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히든엔딩
수도에서 북부의 프로이카로 향하는 길은 칼레스령에서 수도까지 올라온 것에 과장을 조금 더 보태 약 백 배 정도 더 힘에 부치는 일정이었다.
프로이카로 향하는 직통 열차는커녕 영지에 구식 기차역조차 없어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서야 겨우 인접한 근처 영지의 작은 기차역으로 갈 수 있을 뿐이었다.
‘정쟁에 휘말리지 않게 완전 한갓진 지역으로 보냈다는 걸 예상은 했는데, 이 정도로 시골 깡촌으로 보냈을 거라곤 진짜 예상 못 했다.’
가능한 한 사람이 없는 무인역만을 이용해 행적을 지운 이브는 최대한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위 지역으로 이동했다. 전국에 있는 열차 노선 중 가장 북상단에 위치한 펠리체 중앙역에 도착한 이브는 늦여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바람을 느끼며 근처를 휘휘 돌아보았다.
반나절을 역 근처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입을 털다가 운 좋게 프로이카의 바로 옆 영지까지 가는 짐마차를 얻어 탈 수 있게 된 이브는 짐마차에 몸을 실은 후에야 그날 아침에 샀던 조간신문을 펼쳐 들었다. 이 시대에 도망자가 구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정보원은 누가 뭐라 해도 신문이었다.
일간지의 1면에는 이브의 예상대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황제의 건강 상태와 구류된 2황자의 처분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에드워드의 수완이 대단한 듯, 일은 차근차근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 보였다.
이브는 2황자의 처분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선 사람 중 트위들 후작이 포함되었다는 대목을 읽으며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곧 트위들 후작위가 발커레스 공작가에서 함께 가지고 있는 작위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렇다는 이야긴 이 트위들 후작이 발커레스 공작의 후계자라는 이야긴데. 카타리나가 오빠가 자꾸 궁에 간다고 하던 이야기가 이거였나.’
카타리나가 습격에 휘말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브는 그녀의 사건은 단지 2황자 쪽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리를 놓을 계기였을 뿐, 에드워드는 발커레스의 장자에게 거부할 수 없는 먹이를 제시해 기어이 중립파 수장의 아들과 손을 잡았으리라 추측했다.
에드워드가 그에게 무엇을 제시했을지는 확실히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다음 대 황손의 외척이 되게 해주겠다며 꼬드겼을지도 모른다. 이브는 어차피 정치 싸움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기에 이 기회에 수인들이 몰려 있던 할렘도 정리하고 일타쌍피를 노렸구나 하고 생각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그렇다는 건 알베리크는 자기 주인이 시켜서 자해 공갈 명연기를 펼쳤다는 거겠지. 하여튼 미친놈들이라니까.’
이미 엉망이 된 이야기는 가속도가 붙어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허허로이 웃으며 1면을 훑어본 이브는 종이를 절반씩 접어 넘겼다.
짐을 가득 실은 짐마차는 무척 좁았기 때문에 신문을 넓게 펼쳐 볼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겨우 이브 한 사람이 몸을 구깃구깃 접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불편함을 참고 종이를 조금씩 펼쳤다 접기를 반복하며 세 번째 장쯤 신문을 넘기자 드디어 익숙한 이름들이 기사에 등장했다. 이브는 눈을 가늘게 뜨며 기사에 집중했다.
『의문의 마차 전복사고, 범인은 뻐꾸기?』
헤드라인 한번 기가 막히게 뽑았군, 하고 내심 혀를 찬 이브는 이윽고 신문에 실린 「범인」의 몽타주를 보고 헛웃음을 뱉고야 말았다.
베르묄 부부와 부부의 조카 엘베르는 마차 사고로 모두 사망했다. 그리고 모든 증거는 베르묄 부부가 진짜 조카라고 믿고 입양한 여자가 범인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만일 그 기사가 본인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이브 역시 「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짜임새 있게 날조된 사건 개요였다.
특히 마차가 사고를 당하기 전 용의자가 저택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부분은 사람들의 의혹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저를 엮어 넣기 위해 에드워드가 작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이브가 입꼬리를 삐뚜름히 들어 올렸다.
‘그치만 이딴 몽타주로는 백날 가야 내 머리카락 한 올 못 찾을 것 같은데.’
신문에 실린 범인의 몽타주는 가관이었다. 기사에 작게 첨부된 「레이디 이벨린」은 뺨에 살집이 있고 표독하게 눈을 치뜬, 온통 보석과 장신구로 치장한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이 초상화를 대문짝만 하게 인쇄해 이브를 그 앞에 세운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대체 수사관들이 무슨 소리를 듣고 몽타주를 그린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이브는 내가 이렇게 생겼나 하고 헷갈렸다.
기사의 후반에 가서는 범인의 마지막 행적을 알고 있는 베르묄의 소공작의 협조를 얻어 수사에 대한 단서를 찾아가고 있다는 구절로 마무리가 지어졌다.
‘설마 끌려가서 고문이라도 당하고 있는 거 아닌지 몰라. 에이,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설마 거기까지 가겠어.’
엘베르뿐만 아니라 베르묄 부부까지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은 남자가 이브를 「귀족 시해범」으로 만들어서라도 어떻게든 찾아내겠다고 작정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알베리크를 구슬릴 명분도 되어줄 것임이 틀림없었다. 이브 탓에 두 부부가 죽게 된 거나 다름없다며 그에게 알고 있는 정보를 토해내라고 요구하겠지. 저열한 수준의 수법에 이브는 질린 얼굴로 혀를 찼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짐마차에서 내려 또 다른 마차로 갈아타고서야 이브는 마침내 프로이카령의 북서쪽 대삼림 인근 지구에 도착했다. 그간 제대로 쉬지 못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마차에서 내려 마부에게 약속한 돈을 지불한 후 팔을 붕붕 흔들어 인사를 한 이브는 멀어지는 짐마차의 뒤꽁무니를 지켜보다가 늘어진 몸을 이끌고 근처를 둘러보았다.
