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7화
[집중 유지에 실패하셨습니다.]
[아르키트 회로 초급 이론서의 습득이 중단됩니다.]
[최종 진행률 23%]
‘으아악! 이런 망할 스킬북!’
편안한 일요일.
텐트 구석에서는 퓨이가 웅크리고 낮잠을 자고 있고.
나는 또다시 아르키트 회로 이론서를 붙잡고 생고생 중이었다.
[특성: 명경지수(明]鏡止水) Lv.3](0/3)
-고요한 물의 표면처럼 집중을 유지합니다.
-다음 레벨업에 능력치 집중 25 필요.
-집중의 효율을 올려줍니다.
-오래 집중할수록 효율이 점진적으로 증가합니다.
서재필 교수가 선물했던 명경지수 특성에 SP를 4를 투자해서 3레벨까지 올렸다. 그 덕분에 진행률이 20%를 돌파했지만 100%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어떻게 집중 능력을 더 향상할 방법이 없을까?’
SP를 명경지수에 더 투자해서라도 진행률을 올리고 싶었지만, 다음 레벨업에 능력치 25 제한이 붙어서 지금 당장 스킬 레벨업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진행률이 20%를 돌파한 덕분인지 조금은 아르키트 회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마력 회로 이론과 비슷하면서 다르다.’
마력 회로 이론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지만, 아르키트 회로 이론은 전혀 다른 원리를 사용했다.
그 방대한 이론과 지식은 도대체 어떤 존재가 만들어 냈을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은 읽고 이해하는 것도 힘들 지경.
나는 잠시 바닥에 누워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읽었던 이론서의 내용과 잡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균열…… 마력 회로…… 아리키트 회로…….
“……잠깐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번쩍하며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가설.
나는 머릿속의 장면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텐트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곧장 균열의 어느 곳으로 향했다.
“…….”
균열이 생성될 때 항상 생겨나는 한 가지 균열핵!
정확한 원리는 그 누구도 그 원리는 설명하지 못하지만, 균열핵이 균열을 만들어 내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균열핵이 나타날 때 항상 같이 나타나는 한 가지.
균열핵 받침대.
대부분 사람이, 나 또한 그렇지만, 균열핵에 신경을 쓰지 받침대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균열핵을 연구하는 학자는 많지만 받침대를 연구하는 학자는 없으니까.
아티팩트는 마석을 이용해 마력 회로를 가동해 마법을 발동시킨다.
만약 균열을 아티팩트에 비유하자면, 균열핵이 마석 역할. 발동되는 마법이 균열 현상.
그렇다면 아티팩트의 마력 회로에 해당하는 건 무엇일까?
이런 이론적 가설 끝에 도달한 결론.
균열핵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대가 회로 역할이지 않을까?
나는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아직 균열에 남아 있는 받침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허리 높이의 균열 받침대를 유심히 관찰했다.
“역시!”
받침대에 정교한 모양으로 새겨진 문양들.
예전에 나였다면 몰랐겠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받침대의 문양들은 아르키트 회로 원리를 사용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균열이란 균열핵을 원동력으로 아르키트 회로 원리를 발현시킨 결과물이라는 것.
[‘아르키트 회로 원리’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마력 회로 이론’에 1포인트를 얻습니다.]
[‘마력 회로 이론’ 레벨이 올랐습니다.]
“좋았어!”
눈앞에 떠오르는 알람들을 보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다시 텐트로 뛰어가서 아르키트 이론서를 펼쳤다. 아직 난해한 내용이 많지만, 이해되는 내용이 좀 더 많아졌다.
그동안 한시라도 빨리 스킬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집중 효율을 올리고 무작정 책을 읽었다.
‘너무 조급했다. 하나씩 천천히 해나가자.’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아직 나는 이 스킬북을 익힐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더 마력 회로 이론을 공부하자.’
아르키트 회로 이론, 마력 회로 이론. 분명 다르지만 겹치는 부분이 많이 있다.
마력 회로 이론을 좀 더 익히고 다양한 지식을 갖추게 된다면, 분명 아르키트 회로 이론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을 헤매다 가야 할 방향을 겨우 찾았다. 방법을 찾지 못해 답답하던 마음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꼬르르륵.
오전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았더니 뱃속에서 요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먹고 다시 시작해 보자.’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나갈 준비를 했다.
