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30화
엄청난 수의 거미 괴물과의 전투가 끝나고.
일행은 전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한창호와 아저씨는 힘든 표정이었지만 그 자리에 선 채로 주변을 계속 경계했다.
균열 관리 센터 직원은 아예 바닥에 누워버렸다.
얼굴을 감싸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 굉장히 험한 욕이 섞여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린 일행은 살았다는 안도감이 조금씩 불안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방금 엄청난 전투를 승리하긴 했지만, 아직 균열이 제거된 게 아니었다. 조금 전과 같은 전투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었다.
일행의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
‘우리가 이 균열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평범한 D등급 3단계 균열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전투를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현재 모인 일행의 능력으로 너무 벅찬 수준이었다.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휘어진 쌍검을 가지고 싸우던 20대 중반의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늦어서 죄송합니다.”
“먼저 출발한 건 우리 쪽이었습니다.”
그래도 늦게 도착한 우리와 뒤쪽에 빠져 있던 마법사 여자, 센터 직원은 상태가 괜찮은 편이었다.
한창호와 함께 앞줄에 나서 싸우던 쌍검 남자와 방패를 든 남자는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온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쌍검 남자는 한창호에게 말을 걸었다.
“조장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
한창호를 조장이라 부르며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지만, 한창호는 굳어진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쌍검 남자 옆에 앉아 있던 검과 방패를 든 남자도 한마디 거들었다.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수준으로는 절대 클리어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돌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누워 있던 센터 직원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동의했다.
“맞습니다. 분명 센터에서 착오가 있었던 겁니다. 내부로 계속 진입하는 건 위험하니 입구 쪽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나머지 일행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한창호도 아저씨도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센터 직원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혹시 중도 포기로 불이익을 받을까 봐 걱정하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전부 증언하겠습니다. 이건 분명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겁니다.”
계속 이야기를 듣던 아저씨가 한창호에게 말했다.
“창호야. 너는 아직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냐?”
“…….”
“너와 나의 케케묵은 예전 일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나는 그때 있었던 일 또 반복하고 싶지 않다.”
“…….”
“…….”
“……젠장!”
-푹!
한창호는 들고 있던 대검을 바닥에 내려찍으며 거칠게 감청을 토해냈다.
평소의 냉정한 표정은 사라지고, 그의 얼굴은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했다.
센터 직원은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에 답답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고요. 얌전히 균열 입구로 돌아가서 버티다가 탈출해야 합니다. 이미 센터 쪽에서 이상함을 깨닫고 미궁 진압 작전을 세우고 있을 겁니다.”
“센터 직원분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조장님. 여기서는 후퇴하는 게…….”
한창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용없다.”
“예?”
한창호의 대답에 직원이 흥분해 되물었다.
“소용없다니요? 균열이 미궁으로 변하기 15분 전에 잠시 입구가 열리지 않습니까?”
“그때까지 못 버틸 겁니다. 후퇴는 최악의 선택이니까.”
“그게 무슨…….”
한창호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대훈 아저씨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이 균열의 주인. 최종 보스는 거미 여왕입니다.”
“…….”
“다른 C등급 균열 보스에 비해 특별히 강한 보스는 아닙니다. 오히려 약한 편에 속하죠. 문제는 그 녀석의 특별한 능력입니다.”
“특별한 능력?”
“거미 여왕은 자신의 둥지 안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계속 거미 알을 낳습니다. 방금 처치했던 규모의 숫자는 1시간이면 다시 복구할 겁니다.”
아저씨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일행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갔다.
“거기다 태어난 새끼 거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해집니다. 아까 몰려왔던 놈들은 막 태어난 새끼였습니다.”
“그러면 더 후퇴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방금 그것들보다 더 강한 놈들이 있다는 말인데.”
센터 직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지만, 아저씨는 야속하게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까 창호가 말했던 대로 후퇴는 최악의 선택입니다. 거미 여왕의 새끼들이 점점 많아지고 강해지면, 놈들이 우릴 먼저 공격하기 시작할 겁니다. 녀석들은 우리를 침입자로 여기니까요.”
“그……그럴 수가?!”
