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66화
25. 불청객(3)
“지아야.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네. 괜찮아요. 언니.”
차를 타고 나타난 대학원 언니라는 사람은 신지아를 샅샅이 살펴보며 안위를 살폈다.
방금까지 펑펑 눈물을 쏟아낸 탓에 눈 주위는 엉망이었고, 대학원 언니는 그런 신지아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몸 다친 곳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응.”
대학원 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신지아를 꼬옥 껴안았다. 신지아도 그녀의 품 안에서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서로를 껴안던 두 여자가 다시 떨어지고.
대학원 언니라는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향했다. 눈빛에서 살짝 경계심이 엿보였다.
“그런데. 이분은……?”
신지아가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내가 먼저 나서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지아 씨와 같이 공방에 일하는 전세진이라고 합니다.”
“혹시. 경연대회 시연자로 나오셨던?”
“네. 맞습니다.”
“아아.”
그녀는 그제야 경계심을 풀고 친근한 미소로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여기 지아랑 대학원 시절에 같이 일했던 장혜은이라고 해요. 새벽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별말씀을요. 당연히 와봐야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짧은 인사를 끝으로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장혜은은 곧바로 신지아를 챙기며 이곳을 떠날 준비를 했다.
“어서 가자 지아야. 따로 챙길 건 없지?”
물음에 신지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장혜은은 신지아의 어깨를 감싸며 주차된 차 쪽으로 이끌었다.
“세진 씨라고 하셨죠. 시간이 늦어서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따로 지아가 연락할 거예요.”
“…….”
“…….”
나만 남겨두고 떠나려는 장혜은의 행동에 나와 신지아는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서 아쉬운 감정이 느껴졌다.
장혜은의 재촉에 신지아가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타려 할 때, 나는 다급히 외쳤다.
“잠시만요.”
차에 올라타던 두 사람이 멈춰서 나를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
“지아 씨. 제가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내 말에 장혜은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경계심이 가득해진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장혜은의 행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지아에게 다시 말했다.
“지아 씨. 저랑 같이 가요.”
“…….”
신지아는 내 말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장혜은은 목소리를 높이며 내게 따지듯 말했다.
“아니. 힘든 애한테 무슨 수작을 부리시는 거예요.”
“수작이 아닙니다. 지아 씨를 돕고 싶을 뿐입니다.”
“더는 듣고 있을 필요도 없네요. 저희는 가볼 테니까. 당신은 알아서 하세요.”
“…….”
장혜은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휙 돌리고 다시 신지아를 차에 태우기 위해 다가갔다.
“가자. 지아야.”
“언니…….”
“…….”
“미안해. 언니.”
차에 올라타지 않고 버티는 신지아의 모습에 장혜은은 놀람과 당황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너. 정말이야?”
-끄덕끄덕.
“저 남자랑 가겠다고?”
-……끄덕끄덕.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신지아.
그녀의 모습에 장혜은은 허탈한 표정을 잠시 짓더니, 돌연 나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경계심을 넘어서 적의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나는 장혜은의 살기 넘치는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지아의 팔을 붙잡아 내 쪽으로 끌어왔다.
작은 저항도 없이 나란히 내 옆에 서는 신지아의 모습에 장혜은은 결국 체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장혜은은 내 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번호 줘봐요.”
“네?”
“당신 휴대폰 번호요!”
“아. 네.”
그녀는 내 휴대폰 번호를 자신의 휴대폰에 입력하고.
“신분증 꺼내 봐요.”
“언니!”
“넌 가만히 있어. 이 나쁜 지지배야. 빨리 신분증 꺼내 봐요.”
나는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고, 장혜은은 내 얼굴과 함께 신분증을 사진으로 남겼다.
“당신! 내일 점심까지 나한테 연락 안 오면 경찰에 바로 신고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려.”
정헤은은 자신의 차 뒤쪽 좌석에서 종이 가방을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옷가지랑 필요한 거 급하게 챙겨왔어. 이건 꼭 필요한 것만 챙겨온 거야. 나머지는 알아서 챙겨줘.”
