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78화
29. 벽 너머로(1)
서율희는 마지막 인원 점검을 끝내고 받침대 위에 놓여 있는 균열핵을 제거했다.
-우우웅!
[균열을 성공적으로 제거했습니다.]
[경험치 3,250 Exp를 획득합니다.]
균열 제거가 완료되었다는 알람과 동시에 균열을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가 생성되었다.
“정해진 순서대로 차례로 빠져나가겠습니다.”
윤동현의 지휘 아래 사람들은 한 명씩 차례로 균열을 빠져나갔다.
나와 정 씨 가족은 조금 뒤쪽에 줄을 서 나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크흠. 전세진 씨?”
“네?”
서율희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단으로 이탈한 죄가 있어 살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그녀는 나와 같이 있던 정 씨 가족의 눈치를 보더니.
“잠깐 이야기 좀 나눌까요?”
내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정 씨 가족을 바라보니, 그들 역시 불안한 표정으로.
-무슨 잘못을 한 거야?
같은 생각을 담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선생님에게 교무실로 끌려가는 느낌으로 서율희에게 다가갔다.
“흠흠. 전투는 할 만하셨나요?”
“네. 조장님, 부조장님이 지휘를 잘 해주셔서 편했던 것 같습니다.”
“여긴 C등급 균열 중에서도 낮은 난이도의 균열이니 절대 방심하시면 안 돼요.”
“네. 주의하겠습니다.”
그 뒤로도 서율희는 나에게 이것저것 질문했지만, 딱히 왜 불러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졌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거의 모든 인원이 균열을 빠져나가 나와 서율희, 정 씨 가족만 남게 되었다.
“저…….”
“……?”
그녀는 굉장히 머뭇거리더니, 약간 허둥대는 느낌으로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놨다.
“절대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니고. 안전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드리는 부탁인데. 그러니까.”
“……??”
“혹시 슬라임 한 번만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안전을 위해 서에요! 혹시 위험할까 봐 확인하려고요.”
그녀는 몇 번을 안전을 위해서라 강조하며 내게 강하게 어필했다.
내가 사람의 표정을 잘 읽는다던가, 분위기를 잘 살피는 성격은 아니지만.
딱 봐도 안전을 위해서 꺼낸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괴물들이 날뛰는 전장에서도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며 많은 사람을 지휘하던 그녀가.
작은 슬라임 하나 때문에 긴장과 설렘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부탁하는 상황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사태를 파악하고 나는 곤혹스러워졌다. 이미 작은 슬라임 친구는 벽을 너머서 사라져버렸기 때문.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있는 그대로 말해줬다.
“죄송합니다. 그 작은 친구는 아까 숲속에서 놓아줬습니다.”
“아…….”
내 말을 전해 들은 그녀는 아쉬운 감정이 절절히 느껴지는 외마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점점 울상으로 변하더니 살짝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어, 어?!”
나는 크게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버렸다.
서율희는 울상인 표정에서 화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다 몸을 홱 돌려 출구로 빠르게 빠져나가 버렸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나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던 정 씨 가족은 왠지 모르겠지만, 나를 약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 * *
균열을 빠져나온 모든 일행은 가벼운 점검과 다음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해산했다.
서율희는 다시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해산하기 전에 가끔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굉장히 매서웠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고, 정 씨 가족도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가방에서 아스타나 약초를 꺼내 남매 모르게 조용히 대훈 아저씨에게 건넸다.
아저씨는 약초를 보자마자 펄쩍 뛸 듯 놀라며 내게 물었다.
“너?! 이거 어디서 가져온 거야?”
“아까 화장실 가려고 잠시 빠져나왔다가 캐냈어요. 이거 아주머니한테 필요한 거 맞죠?”
“맞긴 맞는데. 이거 엄청 비싼 약초야. 이렇게 막 주면 안 돼.”
받지 않으려는 아저씨에게 나는 억지로 약초를 쥐여줬다.
“그냥 받아두세요. 아저씨 좋아서 주는 게 아니라, 맛있는 반찬 챙겨준 아주머니한테 고마워서 드리는 거예요.”
“세진아…….”
아저씨는 감동 받은 표정으로 나와 약초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면서도 아직 고민이 되는지 약초를 챙기지 못했다.
“아. 이번 한 번뿐이에요. 다음번에는 얄짤 없이 비싸게 팔 거니까 지금은 받아둬요.”
“고맙다. 정말 고마워.”
“아, 진짜. 애들 보잖아요.”
고개까지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아저씨를 말리며, 남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수고하셨어요.”
운전대를 잡은 윤동현이 뒷좌석에 앉은 서율희에게 말했다.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서율희의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해 계속 말을 꺼냈다.
“이번에 길드 추천으로 참가했던 파티, 어땠어요? 저는 괜찮은 것 같더라고요. 정대훈 아저씨였나?”
“…….”
“확실히 경험이 많아서인지 지시도 잘 따라주시고, 빈틈없이 전열 유지해 주시더라고요.”
“나도 괜찮은 것 같았어.”
윤동현의 말에 서율희가 동의했다.
“전세진. 그분은 어땠어요? 이번에 길드가 추천하게 된 것도 그 사람 때문인 거로 아는데.”
“나빠.”
“……예?”
“그 사람은 나빠. 최악이야.”
가혹한 혹평을 날리는 서율희의 행동에 윤동현이 백미러로 슬쩍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 멍한 표정의 그녀가, 전세진 이야기에 지금은 심술이 가득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윤동현은 아까 우연히 아스타나 약초를 발견하던 전세진의 모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세진 씨.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윤동현은 길드에 보고를 올려야 하는 처지로, 주요 영입 인물에 대해 나쁘다는 말만 반복하는 직장 상사를 보며 굉장히 난감해졌다.
