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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1화 (1/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1화

0. 어느 추운 겨울날

어느 겨울밤 나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하아.”

내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코끝은 감각이 없어지고, 얼굴은 조금씩 붉어졌다.

휘이이잉.

매섭게 불어오는 겨울바람.

여기가 한국인지, 아니면 시베리아 한복판인지 의심이 들 만큼 시린 바람이었다.

목 부분의 외투를 단단히 여미며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연말이지만 추운 날씨 때문인지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건물 안 가게들은 연말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길가에 멈춰 따뜻한 분위기의 한 카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느릿느릿 발을 옮겨 도착한 곳은 한강이 보이는 시민 공원이었다.

주인 없는 공원 벤치에 앉아 한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질문에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지난 몇 개월 동안 끊임없이 속으로 곱씹은 질문이었다.

친구와 사업 시작, 무리한 확장, 예견된 실패, 마지막에는 친구의 배신까지.

드라마 소재로 쓰기에도 진부한 스토리가 내 인생에 일어났다.

그 결과 20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남은 건 매고 있는 가방 속 옷 몇 벌과 지갑에 지폐 몇 장.

그리고 3억의 빚.

사업이 한창 잘되던 때에는 3억이 우습게 보였던 적도 있었다. 하루 매출이 몇천을 찍던 경우도 빈번했으니까.

아이들이 더 쉽게 각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약.

이게 우리의 사업 아이템이었다.

자식을 각성자로 만들고 싶은 부모들의 돈을 정말 싹싹 끌어모았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재고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팔려나갔다.

하지만 약의 효능이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삐 움직였지만.

제품을 공급해 주던 본사와의 연락은 끊긴 뒤였고, 우리도 사기당했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뤄왔던 모든 것들이 환상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동고동락했던 친구가 빚과 뒤처리를 내게 떠넘기고 자취를 감췄다.

얼마 되지 않는 낡은 집과 자동차, 돈이 될만한 물건을 다 처분했음에도 3억이라는 빚이 남아버렸다.

도시 야경의 형형색색으로 물든 한강을 바라보다 불쑥, 머리를 스치는 생각.

‘뛰어들까?’

‘한강 물은 따뜻하지 않을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위험한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너무 춥다. 추위라도 피할 수 있었으면.’

우우웅!

옆에서 낮은 울림과 함께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옆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

그곳에는 공간이 깨진 것처럼 금이 생겨 있었고, 그 틈새로 푸른빛과 하얀빛이 뒤섞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균열 생성에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반적으로 도시 근처에 생성되는 균열은 미리 경찰이 출동해 접근을 차단하고 균열을 제거한다.

그런데 경찰은커녕 일반 시민도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멍하게 균열을 바라보던 나는 추위를 피하고자 균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오오!”

생전 처음으로 균열로 들어온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커다란 동굴 같은 내부에 벽 곳곳에는 은은한 빛을 내는 발광석이 존재했다. 그 덕분에 균열 내부는 불을 켜놓은 것처럼 환했다.

무엇보다 따뜻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한 것만으로도 얼굴에 온기가 조금씩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앉을만한 곳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바닥은 딱딱했지만, 추위를 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정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 집인 것처럼 편안했다.

식었던 몸에도 조금씩 온기가 돌자 노곤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균열 안쪽에는 괴물들이 있을 텐데. 자면 안 돼.’

동굴 안쪽을 의식하며 잠을 깨려 노력했지만.

종일 거리를 떠돌아다녔던 피로에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억지로 붙잡고 있던 의식이 나른한 기운에 밀려 조금씩 흐릿해졌다.

결국 나는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씨!”

툭툭.

“아저씨. 일어나 봐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빨리 일어나세요.”

약간 가시 돋친 경찰의 말투에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켰다. 아직 몽롱한 기분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술 취하셨어요?”

“네?”

“술 드셨어요? 왜 균열 구석에서 잠을 자요?”

“…….”

드디어 상황을 파악한 나는 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보니까 술은 안 드신 것 같은데. 제정신입니까? 아무리 E등급 균열이지만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되는 거 몰라요?”

“죄송합니다.”

‘내가 미쳤지!’

경찰의 타박에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내 사죄에도 경찰의 언짢은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됐고요. 얼른 나가세요.”

“…….”

“뭐해요? 얼른 나가라니까.”

“…….”

