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38화
16. 아라스티아 공주
아라스티아 공주와 균열에 같이 살게 된 지 며칠이 지났다.
퓨이와 단둘이 있을 때는 조용한 분위기일 때가 많았는데, 티아 공주의 합류로 분위기가 한층 떠들썩해졌다.
“퓨이야. 저기! 저기!”
“퓨이. 퓨이.”
태블릿PC 화면을 노려보며.
쉴 새 없이 달려드는 적들을 작은 손과 앙증맞은 꼬리로 열심히 두드리는 두 아이.
오늘 새로 깔아준 게임으로 재미있게 노는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너무 게임에 중독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쩝. 나도 모르게 보호자 같은 생각을 하게 되네.’
아르키트 왕가의 권능 [균열 특이점]의 힘으로 바깥세상과 단절돼있던 균열에서도 인터넷과 전화통화가 가능해졌다.
짧은 통화, 메시지를 받을 때도 일일이 균열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어졌고, 텐트에 편하게 누워 휴대폰으로 시간 보내기도 가능해졌다.
처음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을 때처럼 삶의 질이 확 올라간 느낌이 들었다.
특히 태블릿PC를 통해 인터넷을 처음 접한 퓨이와 티아 공주는 최근에 신세계를 경험하는 중이었다.
-퍼펑.
-Game Over…….
티아 공주와 퓨이의 노력이 무색하게 적들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게임이 끝나버렸다.
“퓨이! 내 말을 좀 더 잘 들었어야지.”
“퓨우우…….”
게임 오버를 퓨이 탓으로 돌리며 면박을 주는 퓨이 공주. 그 모습에 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티아 공주는 스스로 고귀한 신분이라는 의식에 휩싸여 가끔 퓨이를 무시하거나 나에게 떼를 쓰는 일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었으나 딱히 혼을 내거나 주의를 시키지 않았다.
일단 퓨이는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하고 있었고, 티아 공주 역시 나쁜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나중에 한 번 주의시켜야겠어.’
나는 외출할 준비를 마치고 다시 게임에 푹 빠져 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다녀오는 동안 과자 너무 많이 먹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전화하는 법 알지?”
“알고 있어.”
“퓨이!”
“좋아. 그럼 갔다 올게.”
텐트 앞까지 나와 손과 꼬리를 흔드는 아이들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다 균열 입구를 빠져나왔다.
* * *
“으으. 또 못 깼어.”
“퓨우우우.”
끝나버린 게임 화면을 티아 공주와 퓨이가 망연자실하게 쳐다봤다.
[보석을 이용해 게임을 이어 하시겠습니까?]
게임 화면에 떠오르는 문구.
게임을 이어할 수 있다는 말에 티아 공주와 퓨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어하기 버튼을 누르자 또 다른 문구가 떠올랐다.
[사용할 수 있는 보석이 없습니다. 유료 결제를 통해 보석을 충전하시겠습니까?]
“유료 결제?”
“퓨이?”
클리어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티아 공주와 퓨이는 화면 이것저것 손대기 시작했다.
* * *
균열을 나와 내가 향한 곳은 신지아의 아티팩트 공방이었다.
한동안 연구에 집중하고 싶다며 부품 주문도 받지 않고, 주문이 없으니 자연스레 일거리가 없어 나도 출근을 하지 않게 되었다.
저번에 공물 바칠 때 아이스크림 힌트로 도움도 받았었고, 너무 소식이 없으니 걱정되기도 해서 오랜만에 공방으로 향했다.
지난번 통화로 좋아한다고 말했던 아이스크림을 선물로 사서 한 손에 들고 공방에 도착했다.
공방 2층으로 올라가자, 내가 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신지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번에 보았던 꾀죄죄하고 반쯤 폐인 같았던 모습이 아니라, 오늘은 상대적으로 말끔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세진 씨.”
“네. 연구는 잘되고 계세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연락드리려고 했었어요.”
“……?”
그녀는 시원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미완성의 연구. 결국 제가 완성했어요.”
“아……. 축하해요. 지아 씨.”
“고마워요. 세진 씨 덕분이에요.”
“아뇨.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정말이에요. 세진 씨가 전해 준 마석과 문양을 연구하면서 얻은 영감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빨리 연구를 완성하지 못했을 거예요.”
연구 성공의 공로를 나에게 돌리는 신지아의 모습에 나는 멋쩍은 듯 볼을 긁적거렸다.
“근데 좀 더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담담하시네요.”
“그러게요. 오히려 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런지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더 들더라고요.”
“…….”
신지아는 아련한 표정과 함께 책상 위의 노트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내가 사 온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세진 씨. 저번에 이야기하셨던 거 기억하세요?”
“어떤 이야기?”
“문양을 사용한 아티팩트의 과부화 문제, 그리고 두 개의 문양을 동시에 이용한 마법 회로.”
“아. 기억나죠.”
