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46화
18. 아티팩트 경연대회(4)
삐걱거리는 느낌과 함께 아티팩트 회로에 마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집중해 회로의 흐름을 유지하려 애썼다.
어느 정도 흐름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하나씩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파이어!
-화륵.
-라이트!
-파앗.
-라이트닝!
-파지직.
마법이 하나씩 안정적으로 시전되었고, 관객들과 심사 위원 모두 숨죽이며 이 장면을 지켜봤다.
-아이스!
-윈드!
-워터!
-매직 미사일!
마지막 매직 미사일까지 성공하자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심사 위원들은 뭔가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아티팩트에 집중했다.
아니, 정확히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마와 등은 벌써 땀으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치면,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는 회로의 흐름이 곧바로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라이트의 출력 단계를 보여주십시오.”
심사 위원은 출력 단계의 마법으로 라이트를 지정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라이트 마법을 시전했다.
하나, 둘씩 빛을 내는 구체가 눈앞에 생겨났다. 구체가 하나씩 생겨날 때마다 관객석에서는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죽겠네.’
한편 출력을 높일 때마다 회로에 가해지는 부담이 늘어나고, 등과 이마에는 더 많은 땀이 흘러내렸다.
4……. 5……. 6……. 그리고 마지막 7번째 빛의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아아!!”
-짝짝짝짝.
다시 한번 관객석에서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기자들도 최대한 심사장에 가까이 붙어 연속적으로 플래시를 터뜨렸다.
반면 이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심사 위원은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심사 위원의 판정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심사장의 분위기는 모두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관객석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지고, 심사 위원들이 마지막 판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나는 아티팩트를 착용한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몰려들었다.
‘어중간하게 인정받을 생각 따위는 없다. 이제는 누구도 반박 못 할 압도적인 실력으로 증명하겠다.’
어쩌면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신지아의 아티팩트가 멀쩡했더라도 성공하기 힘든 일이었다.
대회 규칙을 어기는 공정하지 못한 행동이지만, 이제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먼저 규칙을 어긴 건 우리가 아니니까.
나는 다시 한번 아티팩트 회로에 의식을 집중시켰다.
머리가 뜨끈해지는 기분과 가벼운 두통이 몰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관객석에서 웅성거림이 커지는 가운데, 다시 한번 아티팩트에서 마법이 발동되었다.
처음은 파이어 마법.
-화르륵.
허공에 불꽃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불꽃을 유지한 채 다음 마법이 시전되었다.
-라이트!
-파앗.
하나의 불꽃과 하나의 빛 구체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어렴풋이 눈치챘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라이트닝!
-파지직.
전기 구체가 하나 더 생겨났다.
이때부터는 관객석에서도 어떠한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모두 앞으로 벌어질 경이로운 장면을 기대하며 숨죽인 채 심사장을 바라봤다.
-아이스!
-윈드!
-워터!
얼음 덩어리, 푸른 기운의 바람, 물방울까지 동시에 내 주위에 떠올랐다.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왔다. 거미 여왕 균열 때처럼 머리가 녹아내리는 기분과 함께 나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려왔다.
나는 이를 꽉 깨물며 마지막 마법을 시전했다.
-매직 미사일!
-우웅.
선명한 매직 미사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관객, 심사 위원, 장내 아나운서, 대회 직원.
심사장의 모든 사람이 눈앞에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혼을 빼앗긴듯한 표정 지었다.
7개의 각기 다른 마법을 동시에 펼쳐내는 모습은, 마법이 아니라 마치 기적을 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눈 앞에 펼쳐지는 기적에 심사장은 엄숙한 침묵을 유지했다.
“크윽.”
살짝 내 신형이 흔들리고.
꽉 깨문 이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주변을 맴돌던 마법들이 환상처럼 사라졌다.
