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고 (21/22)

20.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고

이브는 무심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황제 집무실의 천장은 녹색 바탕에 금색 페이즐리 무늬가 섞여 있었다. 원래는 녹색이 아니었지만, 언젠가 무심코 녹색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을 에드워드가 기억하고 바로 공사를 진행해 천장과 벽지의 색을 바꾸어버린 탓이었다.

이브는 갑작스럽게 궁성 내의 인테리어 공사를 명령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남자를 흘긋 바라보았다. 머릿기름을 발라 깔끔하게 넘긴 금발이 흐트러져 반 정도 아래로 흘러내린 것이 보였다.

에드워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연무장을 돌고 온 지 얼마 안 돼 흙먼지가 묻은 이브의 부츠를 정성껏 핥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듯 그는 눈동자를 굴려 이브와 눈을 마주쳤지만, 그는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눈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제 허벅다리 위에 앉은 남자가 몸을 뒤트는 바람에 흰 어깨에 시야가 가려졌다. 이브는 시선을 돌려 훌쩍훌쩍 흐느끼는 칼리스토를 올려보았다.

“기분 좋아?”

이브의 물음에도 칼리스토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입에 물고 있는 공갈 젖꼭지를 잘근잘근 짓씹으며 아래로 내렸던 허리를 힘겹게 다시 위로 들어 올렸다.

집무실 밖으로 소리가 나가면 안 된다는 이유로 입에 유아용 공갈 젖꼭지를 물려주었을 때만 해도 질색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던 칼리스토는 지금 입에 들어온 것이 고무인지 뭔지 구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허리를 떨며 흐느꼈다.

“으흐, 흣! 흐응, 으!”

“아기가 기분이 좋은가 보네. 이렇게 기운차게 질질 싸는 걸 보니까.”

신경접속형 마도구를 통해 배 아래로 칼리스토의 육벽이 단단한 모조성기를 사정없이 조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브의 어깨를 짚은 채 위아래로 왕복운동을 거듭하던 칼리스토는 이윽고 밀려오는 사정감에 어찌할 줄 모르고 팔을 조여 더욱 이브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흐, 흐으……! 윽, 크읏, 으흑!”

이로 공갈 젖꼭지를 질끈 문 채였기에 이브에 귓가에는 앙다문 잇새로 흐르는 앓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이브는 손을 들어 바짝 돋아 오른 유두 위를 힘주어 꼬집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거 싫다고 하지 않았어?”

“후으, 응, 읏……!”

“아기처럼 젖꼭지 물고, 이러다 누워서 젖도 얻어먹으려고 하겠네. 기저귀도 채워줘야 할까?”

칼리스토는 짓궂은 희롱에 반응하는 대신 허리를 떨며 쾌감에 젖은 눈물을 후드득 떨구었다. 이브는 그의 허벅지 안쪽이 파르르 경련하는 것을 느끼고는 손을 내려 바짝 솟아 꺼떡이는 성기의 선단을 가득 감싸 쥐었다.

“쉬야할 것 같아? 쉬 할까?”

“흐응, 응, 으흑! 으, 흐아, 아!”

결국 참지 못한 남자가 입을 크게 벌리고 헐떡이며 새된 신음을 토했다. 큰 신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 이브의 뒤쪽에서 누군가의 손이 뻗어져 나와 칼리스토의 입을 막았다.

마디 굵은 큰 손에 입이 틀어막힌 채, 칼리스토는 구멍 안으로 들어온 유선형의 장난감을 바짝 조이며 절정에 올랐다. 이브는 손 안 가득 질척한 액체가 뿜어져 나온 것을 느끼고는 천천히 박동 치는 성기를 슬슬 문질러 요도 안쪽에 남은 백탁액을 남김없이 뱉어내게끔 도와주었다.

질금질금 흐르던 정액을 모조리 이브의 손바닥에 낸 후에야 칼리스토는 힘없이 몸을 무너트리며 이브의 어깨와 목 언저리에 뺨을 묻었다.

“이리 와요.”

이브는 앉아 있던 암체어 바깥으로 손을 뻗었다. 칼리스토의 체액으로 엉망이 된 손이었다.

