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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9화 (9/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9화

“후우우.”

“…….”

신지아와 다시 방안에서 마주 앉았다.

나는 여유롭게 커피를 마셨다. 신지아 역시 아까의 흥분은 완전히 가라앉았는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반 넘게 남아 있는 커피잔을 계속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내심 초조해 보였다.

내가 가져온 마석에 관해 묻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초조한 모습이 지금까지 여유롭던 모습과 대비되어 흥미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것 때문에 일부러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는 건 아니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머릿속으로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 봤다.

솔직히 퓨이가 만들어 낸 마석이 이렇게 큰 가치를 가지고 있을 줄 전혀 예상 못 했다.

다른 마석들에 비해 독특해서 조금 더 비싸게 받는 정도로 생각했지, 세상을 뒤흔들만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어디까지 말하고, 어디까지 숨겨야 할까?’

일단 퓨이의 정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슬라임이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믿어주지 않겠지만.

문제는 눈앞의 신지아는 이 마석을 내가 만들어 냈다고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퓨이가 만들어 냈으니 사실 어느 정도는 비슷했다.

대충 생각을 정리한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하고 싶으신 말이 많으신 것 같은데. 해보세요.”

“저 마석. 세진 씨가 만들어 내신 건가요?”

“아뇨. 제가 만든 건 아닙니다. 저도 우연히 구하게 된 겁니다.”

일단 내가 만든 게 아니라고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녀는 내 말에 의심을 품는 듯했지만,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럼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E등급 균열에서요.”

“거짓말이군요?”

그녀는 내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확신한 듯이 말했다. 나는 침묵을 유지할 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럼 이 질문만 제대로 대답해줘요. 이 마석. 또 구할 수 있나요?”

그녀는 절박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마지막 질문에 대답을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도 오늘 나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인데, 저런 절박한 표정까지 무시하면서 끝까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네. 또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내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매우 밝아졌다.

“그런데 마석에는 가치가 없는 거 아니었어요? 마석보다 만드는 방법에 엄청난 가치가 있는 거라고 들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일반적인 마석으로의 가치가 없다는 뜻이었어요. 다른 분야에서는 충분히 쓰임새가 있어요.”

“다른 분야?”

“예를 들면 연구용이나 신제품 개발용이요.”

아까 E등급 마석에 불과하다는 말에 실망했었는데 다행히 마석만으로도 쓰임새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이 마석들을 구매해줄 만한 곳을 알거든요. 혹시 저한테 판매를 맡겨보실 생각 있어요?”

“어디에 파실 생각이신데요?”

“개인적으로 아는 대학교수님이 계시거든요. 그 교수님이 있는 연구실에서 이 마석들을 필요로 할 것 같아서요.”

“흐음.”

나한테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아직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중고 가게 노인에게 파는 것 보다는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지아가 슬쩍슬쩍 내 반응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아마 판매 다리를 놔주는 조건으로 뭔가를 요구할 생각인 듯했다.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혹시 가능하시면 저도 그 마석을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지아 씨가요?”

“네. 제가 연구 중인 아티팩트 회로가 있는데, 연구용으로 그 마석을 사용하고 싶어서요.”

“지아 씨에게도 팔면 되죠.”

“…….”

“혹시 공짜로요?”

“공짜로 받겠다는 건 아니에요. 근데 제가 요즘 경제적으로 사정이 좀 안 좋아서. 돈 말고 다른 방식으로 마석 값을 지불하고 싶은데.”

“쩝.”

경제적으로 사정이 안 좋다는 말에 살짝 동정심이 생겼다.

“그럼 뭐로 마석 값을 내실 생각이신데요?”

“그게…….”

“……?”

“혹시 아티팩트 제작에 관심 있으세요?”

“네?”

“아티팩트 제작이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제가 실력이 좀 좋거든요. 정말 잘 가르쳐드릴 수 있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나와서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세진 씨. 각성자 맞으시죠?”

“네. 전투 능력은 없지만.”

“스킬 자원으로 ‘집중’ 사용하시죠?”

나는 살짝 놀라며 반문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보통 전투 능력이 없으신 분들이 스킬 자원으로 ‘집중’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가요? 처음 들었네요.”

“특히 스킬 자원이 ‘집중’인 경우에 이런 제작 쪽 기술과 잘 어울리는 거 알고 계시죠?”

‘아티팩트 제작이라.’

저번에 능력자 커뮤니티를 통해 들었던 조언이 떠올랐다. 꼭 전투 능력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방향으로 능력을 개발시킬 수 있다는 말.

물론 고유 능력 덕분에 머물 집도 얻었고, 퓨이도 만날 수 있었고, 마석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아쉬운 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전투 능력만큼 큰 대우를 받기는 힘들지만, 주워듣기로 제작 능력도 그 숙련도에 따라서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 같았다.

아직 마석이 얼마에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마석만 어느 정도 넘기면 공짜로 아티팩트 제작 기술을 배울 기회.

“근데 정말 실력 있으신 거 맞아요?”

“당연하죠. 유명한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들어와요. 저 꽤 비싼 몸이에요.”

“근데 왜 이런 허름한 공방에?”

“원래 여긴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공방이었어요. 돌아가신 후에는 제가 맡았지만, 경영이 많이 힘들어져서.”

“아아.”

담담하게 집안 사정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오히려 그녀가 먼저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저 정말 잘 가르쳐드릴 자신 있어요. 분명 세진 씨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한번 맡겨주세요.”

그녀는 다시 한번 더 내게 부탁했다.