내 시연은 끝을 맺었지만, 심사장 안에 그 누구도 먼저 소리를 내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내 존재감에 완벽히 압도된 모습.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온몸이 덜덜 떨려왔지만 내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떨리는 팔을 억누르며 아티팩트를 착용한 오른팔을 다시 한번 번쩍 들어 보였다.
“와아아아아아!!!”
내 행동과 함께 사람들은 최면에 깨어난 것처럼 동시에 대회장이 무너질 것 같은 환호성과 박수를 보내왔다.
흥분, 환희, 놀라움.
관객석의 사람들은 이 모든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렀다.
심사 위원 모두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장내 아나운서는 어떤 멘트를 해야 할지 떠올리지 못해 버벅거리고 있었다.
조금 숨을 고른 나는 성큼성큼 장내 아나운서를 향해 다가갔다.
-어…… 잠시…….
당황하는 장내 아나운서를 무시하고 그의 마이크를 휙 뺏어 들었다.
나는 뺏어 든 마이크를 들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 안녕하십니까? 혜윰 공방의 시연자로 나선 전세진입니다.
관객들은 내 돌발 행동에 오히려 큰 환호와 함성으로 호응해 줬다. 누군가는 마치 연예인의 이름을 부르듯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연호했다.
-갑자기 이렇게 마이크를 뺏어 들게 된 이유는 오늘 이 대회에서 저희 혜윰 공방이 받게 된 부당한 대우를 짚고 넘어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담담하고 진지한 내 목소리. 그리고 폭로하는 듯한 분위기에 환호성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사람들의 관심이 주목됐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대회 관계자들과 장내 아나운서는 어찌할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미 상황은 멈출 수 없게 진행되고 있었다.
-오늘 혜윰 공방은 처음에 분명 완벽하게 더블 세븐을 성공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심사 위원분들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고 갑자기 재시연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심사 위원 쪽을 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너무 황당했습니다. 분명 우리는 완벽한 시연을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재시연을 요구하니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심사 위원분들도 실수할 수 있죠.
심사 위원들은 내 눈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런데 웃긴 건 마치 저희 혜윰 공방이 잘못한 것처럼 미안한 기색도 없이 재시연을 요구해 왔습니다. 심지어 재시연을 하지 않으면 대회 탈락이라고 협박하더군요.
내 폭로를 달은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커졌다.
-만약 저희가 이름 있는 공방이었거나, 대기업 소속이었다면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지 궁금하네요.
내 말에 동조한 관객들의 웅성거림은 조금씩 대회 관계자들과 심사 위원에 대한 야유 소리로 변해갔다.
나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심사 위원이 앉아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직접 물어보죠. 명문 대학교수님이신데. 질문에 대답 좀 해주시죠. 도대체 저희 혜윰 공방 시연에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질문과 함께 내가 들고 있던 마이크를 심사 위원 중 한 명에게 들이밀었다.
-어흠. 그러니까…… 흠. 흠.
심사 위원은 당황하며 헛기침만 내뱉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관객들의 야유소리가 점점 켜져 갔다.
다른 나머지 심사 위원에게도 마이크를 들이밀었지만 모두 시선을 피하며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번엔 마력 측정 기계를 사용하던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측정 결과 혜윰 공방의 시연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내가 갑자기 마이크를 들이밀자 직원은 크게 당황하며 떠듬떠듬 대답을 이어나갔다.
-아, 아닙니다. 기계 측정에는 전혀 이, 이상이 없었습니다.
기계 측정에는 이상이 없었다는 말에 관객들은 이제 의심을 넘어서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곳곳에서 대회 책임자가 나와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점점 심사장은 더 이상 대회를 진행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때 홍세완이 마이크를 잡고 심사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회 총괄을 맡은 홍세완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전까지 여유로운 표정은 사라지고 꽤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혜윰 공방 측에서 잠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혜윰 공방에서 워낙 믿기 힘든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에 많은 분이 다시 보고 싶어 하셨고, 재심사의 의미보다는 다시 많은 분이 그 시연을 볼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홍세완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애써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려고 했다.