거미 여왕 균열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아티팩트의 과부화 문제와 두 개의 문양을 동시에 사용하는 회로의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개인 연구하면서 짬 나는 시간에 그것도 조금 실험을 진행해 봤어요.”
“바쁘셨을 텐데…….”
“머리 식힐 겸 쉬엄쉬엄 실험한 거라 오히려 좋았어요. 기분전환도 됐고.”
“…….”
‘이 여자는 일 중독인 건가, 아니면 아티팩트에 미친 건가?’
신지아는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그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요.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다른 문제 때문에 불가능해요.”
“다른 문제요?”
“지금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아티팩트 재료로는 문양의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어요. 조금 더 고급 재료가 필요해요.”
“으음. 그럼 돈 문제인 건가요?”
내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아티팩트의 고급 재료는 국가의 허가을 받은 제작자만 다룰 수 있어요. 지금 우리 아티팩트 공방의 수준으로는 허가를 받아내기 힘들어요.”
“아…….”
아티팩트 고급 재료들은 대부분 균열에서 구할 수 있고, 이 재료들은 국가에서 전략자원으로 엄격히 관리하기 때문에 아무나 취급할 수 없다.
부품 하청을 받아 겨우 운영을 이어나가는 아티팩트 공방에게 허가를 내줄 리가 없었다.
“그럼 방법이 없는 건가요?”
“해결책이 있어요.”
“……?”
“아티팩트 경연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면 인정을 받고, 허가를 받을 확률도 높아질 거예요.”
저번에 한 번 그녀가 언급했던 경연대회.
나도 직원으로서 도와주기로 했던 그 대회를 다시 한번 언급했다.
“완성한 아버지의 연구와 제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이번 대회에 참가할 거예요.”
신지아는 결연한 눈빛으로 내 눈을 응시했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해서 아버지의 연구와 아티팩트 제작자로서 인정받을 거예요. 그리고.”
말을 멈추고 그녀의 시선이 옮겨진 곳에는 과부하로 고장이 나버린 내 아티팩트가 있었다.
“세진 씨가 말했던, 어떤 문양의 힘도 견뎌낼 수 있는 아티팩트 꼭 만들어 드릴게요.”
나도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지아 씨.”
* * *
신지아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는 아티팩트 공방을 빠져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버스를 타러 가기 위해 큰길로 향했겠지만, 오늘은 반대로 골목 구석으로 향했다.
주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골목 구석에 자리 잡고, 두 번째로 얻은 권능을 사용했다.
-<균열 차원문>
권능을 사용하자 눈앞에 균열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를 통과하자 익숙한 텐트가 보였다.
신지아의 아티팩트 공방에서 순식간에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루 3번이라는 사용 제한이 있지만, 어디서든 균열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능력인 것 같았다.
내가 텐트로 다가서자 인기척을 느낀 퓨이와 티아 공주가 튀어나오듯 모습을 드러냈다.
“세진!”
“퓨이!”
반갑게 맞아주는 아이들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녀왔어. 나 없는 동안 잘 놀고 있었어?”
“응. 세진. 이거 봐. 세진 없는 동안 우리가 신기록을 달성했어.”
“퓨이!”
둘은 태블릿PC 화면을 보여주며 나에게 자랑했다.
‘어? 뭐야. 어떻게 이런 점수를 냈지?’
내가 태블릿PC에 깔아준 게임이라 몇 번 해봤지만, 두 아이가 절대 달성할 수 없는 고득점이 기록되어 있었다.
의구심에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엄청난 현질로 이뤄낸 게임 기록이었다. 확인해 보니 내가 없는 사이에 수십만 원어치의 유료 아이템을 구매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결제 금액을 확인하고 나도 모르게 아이들을 향해 아쉬운 소리를 내뱉었다.
“아니. 유료 결제를 하면 어떻게 해?”
“…….”
“퓨우우.”
“이렇게 막 결제해 버리면 안 돼. 전부 돈을 내고 사용하는 거라고.”
조금 높아진 내 목소리에 아이들은 몸을 움찔거렸다.
축 처져 버린 두 아이의 모습을 보며 아차 싶은 감정이 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결제 금액에 민감해져 아이들 탓으로 돌리고 말았다.
감정을 정리하려 잠시 말을 멈췄을 때, 돌연 티아 공주가 퓨이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퓨이가 하자고 그랬어. 나는 아무 잘못 없어.”
“퓨이?!”
갑작스러운 티아 공주의 고자질에 퓨이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티아 공주의 행동에 감정을 추스르던 내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지금 친구를 고자질하는 거야?”
“친구 아냐. 내 시종이야. 그러니까 나는 잘못 없어.”
또다시 퓨이를 시종이라 칭하며 잘못을 덮어씌우는 티아 공주. 그녀의 행동에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아라스티아!!”
움찔.
내 화난 외침에 티아 공주가 움찔 놀랐다.
