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68화
26. 어둠의 손길(2)
그날 사건에 대해 신지아에게 전해 듣고 지금이라도 당장 경찰을 찾아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녀는 사건이 일어났던 날 출동했던 경찰과 소방관에게 있었던 일을 자세히 진술했다고 대답했다.
“화재 원인이 확정되면 다시 연락해 준다고 했어요.”
“으음.”
일단 나는 격해진 감정을 가라앉혔다.
만약 신지아가 새벽에 들었던 침입자의 소리가 진짜고, 화재가 일어난 이유가 단순 사고가 아니라면.
경찰이든 소방서든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해 줄 거로 생각했다.
나는 자책하는 신지아를 위로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일을 저지른 녀석들에게 꼭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고.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번 사건은 점점 어렵게 변해갔다.
* * *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사해 본 결과 딱히 방화의 흔적이라던가, 침입자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지아 씨 이야기 못 들었습니까? 분명 누군가 공방 안으로 들어온 소리를 들었다니까요.”
“신지아 씨의 진술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잠에서 막 깨어난 시점이었고. 잘 못 들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아.”
눈앞의 형사는 이미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나와 신지아를 되려 설득하려 했다.
“정말 제대로 조사해 보신 것 맞습니까?”
“불의의 사고로 힘드신 건 잘 알겠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시면 곤란합니다.”
“억지가 아니라…….”
“세진 씨. 그만 해요.”
내가 목소리를 높이려 하자 옆에 있던 신지아가 나를 붙잡으며 말렸다.
“아직 사건이 종결된 건 아니니 조금 더 조사해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죠.”
형사는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우리를 돌려보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경찰서를 나오게 되자 허탈했다. 분명 미심쩍은 상황이 한둘이 아닌 데, 형사의 태도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마치 범인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았다.
화재가 일어나고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범인에 대한 실마리는커녕, 제대로 된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인상을 구기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신지아가 말을 꺼냈다.
“세진 씨. 저 잠시 만나볼 사람이 있어서요.”
“……?”
내가 궁금한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미래 그룹 쪽에서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요.”
“아. 네.”
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미래 그룹 쪽 사람과 만나는 일이면 따라갔다가 민폐를 끼칠 것 같았다.
“데려다줄게요.”
“아뇨. 여기서 별로 안 멀어요. 세진 씨는 먼저 집에 돌아가 계세요.”
괜찮다며 내 제안을 거절한 신지아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환하게 웃어주고 먼저 떠나갔다.
멀어져가는 신지아를 멀거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방금 빠져나온 경찰서를 응시했다.
‘믿고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돼. 직접 움직여야겠어.’
“하아…….”
신지아와 헤어진 이후.
나는 각성자 관리본부, 각성자 협회, 오성 길드의 한창호, 정대훈 아저씨까지.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지금 상황에 도움을 얻을 수 없을지 물어보았다.
한창호와 정대훈 아저씨는 자신들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안타까워했고.
관리본부와 협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동호 팀장은 난감함을 표하며 내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저도 도움을 드리고 싶지만. 이미 경찰이 나섰다면 저희도 사건에 관여하기 굉장히 곤란합니다. 그게…….”
그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춰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각성자 관련 사건이면 저희가 끼어들 여지가 있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는 나서기 힘듭니다. 일종에 불문율이라.”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세진 씨.”
상황은 협회도 마찬가지였다.
경찰 쪽 수사에 직접 관여할 권한은 당연히 없을뿐더러, 그들 역시 불문율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라고.
오히려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겠다며 제안을 해왔지만, 일단 제안은 물러두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리저리 연락을 돌려봤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답답한 상황에 한숨만 계속 나올 뿐이었다.
나는 휴대폰 연락처 목록을 바라보며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한 연락처를 눌러 통화를 연결했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들려왔다.
-세진 씨?
“오랜만입니다. 임 경사님. 잘 계셨어요.”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세진 씨도 잘 지내시죠?
오랜만에 하는 연락이지만 임진혁 경사는 반갑게 내 전화를 받아주었다.
잠시 이런저런 안부 인사를 나누고.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
임 경사 쪽에서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게 말이죠…….”
나는 임 경사에게 신지아의 공방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소극적인 형사의 태도에 대해서도.
