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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79화 (79/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79화

29. 벽 너머로(2)

“어? 넘어갈 수 있다고?”

“응.”

깜짝 놀라 되묻자, 티아는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균열 특이점 권능을 사용하면 되잖아?”

나는 티아의 말에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균열 특이점은 내가 소유한 균열끼리 연결하는 권능인데, 벽 건너편은 내 소유 균열이 아니야.”

티아는 내 설명을 듣더니, 투명한 벽으로 다가가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티아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쏟아졌다.

나와 퓨이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잠시 후.

벽에서 손을 뗀 티아가 나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될 거야.”

“……?”

“주인한테 허락을 받았어.”

“허락을 받았다고?!”

나는 티아의 이해할 수 없는 설명에 목소리를 높였다.

“응.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게 입구를 열어도 되겠냐고 물었는데, 상관없데.”

“도대체 그 주인이 누구인데?”

“나도 몰라. 근데 엄청 친절하고, 친숙한 느낌이었어.”

굉장히 부실한 설명이었지만, 티아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일단 해볼까?’

큰 기대감 없이 티아의 말대로 권능을 사용해 보았다.

-우우웅!

평소에 균열을 연결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균열 입구를 여는 과정을 시도했다.

그런데.

“크흡!”

순간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고, 숨을 쉬기 어려운 압박감을 느꼈다. 나는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권능 사용을 중지했다.

“퓨이.”

“괜찮아?”

이상한 반응을 본 퓨이와 티아가 걱정스럽게 내 안위를 살폈다.

나는 손을 들어 보여 일단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다행히 권능 사용을 중지하자마자 압박감은 바로 사라졌다. 나는 살짝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투명한 벽을 바라봤다.

‘뭐지? 평소에는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조금 전, C등급 균열과 보금자리를 잇는 균열 특이점 권능을 사용할 때도 약간의 압박감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 숨이 멎을 것 같은 느낌의 강한 압박감은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강한 충격을 받는 와중에 권능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압박감만 견디면 충분히 입구를 개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티아와 퓨이, 투명한 벽 건너편에서 아직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작은 슬라임. 그리고 그 옆에는 아스타나 약초.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두 손을 투명한 벽에 올리고, 눈을 감은 채 권능 사용에 의식을 집중했다.

-우우웅!

권능이 발동되고, 다시 한번 엄청난 압박감이 온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흐읍!!”

나는 이를 꽉 물고 온몸을 짓누르는 거대한 힘에 대항했다. 그래도 미리 대비한 덕분인지 첫 번째보다 훨씬 견딜 만한 것 같았다.

생각보다 균열이 연결되는 과정이 오래 걸리고, 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귓가에 티아와 퓨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를 응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엄청난 압력에 귀도 먹먹해져 잘 들리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지금까지 버틴 게 아깝다는 생각에 나는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덜덜 떨리는 몸에 다시 한번 힘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파아앗!

“허억. 허억.”

뻥 뚫리는 시원한 기분과 함께 투명한 벽에 찬란한 빛을 내뿜는 균열 입구가 생겨났다.

나는 성공했음을 확인한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티아와 퓨이가 걱정이 됐는지 곧바로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괜찮다는 말도 하고 싶었지만 거칠어진 숨 때문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잠시 숨을 돌린 나는 다시 일어나 새롭게 생겨난 균열 입구 앞에 섰다.

“위험할지 모르니까 내가 먼저 들어가 볼게.”

나는 퓨이와 티아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조심스럽게 입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굉장히 긴장했지만, 평범하게 균열 입구를 통과해 벽 반대편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와…….”

나는 벽 반대편에 도착하자마자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투명한 벽을 지나기 전 균열은 해가 머리 위에 있는 오후 시간대였다.

균열에서는 해의 움직임이 없어서 처음부터 계속 오후 시간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특유의 시원함과 상쾌함이 느껴지는 새벽이었다.

분명 주변 풍경은 벽 너머에서 보던 것과 같았지만, 시간대는 달라져 있었다.

