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57화
23. 태동하는 민티단(1)
작은 슬라임들을 해방해 주고.
나는 남은 95개의 금화를 사용하기 위해 물건들을 계속 둘러봤다.
워낙 물건이 많다 보니 둘러보는 것만 해도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세진! 세진!”
한참 물건을 둘러보고 있을 때.
티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세진. 이거 사주면 안 돼?”
티아가 가리키는 곳에는 아기자기하면서 고급스러워 보이는 티타임 세트가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핀테일이 불쑥 나서 설명했다.
“이건 제가 꽤 자신하는 물건입니다. 하루 2번. 10종류의 찻잎과 80종류의 과자 중에 랜덤하게 세팅됩니다. 찻잎과 과자 모두 상등품으로 구성해 놓았으니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의 설명에 티아가 더 눈을 반짝거리며 물건을 바라봤다. 슬쩍 가격을 확인해 보니 금화 25개였다.
‘생각보다 비싼데.’
비싼 가격에 내가 망설이자, 티아는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우물거리듯 말했다.
“이거 사주면 다른 간식은 많이 사달라고 안 할게.”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도 안 사줘도 돼?”
“으으으.”
가장 좋아하는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을 꺼내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티아는 한참 동안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한 달에 한 번만 사주면 돼.”
마치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 것처럼 비장함이 엿보였다.
“푸하하하.”
그 모습이 너무 귀엽게 보여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내 웃음에 놀란 티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귀여운 그 모습에 나는 티아를 품에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수고했어. 티아 없었으면 오늘 던전을 클리어 못 했을 거야. 이거는 그 답례니까 간식 걱정은 안 해도 돼.”
나는 티아를 칭찬해 주며, 자루에 담긴 금화 25개를 핀테일에게 건넸다.
“이거 살게.”
핀테일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금화를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티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끌어안았다.
“세진. 고마워. 쪽!”
정말 기뻤는지 얼굴에 뽀뽀까지 해주며 기쁨을 표현했다. 나는 한동안 티아의 격렬한 애정표현을 받아줘야 했다.
계속해서 물건을 둘러봤지만, 너무 종류가 많아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답답함을 느끼고 뒤쪽에 서 있던 핀테일에게 말을 걸었다.
“추천할만한 물건은 없어?”
“도움이 필요하시군요.”
내 질문에 핀테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을 줄줄 쏟아내기 시작했다.
“먼저 가장 추천해 드리는 건 이 구슬입니다. 구슬을 흡수하면 랜덤한 문양의 힘 3개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오!”
첫 추천부터 꽤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왔다.
“전투를 대비해 회복 포션도 구입을 추천해 드립니다. 모든 등급의 포션을 준비해 놓았으니 필요에 따라 구매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뒤로 희귀한 아이템, 장비, 각종 재료 아이템 등등.
핀테일은 쉴 새 없이 적절한 추천을 이어갔다.
그의 추천 때문에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아져서 고르기 힘들어질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추천해 드리는 물품은 이 ‘하급 기계공학 핵’입니다.”
“이건 어디다 쓰는 물건인데?”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제 추천 물품은 여기까지입니다.”
마지막에 뭔가 찝찝함을 남기고 핀테일은 설명을 그만두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다시 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나는
첫 번째로 추천해 줬던 문양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구슬과 중급 치료 포션 6개.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천해 줬던 의문의 ‘하급 기계공학 핵’ 2개를 구입했다.
핀테일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제 나가는 출구를 열어드리겠습니다.”
그의 손짓에 따라 눈앞에 출구가 생겨났다. 나는 아이들과 나가기 전에 핀테일에게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다시 올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저도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르키트 중급 회로 이론서’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출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퓨이!”
-몽. 몽. 몽.
-몽. 몽. 몽.
우리는 작은 슬라임들과 핀테일의 배웅을 받으며 던전을 빠져나왔다.
* * *
균열 제거 일을 하는 20대 중반 각성자 민초현.
그는 얼마 전까지는 D등급 균열 제거를 주로 했으나, 지금은 적당한 길드에 들어가서 C등급 균열 제거에 참여하고 있다.