“지금 균열 입구로 돌아간다는 것은, 충분히 자란 새끼 거미들의 총공격을 기다리는 꼴입니다. 돌파만이 최선의 선택입니다.”
아저씨의 말이 끝나고.
말 많던 센터 직원도, 나머지 일행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후퇴할 수 없다.
겨우 버텨낸 저 괴물 거미보다 더 강한 녀석들과 싸워야 한다.
경험 많은 아저씨나 한창호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상황이었다. 특히 센터 직원은 지금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도 저분이 있으니까 해볼 만하지 않을까요?”
이때까지 가만히 있던 여자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일행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여들었다.
"아까 같은 마법이면 화력은 충분하지.”
“확실히 맞는 말이야.”
아저씨와 한창호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일행도 희망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다시 한번 절망 속으로 보내버렸다.
“죄송한데. 아까 같은 마법은 다시 사용하기 힘들 것 같아요.”
“이런…….”
“…….”
“아니?! 도대체 왜요?”
여자 마법사가 내 쪽으로 불쑥 다가와서 물었다. 나는 그녀와 살짝 떨어지며 상황을 설명했다.
“방금 마법으로 조금 무리하는 바람에 아티팩트에 손상이 생겼어요. 아직 작동은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몰라요.”
“아.”
“아마 그 정도 마법을 한 번 더 사용한다면 무조건 아티팩트의 마지막이 될 거예요.”
Sanye(질서) 문양의 힘으로 살펴본 아티팩트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회로 곳곳에 피해가 갔고, 전체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황.
‘한 번도 최고 출력으로 사용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정도 일 줄은.’
혹시나 수리할 수 있을까 싶어 시도해 보았지만 불가능했다.
그나마 신지아가 신경 써주고 비싼 재료를 사용한 덕분에 이 정도로 버틴 거지, 평범한 아티팩트였으면 마법을 사용하자마자 터져버렸을 것이다.
내 상황설명을 듣고 아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저씨를 불렀다.
“아빠. 무슨 방법 없을까?”
“…….”
답답한 상황 속에서 누구 하나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시간을 낭비할수록 거미는 점점 많아지고 강해지는 상황.
나 역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퓨이라도 불러야 하나?’
퓨이를 소환할지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퓨이 하나 더해진다고 나아질 상황이 아니었다.
정말 처음으로 그 단어가 마음속 깊이 다가왔다.
죽음.
균열 전투에 참여하면서 신지아가 항상 걱정했지만, 크게 위험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임 경사와 균열에서 소라 괴물과 싸울 때도 이 정도로 절망적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다.
경험 많은 아저씨와 한창호도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
불안한 예감을 안일하게 무시하고 균열로 들어왔던 나 자신이 너무 멍청하고 바보 같았다.
‘젠장. 후회할 시간은 없어. 방법을 찾아야 해.’
나는 이 방법을 타개할 만한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머리를 굴리던 와중에 바닥에 널브러진 거미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시체 옆에 떨어진 마석 하나.
‘마석…… 마석?!’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많은 거미의 사체들 사이에 드문드문 마석이 보였다.
나는 곧바로 아윤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윤아. 잠깐 활 좀 줘볼래?”
다짜고짜 활을 달라는 내 말에 아윤은 반대로 활을 꼭 끌어안으며 되물었다.
“활은 갑자기 왜요?”
“뭔가 실험해 볼 게 있어서. 잠깐만 줘봐.”
“내 보물 1호를 가지고 뭘 실험한다는 거예요. 안돼요!”
“균열을 클이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라.”
내 말에 일행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세진아. 그게 무슨 말이야? 아윤이 활로 뭘 하려고?”
“아윤아. 오빠 한 번만 믿어봐.”
“…….”
내 간절한 부탁에 아윤은 머뭇머뭇 품 안의 활을 내 쪽으로 건넸다.
[노련한 사냥꾼의 활][희귀]
-공격 등급 : 25
-근력 +3
-민첩 +8
-공격속도 25% 증가
-치명타 피해 15% 증가
아윤의 활은 무려 희귀 등급이었다. 괜히 보물 1호라 외치며 거부한 게 아니었다.
나는 활을 보며 외쳤다.
“Anna(부여).”