“퓨우우…….”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퓨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히 외투와 지갑을 챙기고 균열을 나섰다.
♩∼♬∼♪
균열을 밖으로 나와 통화권에 연결되자마자,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부재중 전화 6통.
-읽지 않은 메시지 13건.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균열에 있긴 했지만, 너무 많은 전화와 메시지들이 도착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확인해 보니 전부 오연우에게 온 연락이었다.
내가 오연우에게 연락을 하려는 순간.
♩∼♬∼♪
무섭게도 먼저 오연우가 연락을 해왔다.
-형!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균열 안에서는 통화권 밖이잖아. 무슨 일이야? 부재중 전화 엄청 많던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식사하셨어요?
“아니, 이제 먹으려고. 간단하게 편의점에서 도시락이라도 사 먹으려고 했는데.”
-잘됐네요. 저 형 균열 근처거든요. 같이 밥 먹죠?
“근데 나는 퓨이도 챙겨야 해서 균열에서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제가 사서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어어. 연우야?”
오연우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통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어안이벙벙해졌다.
‘얘 뭐지?’
* * *
“형. 오랜만이에요.”
“그래. 근데 뭘 그렇게 많이 사 왔어?”
나는 오연우의 양손 가득한 것들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한 손의 짐을 대신 받아서 들어 확인하니 캔맥주, 과자, 음료수, 도시락 등등.
“하하. 그냥 제가 많이 먹고 싶어서 샀어요.”
“그래. 아무튼 고생했어. 들어가자.”
나는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일단 오연우와 함께 균열 안으로 들어갔다.
“퓨이……?”
퓨이는 아직 잠에서 덜 깨서 약간 비몽사몽인 표정이었다.
“퓨이야. 안녕?”
“퓨이!”
오연우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퓨이가 그를 알아보고 대답했다.
텐트 앞에 자리와 테이블을 마련하고 오연우가 사 온 것들을 하나씩 올려놨다.
“와. 초밥을 사 온 거야?”
“근처에 맛있는 집이 있다고 해서 포장해 왔어요. 맥주 드실 거죠?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어놓을게요.”
퓨이는 처음 보는 초밥이 신기한지 꼬리로 초밥을 가리키며 나를 재촉했다.
“퓨이! 퓨이!”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봐.”
젓가락으로 광어 초밥 하나를 간장에 살짝 찍어 퓨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맛있어?”
-끄덕끄덕.
맛있게 광어 초밥을 먹는 퓨이의 모습을 보고 오연우가 감탄했다.
“와. 퓨이는 정말 다 잘 먹네요.”
“편식을 안 하는 편이긴 하지.”
“근데 맛은 다 알고 먹는 거예요?”
“당연하지! 다 잘 먹긴 하지만 취향은 확실하다고. 최근에 한우 세트를 선물 받았는데, 퓨이가 한우 맛을 알아버려서 한동안 한우만 먹었어.”
서재필 교수에게 받았던 한우 세트가 꽤 많은 양이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퓨이와 둘이서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다.
“연우야, 잘 먹을게. 너도 빨리 먹어.”
“네, 형.”
나와 오연우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했다.
-탁. 치이익.
시원한 캔맥주를 따서 한 모금, 그리고 연어 초밥 하나를 간장에 찍어 입안으로 가져갔다.
짭조름한 간장과 톡 쏘는 고추냉이. 부드러운 연어와 차진 밥이 어우러졌다.
초밥이 입안에서 사라질 때쯤 다시 시원한 맥주 한 모금.
입안이 깔끔해짐과 동시에 기분 좋은 여운이 맴돌았다.
“초밥. 맛있다.”
“괜찮죠?”
맥주에 한입씩 초밥을 먹다 보니 금방 초밥 한 세트를 비워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맥주를 2캔 정도 땄을 때, 오연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 제가 올린 영상 보셨어요?”
“봤지. 재미있게 잘 편집했더라.”
“너튜브에 형이랑 퓨이 영상 반응이 장난 아니었는데.”
“나도 놀랐어. 나는 평소에 잘 안 보니까 몰랐는데, 생각보다 주변에 너튜브 보는 사람이 많더라고.”
오연우가 꺼낸 너튜브를 화제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평소에 너튜브에 큰 관심이 없다 보니 이야기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반응이 별로 없자 오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본심을 꺼내기 시작했다.