부츠 위에 입을 맞추고 있던 에드워드가 그녀의 의도를 빠르게 알아채고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기어와 의자의 팔걸이 앞까지 다가왔다. 손앞에 얼굴이 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온 에드워드는 양손으로 이브의 손목을 감싸 쥐고 손가락 끝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말랑한 입술과 축축한 혀가 손끝에서 손가락, 손바닥으로 위치를 옮기며 오물을 입 안으로 옮기는 것을 느끼던 이브는 돌연 고개를 뒤로 젖혀 제 뒤쪽에 서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칼리스토의 입을 막아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한 카스텔은 칼리스토가 기운 없이 이브에게 몸을 기대는 것을 보며 다시 팔을 회수해 양팔을 뒤로 돌려 뒷짐을 진 자세를 취한 채 그녀의 뒤에 꼿꼿이 서 있었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있던가요?”

“알베리크 경일 겁니다.”

“아하.”

남자는 이미 집무실 바깥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기척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 이브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했다.

황제가 업무 중 잠시 「휴식」을 가지는 시간이었다. 에드워드는 이 시간에 맞추어 집무실과 응접실 내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이지 못하도록 지시했기에 보통 이 시간대에 집무실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폭이 일정한 발걸음 소리가 집무실의 꽉 닫힌 문 너머에서 멈추었다. 이윽고 가볍게 두 번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문 앞까지 다가간 카스텔이 방문자의 신원을 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문밖에서는 알베리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입 허락이 떨어지고 곧 열린 문틈으로 알베리크의 모습이 보였다.

“폐하의 결재가 급히 필요한 서류들입니다.”

이브는 품에 서류 뭉치를 한 아름 들고 온 알베리크를 한번 쳐다보고는 헐떡이며 사정의 여운에 잠겨 있던 칼리스토의 허리를 붙들어 억지로 일으켰다.

“이제 가봐요. 댁도 일하셔야지.”

“으응, 흑…….”

“어허, 어리광 부리지 말고.”

남자는 불시에 몸 밖을 빠져나가는 묵직한 모조성기의 감촉에 허리를 잘게 떨었다. 질척이는 구멍 사이로 거품이 잔뜩 인 윤활제가 주르륵 흐르며 먹쇠의 움직임을 따라 새어 나왔다.

한참을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던 칼리스토는 이윽고 정신을 차린 듯 민망함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는 곧장 서클을 열어 빠르게 이브와 저에게 세정 마법을 걸고는 말끔해진 몸으로 집무실 한쪽에 걸쳐둔 바지와 로브를 후다닥 챙겨 입은 후 인사도 없이 바람처럼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브는 남자가 미처 챙기지 못한 공갈젖꼭지를 들고 좌우로 설렁설렁 흔들며 말했다.

“어휴, 저 양반도 변태 새끼가 다 됐다니까. 그렇게 싫다고 앙탈 부릴 땐 언제고.”

“…….”

“왜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아닙니다.”

미묘한 표정으로 이브를 바라보던 알베리크가 이브의 날 선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언제 봐도 굉장한 장면이군요.”

“잠깐 숨 돌리는 시간에만 하는 건데요, 뭐.”

알몸으로 집무실 카펫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브의 손을 핥고 있는 황제의 모습은, 사정을 알고 있는 제가 보아도 당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이브는 손을 핥고 있던 에드워드에게 휘적휘적 손을 내저어 가서 일을 봐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그제야 에드워드는 제 쪽으로 다가온 카스텔이 어깨 위로 덮어주는 짙은 쪽빛 실크 가운을 몸에 걸치고 집무실의 책상에 앉을 수 있었다.

절반쯤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거슬리는 듯 손을 들어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린 남자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말끔한 표정으로 알베리크에게 서류를 넘겨받아 그 안의 내용을 살폈다.

만약 맨몸에 가운만 걸친 모습이 아니었다면 쭉 일상적인 집무를 보고 있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이브는 풀어 헤친 바지 사이로 착용했던 마도구 모조성기를 제거해 이리저리 살펴본 후 그것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칼리스토가 세정 마법을 걸어준 덕분에 별다른 세척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깔끔해졌기 때문이다.

암체어에 앉은 채 기사 정복의 바지 여밈을 다시 단정히 여민 이브가 허리를 돌려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남자를 불렀다.