조용히 내 이야기를 전부 들은 임 경사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초조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전화로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오늘 야간 근무 전까지 시간이 남는데 잠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네. 가능합니다.”
만날 약속 장소를 잡고, 통화는 종료됐다.
나는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임 경사가 말한 약속 장소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 *
한산한 카페 안.
나와 임 경사는 간단한 마실 거리를 앞에 두고 마주 보며 앉았다.
“죄송합니다, 임 경사님. 갑자기 이런 부탁을 드려서.”
“아닙니다. 저도 세진 씨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임 경사는 예전 일을 언급하며 괜찮다고 말했다.
“상황은 대충 들어서 알겠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상황에 관해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얼마든지요.”
그는 불타버린 공방과 신지아에 대해 꽤 상세하게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본인이 아니다 보니 모든 질문에 정확히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그녀에게 들었던 일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임 경사는 질문과 대답을 수첩에 계속 정리했고, 어느 정도 질문이 끝나자 집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름한 공방이지만, 최근에 큰 성과가 있었고.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여성 한 명.”
그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사를 소극적으로 할 이유가 전혀 없군요. 증거는 없다고 해도 정황상 계획적인 범죄일 확률이 너무 높습니다.”
처음으로 내 마음을 제대로 대변해 주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죠? 사건을 맡은 그 형사가 잘못 알고 있는 거죠?”
“아뇨. 잘 못 알고 있는 게 아닐 겁니다.”
“……?”
임 경사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아마 모른 척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임 경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물었다.
“전화 한 통만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그럼.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내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조금 전 임 경사의 말과 지금까지의 상황을 생각하며 나름대로 정리하려 했다.
잠시 후.
통화를 끝낸 임 경사가 다시 카페 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내게 말했다.
“세진 씨. 가능하면 내일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내일이요?”
“네. 그리고 이번에는 신지아라는 분도 함께 만났으면 좋겠군요.”
“아……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스러웠지만, 임진혁 경사와 내일 다시 만날 약속을 잡았다.
헤어지기 전.
그는 나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가능하면 당분간 그 형사와는 연락을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를 끝으로 나와 임 경사는 카페 앞에서 헤어졌다.
* * *
다음날.
임진혁 경사와 약속한 대로 나와 신지아는 그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다.
우리가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혁 경사가 도착했다.
“저번에 한 번 뵀었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임진혁 경사입니다.”
“아티팩트 박람회장에서 뵌 분 맞죠? 기억하고 있어요.”
신지아와 임 경사가 잠시 인사를 나누는 사이. 승용차 한 대가 우리 곁으로 다가와 멈춰 섰다.
멈춰선 승용차의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외쳤다.
“진혁 선배!”
“딱 맞춰 도착했네. 그럼 가시죠.”
“네?”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해드리겠습니다. 일단 차에 타시죠.”
임 경사는 막무가내로 우리를 승용차에 태웠다. 차에 올라타자 운전석에 있던 사람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임진혁 경사도 꽤 큰 덩치와 위압감을 자랑했지만, 운전석에 앉아 있던 사람도 그에 못지않은 풍채를 가진 남성이었다.
“반갑습니다. 최진철이라고 합니다.”
“전세진입니다.”
“신지아에요.”
덩치에 약간 어울리지 않는 발랄하고 쾌활한 첫인사에 나와 신지아는 얼떨결에 같이 인사했다.
“진철아. 일단 출발하자.”
“알겠습니다. 선배님.”
임 경사에 지시에 따라 차량은 곧바로 출발했다.
나는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몰라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임 경사님. 우리 어디로 가는 겁니까?”
“사건 현장으로 가볼 겁니다. 현장도 둘러보고 지아 씨에게 조금 더 사건이 있었던 당일에 대해 들어보려고 합니다.”
임 경사의 대답에 나와 신지아는 조금 안심이 된 표정을 지었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우리 진혁 선배님이 직접 나섰으면 무슨 사건이든 바로 해결됩니다. 예전에…….”
“진철아.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조용히 가자.”
“넵. 선배님.”
뭔가를 이야기하려던 최진철은 임 경사의 압박에 찍소리도 못하고 조용히 운전대에 집중했다.
우리를 태운 차량이 공방 근처에 도착하고.
차량에서 내린 임 경사가 사건 현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는 신지아를 대동해 궁금한 점이나, 그날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물어봤다.
