요? 세진 씨.”
“네. 오랜만에 뵙네요.”
각성자 협회의 박선영이 여전히 편안한 인상으로 밝게 인사를 해왔다.
“이쪽은 오늘 거래를 도와주실 김형석 선생님이에요.”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40대의 깡마른 체형 가진 김형석과도 짧게 인사를 나눴다.
“안부 인사는 전화로도 충분히 나눴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박선영은 시원시원하게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녀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아래에 두었던 가방을 꺼내 들었다.
가방에서 가져온 약초를 하나씩 꺼내 보이자, 지켜보던 김형석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옆에 있던 박선영도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김형석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 아니. 개인 판매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개인 판매자 맞습니다. 문제라도?”
“그럼 이 약초를 전부 혼자서 채취하셨다는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허허…….”
김형석은 내 대답에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할 말을 잃고 허무한 웃음을 흘리고 있자, 박선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세진 씨. 정말 이 약초들을 모두 혼자서 캐내신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서 짙은 의심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더 심각한 두 사람의 반응에 얼떨떨했지만, 거짓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박선영과 김형석은 아연한 표정으로 나와 약초를 번갈아 쳐다봤다.
한동안 가만히 있던 김형석은 품에서 돋보기안경과 새하얀 면장갑을 꺼내 착용하고, 올려놓은 약초를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약초를 캐낼 때 최대한 조심한다고 조심했지만, 약초 일에 초보자였기에 실수한 게 있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세심하게 약초를 살피던 그는 돋보기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일단 상태는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채취하신 분이 경험이 많이 없으신지 뿌리 쪽에 조금 손상이 있는 것도 있지만, 크게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큰 문제가 없다는 말에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세진 씨가 이 약초들을 직접 캐내신 건가요?
“예. 제가 직접 했습니다.”
“약초에 대해 따로 공부하신 적은 없으시죠?”
“네.”
김형석의 질문에 내가 살짝 움츠러드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편안한 웃음을 보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경험이 없다고 탓하려 하는 게 아닙니다. 아직 이 귀한 약초들을 혼자 구하셨다는 말은 믿기 힘들지만. 정말로 세진 씨가 그런 능력을 갖추고 계신다면, 조금만 더 세심한 노력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나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연락해 주시면 채취 방법에 대한 설명이나 자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원하시면 조금 복잡한 손질 방법까지 알려드릴 테니 시간 한번 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김형석은 박선영에게 서류를 하나 받아 오늘 확인한 약초들의 종류와 수량, 채취 시기, 상태를 꼼꼼하게 적어넣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서명이 끝나고 서류는 나에게로 전해졌다.
나와 박선영의 확인과 서명이 끝나자 김형석은 약초들을 챙기며 먼저 일어섰다.
“아무래도 빨리 손질해야 할 것들이 보여서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는 짧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약초와 함께 자리를 빠져나갔다.
자리에는 박선영과 나, 단둘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세진 씨.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에요?”
“……?”
“말도 안 되는 능력의 아티팩트를 선보인 게 엊그제인 것 같은데, 갑자기 대뜸 약초를 잔뜩 가지고 오시고. 그것도 전부 희귀한 약초들만.”
박선영은 드물게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세진 씨가 가져온 약초의 양이 웬만한 길드가 한 달 내내 균열에서 구해야 하는 양인 거 아세요?”
“…….”
나는 무척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C등급 균열과 벽 너머 세상을 좀 돌아다니며 채취한 양이 그 정도일 줄이야.
그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듯 말했다.
“솔직히 약초 좀 팔고 싶다고 연락하셨을 때, 운이 좋아 발견한 약초 몇 뿌리 정도 파실 줄 알았어요.”
그리고 서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약초 이야기는 별로 준비 안 하고, 아티팩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해 왔는데. 이건 뭐, 길드급으로 약초를 캐오셔서.”
“뭔가 죄송하네요.”
“세진 씨가 죄송할 건 없죠. 그냥 세진 씨를 영입해야 하는 제 입장만 점점 곤란해진다고 할까나.”
박선영은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며 내게 물었다.
“그냥 협회에 들어와 주시면 안 돼요? 진짜 맞춰달라는 거 다 맞춰줄게요.”
거의 애원하듯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미소만 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박선영은 좌절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본래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일단 약초의 수량과 품질 확인은 끝났어요. 몇 가지 약초는 워낙 희귀한 물건이라 경매장에 올릴 수 있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래요?”
“약초 같은 경우는 보통 경매장보다 주문 판매를 많이 해요. 시간이 지날수록 효능이 떨어지는 물건도 있어서 빨리 파는 게 좋거든요. 경매장에서 팔면 더 비싸게 팔 수 있지만, 제때 팔지 못하면 약초의 효능이 떨어져서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어요.”
박선영은 설명과 함께 어떤 약초가 경매장에 올리면 좋을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줬다.
그녀의 설명과 추천을 통해 약초들을 어떻게 판매할지 결정한 뒤, 마지막으로 경매장 이용에 관한 서류에 서명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어도 약초 거래가 끝나고. 내가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박선영 굉장히 조심스럽게 내게 질문했다.
“세진 씨. 혹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약초를 판매하실 계획이신가요?”
앞으로의 상세한 계획까지는 세우지 않았지만, 약초는 꾸준히 채취할 생각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대답에 잠시 뭔가를 고민하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조금 걱정이 돼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벤전스 길드 아세요?”
“벤전스 길드요? 한번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5대 길드 중의 하나인데. 아스타나 약초를 독점한 거로 유명해요.”
“…….”
“소문이긴 하지만 벤전스 길드에서 자신의 독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개인이나 작은 길드의 아스타나 약초 판매를 방해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녀가 꺼낸 심각한 이야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얼굴을 굳혔다.
“벤전스 길드가 그런 짓을 벌였다는 증거는 아직 없는데. 소문이 굉장히 흉흉해요. 다른 약초들은 상관없는데. 아스타나 약초를 이런 식으로 계속 판매하게 되면 벤전스 길드 쪽에서 먼저 찾아올지도 몰라요.”
박선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에서 이 문제가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세진 씨가 계속 아스타나 약초를 협회를 통해 판매하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방금 제가 드린 말씀은 한번 꼭 생각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지막에 약간 찝찝함을 남기긴 했지만. 박선영과의 약초 거래는 서로 만족스럽게 끝낼 수 있었다.
* * *
박선영을 통해 각성자 협회와 거래를 끝내고 며칠이 지났다. 텐트에서 아이들과 쉬고 있는데 박선영에게서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경매장에 올린 약초 판매가 모두 완료됐습니다. 아직 주문 판매가 끝나지 않은 약초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정산해 계좌에 입금했습니다. 정산서도 함께 보내드렸으니 확인해 보시고, 나머지 판매가 완료되면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박선영의 문자를 확인하고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통해 계좌를 확인했다.
“…….”
나는 혹시 표시가 잘못됐나 싶어 화면 새로 고침을 눌렀다. 그런데 화면에 표시된 금액은 그대로였다.
그때, 박선영으로부터 한 통의 문자가 추가로 도착했다.
-그리고 세진 씨가 캐낸 약초의 효능이 좋다는 소문이 벌써 쫙 퍼졌어요. 그 덕분에 조금 더 비싸게 팔렸으니 참고하세요.
나는 추가로 온 문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내 계좌에 찍힌 금액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계좌에는 무려 각성자 협회 이름으로 1,500만 원이라는 금액이 입금돼 있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옆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 시선이 향했다.
“얘들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내 질문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
“퓨이!”
“후모!”
-몽. 몽.
-몽. 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