일의 경력은 꽤 길지만 새로운 길드 환경과 C등급 균열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딱히 뛰어난 각성 능력을 갖춘 것도 아니고, 길드의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라 사실상 찬밥신세.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수입을 보면서 그는 꿋꿋하게 버텨내는 중이다.
이런 빡빡한 생활을 보내는 민초현의 일상에 최근 자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나는 위대한 아르키트 왕국의 공주. 아라스티아 공주야.
힘든 일상 속에서 티아 공주와의 우연한 만남은 민초현에게 사막 속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 들게 했다.
민트색 머리칼에 앙증맞은 외모.
도도한 공주님처럼 보이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어리숙하고 귀여운 행동에 푹 빠져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트 초코를 최고의 디저트라 선언하며 특별한 애정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그는 큰 감명을 받게 됐다.
민초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도 엄청난 민트 초코 애호가였다.
워낙 호불호가 강한 음식이다 보니. 가끔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는 강한 동질감을 느끼곤 했었는데.
너튜브를 통해 만나게 된 티아 공주에게서는 동질감을 넘어선 강한 이끌림을 느끼게 되었다.
같이 영상에 나오는 퓨이도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티아 공주에게서는 그 이상의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균숙자네 퓨이’ 채널에 티아 공주 관련 영상을 전부 시청하고 댓글을 읽었을 때, 민초현은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사람이 많은 것을 되었다.
민트 초코를 좋아하면서 티아 공주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고, 댓글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들은 자신들 만의 모일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럼 따로 팬카페라도 만드는 게 어떨까요?
-오오! 그거 좋은 듯.
-저도 바로 가입할게요.
민초현은 ‘균숙자네 퓨이’ 채널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과 의기투합해 티아 공주의 팬카페를 만들게 된다.
팬카페에 소속된 사람들은
민트 초코와 티아 공주.
이 두 상징의 앞글자를 따 자신들을 ‘민티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호불호가 강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되는 동질감과 티아 공주의 강력한 매력이 합쳐져.
민티단의 결속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해졌고, 그 세력을 확실하게 넓혀나갔다.
팬카페의 대표를 맡게 된 민초현은 균열 제거 일을 다니면서 카페를 관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것을 공감해 주는 사람들과의 소통은 힘든 일마저도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조금씩 커져 가는 카페의 규모를 바라보며 민초현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민초현의 왼쪽 손등에는 희미한 문양이 빛나고 있었다.
* * *
점심 식사가 끝난 한가한 오후.
나와 티아, 퓨이 그리고 오연우는 텐트에 모여 느긋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핀테일의 던전에서 산 티타임 세트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았다.
평소에 차 마시는 것을 즐기는 취향은 아니라,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티아와 함께 마셨는데.
티타임을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은은하고 깊은 맛을 내는 차와 달콤한 디저트도 좋지만.
기분이 좋은 차 향에 마음을 비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쉬는 것보다 훨씬 스트레스도 잘 풀리고 활력을 주는 느낌이었다.
처음 텐트 티타임에 참여한 오연우도 편안한 표정으로 차와 디저트를 즐기고 있었다.
“형. 진짜 차 향 좋네요. 디저트도 정말 맛있고. 근데 이게 무한 리필이 되는 거라고요?”
“완전히 무한은 아니고. 하루에 두 번만.”
“와. 도대체 어디서 이런 물건을 구해오신 거예요.”
“운이 좋았지.”
나는 오연우의 질문에 대충 얼버무리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흠. 티타임 영상도 하나 찍어 놔야겠어요. 저번에 올렸던 일상 브이로그도 반응이 괜찮았거든요.”
“그래?”
“그럼요. 조회수도 대박 잘 나왔어요. 한번 보실래요?”
오연우는 나에게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었다.
저번에 오연우가 소형 카메라를 빌려주면서 휴일에 어떻게 지내는지 찍어달라고 부탁했었다.
나는 부탁을 받고 정말 아무 특별한 것 없는 아이들과 일상을 찍어 오연우에게 보내주었는데, 그게 조회수 대박을 터뜨렸다고 한다.