“경, 이리 와보세요. 요기 앉아봐요.”

에드워드의 서명을 기다리고 있던 알베리크가 이브의 목소리를 듣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브는 덩치가 산만 한 남자를 어린애처럼 제 무릎 위에 앉힌 채 그의 등 뒤에서 허리를 감듯 손을 둘러 정복 위로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옷으로도 숨겨지지 않는 훌륭한 대흉근을 손 가득 쥐었다가 아래를 받쳐 들듯 들어 올린 이브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가슴이 좀 줄었나……? 요즘 퇴근하고 운동 안 해요?”

“……서류 업무가 밀려서. 오늘부터 다시 하겠, 읏, 습니다.”

“아. 유두 섰다. 어떡하지, 이렇게 예민해져서. 뭐 반창고 같은 거 붙이고 다녀야 하는 거 아녜요? 일하다 말고 이렇게 젖꼭지 세우면 어떻게 해요?”

“흐, 웃……. 죄송합니다.”

“음 뭐, 여전히 훌륭한 근육이긴 하지만 자만은 금물인 거 알죠? 경이 근손실이라도 오면 나 진짜 너무 슬플 것 같아.”

“명심하겠습니다.”

알베리크는 카스텔의 가슴 위를 마치 추행이라도 하듯 끈덕지게 주무르는 이브를 보며 기어코 한마디를 뱉고야 말았다.

“정말이지, 당신 배짱은 대단하군요. 어떻게 근무시간에 이런 식으로…….”

“오라버니도 한번 하고 갈래요?”

이브는 빈정거림과 잔소리 사이 어딘가에 놓인 그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대꾸했다. 알베리크는 조금 전 칼리스토의 모습을 상기하고는 조금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건 좀. 저는 속이 울렁거리더군요.”

“이상하네. 다들 뒷구멍 쑤셔주는 거 좋아하던데, 유난히 너는 별로 못 느끼더라.”

“……그, 정 원하신다면. 넣어도…… 괜찮습니다만.”

이브는 희게 질린 얼굴로도 조심스럽게 제 비위를 맞추려 드는 알베리크의 파리한 얼굴을 보며 킥킥 웃었다. 그러고는 제 무릎에 앉은 기사의 가슴을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됐어요. 카스텔 경이 잘 느끼니까. 그렇죠?”

“…….”

“후장으로 얼마나 잘 느끼는지, 손가락으로만 쑤셔줘도 싼다니까. 예뻐 죽겠어.”

남자는 목 뒷덜미를 새빨갛게 물들이며 무뚝뚝한 낯을 아래로 내려 슬쩍 시선을 바닥에 꽂았다. 민망해하는 카스텔의 반응에 이브는 낄낄대며 그의 붉어진 목 뒤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어디로 가십니까?”

이브는 문득 은근해진 알베리크의 목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빼 카스텔의 어깨너머로 알베리크를 바라보았다.

“아, 오늘은 개 먹이를 줘야 해서.”

“그렇습니까.”

“대신 오늘 저녁 먹으러 올래요?”

“알겠습니다.”

“아……. 근데 윌리엄도 올 거예요. 뭘 하는 건 아니고, 그 사람은 벌을 좀 받아야 해서.”

이브의 「라면 먹으러 오라」는 제안에 안색이 밝아진 알베리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이어지는 말에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보는 건, 아무래도 좀.”

“괜찮아요. 너는 안대 쓸 거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에이. 괜찮다니까.”

“제가 안 괜찮습니다.”

“자꾸 그러면 대문 앞에서부터 발가벗겨버릴 거예요.”

“…….”

「엔딩」을 본 이후로 많은 일이 있었다.

이브에 의해 주종의 인을 찍힌 에드워드는 더는 그녀를 해할 수 없게 되었다. 남자는 제가 이브를 붙잡기 위해 저지른 일들을 하나씩 수습해나갔다. 베르묄 백작 부부와 「레이디 로잘린의 친자」의 죽음도 그중 하나였다.

사건을 벌인 당사자의 지시와 하나 남은 유가족이라 할 수 있는 알베리크의 협조 아래 마차 사고는 바퀴를 잘 관리하지 않은 탓에 일어난 우연한 사고로 마무리되었다. 본인을 진짜 로잘린의 친자라 주장한 엘베르 역시 가짜 증거를 조작한 사기꾼임이 드러났다.

