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77화 (77/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77화

28. C등급 균열(3)

갑자기 분위기가 급변한 서율희의 모습에 나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아윤과 선우도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위에 있는 작은 슬라임에게 모든 관심을 빼앗긴 상태였다.

서율희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손을 올려 조심스럽게 슬라임에게 가져갔다.

-몽. 몽.

슬라임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듯 몸을 뒤로 움직였다.

“아…….”

손길을 피하자 서율희는 안타까운 감정이 담긴 짧은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내가 반대쪽 손을 들어 슬라임을 쓰다듬어줬다. 슬라임은 내 손길은 피하지 않았고, 기분 좋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몽. 몽. 몽.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기분 좋은 향기가 퍼져 나왔다.

“와! 향기 좋다.”

“오빠. 얘가 지금 향기 내는 거죠?”

선우와 아윤이 향기를 내뿜는 작은 슬라임이 신기한지 호들갑을 떨었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서율희의 표정이 굉장히 오묘해졌다.

나에게는 뭔가 불만스러운 시선을 하면서, 향기를 내뿜는 슬라임은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조장님!”

부조장인 윤동현이 서율희를 부르며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하세요? 휴식 시간 곧 끝나는데.”

나는 일단 작은 슬라임을 다시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윤동현은 슬라임은 보지 못했는지 서율희에게만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알았어. 금방 갈게.”

서율희는 윤동현을 먼저 돌려보냈다. 그녀는 아까와 같이 다시 냉담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혼자 돌아다니는 행동은 위험합니까. 주의해 주세요. 생리적인 일도 전부 보고하고 행동하셔야 해요.”

“주의하겠습니다.”

그녀의 따끔한 경고에 나는 다시 한번 고개 숙이며 주의하겠다 말했다.

그리고 서율희의 시선이 한동안 내 상의 주머니에 머물렀다.

우물쭈물하며 뭔가를 말하려는가 싶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윤동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누나. 조장님 되게 무섭다.”

“그러게. 오빠, 조심 좀 해요. 조장님 화나신 것 같아서 우리도 놀랐잖아요.”

“미안. 미안. 앞으로 안 그럴게.”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남매에게 사과했다.

서율희의 지휘 아래 사람들은 큰 문제 없이 전투를 이어나갔다.

윤동현을 필두로 탱커진은 든든하게 전열을 유지했고, 서율희의 적절한 지시로 딜러들의 활약도 계속 이어졌다.

사람들이 계속된 전투의 손쉬운 승리에 약간 우쭐해지려 할 때. 서율희의 긴장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지금까지는 미지의 C등급 균열이라는 공포감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니 사람들의 긴장감이 느슨하게 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들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주의시키고 경고했다.

하지만 조금씩 지시에 늦게 따르거나,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탱커의 전열이 잠시 흐트러진 틈을 타 늑대 한 마리가 딜러들을 향해 달려들어 흉포한 발톱을 들이밀었다.

탱커진을 믿고 있던 남자 마법사 한 명이 무방비 상태로 늑대의 공격에 노출됐다.

‘이런!’

서율희는 위급한 상황에 곧바로 반응해 능력을 사용했다.

-쑤우욱!

그녀의 주변에 생겨난 기다랗고 기괴한 촉수가 늑대를 향해 뻗어 나갔다. 촉수는 아슬아슬하게 늑대를 후려쳐 공격을 저지했다.

잠시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다른 방향에서 늑대가 한 마리 더 튀어나왔다.

서율희는 다급하게 다시 능력을 발동하려 했지만, 본능적으로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 마법사가 늑대에게 덮쳐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

-쉴드!

그때.

누군가 남자 마법사 앞에 나서서 쉴드 마법을 사용했다. 불투명한 방어막에 막혀 늑대의 공격이 수포로 돌아가고.

-회오리바람!

휘몰아치는 바람에 의해 늑대가 잠시 비틀거리는 사이, 바람을 꿰뚫고 날아온 화살에 머리를 적중당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전열이 무너져 생긴 빈틈은 정대훈의 지원으로 다시 복구됐고, 다시 안정적으로 전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전세진과 그의 일행의 발 빠른 대처로 크게 다칠뻔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안정적으로 전투가 끝나고.

서율희는 불같이 화를 내며 사람들을 다그쳤다.

“제가 긴장하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아요. 방금 크게 다칠뻔한 상황 보셨죠? 이 짧은 균열을 진행하면서도 집중을 유지 못 하면 나중에 훨씬 긴 균열에서는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녀의 따끔한 일침에 많은 사람이 고개를 떨궜다.