근래 들어 길을 포장했는지 뜻밖에 바닥이 깔끔했다. 프로이카로 진입하는 데서부터 어쩐지 마차의 흔들림이 현격하게 줄었다 싶었던 이브는 눈을 빛내며 골목을 돌아 걸었다.
북부의 영지들은 대체로 동쪽으로 낙농업을 하기에 좋은 넓은 평지가 있고 서쪽으로는 아키디움 산맥의 영향으로 지대가 높아지며 울창하게 우거진 산이 있는 동저서고의 지형의 형태를 띠고 있어 보통 민가는 동쪽 지역에 많이 몰려 있는 편이었다.
특히나 프로이카는 영지의 규모 자체는 크지만 대부분이 삼림 지역으로, 사람이 사는 구역의 크기는 공작령이라고 불리는 것에 비해 작은 편에 속했다.
우선 시가지 쪽에서 숲의 지형과 기타 수색에 필요한 정보들을 파악한 후 서쪽 산지로 넘어갈 생각이던 이브는 한동안 묵을 곳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그러나 점점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분명 가족이나 인척 위주의 규모로 낙농업을 하는 지역이라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곳저곳에서 건물을 올리는 공사장들이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이브는 시골인 만큼 여관은 없거나, 있어도 아주 낙후된 시설일 것임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처 상점 주인의 소개로 찾아간 여관은 새로 지어진 것 같은 깔끔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주변 민가는 두 세기도 더 전에 지어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몇몇 건물들은 유독 신식 건축 공법을 이용해 신축해 올린 것처럼 보였다. 거리에 펼쳐진 기묘한 조화에 고개를 갸웃거린 이브가 우선은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1층은 술과 식사하는 다이닝 펍으로 운영되고 있는 듯, 여관의 1층 홀에는 목조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른 시간인 만큼 식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브는 1층을 휙 둘러본 후 카운터 앞으로 가 벨을 쳤다.
공이가 놋쇠 종을 때리는 탁한 소리가 띠링 띠링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 안쪽 조리실로 보이는 곳에서 살집이 있는 중년 여성이 밖으로 나왔다.
“예에, 예.”
“안녕하세요. 며칠 숙박하려고 하는데 혹시 방 있나요?”
“어이구. 그럼요. 그쪽도 일 구하러 온 거요?”
“하하, 네.”
“얼마나 묵고 갈 건가?”
“일단 보름이요.”
부인은 오랜 이동으로 꼬질꼬질해진 이브의 행색을 슬쩍 훑어보고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숙박 금액을 알려주었다. 이브는 숙박비와 함께 미리 식사 비용까지 지불한 후 열쇠를 받아 위로 올라갔다.
시설이 신식인 것에 비해 여관의 숙박비는 저렴했다. 이브는 3층으로 올라가 제 몫으로 배정된 방을 열고 들어갔다. 침대는 좁았지만 깨끗했고, 방 안의 집기들은 오래된 것과 새것이 뒤섞여 있었다. 이브는 문을 잠근 후 가장 먼저 욕실로 향했다.
욕실 역시 공간이 넓지는 않았지만 깔끔한 옥색 타일로 마감되어 제법 운치가 있었다. 시설이 새것일 때부터 기대하긴 했지만 정말 뜨거운 물이 구릿빛 욕조로 쏟아지는 것을 보니 무척 감격스러웠다.
오랜 시간 몸을 씻지 못해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현대인의 자아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안정을 되찾았다. 이브는 열심히 묵은 때를 벗겨내고 한참 만에 욕실을 빠져나왔다.
셔츠며 바지를 되는대로 다 쓸어 주머니에 쑤셔 넣어왔음에도 새 옷은 이제 한 벌 남았다. 이브는 속옷만 입은 채로 비척비척 침대로 걸어갔다.
햇볕 냄새가 나는 바삭바삭한 침대 커버 위로 몸을 날린 이브는 오랜만에 맛보는 푹신함에 정신을 놓았다.
한참 단잠에 빠져 있던 이브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해가 다 져 창밖이 온통 쪽빛으로 물들었을 즈음이었다. 헉, 하고 잠에서 깨어난 이브는 입가에 흐를 뻔한 침을 흡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흰 만다린 칼라 셔츠에 밑위가 긴 갈색 면바지를 챙겨 입은 이브는 회갈색 조끼를 상체에 걸치고 그 위에 다시 헐렁한 갈색 재킷을 걸쳤다. 마지막으로 납작한 육각모를 쓰니 어딜 가나 있을 법한 앳된 사환처럼 보였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부터 이미 아래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 수가 제법 많은 것 같았다. 어쩌면 식당에는 자리가 없을 수도 있었다. 이브는 문단속을 꼼꼼히 마친 후 1층으로 내려갔다.
역시나 빈자리가 없어 이브는 양해를 구하고 세 명이 앉아 있는 4인석에 합석을 하게 되었다. 여관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공사를 하는 인부들인 모양인지 다들 흙먼지가 묻은 재킷을 걸친 채 맥주를 한 잔씩 앞에 놓고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저와 합석을 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오늘 누가 농땡이를 부렸다느니, 누가 헛짓을 하다 다쳤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세 사람의 말투와 억양은 저마다 조금 차이가 있었다.
이브는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곧 제 앞에 놓이는 따뜻하게 데운 잡곡빵과 토마토가 들어간 쇠고기스튜, 색이 맑은 라거 맥주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서버에게 인사했다.
색이 어두운 잡곡빵을 한 입 베어 물고 곧 푹 익은 소고기 한 조각을 스푼으로 퍼 입에 넣은 이브는 입 안에 퍼지는 짙은 풍미를 즐기면서도 주변의 목소리에 예민하게 귀 기울였다.
