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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67화 (67/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67화

26. 어둠의 손길(1)

“으음…….”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텐트 밖에서 아이들의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렛이 보였고, 그 옆에 가지런히 정리된 이불이 보였다.

어제 신지아가 덮었던 이불.

나는 어젯밤의 일을 기억해 내고 벌떡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텐트 입구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세진. 잘 잤어?”

“퓨이!”

“일어나셨어요? 세진 씨.”

신지아와 아이들은 핀테일의 티타임 세트를 가운데 두고, 사이좋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풍경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뭐랄까?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보기만 해도 굉장히 기분 좋은 풍경이었다.

“너무 곤히 주무시는 것 같아서 일부러 안 깨웠어요.”

“아.”

새벽녘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느라 밤잠을 설쳤던 사실을 기억해 내고,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지아. 이것도 먹어봐.”

“고마워. 티아야.”

“퓨이!”

“알았어. 퓨이도 고마워.”

신지아와 아이들은 어느새 굉장히 친해져 있었다. 처음 외부인을 만났을 때 경계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자연스럽게 신지아가 내게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건네줬다.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살짝 시큼하면서 달곰한 차 맛이 느껴졌다. 뜨끈한 기운이 몸 안에 돌자 아직 잠들어 있던 온몸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내가 여유롭게 차 맛을 즐기고 있을 때, 아이들과 신지아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계속 웃음꽃을 피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왠지 모르게 끼어들기 힘든 분위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찾았다.

“응?”

평소에 놔두던 장소에 휴대폰이 보이지 않자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죄송해요. 세진 씨. 여기 휴대폰이요.”

내가 휴대폰을 찾는 모습을 보고 신지아는 옆에 있던 휴대폰을 내게 건넸다.

“아침에 언니한테서 전화가 와서 제가 받았어요. 사용하고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걸 깜빡했었네요.”

“아뇨. 괜찮아요. 오히려 잘하셨어요. 그분도 많이 걱정하셨을 텐데.”

헤어지기 직전에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더니, 아침에 먼저 연락을 해온 모양이다.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잠시 시간을 보내고.

신지아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꺼냈다.

“저. 세진 씨.”

“네?”

“옷이랑 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할 것 같은데. 같이 가주실래요?”

“물론이죠. 지금 당장 준비할게요.”

나와 신지아는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 * *

신지아는 새로 사야 할 물건이 정말 많았다.

휴대폰도 없었고, 지갑도 화재에 없어져 버렸다.

보통 화재 때문에 피난하더라도 지갑이나 휴대폰을 챙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녀는 달랐다.

불이 났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노트북과 연구 자료, 완성된 시제품을 챙기려 했고.

그 덕분에 기본적인 물건을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튼, 밖으로 나온 나와 신지아는 먼저 휴대폰을 새로 구매했다. 휴대폰은 빠르게 당일 개통이 되었다.

다음은 옷.

그녀는 일단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 위주로 몇 벌을 구매했다.

그리고 속옷도 필요했기 때문에 속옷가게도 방문했다. 나는 차마 같이 들어가지는 못하고 근처에서 어색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속옷가게 앞에서 신지아를 기다리는 기분은 굉장히 기묘했다.

그 외에도 여자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했다.

휴대폰, 옷, 물건들은 일단 내가 전부 결제했다. 지갑도 없어진 터라 그녀에게는 결제할 방법이 없었다.

미안해하는 그녀에게 나는 일부러 결제 영수증들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중에 다 받아낼 거니까. 미안해하지 마세요.”

반쯤 장난이 섞인 내 말에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물건을 모두 사고 나니 시간이 꽤 흘러가 있었다.

우리는 텐트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과 함께 먹을 저녁을 위해 재료를 준비했다.

저녁 메뉴는 돼지고기 삼겹살과 목살.

고기를 넉넉하게 구입하고, 쌈과 각종 반찬 재료들도 구입했다.

돌아가는 길에 티아가 좋아하는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도 디저트로 준비했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곧바로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고기 구울 준비는 내가, 쌈과 반찬 준비는 신지아가. 그 옆에서 아이들은 벌써부터 눈을 빛내며 맛있는 식사를 기다렸다.

-지글지글.

균열 안에는 고기 굽는 냄새가 퍼져나갔고, 기다리는 아이들의 입에서는 침이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적당히 잘 구워진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 아이들에게 가져다주었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

“잘 먹을게.”

“퓨이!”

“후모!”

이 귀여운 먹보들은 접시 위에 올려진 고기들을 순식간에 해치워나갔다.

“애들아. 천천히 먹어.”

내가 다시 고기를 굽는 사이 신지아는 아이들을 챙겨줬다.

불판에 고기가 사라지길 몇 번을 반복하고 나자, 아이들은 배가 부른지 슬슬 고기를 먹는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진. 이제 배불러.”

“더 안 먹어? 아직 고기 많은데.”

“응. 이제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

티아는 아직 아이스크림 먹을 배는 남겨놨는지 눈을 깜찍하게 뜨며 내게 말했다.

나는 허허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냉장고에 있으니까 퓨이랑 모렛이랑 같이 나눠 먹어.”

“헤헤. 알겠어.”

티아는 퓨이와 모렛을 이끌고 쪼르르 냉장고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는 나와 신지아의 입가에는 훈훈한 미소가 걸렸다.

“애들이 참 귀엽네요. 말도 잘 듣고.”

“그렇죠?”

“이제 제가 고기 구울게요. 세진 씨는 하나도 못 먹었잖아요.”

“괜찮은데.”

“얼른 주세요.”