-하하. 그런 의도였다면 대회 탈락이라는 협박을 하지는 않았겠죠? 안 그렇습니까?
-…….
그는 내 반박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유지했다. 관객들은 홍세완을 향해 야유를 날리기 시작했다.
-이 대회는 과거 이연수 여사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대회라고 들었습니다. 수십 년 전 무시당하던 여성 아티팩트 제작가였지만, 오로지 실력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그분의 업적을요.
관객들이 야유를 멈추고 내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저희 혜윰 공방의 뛰어난 여성 제작자인 신지아 씨는 이름 없는 공방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연수 여사님 대회에서 차별과 무시를 받는군요.
대회장의 모든 사람이 침중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혜윰 공방을 이름 없는 공방이라 무시한 건 대회 관계자뿐만 아니었다.
관객들 역시 혜윰 공방을 의심하고 무시하려 했으니까.
-상을 받는 사람에게 자격과 증명이 필요하듯, 대회에도 그에 걸맞은 자격과 증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혜윰 공방은 대회에 걸맞은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나는 숨을 한번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 대회는 혜윰 공방, 신지아 씨에게 상을 줄 만한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혜윰 공방은 지금 이 자리에서 대회 기권을 선언하겠습니다.
말을 끝낸 나는 미련 없이 돌아서 심사장을 걸어 나왔다.
내 기권 선언에 대회장의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빠져들었다. 홍세완 역시 내 행동에 당황한 듯 안색을 흐렸다.
야유와 환호성을 지르는 관객들과 혼란스러워하는 대회 관계자들 그리고 열심히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노트북을 두드리는 기자들로 대회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아, 죄송합니다. 하나 빠트렸네요. 심사 위원분들께서 제대로 심사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힘을 모아 크게 외쳤다.
-혜윰 공방. 세계 최초 더블 세븐(Double Seven) 성공입니다.
나는 들고 있던 마이크를 바닥에 내던지고, 그대로 심사장을 빠져나왔다.
땅에 떨어진 마이크가 듣기 싫은 깨지는 소리를 냈지만.
대회장을 뒤흔드는 관객들의 환호와 야유소리에 뒤섞여 곧바로 묻혀버렸다.
* * *
최대한 멀쩡한 척하며 심사장을 빠져나왔지만, 통로에 들어서면서 온몸이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나왔다.
‘끙. 너무 무리했나.’
마지막 7개의 마법을 동시에 펼쳐내는 퍼포먼스는 살짝 무리한 감이 없지 않았다.
“세진 씨.”
신지아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나를 향해 뛰어왔다.
나는 오른팔의 아티팩트를 빼내 들고 머쓱한 미소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거 또 고장 낸 것 같아요.”
“…….”
“저는 항상 지아 씨 아티팩트를 망가뜨리네요.”
그녀는 내 말에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니 와락 나를 껴안았다.
갑자기 안겨드는 그녀의 행동에 잠시 당황했지만, 나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살짝 껴안았다.
신지아의 온기가 느껴지자 신기하게도, 떨리던 몸이 진정되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미안해요. 마음대로 대회를 기권해 버려서.”
“괜찮아요. 저는 충분해요.”
“저 땀 많이 흘렸는데.”
“괜찮아요.”
내 품 안에서 계속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계속 있어도 좋을 것 같았지만, 점점 우리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쉽지만 품에서 그녀를 살짝 떼어내고 눈물로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이제 갈까요?”
끄덕끄덕.
내 말에 신지아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나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뒤쪽에서 홍세완이 우리를 부르며 허겁지겁 뛰어왔다.
“이렇게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그녀를 보호하듯 등 뒤로 보내고 홍세완을 바라봤다.
“아까 말했는데요. 혜윰 공방은 이번 대회를 기권하겠다고.”
“무슨 소리이십니까? 대회 우승 자리를 그냥 넘기겠다는 말씀입니까?”
