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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33화 (33/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33화

나는 퓨이를 안은 채, 조심스럽게 구슬을 향해 다가갔다.

“…….”

새하얀 구슬은 푹신한 방석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분명 검은 공간에서 봤던 구슬이었다.

‘어떻게 텐트로 온 거지?’

천천히 손을 뻗어 구슬에 가져갔다. 매끈매끈하고 따스한 느낌이 구슬의 표면에서 느껴졌다.

-우우웅.

구슬이 내 손길에 반응하듯 낮은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오오.”

“퓨이?”

나와 퓨이는 구슬의 신기한 반응에 놀랐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퓨이를 위해 방석 위의 구슬을 양손으로 들어 텐트 구석으로 옮겨놓았다.

-우우웅. 우우웅.

-데구르르르.

구슬은 항의하듯 짧게 진동하더니, 다시 데구르르 굴러 방석 위로 되돌아갔다.

“퓨이이∼”

“이것 참. 하하하.”

퓨이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울상을 지으며 울음소리를 냈다. 방석 때문에 싸우는 두 녀석의 모습에 나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바닥에 양반다리로 주저앉고 그 위에 퓨이를 올려주었다. 울상을 짓는 퓨이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달래줬다.

방석보다는 내 다리 위가 마음에 들었는지, 퓨이는 다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퓨이’가 10레벨을 달성했습니다.]

[특성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퓨이를 안고 있자 특성 선택 알람이 떠올랐다.

[특성을 선택해 주십시오.]

[슬라임젤 강화]

-슬라임젤의 치료 효과를 강화합니다.

[산성용액 강화]

-산성용액의 피해량과 범위를 강화합니다.

[마석 추출 강화]

-마석 추출의 효율을 강화합니다.

퓨이도 레벨 10을 달성해서 특성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특성이 생기지는 않고 원래 있던 특성들의 강화 선택지가 떠올랐다.

잠시 선택지를 둘러본 나는 주저 없이 ‘마석 추출 강화’를 선택했다.

‘퓨이는 전투 쪽 능력보다는 아직 파밍 능력이 더 중요해.’

[‘퓨이’의 ‘마석 추출’을 강화했습니다.]

“퓨이!”

“그래. 그래.”

퓨이도 마음에 드는지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

-데구르르르.

내가 퓨이와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를 지켜보던 방석 위의 구슬이 우리 쪽으로 굴러왔다.

“응?”

-우우웅.

구슬은 내 앞에 서서 낮은 진동 소리를 냈다. 이 모습을 본 퓨이가 꼬리를 격하게 흔들며 화를 냈다.

“퓨! 퓨! 퓨이!”

-우우웅.

아무래도 구슬이 내 다리 위를 탐을 내는 것 같았고, 퓨이는 이 사실을 알고 화를 냈다.

“싸우지 말고.”

“퓨이.”

-우우웅.

어쩔 수 없이 구슬은 왼쪽, 퓨이를 오른쪽 다리 위에 나란히 올려주었다.

퓨이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는 구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고, 구슬은 어쨌든 다리 위로 올라와 만족하는 것 같았다.

나는 두 녀석 모두 쓰다듬어주며 싸우지 않게 달래주었다. 내 손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퓨이도 구슬도 잠잠해졌다.

‘거참. 신기한 녀석이네.’

나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행동하는 정체불명의 구슬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 * *

거미 여왕의 균열을 무사히 빠져나온 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일주일 동안은 정 씨 가족과 같이 균열 제거 일을 모두 쉬게 되었다. 단순히 격렬한 전투로 인한 휴식의 의미도 있었지만, 세상의 주목을 피하기 위한 의미도 있었다.

뉴스에 나올 정도로 크게 이슈가 된 건 아니었지만, 균열 제거 일은 하는 각성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사건이 꽤 주목을 받았다.

D등급이라 분류됐던 균열이 C등급으로 돌변했던 점. 높지 않은 수준의, 그것도 8명만으로 C등급을 끝까지 클리어했다는 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번 일에서 적지 않은 의문을 제시했다.

-과연 경험만으로 돌파 가능한 수준이었나?