* * *
정 씨 가족과 헤어진 뒤, 나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C등급 균열의 입구를 열었다.
균열에서 나오기 전, ‘균열 획득’ 능력을 통해 C등급 균열의 소유권을 획득해 놓았다.
물론 등급이 높았던 탓에 많은 수의 마석을 대가로 내야만 했다.
나는 균열 특이점 권능을 이용해 C등급 균열과 보금자리가 있는 균열을 연결했다.
C등급 균열에 새로운 입구가 생겨나고, 그 입구를 통해 퓨이와 티아, 모렛이 차례로 튀어나왔다.
“퓨이!”
“후모!”
퓨이와 모렛은 C등급 균열의 새로운 환경이 신기한지, 흥분한 듯 이곳저곳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퓨이는 주변의 풀들을 만져보거나, 예쁘게 피어난 꽃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다.
모렛은 나무 주변을 서성이며 하나씩 두드려보고 있었다.
한편 티아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지 내 곁에 머물며 퓨이와 모렛을 지켜봤다.
‘생각해 보니 퓨이와 모렛은 이런 환경을 처음 보는 거구나.’
퓨이와 모렛은 항상 텐트가 있는 동굴 같은 균열에만 머물다 보니, 이런 풍경을 실제로 보기 쉽지 않았다.
어쩌면 태어나 처음 보게 된 바깥 풍경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 녀석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젠가 균열이 아닌, 내가 사는 세상으로도 아이들과 같이 나갈 수 있을까?’
퓨이가 좋아하는 닭강정 가게에 직접 방문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놀이공원에 가는 상상을 하며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아이들이 지칠 때까지 마음껏 이곳을 둘러볼 수 있게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잠시 후.
“퓨이!”
퓨이는 마음껏 주변을 돌아봤는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그럼. 일 시작해 볼까?”
“퓨이!”
나는 퓨이와 함께 균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죽어 있는 괴물에게서 마석을 추출했다.
확실히 높은 등급의 균열이라 그런지, 마석이 굉장히 많이 나왔다.
거기다 C등급 마석까지 종종 나와주었다.
‘오늘 소유권 획득하느라 사용했던 마석을 금방 채우겠는데?’
생각보다 수확이 좋아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일을 계속했다.
퓨이도 평소와 다른 환경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즐거운지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모!”
마석 추출일에 몰두해 있는 사이, 모렛이 커다란 나무 앞에서 나를 불렀다.
“후모. 후모.”
모렛은 두 손으로 털 깊숙한 곳에서 커다란 도끼를 꺼내 들었다.
“이 나무를 자르려고?”
“후모!”
내 물음에 모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두 팔로 겨우 껴안을 수 있을 것 같은 나무를 벌목하겠다는 모렛.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모렛을 믿어보기로 했다.
나와 아이들이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는 사이.
모렛은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파워를 자랑하며 나무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팟! 팟! 팟!
강력한 도끼질에 나무의 밑부분이 조금씩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모렛은 능숙한 벌목 실력으로 나무의 아랫부분을 공략해 나갔다.
“후모! 후모!”
모렛의 경고가 담긴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나와 아이들은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상황을 지켜봤다.
-휘익!
-파악!!
-기우뚱.
마지막 힘찬 도끼질과 함께 커다란 나무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쓰러졌다.
모렛은 멈추지 않고 쓰러진 나무의 가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지 정리를 끝낸 모렛이 나를 불렀다.
“후모!”
무성한 나뭇잎을 자랑하던 커다란 나무는 모렛의 도끼질에 순식간에 통나무로 변해버렸다.
내가 통나무에 손을 가져가자 정보를 나타내는 알람이 떠올랐다.
[은은한 마력이 흐르는 통나무]
-통나무에 순수한 마력이 은은하게 깃들어 있다.
“오오!”
통나무의 정보를 확인한 나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작업실에서 나무 톱니바퀴를 만드는데 사용할 수 있는 재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후모!”
감탄하는 내 모습에 모렛은 가슴을 쭉 펴 보이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모렛의 털을 쓰다듬어주며 칭찬했다.
“잘했어. 모렛.”
“후모!”
나는 모렛을 듬뿍 칭찬해 준 뒤, 다시 남은 마석 추출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모렛은 통나무를 옮기기 좋게 자르는 작업을 위해 남기로 했다.
대충 마석 추출이 끝나갈 때쯤.
“퓨이?”
잘 가던 퓨이가 갑자기 길을 벗어나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퓨이야?”
갑작스러운 퓨이의 행동에 놀라며 나와 티아는 급하게 퓨이의 뒤를 따랐다.
빽빽한 풀들을 헤치며 퓨이를 따라 도착한 곳은 내가 한번 와본 적 있는 곳이었다.
바로 작은 슬라임과 헤어졌던 곳이면서, 벽 너머로 아스타나 약초가 보이는 장소였다.
-몽. 몽. 몽.
“퓨이! 퓨이!”
아까 봤던 작은 슬라임이 다시 한번 벽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모습에 퓨이가 흥분해 뛰어들었다.
-툭!
하지만 퓨이도 나와 마찬가지로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친구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퓨우우우.”
-몽. 몽.
눈앞에 친구를 두고 만날 수 없게 되자, 퓨이는 울상인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벽을 넘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의미인 듯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퓨이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으음. 나도 이 벽을 통과할 방법은 모르는데.”
“퓨우.”
내 말을 들은 퓨이가 크게 실망한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벽 너머에 있는 친구를 무척 만나고 싶은 것 같았다.
슬픈 기색이 가득한 퓨이의 모습에 나도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티아가 벽을 살피더니 내게 말했다.
“세진. 이 벽 넘어갈 수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