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36화
15. 상상도 못 한 정체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구슬에게 말했다.
“구슬아. 이거 네가 한 거야?”
-우우웅.
구슬은 내 질문에 대답하듯 낮게 진동했다.
나는 그런 구슬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감정을 수습하며 다시 눈앞의 글들을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균열 탐색, 균열 획득, 보금자리 생성. 모두 내가 능력을 각성하면서 처음으로 얻은 스킬들이었다.
‘이 스킬들과 구슬은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처음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에서 구슬을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기억을 샅샅이 생각해 보았지만, 연관성을 찾기 힘들었다.
단순히 균열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추측만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복잡한 생각은 접어두고 눈앞의 문제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스킬창을 열어 스킬들을 확인했다.
《스킬》
[균열 탐색 Lv.2](0/3)
-집중30 필요.
-E등급의 균열을 탐색할 수 있습니다.
-위험한 균열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 30개의 균열을 탐색하기 (달성)
[균열 획득 Lv.2](0/3)
-조건을 만족하면 균열의 소유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현재 최대 소유할 수 있는 균열 개수 : 2개 (2/2)
-마석을 이용해 균열의 소유권 획득할 수 있습니다.
↳ 균열 획득 10번 사용하기 (달성)
[보금자리 생성 Lv.3](0/3)
-소유권을 얻은 균열에 보금자리를 생성합니다.
-보금자리에 펫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1/1)
↳ 보금자리 생성 후 균열에서 15일 지내기 (달성)
-보금자리에 손님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0/4)
‘균열 탐색’과 ‘균열 획득’은 각각 1레벨씩, ‘보금자리 생성’은 2레벨을 올려야 구슬의 요구 사항을 만족할 수 있다.
남아 있는 SP(스킬포인트)를 따져봤다. 일단은 구슬이 요구하는 레벨은 충분히 달성할 만한 포인트가 쌓여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라도 레벨을 올릴 수 있는 상황.
‘올려서 나쁠 건 없겠지?’
나는 짧은 고민 끝에 3개 스킬의 레벨을 올리기 시작했다. 모두 14 SP를 사용해 구슬이 요구 조건을 달성했다.
내가 요구 조건을 달성하자 구슬이 낮게 진동했다.
-우우웅.
[요구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정체불명의 존재가 ‘아르키트 왕가의 징표’를 요구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요구 조건을 달성하자마자 또 다른 조건이 튀어나왔다.
저번 거미 여왕 균열에서 획득했던 ‘아르키트 왕가의 징표’를 요구하는 구슬.
나는 ‘아르키트 왕가의 징표’를 꺼내 들고 고민했다.
[아르키트 왕가의 징표][----][귀속]
-고귀한 힘이 담긴 아르키트 왕가의 물건.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동그란 동전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었고. 설명은 평범했지만 특이하게 아이템 등급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딱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흘러나왔다.
범상치 않은 물건이기에 쉽게 넘겨주기 어려웠다.
눈앞의 구슬이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더욱 결정이 힘들었다.
‘끄응. 어차피 어디에 쓰는 아이템인지도 모르는데, 그냥 넘기는 게 좋으려나?’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떨리는 표정으로 왕가의 징표를 구슬을 건넸다.
왕가의 징표가 구슬 가까이에 도착하니 마치 액체처럼 구슬 표면에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갑자기 일어난 이상한 현상에 놀라는 사이. 구슬이 낮은 진동음을 반복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처음에는 낮고 잔잔했던 진동음이 점점 크고 우렁차게 변해갔다.
구슬의 진동음은 텐트는 물론이고 균열 내부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커졌다.
살짝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퓨이.”
진동음에 놀란 퓨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내 품에 안겨들었다. 나는 품속의 퓨이를 달래며 끝까지 구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우우웅!!! 우우우웅!!! ………….
텐트가 터져나갈 듯이 진동음을 내던 구슬이 돌연 진동음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으음?”
“퓨이?”
나와 퓨이가 불안함과 호기심이 뒤섞인 표정으로 구슬을 응시했다.
새하얀 광채를 내뿜던 구슬은 점점 광채가 흐릿해지더니, 마치 죽은 것처럼 어떠한 빛도 뿜어내지 않았다.
잠잠해진 구슬을 보고 내 품 안에 있던 퓨이가 튀어나와 구슬을 향해 다가갔다.
“퓨이…….”
퓨이가 조심스럽게 꼬리로 건드려도 구슬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용감해진 퓨이가 꼬리로 구슬 표면을 슬슬 쓰다듬는데.
-쩌적!
구슬의 상단부에 쩍! 하고 깨진 자국이 발생했다.
꼬리로 쓰다듬던 퓨이가 깜짝 놀라 다시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나도 구슬에 생긴 금을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쩌저적! 쩌억!
구슬에 생긴 금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구슬 표면 전체로 퍼져갔다.
