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18화 (18/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18화

7. 새로운 세상

“고생하셨습니다.”

균열 안쪽에서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정 씨 가족.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맞이했다.

가장 무거운 장비를 두르고 있는 대훈 아저씨에게 다가가 장비를 풀 수 있게 도와주었다.

“으허. 고맙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어. 안쪽이 두 갈래 길이라서 시간이 더 걸렸네.”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비를 가지고 수돗가로 향해 장비를 정비를 도왔다.

벌써 몇 번째 도와주는 일이다 보니 꽤 익숙해졌다.

정 씨 가족을 따라 D등급 균열을 다닌 지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처음 어색했던 분위기는 많이 사라지고, 요즘은 정말 같은 파티인 것처럼 편한 분위기였다.

“세진아. 오늘도 있지?”

“잠시만요.”

나는 텐트에서 캔맥주를 꺼내 조심스럽게 건넸다.

“흐흐. 고맙다.”

조심스럽게 속삭이며 웃는 이 아저씨.

정 씨 가족의 가장이자, 탱커인 정대훈은 딱 인심 좋은 옆집 아저씨 느낌의 남자였다.

가끔은 장난스럽고, 술을 좋아하고, 처음 만난 사람과도 잘 어울리고. 이 파티와 친해지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존재이기도 했다.

문제는 사람이 너무 좋다는 게 문제였다. 들은 바에 의하면 사기도 몇 번 당하고, 지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못 받은 경우도 많단다.

첫날 나와 만났을 때,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보이던 정아윤의 행동이 최근에는 이해가 될 정도였다.

과거에 조금 신세를 졌다고 처음 만난 사람들 넙죽 파티에 동행시키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안했으리라.

아저씨의 장비 정리가 거의 끝났을 때쯤, 텐트 쪽에서 날카로움 외침이 들려왔다.

“세진 오빠!”

“어, 왜?”

“아니, 왜 아직도 겨울 이불을 덮고 있어요. 계절이 봄 된 지 한참인데. 그리고 이불은 언제 세탁한 거예요? 어우, 이 먼지 봐.”

“…….”

처음 만났을 때는 아저씨였지만 이제는 오빠라고 나를 부르는 정아윤.

대학교 2학년의 그녀는 친해지기 어려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냉장고에 엄마가 해주신 반찬 몇 개 넣어놨어요. 고기반찬은 금방 상하니까 빨리 꺼내 먹어요.”

“챙겨줘서 고마워. 잘 먹을게.”

친해지고 난 뒤는 가끔 반찬을 가져다주거나, 필요한 걸 챙겨주기도 했다. 겉으로는 틱틱거려도 아빠를 닮아서 주변 사람을 잘 챙겼다.

“아. 그리고 냉장고 청소 좀 해요. 저 구석에 있던 치킨은 언제 먹은 거예요?”

“저번 주에…….”

“다음에 또 이 상태면 냉장고 다 엎어버릴 줄 알아요.”

“으, 응. 알았어.”

그녀의 살벌한 잔소리에 내가 찍소리도 못하자 옆에 있던 정대훈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큭큭. 잔소리에 꼼짝도 못 하네.”

“아빠! 맥주는 저한테 허락 맡고 마시기로 했잖아요. 계속 이러면 엄마한테 다 이를 거예요?”

“…….”

괜히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가 아저씨도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나와 아저씨가 잔소리 폭격을 당하고 있을 때, 텐트에서 정선우가 퓨이를 안고 나타났다.

“형. 퓨이한테 과자 줘도 돼요?”

“어. 상관없어.”

“네. 퓨이야 같이 과자 먹자.”

“퓨이!”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인 정선우. 생각보다 친해지기 힘든 녀석이었다. 워낙 낯을 많이 가리고 부끄럼이 많다 보니 초반에는 인사만 겨우 나눌 정도였다.

그래도 지금은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했다. 아빠나 누나를 닮아 심성이 착하고, 퓨이를 잘 챙겼다.

최근에는 자기가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을 가져와 퓨이에게 선물했다.

장비 정리도 끝나고 정 씨 가족은 슬슬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세진아. 같이 점심 먹으러 안 갈래?”

“저는 여기 좀 더 남아 있어야 해서. 죄송해요.”

“쩝, 어쩔 수 없지. 그럼 우리는 먼저 갈게.”

정 씨 가족은 나에게 인사한 뒤 균열을 빠져나갔다.

아저씨가 점심 권유를 했지만, 마석 추출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나는 균열에 남아 있어야 했다.