내가 균열을 경험한 기간이 엄청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균열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이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실제 세상과 균열의 차이를 미세하게 느낄 수 있게 됐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도 실제 세상과 균열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느낌을 예시로 들자면 모델하우스를 보는 것과 평범한 가정집을 보는 차이?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균열에서는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 막 발을 내디딘 이곳.

이곳은 달랐다. 마치 실제 세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시원한 새벽 공기도, 주변에서 느껴지는 싱그러운 풀 내음도,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땅바닥의 감촉도.

모두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균열 입구를 통해 티아와 퓨이가 차례로 넘어왔다.

“와아!”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티아도 감탄사를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퓨이!”

-몽. 몽. 몽.

퓨이는 곧바로 작은 슬라임에게 다가가 재회의 기쁨을 마음껏 나눴다.

아직 새로운 경험의 충격에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작은 슬라임이 아스타나 약초 주변을 맴돌며 울음소리를 냈다.

-몽. 몽.

“이거 캐내라는 거지? 알았어.”

비싼 약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약초를 캐내 작은 가방에 챙겨 넣었다.

내가 약초를 챙기자 작은 슬라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와 아이들은 일단 녀석을 뒤따랐다.

작은 슬라임이 우리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아스타나 약초가 있는 곳이었다.

“어?! 여기는.”

-몽. 몽.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내가 처음으로 아스타나 약초를 캐낸 곳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분명 약초를 캐냈던 자리에 또 아스타나 약초가 생겨나 있었다.

‘뭐지? 약초가 그 짧은 사이에 새로 자라났을 리는 없고.’

굉장히 기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아스타나 약초를 다시 캐내서 가방에 챙겼다.

-몽. 몽. 몽.

내가 약초를 챙기자마자 작은 슬라임은 또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슬라임을 뒤따르며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C등급 균열의 모습과 똑같아.’

아침이라는 시간대만 다를 뿐 이곳은 C등급 균열을 복사해서 가져다 놓은 것처럼 똑같은 공간이었다.

-몽. 몽. 몽.

이번에는 작은 슬라임이 아스타나 약초가 아닌 처음 보는 풀 주변을 맴돌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꽃이 지고 그 자리에 콩알만 한 빨간색 열매가 여러 개 열려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열매를 따 손위로 가져갔다.

-몽. 몽.

작은 슬라임이 내 발치에서 몸을 통통 튀면서 뭔가를 요구하는 행동을 보였다.

나는 방금 딴 열매를 손 위에 올려둔 채 녀석의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손바닥 위의 작은 열매 하나를 냉큼 집어 먹더니, 기분 좋게 웃으며 다시 몸을 통통 튕겼다.

-몽. 몽. 몽.

“나도 먹으라고?”

-몽. 몽.

작은 슬라임의 재촉에 나는 열매 2알 정도를 입안으로 넣었다. 작은 열매를 씹으니 씁쓸한 맛과 그 안에 작은 씨앗이 느껴졌다.

대충 씨앗까지 씹어 넘기고, 생각보다 별로 맛이 없어 실망감을 느끼고 있을 때.

“으음?”

갑자기 온몸에서 활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균열 입구를 열기 위해 용쓰느라 몸에 피곤함이 남아 있었는데, 피곤함마저 싹 날려버리고 전신에 힘이 넘쳐 흘렀다.

마치 포션을 먹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손바닥 위에 남은 빨간 열매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아스타나 약초와 함께 가방 안에 챙겨 넣었다.

작은 슬라임은 그 뒤로도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면 각가지 약초를 캘 수 있도록 도와줬다.

정확히 약초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전부 가방 속에 조심스럽게 챙겨뒀다.

부피가 크지 않은 가방이라 어느새 수많은 약초로 가방이 가득 찼다.

“이제 가방이 다 차서, 약초는 더 못 가져갈 것 같아.”

-몽. 몽. 몽.

작은 슬라임은 내 말을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어디론 가로 향했다.

녀석을 따라 도착한 곳은 거대한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몽. 몽. 몽.

-몽. 몽. 몽.