“세진 형. 혹시 너튜브 영상 만들어 보실 생각 없으세요?”
“으음. 한 번 더 네 채널에 출연해 달라고?”
“아뇨. 아예 형이 직접 채널을 만드시는 거죠.”
“내가 직접 채널을 만든다고?”
나는 난감해하며 오연우를 바라봤다.
“나는 너튜브를 보지도 않고, 영상 만들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채널을 만들어.”
“형이랑 퓨이는 출연만 하는 거죠. 영상편집이랑 운영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예를 들면 저 같은…….”
눈치를 보며 말하는 오연우.
그제야 오연우가 무슨 의도로 너튜브를 화제로 꺼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말 하려고 오늘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거야?”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
“에이씨. 솔직히 말할게요. 형! 저랑 같이 너튜브 해볼 생각 없어요?”
오연우는 드디어 본심을 드러냈다.
“형이랑 퓨이 영상 올렸을 때, 반응이 정말 장난 아니었어요. 이거 무조건 대박 터뜨릴 수 있어요.”
“흐음.”
그의 열정적인 권유에도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너튜브에 큰 관심도 없고, 무엇보다 그런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내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다급해진 오연우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더니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 보이세요? 제 너튜브 채널 구독자와 조회수 추이를 그래프로 만들어 놓은 건데, 여기 크게 급등하는 구간 보이죠? 여기가 형이랑 퓨이 영상 올린 후에요.”
“…….”
“그리고 댓글 반응도 엄청 좋았어요. 물론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오연우가 보여준 그래프에는 확실히 나와 퓨이 영상에서 팍! 치고 올라갔다가 다시 급격히 내려가는 양상을 보였다.
나는 오연우의 설득에도 회의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네가 계속 영상 만들어 올리는 게 좋지 않겠어? 그냥 운이 좋아서 반짝인기를 끌었던 걸 수도 있는데.”
오연우는 한숨을 내쉬더니 내 말에 대답했다.
“형. 제가 지금까지 너튜브 채널 운영하면서 느낀 거는 무조건 특별해야 한다는 거예요.”
“특별?”
“솔직히 저 좀 귀엽게 생겼잖아요? 여자한테도 인기 있는 스타일이고.”
“너 뻔뻔하게 그런 말 잘도 하네.”
“원래 너튜버는 좀 뻔뻔해야 해요. 아무튼, 그 부분은 꽤 자신 있었는데 너튜브에서는 크게 특별한 장점까지는 아니더라고요. 요즘 외모보다 중요한 건 특별한 각성 능력!”
그는 다시 노트북으로 새로운 자료를 보여줬다.
“요즘 핫한 너튜버들은 전부 각성자예요. 최근에는 연예인 중에서도 각성자인 사람 많아요. 평범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각성자를 동경하니까요. 제가 형에게 너튜브를 같이 하자고 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내가 각성자라서?”
“거기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귀여운 슬라임 펫도 있죠. 정말 가능성 있다니까요.”
“흐음.”
“형. 제가 방송 장비 전부 준비할 거고, 컨텐츠 계획, 스케쥴, 너튜브 채널 관리까지 다 할게요. 형은 저한테 시간만 좀 맞춰주시기만 하면 돼요.”
오연우의 이야기는 꽤 설득력이 있었다. 내가 크게 손해 볼 것 같지도 않고.
걸리는 것은 오연우와의 인연이 길지 않다는 점과 예전에 친구와 말아먹은 사업이 생각나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본금이 들어가는 사업에 비하면 너튜브는 위험 부담도 적고 가볍게 생각해 볼법하지만, 내가 채널의 주인이라도 동업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거고.
결국은 너튜브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오연우의 말과 의견을 따르게 될 것이다.
예전 사업도 그랬다. 자본금은 나와 친구가 같이 냈지만, 사업에 더 많은 정보를 갖춘 친구가 모든 선택과 결정을 주도했다.
‘거의 10년 넘게 사귄 친구도 그 끝이 좋지 못했는데. 만난 지 며칠 되지 않는 이 녀석을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끝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오연우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케이.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형이 필요로 하는 뭐든지 들어드릴 테니까. 딱 10편, 아니, 5편만 영상 찍어보죠. 5편 찍고 형이 봤을 때 가망 없다 싶으면 저도 깔끔하게 포기할게요.”