장례식이 있던 날, 이브는 새카만 상복을 입고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은 채 부부의 관 위로 흙이 덮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알베리크에게 물었다.

―괜찮겠어?

그러자 남자는 건조한 얼굴로 관 위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글쎄요. 돌아가신 조부께선 제가 집안의 그 누구와도 애착을 쌓지 못하도록 하셨죠. 아마도 로잘린 고모님을 잊지 못하셨던 본인을 반면교사로 삼으셨던 모양입니다. 그 덕분일까요, 이상하게 별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는군요.

게다가 「그분」은 이미 벌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덧붙여 말한 알베리크가 피식 웃었다. 그 전날 보았던, 벌거벗은 채 한 시간여를 몸을 구부려 이브의 발아래에 등을 대고 발 받침대가 되어야 했던 에드워드의 모습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렇게 말한 알베리크는 이후 부모의 목숨값으로 귀족원의 부의장 자리를 받았다. 단 셋뿐인 자리에 임명된, 새파랗게 어린 20대 중반의 백작을 두고 모두가 말이 많았으나 남자는 능란하게 귀족원의 의정 활동에 참여해 제가 받은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또한 알베리크는 이브의 친모가 레이디 로잘린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별말 없이 그녀가 계속해서 베르묄의 이름을 쓸 수 있도록 눈감아주었다.

에드워드가 보여준 성녀의 기록물에 따르자면 신의 딸은 인간의 태를 빌어 나지 않으며 신이 원하는 그 순간 존재한다고 쓰여 있으니, 까놓고 말하자면 이브에게 생물학적 부친과 모친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었다.

이브는 알베리크에게 그런 제 비밀을 말해주며 「근친 플레이를 못 해서 좀 아쉽긴 하네요.」 하고 웃었다가 남자의 싸늘하게 식은 경멸 어린 눈총을 받았다.

수도로 돌아와 한동안 백수 생활을 만끽하던 이브는 에드워드의 강요 아닌 강요와 카스텔의 추천으로 황성의 근위 기사단에 지원하게 되었다. 황태자 에드워드가 부친의 시신으로부터 금관을 물려받은 이후 황성 안에 한차례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었던 탓에 인력난이 극심했기에 이브는 젊은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무사히 기사 작위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브는 작위와 함께 「테루안느」라는 성을 받았다. 이로써 이브는 자신이 완전해졌음을 느꼈다. 빠져 있던 퍼즐의 마지막 피스가 들어맞는 완전한 일체감. 이브는 베르묄이라는 성을 쓰는 것에 대한 제 거부감이 생각보다 더 심했구나 하고 뒤늦게야 깨달았다.

작위와 성을 내려 받는 서임식에서 이브는 작정하고 오라를 드러내 보였다. 이브는 짧게나마 저를 가르친 순백의 기사 마르그리트의 이름도 마구 팔아젖혔다. 제가 가진 가장 뛰어난 패를 보이지 않으면 여자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해에는 마흔두 명의 기사가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브는 그중 단 셋뿐인 여기사 중 하나가 되었다.

이브가 기사 서임을 받은 그날, 소식을 전해들은 듯 마거릿이 이브를 찾았다. 설마 정말 기사가 될 줄은 몰랐다며 호탕하게 웃은 마거릿은 이브와 함께 기절할 때까지 술을 진탕 퍼마시고 다음 날 홀연히 사라졌다. 이브는 근무 꿀팁이라도 알려주고 가시지, 하고 아쉬워하기는 했으나 또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 생각했다.