물론 지루하지 않게 오연우가 적절한 편집과 센스 있는 자막을 넣어주긴 했어도, 내가 보기에는 지루한 일상의 모습일 뿐이었다.
‘이런 지루한 영상을 좋아한다고?’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그 뒤로 브이로그 영상들을 찾아보고 어떤 의미이고, 왜 이런 영상을 좋아하는지 이제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저번에 찍었던 보드게임 영상도 꽤 반응이 좋았어요. 다른 게임도 해달라고 추천도 많이 해주시고, 어떤 분은 직접 구입해서 선물해 주신 분도 있어요.”
“그래?”
최근에 나와 퓨이, 티아, 오연우.
이렇게 넷이 모여 보드게임을 한 영상을 올렸었다.
부X마블과 젠가 같은 게임을 했었는데. 촬영을 떠나서 정말 즐겁게 몰입해서 게임을 했었다.
확실히 오연우의 말대로 일상 브이로그, 보드게임 모두 반응이 좋았다.
댓글들을 꼼꼼하게 살피며 시청자들의 의견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호의적인 반응이었지만 몇몇 댓글은 아니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나는 그런 악성 댓글들은 가차 없이 삭제해 나갔다.
퓨이와 티아도 우리 채널의 영상을 자주 보기 때문에.
이런 질 나쁜 댓글 관리는 나뿐만 아니라 오연우도 꽤 꼼꼼히 하는 편이다.
댓글들을 살피던 나는 생소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민티단? 연우야. 민티단이 뭐냐?”
“아. 그거요? 티아 공주님 팬들이에요.”
“뭐?”
“민트 초코와 티아 공주님 앞글자를 따서 만든 단체래요.”
“하하. 진짜로?”
내 믿기 힘들다는 반응에 오연우는 직접 노트북을 조작해 민티단 팬카페 사이트를 보여주었다.
“와, 진짜네. 회원도 꽤 많잖아?”
“대부분 우리 채널 구독자님들이에요. 그중에서도 티아 공주님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분들이 만든 곳이거든요.”
퓨이와 티아 모두 우리 채널 구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티아는 좀 특이하게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구독자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민트 초코에 대한 티아의 확고한 신념 덕분에 일어난 현상 같았다.
민티단 팬카페 사이트를 살펴보니 거의 민트 초코와 티아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사랑과 관심을 보내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너무 열렬한 지지와 관심은 살짝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티아가 처음 라이브 방송에 출연했을 때 생겼던 정체불명의 알람이 떠올랐다.
[아라스티아 공주의 추종자]
[현재 추종자 숫자 82명]
[다음 권능 개방 필요 추종자 100명]
‘48명에서 82명으로 늘었네.’
정확히 추종자가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생겨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민티단과 관련이 있을 것만 같았다.
“아! 맞다. 세진 형.”
민티단 카페를 살피던 나에게 오연우가 뭔가 생각난 듯 나를 불렀다.
“왜?”
“꽤 유명한 너튜브 채널에서 합동 라이브 방송 요청이 들어왔거든요.”
“갑자기 우리한테?”
“네. 구독자 숫자도 많고 유명한 채널이라 저도 처음에 깜짝 놀랐어요.”
오연우는 노트북으로 연락 메시지와 채널을 직접 보여주었다.
“와! 영상 조회수 좀 봐. 우리 10배는 되겠네.”
최근에 올린 영상이 조회수 몇십만을 가볍게 넘어서고 있었다.
채널을 직접 구경해 보니 더욱 궁금증이 생겨났다.
“도대체 왜 우리를 부르는 거야?”
“이 채널에서 재미있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컨텐츠를 찍는데 우리가 토론 참가자 중에 하나로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해서요.”
“토론 주제가 뭔데?”
“그러니까…….”
“……?”
“민트 초코, 음식인가? 치약인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던 티아가 이 말을 듣고 흥분해 오연우에게 외쳤다.
“뭐? 누가 그런 말 하는 거야! 민트 초코가 치약이라니!”
“저. 공주님. 제가 그런 말 한 게 아니라…….”
나와 오연우는 화가 잔뜩 난 티아를 달래느라 한동안 진땀을 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