수많은 의문과 가설이 제시되었지만, 명확히 밝혀지는 것 없이 이번 사건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나에게도 균열 관리센터에서 직접 연락이 왔었다.

용건은 이번 일에 대한 사과와 보상 문제라고 했지만. 집요하게 균열 안에서 있었던 일을 캐물었다.

나는 아저씨와 한창호에게 들었던 것처럼, 균열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줘야 할 의무는 없으므로 대답을 거부했다.

“궁금한 점 있으면 같이 들어왔던 직원분에게 물어보세요.”

“…….”

웃긴 점은 우리와 같이 균열에서 고생했던 센터 직원도 대답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이유인즉슨, 원래 그는 균열에 따라 들어가는 역할이 아니었는데 상사의 강요로 억지로 균열에 들어가게 된 경우였다.

거기다 균열 안에서 짐이 되는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나머지 일행에 미안한 감정과 고마운 감정이 있었고.

균열을 나와서도 직장인 관리센터가 아니라 우리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균열에 들어갔던 9명 모두 피해자라 할 수 있으니, 억지로 입을 열게 만들 방법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원래 받아야 했던 수당보다 더 높은 수당, 균열 관리센터 실수에 대한 보상, 균열 안에서 나온 아이템 판매 금액을 전부 더해서 한 사람당 1,500만 원에 가까운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

원래 수당보다는 훨씬 많은 금액이었지만, 목숨 걸고 싸웠다는 사실을 따지자면 그렇게 큰 금액도 아니었다.

내가 받은 돈은 얼마만 빼고 모두 은행으로 들어갔다. 남긴 돈으로 일주일 동안 편하게 놀고먹었다.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티팩트를 가지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게…….”

나는 고철로 변해버린 아티팩트를 신지아 앞에 두고 뻘쭘하게 서 있었다.

“제가 이거 만들고 점검하느라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세진 씨가 다친 곳 없이 돌아온 건 기쁘지만 이건 좀 서운하네요.”

정말 실망한 듯 어두운 표정을 짓는 신지아.

나는 그런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종이봉투 하나를 건넸다.

“지아 씨.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뭔데요?”

“이번 균열 일로 돈이 조금 생겨서. 지아 씨 생각나서 화장품 좀 사 왔어요.”

“…….”

“틴트인가? 이거 인기 있는 제품이라고. 그리고 손 많이 상하지 말라고 핸드크림도 하나 샀어요.”

“……줘봐요.”

그녀는 내가 사 온 종이가방을 받아들고 내용물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여자 화장품을 사본 적이 없어 아윤과 가게 직원의 도움을 받아 구한 물건들이었다.

“이거 TV에서 광고하는 거 아니에요? 비싼 것 같은데.”

“아뇨. 그렇게 많이 안 비싸요. 그리고 평소에 지아 씨가 신경 많이 써주시니까 이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죠.”

평소에 신세를 진 것도 있고, 이번 균열에서 그녀가 만들어준 아티팩트가 아니었으면 정말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신지아는 내 말에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얼굴이 풀어지면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내 눈치를 살짝 보더니 일부러 기쁜 기색을 숨기며 말했다.

“흠흠. 선물은 감사히 잘 받을게요. 그래도 화가 풀린 건 아니에요. 세진 씨 아티팩트는 문양까지 들어가서 정말 공을 많이 들이는 물건이에요. 조금은 조심히 다뤄주세요.”

“네. 미안해요. 다음에는 좀 더 조심할게요.”

“이번에 쓰면서 문제 있거나 그러진 않았죠?”

나는 균열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아티팩트에 생겼던 현상을 말했다.

그녀는 내 설명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네?! 최대 위력으로 사용했더니 아티팩트 회로에 손상이 생겼다고요?”

“네. 정말이에요. 그동안은 최대 출력으로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확실히 아티팩트 회로에 손상이 생겼어요.”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네요. 꽤 좋은 부품에 회로 설계도 신경 썼다고 생각했는데. 출력을 못 버틸 정도라니.”

신지아는 충격받은 모습으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받았던 화장품 선물은 어느새 내팽개치고, 노트와 펜을 꺼내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상황을 꼼꼼하게 물어보며 하나하나 노트에 기록했다.

