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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62화 (62/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62화

24. 새로운 가능성(3)

우리는 아티팩트 시험으로 어질러진 공터를 최대한 정리하고 다시 공방으로 돌아왔다.

신지아는 공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노트북과 연구 노트를 꺼내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나는 난처한 미소를 보였다.

‘또 스위치 들어갔네.’

아티팩트 경연대회가 있기 전에도 연구에 빠져서 이런 모습을 자주 보여줬었는데, 오랜만에 그녀의 열중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방금 공터에서 보여준 아티팩트 시험으로 뭔가 영감이 떠오른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영감을 놓치고 싶지 않은지 나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로지 연구 노트에만 집중했다.

나는 그녀의 책상 옆으로 의자 하나를 끌어와 자리를 잡고 연구에 몰두한 그녀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봤다.

‘눈에 콩깍지가 꼈나?’

나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으면서.

마치 연구 노트와 사랑에 빠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이 왜 이렇게 내 눈길을 끄는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연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자리를 지켰고.

꽤 오랜 시간 동안 공방 작업실에는 신지아의 볼펜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으음.”

한동안 표정 변화 없이 볼펜을 움직이던 신지아는 짧은 침음과 함께 와락 얼굴을 구겼다.

아마 그녀가 떠올랐던 영감에 대한 정리는 끝났지만,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노트에서 뗀 볼펜을 달칵거리면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신지아의 감정 변화를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던 나는 슬쩍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뭐가 잘 안 돼요?”

“어맛!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갑자기 들려오는 내 목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거기 계신 거예요?”

“허허. 참나.”

곁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은 지 1시간이 다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녀는 정말 내 존재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진짜 큰일 날 여자네. 연구하고 있는 도중이면 납치해가도 모르겠어.’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대답해 줬다.

“벌써 1시간 동안 이러고 있었어요. 너무 집중하신 것 같아서 방해 안 하려고요.”

대답을 들은 신지아는 그제야 시간을 확인하고 민망한 표정과 함께 내게 사과했다.

“아아. 죄송해요. 생각을 좀 정리하느라 너무 집중했네요.”

“괜찮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뭐.”

내 반응에 오히려 더 민망한지 살짝 원망스러운 기색으로 나를 탓했다.

“그러면 중간에 말을 걸어주시지 그랬어요.”

“방해하기 싫었다니까요. 그래서 뭔가 생각난 게 있으신 거예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 나름대로 수치계산을 해봤어요. 아마 실험값이 더 필요하겠지만 말이죠.”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좋은 소식부터 들으실래요? 안 좋은 소식부터 들으실래요?”

“흐으음. 좋은 소식부터요.”

“일단 대박이에요.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아티팩트 제작 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 만한 발견이에요.”

신지아는 흥분을 자제하듯 감정을 억누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연구를 통해 출력을 안정화하고 내구도 검증만 끝낸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현재 나와 있는 아티팩트의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어요.”

그녀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안 좋은 소식에 대한 불안감이 생겨났다.

“안 좋은 소식은요?”

“예전에 대회가 끝나고 세진 씨에게 만들어 줬던 아티팩트 기억하세요?”

“기억하죠. 미래 그룹에 부탁한 재료로 만드신 거.”

“정확한 수치는 아니겠지만, 이 놀라운 아티팩트를 만들어 내려면 그 재료에 버금가거나 더 고급재료를 써야 할지도 몰라요.”

“…….”

“거기다 출력을 안정화하려면 마정석도 세공해야 하고, 부품 제작도 꽤 쉽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설명을 들은 나는 까마득하여 한숨만 나왔다. 그녀 역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 수준에서는 사람들에게 선보일만한 아티팩트를 만들 수 없다는 뜻이에요.”

“…….”

“거기다 연구를 위해 시험을 하는데도 돈이 상상 이상으로 필요할 거예요. 들어가는 재료 자체가 워낙 비싸니까.”

