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39화
티아 공주는 조심스럽게 아르키트 왕국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야기 속 아르키트 왕국은 엄청난 마법 지식과 발달한 기계 문명으로 차원의 균형을 유지하고 다스리는 국가였다.
아르키트 왕가의 사람들은 차원의 균형의 유지하는 것에 큰 의지와 사명감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아르키트 왕국의 이야기도 상상 속에서나 있을법한 일들이지만, 더 놀라운 점은 이런 왕가의 인물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차원을 다스리는 아르키트 왕국보다 더 높은 차원의 존재.
그들이 만든 질서와 규칙을 따라 아르키트 왕국은 수많은 하위 차원을 다스렸다고 한다.
아르키트 왕국의 우두머리이자 티아의 아버지인 국왕은 뛰어난 능력으로 차원의 관리는 물론, 왕국의 사람들을 현명하게 이끌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어지는 티아 공주의 이야기는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책에서 볼법한 이야기의 흐름이었다.
바로 어질고 현명했던 왕과 그를 지기 질투한 동생.
국왕의 동생이자 티아 공주의 숙부는 뛰어난 형의 능력을 부러워하며 질투했다.
그래서 그는 절대적인 아르키트 왕가의 규칙을 어기고, 차원의 질서를 어지럽히면서 아무도 모르게 힘을 모았다.
다행히 공주의 아버지였던 아르키트 왕은 동생의 계획을 눈치챘지만, 동생을 불쌍히 여겨 그를 처벌하지 못했다.
오히려 사건을 은폐시켜 그의 잘못을 덮어주었다.
왕의 자비로운 모습은 오히려 동생의 삐뚤어진 열등감과 질투를 부추기는 행동이 돼버렸다.
동생은 더더욱 은밀하고 대담하게 자신의 계획을 국왕 몰래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규칙을 어긴 동생의 행동으로 차원의 질서가 크게 흔들리며 하나의 세계가 멸망해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을 저지른 동생은 엄청난 힘과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차원의 틈새로 사라졌다.
동생을 믿었던 국왕은 망연자실하게 된다. 뛰어난 능력의 국왕도 한번 크게 흔들려버린 차원의 질서를 바로잡지 못했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 저만 갔다.
상위 차원의 존재들은 이 사태에 크게 분노했고, 아르키트 왕이 규칙을 어긴 동생을 감싸줬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상위 차원의 존재들은 아르키트 왕가가 가진 권한을 빼앗고, 왕가의 일원 모두에게 벌을 내리게 된다.
-어질러진 차원의 균형이 다시 맞춰질 때까지 왕가의 일원들은 영원히 왕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티아 공주가 기억하는 아르키트 왕국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가족이 어떻게 됐는지, 어떤 식으로 벌을 받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
어린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에 나는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먼저 퓨이가 움직였다.
“…….”
“퓨이.”
쓸쓸한 티아 공주의 모습을 보고 퓨이가 슬쩍 다가와 위로했다.
티아 공주는 아까 퓨이에게 했던 행동에 미안함이 남아 있는지 퓨이의 눈을 피했다.
이번엔 내가 손을 움직여.
내 무릎에 등을 보이고 앉은 티아 공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퓨이가 싫은 거야?”
“…….”
도리도리.
“퓨이한테 미안해?”
“…….”
끄덕끄덕.
“그럼 아까 왜 그런 거야. 친구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고, 안 좋은 말로 욕하고.”
티아 공주는 잠시 입을 우물거리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공주고, 세진에게 능력도 주고, 새로운 신분도 줬는데. 나보다 퓨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질투가 난 거야?”
끄덕끄덕.
‘허허. 이것 참.’
질투가 났다고 솔직히 말하는 티아 공주의 모습에 내심 기분 좋기도 하고,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질투로 인해 티아 공주가 한 행동은 전혀 귀엽지 않은 행동이었다.
“티아. 아까 내가 퓨이 만난 이야기 해줬지?”
“응.”
“퓨이는 내가 어려웠을 때부터 이 텐트에서 함께 지내며 서로 의지한 가족이야. 아무리 많은 능력과 높은 신분을 준다고 해도 가족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어.”
“…….”
그녀는 내 말에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공주의 능력으로 내게 능력과 신분을 준 건 정말 고맙지만, 퓨이를 무시하면서 그런 안 좋은 말을 하는 건 크게 잘못한 일이야.”
티아 공주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어느새 커다란 눈망울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나 내쫓을 거야?”
불안한 표정에 처연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 모습에 나는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아니. 아냐. 아까는 내가 너무 화가 나서 그렇게 말한 거야.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불안해하는 티아 공주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달랬다.
“대신 퓨이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해야 해. 티아도 그 행동이 나쁜 행동인 거 알고 있지?”
“응…….”
“자. 그럼 퓨이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해.”
티아 공주는 내 무릎에서 내려와 퓨이를 향해 쭈뼛쭈뼛 다가섰다.
“퓨이야. 아까 잘못 뒤집어씌우고, 나쁜 말 해서 미안해.”
“퓨이?”
“나 용서해 줄 거야?”
“퓨이! 퓨이!”
애초에 그때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것인지, 티아 공주를 배려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퓨이는 밝은 표정으로 티아 공주에게 다가가 친밀함을 표현했다. 그런 퓨이의 행동에 티아 공주도 웃으며 퓨이를 꼭 껴안았다.
나는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티아 공주를 다시 내 무릎 위에 올리고, 눈물로 촉촉하게 젖은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티아야. 나도 아까 화내면서 소리 질러서 미안해. 무서웠지?”