임 경사가 현장을 둘러보는 사이.
나와 최진철은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약간 어색한 분위기에 나는 최진철에게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저. 임 경사님과는 어떤 사이세요?”
“진혁 선배랑 저요? 친한 선후배죠. 지금은 선배가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선후배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무슨 일 하시는데요?”
“아! 모르셨습니까? 저는 지금 강력계 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선배와 같은 팀 선후배였죠.”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쩝. 말하면 안 됐던 건가? 뭐. 선배랑 인연이 좀 있으신 것 같아 말씀드린 겁니다.”
“그런데 임 경사님은 왜 형사를 그만두신 거죠?”
“그게. 이야기가 좀 복잡한데…….”
뭔가 더 숨겨진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진철아!”
“네. 선배님. 가봐야겠습니다.”
“…….”
최진철은 임 경사의 부름에 바로 뛰어가 버렸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를 뒤따랐다.
임 경사는 달려온 최진철에게 말했다.
“진철아. 일단 조사는 다 끝냈다. 그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모두 조금만 제 곁에서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물러나 달라는 그의 말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모두 그의 곁에서 물러났다.
최진철은 타버린 잔해에 손을 올리더니 눈을 감고 집중하는 듯 인상을 썼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고, 마지막에는 고통스러운 표정과 함께 눈을 번쩍 떴다.
“헉. 허억. 허억.”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불규칙적으로 몰아쉬었다.
“진철아.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선배님.”
나와 신지아는 어떤 상황인지 영문을 몰라 멀뚱히 그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숨을 고른 최진철이 안정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후우. 죄송합니다. 조금 무리를 해서.”
“아뇨. 근데 방금 무슨 일을 하신 거죠?”
“방금은 저의 각성 능력을 사용한 겁니다. 제 능력은 특정한 조건의 현장 기억을 읽는 능력이거든요.”
나는 놀라며 외쳤다.
“사이코 메트리(Psychometry)?”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저는 누군가 각성 능력을 사용한 현장의 기억만 부분적으로 읽을 수 있거든요.”
최진철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계속 말했다.
“조금 전 제 능력으로 화재가 일어난 공방의 기억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결과.”
“……?”
“아마도 누군가 여기에서 능력을 사용해 화재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것도 꽤 강력한 능력으로 순식간에 공방 전체를 불태워버렸습니다.”
그의 말에 나머지 모든 사람이 눈을 빛냈다.
“그렇다는 건?”
“예. 단순 화재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범행이라는 뜻이죠.”
“아…….”
계획적인 범행이라는 말에 신지아는 안타까운 감정이 느껴지는 힘없는 소리를 냈다.
반면 나는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이제 증거를 찾은 거 아닙니까? 당장 이 증거를 가지고 범인을 찾아야지요.”
임 경사와 최진철은 내 말에 회의적인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그건 힘들 겁니다.”
“예?”
“진철이의 능력은 아주 짧은 순간만 읽는 수준이라 증거로 사용하기도 힘들뿐더러 용의자를 지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임 경사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나와 신지아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거기다 지금 저와 진철이가 하는 행동은 공식적으로 사건을 받아 진행하는 수사가 아닙니다. 괜히 이 사실을 알렸다가는 오히려 다른 문제만 생기는 꼴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소리쳤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임 경사는 내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신지아에게 돌리고 말했다.
“지금까지 정보를 종합해 본 결과. 범인은 계획적으로 이곳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목표한 물건들을 훔치고 불을 지르는 데까지 매우 짧은 시간이 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
“범인은 아마 지아 씨를 죽이려는 목적은 아니었을 겁니다. 오히려 살리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각성자의 능력을 사용해 빠르게 공방을 불태웠음에도, 지아 씨는 큰 부상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겠죠.”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신지아에게 물었다.
“범인은 신지아 씨가 아는 사람, 거기에 이 공방에 대해서 구조나 물건의 위치까지 알고 있는 사람일 겁니다. 혹시 짐작이 가는 사람 있습니까?”
임 경사의 물음에 신지아는 고개를 숙이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순간적으로 사건이 있었던 새벽 전날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와보니 옛날 생각도 나고 좋네. 여긴 하나도 안 변했어.
갑자기 방문해 공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 녀석.
“조성훈…… 이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