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6화
조성훈이라 불린 남자는 자연스럽게 나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조성훈이라고 합니다. 서재필 교수님 밑에서 연구를 돕고 있습니다.”
“아, 전세진이라고 합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이름을 밝히며 인사를 해와서 얼떨결에 인사를 받아주었다.
“세진 씨. 멀지 않은 곳에 휴게실이 있는데, 거기로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뭐하는 짓이야. 네가 왜 세진 씨랑 이야기를 나눠.”
조성훈이 아주 정중하게 초대를 해왔지만 신지아가 매섭게 반응했다.
“지아야.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건 알겠는데, 조금 빠져주지 않을래? 귀한 손님이랑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거든. 오랜 친구지만 서로 지킬 예의는 지켜야지.”
조성훈의 말에 신지아는 질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니면. 세진 씨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너한테 허락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야?”
“…….”
계속되는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내가 먼저 나섰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상관없습니다. 휴게실에서 이야기를 들어보죠. 괜찮죠, 지아 씨?”
신지아는 표정은 좋지 못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와 신지아는 조성훈을 따라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은 테라스처럼 주변이 뻥 뚫려 주변 대학 전경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음료수라도 한 잔 뽑아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용건만 간단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음료수 권유를 거절하고 용건을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세진 씨의 말대로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슬쩍 신지아 쪽을 바라보더니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신지아를 통해서 마석을 공급해 주고 계신 분이 세진 씨 맞으시죠?”
“…….”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신지아가 운영하는 공방에도 마석을 지원해 주시는 것 같은데, 대가로 뭘 받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그저 세진 씨에게 더 좋은 계약 조건을 보장해줄 수 있는 곳을 소개해드리려고 그런 것뿐입니다.”
아직 조성훈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
“마석을 지원해 주는 대신 지아 씨에게 아티팩트 제작을 배우고 있습니다. 딱히 불만은 없습니다.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하. 신지아에게 아티팩트 제작을 배우신다고요? 혹시 이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까? 신지아가 아티팩트 제작을 배우기 시작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요.”
조성훈의 말에 신지아가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뭐. 기초적인 지식은 그녀가 가르쳐 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좀 더 제대로 배우려면 전문성이 보장된 사람한테 배우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녀가 아티팩트 제작을 배우기 시작한 게 3년이라고?’
그녀에게 정확한 경력을 물어본 적은 없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확실히 짧은 기간이긴 했다.
3년.
길다면 긴 시간이겠지만, 한 분야에 뛰어난 전문성을 가지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슬쩍 그녀를 바라보니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진 씨가 원하신다면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아티팩트 제작자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마석도 교수님이 매입하시는 가격의 3배까지 계산해드리겠습니다.”
나도 바보는 아니다. 이렇게 좋은 대우를 그냥 해줄 리가 없다. 당연히 내게 원하는 게 있을 터.
“조건은 뭡니까?”
“특별한 조건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 구질구질한 아티팩트 공방에는 발길을 끊고, 우리 공방과 거래를 유지 해주시면 됩니다.”
“한마디로 지아 씨를 배신하라는 겁니까?”
“굳이 그런 거북한 표현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저 전세진 씨가 본인의 가치에 걸맞은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조성훈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당연히 내가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듯이.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직까지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는 신지아.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먼저 움직였다.
-탁!
한 손에 짐을 챙겨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신지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신지아가 화들짝 놀랐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지아 씨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가요 지아 씨.”
나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이끌었다.
“세진 씨. 어디 가는 거예요?”
“학교 구경시켜준다고 약속했잖아요.”
“세진 씨, 잠시만요. 세진 씨!”
신지아는 불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이끌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세진 씨.”
등 뒤로 조성훈의 외침이 들렸지만 무시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도망치듯 휴게실을 빠져나와 계속 걸었다.
신지아도 아무 말 없이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어. 근데 여기가 어디지?’
생각보다 건물의 구조가 복잡해서인지 순간 길을 잃어버렸다.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신지아가 내 팔을 잡았다.
“이쪽이에요.”
이번엔 그녀가 내 팔을 잡고 걷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 * *
나와 신지아는 함께 건물을 빠져나와 대학교 내부의 어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뭔가 할 말도 많고 물어볼 것도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답답했다.
그녀도 아무 말 없이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눈앞으로 10명 정도의 학생이 지나갔을 때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세진 씨.”
“뭐가요?”
“아까 조성훈의 말대로 아티팩트 제작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건 3년밖에 되지 않았어요.”
“…….”
속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계약했을 때,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믿음을 가졌을 뿐. 그때는 내가 이렇게 아티팩트 제작에 관심을 두게 될 줄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조금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이론 쪽 공부는 꽤 자신 있지만, 제작에 관한 세세한 부분이나 경험은 저도 아직 부족해요. 솔직히 자신 있게 누군가를 가르칠만한 입장은 아니에요.”
“그럼 단순히 마석 때문에 가르쳐 주겠다고 한 거예요?”
끄덕끄덕.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그녀가 나를 속이겠다는 생각으로 나를 대했다면, 절대 그렇게 열정적으로 나를 가르치지 않았을 거다.
자격 여부를 떠나서 그녀는 정말 날 열심히 가르쳤고 신경 써줬다. 어쩌면 날 속였다는 죄책감에 더 열심히 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
“방금 만난 조성훈이란 사람. 도대체 무슨 관계예요?”