어느 정도 성공이 눈앞에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남은 난관들이 녹록하지 않았다.

특히 노력으로 어떻게 해결하기 힘든 돈 문제가 생기다 보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급격히 가라앉은 분위기에 신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지금 생각나는 건 두 가지 정도겠네요.”

“……?”

“첫 번째. 이 기술을 담보로 기업에 투자를 받는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첫 번째로 나왔다.

“자금, 제작 능력, 재료가 모두 부족한 상황이지만. 이 모든 걸 커버해 줄 수 있는 기업의 투자를 받고,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친다면 금방이라도 아티팩트를 생산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지난번에 만났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관리본부, 각성자 협회, 오성 길드.

아마 이 세 곳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먼저 이 제안을 한다면 환영하며 맞아줄 가능성이 컸다.

“세진 씨가 원하신다면 제가 미래 그룹에 이야기를 꺼내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그렇죠. 절대 공짜는 없죠.”

그만한 투자를 받는다면 당연히 우리도 그만한 가치를 갚아줘야 한다.

어쩌면 더 많은 것을 돌려줘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

“…….”

“모든 것을 걸고 한번 도박을 해본다.”

“……??”

나는 신지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더니 통장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통장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지아 씨. 뭐에요?”

“열어보세요.”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말에 따라 통장을 열어보았다.

통장은 최근에 개설된 계좌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0원이나 다름없었던 계좌 금액은 꾸준히 들어온 돈으로 몇천만 원까지 불어나 있었다.

“대회 우승하고 상금을 받을 목적으로 만든 계좌에요. 그 뒤로 방송 출현이나 강연도 다니면서 꾸준히 돈을 모았어요.”

“대단하네요.”

“아직 정산이 안 끝나서 숨기고 있었어요. 정산이 끝나면 세진 씨에게 보여주고 보너스도 두둑하게 챙겨주려고 했거든요.”

신지아는 뿌듯한 표정으로 통장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다. 나는 빽빽이 찍혀 있는 입금 내용을 보며 솔직히 감탄했다.

대회가 끝난 뒤에 그녀가 엄청 바쁘게 활동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돈을 단기간에 모았을 줄은 몰랐다.

내가 감탄하며 통장을 살피고 있을 때, 신지아는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그 돈으로 한번 걸어보죠.”

“……네?”

“이 정도 돈으로도 부족할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제안에 나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걸 전부 투자하시겠다고요?”

“네.”

“지아 씨가 힘들게 모은 돈인데.”

“이 돈의 일부분은 세진 씨 몫이에요. 세진 씨가 없었으면 제가 우승하지 못했을 거니까요.”

“…….”

그녀는 일부러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듯 가벼운 미소와 함께 말했지만, 나는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신뢰받는다는 느낌.

누군가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할수록 사람과의 관계에 순수한 신뢰를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래서 이런 흔들림 없는 믿음을 보여줄 때, 기쁘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투자해서 실패하면. 혹은 내가 중간에 다른 기업과 손잡고 배신하면 어쩌려고…….’

내가 침중한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하자. 신지아는 포근한 미소로 내게 말했다.

“저번에 제가 말했죠?”

“……?”

“세진 씨가 어떤 아티팩트를 망가뜨려 와도 거뜬히 고쳐줄 수 있는 제작자가 되겠다고.”

그녀는 조금 전 시험으로 망가진 아티팩트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조금씩 천천히 실력을 쌓기에는 세진 씨가 너무 멀리 가버릴 것 같아요. 그래서 대회를 준비할 때처럼 다시 도전해 볼래요.”

“지아 씨…….”

“어차피 제 꿈을 이루기 위해 거쳐 가야 할 관문이에요. 딱히 세진 씨를 위해서 쓰는 게 아니니까.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아요.”

내 표정이 조금 밝아지자 신지아는 매혹적인 미소로 다시 내게 물어왔다.

“어때요? 한번 해보지 않을래요? 겁나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후후.”

