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15화 (15/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15화

6. 변화하는 일상

눈앞에 놓인 아르키트 회로 이론서를 바라보며 집중했다. 한 구절이라도 놓칠세라, 구절마다 의미를 최대한 곱씹으며 머리에 집어넣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왔다. 체감으로 엄청난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이제 겨우 책의 초입부를 읽었을 뿐.

“흐읍!”

책장을 넘기는 순간, 갑자기 터져 나오는 기침.

“쿨럭.”

[집중 유지에 실패하셨습니다.]

[아르키트 회로 초급 이론서의 습득이 중단됩니다.]

[최종 진행률 7%]

“으아아악! 뭐 이런 미친 스킬북이 다 있어?!”

나는 바닥에 누운 채로 발버둥을 치며 소리쳤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보던 퓨이는 잠시 나를 지켜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다.

반복된 실패로 터져 나오는 나의 이상 행동에 적응한 모습이었다.

거대 소라게 괴물을 해치우고 얻은 유일 등급 스킬북.

‘아르키트 회로 초급 이론서’

이 이론서를 배우기 위해서는 2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지능 20과 집중 20의 능력치.

지금까지 레벨업으로 얻은 능력치를 모두 모아뒀기 때문에, 16포인트 중에서 14포인트를 투자해 쉽게 조건을 달성했다.

문제는 두 번째 조건.

-책을 끝까지 읽으면 스킬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보면 조건이 아니라 당연한 설명같이 보이는 문구. 스킬북을 사용하려면 당연히 책을 읽어야 하니까.

그게 함정이었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단순히 ‘읽기’만 해서는 안 됐다. 정확히 97이라는 집중을 유지한 채 책을 끝까지 읽어야 했다.

집중의 최대 수치는 100.

100중 97을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모든 잡념을 없애고 완벽한 집중을 해내야 한다는 말.

몇 번의 도전이 있었지만 전부 처참하게 실패했다. 진행률 10%도 채우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나는 고개0를 돌려 스킬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어이없는 스킬북은 내다 팔기라도 가능하면 모르겠는데 떡하니 [귀속]이 붙어 있어 팔지도 못한다.

한마디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익혀야 한다는 말.

며칠 동안 머리가 터져라 스킬북을 읽은 성과는 단 하나였다.

아르키트 회로 이론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신지아에게서 배우는 마력 회로 이론과 유사성이 있다는 점.

딱 그 정도만 알아냈다.

“스킬북아.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길래 이렇게 고생시키는 거냐?”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허무한 질문을 하며 멍하니 텐트 천장을 바라봤다.

휴대폰 화면의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오후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1시로 잡혀 있는 약속 시각을 상기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

오후 1시 5분 전.

나는 신지아의 아티팩트 공방 앞에 도착했다.

-저 공방 앞에 도착했어요.

-금방 나갈 테니 기다려요.

금방 나온다는 그녀의 문자를 받고, 공방 벽에 기대서서 그녀가 나오길 기다렸다.

-철컥!

공방 특유의 둔중한 출입문 여는 소리와 함께 신지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 기다렸어요?”

“어…… 아, 아뇨. 저도 금방 도착했어요.”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뭐에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멍해요. 자다 왔어요?”

“그게 아니라. 오늘 좀 달라 보여서.”

평소에 공방에서 보던 허름한 작업복 바지, 두꺼운 패딩 차림이 아니라.

세련된 검정 정장 바지에 상의는 니트와 더블 코트. 거기다 작업할 때는 대충 묶던 머리도 예쁘게 손질하고, 얼굴에는 옅은 화장까지.

평소에도 어느 정도 예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꾸미고 나오니 모델 포스가 났다.

평소처럼 입고 나온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오랜만에 대학교에 가는 거라 조금 꾸며봤어요.”

“네. 잘 어울려요.”

“헤헤. 칭찬 고마워요.”

그녀는 내 칭찬이 마음에 드는지 배시시 웃음 지었다.