윤동현과 서율희의 지시만 잘 따랐어도 아주 쉽게 잡을 수 있는 상대였다.

그런데 잠깐의 실수로 누군가 크게 다칠 뻔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이곳에 모이신 분들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건 알고 있지만. C등급에서는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주세요. 경험이 많다고 괴물들이 대우해 주는 거 아닙니다.”

그녀의 말을 마지막으로 일행은 휴식에 들어갔다.

조금 전 있었던 상황으로 일행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가라앉았지만, 서율희는 한숨 놓을 수 있었다.

분위기는 최악일지라도 어느 정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각심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번 균열이 끝날 때까지는 이런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행들을 둘러보던 와중, 한쪽에 모여 있는 전세진과 그의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상황에서 그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큰 사고가 일어날 뻔했다.

서율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전세진의 일행을 바라봤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지시에도 충실히 따라주었고.

무엇보다 돌발상황에서 그렇게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은 긴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 전장을 둘러볼 만큼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거기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일행의 연계 플레이가 그들이 평소에 얼마나 진지하게 이 일에 임했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처음 전세진 일행을 회유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불만스러웠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D등급 균열에서 오랫동안 전전할 실력이면 길드에 전혀 도움이 될만한 전력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전세진을 회유하기 위해 그 주변 일행을 거짓으로 추켜세워 끌어들이는 방식은 그녀의 성미에 전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본 전세진과 그 일행의 실력은 눈에 띄게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탄탄한 기본 실력과 경험을 갖춘 파티였다.

아직 모자란 부분이 있지만, 잠재 가능성과 탄탄한 기본 실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길드로 회유할 만한 실력을 갖춘 일행이었다.

바람의 정령을 다루는 지원가 정선우.

아직은 그 위력이 미미해 보이지만, 수준이 높아질수록 그 영향력이 엄청나질 수 있는 지원가.

활을 사용하는 원거리 딜러 정아윤.

아이템과 스킬 셋팅만 조금 더 맞춰지면 상위 균열에서도 먹힐 만한 딜을 뿜어낼 잠재력을 가진 딜러.

방패를 든 탱커 정대훈.

평범한 능력에 평범한 장비를 사용하는 탱커지만, 수많은 경험과 특유의 강한 책임감은 높이 살만한 탱커.

마지막으로 전세진.

서율희의 눈에 상의 주머니 안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전세진의 모습이 보였다.

-불룩!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토라진 아이처럼 볼을 빵빵하게 불리며 전세진을 노려봤다.

‘으으. 마음에 안 들어.’

귀여운 슬라임을 혼자 독차지한 모습을 보니 그녀의 심사가 뒤틀렸다.

‘나도 슬라임이랑 놀고 싶은데. 나도 쓰다듬고 싶은데.’

지금 당장에라도 전세진에게 뛰어가 귀여운 슬라임을 내놓으라고 외치고 싶었다.

혼자만 슬라임과 즐겁게 지내는 그의 모습을 보니 아무 이유 없이 심술이 났다.

길드에서 전세진을 최우선으로 회유하라고 했는데, 그녀는 그 사실은 까맣게 잊고 질투심을 불태웠다.

* * *

-크헝!

마지막 괴물이었던 늑대의 단말마 비명이 울려 퍼지고.

균열의 모든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6시간 동안 계속 이어진 전투 끝에 C등급 균열 제거에 성공했다. 사람들의 표정에는 피곤함과 기분 좋은 성취감이 어렸다.

마지막으로 균열핵을 꺼내기 전에 마지막 휴식 시간이 이어졌다.

서율희는 마지막까지 전투에서 아쉬웠던 부분이나 좀 더 주의해야 할 부분에 관해 설명했다.

대부분 인원이 피곤함에 그녀의 설명을 대충대충 흘려들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설명을 이어나갔다.

‘대단한 사람이네.’

그녀의 열정적이고 책임감 넘치는 모습에 속으로 감탄했다.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것 같은데, 괜히 거대한 길드의 조장 자리를 맡은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흥!”

“……??”

서율희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새침하게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 당황스러워졌다.

-몽. 몽. 몽.

“응?”

-몽. 몽. 몽.

주머니에서 조용히 있던 작은 슬라임이 움직임을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녀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줬다.

-휙!

“어엇?!”

녀석은 내 손바닥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내 손바닥을 벗어난 녀석은 어디론가 통통 튀어가더니.

-몽. 몽. 몽.

나를 부르듯 통통 튀며 울음소리를 냈다.

