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69화
26. 어둠의 손길(3)
분노에 찬 내 목소리에 임진혁 경사가 물었다.
“생각 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네. 조성훈이라고. 사건 전날에 공방을 찾아와 둘러보고 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끊고 신지아를 바라봤다.
내 의도를 읽은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허락을 받고 그 동안 있었던 조성훈, 조윤학 부자와의 악연을 임진혁 경사와 최진철에게 말해줬다.
“선배님. 들어보니 범행동기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흐음.”
뭔가를 생각하던 임 경사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세진 씨가 말한 그 사람들이 이번 사건을 주도한 사람이 맞다고 해도, 지금 당장 그들을 잡아들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니. 범인을 알아도 못 잡는다는 말입니까?”
“일단 그 사람들이 범행에 참여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아마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녀석들을 통해 일을 꾸몄을 겁니다.”
“아…….”
“그리고 경찰 쪽에 이번 사건에 대한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겁니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으니 단순 사고라고 종결짓고 대충 넘어가려 할 겁니다.”
나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그럼 조성훈 쪽에서 경찰까지 매수했다는 겁니까?”
내 물음에 최진철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확히는 경찰에 압력을 넣을 만한 조직과 거래를 했을 겁니다.”
“조직?”
“모르시겠지만 이런 비슷한 사건이 꽤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최진철은 나에게 범죄 조직과 그들과 거래하는 자들에 대해 말해줬다.
범죄 조직과 거래를 통해 경쟁 업체를 제거하고, 그 대가로 이익의 일부를 상납한다.
범죄 조직은 이렇게 상납받은 돈으로 규모를 키워 경찰에 압박을 넣으며, 그 활동 영역을 점점 넓혀간다고 한다.
정말 영화에서나 볼법한 일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굉장히 지독하고 치밀한 놈들입니다. 아마 어설프게 증거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고, 설령 증거를 남겼다 해도 사건이 해결될 확률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절망적인 임 경사의 말에 나와 신지아는 고개를 떨궜다.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번쩍 들고 마지막 희망을 바라보듯, 임 경사를 바라봤다.
그는 강렬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놈들이 만들어 놓은 판 위에서 해결할 수 없다면, 새로운 판을 짜는 수밖에 없겠죠.”
“……?”
“이번에는 우리가 판을 짜는 겁니다.”
* * *
조성훈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범하게 대학교에 나왔다.
신지아에 대한 소식 때문에 그녀를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 아직도 시끌시끌했다.
그는 대충 그들의 장단을 맞춰주며 별로 관심 없는 듯 행동했다.
그들과의 거래를 통해 신지아의 아티팩트 공방을 불태운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이미 경찰 쪽에서도 단순 사고로 사건을 종결하는 듯했고, 조성훈 자신이나 아버지인 조윤학이 의심받을 만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 여유를 찾아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한 가지 조성훈의 마음에 걸리는 점은.
신지아의 아티팩트 공방에서 빼 온 연구 자료와 아티팩트에 대한 분석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연구를 습득해 조윤학 회사의 것으로 해야 했다.
그들과의 거래로 이미 많은 돈을 사용했기 때문에 반드시 큰 이익을 봐야 했다.
‘아직 시간은 많아.’
모든 연구 자료와 아티팩트, 시설까지 잃은 신지아가 다시 연구 자료를 모으고 새로운 아티팩트를 만들어 내려면 분명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
그때까지 연구 자료를 해석하고 완벽히 회사의 것을 만들면 신지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완벽히 없어진다.
“성훈 씨.”
“네.”
“교수님이 저번에 부탁하신 논문 자료 가지고 방으로 오라고 하셨어요.”
“그거 메일로 보내드렸는데.”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조성훈은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논문 자료를 뽑아 교수의 방으로 향했다.
-똑. 똑. 똑.
“교수님. 조성훈입니다. 부탁하신 자료 가지고 왔습니다.”
-오. 들어와.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연 조성훈은 방 안에 있던 뜻밖의 인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신지아…….”
신지아는 조성훈이 방 안에 들어온 것을 보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노트북과 서류들을 후다닥 정리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 저 그럼 가볼게요. 상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또 연락해라.”
서재필 교수에게 인사를 남긴 신지아는 조성훈은 본체만체하고 쌩하니 방을 나섰다.
조성훈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래. 자료 가지고 온 거지?”
“네. 교수님.”
교수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조성훈이 가져왔던 자료를 교수에게 건넸다.
서재필 교수가 자료를 훑어보는 도중에 조성훈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근데 교수님.”
“왜 그러느냐?”
“지아는 여기 왜 찾아온 겁니까?”
“흠.”
잠시 서류에서 눈을 뗀 교수가 조성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근에 지아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너도 알고 있지?”
“네. 저도 들었습니다.”
“한동안 연구실의 혜은이 집에 있다가. 지금은 잠시 호텔에서 지낸다는구나.”
“…….”
“상황이 어렵지만, 그래도 특허 신청을 서두르는 모양이야. 다행히 연구 자료가 남아 있어서…….”
“연구 자료가 남았다고요?”
조성훈이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렇게 놀라느냐?”
“아뇨. 공방이 심하게 불타서 아무것도 못 가지고 나왔다고 들었는데.”