‘뭐? 온천? 대박. 그래서 공사하고 있었구나. 하긴 이제 낙농업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 시대이긴 하지. 완전 관광 도시로 만들 생각인가? 어쩐지 유난히 숙박시설들이 때깔이 좋더라니.’
온천이 터졌다니, 잘 굴리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을 아이템이었다. 이브는 부럽다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스푼을 입 안으로 날랐다. 오래 지나지 않아 접시는 바닥을 보였다.
간혹 알음알음 일을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은 나이 어린 소년들이 찾아오기도 하는 모양인지 이브의 존재는 그리 튀는 편이 아니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이브는 몇몇 오지랖 넓은 인부들에게서 건축공사는 어린애가 할 만한 게 못 되니 다른 일을 구하는 편이 더 나을 거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아하하 웃었다.
한 모금 남은 맥주를 마저 들이켠 후 이브는 맥주를 한 잔 더 시켰다. 이브는 본격적으로 펍 안을 휘적휘적 돌아다니며 주변 인부들 사이에서 북부 토박이들을 찾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이미 알코올이 들어간 상태에서 형님, 형님 하고 살갑게 말을 붙여오는 어린 청년을 퍽 귀여워한 인부들은 이브의 물음에 별다른 생각 없이 머리를 쥐어짜 대답을 했다.
“하얀 숲?”
“네. 대삼림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게 뭐지……. 로비, 너는 뭐 아는 거 있냐?”
“그거 아냐? 백송나무 숲?”
“야, 백송 그거 나라에서 뭐 만든다고 죄다 베어 간 게 언젠데.”
“그리고 엄청나게 큰 호수가 있었대요.”
고작해야 게임 속 미니맵의 기억만이 흐릿하게 남아 있는지라 신전의 정확한 위치를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브는 영지의 토박이들을 찾아 술잔을 부딪치며 인게임에서 보았던 「하얀색 숲」, 「빛이 반짝이며 돌아다니는 모습」, 「커다란 호수가 보이는 정경」 등을 마치 어디서 주워들은 것처럼 꾸며 물어보았다.
“글쎄, 호수야 엄청 많지.”
“야생화 피는 데 근처도 있고. 그 뭐냐, 빛 나오는 버섯 있잖아.”
“맞다, 맞다. 야광버섯 군락 근처에서도 호수 큰 거 하나 있지. 그래.”
“그래. 한번은 버섯 캐러 갔다가 전에 그 근처서 이상한 폐가를 본 적이 있거든.”
“폐가요?”
이브의 눈이 반짝였다. 머리가 벗겨진 대머리 사내가 이브의 물음에 반들반들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말이야. 사람이 살 것 같지는 않았구먼. 요상하게 생겼더라고. 천장에 구멍까지 다 뚫려 있고.”
“헉. 밴시 같은 게 나오는 건 아니에요?”
이브가 짐짓 호들갑을 떨며 유령 이야기를 꺼내자 남자가 와하학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게 어디 있나! 그냥 이상하게 생긴 오래된 건물이었다니까. 문 앞에서 좀 살펴보다가 금방 나와버렸지.”
“야광버섯 군락 근처였다고요?”
“그래. 그게 왜 기억이 났느냐면, 그때 한참 마을에 버섯 따는 게 유행을 했었는데…….”
대화는 점점 옆길로 새 어느덧 주제가 대삼림에서 채집할 수 있는 버섯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흰긴사슴뿔버섯이 식용인가 아닌가를 두고 남자 둘이 격렬한 설전을 벌이는 것을 보며 이브는 맥주를 꿀떡 삼켰다.
여전히 넓은 숲에서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할지는 막막했지만 그래도 대충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식사를 마친 후, 한 아름 되는 빨래를 맡기고서야 이브는 방으로 올라가 다시 잠을 청했다. 낮에 잠시 낮잠을 잤었지만, 침대에 누우니 잠은 금방 이브를 찾아왔다.
❖
영지에 도착한 이후 한동안 이브는 정보 수집에 여념이 없었다. 일을 구하는 척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 밤에는 오래된 음식점이나 낡은 펍에 들어가 토박이들과 어울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첫날 들었던 이야기 이상으로 의미 있는 정보를 얻지 못한 이브는 결국 일주일 만에 짐을 꾸려 직접 대삼림을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뒤가 밟힐 것을 의식한 이브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척을 하며 방을 빼자 그간 친해진 여관의 주인이나 요리사가 긴 여행을 걱정하며 감자나 병조림 같은 것들을 따로 챙겨주기도 했다.
북부의 사람들은 다들 덩치가 크고 인상이 딱딱해 얼핏 다가가기 어려워 보이지만 속정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 덕에 정보 조사를 하던 기간 동안 공짜 술을 원 없이 마신 이브가 다정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픽 웃고는 모닥불 위로 감자 서너 알을 던져 넣었다.
피워둔 모닥불의 빛이 뺨과 이마 언저리를 붉게 달구었다. 이브는 긴 나뭇가지를 쑤석여 감자가 타지 않도록 이리저리 굴렸다. 아침에 출발하면서 여관에 부탁해 챙겨 온 샌드위치 하나를 이미 먹어치운 지 오래지만, 아직 속이 허했다.