마석 추출에 관한 건 정 씨 가족에게 숨기고 있어서 그들이 균열을 빠져나가고 나면 일을 시작했다.

“가자. 퓨이야.”

“퓨이!”

퓨이와 함께 마석 추출을 시작했다.

이제 D등급 균열에도 꽤 익숙해져 빠르게 괴물들의 시체를 처리했다.

4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려 마석 추출이 끝이 났다.

오늘의 수확은 E등급 마석 13개, D등급 마석 3개.

‘끙. 오늘은 D등급 마석이 적게 나왔네.’

수확한 마석 중 E등급 마석 3개와 D등급 마석 1개를 제외하고 나머지 마석을 챙겨 균열을 빠져나왔다.

* * *

오늘 수확한 마석을 챙겨 도착한 곳은 신지아의 아티팩트 공방이었다.

“안녕하세요. 지아 씨.”

“어서 와요. 세진 씨.”

나는 원래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신자아의 아티팩트 공방에 정식으로 취직했다. 크게 두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로 D등급 균열을 따라다니다 보니, 공장에 매일 출근이 어려웠다.

신지아의 공방은 아무 때나 출근해도 된다는 허락을 이미 받았다. 대신 공방의 급여는 공장에 비해 적었다.

두 번째로 마력 회로 이론과 아티팩트 제작 능력을 빨리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돈을 적게 벌더라도 공방에서 한시라도 더 마력 회로를 공부하고 싶었다.

“여기 마석 가져왔어요.”

“어디 보자. 오늘은 D등급 마석이 적네요?”

“운이 없었죠.”

“이것만 해도 300만 원. 아무리 봐도 사장인 저보다 직원인 세진 씨가 돈을 더 잘 버는 것 같은데요.”

“하하하.”

D등급 마석은 개당 50만 원에 대학교로 팔려나갔다.

따로 모아두는 마석들을 제외하고 최근에 팔아버린 마석만 600만 원. 오늘 가져온 마석까지 합치면 이번 달에만 천만 원 가까이 벌어들였다.

대부분 빚 청산에 쓰이겠지만, 이런 속도라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빠르게 빚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빨리 일 시작하죠. 오늘 납품해야 할 물건이 많아서 서둘러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공방에서 하는 일은 대부분 하청을 받아 부품을 만드는 일이었다. 아티팩트 제작의뢰는 거의 들어오지 않고, 이렇게 하청으로 공방의 운영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래도 최근 한 달 사이에 실력이 일취월장해 웬만한 부품작업은 나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

신지아의 말에 의하면, 지금 정도 실력이면 어느 아티팩트 공방에 가더라도 직원으로 쉽게 취직할 수 있다고 한다.

“지아 씨. 이거 기판 불량인 것 같아요. 다른 거로 교체할게요.”

“혼자 하실 수 있죠?”

“네. 교체하고 다시 회로 작업 들어갈게요.”

나는 이제 꽤 익숙해진 모습으로 회로를 다뤘다.

기초적인 회로 작업은 내가 담당하고, 복잡한 회로 작업과 마무리는 신지아가 담당했다.

처음 일 시작할 때는 신지아의 속도를 못 맞춰서 힘들었지만, 한 달 동안 호흡을 맞춰서 그런지 지금은 꽤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나와 신지아는 쌓여 있는 납품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각자 회로 작업에 집중했다.

정신없이 회로 작업을 진행하고, 목표 수량을 다 채웠을 때는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끄어어어.”

나는 기지개를 켜며 괴성을 질렀다. 몇 시간 동안 회로를 보며 집중하느라 눈이 시큰거렸다.

“수고했어요. 세진 씨.”

“물량이 많아서 좀 힘들었네요.”

“확실히 세진 씨도 회로 작업에 익숙해지셨네요. 조금 있으면 웬만한 작업은 혼자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 멀었죠.”

그녀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내게 물었다.

“오늘도 남아서 공부하다가 가실 건가요?”

“아뇨. 오늘은 일찍 가보겠습니다.”

평소에는 작업이 끝나면 남아서 그녀와 함께 공부했지만, 오늘은 일찍 돌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세진 씨.”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공방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표정은 설레임으로 가득했다. 오늘 아티팩트 공방에서 작업하면서 떴던 이 알람 때문에.

[숙련된 작업으로 영감을 얻었습니다.]

[‘마력 회로 이론’에 1포인트를 얻습니다.]

[‘마력 회로 이론’ 레벨이 올랐습니다.]’

‘드디어 마력 회로 이론 Lv.3이다.’