“퓨이! 퓨이!”

언덕 위에는 핀테일 던전에서 만났던 작은 슬라임 무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들은 나와 퓨이, 티아 주변을 감싸더니 몸을 부르르 떨며 기분 좋은 향기를 내뿜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퓨이는 다시 만난 친구들과 어느새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고, 티아도 그사이에 끼여 함께 어울렸다.

나는 언덕 위 잔디에 주저앉아 고요하고 깨끗한 수면의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거울처럼 투명한 호수에는 가끔 물고기들이 수면에 모습을 보였다.

‘다음에는 낚싯대라도 하나 챙겨와 볼까?’

호수 표면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작은 슬라임 몇 마리가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녀석들을 쓰다듬어줬다.

“와아! 세진 저거 봐!”

그때 티아가 내 곁으로 다가와 큰 목소리로 호수 뒤 거대한 산 정상 쪽을 가리켰다.

산봉우리 사이로 해가 빛나는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퓨이!”

-몽. 몽. 몽.

-몽. 몽. 몽.

퓨이와 작은 슬라임들도 노는 걸 멈추고 모두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해가 부끄러움을 떨쳐내고 조금씩 얼굴을 비치자, 잔디로 뒤덮인 언덕에는 포근한 기운으로 가득해졌다.

등 뒤로는 아직 서늘한 새벽 공기가, 앞으로는 따뜻한 아침 햇살을 느끼며 나는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아이들과 작은 슬라임들도 조용히 아침 햇살의 포근함을 즐겼다.

한동안 포근한 기운에 휩싸여 기분 좋은 느낌을 만끽하던 나는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태양을 보며 생각했다.

‘여긴 균열이 아니야. 진짜 새로운 세상이야.’

눈 앞에 펼쳐지는 이 모든 광경에서 어떠한 부자연스러움도 느낄 수 없었다.

정확히 이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평소에 드나들었던 균열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아직 불확실한 사실들과 궁금증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애써 그것들을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포근한 아침 햇살을 느끼며, 아이들과 보내는 기분 좋은 시간을 소중히 했다.

* * *

정체불명의 새로운 세상에서 나와 아이들은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몽. 몽. 몽.

-몽. 몽. 몽.

그리고 작은 슬라임 두 마리가 우리를 따라왔다. 한 마리는 나에게 약초의 위치를 알려줬던 녀석이었다.

“후모?!”

-몽. 몽. 몽.

-몽. 몽. 몽.

작은 슬라임들은 처음 만난 모렛이 신기한지 계속 주변을 맴돌았고, 모렛은 그런 녀석들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운지 당황한 기색을 내보였다.

한편, 나는 노트북으로 그곳에서 가져온 약초들에 대해 찾아보고 있었는데…….

“어어, 헉?!”

아스타나 약초는 이미 비싸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물론 생각보다 높은 200만 원에서 300만 원 사이에 가격이 형성된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작은 슬라임의 안내로 가져온 약초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가격대를 하고 있었다.

특히 온몸에 활력을 넘치게 했던 붉은 열매.

그 열매 한 알당 30만 원에 거래가 되고 있었다.

내가 두 알을 먹고, 작은 슬라임과 퓨이, 티아에게도 한 알씩 나눠줬는데. 그게 모두 150만 원어치의 열매였다.

고급 포션 제작에 무조건 들어가는 재료로 수요가 굉장히 높은데 공급이 적다고 한다.

붉은 열매 말고 다른 약초들도 모두 하나같이 굉장히 희귀한 약초들이었다.

오늘 가져간 가방이 조금 더 큰 가방이었다면, 작은 슬라임을 따라다니며 수천만 원을 벌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 작은 슬라임을 바라봤다.

녀석들은 퓨이가 건네주는 과자를 얌전히 받아먹고 있었다. 마치 엄마와 자식들같이 훈훈한 광경이었다.

“허허.”

나는 오늘 발견한 새로운 세상과 작은 슬라임, 그리고 희귀한 약초들을 떠올리며 기쁨과 허무함이 뒤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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