“이제 그런 건 상관없어요.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 대회는 우리 혜윰 공방에게 상을 줄 자격이 부족해 보이네요.”
“이연수 여사님을 기리는 대회입니다. 한국 최고의 권위를 가진…….”
“아아. 그분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대단한 거지 이 대회를 운영하는 당신이 대단한 게 아니잖아요?”
“…….”
“그러니 남은 사람들이랑 대회 마무리 잘하세요. 불청객은 사라져드릴 테니까.”
홍세완은 내 말에 온몸을 부들부들했지만, 더 이상 우리를 붙잡지 못했다.
“가요. 지아 씨.”
나는 다시 그녀를 이끌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세진 씨.”
“네?”
“저 가방이 아직 대기실에 있는데.”
“아. 그럼 대기실에 들렸다 바로 나가죠.”
신지아의 가방을 가져가기 위해 우리는 머물렀던 대기실로 향했다.
근데 자신 있게 먼저 걸음을 내디뎠지만 복잡한 내부 구조 때문에 잠시 방황하고 있을 때.
아까 우리를 안내해 줬던 안내 요원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대기실 가시는 건가요?”
“네.”
“그럼 안내해 드릴게요.”
다행히 안내 요원 덕분에 우리가 머물렀던 대기실을 찾을 수 있었다.
도와준 안내 요원에게 내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리고 아까 정말 멋있었어요. 최고예요.”
나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이며 칭찬해 줬다. 나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안내 요원은 나가는 길까지 상세히 알려주고 대기실을 떠나갔다.
잠시 놓아두었던 신지아의 짐을 챙기고 다시 대기실을 떠나려는데.
-똑. 똑. 똑.
누군가 우리가 있는 대기실의 문을 두드렸다.
-미래 그룹 비서실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괜찮겠습니까?
나는 와락 인상을 구기며 외쳤다.
“우리는 이제 기권했습니다. 여기서도 금방 나갈 테니 그만 귀찮게 하시죠.”
짜증 섞인 내 외침에도 문밖의 상대는 아주 정중한 말투로 양해를 구했다.
-오늘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저희도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혜윰 공방의 신지아 님과 잠시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겠습니까?
저자세로 부탁해 왔지만 나는 전혀 그들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다시 거절하려 말을 꺼내려는데 신지아가 내 팔을 붙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그녀의 뜻을 깨닫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성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미래 그룹의 비서실장직을 맡은 최인환이라고 합니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미래 그룹의 일원으로 굉장히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는 우리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이도 지긋해 보이는 분이 고개를 90도까지 숙이며 사죄하자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오늘 우리에게 있었던 일은 이런 사과 한마디로 보상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용건만 빨리 말씀해 주시죠. 저희는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으니까요.”
내 싸늘한 반응에도 그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어받았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품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통화를 연결했다. 그리고 신지아에게 휴대폰을 정중하게 건넸다.
그녀는 전화를 받아들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살짝 놀리기도 하고, 얼굴을 굳히기도 하고, 살짝 슬픈 기색도 보였다.
누구와 대화하는 건지, 무슨 내용의 대화가 이루어지는지 궁금했지만 꾹 참으며 그녀의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생각보다 긴 통화가 이어지고.
“네. 잠시만요.”
“……?”
“세진 씨.”
그녀는 갑자기 내게 휴대폰을 건넸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오히려 재촉하듯 내게 눈빛을 보냈다.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자네가 혜윰 공방의 시연자 전세진인가?
휴대폰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같았다.
살짝 그립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기분이 드는 목소리.
갑자기 몰려드는 이상한 감상에 빠져나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나는 미래 그룹의 회장직을 맡은 강유환이라는 늙은이일세.
생각보다 거물이 튀어나와 살짝 긴장되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고 오히려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시죠?”
-먼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회서 사과하고 싶어 이렇게 전화를 걸었다네. 정말 미안하네.
