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2화
아저씨의 감정이 진정될 때까지 시간이 흘렀다.
마음속 감정의 찌꺼기를 전부 토해내듯 구슬픈 울음이었지만, 끝나고 나니 아저씨의 표정은 훨씬 후련해져 있었다.
“이제 진정 좀 되셨어요?”
“부끄럽네. 너한테는 오늘 못난 모습만 보여준다.”
아저씨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금은 평소 같은 미소도 함께 보여주었다.
나는 그런 아저씨를 보면서 말했다.
“아저씨. 저는 시설에서 자라서 아버지가 없었어요. 보호자 역할을 해주는 원장 선생님은 계셨지만, 아버지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요.”
“…….”
“그래서 주위에 아버지가 있는 친구들이 항상 부러웠어요. 멋있는 장난감도 사주고, 뭐든 해결해주는 슈퍼맨같이 보였으니까요.”
담담하게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내 모습에 아저씨는 살짝 놀란 듯 보였지만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근데 사회에 나와보니까. 예전에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보다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어요. 그저 어디서나 볼법한 평범한 회사원, 노동자였죠.”
아저씨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다 평범한 사회인일 뿐이지.”
“하지만 오늘 아저씨 모습을 보면서 다시 깨달았어요. 아버지란 참 대단한 존재라고. 외롭고 쓸쓸하지만, 가족의 어려움을 몸으로 받아내는 일. 저는 절대 못 할 것 같았거든요.”
내 칭찬에 아저씨는 쑥스러운지 고개를 돌리며 볼을 긁적거렸다.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엔 아저씨는 충분히 멋진 아버지니까. 분명 아윤이, 선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정말 그럴까?”
“물론이죠. 그리고 좀 더 가족들을 믿으세요. 아윤, 선우 모두 좋은 아이들이잖아요.”
“……고맙다. 세진아.”
나의 위로의 말에 아저씨의 눈가가 다시 촉촉해졌다.
그는 황급히 눈가를 비비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에이. 나이 먹어서 그런지 툭하면 울음이 나온단 말이야.’
나는 그런 아저씨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웃음 지었다.
* * *
“아저씨. 여기 맞아요?”
“으으응. 맞아. 맞아.”
나는 술에 만취해버린 대훈 아저씨를 업다시피 부축한 채, 아저씨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훈훈한 분위기로 마무리될 것 같았던 술자리는 생각보다 좀 더 길어졌고, 당연히 만취해버린 아저씨를 내가 맡아야 했다.
내게 몸을 기댄 채로 걸음을 옮기던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세진아.”
“네?”
“너. 부모님이 없다고 그랬지?”
“예. 없어요.”
“흐흐. 그럼 내 아들 해라. 너처럼 듬직한 아들 한 명 더 있었으면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요?”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아들 삼으려는 아저씨의 모습에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전세진 이름에서 한 글자만 바꿔서 정세진으로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정.세.진. 딱 좋구먼.”
“크크큭.”
아저씨의 이상한 논리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으응? 나 장난 아니다. 아니면 내가 아버지인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아저씨는 약간 서운하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뭐가 문제야. 자! 아버지하고 불러봐.”
“…….”
술기운에 취한 아저씨의 말에 가볍게 어울려 줄 수도 있었지만, 평생 누군가에게 써본 적 없는 그 단어를 직접 내뱉으려니 쑥스러우면서 어려웠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아저씨는 갑자기 멈춰 섰다.
“아버지라 안 부르면 나 안 간다.”
“아저씨. 장난하지 마세요. 저 힘들어요.”
“나 장난 아니다.”
아저씨는 술에 취해 헤실거리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꿈쩍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는 최대한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아버지. 됐죠? 이제 빨리 가요.”
“허허. 그래. 아들이 가자면 가야지.”
단순한 아버지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아저씨를 이끌고 완만한 오르막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세진아.”
“예.”
“고맙다.”
“뭐가요?”
“이렇게 잘 커 줘서. 고마워.”
“…….”
“아버지가 해준 건 없지만, 잘 자라줘서 네가 자랑스럽다.”
“…….”
순간 울컥하는 감정에 목이 메어와 대답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계속 솟구쳐 올라왔지만 애써 꾹꾹 담아 눌렀다.
‘만약에 진짜 아버지가 내 모습을 봤다면, 이렇게 말해 주실까?’
아저씨는 이런 내 모습을 다 안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빌라 4층.
아저씨의 집인 401호의 앞에서 벨을 눌렀다.
-딩-동!
-누구세요?
벨을 누르자 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우야. 아빠 왔다.”
-철컥!
“세진이 형?”
문을 열고 내 모습을 본 선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가 술을 많이 드셔서 모시고 왔어.”
“아이고. 우리 귀여운 막내.”
아저씨는 선우를 다짜고짜 껴안으며 행복한 표정으로 볼을 부비적거렸다. 선우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편한 복장의 아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 역시 선우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세진 오빠?”
“어. 아저씨가 술을 많이 드셔서…….”
“이게 누구야. 우리 공주님!”
아윤을 발견한 아저씨가 이번엔 대상을 변경해 달려들었다.
“아이! 아빠 술 냄새.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엄마한테 또 혼나려고.”
“흐흐흐. 조금만 마셨어, 조금.”
아윤의 격렬한 반항에 껴안는 것도 실패하고 잔소리를 들었지만, 아저씨는 그 모습도 좋은지 바보처럼 웃었다.
“우리 공주님. 오랜만에 아빠가 용돈 줄까? 어디 보자.”
아저씨가 지갑을 꺼내 뒤적거림과 동시에 아윤이는 빠른 손놀림으로 5만 원 한 장을 쏙 꺼내 갔다.