이브는 해가 지자 일찌감치 미리 보아둔 곳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지폈다. 대삼림에 산다는 맹수가 걱정되는 건 아니었지만, 북쪽 지역이라 그런지 아직 초가을 날씨임에도 해가 지니 제법 쌀쌀했다. 얇은 재킷의 앞을 여미며 이브는 불씨의 중심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에드워드는 수정을 가로채려 했다. 비록 진짜는 아니었지만. 이브는 그가 신을 부르는 의식에 대해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아마도 에드워드가 가진 「잊힌 신」에 대한 정보는 이브에게 알려준 것보다 훨씬 방대할 터였다. 이브에게 공개한 책들은 모두 중요한 내용을 비껴간 껍데기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북부에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윌리엄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거나 신을 불러낼 수 있는 신전의 위치까지는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브는 후자 쪽에 무게를 두었다. 남자의 추적이 따라붙기 전에 수색을 마쳐야만 했다. 엔딩이고 나발이고 에드워드에게 위치가 발각되는 순간 귀족 시해범 누명을 쓰고 끌려가게 될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이브는 조급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던전에 들어가 기상천외한 괴물들을 사냥하던 때에 비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급해져 생각을 멈추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었다.
오랜 시간 험한 일을 하며 깨달은 진리를 나침반 삼아, 이브는 숲을 뒤질 때는 열심히 뒤지고 쉴 때는 확실히 쉬어가며 체력을 보충했다.
얼추 속이 익었겠다 싶은 시간이 지나 감자를 굴려 꺼낸 이브는 조심조심 껍질을 벗겨내 포슬포슬하게 익은 감자를 한입 물었다. 입 안을 온통 델 것 같은 뜨거움에 참지 못하고 흐어어, 하고 뱉어낸 숨 사이로 새하얀 연기가 섞여 빠져나갔다.
입 안에 남은 자글자글한 감자 부스러기의 입자를 혀로 굴리며 삼킨 이브는 멍하니 일렁이는 불꽃을 보며 생각했다.
‘아마 소원을 비는 건 똑같겠지. 이 고생을 시켜놓고 소원 하나 안 들어주면 진짜 죽창으로 찔러야지. 뭘 빌까? 한국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할까?’
이 상황이 게임이라고 생각했을 때야 마치 게임을 하는 감상으로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는 귀찮은 일은 피하고 자기 몸을 보신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이 세계는 더 이상 게임 속의 세계가 아니었고, 이브는 이 순간이 모두 자신의 삶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현실감이 피부에 와닿고서야 이브는 엔딩 이후에도 계속될 시간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배자가 될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으나 어차피 오랜 시간 어렴풋하게나마 국경을 넘는 것을 고민해왔던 터였다. 모은 돈을 가지고 땅을 사서 농사나 지을까, 하고 생각하며 이브는 중앙은행 계좌에 모아둔 돈이 얼마나 되던가를 떠올려 보았다.
멍하니 저금 잔액을 생각하던 이브가 돌연 몸을 벌떡 일으키며 옆에 꺼내두었던 마체테를 집어 들었다. 풀을 밟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근처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 살아 있는 생물의 기척이었다.
이브는 지체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칼 손잡이를 억세게 쥔 채 날 위에 둘러두었던 가죽을 벗겼다. 위로 길게 뻗은 울창한 전나무 사이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뿌득, 칼 손잡이에서 잔마찰음이 새어 나왔다.
곧 길쭉한 그림자가 빛이 닿는 곳까지 다가왔다. 이브는 손을 들어 올린 채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칼을 쥔 손에 힘을 빼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안 거야?”
“……연락 한 번을 안 하더라.”
“내 마음이지.”
“찾느라 정말 힘들었어. 대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냥 평범하게 기차 타고 왔는데?”
모닥불 가까이 다가온 윌리엄의 얼굴이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보여 이브는 자리에 다시 주저앉으며 친절히 설명했다.
“무인역을 골라서 좀 돌아왔어.”
“무인역? 여기도 무인역이 있어?”
“이래서 귀족 놈들이란.”
“난 영락없이 배를 탔다고 생각했지. 듣자하니 선배 찾겠다고 항구란 항구는 다 뒤집어엎고 출항기록을 싹 털었다던데.”
“음, 알베리크가 배편을 구해다 주기는 했는데.”
윌리엄은 자연스럽게 이브의 곁에 붙어 앉았다. 이브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바닥에 내던졌던 나뭇가지를 도로 주워 모닥불을 뒤적였다.
“그러려다가, 그냥 좀 볼일이 있어서.”
“볼일?”
“그냥 뭐. 여기까지 왔는데 끝은 봐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러면, 일 마치면 어떻게 할 거야?”
“글쎄다.”
이브는 한참 말이 없었다. 윌리엄은 무릎을 당겨 앉으며 무릎 위에 팔꿈치를 받쳐 턱을 괴었다.
“항구 쪽 감시 소홀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배나 탈까.”
“그러지 말고, 그냥 나랑 같이 여기서 살죠?”
“나 수배잔데? 걸리면 너도 범죄자 은닉죄로 같이 엮이는 거 아냐?”
“누명 벗을 생각은 없고? 그거 선배가 한 거 아니잖아.”
“귀찮아. 일 터지기 전이면 모를까, 저렇게 작정을 하고 덫을 팠는데 이미 증거고 나발이고 싹 다 날조해놨을걸. 원래 결백을 증명하는 게 제일 어려운 거야. 거기다 내가 진짜 그 집 조카딸도 아니고,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이 나라에 붙어 있어야 할 이유도 없거든.”
“…….”
“에드워드한텐 내가 이대로 없어지는 게 제일 뒤통수 맞는 일이겠지. 하하, 엿 좀 먹어보라지. 뭐 범죄인 인도 어쩌고 하는 법률은 아직 없을 테니까, 다른 나라로 튀어버리면 자기들이 어쩔 거야.”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마친 이브는 나뭇가지로 남은 감자를 굴려 모닥불 안쪽에서 빼내다가 문득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간 것을 말했다.
“아, 신문 보니까 황실 재판 이야기로 난리가 났더라? 발커레스 공작 후계자는 거의 뭐 2황자 저격수 수준이던데. 덕분에 내 기사는 쥐똥만 하게 실렸지만.”
“아아. 2황자 쪽은 끝났다고 봐야지. 여동생이 막판에 뒤통수를 쳤거든.”
“어?”