그렇게 이브의 근위 기사단 생활이 시작되었다. 오라를 다룰 줄 아는 이브는 외궁 경비를 건너뛰고 바로 황제를 경호하는 측근 근위 기사가 되었다. 황실 제1기사단의 단장이자 황제 측근 근위대의 대장인 아르놀트 비텔스바흐 경은 철저히 실력 위주로 황제의 경호인단을 구성했다. 그러니 황실 기사단 내에서 가장 강한 기사인 카스텔과 스무 합 이상을 붙어 싸울 수 있는 인재인 이브가 황제의 측근 근위대에 포함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르놀트 경은 공과 사의 구분이 철저한 사람이었으나 마거릿에게 검을 사사한 이브를 퍽 살갑게 대하는 편이었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카스텔과 똑 닮은 얼굴로 무뚝뚝하게 명령을 내리면서도 근무를 마치면 요즘 여자애들이 뭘 좋아할지 모르겠다며 다른 애들이랑 나눠 먹어라, 하는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알이 큰 사탕 꾸러미를 던져주고는 했다.

이브는 그럴 때마다 바로 사탕 꾸러미를 열어 동료 기사들과 사탕을 나누어 먹었다. 경계근무 중 당 충전은 중요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르놀트 경이 던져준 초콜릿 칩이 박힌 쿠키를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넘긴 이브가 손을 탈탈 털어 과자 부스러기를 제거한 후 황제궁 정문 앞에서 신원을 증명하는 작은 카드를 보였다.

저녁 경호반과 교대를 마친 이브는 선배 기사들에게 가볍게 인사말을 건네며 거수경례를 한 후 황제궁을 빠져나왔다.

궁을 나와 정문과 길게 연결된 가로수 길을 걷고 있으니 외부 경비를 돌던 신입 기사들이 경례를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벨린 경! 퇴근하십니까?”

“옙. 수고하십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신입 기사 두 사람은 모두 여기사였다. 이브는 씩 웃으며 함께 거수한 후 그녀들을 지나쳤다.

공식석상에서 짙푸른 기사 제복을 차려입고 꽁지가 겨우 묶일 기장의 머리를 아무런 장식 없이 꽉 조여 맨 채 화장기 없는 얼굴로 황제를 호위하는 여기사의 등장은 궁성 안에서 제법 파란을 일으켰다.

이브는 자신이 에드워드를 호위하기 시작한 후 조금씩 황성 기사단에 지원하는 여성이 늘어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별것 아님에도 괜히 뿌듯해지는 말이었다.

내궁을 벗어나 외궁으로 그리고 그 밖으로 쭉 이어진 대로를 따라 어슬렁대며 걷던 이브는 마침내 외궁을 벗어났다. 궁성의 화려한 정문 옆 쪽문으로 빠져나온 이브는 익숙한 남자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이브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기다리고 있었던지, 마차의 창문 옆에 붙어 쪽문 근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윌리엄이 열린 창문 안쪽에서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브가 길을 건너가 마차에 오르자 윌리엄은 마부에게 기별해 출발을 지시했다. 바퀴까지 새카만 사륜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이브가 팔짱을 낀 채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너, 자꾸 뒤에서 몰래 수작 부리는 거 그만하라고 했지.”

“아니, 그게 그러려던 건 아니고.”

“아멜리아 좀 내버려둬라. 에드워드랑 평화협정 맺고 후계자 교육 열심히 받고 있는 애를 찔러보긴 왜 찔러봐?”

“아니, 그게.”

“이미 한참 전에 다 끝난 얘기잖아. 대체 거길 찾아가서 또 뭐라고 그랬냐? 그냥 지금 쓱싹하고 제위에 오르라고 속살댔냐?”

“……그 새끼 죽었으면 좋겠단 말이야. 자꾸 옆에서 얼쩡대는 거 존나 기분 나빠.”

“요놈 새끼 말하는 거 봐! 입! 입! 대공이 돼 가지고 존나가 뭐야, 존나가!”

이브는 윌리엄에게서 튀어나온 익숙한 한글을 듣고는 윌리엄의 허벅다리를 짝짝 소리가 날 정도로 후려쳤다.

며칠 전의 일이었다. 가끔가다 이브는 서류 작업을 하다 말고 아멜리아 황녀에게 부름을 받아 뜬금없이 티타임을 즐기다 돌아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향긋한 장미꽃 내음을 느끼며 찻물을 한 모금 입에 담은 아멜리아가 어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경이 내 앞길을 막던 남자들을 다 치워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네.

―하하,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후후…….