그의 재촉에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에 경찰이 화를 내려는 순간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순경. 무슨 일이야?”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에 이 순경이라 불린 경찰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배님. 아 글쎄, 이 아저씨가 균열 구석에서 자고 있더라고요. 깨워서 얼른 내보내려고 했는데 꿈쩍을 안 해요.”

“그래?”

또 다른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내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까이에 선 남자는 앞선 경찰과는 다르게 위압감 넘치는 덩치와 인상을 가진 경찰이었다. 흔히 TV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강력계 형사 같은 느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임진혁 경사입니다. 잠시 신분증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인상과는 다르게 임진혁 경사는 편안한 미소와 부드러운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네, 임 경사님.”

나는 얼른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줬다.

“전세진 씨. 맞으세요?”

“네. 맞습니다.”

“세진 씨. 이곳 균열에 균열핵을 저희가 제거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균열이 소멸할 예정인데 저희와 함께 나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나는 임 경사의 친절한 권유에도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이런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임 경사가 말했다.

“이 순경. 균열핵 챙기고 먼저 차에 가 있어.”

“네?”

“잔말 말고, 먼저 차에 가서 지구대에 보고하고 있어. 공원 균열은 처리했다고. 어서!”

임 경사의 지시에 이 순경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먼저 균열을 빠져나갔다.

균열에는 나와 임 경사만 남게 되었다.

“혹시 균열 안에 남아 있으시려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

나는 다시 한번 더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이 추운 겨울날 갈 곳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임 경사는 눈치 빠르게 내 상황을 꿰뚫어 보았다.

“만약 갈 곳이 없으시다면 저랑 같이 지구대로 가시죠. 오늘 밤만 지구대에서 보내시고 아침이 되면 잠시라도 머물 곳을 찾아드리겠습니다.”

그의 친절한 제안에 잠시 움찔거렸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여기 계속 있으실 생각입니까? 이미 균열핵을 제거해서 30분이면 균열도 소멸할 겁니다.”

“괜찮습니다. 30분이라도 좋으니 여기 혼자 있고 싶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간절한 어조로 임 경사에게 부탁했다. 그는 곤란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별안간 균열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금방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나 괴물들이 남았나 해서 균열 안쪽까지 확인해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임 경사는 자신이 입고 있던 상의 경찰 외투를 벗어 나에게 걸쳐주었다.

“밖에 날씨가 꽤 춥습니다. 이거 걸치고 있으세요.”

너무 죄송스러워 거절하려 했지만 임 경사는 억지로 외투를 걸쳐주며 쾌활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대신 꼭 돌려주러 오셔야 합니다. 저는 오늘은 오전 8시까지 근무합니다.”

꼭 돌려줘야 한다는 말과 함께 지구대의 위치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그리고 임 경사는 절도있는 경례와 함께 균열을 빠져나갔다. 균열 안에는 다시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조용한 균열 안에서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균열에 남겠다고 억지를 부린 이유는 단순했다.

비참한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3억의 빚도,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도. 모두 외면하고 싶었다.

비틀비틀 걸어가 벽에 기대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아, 이거 완전 민폐네.”

균열에 겁도 없이 마음대로 들어가고.

억지를 부려 균열에 남은 것도 모자라, 밤새워 일해야 할 임 경사의 외투도 뺏은 꼴이다.

아마 평소의 나였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

스스로가 너무 부끄럽고, 비참했다.

그리고 임 경사의 배려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고마웠다.

아마 억지로 외투를 권하고 꼭 돌려주러 오라고 한 이유도 단지 날씨가 추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임 경사의 눈에 그만큼 내가 불안해 보였으리라.

잠시라도 한강 물을 보고 ‘따뜻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니.

마음속의 부끄러운 감정도 잠시. 짧은 수면으로 풀리지 않은 피곤이 다시 몰려왔다.

임 경사의 외투가 바닥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감싸고, 가방을 베개 삼아 땅바닥에 누웠다.

너무 편안했다.

이곳이 균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 멸망의 시작이라 불리던 균열.

그곳에서 느끼는 집과 같은 편안함이라니.

이 세상에서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 그마저도 얼마 뒤면 사라진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10분? 5분?

시간이 다 되면 알아서 밖으로 튕겨 나가는 건가?

누워 있는 상태로 바닥을 뒹굴기는 싫은데.

이런저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이, 다시 한번 눈이 스르륵 잠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 나를 괴롭혔던 일과 감정들은 잠시 뒤로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당신은 각성했습니다.]

[당신의 고유 능력은 ‘균열 노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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