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72화
27. 다시 일상으로(1)
“퓨이.”
“지아는 언제 놀러 와?”
퓨이와 티아가 내 곁에 달라붙어 신지아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지금은 바빠서 오기 힘들데.”
화재 사건으로 잠시 균열에 머물렀던 신지아.
그녀는 균열을 떠나 미래 그룹 지원 아래에서 새로운 기술과 장비에 대해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가끔 나와 아이들과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워낙 바빠서 직접 만날 시간은 생기지 않았다.
“히잉.”
“퓨우우…….”
바빠서 놀러 오기 힘들다는 말에 티아와 퓨이는 풀이 죽어버렸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신지아를 그리워하는 듯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그렇게 오래 균열에서 같이 지낸 것도 아닌데. 아이들이 신지아에게 느낀 친밀감이 남달랐나 보다.
균열에 찾아오는 정 씨 가족이나 오연우에 비하면 신지아는 특별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들과 빨리 친해졌다.
궁금증을 느낀 나는 티아와 퓨이에게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지아 씨를 좋아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 만나면 예전에는 엄청나게 경계했잖아?”
티아는 내 질문에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가족이니까 당연히 좋아하는 거 아냐?”
“가족? 지아 씨가 가족이라는 거야?”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내가 깜짝 놀라며 묻자, 티아와 심지어 퓨이까지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같이 텐트에 지내서 가족이라고 하는 건가?’
내 나름대로 아이들이 지아 씨를 가족으로 생각한 이유를 예상했지만, 진짜 이유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지아가 세진이랑 부부가 되면 가족이 되는 거 아냐?”
“으응? 부부?”
“응. 부부. 둘이 사랑하는 사이잖아.”
“퓨이!”
나는 아이들에게서 튀어나온 예상치 못한 단어에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부, 부부라니. 지아 씨랑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보기에 따라서는 굉장히 궁색해 보이는 변명에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표정을 짓던 퓨이가 텐트 구석에 동화책을 하나 가져와 내게 펼쳐 보였다.
“퓨이! 퓨이!”
퓨이가 펼쳐 보인 동화책에는 왕자와 공주가 입맞춤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설마?! 너희들 깨어 있었어?”
소스라치게 놀라며 묻자 티아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응. 지아가 찾아온 새벽에 봤어.”
“…….”
“뽀뽀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라고 엄마가 그랬는데. 아니야?”
“퓨이?”
아이들은 순진한 눈을 빛내며 나를 압박해 왔다.
“그건 맞는데…….”
“그럼 지아랑 세진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데 뽀뽀한 거야?”
“아니. 그게.”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데 뽀뽀했다고 표현하니까 뭔가 굉장히 표현이 이상하게 들렸다.
아이들은 장난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정말 순수한 눈빛으로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자식에게
-아기는 어떻게 생겨요?
라는 질문을 받은 부모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대답해 줄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진짜 신지아와 나는 어떤 관계지?’
아주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신지아와 알게 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균열에 살게 된 이후로 퓨이나 티아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낸 사람.
아티팩트 경연대회를 기점으로 굉장히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느끼고 있었고.
이번 공방 화재 사건을 겪으며 더욱 관계가 돈독해진 것 같았다.
솔직히 그녀와 나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
그것이 단순히 공방에서 같이 일하는 관계의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깨달았다.
좀 더 어리고 패기 넘쳤던 시절의 격렬한 감정은 아니지만. 더 포근하고 안정적인 느낌에 가까운 감정.
나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관계에 대해 서로 조심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 만남의 시작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맺어진 계약 관계.
나는 그녀에게서 아티팩트에 대한 지식과 마석 거래가 필요했고.
그녀는 내 마석과 아티팩트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필요했다.
그렇게 처음에는 서로가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관계를 주고받았지만, 점점 느낌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나를 위한 거래였지만, 점점 상대를 위한 거래로 변해갔다.