아멜리아는 윌리엄과 무척 닮은 인상의 소녀였다. 복숭아처럼 보드라운 뺨과 장밋빛 입술을 가진 어린 소녀의 머리칼은 밤하늘을 자아낸 비단처럼 남색으로 윤이 돌았고, 눈동자는 밝은 담청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앳된 소녀의 얼굴은 노련한 정치가의 것처럼 좀처럼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고, 인형처럼 크고 섬세한 눈동자는 벼려진 칼날처럼 서늘한 기운을 숨기고 있었다.

―요즈음 경이 기르는 개가 산책을 하면서 내게 알은척을 하지 뭔가. 귀엽기는 하지만 내가 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말일세. 경이 개의 목줄을 신경 써주었으면 좋겠어.

누가 들어도 개 이야기는 아니었다. 짐작 가는 데가 있는 이브로서는 그저 머쓱하게 웃으면서 굽실굽실 「제삼다.」 「잚태씀다.」를 연발할 뿐이었다.

티타임을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황녀가 기거하는 태자궁에서 일하는 근위 기사 몇의 옆구리를 찔러 며칠 전 윌리엄 대공이 다녀갔음을 알아낸 이브는 또 요놈이 마음잡고 잘 사는 아가씨를 들쑤셨구나 싶어 골머리를 앓았다.

그날의 대화를 남자에게 들려준 이브가 안면을 와작 구기며 이를 갈았다.

“너 한 번만 더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개 단속하라는 소리 듣게 했단 봐. 홀딱 벗겨서 헬리오스 대광장 분수대에 오줌싸개 천사상 대신에 꽂아놓을 거야.”

“윽.”

“그리고 너, 저번 주에도 우리 집 와서 바스카 괴롭혔다며. 그냥 내가 기른다니까 왜 자꾸 못 죽여 안달이야?”

“그건 진짜 나 아닌데?”

“개소리 마. 칼리스토가 다 불었어. 어디서 이빨을 까?”

“……그 솜사탕 대가리가.”

이브가 바실리오의 근황을 알게 된 것은 올해 초봄 경이었다. 경찰국의 마약 단속반에서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에 궁성에서 근무하는 기사 몇이 차출되어 나간 적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외근하고 싶었던 이브가 그 임무에 은근슬쩍 끼었다가 아편굴에서 끌려 나온 사람 중 익숙한 얼굴을 목격한 것이었다. 햇수로 딱 2년 만에 보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오래 약에 노출된 것은 아닌지 남자의 금단증상은 경미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실리오는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시두스의 늑대라는 단체는 오랜 세월 쌓아온 악명이 무색하게 한순간에 무너졌다. 보스가 반송장이 되어 돌아온 날부터 그의 자질에 대한 질 나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내부에서 삐걱거리며 패거리가 갈리기 시작한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황실 사냥터를 습격한 늑대 수인을 수색한다는 명목으로 황태자의 주도하에 늑대 수인 조직이 대대적으로 뒤집혔다.

게다가 시두스는 2황자 레이놀드가 수족처럼 부리던 조직이었으니 집중적인 수사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위기를 넘기나 했더니 이번에는 레이놀드 황자가 실각하고 말았다. 결국, 시두스 패밀리는 오래 지나지 않아 몇몇 대장 노릇을 하는 카포를 따라 몇 개의 군소 패밀리로 조각조각 갈라졌다.

발목에 영구한 장애를 입게 된 바실리오가 힘을 중시하는 수인 조직 내에서 환영받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 남자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야 폐인이 다 되어 아편굴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이브는 바실리오를 거두어 제 저택에 데려갔다. 그러나 거창한 아가페 정신이나 동정심으로 행한 일은 아니었다.

급료가 오르고부터 이브는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센트럴 지역에 저택을 하나 사서 저를 가장 잘 따르는 하녀 셋을 데리고 알베리크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다.

이브가 사는 2층 저택은 여자 넷이서 살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보안이 걱정되었기에 집 지키는 개를 한 마리 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바실리오는 이브의 저택 1층에서 목줄과 쇠사슬, 재갈, 체고가 큰 대형 도사견들이 찰 법한 입마개를 찬 채 지내게 되었다. 오랜 시간 꾸준히 이브가 식사를 챙겨 먹인 덕에 남자는 이브를 보면 제법 반길 줄도 알게 되었다.