한 달 동안 공방에서 작업하고 공부해서 얻은 ‘마력 회로 이론 Lv.3’.

다시 한번 ‘아르키트 회로 이론서’에 도전할 때가 되었다.

조급해하지 않기 위해 한 달 동안 일부러 이론서를 보지 않고 실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드디어 목표했던 마력 회로 이론 Lv.3을 달성했다.

‘이날을 기다렸다. 오늘 기필코 해낸다.’

* * *

균열로 돌아온 나는 텐트에 홀로 앉아 책을 집어 들었다. 최대한 집중하기 위해 퓨이도 잠시 텐트 밖으로 내보냈다.

한 달 만에 다시 들어 올리는 ‘아르키트 회로 이론서’.

“집중하자. 집중하자.”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책을 펼쳐 들었다.

“…….”

시작은 비장함과 떨리는 기분으로 가득했지만, 책을 읽어 나갈수록 사소한 감정의 파편들은 사라져갔다.

오로지 책의 내용에만 집중해 한 페이지씩 넘겨 나갔다.

난해하고 복잡한 내용으로 가득했지만, 하나하나 그 내용을 곱씹고 또 곱씹으면서 머릿속에 쌓아나갔다.

[진행률 20% 돌파.]

진행률을 알리는 알람이 떠올랐지만, 나의 집중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모든 감각이 책으로 쏠려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내가 책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행률 50% 돌파.]

좀 더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마와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끊어질 듯한 집중력을 겨우 부여잡으며 페이지를 넘겨 나갔다.

[진행률 80% 돌파.]

억지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책에 적힌 내용을 최대한 머리에 쑤셔 박았다. 의식이 아닌 무의식적으로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진행률 95% 돌파.]

완전한 무아지경.

나는 책이 인도하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열릴 듯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나갔다.

그리고…….

[진행률 100% 달성.]

[‘아르키트 회로 초급 이론서’를 습득했습니다.]

[유일 등급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5 Point 상승합니다.]

[‘마력 회로 이론’이 ‘아르키트 회로 이론’으로 대체됩니다.]

수많은 알람이 눈앞에 떠올랐지만, 나의 눈은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눈앞에 모든 것들이 회로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앉아 있는 텐트도, 밖에서 심심한 듯 기다리는 퓨이도, 내가 소유한 균열도, 그리고 그 모든 것 너머 보이는 우주도.

모든 것이 거대한 회로로 이루어져 있고, 서로 이어져 있었다.

마치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마주한 병아리처럼 경이로움과 환희에 가득 찼다.

나의 의지는 우주의 회로를 따라 이리저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보고 느끼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충족감.

이 모든 우주에 내 의지가 전달되고, 우주 너머 그 어딘가로 향하는 그 순간.

미지의 힘이 나를 구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내동댕이쳐지듯 현실로 돌아왔다.

“커억. 헉, 헉.”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고, 속이 어지러웠다. 온몸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까와 같은 광경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모두 꿈이었던 건가?’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했던 경험.

나는 텐트 밖으로 나왔다.

“퓨이?”

퓨이가 내 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나는 몸을 숙여 말없이 퓨이를 쓰다듬어줬다.

손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감촉에 울렁거리는 가슴이 살짝 진정됐다.

알 수 없는 허탈감에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상태를 확인했다.

《스킬》

[아르키트 회로 이론 Lv.1](0/1)

-초급 : Tuvcanta(해석)

-3개의 문양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0/3)

↳ 10개의 문양 해석하기 (0/10)

스킬창에 확인된 아르키트 회로 이론.

그리고 눈길을 끄는 단어 ‘Tuvcanta’.

어째서인지 나는 자연스럽게 그 단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Tuvcanta, Tuvcanta, Tuvcanta.’

한동안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걸음을 옮겼다. 내 걸음이 멈춘 곳은 발광석이 있는 균열 벽면이었다.

“…….”

나는 말 없이 눈앞에 발광석을 바라보다 손을 앞으로 뻗어 그 단어를 외쳤다.

“Tuvcanta(해석)”

[대상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아까와 같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순 없었지만.

눈앞의 발광석이 회로로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회로를 해석하고 이해했다.

[해석에 성공했습니다.]

[Ondo(바위), Cala(빛) 문양을 습득 가능합니다.]

[습득하시겠습니까? (Y/N)]

“아…….”

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조금 전 내가 봤던 경이롭던 세상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 세상 너머 어딘가에 있을 진리에 잠시라도 도달했다는 사실에…….

나는 전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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