신지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체념한 표정으로 모든 걸 풀어놓기 시작했다.
“조성훈은 아버지 친구의 아들이에요. 아버지와 그 친구는 어렸을 적부터 대학생 시절까지 같이 공부했던 사이고요.”
나는 자연스레 아티팩트 공방에서 봤던 중년 남성과 여학생의 사진을 떠올렸다.
“제 어머니는 저를 낳고 돌아가셨고, 저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어요. 자연스럽게 아버지 친구 가족과도 가깝게 지냈고, 조성훈도 그때 알게 됐죠.”
그녀는 아련한 표정으로 그때를 떠올리는 듯했다.
“불행의 시작은 아버지가 새로운 마력 회로를 개발해 내면서부터였어요. 아버지는 개발한 성과물을 자연스럽게 친구에게 보여줬어요. 새로운 마력 회로를 이용해 친구의 사업을 도와주고 싶어 하셨거든요.”
뒷부분이 예상되는 이야기의 흐름에 입맛이 텁텁해졌다.
“친구는 그걸 보고 욕심이 생겨 자료를 빼돌려 자신의 성과물인 것처럼 특허를 내버렸어요. 그리고 크게 사업을 성공하게 됐죠. 한편 배신당한 아버지는 혼자 끙끙 앓으면서 연구를 계속해 나갔어요. 운영하던 아티팩트 공방도 이때부터 어려워지기 시작했죠. 혼자 애쓰시던 아버지는 과로로 쓰러지셨고, 제가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어요.”
이야기를 듣던 나는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그럼 왜 조성훈이 지아 씨를 방해하려고 하는 거죠?”
“남아 있는 아버지의 연구자료 때문이에요. 친구가 빼돌렸던 연구는 미완성이었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미완성의 연구를 마무리 짓기 위해 노력하셨지만 실패했어요. 대신 제가 교수님 밑에서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아버지의 연구를 이어받았어요. 그때부터 아티팩트 제작을 배운 거고요.”
“…….”
“조성훈과 그의 아버지는 아직도 아버지가 남기신 연구자료를 노리고 있어요. 그래서 아티팩트 공방을 없애고 싶어 하죠. 연구할 곳이 없어지면 제가 연구를 포기하고 자료를 넘길 테니까.”
상상 이상으로 악랄한 조성훈과 그의 아버지의 행동에 분노가 치솟았다. 사업에 실패할 때 나를 속였던 사기꾼들이 생각날 정도로.
내가 조성훈 부자를 생각하며 치를 떨고 있을 때, 이번엔 신지아가 나에게 물었다.
“저도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아까 왜 조성훈의 제안을 거절했어요? 마석 값도 더 주고, 제대로 된 사람에게 아티팩트 제작도 배울 수 있는데.”
나는 그녀의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그냥 싫었어요.”
“……?”
“돈 때문에 사람한테 버림받는 거, 얼마나 비참한 일이인지 당해봐서 알거든요. 그래서 싫었어요.”
사업 실패로 주변 사람들 전부 떠나가고, 빚 때문에 친구한테 배신당하고.
그때 처참한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최근에 어려운 일이 있었는데, 전화 한 통에 달려와 준 사람이 있어요. 제가 잘나갔을 때처럼 값비싼 선물을 하거나 비싼 밥을 사준 적도 없는데, 제 일인 것처럼 믿고 도와줬어요. 그걸 보고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최근에야 알게 된 잘나갈 때는 절대 알 수 없는 인생의 중요한 가치. 한 번 제대로 인생의 쓴맛을 보고 나서야 뼈저리게 알게 되는 것들.
“돈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지만. 사람은 안 그렇거든요. 좋은 사람과의 관계는 돈이나 상황에 변하지 않아요.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면 진정한 관계가 아니었던 거죠.”
“…….”
“만약 제가 조성훈이라는 사람의 제안을 덜컥 받아들였다면, 저를 배신하고 속였던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싫었어요.”
“그런 건가요?”
“네. 그런 겁니다.”
신지아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별안간 눈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그럼 저도 세진 씨에게 좋은 사람인 건가요?”
나는 그런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지아 씨가 제 한우 선물 세트를 더 이상 탐내지 않는다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
“…….”
“푸흡.”
“……?”
“푸하하하. 그게 뭐예요, 재미없게. 하하하하.”
그녀는 주변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살짝 고일 정도였다.
‘재미없다면서 엄청나게 웃네.’
나도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 지었다.
신지아의 웃음이 멈출 때까지 나와 그녀는 그렇게 벤치에 앉아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 * *
오연우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좌절에 빠졌다.
전세진과 퓨이의 출연으로 그의 채널은 잠시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그 덕분에 채널 구독자 숫자도 오르고, 영상들의 조회수도 눈에 띄게 상승했다.
하지만 뜨거웠던 관심은 식어가고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오연우는 자신이 만들어 낸 컨텐츠와 편집 실력으로 사람들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퓨이는 더 안 나오나요?
-퓨이 보여주세요.
-퓨이는 역시 조작이었나요?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귀여운 슬라임에 쏠려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점점 싸늘해지고 오연우는 계속해서 자신감을 잃어갔다.
며칠을 영상촬영과 편집을 손에서 놓은 채 고심한 끝에, 그는 결론을 내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