계약서에 묶인 관계가 아니라 나와 신지아, 두 사람만의 관계로 깊게 묶이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그녀는 최고의 아티팩트 제작자가 되기 위해, 나는 그녀의 아티팩트 지식을 얻어 계속 문양의 힘을 키우기 위해.
그래서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용기를 내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아이들에게 설명하기 힘든 이런 애매한 관계일지라도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나아가는 방식을 선택한 것.
오랫동안 멍하게 생각에 빠져 있자, 티아와 퓨이가 이상하게 나를 쳐다봤다.
“세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퓨이?”
왠지 아이들의 표정이 귀엽게 느껴져 양손으로 둘 모두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지아 씨랑 나는 아직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야.”
“그러면?”
“하지만 나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어쩌면 나중에 티아가 생각하는 관계로 변할지도 모르고.”
“으으음.”
티아는 내 말이 어려운지 눈을 찡그리며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쓰는 듯했다.
“티아도. 조금 더 크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조금 더 커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볼을 불퉁하게 만들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봤다.
티아와 퓨이의 오해 아닌 오해로 나는 신지아의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녀가 새로운 환경에서 노력하는 것처럼, 나도 조금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지만, 한시라도 빠른 빚 청산이 제일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 같고…….’
나는 얼마 전까지 신지아와 함께 지냈던 텐트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솔직히 남녀가 함께 사용하기에는 너무 불편한 공간.
‘집도 더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네.’
그렇게 속으로 나만의 목표를 하나씩 세워나갔다.
* * *
“후모! 후모!!”
“진정해 모렛.”
“후모!!”
모렛은 부슬부슬한 털이 휘날릴 정도로 씩씩거리며 내게 화를 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녀석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녀석이 이렇게 화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일을 시켜주지 않았다는 것.
얼마 전에도 일거리를 주지 않아서 불만을 표했지만, 금방 일거리를 찾아주겠다고 달래며 넘어갔었다.
하지만 그 뒤로 공방 화재 사건이 터지며 굉장히 바빴고. 모렛에게 따로 일거리를 주기 힘든 상황이었다.
최근에는 균열 제거 일을 하며 마정석 광산을 찾지도 않았으니까 더더욱 일거리가 없었다.
이런 사정으로 불만이 쌓여 있던 모렛이 지금과 같이 격렬히 항의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모렛을 달래줘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후모. 후모.”
화를 내던 녀석이 내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며 어디론 가로 향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모렛을 따라갔다.
모렛은 온천이 연결된 균열 입구를 가리키며 뭔가를 내게 말하려 했다.
“후모!”
“온천에 들어가고 싶어?”
“후모.”
내 질문에 모렛은 고개를 저었다.
“온천을 하나 더 만들겠다고?”
“후모.”
“어…… 아니면 온천을 청소하겠다고?”
“후모!!”
내가 계속 말을 못 알아듣자 모렛이 다시 씩씩거리며 화를 내려 했다.
그때.
티아가 내 곁으로 날아와 말했다.
“아무래도 모렛은 새로운 공간이 필요한 것 같은데?”
“티아야. 그게 무슨 말이야?”
“온천 만들 때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냈던 것처럼 말이야.”
“흐음. 모렛. 티아가 한 말이 맞아?”
“후모!”
모렛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만족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나는 왜 모렛이 새로운 공간을 원하는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일단 내가 소유 중인 균열 중 하나를 온천 때와 마찬가지로 합병을 진행했다.
[현재 소유중인 ‘D등급 균열’을 ‘균열 : 집’에 합병하시겠습니까? (Y/N)]
내가 눈앞에 질문에 수락하자.
균열 중앙에 있던 균열핵에서 마력 파동이 퍼져 나왔다. 잔잔한 마력 파동이 끝나고 새로운 균열 입구가 생겨났다.
모렛은 입구가 열리자마자 휙 하고 입구로 뛰어들었다.
나와 티아도 뒤따라 균열 입구로 들어갔다.
“후모. 후모.”
모렛은 널찍한 공간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뭔가를 확인하는 듯했다.