“아멜리아가 자기 친오빠랑 엄마를 배신하고 황태자 쪽에 붙었어. 내부 사정을 분 것도 그 여자고.”
“와, 대단하네.”
“그리고 그 여자를 황태자와 연결해준 건 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잇는 윌리엄의 말에 이브는 감자 하나를 식히기 위해 손 위에서 이리저리 굴리다 말고 멈칫했다. 입을 벌린 채 움직임을 멈춘 이브를 보며 윌리엄은 눈을 휘고 웃어 보였다.
“그리고 3년 안으로 아멜리아가 황태자를 죽이고 황제가 될 거야.”
손 위에 들려 있던 감자가 툭, 소리를 내며 흙바닥 위에 떨어졌다.
“황녀가 야심이 대단하더라고.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은 자긴데 왜 관과 홀을 두고 싸우는 건 두 오빠뿐이냐고 묻길래, 조금 도와줬어.”
“나 지금 엄청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원래는 3년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누나가 원하면 더 빨리 죽일게. 이게 다 에드워드 그 새끼 때문이잖아. 그 자식만 없어지면 되는 거 아냐?”
“아니, 어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게 네가 원한다고 그렇게 막, 그게 되는 거냐?”
이브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남자에게 묻자 윌리엄은 가만히 웃어 보이며 땅에 떨어진 감자를 주워 들었다.
“소금은 안 가져왔어? 그냥 먹으면 목이 멜 텐데.”
“처음부터 아주 작정을 했었구나, 너. 근래 들어 꾸민 짓은 아닐 테고. 그러고 보니 전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지 않았냐?”
“미안. 그땐 선배가 어디로 튈지 몰라서 그랬어.”
윌리엄은 손에 든 감자를 후후 불어 뜨겁게 올라오는 김을 식히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진짜 혈육도 아닌 사람들인데 하나둘쯤 죽인다고 뭐가 대수겠어.”
“너…….”
“나한테 선배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어. 아마 내가 이 세계에 불려 온 건 이걸 위한 거겠지. 선배 앞길에 거슬리는 새끼들 다 치워버리라고.”
바짝 익어 거뭇하게 그을린 감자의 껍질을 벗겨내며 하는 말치고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브는 기억 속의 「유선호」라는 남자의 성격을 되짚어보았다.
‘저게 원래 저렇게 좀 맛이 가 있던가……? 아니면 윌리엄 몸에 들어가서 돌아버린 건가? 갑자기 왜 혼자 급발진이야?’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선배가 귀찮을 일은 없을 거야.”
윌리엄은 껍질을 깐 감자를 이브의 손에 쥐여 주면서 조용히 눈을 접으며 웃었다. 일렁일렁 새빨간 불빛이 남자의 얼굴 위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이브는 높은 콧대 너머 그림자가 드리워진 나머지 반쪽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랑 있어줘. 당신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그냥 곁에만 있어줘. 나는 그냥, 그냥 그거면 돼.”
“왜?”
“정말 후회 많이 했어.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거절할 거 아는데도, 그런데도 포기가 안 되더라고.”
“하……. 잠깐, 기다려봐.”
“나 여기까지 왔잖아요. 이렇게 다른 사람 껍데기까지 빌려서. 이렇게.”
남자의 목소리에 희미하게 물기가 배어났다. 이브는 차갑게 식은 이성을 앞세워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책임지라고?”
“아니야, 아니에요. 그냥 나는.”
윌리엄은 바로 부정을 뱉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큰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맞아. 어차피 다 자기만족이고,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괜찮아. 사랑해달라고 이러는 거 아냐. 나는, 내가.”
“…….”
“내가 누나 곁에 있을 수 있게만 해줘요.”
“너, 진짜.”
“다른 거 바라지 않을게. 밀어내지만 마요. 제발.”
결국 남자의 연한 겨울 하늘빛 눈동자에서 새어 나온 눈물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길게 꼬리를 남기며 아래로 떨어졌다. 이브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마는 그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이내 길게 숨을 뱉으며 머리를 짚었다.
‘그래. 얘가 무슨 죄가 있다고. 쟤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데 딸려 온 거 아냐. 낯선 별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뭐든 해야 했겠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두고 움직이니까.’
“일단은, 그래. 고려해볼게.”
“아.”
“울지 말고.”
“좋아해…….”
“어어.”
“나는, 진짜.”
“다 큰 놈이 흉하게. 그만 좀 울어. 뚝 해, 뚝.”
난처한 얼굴로 이브가 소맷자락을 길게 끌어와 윌리엄의 뺨 언저리를 툭툭 두드리며 물기를 닦아주었다. 숨죽여 눈물을 툭툭 떨어트리던 그는 슬그머니 이브의 품으로 파고들어 안겨왔다.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이브는 별말 없이 윌리엄의 등 위를 도닥도닥 두드려주었다.
이브의 품에 안겨 그녀의 목덜미 언저리에 뺨을 기댄 남자의 입매가 꿈틀대며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혹시나 이브를 귀찮게 하는 장애물들을 치우면 그녀가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해줄까 싶어 수작질을 부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죄책감이 들거나 후회가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순순히 자백하면 혼이 나니까 다음부터는 들키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숨겨야겠다 하는 감상뿐이었다.
남자로서는 눈물 몇 방울 쥐어짜 이브의 약한 구석을 찌를 수 있다면 이득이었다. 울음이라도 터트리지 않았다면 제 말을 신뢰할 수 없다며 밀어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윌리엄은 필사적으로 울먹이며 불쌍한 척을 했다.