“꼭 챙겨주겠습니다.”
그녀는 영 미덥지 않은 눈치였지만,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고 신지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나쁜 지지배.”
“미안해. 언니.”
“너. 노처녀 속 뒤집히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
“그런 거 아냐.”
“아니긴 뭘 아냐. 나쁜 년.”
장혜은은 입에서 쏟아지는 험한 말과는 다르게 신지아를 다시 소중하게 껴안았다.
“불편하면 언제든지 언니 집으로 와. 계속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알았지?”
“응. 고마워 언니.”
따뜻한 그녀의 말에 신지아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껴안은 두 사람이 떨어질 때까지 나는 조용히 곁을 지키고 있었다.
* * *
장혜은은 나와 신지아를 차로 태워 주겠다고 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쉬워하는 장혜은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와 신지아는 골목 구석으로 향했다.
“세진 씨?”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는 내 모습에 신지아는 살짝 불안한 듯 나를 불렀다.
“지아 씨. 놀라지 마세요.”
“……?”
나는 골목 구석에 균열로 향하는 입구를 열었다. 갑자기 생겨난 균열 입구에 그녀는 내 경고에도 감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들어갈까요?”
내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결심한 표정을 짓더니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미소 지으면서 그녀와 함께 균열 입구를 통과했다.
“여긴?!”
균열 내부에 들어온 신지아는 짧게 감탄했다.
“세진 씨. 여기가 균열인 거예요?”
“네. 이게 제 능력이거든요.”
처음 균열에 들어와 본 듯,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녀를 이끌고 텐트로 향했다.
텐트 앞에서 나는 손가락을 입 앞에 들어 보이며 조금 조용히 해달라는 몸짓을 취했다.
“안에 아이들이 자고 있거든요.”
“아이들?”
아이들이란 이야기에 신지아는 기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설명하기보다는 빠르고 조용하게 텐트 입구를 열어 보여줬다.
텐트 안에서는 퓨이와 티아, 모렛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머!”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에 그녀는 입을 가리고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번에는 그녀를 이끌고 또 다른 균열 입구로 연결된 온천으로 향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온천을 본 신지아는 놀라움을 넘어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진 씨. 이건 도대체…….”
“설명은 나중에 해줄게요. 일단 편안하게 씻으세요. 저는 나가 있을 테니까.”
나는 장혜은이 건네줬던 종이 가방과 사용할 수건을 그녀에게 건네주고 온천을 빠져나왔다.
혼자 텐트로 돌아와 신지아가 돌아오기 전에 텐트 내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정리를 하던 도중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으아! 내가 왜 그런 거지?’
신지아를 데려왔다는 사실이 갑자기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장혜은과 떠나려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뭔가 참을 수가 없었다. 뒤는 생각하지 않고 내질러 버렸다.
그런데 그녀는 순순히 나를 따라와 줬다.
솔직히 기뻤다.
신지아가 나를 믿어주고 의지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 기뻤다.
하지만 감정이 가라앉고 텐트에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상황파악이 되었다.
자신만만하게 데려왔지만, 번듯한 집이 아니라 텐트 생활이고.
아이들이 있긴 하지만 외간 남자와 한 텐트 안에서 지내야 하는 상황.
생각해 보니 그녀에게 너무나도 불편한 환경이었다.
무작정 감정이 앞서 그녀를 데려왔지만, 오히려 그녀에게 불편함을 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내가 이런저런 걱정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텐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진 씨? 저 들어갈게요.”
신지아는 장혜은이 전해준 것 같은 옷으로 갈아입고, 아직 촉촉한 물기가 남아 있는 채로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곁으로 다가오자 텐트 안에는 향긋한 향기가 가득 차는 것 같았다.
분명 내가 쓰는 샴푸를 사용했을 텐데, 왠지 그 향기가 더 부드럽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수건으로 아직 젖은 머리를 닦아내는 그녀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온천 정말 좋네요.”