“공방에서 일하던 직원이 연구에 사용하던 다른 노트북을 가지고 있었다는구나.”
“…….”
“아무튼, 그래서 특허에 관련해서 조언도 좀 해주고, 아는 사람도 소개해 줬다.”
“그렇군요.”
대화가 끝나고 교수는 다시 자료에 눈을 돌렸고, 조성훈은 뭔가 안절부절못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 교수님. 저 급한 일이 생각나서,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어어. 그래. 자료 잘 받았다. 나가서 일 봐.”
“죄송합니다. 그럼.”
조성훈이 황급히 방을 나가고, 서류에 눈을 떼지 않던 교수는 그런 조성훈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황급히 방을 나온 조성훈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해, 곧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성훈입니다.”
그리고.
방금 교수의 방 안에서 봤던 것과 나눴던 이야기를 전부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 * *
그날 밤.
신지아는 인적이 드문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노트북이 들어 있는 가방을 옆으로 메고 걷고 있는 그녀의 뒤로 누군가 따라붙었다.
크지 않은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남자는 신지아와 거리를 유치한 채 계속 그녀를 따라 걸었다.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던 그녀 옆으로 뒤따르던 남자가 가깝게 붙었다.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고, 신지아가 건널목을 건너려는 순간.
-휙!
“꺄악!”
뒤따르던 남자가 그녀의 가방을 강하게 낚아챘다.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쓰러지고, 가방을 든 남자는 순식간에 멀리 달아났다.
건널목 앞에 주저앉은 신지아가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리에는 그녀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잠시 후.
나는 쓰러진 그녀에게 뛰어갔다.
“지아 씨, 괜찮아요? 다친 거 아니에요?
“네. 괜찮아요. 그냥 쓰러진 것뿐이에요.”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신지아는 조금 전 소매치기 당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속아 넘어갔겠죠?”
“물론이죠. 지아 씨. 연기 잘하시던데요.”
“신고는?”
“벌써 해놨죠. 곧 도착할 거예요.”
* * *
신지아의 가방을 뺏어 든 남자는 아무도 뒤쫓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잠시 숨을 돌렸다.
“멍청한 년.”
야심한 밤에, 그것도 인적 없는 곳으로 다니던 목표물 덕분에 정말 쉽게 일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의뢰의 대가로 받을 보수를 생각하며 여유롭게 웃고 있던 남자의 뒤로 갑자기 경찰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잉위잉위잉!
경찰차는 짧은 사이렌 소리를 반복하며 남자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말도 안 돼!”
남자는 분명 추격이 어렵게 도망 경로를 이리저리 뒤틀었는데, 어떻게 경찰이 추격해 왔는지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경찰차는 빠르게 남자를 향해 다가왔고 그는 다시 전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앞에 보이는 저 남자 맞죠?”
“네. 맞아요.”
경찰차를 운전하던 임 경사의 질문에 뒷좌석에 타고 있던 신지아가 대답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화면을 가진 기계가 들려 있었고, 화면에는 경찰차를 피해 뛰고 있는 남자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리 빨리 뛰어도 뒤따라 오는 경찰차를 뿌리칠 수 없었다.
경찰차가 남자를 거의 다 뒤따라 잡으려 할 때.
“쳇! 어쩔 수 없지.”
-파앗!!
남자는 인간이 낼 수 없는 속력으로 경찰차보다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거의 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인 남자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벗어나 버렸다.
임 경사는 계속 운전을 하면서 옆좌석에 타고 있던 이신우 경장에게 말했다.
“신우야. 지금 당장 상황 보고하고, 각정자 진압반 지원 요청해라.”
“네? 진압반까지 부른다고요? 그냥 소매치기인데.”
이신우가 깜짝 놀라고 말했지만, 임 경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시 한번 말했다.
“매뉴얼대로 행동하는 거다. 지금 당장 상황 보고하고, 지원 요청해라.”
임 경사의 완고한 태도에 이신우는 어쩔 수 없이 경찰차의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이신우는 상황을 자세히 알리고, 범인의 도주 경로와 위치를 알리며 진압반의 지원을 요청했다.
도망친 남자가 시야에서는 벗어났지만, 기계의 추적까지는 벗어날 수 없었고.
남자의 움직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멈췄어요!”
화면에 표시된 남자의 위치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신우야. 다시 범인의 위치 보고해. 꽉 잡으세요. 속도를 조금만 올리겠습니다.”
임 경사가 운전하는 경찰차는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경찰차는 기계가 표시하는 위치에 도착했다.
도착한 곳은 성진 공업이라 적혀 있는 입구였다.
바로 조성훈의 아버지 조윤학이 운영하는 회사였다.
차량에서 내리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 2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임 경사는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현행범이 이곳으로 도망친 것 같습니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볼 수 있겠습니까?”
“현행범이요?”
“네. 크지 않은 키에, 호리호리한 남성입니다.”
설명을 들은 두 경비원은 잠시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우리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런 사람 못 봤습니다. 다른 곳을 찾아보시죠.”
“분명 이곳으로 향했습니다. 잠시만 둘러볼 수 있게 해주시죠.”
“들여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오시던가, 아니면 수색영장이라도 가지고 오시죠.”
완강하게 막아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임 경사가 눈을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