전투는 끝이 났지만 아까와 같이 무단이탈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윤동현 부조장에게 다가가 살짝 말을 걸었다.

“저. 부조장님?”

“왜 그러세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혹시 모르니까 저랑 같이 가시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따라나섰다. 조금 난처했지만, 호의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와 윤동현은 같이 일행과 떨어져 나왔다.

-몽. 몽. 몽.

슬라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울음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윤동현에게는 슬라임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는 울음소리를 따라 풀숲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릴 때쯤.

윤동현이 나에게 주의를 시켰다.

“너무 깊게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죠? 저 앞까지만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무슨 일 있으시면 바로 말씀하세요.”

주변을 둘러보는 윤동현을 뒤로하고, 나는 울음소리가 강하게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나는 얼마 가지 않아 통통 튀어 오르는 슬라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디 갔었어?”

-몽. 몽. 몽.

내가 몸을 숙여 말을 걸자, 녀석은 갑자기 어떤 꽃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슬라임이 맴도는 꽃은 겉보기에는 굉장히 평범해 보였는데, 굉장히 은은하고 깊은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땅을 파서 꽃의 뿌리부터, 이파리와 꽃들이 다치지 않게 뽑아 들었다.

-몽. 몽. 몽.

내 행동이 마음에 만족스러운지 제자리에서 몸을 통통 튕기던 녀석은 다시 어디론 가로 향했다.

“어엇. 또 어디가?”

슬라임은 작은 몸으로 생각보다 빠르게 풀숲을 사이를 지나가더니, 또 똑같이 생긴 꽃 주변을 맴돌았다.

내가 황급히 녀석을 따라가려는데.

-우우웅.

“허헙!”

뭔가 투명하고 부드러운 벽이 나를 가로막았고, 나는 그 반발력에 그만 뒤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털썩.

“끄응.”

제대로 엉덩방아를 한 나는 신음을 흘렸고, 그 소리를 들은 윤동현이 근처로 다급히 뛰어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그는 내 곁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어줬고, 나는 그 손을 붙잡았다.

나는 아까 캐낸 정체 모를 꽃을 챙겨 일어났고, 윤동현의 눈이 자연스럽게 그 꽃을 향했다.

“어엇?!!”

“……?”

그는 꽃을 확인하더니 엄청나게 놀란 듯 소리를 질렀다.

“이거 아스타나 약초 아닙니까?”

“어……. 그게 뭐죠? 저는 잘 모르는데.”

“모르십니까? 티머시 증후군 치료제에 사용되는 원재료입니다.”

“…….”

“굉장히 희귀하고, 발견하기도 힘든데. 용케 찾으셨습니다?”

윤동현은 살짝 부러움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쪽에 하나 더 있던데.”

“예?!”

윤동현이 다시 한번 깜짝 놀라며 내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슬라임은 모습을 감췄지만, 또 하나의 아스타나 약초가 보였다.

그는 실망한듯한 말투로 말했다.

“아깝게도. 저건 못 캐내겠네요.”

“왜요? 이 투명한 벽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이 벽을 뚫고 지나갈 방법이 없거든요. 애초에 벽 뒤로 보이는 풍경도 홀로그램같이 허상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냥 보이기만 할 뿐인 거죠.”

“…….”

나는 그의 설명에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허상이라고? 분명 작은 슬라임이 벽을 건너가서 꽃 주변을 맴돌았는데.’

내 표정을 본 윤동현이 조금 더 부연설명을 했다.

“C등급 균열은 완전히 개방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렇게 투명한 벽으로 주변이 막혀 있습니다. 물론 전체 면적이 엄청 넓긴 하지만 D등급이나 E등급과 똑같이 사방이 막혀 있는 거죠.”

“저 투명한 벽 너머에 있는 건 허상이라는 거죠?”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뭐. 넘어가 본 사람이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죠.”

그리고 그는 내가 들고 있던 아스타나 약초를 가리키며 말했다.

“웬만하면 그건 숨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축하할 만한 행운이지만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이유는 없으니까요. 저도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아! 조언 감사합니다.”

“대신 잘되면 밥 한번 사주시는 거죠?”

“물론이죠. 고기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흐흐.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윤동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고, 나는 작은 가방에 아스타나 약초를 조심스럽게 챙겨 넣으며 뒤따랐다.

-몽. 몽. 몽.

등 뒤로 들려오는 슬라임의 울음소리에 나는 잠시 뒤를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허상이 아니야. 분명 벽 너머에 뭔가 있는 거야.’

나는 작은 슬라임과 아스타나 약초를 생각하며 윤동현과 함께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