“뭐든지 들어준다고?”
“물론 제가 가능한 선에서요. 형도 지금 필요한 게 있을 거 아니에요.”
‘필요한 거라…….’
나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당연히 돈이다.
차근차근 갚아나가고 있지만, 은행에는 아직도 3억이 조금 안 되는 빚이 있으니.
“너 돈 많아?”
“저 오늘 무리해서 내일부터 컵라면 먹어야 하는데요?‘
“…….”
일단 이건 패스.
그럼 다음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르키트 회로 이론.
최근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관심사.
“혹시 너 마력 회로 이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
“뭐, 뭔 회로 이론이요?”
“…….”
역시나.
이것도 패스.
그다음은 D등급 마석에 대한 고민이다.
꽤 짭짤하게 벌어들이고 있는 마석 판매를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D등급 균열에 가야 하는데, 전투 능력이 전혀 없어서 파티에 깍두기로 가야 하는 상황.
“그럼 소개해줄 만한 D등급 균열 파티 있어?”
“형. 균열 파티에 들어가시게요? 전투 능력 없으신 거 아니었어요?”
“전투는 안 할 거야. 그냥 따라만 다닐 수 있으면 돼.”
지구대를 따라다녔던 것처럼 균열에 입장해서 소유권만 얻을 수 있으면 된다. 그 뒤에는 혼자 남아서 시체를 처리해 마석을 획득.
“으음. 잠시만요.”
“어디가?”
“이거는 제가 어떻게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물어보면서도 크게 기대를 안 했는데 오연우는 연락할 곳이 있다며 노트북을 가지고 균열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오연우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앞으로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형. 여기 가져왔어요.”
“이게 뭔데?”
“이 지역 근처에서 활동하는 D등급 균열 파티 연락처요.”
“뭐? 너 어디서 이런 걸 구한 거야?”
화면에는 적게 잡아도 수십 개는 돼 보이는 균열 파티의 연락처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있었다.
“아버지가 건설회사를 운영하시는데, 가끔 공사 현장에 균열이 발생하면 곤란해서 따로 연락처를 구해놓은 거예요.”
“응? 너 금수저였어?”
“뭔 또 금수저 타령이에요. 학교 휴학하고 너튜브 한다고 용돈이고 뭐고 다 끊겨서 흙수저나 다름없어요.”
‘가난하지만 꿈을 좇는 대학생 느낌인 줄 알았는데.’
뭔가 또 속은 느낌이 들었지만, 일단 넘어갔다.
“여기 있는 균열 파티 전부 아버지 회사와 좋은 관계거든요? 아마 그 정도 부탁이면 들어줄 것 같아요.”
“근데. 아버지 회사 이름 이렇게 팔아도 되나? 너 허락 안 받았지?”
내 물음에 오연우가 움찔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대신 형이 원하는 대로 되면 꼭 영상 5편은 찍는 거예요?”
“쩝, 알았어. 만약 일이 잘 풀리면 네 말대로 할게.”
“오케이! 그럼 지금 바로 연락해 볼까요?”
우리는 본격적인 연락을 위해 자리를 옮겼다.
“…….”
“…….”
어느덧 서쪽 하늘에 노을이 걸리고.
나와 오연우는 어둑해진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자신만만했던 오연우의 예상과는 달리 연락했던 균열 파티는 우리의 제안을 전부 거절했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장난 전화하지 마세요.
-죄송하지만, 정말 태성건설 측에서 연락 온 겁니까?
오연우 아버지의 건설 회사인 태성건설 이름을 팔았음에도, 전부 장난 전화 취급하거나 정중히 거절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나도 이 정도 일 줄은.”
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균열에 들어갈 때 외부인과 같이 입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범죄의 위험도 있고, 전투 자체에 집중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
“이제 마지막이네요.”
우리는 마지막으로 남은 전화번호로 통화 연결을 시도했다.
-여보세요.
굵직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D등급 균열 파티의 정대훈 씨 연락처 맞나요?”
-예. 제가 정대훈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다름이 아니라…….”
우리는 간략하게 전화한 용건을 말했다.
-어어. 그러니까 D등급 균열에 같이 입장하고 싶다는 말이죠?