“저는 괜찮습니다. 사과받아야 할 사람은 우리 공방의 대표인 신지아 씨입니다.”
-물론 그녀에게도 조금 전 사과의 뜻을 전했다네. 아무튼, 자네도 오늘 대회의 참가자이니 당연히 사과해야겠지.
내 딱딱한 말투에도 강유환 회장은 시종일관 부드럽게 대회를 이끌어 나갔다.
-원래는 매년 이 대회를 내가 직접 주관하고 운영하지만, 올해는 몸 상태가 좋지 못해 나서지 못했다네. 물론 그렇다고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아닐세. 그 대회가 미래 그룹 주관으로 열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
-신지아 대표에게도 그룹 차원에서 보상책을 내놓을 생각이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부탁을 하고 싶어 이렇게 연락했다네.
그는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제발 대회의 기권을 철회하고 상을 받아주면 안 되겠나?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제발 부탁하네.
“결국, 회사의 체면을 세우겠다는 뜻입니까?”
내 싸늘한 물음에 그는 황급히 부인하며 설명했다.
-회사의 입장은 어찌 돼도 상관없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대회는 내 아내를 기리기 위해 만든 대회라네. 회사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내 개인적으로 비용과 시간을 들어 매년 개최를 해왔었지.
“…….”
-예전에 내 아내처럼 실력 있음에도 빛을 보지 못하는 제작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만든 대회지만, 최근에는 기업들의 실력을 자랑하는 곳으로 변질해 버렸지.
그는 짧은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혜윰 공방을 운영하는 그녀가 이 대회의 취지에 딱 맞는 인물이란 걸 알 수 있었어. 그런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버려서. 정말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내 아내에게도 면목이 없다네.
이연수 여사의 이야기를 꺼내며 슬퍼하는 그의 모습에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
-기권을 철회해 주면 안 되겠나? 이건 미래 그룹의 회장으로서가 아니라, 먼저 떠나간 아내를 그리워하는 늙은이의 부탁이라네.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게.
나는 간절한 그의 부탁에 누그러진 말투로 대답했다.
“저는 공방의 일개 직원일 뿐입니다. 결정은 사장인 신지아 씨가 하는 거죠.”
강유환 회장은 잠시 침묵하더니 내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혹시 그녀와 연인관계인가?
갑자기 예상 못 한 질문에 나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흠. 다른 게 아니라 신지아 대표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하니, 자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떠한 보상도 필요 없다고 하더군. 만약 자네의 허락만 있으면 기권 철회도 생각해 보겠다고 했었다네.
“…….”
-보통의 사장과 직원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연인관계가 아닌 건가?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강유환 회장의 말이 어쩐지 능글맞아진 것 같았다.
나는 힐끔 신지아를 쳐다봤다.
살짝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편안히 웃어 보였다.
괜히 부끄러워진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휴대폰을 손으로 가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튼, 신지아 씨와 그런 사이 아닙니다.”
누가 들어도 변명같은 내 대답에 강유환 회장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청춘이구먼. 청춘이야.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강유환 회장과의 통화 끝에 우리는 대회 기권을 철회하기로 했다.
대신 혜윰 공방에 대한 투자와 미래 그룹의 아티팩트 제작 관련 기술 지원을 약속받았고.
오늘 대회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약속받았다.
대회는 이미 난장판이 되었지만, 뒤늦게라도 시상식이 열렸다.
시상식 전에 대회 모든 관계자가 관객들에게 오늘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사죄했고, 우리에게도 정중한 사과 인사를 전했다.
2, 3등을 했던 대기업 참가팀은 시상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만 덩그러니 시상식에서 대회 우승 상을 받게 되었다.
엄청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신지아는 이렇게 아버지의 연구를 완성하고 꿈을 이뤄낼 수 있었다.
* * *
시상식이 끝나고 곧바로 기자회견 자리가 열렸다.