나는 벌써 몰입해 버린 그녀를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 *

-띵동! 띵동!

-세진이 형?

“그래. 선우야.”

-철컥!

“오랜만이야.”

“딱 시간 맞췄네요.”

내가 집안으로 들어서자 부엌 쪽에서 중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진 씨 맞죠?”

“네. 처음 뵙겠습니다. 전세진입니다.”

“저는 서미정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두 아이의 어머니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의 여성이었다. 예전에 술 취해서 아내 자랑을 하던 아저씨의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호호. 그럼 편하게 할까? 우리 세진이 듣던 것보다 훨씬 잘생겼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여성스러운 분위기와 다르게 화끈한 성격의 어머님인 것 같았다.

이번엔 부엌에서 아저씨와 아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진이 왔구나.”

“오빠. 손에 든 건 뭐야?”

“제과점에서 빵이랑 과자 좀 사 왔어.”

“어머. 이런 거 안 사와도 되는데.”

나는 사서 온 선물은 아윤에게 넘기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커다란 상위에 수많은 반찬이 자리하고 있었다. 잔치 분위기의 잡채부터, 색깔 고운 김치, 갖가지 봄나물 무침.

“조금만 기다려. 밥이랑 나머지 반찬 내올 테니까.”

어머니는 이에 멈추지 않고 부엌에서 계속 무언가를 내오셨다.

구수한 된장찌개, 먹음직스러운 갈비찜, 간장 게장, 윤기 나는 흰 쌀밥까지.

상다리가 휘어진다는 표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한 상 차림이었다.

정말 융숭한 대접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차린 게 없어서 미안하네.”

“아니. 차린 게 없다뇨. 이런 대접은 난생처음입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어머니는 내 감상이 마음에 드는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셨다.

“자자.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식기 전에 먹자. 세진아, 많이 먹어라.”

“네.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정 씨 가족네 집에서 저녁이 시작되었다.

손님으로 초대받은 거지만,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 식사 기분을 조금 느껴볼 수 있었다.

“이 갈비찜 좀 먹어봐. 이번에 고기가 야들야들하게 잘 익었어.”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맛있는 고기의 부위를 손수 골라주며 내 쌀밥 위에 올려주셨다.

이미 공짜로 얻어먹은 반찬을 통해서 어머니의 요리실력은 예상했지만, 방금 완성된 따뜻한 요리가 전해 주는 맛은 또 전혀 다른 세계였다.

갈비찜은 야들야들하다 못해 녹아내릴 듯 부드러웠고, 구수하면서 칼칼한 맛을 살린 된장찌개, 다른 밑반찬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모두 맛깔났다.

하지만 가장 대박은 바로 살과 알이 가득 찬 간장 게장이었다.

“봄에 게가 제철이라 직접 담근 건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어머니는 내 입맛을 걱정하며 간장 게장을 먹기 좋게 잘라주셨다. 말은 걱정된다고 하셨지만, 눈빛은 이미 자신감으로 가득 차 계셨다.

마치 비장의 필살기를 꺼낸 것처럼.

먹기 좋게 자른 간장 게장을 한입 베어 물자, 짭조름한 간장과 함께 꽃게살과 알이 입안 가득 들어왔다.

거기에 뜨끈한 쌀밥을 한입 가득 먹으니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비리지 않은 간장과 담백한 꽃게살, 씹으면 씹을수록 느껴지는 쌀알의 단맛이 어우러지며.

이게 정말 궁극의 단짠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때? 먹을 만해?”

어머니의 기대감 넘치는 질문에 나는 조용히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맛깔나는 반찬에 밥 두 공기를 뚝딱 비우고.

게딱지에 참기름, 김 가루를 넣고 비빈 비빔밥을 먹고 나서야 수저를 놓을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극도의 포만감으로 늘어져 있는 나에게 어머니가 슬쩍 다가오셨다.

“세진아. 갈 때 간장 게장 좀 싸줄까?”

그날 저녁에 들었던 말 중에 가장 기쁘고 행복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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