가끔 볕이 좋은 날에는 목줄을 채운 채 저택 뒷마당을 함께 산책하기도 했다. 바실리오의 상태는 상당히 온순한 편이었다. 그러나 한 번씩 남자는 제정신으로 돌아와 발작을 일으키고는 했기에 안전을 위해 목줄과 입마개, 재갈을 풀어줄 수는 없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때를 제외하면 그는 그럭저럭 이브의 개가 되는 데에 적응했다. 처음 이브가 뺨이 움푹 패고 바짝 마른 남자의 목에 목줄을 채우는 것을 보고 안색을 흐렸던 하녀들도 이제는 살랑이는 치맛자락을 눈으로 좇는 바실리오를 꽤 귀여워하는 데에 이르렀다.

특히나 개중 가장 겁이 없는 안나는 이브 몰래 바실리오의 턱과 귀 뒤를 간질여주다가 이브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민망해한 적도 있었다.

이브는 아마 잘 먹여 살이 오르면서 튼튼한 체격 위에 살이 붙어 남자가 원래 가지고 있던 수려한 미모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여자라면 누구나 잘생긴 남자의 목에 목줄을 매어보고 싶은 다소 음습한 욕망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이브는 혀를 쯧, 차며 윌리엄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꼭 윌리엄이 제 저택을 다녀간 후에는 바실리오의 몸에 멍이나 상처가 생기고는 했다.

“안 그래도 한 번씩 정신 돌아올 때마다 자살하겠다고 혀 깨물고 난리 치는 애를 왜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죽는다고 괜히 쑈 하면서 제대로 죽지도 않잖아, 같잖은 게.”

“또, 또! 자꾸 못된 말 할래? 우리 집 아가씨들이 개 다치는 거 보면 속상해한단 말이야! 때릴 거면 안 보이는 데를 때리든가!”

“……왜 자꾸 나만 혼내고 그래.”

윌리엄은 금방 기가 죽어 눈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브는 그의 우울한 얼굴에 속지 않았다.

“그러게 누가 너 혼자 급발진하래? 너 그 못된 버릇 고치기 전까진 손도 안 댈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오늘도 그냥 묶어놓기만 할 거야.”

“누나아.”

“누가 전하 누납니까? 죄송한데 저는 남동생이 없습니다, 전하.”

“…….”

윌리엄이 잔뜩 울상을 지으며 이브를 물기 어린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브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 거리를 바쁘게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여전히 과거의 기억들은 밤마다 되살아나 이브를 괴롭히곤 했다. 어떤 기억은 끔찍한 악몽이 되어 이브의 숨통을 짓누르기도 했다. 잔혹할 정도의 무참한 반복을 떠올린 이브의 영혼이 참지 못하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조금씩 깊게 팬 상처들을 수복해나갔고, 다른 세계에서 단단해진 정신은 갑작스레 맞닥뜨린 고통을 성숙하게 삼켜냈다.

깊이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이브는 그들이 짓지 않은 과거의 죄에 대해 죗값을 물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이브는 시간의 흐름 너머로 사라진 반복 속의 죄악을 관대히 용서하기로 했다.

그들을 가까이 두는 것은 혹여 남자들의 태도가 바뀌어 못된 마음을 품고 죄를 짓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어 단속하려는 속셈이었다. 그 와중에 이브에게 복속을 맹세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발아래 조아린 신자들은 여신의 딸에게 자비를 구했다. 이브는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줄 만한 능력도 없었고 그들이 바라는 사랑을 줄 수도 없었지만, 다만 곁을 내어줄 수는 있었다.

아직도 이브는 여신의 의중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대체 끝없는 반복으로 무엇을 추구했는지, 죽은 후배의 영혼을 어째서 이 세계로 불러들인 건지 이브는 도저히 밝혀낼 수가 없었다. 단지 이브가 행복해지기를 바랐기에 계속해서 기회를 준 것이 아닌가 하고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었다.

고민에 대한 명료한 답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명확히 답이 주어지는 방향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어떠한 일은 그냥 그렇게 일어나고는 했다. 사람은 사건의 연원을 모르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그런 게 삶이었다.

아무튼 이브는 「엔딩」 이후로도 나름대로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다.

오늘도 별다를 바 없는 평화로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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