아무래도 우여곡절이 많았던 터라 최인환 비서실장이 기자회견의 취소를 권유했지만, 신지아는 괜찮다며 씩씩하게 기자회견장에 올라섰다.
물론 나도 시연자로 참여했기 때문에 같이 기자회견장에 참석해야 했다.
질문 대부분은 아티팩트 제작자인 신지아에게 집중되었다.
“굉장히 젊은 나이신데, 어떻게 더블 세븐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실 수 있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미완성 연구를 완성했을 뿐이에요. 아버지께서는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 받은 대회의 상은 아버지의 몫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찰칵! 찰칵!
“아버님이 하셨던 연구에 대해 짧은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버지는 병렬 회로의 교차적인 마력 회로 연결로 다양한 출력과 동시에 안정성을 높이는 연구를 계속하셨어요. 저는 그 연구에서 마력장이라는 요소를 접합시켜 아버지의 연구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들의 맹렬한 질문세례가 이어지는 가운데, 외국인 기자의 질문도 있었다.
신지아는 통역 없이도 영어 질문에 거침없이 답변했고 외국인 기자는 그녀의 친절한 대답에 감사 인사를 남겼다.
나는 그런 그녀를 옆에서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포착한 기자가 신지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 시연자로 나선 전세진 씨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이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을 이어나가던 신지아가 처음으로 멈칫했다.
뭔가를 느낀 기자들.
그들은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의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괜히 나도 긴장하고 있을 때, 신지아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그 질문에 대답했다.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오늘 대회의 아티팩트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처럼, 세진 씨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제가 여기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을 끝으로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고, 기자들은 맹렬하게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촤라라락!!
그녀의 대답에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억제하느라 고생해야 했다.
두 시간 가까이 기자들의 질문에 시달리다가.
최인환 비서실장과 부하직원의 호위를 받으며 우리는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주차장으로 모시겠습니다. 혹시 차량 가지고 오셨습니까?”
“아뇨. 저희 버스 타고 왔는데.”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최인환 비서실장이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몇 분 뒤.
직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와 신지아는 대형 고급 세단 차량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운전자 옆 좌석에 탑승한 최인환 비서실장이 우리에게 물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지만, 저녁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곧바로 근처에 괜찮은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벌써 저녁 9시가 다 돼가는 시간.
우리는 배고픈 것도 있지만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배는 별로 안 고프네요. 지아 씨는요?”
“저도 저녁은 별로…….”
“그럼 혜윰 공방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차량은 신지아의 아티팩트 공방으로 부드럽게 나아갔다.
신지아는 오늘 하루 힘들었는지 편안한 승차감에 곧바로 잠들어버렸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새근새근 잠이 든 그녀.
나는 그녀가 깨지 않게 살짝 고개를 돌려 잠든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공방에 도착할 때까지 쳐다봤다.
* * *
공방에 도착하고.
차량에서 내린 우리는 비서실장의 명함을 받았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아마 저희 쪽에서 먼저 연락이 가겠지만, 혹시 연락하실 일이 있으면 이쪽으로 해주시면 됩니다.”
그는 또 나와 신지아의 연락처도 받아갔다.
“세진 씨는 따로 모셔다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균열 입구를 열고 바로 이동할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그런데 비서실장은 슬쩍 신지아 쪽을 바라보더니 뭔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비서실장과 운전해준 직원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차량은 떠나갔다.
신지아는 공방 앞에 서서 내게 말했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세진 씨.”
“지아 씨도 수고 많으셨어요.”
“…….”
“…….”
이제 인사를 남기고 떠나야 하는 타이밍인데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도 뭔가 아쉬운 표정으로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렇게 공방 입구에서 서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몇 분이 흘렀다.
“저 세진 씨.”
“네?”
“배 안 고프세요?”
“…….”
아까 비서실장에게는 별로 배가 안 고프다고 했었는데.
“라면 먹고 가실래요?”
갑자기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