“네. 온천 좋죠.”
“이게 세진 씨 능력이라니. 정말 대단해요.”
“아뇨. 별 볼 일 없는 능력입니다.”
두근대는 마음을 감추느라 계속 어색한 대화가 오갔다.
마치 사춘기 남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설레고,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힐끔힐끔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옷자락에 살짝 드러난 오른쪽 팔이 눈에 들어왔다.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아 씨. 오른쪽 팔 괜찮아요?”
“네? 아. 괜찮아요.”
“잠시 보여주세요.”
“괜찮은데.”
괜찮다며 숨기려 하는 신지아의 손을 밀어내고 오른팔의 옷자락을 걷어냈다.
드러난 오른팔은 화상 때문에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이 한순간 차갑게 식어버렸다.
나는 주먹으로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책했다.
‘이 멍청이가.’
나는 곧바로 텐트 구석에 있는 구급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자고 있던 퓨이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퓨이야. 미안해. 잠깐만 일어나볼래?”
“퓨우우…… 퓨우?”
“미안해. 잠깐만 여기 상처 좀 봐줘.”
퓨이는 잠에서 덜 깨 부스스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쪽에 앉아 있는 신지아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퓨이?”
“아, 안녕?”
신지아는 자신을 신기한 듯 쳐다보는 퓨이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퓨이야. 지아 씨가 팔을 조금 다쳤거든. 네가 치료해 줄래?”
“퓨이!”
잠에서 깨웠지만 퓨이는 짜증 하나 내지 않고 신지아에게 다가갔다.
귀여운 모습의 퓨이지만 신지아는 살짝 겁먹은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요. 지아 씨. 팔만 살짝 내밀어주세요.”
내 말에 그녀는 아주 잠깐 머뭇거리다 천천히 오른팔을 퓨이에게 내보였다.
-덥석!
-움찔.
퓨이가 신지아의 오른팔을 덥썩 물었고, 그녀는 움찔 몸을 떨었다.
잠시 후.
퓨이가 팔에서 떨어지고 그녀의 오른팔의 붓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깨끗한 붕대로 화상 부위를 잘 감싸주었다.
“고마워. 퓨이야.”
“퓨이!”
나는 자다 일어나 고생해 준 퓨이를 쓰다듬어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지아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저도 만져봐도 돼요?”
“네.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세요.”
그녀는 천천히 손을 퓨이에게 가져갔다.
아주 조심스럽게 퓨이를 쓰다듬더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처 치료해 줘서 고마워. 퓨이야.”
“퓨이!”
한동안 신지아의 손길을 느끼고 있던 퓨이가 작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잠이 오는가 봐요.”
“어머. 정말 귀엽네요.”
우리는 잠투정을 부리는 퓨이를 훈훈한 미소로 쳐다봤다.
“우리도 이제 잘까요?”
“네.”
신지아가 내가 준비해둔 자리에 눕자, 나는 텐트에 불을 끄고 퓨이를 품에 안고 누웠다.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지아 씨.”
“네?”
“자신만만하게 데려와 놓고 이런 텐트라 실망했죠?”
“…….”
“불편하면 내일 아침에라도 그 언니분 집에 데려다줄게요.”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스윽.
향긋한 샴푸 향기가 숨 막힐 듯이 내 얼굴 앞에 가득해졌다.
“세진 씨. 저는 편한 잠자리를 원해서 따라온 게 아니에요.”
“…….”
“같이 있고 싶어서 따라온 거예요. 알겠어요?”
왠지 박력이 넘치는 그녀의 말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그러니까 쓸데없이 걱정하지 마요. 알았죠?”
그리고 내 얼굴을 그녀의 머리카락이 간지럽히더니.
-쪽!
“잘 자요. 세진 씨.”
“…….”
그녀는 달콤한 인사를 남기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볼에서 선명하게 느껴진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
그 기분 좋은 감촉에 가라앉았던 내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깊은 새벽.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꿎은 퓨이만 쓰다듬으며 한참을 뜬눈으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