“응. 세진이 화내서 너무 무서웠어.”
“그래. 앞으로는 절대 안 그럴게.”
부드러운 민트색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티아야. 앞으로 네가 여기 있는 건 나에게 권능이나 신분을 줘서 그런 것도 아니고, 네가 아르키트 왕국의 공주여서도 아니야.”
“…….?”
“이제는 너를 퓨이랑 똑같이 내 가족으로 생각할 거야. 고귀한 아라스티아 공주가 아니라,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평범한 티아여도 상관없어.”
“정말이야?”
“물론! 대신 티아도 나랑 퓨이를 가족으로 생각해야 해. 네가 우리를 가족으로 생각해 주고 위해준다면 누추한 곳이지만 여기 계속 있어도 돼.”
티아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티아가 다시 아르키트 왕국의 가족들을 만나서 돌아갈 때까지 쭉 내가 지켜줄게. 알았지?”
“응! 알았어.”
전에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와 함께, 티아는 작은 두 팔을 벌려 내 품에 안겨들었다.
“세진. 고마워.”
티아는 고맙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서러움과 슬픔이 담긴 눈물이 아니라,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퓨이도 반대편 품에 쏙 안겨들었다.
품 안에 작은 소녀와 슬라임을 꼭 껴안으며 나도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렸을 적 어색했던 가족이란 단어를 보며, 꿈꾸듯 그린 평범하고 단란한 가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만.
조금은 특이해도 뭐 어떤가?
한쪽에는 눈물로 옷을 적시는 귀여운 티아와 한쪽에는 닭강정 소스로 옷을 적시고 있는 퓨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마음이 뿌듯한데.
나에게 계속 고맙다고 말하는 티아에게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원했던 가족이라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으니까.
나는 품속의 티아와 떼어내며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티슈로 닦아주었다.
“헤헤.”
티아는 눈물로 퉁퉁 부어버린 얼굴로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 웃음 지었다.
“아이스크림 다 녹겠다. 어서 먹어.”
“응. 세진도 먹어.”
“응?”
“가족끼리는 맛있는 것도 나눠 먹어야지. 자!”
“…….”
해맑은 미소로 스푼 가득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티아.
나는 미소 가득한 티아의 권유를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으어억. 치약 맛!!’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과 과도한 상쾌함이 언밸런스하게 내 입을 괴롭혔다.
하지만 괴로운 표정을 숨기며 티아에게 말했다.
“으으음. 맛있네.”
“그치? 자. 더 줄게.”
“음? 아니. 티아 많이 먹어. 나는 티아 먹는 것만 봐도 좋아.”
“헤헤. 알았어.”
겨우 티아의 민트 초코 세례를 거절하고, 바닥에 놓여 있던 문제의 태블릿PC를 집어 들었다.
오늘 있었던 일의 발단이 된 태블릿PC.
‘어린이 보호 기능을 해놔야겠어.’
나는 태블릿PC의 설정을 확인하여 결제 기능에 비밀번호를 설정해 막아두고.
애들이 보기에 부적절한 영상이나 정보가 보이지 않도록 추가로 설정을 확인했다.
설정 때문에 내가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태블릿PC를 만지니, 아이스크림과 닭강정을 먹던 티아와 퓨이가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마 자신들이 잘못 때문에 또 혼내는 게 아닌지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긴장한 표정에 아까 화내고 소리 질렀던 일이 생각나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흠흠, 애들아. 내가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설정해 놨으니까. 마음껏 써도 돼.”
티아와 퓨이가 살짝 눈치를 보더니, 대뜸 티아가 태블릿PC를 가리키며 외쳤다.
“세진. 저 녀석이 나빠. 우리를 속인 거야.”
“응?”
“나랑 퓨이는 게임만 하고 있었는데 계속 뭘 사라고 시켰어.”
“퓨! 퓨! 퓨!”
옆에서 티아의 말을 듣고 있던 퓨이도 흥분해서 맞장구를 쳤다. 아무래도 결제 유도 문구가 아이들에게는 당연히 그렇게 보일만 했다.
나는 억울하게 나쁜 놈으로 몰리는 태블릿PC를 바라보다 아이들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앞으로 그런 짓 못 하게 내가 이 녀석 혼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내 말에 아이들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미안하다. 태블릿PC야. 오늘은 네가 나쁜 놈 좀 해라.’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는 태블릿PC를 혼내는 척하며 아이들을 기쁘게 만들어줬다.
어쩐지 길게 느껴졌던 저녁이 끝나고 밤이 찾아왔다.
슬슬 잘 준비를 끝내고 자리에 누웠다.
평소처럼 퓨이가 내 옆구리를 파고들어 자리를 잡았다.
“…….”
지금까지 티아는 퓨이가 사용하던 푹신하고 커다란 방석 위에서 잠이 들었는데, 오늘은 내 곁에서 우물쭈물하며 서성거렸다.
나는 비어 있는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티아를 불렀다. 티아는 쪼르르 달려오더니 남아 있는 내 옆구리에 쏙 들어왔다.
“헤헤. 따뜻하다.”
행복한 표정의 티아를 바라보며 나도 미소 지었다.
“잘자. 애들아.”
“퓨이!”
“응.”
티아와 퓨이는 오늘 하루 피곤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롱고롱 안정된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잠든 와중에도 내 품에 딱 달라붙은 티아와 퓨이 덕분에 몸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끄응.”
최대한 아이들이 흔들리지 않게 몸을 뒤척이며 눈을 감았다. 몸은 불편했지만, 마음만은 정말 편안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