어조는 정중했지만 비굴하거나 애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멋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당한 그녀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믿음이 갔다.

“좋아요. 대신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한동안 이어진 조건 제시와 협상 끝에 나와 신지아는 합의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어디선가 가져온 계약서에 합의한 조건과 내용을 적어넣었다.

합의한 내용은 크게 3가지.

첫째. 신지아는 마석을 대신 판매하고 최종 가격 결정은 내가 결정한다. 또한, 나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타인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둘째. 신지아가 원하는 일정 수량의 마석을 제공해 주고 나는 그의 대가로 아티팩트 제작 방법을 배운다.

셋째. 나는 신지아에게 1개의 아티팩트를 받을 수 있으며, 유지와 수리 또한 그녀가 책임진다.

모든 조건이 대체적으로 나에게 유리하게 정해져 있었지만, 나는 다시 한번 더 꼼꼼히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했다.

이런 신중한 내 모습이 많이 양보한 그녀로서는 살짝 불만인듯한 모습이었다.

“언제까지 계약서만 읽고 있을 거예요?”

“각성한 지 얼마 안 되는 초짜라서 호구 취급당할까 봐요.”

아까 신지아가 내게 했던 말을 인용해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내가 읽고 있던 계약서를 채갔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말아요.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얼굴을 팩하고 돌려버렸다. 아무래도 진짜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상황과 안 맞을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토라진 모습이 내게는 조금 귀엽게 보였다.

“미안해요. 이제 서명할 테니까 다시 주세요.”

“…….”

내가 먼저 사과의 말을 꺼내자 그녀는 슬그머니 계약서를 내밀었다. 같은 계약서 2부에 각각 사인을 마치고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도 계약서에 사인하고 내게 계약서 1부를 돌려줬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아 씨.”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우리는 처음 통성명을 했을 때처럼 웃으며 악수를 했다.

악수가 끝나고 신지아는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책과 물건 떨어지는 소리와 그녀의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곧이어 그녀는 두툼한 책 몇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턱!

몇 권 안 되는 책이 엄청 둔탁한 소리를 내며 탁자 위에 올라왔다.

“이건 뭐죠?”

“뭐긴요. 아티팩트 제작을 배우는데 필요한 기본 이론서들이죠. 다음에 여기 오실 때, 제가 정해드리는 곳까지 전부 읽어오세요.”

“네???”

가방에 전부 들어갈지 의심이 되는 두께의 책들. 한번 펼쳐보니 글씨도 깨알 같았고, 어려워 보이는 단어들로 가득했다.

“연락처도 알려드릴 테니까, 모르거나 이해 안 되는 부분 있으면 바로 연락하시고요.”

“…….”

“제가 확실히 가르쳐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의욕 만만한 모습의 그녀를 보며 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신지아가 제대로 가르쳐 줄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대신 내가 그녀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할 것 같다.

* * *

신지아와 공방에서 계약을 나누고 3일이 지났다.

평소와 같이 공장에서 일을 끝내고 지구대로 향하는 길에 신지아의 전화가 걸려왔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세진 씨. 책 많이 읽으셨나요?

“최대한 읽고 있습니다.”

-나중에 검사할 거니까 제대로 읽어오세요. 다른 게 아니라 전에 말씀드린 대학에서 마석을 구매하기로 했어요.

“정말요? 잘됐네요.”

-개당 10만 원에 구매하고 싶다고 하는데. 어때요?

“10만 원이요?!”

생각보다 높은 금액에 놀라 소리쳤다.

-깜짝이야. 네. 저에게 준 5개를 제외하고 총 23개 다해서 230만 원이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또 구매하고 싶다고 전해 달래요.

‘대박이네. 균열에 널브러진 시체들에서 추출한 마석이 저런 가치를 가지다니.’

갑자기 마석을 1만 원에 사겠다고 했던 중고 가게 노인이 생각났다.

“그때 지 씨 할아버지라는 사람은 이걸 알고 만 원에 사겠다고 하신 걸까요?”

-지 씨 할아버지요? 아뇨. 아마 정확한 건 몰랐을 거예요.

“근데 어떻게?”

-괜히 30년 경력이 아니라는 말이겠죠. 정확한 검사도 없이 감으로 그 마석의 가치를 짐작해낸 거니까.

“생각보다 대단하신 분이었네요.”

-대단하긴 뭘. 그보다 10만 원에 거래하실 거죠?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나중에 계좌 보내주세요. 그리고 다음에 오실 때까지 숙제 다 해오셔야 해요.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노력으로는 부족해요. 무조건 해오세요.

신지아의 단호한 말을 끝으로 통화는 종료됐다.

‘280만 원이라. 생각보다 쉽게 돈을 벌었네.’

물론 대부분 빚을 갚는 데 쓰겠지만 마음이 뿌듯했다. 그리고 이렇게 돈을 벌 수 있게 해준 퓨이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거로 준비해야겠다.’

어떤 맛있는 저녁을 사 갈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휴대폰에 신호가 울렸다.

‘뭐지? 문자가 온 것도 아닌데.’

잠시 버벅대며 이리저리 확인해 보니, 각성자 전용 어플을 통해 누군가가 나에게 쪽지를 보낸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너튜브에서 연우 PD 채널을 운영 중인 오연우라고 합니다.

-혹시 ‘균열 노숙자’라는 능력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 좀 나누고 영상을 촬영할 수 있을까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밑에 제 채널 주소와 연락처 남겨드릴 테니 보시고 관심 있으시면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오연우라는 사람에게서 날라온 장문의 쪽지에 한동안 멍하게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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