“네. 아이템이나 수당은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입장만 같이할 수 있으면 됩니다.”
-허허. 이것 참.
중년 남성도 부탁이 부담스러운지 난감해하는 기색이 휴대폰을 통해 느껴졌다.
-태성건설에서 연락하신 거라고 하셨죠?
“네. 제가 오윤철 사장님 아들입니다.”
잠시 고민하는 듯 침묵이 이어지고.
-예전에 태성건설에 신세 진 일도 있고 하니. 좋습니다. 다음 균열 일정 잡히면 같이 가도록 하죠.
“정말이요? 정말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안 될 수도 있어요. 아직 일행과 이야기를 나눈 게 아니라서. 다음에 다시 연락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나고. 마지막 연락에서 극적으로 성공한 기쁨에 나와 오연우는 환호성을 질렀다.
“형. 잊으면 안 돼요? 5편!”
“알았어. 잘되면 꼭 5편 찍을게.”
오연우는 헤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5편을 강조하며 떠나갔다.
그리고 며칠 뒤.
정대훈에게서 일정이 잡혔다는 말과 함께 장소와 시간을 보내왔다.
* * *
E등급 균열이 경찰. 즉 정부 기관에 의해 관리, 제거가 이루어진다면.
D등급 균열부터는 정부 기관에서 관리, 민간에서 제거가 이루어진다.
각 지역 중심 도시를 거점으로 균열 관리 센터가 있고, 관리 센터는 곳곳에 설치된 탐지 기계에서 균열을 예상하고 등급에 맞게 소속된 파티나 길드에 균열을 할당한다.
D등급의 경우 할당된 균열을 제거하면 기관에서 수당을 지급하고, 균열핵만 수거해 간다. 나머지 아이템은 균열을 제거한 파티의 몫.
D등급의 균열도 3단계로 나뉘는데, D등급 1단계의 경우 수당도 적고, 아이템 수입도 애매해서 일반 회사원보다 적게 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파티가 1단계에서 머무르지 않고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정대훈의 파티는 1단계에서 오래 일을 하는 파티였다.
특이하게도 일행 전원이 가족인 가족 파티라는 형태로 1단계에서 계속 일을 해오고 있었다.
“아빠. 제정신이야? 저 사람이 누군 줄 알고 같이 균열에 데리고 들어가.”
“아윤아. 태성건설에서 부탁해온 거야. 설마 나쁜 사람을 보냈으려고.”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별로 나쁜 형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조용히 해. 정선우!”
“…….”
파티의 일정을 전해 받고, 균열이 생성되는 서울 외곽의 어느 공터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릴 줄 알았지만.
정대훈의 딸, 정아윤이 나와 동반 입장을 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는 균열에 같이 들어가지 못하겠다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그녀의 반응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
“아윤아. 이미 약속도 했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냥 돌려보내니.”
정대훈의 말에도 그녀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살벌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 뭐 때문에 우리랑 균열에 같이 들어가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목적은 D등급 균열에서 마석을 얻는 게 목적이었지만, 대충 고유 능력을 성장시키는 데 필요하다고 얼버무렸다.
설명에도 정아윤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았다.
한창 내가 정아윤에게 몰리고 있을 때, 또 다른 남자가 이곳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균열 관리 센터 직원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대훈 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파티에 인원이 늘었나요? 제가 알기로는 3명이 들어간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분은 같이 들어가기만 할 겁니다. 전투에도 참여 안 할 겁니다.”
남자 직원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무것도 안 할 거면 균열에 왜 들어가느냐? 라고 묻는 듯했다.
설명하자니 시간도 오래 걸릴 것 같아 그냥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균열 들어가기 전에 신분증 제출하고, 여기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거기 동행하시는 분도 같이 해주시죠.”
간단한 신원 파악이 끝난 뒤, 균열 발생 예상 시각이 다 되었다.
-우우웅!
그동안 자주 보았던 E등급 균열과 미묘하게 다른 느낌의 균열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센터 직원은 차에서 휴대용 의자를 꺼내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책을 꺼냈다.
“그럼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직원의 태평한 안부 인사를 받으며 나와 정 씨 가족이 균열 안으로 향했다.
처음 들어온 D등급 균열은 모습은 E등급 균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전체 길이는 E등급의 5배가 넘는다고 한다.