-파바밧. 화아아악!
곧이어 구슬은 사방으로 파편을 튀기며 폭발하듯 깨져나갔고, 그 안에서 엄청난 광채가 흘러나왔다.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밝은 광채에 손으로 눈을 가렸다.
한동안 텐트 안은 휘황찬란한 광채로 가득했다.
겨우 눈을 뜰 수 있을 정도로 빛이 약해지자 손가락 틈새로 어렴풋이 어떤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텐트 안을 뒤덮던 광채가 사라지고, 나와 퓨이의 눈앞에 구슬을 깨고 나온 정체불명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
“퓨이?”
“…….”
밝은 청록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인형처럼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귀엽고 고급스러운 느낌의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마치 동화 속 요정 같은 분위기를 뿜어냈다.
무릎 높이만 한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여자아이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그녀는 살포시 허공으로 떠올라 나와 비슷한 눈높이로 올라섰다.
자연스럽게 허공에 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봤다.
“…….”
“…….”
“…….”
“…….”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나를 바라보던 여자아이의 표정에 점점 불만스러운 감정이 차올랐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영문을 모르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여자아이는 작은 볼을 귀엽게 부풀리더니 빽! 하고 소리 질렀다.
“뭐 하는 거야! 먼저 예의를 차려 인사해야지!”
“……?”
내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반응을 보이자 여자아이는 허공에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아아. 정말! 예법 몰라?”
“모르는데……?”
예법을 모른다는 말에 그녀는 얼굴을 와락 구기더니, 나에게 예법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졸지에 조그마한 여자아이에게 예절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한 손은 뒷짐 지듯 등 뒤로, 나머지 한 손은 가슴팍에 대고 살짝 고개 숙이며 말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에 사는 평범한 시민 전세진이라고 합니다. 고귀하신 분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예절 교육을 통해 배운 대사를 따라 읽었다.
온몸이 오그라들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가슴팍에 있던 손을 그녀를 향해 공손하게 내밀었다.
여자아이는 내 인사에 이제야 좀 만족스러운 듯, 최대한 우아한 표정과 몸짓으로 내 손 위에 그녀의 작은 손을 가볍게 올렸다.
“흠흠.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위대한 아르키트 왕가의 공주, ‘아라스티아’라고 해요.”
“…….”
“저를 그곳에서 꺼내주신 은혜. 왕가를 대표해 감사드릴게요.”
아까 불만스럽게 외치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르게 차분하고 잔잔한 목소리였지만.
뭐랄까?
어린아이가 억지로 공주님 흉내를 내는 느낌이 들어 엄청 풋풋하고 귀엽게 느껴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웃는 거야?”
“아니. 그냥 귀여워서.”
“이익. 다 큰 숙녀에게 귀엽다는 말은 실례야.”
누가 봐도 아직 어린 소녀인데 억지 부리는 모습이 그녀의 의도와는 반대로 더 귀엽게 보였다.
“퓨이!”
“응?”
“퓨이! 퓨이!”
내 품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퓨이가 작은 공주님을 향해 반갑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녀는 퓨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고귀한 신분이야. 너 같은 미물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퓨이?”
“너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없어. 그러니까 그렇게 친한 척하지 마.”
“퓨이?!”
쌀쌀맞은 그녀의 반응에 퓨이가 충격받은 표정이 되었다. 나는 품 안의 퓨이를 위로하며 말했다.
“구슬일 때는 그렇게 잘 붙어 다녔잖아?
“그…… 그런 거. 난 기억 안 나.”
그녀는 필사적으로 거짓말하며 구슬 모습일 때의 일을 부정했다.
“퓨우우…….”
퓨이는 그녀의 반응에 실망한 표정으로 축 처져 버렸다.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퓨이를 품 안에 안고 쓰다듬어줬다.
한편 슬쩍슬쩍 퓨이의 실망한 모습을 살피던 아라스티아 공주.
초조한 듯 몸을 작게 흔들더니 휙 하고 퓨이 곁으로 날아왔다.
“너. 퓨이라고 했지?”
“퓨이?”
“나는 아르키트 왕국의 공주님이라 너와는 친구가 될 수 없어. 대신 내 시종으로 삼아줄게. 어때?”
“퓨이! 퓨이!”
선심 쓰듯 시종으로 삼아주겠다는 말에 퓨이가 기뻐하며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온몸을 비비며 친근함을 표하는 퓨이가 싫지는 않은지 공주는 작게 미소 지었다.
“친구가 아니야. 시종이라니까.”
“퓨이.”
다시 친해진 둘의 모습을 나는 흐뭇하게 바라봤다.
한동안 퓨이의 애정 공세를 받아주던 아라스티아 공주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전세진이라고 했지?”
“어. 맞아. 그러니까 아라스티아 공주님?”
“편하게 ‘티아’라고 불러도 돼. 아무나 나를 그렇게 부를 수 없으니 영광으로 알라고.”