“왜 퓨이에게 못되게 구는 거야. 같이 사는 가족인데.”
티아 공주는 오히려 악을 쓰며 외쳤다.
“나는 아르키트 왕국의 공주야. 저 미물이 아니라 내 편을 들어야 하는 거 아냐?”
퓨이를 미물이라 부르며 비하하는 모습에 나는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며칠 동안 이곳에 지내면서 공주라는 신분으로 퓨이를 무시하거나 내게 막 대하는 태도가 조금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 한 나라의 공주였다면 이곳과 환경이 많이 달랐을 테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까.
무엇보다 나쁜 마음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티아 공주는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퓨이는 어려웠을 때 나와 함께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가족을 미물이라 부르는 행동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왜 네 편을 들어. 잘못한 건 너잖아.”
“이익! 신분도 상승시켜주고, 권능도 줬는데. 당연히 내 편을 들어야지. 다시 천민으로 돌아가고 싶어?”
“천민으로 돌아가도 상관없어. 권능도 다시 가져가. 너보다 퓨이가 훨씬 중요해.”
티아 공주는 내 말에 충격받은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다 필요 없으니까 잘난 네 왕국으로 돌아가 버려!”
“…….”
내 외침에 악을 쓰며 대답하던 티아 공주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윽고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흑…… 흐…… 으아아앙!”
“…….”
“흐으아아앙!”
눈앞에서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티아 공주 때문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퓨이도 당황하며 티아 공주의 주변을 맴돌았다.
울고 있는 공주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에 혼란스러워하다가 나는 아주 오래전 추억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시설에서 생활할 때 같이 놀던 친구와 심하게 다퉜던 일이 있었다.
뭐 때문에 싸웠는지는 지금에서야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사소한 일이었다.
그때 싸움을 말린 여자 선생님이 화해하라고 다그쳤지만, 나와 친구는 잘못한 게 없다며 서로를 탓했다.
-이렇게 말 안 들으면 둘 다 내보내 버릴 거야!
선생님의 화난 외침에 나와 친구는 몸이 굳어버렸다.
친구는 크게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잘못을 빌었다.
여자 선생님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꽉 껴안아주셨다.
친구는 더 서럽게 울었고, 나는 선생님의 품속에서도 계속 잘못을 빌었다.
어리다고 눈치가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어릴수록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그에 맞춰 행동하려 한다.
그래서.
너무 무서웠다.
정말 내쫓을 것 같아서.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질까 봐 두려웠다.
아마 서럽게 울던 그 친구도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으리라.
그리고 눈앞에서 울고 있는 티아 공주에게서 예전 그 친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잠시 후.
서럽게 울던 티아 공주가 겨우 울음을 멈추고.
나는 티아 공주를 무릎 위에 앉혀두고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닦아주었다.
악을 쓰던 모습은 어디 가고.
벌겋게 달아오른 눈과 코, 푹 숙인 고개와 좁아진 어깨가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이런 소녀에게 소리 질렀던 나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퓨이.”
“…….”
퓨이도 티아 공주가 걱정되는지 계속 주변에서 맴돌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계속 눈을 피했다.
어떻게 이 소녀의 기운을 차리게 해줄지 고민하다, 단순한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티아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
“저번에 먹은 츄러스 사줄까? 아니면 다른 간식?”
“…….”
티아 공주는 고개를 돌리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
“과자 사줄까? 아니면 아이스크림?”
“…….”
“응?”
“민트 초코…….”
“알았어. 내가 금방 가서 사 올게.”
티아 공주를 조심스럽게 방석 위에 올려주고 나가려는데.
“퓨이.”
퓨이가 나를 불렀다.
내가 퓨이 쪽을 바라보자 퓨이는 글자가 적힌 스케치북을 들고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스케치북에는 [닭강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퓨이야. 언제 그렇게 빨리 글을 쓸 수 있게 됐니?’
나는 퓨이의 재빠른 행동에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닭강정도 사 올 게 퓨이야.”
“퓨이.”
* * *
오물오물.
내 왼쪽 무릎에는 티아 공주가 앉아서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을, 오른쪽에는 퓨이가 닭강정을 먹고 있었다.
티아 공주도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에 기분이 아주 조금 풀렸는지 얼굴에 살짝 생기가 돌았다.
티아 공주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서 고민하다 전부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렸을 때 고아였던 이야기부터, 어린 시절 시설에서 자랐던 이야기, 친구와 손잡고 무작정 도시로 향했던 이야기.
혼잣말 같은 내 이야기에 티아 공주는 아이스크림 스푼을 내려놓고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배신당했다는 이야기에 조금 감정을 내비치고, 퓨이를 만난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고, 마지막 거미 여왕 균열에서 두 눈을 빛냈다.
길었던 내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편안한 목소리로 티아 공주에게 물었다.
“티아야. 네 이야기도 해줄래?”
“……알았어.”
티아는 아주 천천히 그녀와 아르키트 왕국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