살짝 도발까지 해오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 돈은 우리 혜윰 공방의 연구 자금으로 결정!”

신지아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해맑게 웃으며 통장을 한 손에 들고 팔랑거리며 흔들었다.

“아! 그리고 이제 이 돈은 전부 연구 자금으로 들어가니까 세진 씨 보너스는 없어요.”

그녀의 장난스러운 농담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너무하네요. 사장님. 완전 악덕 기업 아닙니까?”

“몰랐어요? 세진 씨는 잘못 걸린 거예요. 아마 평생 제 밑에서 착취당하며 살 걸요?”

“하하하.”

신지아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우리는 문양의 힘을 마정석에 새긴 아티팩트 개발 연구를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균열을 돌아다니며 광산을 개발해 마정석 원석을 구해 재료를 만들었고.

신지아는 밤낮 쉬지 않으며 아티팩트에 사용할 회로를 설계하고, 실험에서 얻은 실험값을 분석했다.

또 그녀는 미래 그룹과의 거래로 아티팩트에 사용할 재료와 부품을 조달해 왔다.

미래 그룹 쪽에서는 무상으로 지원해 주겠다는 의견을 표했지만, 신지아는 딱 부러지게 거절하고 모든 재료값을 지급했다.

아티팩트 개발과 별개로 신지아는 특허 출원 준비까지 겸하는 바람에 일이 엄청 많았다.

내가 특허 출원이 끝날 때까지 개발을 잠시 미루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잠을 더 줄여서라도 개발을 동시에 진행하겠다는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신지아가 너무 몸을 혹사하는 것 같아 나는 자주 아티팩트 공방에 들러 식사를 챙기거나, 개발 일을 도와줬다.

그렇게 1달 가까이 아티팩트 개발 연구에 매진한 결과.

우리는 프로토타입의 아티팩트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통장의 남아 있던 돈은 원래 금액보다 1/5로 줄어든 상태였다.

이제는 프로토타입의 아티팩트를 시험받을 차례.

신지아가 어디에 이 시험을 맡길지 고민하고 있을 때, 내가 나서 시험을 도와줄 사람을 찾겠다고 말했다.

* * *

“그래서. 우리 오성 길드에 아티팩트 시험을 맡기고 싶다고?”

“네.”

한창호는 살짝 어이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뻔뻔하게도 이런 부탁을 해오는군. 아직 개인적으로 갚아야 할 빚은 남았다고 생각하지만, 길드의 일이라면 다르다.”

그는 길드의 일이라 판단해 냉정하게 대응했다.

“네가 우리 길드에 들어오겠다는 조건으로 일을 맡기는 거라면 환영하겠지만, 단순히 부탁해 오는 거라면 거절이다. 오성 길드의 이름은 무겁다.”

칼 같은 그의 거절에 나는 오히려 여유롭게 반응했다.

“그렇습니까? 아쉽네요. 저는 저번에 만났던 분들 중에 그래도 오성 길드가 가장 믿음직스러운 것 같아서 ‘기회’를 드린 건데……. 어쩔 수 없죠.”

“…….”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 한창호 조장님. 다음에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자연스럽게 통화를 끝내려 하자 한창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 ‘기회’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오성 길드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

“평범한 아티팩트 시험해 보겠다고 오성 길드에 이런 부탁을 하겠습니까?”

“설마?!”

한창호는 뭔가 깨달았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내가 본 그 아티팩트. 그걸 말하는 거냐?”

“뭐. 비슷할걸요? 더 좋을 수도 있고. 아직 프로토타입이라서요.”

“……잠시만 기다려라.”

“거절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길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 연락해 주겠다.”

한창호는 길드와 연락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긴 뒤, 문자 메시지로 절대 다른 곳에 시험을 맡기지 말라는 부탁 반, 협박 반이 섞인 말이 도착했다.

나는 다급함이 느껴지는 메시지를 보고, 여유롭게 웃으며 한창호의 연락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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