그러더니 아저씨를 안방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안방에서 아저씨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아저씨가 그렇게 자랑한 아내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형. 잠깐 들어오실래요?”
“아냐, 시간도 늦었는데. 다음에 또 올게.”
잠깐 들어오라는 선우의 권유를 거절하고 몸을 돌리는데.
“잠깐만 기다려요.”
“응?”
아윤은 방에서 외투를 챙겨 나오더니 슬리퍼를 신고 나와 같이 현관을 나섰다.
“대로까지만 배웅할게요.”
“여기까지만 배웅해도…….”
“빨리 걸어요. 추우니까.”
“으응.”
그녀는 빌라를 벗어나 나와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빠가 이상한 소리 안 했어요?”
“아니, 뭐. 그냥…….”
아저씨와 있었던 일을 말해 주기 어려워 말을 흐렸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아윤은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각성자로 균열 제거 일을 시작한 건 순전히 내 생각이었어요. 디자이너 일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
그녀는 마치 아저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는 것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말했다.
“적성에 안 맞았어요. 그쪽 일은. 근데 균열 쪽 일은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고유 능력도 꽤 괜찮고. 이대로 성장해서 엄마도 못 들어갔던 3대 길드까지 노려볼 생각이에요.”
“어. 대단하네.”
“우리 아빠는 잘못 없어요. 이건 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대신 선우는 나중에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공부시켜서 대학교에 보낼 거예요.”
아윤은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오빠도 아빠 말에 이상한 오해하지 말아요.”
허리에 손을 턱 하니 올리고 나에게 엄포를 놓는 모습이, 뭔가 귀엽게 느껴져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내 모습에 아윤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뭐에요. 갑자기 왜 웃어요?”
“아니. 아니. 미안.”
나는 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말을 이었다.
“아주머니는 좀 괜찮으셔?”
“엄마요? 괜찮아요. 약값이 좀 비싸지만, 약만 제때 챙겨 먹으면 일상생활에는 지장 없어요.”
“아저씨가 가족들 걱정이 많은 것 같더라고.”
“어휴. 그 병은 유전되는 것도 아니고, 균열에 자주 들어간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아빠는 너무 걱정이 많아서 탈이에요.”
“그래?”
“전부 다 과학적으로 증명도 안 된 소문인데도…….”
“아저씨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식 일인데.”
“…….”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대로변에 도착했다.
“이거 받아요. 버스도 끊겼으니까 택시비 해요.”
아윤은 5만 원을 내게 내밀었다.
“아빠 지갑에서 빼낸 거니까 받아요.”
“괜찮아. 너랑 선우 맛있는 거 사 먹어.”
“안 받으면 땅바닥에 버릴 거예요?”
내가 돈을 받지 않으려 하자 아윤은 5만 원권을 버릴 것처럼 팔랑거렸다.
나는 마지못해 돈을 받아들었다.
“여기 택시 많이 다니니까 금방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저 가요.”
“그래. 배웅해줘서 고마워.”
내 인사에 아윤은 뒤돌아선 채로 손을 한번 휘적거리고, 오르막을 따라 쌩하니 사라져버렸다.
나는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 집으로 돌아갔다.
* * *
아저씨와 술자리를 함께하고 며칠이 지났다.
“…….”
“…….”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아저씨의 장비 점검을 도와주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름이 아니라 다시 만난 아저씨는 나를 엄청나게 어색해하셨기 때문.
아저씨는 아무래도 만취한 상태에서도 모든 걸 기억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티 나게 어색해하는 아저씨와 내 모습을 보며 아윤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장비 점검을 끝내고 아저씨의 말에 따라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나를 포함한 아윤, 선우, 퓨이까지 나란히 아저씨를 앞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흠흠. 중대발표가 있어 잠시 모이게 했다.”
아저씨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파티가 D등급 2단계 균열에 배정되었어.”
“…….”
“지금껏 센터의 배려로 1단계 균열만 배정되었지만, 오늘 2단계 균열 배정과 함께 우리의 의중을 묻는 연락이 왔어. 거절할 수도 있어. 대신 기한을 두겠다는 조건이야.”
아저씨의 말을 들은 아윤이 번쩍 손을 들고 말했다.
“아빠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윤의 질문에 아저씨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희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거기에 따를 예정이야.”
“그건 우리가 가겠다면 이제 안 말리겠다는 뜻?”
“그래. 내 고집으로 1단계 균열에만 집착하는 건 그만둘 거야. 대신 진지하게 의견을 말해.”
아저씨의 달라진 태도에 아윤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찬성!”
아윤이 재빨리 찬성 의견을 냈다.
선우는 우물쭈물하며 고민하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나도 찬성.”
아윤과 선우의 의견이 결정되고, 사람들의 시선이 나로 향했다.
“저요? 저는 전투도 안 하는데 왜…….”
“지난번에 파티원 등록에 실패하기는 했지만, 꽤 오랫동안 함께한 파티원이니 의견을 들어봐야지.”
나는 당황했지만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떠밀리는 감이 있었지만, 진지하게 평소 생각해 왔던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1단계 균열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저씨나, 아윤이, 선우 모두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했어요. 실력으로는 제가 뭐라 말씀을 못 드리지만, 마음가짐은 이미 충분한 것 같아요.”
“그 말은?”
“저는 찬성이요.”
“좋아. 그러면 3명의 찬성으로…….”
“퓨이! 퓨이!”
갑자기 퓨이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끼어들었다.
“하하. 그래 퓨이가 있었지. 퓨이야. 너는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니?”
“퓨우우.”
아저씨의 질문에 퓨이가 눈을 감고 고민하는 것처럼 침음을 냈다.
그리고.
“퓨이!”
“하하하. 그러면 3명에 퓨이까지 찬성했다. 우리는 다음부터 2단계 균열에 도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