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34화 (34/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34화

14. 액괴 대세는 액귀

한가로운 휴일 오전.

나는 텐트에서 퓨이와 새하얀 구슬과 함께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퓨이는 구슬과 함께 내가 사준 태블릿PC로 자신이 출현한 너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균열 안에서는 인터넷이 안 되기 때문에 오연우가 보내준 원본 동영상이었다.

“퓨이!”

-우우웅.

퓨이는 영상 속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듯 꼬리로 가리켰다. 그러자 구슬은 낮은 소리를 내며 반응했다.

나는 어느덧 친해진 두 녀석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첫 만남은 별로 좋지 못했던 퓨이와 구슬은 얼마 지나지 않아 꽤 친밀한 사이로 발전했다.

처음에 나 없이 둘만 남겨두는 게 걱정됐었는데, 내 걱정과는 달리 오히려 내가 없으니 둘이 급속도로 친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균열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그동안 퓨이가 혼자 외로웠던 것 같다.

오늘같이 내가 하루종일 균열에 있는 날이면 퓨이는 내 곁에 딱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는데, 지금은 구슬과 노느라 나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나는 회로 이론서를 읽으며 둘이 딱 붙어 영상 보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자니.

퓨이에게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기쁘기도 하고, 나에 관한 관심이 떨어진 것 같아 섭섭하기도 하고.

마치 친구랑 노는 걸 너무 좋아하는 자식을 보는 부모님 느낌이랄까?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면 피식 웃어버렸다. 결혼도 안 한 총각이 부모님의 감정을 느끼다니.

휴대폰의 시계를 슬쩍 확인한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잠시 균열 밖으로 나설 준비를 했다.

“퓨이야. 구슬아. 나 잠시 나가서 연우 데리고 올게.”

“퓨이!”

-우우웅.

나는 퓨이와 구슬의 인사를 받으며 균열을 나섰다.

균열 입구를 빠져나와 오연우를 맞이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평소에는 균열 입구가 있는 공원까지 알아서 찾아오는데, 오늘은 가져와야 할 짐이 많아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

-형. 거의 다 왔어요.

내가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딱 타이밍 맞게 오연우의 연락이 왔다.

-어. 나 약속 장소에 이미 나와 있어.

-3분 안에 도착해요.

얼마 후.

내 앞에 택시 한 대가 도착하고 앞 좌석에서 오연우가 내렸다.

“형. 뒤에 짐 있으니까 좀 꺼내줘요. 저는 장비를 좀 챙겨야 해서.”

“알았어.”

오연우는 나를 보자마자 택시 짐칸에서 같이 짐을 꺼내 달라 부탁했다. 일단 그의 요청대로 짐칸에서 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짐은 두 개의 상자였는데 하나는 꽤 묵직했다.

“어후. 이거 뭐길래 이렇게 묵직해?”

“안에 책이 들어 있어서 조금 무거워요.”

내가 짐을 꺼내는 사이 오연우는 택시비를 계산하고 뒷좌석에 놓여 있던 장비를 꺼냈다.

확실히 혼자서 들고 오기에는 많은 양의 짐이었다.

나와 오연우는 대충 짐을 나눠 들고 균열로 향했다.

* * *

균열에 도착한 오연우는 먼저 텐트로 달려가 퓨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퓨이야.”

“퓨이!”

퓨이는 이제 익숙해진 오연우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받아줬다.

-우우웅.

그리고 새하얀 구슬도 오연우를 보고 반응했다.

“어? 형. 이 구슬은 뭐에요?”

오연우가 텐트 안에 있는 구슬을 보고 내게 물었다. 하지만 나도 정확한 정체는 몰랐기 때문에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연우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구슬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파지직!

“아앗! 뭐야.”

구슬은 약한 전기를 발생시켜 오연우의 손길을 거부했다. 짜릿한 전기 맛을 본 그는 황당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형. 이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막 공격하는데.”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치 구슬아?”

-우웅.

이번엔 내가 구슬을 쓰다듬자 낮은 진동음을 내며 가만히 있었다. 반들반들하고 따뜻하고 기분 좋은 촉감이었다.

이 모습을 본 오연우는 감탄하며 말했다.

“형은 어디서 이런 신기한 애들을 데려오는 거예요?”

“어디긴 어디야. 균열에서 데려왔지. 그건 그렇고 오늘 가져온 짐들은 다 뭐야? 촬영 장비는 거의 다 가져온 거 아니었어?”

“아. 잠시만요.”

오연우는 가져온 상자를 뜯어 내용물을 꺼내 보여줬다.

“짜잔! 우리 너튜브 채널을 보고 출판사에서 보내준 선물이에요.”