정 씨 가족은 균열에 들어오자마자 장비를 갖추고, 무기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정대훈은 두꺼운 철 방패와 도끼를, 정아윤은 활, 정선우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대충 정비가 끝난 듯 보였지만, 출발하지 않고 계속 입구에 머물렀다.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저기 왜 출발을 안 하시는 거죠?”
“아, 균열 입구가 닫히길 기다리는 거야. 최초 입장 15분 후에는 입구가 닫히거든.”
“그렇군요.”
“가끔 안 좋은 의도를 가지고 뒤를 노리는 경우가 있어서 보통 입구가 완전히 닫힌 후에 움직이기 시작하지.”
E등급 균열만 다니다 보니 D등급 균열에는 그런 법칙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오자, 이번엔 정대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흠흠. 그러고 보니 아직 자기소개도 안 했네.”
통성명을 했어야 할 타이밍에 정아윤이 화를 내며 몰아붙이는 바람에 소개할 시간이 없었다.
“내 이름은 정대훈이고, 저기 뿔나 있는 예쁜 아가씨가 정아윤, 그 옆에는 정선우. 보시다시피 가족 파티야.”
“제 이름은 전세진입니다.”
“…….”
“…….”
정아윤은 아직 불편한 표정이었고, 정선우는 낯을 가리는지 살짝 고개만 꾸벅거렸다.
약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정대훈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근데 도대체 무슨 능력이길래 여길 따라온 거야? 전투에 참여 안 하면 경험치도 못 얻는데.”
나는 살짝 고민한 끝에 능력을 보여주기로 했다.
-균열획득!
[마석을 사용해 소유권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E등급 마석 10개’를 이용해 균열의 소유권을 획득하시겠습니까? (Y/N)]
곧바로 E등급 마석 10개를 사용해 소유권을 획득하고 보금자리를 소환했다.
갑자기 눈앞에 텐트 하나가 생겨나자 정 씨 가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퓨이?”
“어머!”
언제나 그렇듯 퓨이가 텐트에 나와 내 품에 쏙 안겼다.
“저는 전투 능력은 없고 균열 안에 이런 보금자리를 만드는 능력밖에 없어요.”
정 씨 가족은 신기한 듯 텐트를 둘러봤다.
“호오, 잠깐 안에 둘러봐도 될까?”
“네, 대훈 아저씨.”
정대훈은 텐트 안을 둘러보더니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 생각보다 넓네. 어? 여기 전기도 들어와? 냉장고도 있네.”
“네. 그것도 제 능력이에요.”
텐트에 관심이 쏠린 정대훈과 달리 정선우는 퓨이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형. 이 슬라임 형이 키우는 거예요?”
“그래. 이름은 퓨이.”
“퓨이!”
“와! 한번 만져봐도 돼요?”
“응. 괜찮아. 퓨이는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걸 좋아해.”
정선우는 조심스럽게 퓨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퓨이도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우와. 엄청 부드러워. 얘 엄청 얌전하네요.”
정선우가 퓨이에게 모든 관심이 쏠렸을 때, 또 한 명 퓨이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힐끔.
정아윤은 퓨이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가까이 오기 싫은지 멀찍이서 곁눈질하기만 했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퓨이를 바닥에 내려줬다. 그리고 퓨이에게 눈빛으로 내 의지를 전했다.
퓨이와 내 친밀도는 벌써 95%를 돌파했다. 퓨이는 내 눈빛만 보고 의도를 알아차리고 곧바로 행동을 시작했다.
-퐁. 퐁. 퐁
퓨이는 귀엽게 몸을 튕기며 정아윤을 향해 다가갔다. 갑자기 퓨이가 다가오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퓨이!”
“으응? 왜 그러니?”
정아윤이 퓨이를 보기 위해 상체를 살짝 숙이자, 퓨이는 살짝 튀어 올라 그녀의 품 안에 쏙 들어갔다.
“어머. 어머.”
품 안에 안겨든 퓨이 때문에 처음에 당황했지만, 곧바로 기분 좋은 부드러움과 말랑말랑함에 매료되어 퓨이를 품 안으로 꼭 껴안았다.
정아윤의 굳어 있던 얼굴이 퓨이의 애교 한방에 싹 풀려버렸다.
“얘들아. 이제 출발하자.”