윌리엄은 이브가 등을 두드려주는 것을 느끼면서 더는 이브가 제가 저지른 일들에 대해 추궁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남자는 그녀가 조금 더 저를 불쌍히 여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윌리엄은 대충 진정한 얼굴을 꾸며내며 이브가 북부 시골까지 올라온 이유를 물었고, 이브는 오래된 건물을 좀 찾아야 한다며 간단히 대꾸했다.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윌리엄의 말을 무시한 이브는 대신 연락을 취하지 않았던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어둑하던 하늘이 점차 푸릇하게 밝아지고 나뭇잎 사이로 어렴풋한 빛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주위를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밝아지고서야 이브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불씨 위로 흙을 덮어 쾅쾅 밟으며 불꽃을 사그라트린 이브가 가죽을 두른 마체테를 들어 허리에 맨 검집대에 고정했다.
“잠깐.”
이브를 불러 세운 윌리엄이 품에서 손가락 하나 정도의 길이의 얇은 피리를 꺼내 휙 불었다.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고음이 한차례 길게 울린 후, 10분이 채 지나기 전에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왔다.
“……뭐야.”
“명색이 공작인데 이런 델 혼자 올 리가 없잖아.”
“근처에 대기시켜놨어? 근데 왜 어젠 같이 안 왔어?”
“모처럼 둘만 있는데, 다른 사람을 거기 왜 끼워?”
이브는 근처로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듣고는 의아해하며 물었고, 윌리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너 갑자기 왜 이렇게 음침하게 구냐고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이브는 결국 얼굴이 식별될 정도로 가까워지는 무리를 보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윌리엄의 부름을 받고 온 이들은 기사인 듯 긴 장검을 찬 남자가 넷, 안면이 있는 마법사가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브는 눈에 익은 얼굴을 보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브에게 함께 묵례한 마법사, 세실은 윌리엄이 지시하는 말을 듣고는 광역 탐지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탐지 마법을 전개하기 전 그녀가 이브에게 물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시는 거죠?”
“음, 근처에 큰 호수가 있다는 것 외에는……. 아. 호수 근처에 야광버섯 군락이 있는 지역 위주로 탐색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아마 꽤 시간이 걸릴 거예요. 위만 훑는 게 아니라 아래를 훑어야 해서.”
“아하.”
“그…….”
정말 있는 장소는 확실한 거죠? 하고 조금 못 미더운 얼굴로 마법사가 물었다. 이브는 하하하 웃으면서 아마도요, 하고 애매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겠지. 그래,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게 정상이지. 그래서 일부러 연락 안 하고 혼자 찾고 있었던 건데.’
곧 마법사의 발밑으로 빛 무리가 모여들었다. 마나의 길을 연 마법사가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읊었다. 보이지 않는 안개처럼 퍼져 있던 자연의 마나가 그녀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한차례 공기가 파르르 떨려왔다.
몇 가닥의 무형의 기운이 실타래처럼 엉기더니 곧 뿌리를 내리는 나무처럼 사방으로 줄기줄기 뻗쳐나갔다. 뻗어 나간 마법사의 마나는 잘게 부스러져 반짝이는 붉은빛 알갱이들을 뿌리며 흔적을 남겼다.
어느덧 맑은 하늘 위로 깨끗한 구름이 흐르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로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서서히 세실의 발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사그라졌다. 감고 있던 눈을 뜬 세실은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간 붉은색 빛 부스러기 중 한 갈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쪽이요. 이 끝에 뭔가 인공물 같은 게 있어요. 정확하지는 않지만요.”
인간 나침반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이브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짝짝짝 손뼉을 쳤고, 열렬한 반응에 세실은 뺨을 슬쩍 붉히며 어서 출발하시죠……! 하고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기사들이 둘씩 갈라져 전위와 후위를 맡았다. 일행의 중간쯤 해서 길을 나선 이브는 어쩐지 던전에 처음 들어갔었던 병아리 시절이 떠올랐다.
물론 그때에 비하면 무리의 일원들이 느끼는 긴장감은 제로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은 이브가 된 이후로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거리는 생각 이상으로 멀었다. 아침나절에 출발한 일행은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또 한참을 걸었다. 결국, 걷다가 지쳐 종아리 근육에 가볍게 쥐가 내린 마법사는 가장 젊은 기사 한 사람의 등에 업히게 되었다.
“아 그러게 평소에 운동도 좀 하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막내 허리 부러지면 책임지실 겁니까?”
“시끄러워요. 발터 경.”
“으하하! 손님 앞이라고 경이라고 불러주시는 검까?”
“전하의 손님 앞에서 새끼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저는, 헥헥. 괜찮습니다. 헉헉.”
“억지로 힘든 척하지 마세요, 페터 경. 경이 제일 나빠요.”
“페터 경 허리가 부러지면 어쩔 수 없이 세실 자네가 검을 들어야겠군.”
“전하까지 그러실 거예요?”
일행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기사들과 마법사는 자주 무리로 묶이는지 익숙하게 투닥거리며 잡담을 나누었다. 윌리엄은 오히려 그들의 대화에 끼어 농을 걸었고, 이브는 친밀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피식 웃었다.
어느덧 하늘이 붉게 노을 지고 있었다. 푸르렀던 하늘이 노란색, 붉은색, 분홍색을 한꺼번에 짜 이리저리 뒤섞은 물감처럼 물들어갈 무렵, 일행의 눈앞에 금이 간 폐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진짜 있네요.”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세실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브마저도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색의 돌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전은 흙먼지가 쌓여 거무튀튀한 잿빛을 띠었고, 이곳저곳이 금이 가고 부서진 데다 한번 불이 질러진 적이 있었던 듯 지붕 안쪽 곳곳에 검은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과거 아름다운 위용을 자랑했을 석조건물은 오랜 시간 비바람을 맞아 부식되어 발로 걷어차기라도 하면 기둥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본디 여덟 개였을 기둥 중 두어 개는 부서져 흔적만 남아 있었고, 간신히 몇 개 남지 않은 기둥들이 아랫변이 긴 삼각형 모양의 돌출랑을 지탱하고 있었다. 코치처럼 튀어나온 처마 뒤로 이어지는 커다란 돔 형태의 본당 역시 지저분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판테온?”