[‘노련한 사냥꾼의 활’을 지정했습니다.]
[부여할 수 있는 문양 : Ita(번개).]
[희귀 등급 아이템에 문양을 새기기 위해서는 E등급 마석 25개와 고철 톱니바퀴 1개가 필요합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Y/N)]
[성공할 활률 : 70%]
‘마석 25개에 고철 톱니바퀴도 1개. 무지 비싸네.’
소모되는 재료도 재료지만, 성공할 확률이 70%. 막연히 성공하리라 낙관할 수 없는 수치였다.
“오빠. 왜요? 뭐 잘못됐어요?”
아윤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내가 대답했다.
“70%…….”
“에? 뭐가 70%인데요?”
“성공할 확률이 70%야.”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건 나도 몰라. 아직 실패해본 적이 없어서.”
“이익! 절대 안 돼요. 정말 내 보물 1호라고요.”
아윤이 흥분해서 나로부터 활을 뺏으려 달려들었다. 다행히 아저씨가 그녀를 말리며 말했다.
“세진아. 뭔지 모르겠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나는 아저씨의 물음에 말없이 끼고 있던 반지를 아저씨에게 건넸다.
갑자기 내가 반지를 건네자 당황한 아저씨의 표정은, 반지의 상태를 확인한 후 놀라움으로 변했다.
“이거 세진이 네가 한 거야?”
“맞아요. 지금 당장 전력을 키울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요.”
아저씨는 내 말에 수긍했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방법은 이것밖에 없겠구나.”
“아빠? 설마 뭔지도 모르고 하라고 할 생각은 아니지?”
불안해하는 아윤.
아저씨는 그런 그녀를 꽉 붙잡고 내게 말했다.
“세진아. 해보자!”
“꺄악! 안돼 아빠!”
아저씨의 품속에서 아윤이 발버둥 쳤지만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손안의 활을 바라봤다.
[‘노련한 사냥꾼의 활’에 문양을 새깁니다.]
손안의 활이 강렬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오빠! 내 활 잘못되면 가만 안 둘 거야!”
결국 아저씨 품을 빠져나오지 못한 아윤이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 역시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제발. 제발. 제발. 부처님, 하느님.’
마음속으로 평소에도 찾지 않던 신을 찾으며 기도했다.
아윤의 활에서 점차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활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모습을 드러낸 활은 누군가의 감탄을 자아냈다.
은은한 광채가 생겼던 반지와 달리, 번개의 문양이 새겨진 활은 주변에 화려한 광채와 함께 번쩍이는 번개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활의 상태를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반쯤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윤에게 직접 활을 건네주었다.
“아아.”
아윤은 활의 정보를 확인하며 다시 한번 눈물을 글썽거렸다.
[노련한 사냥꾼의 활][희귀][Ita(번개)]
-공격 등급 : 40(+15)
-근력 +6(+3)
-민첩 +14(+6)
-공격속도 35%(+10) 증가
-치명타 피해 20%(+5) 증가
“흠흠. 어때? 오빠 한번 믿어보랬지?”
“…….”
“아윤야?”
“꺄아! 오빠 사랑해!”
아윤은 나에게 와락 안기며 ‘사랑해!’를 연발했다.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얼굴에 기쁨으로 가득했다.
“왜 울고 그래.”
“너무 기뻐서. 앞으로는 오빠 말 잘 들을게.”
“하하하.”
평소에 약간 까칠하고 털털한 매력을 보여주던 아윤.
활 한번 업그레이드해 줬다고 품에서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보니 뿌듯함과 동시에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옆에서 활의 달라진 정보를 확인한 아저씨와 선우도 놀람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정말 대단하다. 세진아!”
“형. 대박!”
정 씨 가족의 호들갑에 나머지 일행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나는 정 씨 가족과 나머지 일행에게 말했다.
“여러분. 최대한 빨리 거미 사체에서 마석 모으는 걸 좀 도와주실래요?”
“마석? E등급 마석?”
한창호가 의문을 표했지만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면 할 수 있어요.”
“……?”
“저 괴물 거미가 강해지는 만큼, 우리도 강해질 수 있다고요.”
절망적인 이 거미 괴물 균열 속에서 살아날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