신지아와 함께 그녀의 모교인 한국대학교에 도착했다. 전국에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여 공부하는 이곳.

나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요?”

“아, 죄송해요. 저는 대학교를 들어와 보는 게 처음이라. 조금 들떴나 보네요.”

내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그게 뭐예요, 사람 민망하게. 나중에 실컷 구경시켜 줄 테니까 조금 서둘러요.”

“알겠습니다.”

걸음을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를 따라 틈틈이 주변을 구경했다.

평범하게 공부하고, 친구와 어울리고, 또 간간이 보이는 연인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조금 더 젊고 여유가 있었을 때, 대학교에 다녔다면 어땠을까?’

대학교를 거니는 학생들의 모습에 나를 투영하며 상상해 봤다.

‘썩 어울리나 않나?’

내 달콤한 상상은 앞서가던 신지아의 외침과 함께 끝났다.

“계속 꾸물거리면 버리고 갈 거예요?”

“갑니다. 가요.”

그녀를 따라 도착한 곳은 ‘공과대학 에너지 자원 공학부’라고 적혀 있는 곳이었다.

신지아는 자연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 ‘서재필 교수’라고 적힌 방 앞에 섰다.

-똑. 똑. 똑.

“교수님. 저 신지아입니다.”

“오, 어서 들어와.”

그녀를 따라 들어간 방 안에는 안경을 낀 지적인 이미지의 50대 남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교수님.”

“그래. 마석을 보낼 때 한번 들릴 줄 알았는데, 이제야 얼굴을 한번 보는구나.”

둘은 가볍게 포옹을 나누며 반가움을 표했다.

“교수님. 이쪽이 마석을 제공해준 전세진 씨예요.”

“반갑습니다. 에너지 자원 공학부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서재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전세진이라고 합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서재필 교수는 손님맞이용 소파로 우리를 이끌었다.

“신분을 숨기고 싶다고 하셔서 망설이다가, 꼭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지아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습니다.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서재필 교수의 정중한 감사 인사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너무 과한 감사 인사는 받기 민망합니다.”

“전혀 과하지 않습니다. 모르시겠지만, 세진 씨의 마석 덕분에 제 연구의 큰 실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서재필 교수는 간단히 연구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구는 마석을 이용한 새로운 에너지 저장 기술의 개발.

지구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기술 중의 하나인 에너지 저장 기술. 그 기술의 새로운 소재로 마석이 떠오르고 있다.

아직 상용화가 가능할 정도로 효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충분한 개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서재필 교수는 이 분야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권위자이지만, 최근 연구가 벽에 가로막혀 진전이 없던 중에, 우연히 퓨이가 만들어 낸 마석을 접하게 되고 새로운 연구 방향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서재필 교수의 설명.

지금까지도 충분히 길었는데 그는 뭔가 불타올랐는지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열정적인 강의에 곤란해지려 할 때쯤.

신지아가 불쑥 한마디 했다.

“교수님. 저희 강의 들으러 온 거 아니거든요.”

“커흠.”

“한 번 불타오르면 끝까지 가시는 성격은 정말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손님도 오셨는데 민망하구먼. 허허.”

그녀의 적절한 개입으로 서재필의 강의가 끝을 맺었다.

“아무튼, 세진 씨에게 꼭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는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책상 뒤쪽에서 뭔가를 꺼내왔다.

“제 지인이 목장을 하는데 그곳에서 사 온 한우입니다. 오늘 날짜에 딱 맞게 부탁해서 준비한 것이니 꽤 맛있을 겁니다.”

딱 봐도 엄청 비싸 보이는 외견의 선물이었다.

“주소를 알면 댁으로 바로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부득이하게 직접 전해드리게 됐습니다. 번거롭지만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선물을 받아드는데 기분 좋은 묵직함이 느껴졌다.

‘퓨이야, 기다려라. 오늘 저녁은 소고기다.’

그때 옆에서 눈을 빛내던 신지아가 외쳤다.

“교수님. 저는요?!”