그녀는 나에게서 집게를 강제로 뺏어가더니 나를 위해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요즘은 항상 애들을 먼저 챙기느라 스스로를 챙길 시간이 없었는데.

누군가 나를 챙겨주려 하는 모습을 보자 소소하게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이 떠나간 식사 자리에서 나와 신지아는 조용하게 식사를 이어나갔다.

어제 새벽에 있었던 참담한 일이 거짓말인 것처럼,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신지아와 함께 뒷정리했다.

손님인 그녀에게 쉬고 있으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엄청난 고집을 부리며 함께 뒷정리를 끝냈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카드놀이를 했다. 아주 간단한 게임인 ‘원 카드’라는 게임이었다.

재미있게 놀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나는 잠자리를 펴고 아이들을 먼저 재웠다.

균열 안에는 다시 나와 신지아만 남게 되었다.

“맥주 한잔하실래요?”

“좋아요.”

나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2캔을 꺼내 하나를 신지아에게 건넸다.

텐트 앞 의자에 둘이 나란히 앉아 맥주캔을 땄다. 캔을 부딪치며 가볍게 건배를 하고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맥주의 시원하고 톡 쏘는 느낌이 입안 가득 느껴졌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맥주에 집중했다. 어색하거나 거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곁에서 맥주만 마시고 있을 뿐인데도 충족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맥주캔을 반쯤 넘게 비웠을 때, 그녀가 먼저 나에게 말을 꺼냈다.

“저 아이들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거예요?”

“아이들이요? 이야기하자면 정말 긴 이야기죠.”

“듣고 싶어요.”

아까 깜찍하게 눈을 빛내던 티아가 생각날 정도로, 신지아는 기대감 넘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퓨이를 만났던 이야기, 티아를 만났던 이야기, 마지막으로 모렛을 만났던 이야기까지.

지루할 것 같은 이야기를 그녀는 끝까지 눈을 빛내며 들어주었다.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에 우리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새로 1캔씩 더 가져왔다.

나의 긴 이야기가 끝나고.

그녀는 내 이야기가 꽤 만족스러웠는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내 이야기를 끝으로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두 번째 캔맥주도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녀는 사뭇 심각해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세진 씨.”

“네?”

“어제 새벽에 있었던 일.”

“…….”

“사실 세진 씨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그녀의 얼굴에서 망설임과 괴로움이 느껴졌다.

“이걸 말하면 왠지 세진 씨에게 정말 폐를 끼칠 것 같았거든요.”

“도대체 지아 씨. 그게 뭔데요?”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재촉하듯 되물었다. 내 재촉에도 그녀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몸을 그녀 쪽으로 가까이하고, 그녀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그녀가 끝내 입을 열었다.

“제가 그날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어요.”

“…….”

“저는 새벽에 누군가 공방을 뒤지는 인기척에 일어났었어요. 제가 일어나 작업실 쪽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 공방은 순식간에 화염으로 뒤덮였어요.”

그날의 상황을 들은 나는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화재가 커지기 전에 노트북과 연구하던 아티팩트를 챙기려 했지만, 그것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어요. 혹시나 해서 마지막까지 작업실을 뒤졌지만 하나도 찾지 못했어요.”

“…….”

나는 들고 있는 맥주캔이 구겨질 정도로 꽉 쥐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단순한 사고인 줄 알았는데.

도대체 누가?!

“미안해요. 세진 씨. 저 때문에…….”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책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야만 했다.

* * *

“허허…….”

혜움 공방과 신지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강유환 회장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좀 더 신경 쓰지 못한 탓에.”

“아니야. 이게 어째서 최 실장 탓이겠나.”

최인환 비서실장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자 강유환 회장이 손을 내저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강유환 회장은 경연대회에 우승했던 신지아와 혜윰 공방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최근에 엄청난 아티팩트를 내놓으면서 남몰래 응원하고 있던 그의 마음을 뿌듯하게 해주었는데.

갑자기 이런 날벼락 같은 일이 생기다니.

단순히 기계 설비뿐이라면 얼마든지 지원해 줄 수 있지만, 그간 모아왔던 자료와 결과물들까지 전부 없어져 버렸다고 하니.

강유환 회장의 속도 같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쿨럭. 쿨럭.”

그가 고통스럽게 기침을 내뱉자 곁을 지키고 있던 이혜린이 신속하게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넸다.

겨우 기침을 진정시킨 강유환 회장에게 이혜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 그런데 아무래도 이 화재. 이상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주변 목격자들의 증언과 현장 상황을 확인해 봤을 때, 단순 사고라고 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강유환 회장의 눈이 깊어졌다.

“그리고 신지아 씨가 연구결과를 하나도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걸립니다.”

“누군가 개입했다는 말씀입니까?”

최인한 비서실장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아직 추측일 뿐입니다.”

“…….”

“…….”

강유환 회장과 최인환 비서실장의 표정에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침묵하던 강유환 회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놈들이 개입됐을 가능성은?”

“아직 무엇도 확신할 수 없지만. 지난번 아티팩트 경연대회 때부터 계속 이상한 낌새가 보였습니다.”

회장은 표정을 구기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미친놈들. 도대체 어디까지 이런 행패를 부릴 생각인 거냐.”

그는 대기업 회장이라는 자리에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 상황이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혜린아.”

“네. 회장님.”

“네가 잠시 나서줘야겠다.”

“…….”

이혜린은 회장의 부탁에 가까운 명령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안다. 지금 네가 나서면 모든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아이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구나.”

절절한 감정이 담겨 있는 그의 말에 이혜린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회장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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