“음. 동화책 전집이네?”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동화책 전집이었다. 세계 명작 동화부터 전래동화까지. 여러 종류의 동화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퓨우우우.”

퓨이는 눈앞에 놓인 수많은 동화책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갑자기 웬 동화책?”

“왜긴 왜겠어요? 다 퓨이 덕분이죠.”

이어진 오연우의 설명은 이러했다.

우리가 올린 첫 먹방 영상이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관심을 끌면서 의도하지 않은 현상이 일어났다.

첫째로 영상에 사용했던 닭강정 가게가 엄청난 관심 속에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지금은 지역의 유명한 맛집으로 자리를 잡았다.

둘째로 ‘오즈의 마법사’ 동화책이 갑자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특히 퓨이가 보여줬던 출판사의 책이 가장 큰 수혜를 입게 되었다.

그 뒤로도 몇 개의 먹방 영상을 제작해 올렸고, 그때마다 퓨이는 동화책 속의 물건과 인물을 이용해 맛을 표현했다.

최근에는 ‘백설 공주의 일곱 난쟁이 같은 맛’이라는 표현으로 또 한 번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꽤 유명한 음식 리뷰 블로거가 퓨이의 독특한 맛 표현을 극찬하며 이런 멘트를 블로그에 올렸다.

-퓨이의 맛 표현은 얼핏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맛의 궁금증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또 다른 맛의 관점을 제시한다. 퓨이는 맛 평가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멘트가 커뮤니티에 퍼져나가며 퓨이는 순식간에 ‘맛잘알 슬라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렇게 퓨이의 동화책 맛 표현이 인기를 끌게 되자,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동화책 출판사에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올해 새로 출시된 동화책 전집이 선물로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자기네 동화책을 사용해 달라는 말이네.”

“그렇죠. 이것 좀 잠깐 보실래요?”

오연우는 노트북을 꺼내 자신이 정리해 놓은 통계자료를 보여줬다.

“원래는 20, 30대 위주로 채널에 유입됐었는데, 지금은 40대, 10대 시청사 숫자도 빠르게 늘고 있어요. 특히 10대. 어린애들 사이에서 퓨이가 꽤 인기가 좋아요.”

“흠. 그래?”

“아직은 힘들지만 조금만 더 구독자랑 조회수를 확보하면 정식으로 광고나 협찬도 꽤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꽤 놀라고 있었다.

아직 너튜브 채널을 개설한 지 한 달 조금 되지 않았는데 구체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최근에는 나도 너튜브에 관심을 두고 틈틈이 우리 채널의 반응을 살피고 있는데 그 반응이 꽤 폭발적이었다.

“형. 어때요? 이 정도면 예상했던 것 이상인 것 같은데.”

“맞아. 정말로 상상했던 것 이상이네.”

“그럼 너튜브 계속하는 거죠?”

“…….”

오연우와 함께 올린 영상은 벌써 5개가 넘었다. 영상 5개만 찍어보자는 약속은 이미 지킨 상황.

이제는 내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에이. 뭘 고민하고 그래요. 댓글 보니까 나보다 형이 더 인기 많던데. 형도 댓글 봤죠?”

“어흠.”

오연우의 다 안다는 표정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영상 반응을 살피기 위해 댓글을 둘러보면 대부분이 퓨이에 관한 이야기지만 종종 나에 대한 댓글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면 쓴 퓨이 주인이라는 남자. 엄청 자상할 것 같음. 퓨이 바라볼 때마다 눈에서 꿀이 떨어짐.

-맞아. 퓨이 쓰다듬는 손에서 애정이 절로 느껴진다고 할까. 그리고 퓨이가 너무 행복해하는 표정이야.

-아오. 연우라는 남자도 귀엽지만, 가면 쓴 주인 얼굴 한번 봤으면 좋겠다.

대부분 호의적인 반응. 게다가 전부 여자가 남긴 것 같은 댓글들.

혼자서 이런 댓글을 볼 때마다 남몰래 흐뭇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솔직히 이건 제 공을 인정해 주셔야 해요. 처음에는 영상에서 형이 말하는 부분 다 편집한다고 싫어하셨잖아요.”

“…….”

“아마 그 어색하게 말하는 영상에 내보냈으면 절대 이런 반응 아니었을 거라고요.”

“그건 그렇지.”

확실히 이 부분은 오연우의 공이 컸다. 어색한 대사와 말투로 영상의 흐름을 깨는 것보다, 차라리 말 없는 신비주의 컨셉이 더 먹혔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상황.