“허허, 미안하다. 하나밖에 준비를 못 해서. 너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 번 준비해 보마.”

교수는 허허로운 웃음으로 신지아의 강렬한 눈빛을 받아넘겨 버렸다. 그녀의 눈빛이 내 품에 있던 한우 선물 세트로 향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선물을 감싸 안으며 경계했다.

이 여자.

처음 만나 중국집 음식 시켜 먹을 때부터 조짐을 보였지만, 최근 같이 시간을 보내면 알게 된 사실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식탐이 엄청났다.

그녀는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반띵?’

나는 살짝 고개를 저어 보이며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우리 집에도 만만찮게 잘 먹는 식구가 있어서.’

그녀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살쾡이처럼 매서워지려고 할 때, 서재필 교수가 또 다른 선물을 꺼내 들었다.

“이건 우연한 기회로 얻게 된 것인데. 세진 씨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한번 가져와 봤습니다.”

그가 전해준 종이 가방 안에 든 것은 놀랍게도 스킬북이었다.

[특성: 명경지수(明]鏡止水) Lv.1][희귀]

-고요한 물의 표면처럼 집중을 유지합니다.

-능력치 집중 15 필요.

-집중의 효율을 올려줍니다.

-오래 집중할수록 효율이 점진적으로 증가합니다.

‘오오. 희귀 등급 특성!’

한우 선물 세트보다 더 귀한 선물이 튀어나왔다. 거기다 최근 집중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는데 너무 시기적절한 선물이었다.

“이렇게 귀한걸.”

“저는 괜찮습니다. 각성자도 아니라 필요한 물건도 아니었는데.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한 손에는 한우 선물 세트, 한 손에는 희귀등급 특성 스킬북까지. 오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로 나의 기분이 들떠있을 때, 서재필 교수는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세진 씨. 지금도 충분히 많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한 가지만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일단 들어보겠습니다.”

“세진 씨가 매번 전해주는 마석은 제 연구에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실제로 순조롭게 진행도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해 받은 E등급의 마석으로는 실험에 한계가 있습니다.”

나는 어렴풋이 서재필 교수의 부탁이 뭔지 예상이 됐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한 단계 높은 등급의 마석을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흐음.”

얼마 전에 괴물 소라게를 쓰러뜨리고 얻은 D등급 마석이 떠올랐다. 가격만 잘 쳐준다면 그 마석도 충분히 교수에게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교수가 원하는 건 이전과 같이 지속적인 마석 공급일 테지.’

솔직히 말해 괴물 소라게 같은 괴물과 다시 싸우는 건 한우 선물 세트를 아무리 줘도 거절하고 싶다.

“그럼 이제 E등급 마석은 필요 없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아직도 필요하긴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난다면 크게 필요하지 않게 될 겁니다.”

교수는 여기에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지만 세진 씨의 마석이 소문이 퍼져 다른 학부에서 은근히 접촉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말고도 아직 필요로 하는 사람은 꽤 많을 겁니다. 세진 씨만 허락해 주신다면 다른 필요로 하는 분들께도 마석을 판매할 수 있습니다.”

당분간은 E등급 마석의 수요가 계속될 거라는, 듣던 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그보다 D등급 마석이라.’

내가 선뜻 부탁의 답을 내놓지 못하자 교수가 말했다.

“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도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테니 오래 생각해 보시고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수는 마지막으로 내가 최대한 부담가지지 않게 배려해 주고 오늘 만남은 끝을 맺게 되었다.

양손의 선물보다 더 무거운 고민을 가슴에 안은 채, 신지아와 함께 교수의 방을 빠져나왔다.

“이야기가 꽤 길었네?”

우리가 방에서 나오자마자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시선을 옮겨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봤다.

멀끔한 차림에 왠지 여자들에게 인기 많을 것 같은 얼굴을 한 남자였다.

그는 나와 신지아를 향해 다가왔다.

“조성훈…….”

“오랜만이네. 신지아.”

신지아의 얼굴은 아까 한우를 노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 변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