“티아. 모렛이 지금 뭘 하는 걸까?”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한참 동안 주변을 둘러본 모렛이 다시 내게 뛰어왔다.
“후모!”
[‘모렛’이 ‘작업장 Lv.1’을 건설하려 합니다.]
[자원을 사용해 ‘작업장 Lv.1’을 건설하시겠습니까? (Y/N)]
“작업장?”
“후모!”
왜 새로운 균열 공간을 원했나 했더니, 작업장 건설이라는 일거리를 만들려 한 것 같았다.
‘흐음. 어떻게 한다?’
눈앞에 떠오른 알람을 확인하니 ‘작업장 Lv.1’을 공짜로 짓는 것은 아닌 듯했다.
정확히 자원이 얼마나 들어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고민이 되었다.
“후모…….”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모렛은 내가 허락을 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울음소리를 냈다.
“끄음.”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힘든 마정석 광산 일도 척척 해주었고, 얼마 전에 일거리를 찾아주겠다는 약속도 기억나서 살짝 미안한 감정이 생겨났다.
“알았어. 모렛.”
“후모?”
“작업장 한 번 지어봐.”
“후모! 후모!”
모렛은 정말 기쁜지 내 다리에 착 달라붙어 부슬부슬한 털을 문질러댔다.
굉장히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같이 웃어줬다.
“후모! 후모!”
내 다리에서 떨어진 모렛은 곧바로 털 안에서 삽을 꺼내더니 주변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힘차고 절제된 동작으로 거침없이 땅을 파내는 모습은 마치 살아 있는 굴착기나 다름없었다.
“모렛 조금 도와줄까?”
“후모.”
내 호의가 담긴 제안에 후모는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내보였다. 그리고 한 손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나만 믿어!
느낌의 자신만만한 제스처를 보였다.
털로 뒤덮인 작은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이 마치 장인에게서 엿보이는 느낌과 비슷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서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잘 부탁할게.”
“후모.”
모렛은 다시 땅파기 작업에 집중했다.
모렛의 작업은 쉼 없이 이어졌다.
식사도 거르고 ‘작업실 Lv.1’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애초에 모렛은 기계 일꾼이라 연료만 챙겨줘도 큰 문제는 없다. 식사할 수는 있지만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대신 연료인 맥주는 꼬박꼬박 챙겨줬다.
작업실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는 대부분 마석이 이용되었다.
정확히는 마석을 주면 모렛이 필요한 재료로 알아서 교환했다.
굉장히 신기한 능력처럼 보였는데, 티아에게 듣기로는 아주 기초적인 재료만 마석으로 교환하는 정도라고 한다.
낮은 레벨이 아닌 높은 레벨의 건축물에 들어가는 재료는 마석뿐만 아니라 더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고.
아무튼.
모렛은 온종일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모렛의 노력으로 작업실은 점점 완성된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
울려 퍼지는 휴대폰 벨소리.
화면을 확인해 보니 오연우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전화를 받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연우야.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겠어요. 당연히 너튜브 때문이죠.
살짝 가시가 돋친 오연우의 태도에 나는 최대한 미안한 기색을 담아 사과했다.
“미안하다. 근데 너도 알다시피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어.”
-저도 뉴스 봐서 알아요.
공방 화재 사건 때문에 너튜브에 잠시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뉴스에 날 정도로 굉장히 큰 사건이었으니 오연우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형. 그래도 일이 정리됐으면 먼저 연락해 줄 수 있잖아요. 기다리고 있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 주세요.
약간 서운한 기색을 담아 불평하는 오연우.
“진짜 미안하다. 내가 정신이 없었어.”
-중요한 일까지 방해하면서 너튜브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조금은 책임감을 느껴주세요.
“알았다. 다음에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내 진심 어린 사과에 오연우는 깔끔하게 남아 있던 불만을 털어버리고, 본격적으로 전화한 용건을 말해 주었다.
“광고가 들어왔다고?”
-네.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 광고에요.
오연우는 채널에 처음으로 들어온 광고 제의에 약간 흥분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