“뭐, 그거나 이거나 신전이긴 마찬가지지.”
유명한 관광명소의 이름을 말하는 윌리엄에게 작게 대꾸한 이브는 성큼성큼 기둥을 지나 본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윌리엄은 기사들에게 본당 입구 쪽의 경계를 지시한 후 이브에게 다가와 혹여 위험요소는 없는지 실내를 둘러보았다.
본당 내부는 무척이나 넓었다. 사방을 둘러싸듯 아치 모양으로 파여 있는 일곱 개의 벽감은 원래 석상이나 신물을 세워두는 장소로 보였으나 무언가 부스러진 흔적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천장 역시 아주 높았다. 어떻게 조각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높은 천장 위로 신을 찬미하는 모습이 양각되어 있었다. 천장의 정가운데는 둥글게 뻥 뚫려 있었고, 그 정중앙의 아래에는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금이 간 제단이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던 이브는 주머니를 뒤져 옥타비아에게 받아 온 수정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녀는 종장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브는 주위의 공기가 술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윌리엄 역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두 사람이 들어온 입구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입구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백히, 함께 온 이들보다 많은 수의 기척이 신전 바깥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세실. 돌아가 원군을 불러와라.”
“하지만, 전하.”
“그게 나아. 놈들의 수가 너무 많아.”
“……네. 서둘러 돌아오겠습니다.”
신전 앞으로 넓게 펼쳐진 이동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이들이 적이라 판단한 윌리엄은 수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마법사에게 명령했다. 잠시 고민하던 얼굴을 하던 세실은 결국 빠르게 서클을 열어 좌표를 읊었다. 원군을 부르기 위해 마법사가 먼저 재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고, 기사들이 검을 빼 들고 본당의 입구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신전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대마법사 칼리스토를 위시한 황태자 에드워드와 그의 기사들이었다. 어림잡아도 스물이 넘는 발소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기사들은 저마다 검을 쥔 손에 뿌드득 힘을 주었다.
이브는 다시 수정을 주머니 안에 넣고 기척을 죽인 채 지붕 아래 복도 쪽을 주시했다. 통로 너머로 에드워드와 카스텔, 칼리스토의 얼굴을 확인한 이브는 쯧 하고 혀를 차며 허리에 찬 마체테를 꺼내 들었다.
에드워드 역시 복도 너머로 이브의 얼굴을 발견한 듯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이쪽에 있을 줄 알았네, 레이디 이벨린.”
“어우. 저 끈질긴 새끼.”
“그대를 추적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저 사내를 추적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지.”
애초에 윌리엄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은 칼리스토의 임무 중 하나였다. 저택에 처박혀 있던 윌리엄이 갑작스럽게 영지의 서쪽 삼림지대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에드워드는 이브가 그곳에 있으리라 확신하며 이동 마법진을 준비시킨 것이었다. 말 그대로 짐승 같은 감이었다.
“미안. 꼬리가 붙은 줄 몰랐어.”
“됐어. 칼리스토가 붙었다면 모를 수밖에 없지.”
남자의 사과를 흘려 넘긴 이브가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윌리엄 역시 허리에 차고 있던 무기를 꺼내 허공에서 한차례 휘둘렀다.
이브는 짧게 뭉쳐 있던 것이 순식간에 휘릭 소리를 내며 길게 펼쳐지는 것을 보고 작게 탄성을 질렀다.
“무슨 게임 아이템 같다, 야.”
이 와중에도 슬그머니 건네지는 그녀의 농담에 윌리엄이 내심 픽 웃고는 자기 키만큼 길게 뻗은 장창으로 바닥을 짚었다.
무장한 기사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와 양쪽으로 갈라져 도열하고는 날카로운 살기를 흘리며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에드워드와 칼리스토, 카스텔이 신전의 본당 안까지 들어섰다.
기사들 사이로 걸어오면서 칼리스토가 작게 말했다.
“이동 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저쪽엔 마법사가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원군을 부르기 위해 자리를 벗어난 듯 보입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하도록.”
에드워드의 지시를 받은 칼리스토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기척을 죽인 뒤 좌표 탐지를 방해하는 마법과 외부의 침입을 막는 결계 마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제 쪽으로 돌리기 위해 에드워드는 일부러 웃으며 이브에게 말을 건넸다.
“바깥나들이는 즐거웠나?”
“뭐, 그럭저럭.”
“뭔가 방법을 찾아냈나 보지.”
“예에, 뭐. 그렇죠.”
“무용한 발버둥이야. 이제 그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오게.”
“하하. 또 무슨 헛소리실까.”
“전엔 이런 거창한 장소까지는 필요치 않았던 것 같았는데. 이 장소는 또 뭔가 다른 비밀이 있는가 보군?”
“글쎄요.”
“뭐,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 「다음번엔」 눈을 뜨자마자 없애버릴 테니까.”
이브가 어깨를 으쓱였다. 에드워드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으나 본능적으로 이브에게 위협을 하는 말임을 알아챈 윌리엄이 으르렁 낮게 목을 울렸다.
“그런 짓을 하게 내버려둘 것 같나?”
“……우선 시끄럽게 짖어대는 번견부터 치워야겠군.”
에드워드의 얼굴이 얼핏 약하게 짜증으로 물들었다. 이내 남자는 붉은 입술을 휘며 수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공은 죽여도 좋다. 죄명은, 그래. 반역 혐의인 걸로 하지. 여자는 목숨만 붙어 있다면 팔다리 하나둘 정도는 상해도 상관없다.”
낭랑히 울려 퍼지는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신호탄이 되었다. 양측의 기사들은 서로를 향해 짓쳐들며 힘껏 검을 휘둘렀다.