“아직 촬영이나 편집이 어색하다는 지적이 좀 있어요. 그건 전적으로 제 역량 부족이죠. 하지만 이제는 더 확신할 수 있어요. 세진이 형. 이거 무조건 성공할 수 있어요.”

오연우는 두는 가득 열정을 불태우며 나에게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퓨이도 촬영하는 거 좋아하고, 나도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있었으니. 너튜브 계속할게.”

“아싸!!”

오연우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두 손을 불끈 쥐며 소리 질렀다.

“퓨이!”

-우우웅.

옆에서 오연우가 신나서 소리치니 퓨이랑 구슬도 따라 소리를 냈다.

“아. 퓨이에게 또 선물이 있어요.”

그는 또 다른 상자를 열더니 다시 이것저것 꺼내 놓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상자 안에는 알록달록한 크레파스, 색연필. 색칠 놀이 스케치북과 공책, 어린이용 퍼즐, 작은 장난감들이 가득했다.

퓨이는 처음 보는 화려한 물건들에 곧바로 관심을 표했다.

“퓨이?”

퓨이는 내 눈치를 살짝 보며 소리 냈다. 나는 곧바로 퓨이의 마음을 읽고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래. 전부 퓨이한테 온 거니까. 마음껏 만져봐도 돼.”

“퓨이!”

내 허락이 떨어지자 퓨이는 신나서 이것저것 만져보기 시작했다. 구슬도 퓨이 옆에 딱 붙어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했다.

‘너무 좋아하네. 내가 미리 사줄 걸 그랬나?’

어렸을 적 시설에 자라면서 이런 학용품이나 비싼 장난감들이 항상 가지고 싶었다.

가끔 시설을 후원해 주시는 분께서 선물을 보낼 때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사줬다고 자랑하는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기뻐하는 퓨이의 모습을 보며 그때 생각이 떠올라 살짝 씁쓸해졌다.

“세진이 형?”

연우가 내 이상한 표정을 읽고 걱정스러운 듯 불렀다.

“아, 미안. 퓨이가 좋아하니 다행이야.”

“그렇죠? 거기서 처음 연락 왔을 때 제가 잘 말해놨죠. 동화책 말고도 많이 보내주시면 꼭 퓨이가 가지고 노는 영상 꼭 찍어보겠다고요. 잘했죠?”

“그래. 잘했다.”

“헤헤.”

연우는 내 칭찬에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퓨이! 퓨이!”

-우우웅.

퓨이는 스케치북에 색연필을 써보더니 마치 신세계에 온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구슬도 신기한지 낮게 진동했다.

신나서 이것저것 꺼내 사용하는 퓨이의 모습을 나는 흐뭇하게 쳐다봤다.

“형. 제가 다음 컨텐츠도 생각해 왔거든요.”

“다음 컨텐츠? 먹방 계속하는 거 아니었어? 반응 엄청 좋은데 굳이 다른 걸 해야 해?”

“먹방 컨텐츠를 완전히 그만두는 건 아니에요. 약간 비정기적으로 너튜브에 핫한 음식 메뉴가 나올 때마다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으음.”

“그리고 지금은 퓨이의 활약 덕분에 반짝인기를 끌었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연우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너튜브에서 먹방이란 컨텐츠는 정말 흔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도전하는 컨텐츠였다.

퓨이라는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그 흔한 먹방 컨텐츠가 특별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 오연우 입장에서는 퓨이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먹방이라는 한정된 컨텐츠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너튜브에는 먹방 말고도 정말 무궁무진한 컨텐츠가 생겨날 수 있는 곳이니까.

“그래서 네가 준비한 컨텐츠가 뭔데?”

“흐흐. 누구나 할 수 있는 컨텐츠지만, 그래서 퓨이만 할 수 있는 게 있죠. 바로…….”

“퓨이! 퓨이!”

연우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갑자기 퓨이가 난입했다.

“왜 그래 퓨이야?”

“퓨이!”

퓨이는 꼬리로 내게 스케치북을 건넸다. 그곳에는 퓨이가 그린 그림이 있었다.

텐트 모양의 집에 어설프게 그린 사람 한 명과 동그란 구슬 하나 그리고 하늘색 슬라임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퓨이에게 물었다.

“이게 나야?”

“퓨이!”

퓨이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형용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며 그림을 다시 살펴보는데, 구석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족

사랑

그 삐뚤빼뚤한 글씨를 읽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짧은 단어들이지만 퓨이의 감정이 내 마음속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퓨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꼬옥 껴안아주었다.

“나도 사랑해 퓨이야.”

“퓨이!”

나는 한동안 퓨이를 품에서 놓지 않았고, 연우와 구슬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