“네.”
“네.”
정대훈이 출발을 알리자, 정아윤과 정선우가 준비를 했다.
“잘 다녀오세요.”
“퓨이!”
정아윤과 정선우는 아쉬운 듯 퓨이를 바라보다 정대훈을 따라 균열 안쪽으로 향했다.
* * *
1시간 반 정도 지났을 때, 균열 안쪽에서 정 씨 가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아윤과 정선우는 상대적으로 말끔했지만, 정대훈의 방패와 도끼에는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정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비와 무기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어? 설마 저기 수돗가 쓸 수 있는 거야?”
“쓸 수 있어요.”
“그럼 좀 쓸 수 있을까? 무기랑 방패에 묻은 피랑 살점 좀 씻어내고 싶은데.”
“네. 마음껏 쓰셔도 돼요.”
“하하. 고마워. 매번 피 냄새 때문에 집에 돌아갈 때 곤란했거든.”
정대훈은 내게 웃으며 장비와 무기를 가지고 수돗가로 향했다.
“저기.”
“예?”
정아윤이 슬쩍 나를 불렀다.
“퓨이는 어디 갔어요?”
“아. 텐트 안에서 그림책 읽고 있어요.”
“슬라임이 책을 읽는다고요?”
두 남매가 텐트 안의 퓨이를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와. 정말 책을 읽고 있네.”
“퓨이!”
퓨이는 놀라는 두 남매에게 우쭐한 몸짓을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퓨이를 쓰다듬어줬다.
장비 정비를 끝낸 정대훈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너 능력이 정말 특이하네. 괴물 조련사 같은 건가?”
“그런 건 아니고. 균열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는 정도예요. 퓨이도 보금자리의 펫이고요.”
“그렇구먼.”
“냉장고에 시원한 음료수라도 꺼내드릴까요?”
“나는 됐어. 우리 애들이나 챙겨줘.”
“캔맥주도 있는데.”
“맥주?!”
음료수 이야기에는 반응하지 않던 정대훈이 맥주 이야기에 즉각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정아윤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정대훈을 바라보았다.
“아빠. 맥주 마시려고?”
“어흠, 목이 좀 마르기는 하네. 큼, 마시면 운전을 못 하는데.”
정대훈은 입으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눈으로는 계속 정아윤을 힐끔거렸다.
“어휴, 운전은 내가 할게. 대신 적당히 마셔. 엄마한테 또 혼나지 말고.”
“흐흐. 역시 우리 딸.”
정아윤이 운전을 하겠다고 나서자 정대훈의 입이 큼지막하게 벌어지며 행복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정대훈에게는 캔맥주를 남매에게는 음료수를 꺼내줬다.
“크아아아! 균열 사냥 뒤에 먹는 시원한 맥주가 별미네.”
캔맥주를 크게 한 모금 마신 정대훈이 매우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대훈 아저씨. 혹시 다음 균열에도 제가 따라가도 될까요?”
“어. 그렇게 해.”
맥주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인지 정대훈은 아주 가볍게 내 부탁을 수락했다.
정아윤은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처럼 격렬한 반대를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내 보금자리에서 휴식한 정 씨 가족은 균열을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그럼 다음에 연락할게.”
“음료수 잘 마셨어요.”
정대훈은 웃으며 인사를 했고.
정아윤은 살짝 틱틱대는 말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래도 표정은 아주 부드러워져 있었다. 정선우도 옆에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 씨 가족이 균열을 나가고.
균열 안에는 나와 퓨이만 남게 되었다.
“그럼 퓨이야. 일 시작할까?”
“퓨이! 퓨이!”
우리는 균열 내부를 돌아다니며 시체와 떨어진 잡동사니 아이템들을 모아 마석 추출을 했다.
E등급 균열은 그 길이가 길지 않아 15분이면 끝날 때도 있었는데, D등급 균열은 훨씬 길어서 1시간 정도 소요됐다.
그렇게 균열을 싹 정리한 뒤 얻은 성과물은.
E등급 마석 11개, D등급 마석 5개.
생각보다 많이 나온 E등급 마석과 D등급 마석.
E등급만 해도 110만 원.
‘D등급 마석은 얼마나 받을 수 있으려나?’
행복한 상상을 하며 마석들을 소중하게 챙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