그녀는 선심 쓰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알았어. 티아 공주님.”
“그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나는 살짝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체불명의 공간에서 그녀를 구출해 줬고, 이런저런 요구 사항도 모두 들어줬으니.
당연히 달콤한 보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네가 저지른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처벌이야.”
“뭐? 처벌?!”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에 놀라 소리쳤다.
“그래. 처벌.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아니. 이게 무슨?”
나는 억울한 심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거야?”
“왕가의 허락 없이 왕가의 기술을 배우고 사용한 죄, 천한 신분으로 권한도 없는 땅을 소유한 죄.”
“설마 아르키트 회로 이론을 말하는 거야?”
“당연하지. 그 기술은 왕가의 허락이 떨어져야 배울 수 있는 기술이야. 특히 천한 신분의 존재는 더더욱 배울 수 없어.”
허공에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말을 잠시 멈췄다.
“아니. 잠깐, 잠깐만. 왜 내가 천한 신분이라는 거야?”
내가 부모님도 없는 고아에 시설 출신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천한 신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니, 신분제가 없어진 지가 언젠데.’
티아 공주는 내 질문에 곧바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내 눈앞에 뭔가 떠올랐다.
바로 내 상태창이었다.
“아…….”
《상태》
전세진 Lv.12
직위 : [천민][불법 체류자]
Exp(125/5500)
고유 능력 : 『균열 노숙자』
능력치 【체력 21】【근력 13】
【민첩 11】【지능 26】
【집중 26】【저항 13】
추가 능력치 : 10 Point
그녀의 말대로 내 상태창에는 [천민], [불법 체류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고 있던 나의 상상도 못 한 정체!
너무 억울했지만, ‘균열 노숙자’라는 능력에 ‘천민’, ‘불법 체류자’라는 표현이 너무 잘 들어맞는 것 같았다.
“이제 이해한 거야?”
“…….”
찝찝했지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가의 권위를 위협하는 중죄를 지었지만, 공주인 나를 구출한 공로를 인정해 지금까지의 죄는 모두 묻지 않을 거야.”
“오오. 고마워!”
“대신!”
그녀가 다시 한번 손을 내저었다.
[아라스티아 공주를 만족시킬 공물들을 준비하십시오.]
[그녀의 만족도를 70%까지 채우십시오.]
[높은 만족도를 달성할수록 더 많은 보상을 얻습니다.]
[만족도를 70%까지 채우지 못할 시 페널티를 받습니다.]
[페널티 : ‘균열 노숙자’, ‘아르키트 회로 이론’ 능력 회수]
“?!”
나는 눈앞에 떠오른 글들을 읽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균열 노숙자와 아르키트 회로 이론 능력을 회수한다면 사실상 나의 모든 능력을 회수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건 좀 페널티가 심한 거 아닌가?”
“왕가의 기술과 권한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냐. 그만한 능력과 존재 가치를 증명한 존재만이 얻을 수 있는 거야.”
겉모습은 어리지만 진지하고 흔들림 없는 그녀의 말에, 한 나라의 공주로서 위엄과 책임감이 느껴졌다.
“어떤 공물을 준비하면 되는 거야?”
“공주의 품위에 어울리는 공물이라면 뭐든지!”
그녀의 대답에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공주의 품위라. 명품 가방? 비싼 보석? 고급 요리?’
수많은 물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퓨이가 뭔가를 가지고 내 곁으로 왔다.
“퓨이!”
“응?”
“퓨이! 퓨이!”
“설마 이걸 공물로 바치라고?”
퓨이가 가져온 것은 정아윤이 퓨이 먹으라고 가져다준 조금 비싼 초콜릿 과자였다.
헤이즐넛 가루와 초콜릿 크림으로 코팅되어 금박지 포장으로 유명한 그 과자.
‘물론 일반 과자에 비하면 비싸긴 하지만…….’
내가 고민하는 사이 퓨이가 상자의 뚜껑을 열어 초콜릿 과자 하나를 티아 공주에게 건넸다.
공주는 약간 호기심 섞인 표정으로 과자를 받아들었다.
금박지 포장을 뜯어 과자를 한입 베어 무는 공주.
나는 기대감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으음. 맛있어!”
“……?”
[아라스티아 공주의 만족도가 70%를 달성했습니다.]
[추가적인 공물로 더 높은 만족도를 달성하십시오.]
“???!!!”
“퓨이야. 너무 맛있다. 나 하나 더 먹어도 돼?”
“퓨이!”
“고마워. 역시 내 친ㄱ…….아니, 시종이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초콜릿 과자를 나눠 먹는 티아 공주와 퓨이.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왕가의 기술과 권한을 얻기 위한 자격증명은 페레X 로X 한방으로 처리돼버렸다.
‘왕국의 공주라도, 역시 애는 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