윌리엄의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기사들이었으나, 수적 열세를 뒤엎을 수 있을 정도로 초월적인 능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브는 제 쪽으로 밀려드는 기사들을 보면서도 그리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체테의 칼등을 어깨에 얹은 채 여유로운 얼굴로 손가락질했다.
“가라, 선호몬!”
“너무하네.”
“서노서노, 하고 울어야지.”
남자는 투덜거리는 입과는 달리 무섭도록 서늘한 무표정을 유지한 채 긴 장창을 휘익 휘둘러 근처로 들이밀어지는 칼들을 한 번에 걷어치웠다.
“한 대라도 맞으면 장가를 못 가요, 아아 미운 사람~.”
이브는 흥얼흥얼 가사를 바꾸어 노래를 불렀고 참다못한 윌리엄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심각한데 웃기지 말라고……!”
“어어? 허리 빈다? 너 혹시 그동안 단련 안 하고 탱탱 놀았니? 몸 쓰는 게 영 꼬롬한데?”
이브의 지적질에 윌리엄은 다시 이를 악물며 창을 쥔 손을 한 바퀴 휘돌려 창대를 고쳐 잡았다.
기본적으로 무투 계열 각성자는 위기의 순간을 대비해 다양한 무기를 다룰 줄 알아야 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잘 맞는 무기가 한두 개씩은 있기 마련이었다. 처음 무기를 고를 무렵 선배의 강요 탓에 강제로 쥐게 된 창이었지만, 의외로 남자는 창이라는 무기와 합이 좋은 편이었다.
빠르게 창대를 서너 번 회전시키며 사방을 날카롭게 베어낸 윌리엄은 찔러 들어오는 칼날의 주변을 창날로 휘돌려 감듯 헤집으며 검사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윌리엄이 무기를 다룰 줄 안다는 보고는 받은 적이 없었던 에드워드가 설핏 안색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저런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군.”
이브는 혼자 다섯을 상대하면서도 그다지 힘든 기색이 보이지 않는 윌리엄 쪽을 흘끗 바라보다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제 쪽으로 치고 들어오는 기사의 팔목을 마체테의 칼등으로 빠르게 올려쳤다.
팔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기사가 칼을 놓쳤고, 이브는 그제야 그를 바라보며 허리를 회전시켜 기사의 머리통을 강하게 갈겨 찼다.
뻐억!
무시무시한 파공음에 뒤이어 강렬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기사는 기절했는지 말이 없었다.
이브는 간간이 제 쪽으로 넘어오는 남자들의 머리통을 갈겨 깔끔하게 기절시키면서 에드워드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남자는 카스텔을 향해 손을 까딱이고 있던 참이었다.
‘아, 소드 마스터는 완전 밸붕이지.’
이브는 윌리엄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카스텔을 향해 힘껏 자리를 박차고 달려갔다.
“어딜 보는 거예요? 당신 상대는 당연히 나지!”
이브의 신형이 지면에서 솟구쳐 올랐다. 순간의 살기를 읽어낸 카스텔이 빠르게 발검해 머리 위로 무겁게 쏟아지는 파르란 검날을 받아쳤다.
콰가가각 하고 고막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긁히는 소리가 이어지고, 오래가지 않아 두 사람의 검날이 동시에 떨어져나갔다.
찍어내고 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막칼과 베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양날검의 상성은 좋지 않았다. 카스텔은 순식간에 조금 상해버린 날 부분을 흘끔 내려다보다가 지체하지 않고 검 위로 오라를 둘렀다. 그 모습을 본 이브 역시 핫, 하는 웃음소리를 내고는 마체테 위로 오라를 덮어씌웠다.
남자와 가까이 있던 에드워드가 어느 틈엔가 뒤편으로 자리를 물렸지만 카스텔은 그래도 걱정이 됐는지 조금씩 이브를 몰아붙이며 신전의 안쪽으로 나아갔다. 이브는 그 자리에서 버티려는 노력 없이 그저 쇄도하는 날을 흘리거나 받아치면서 천천히 뒤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옆구리로 파고들다가 갑작스럽게 검로를 바꾸는 롱소드를 보고 스텝을 밟아 빠르게 뒤로 물러선 이브가 칼을 들고 방어 태세를 갖추며 웃었다.
“엄청 봐주고 계시네요.”
“……생포를 명받았습니다.”
“팔다리 정도는 잘려도 괜찮다던데요?”
“…….”
“그렇게 여유 부리다가는 다쳐요, 카스텔 경. 나 요즘 오라 다루는 솜씨가 꽤 늘었거든.”
“그래 보입니다.”
이브의 말에 돌연 카스텔이 부드럽게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후, 하고 짧게 웃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남자의 미소를 목격한 이브가 잠시 얼떨떨한 얼굴을 하자 남자가 다시금 공세를 갖추고 작게 덧이어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브가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카스텔의 검이 이브 쪽으로 파고들었다. 허벅지 방향으로 베어지는 칼날의 검로를 받아 흘리며 남자의 목을 노리면서도 이브는 어쩐지 싱숭생숭한 마음이 되었다.
‘뭐야? 뭔데? 다쳐도 괜찮다고? 너 미인계 쓴 거야, 지금? 이 곰 같은 놈이 여우 짓을 다 하네?’
남자의 검격은 급소가 아닌 곳만을 골라 치고 들어왔다. 덕분에 방어가 수월해진 이브는 묘한 얼굴을 하면서 카스텔의 칼을 받아내다가 슬쩍 에드워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얼핏 남들이 보기에는 카스텔의 공세에 눌려 뒤로 밀려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느새 꽤 거리가 멀어져 에드워드가 뭐라고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에드워드는 칼리스토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칼리스토의 마법이 한번 발동이 된다면 파훼하기 무척 까다로울 터였다. 더는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브는 바닥에 쓰러진 상당수의 기사들과 아직까지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윌리엄의 기사들, 장창으로 혼자 나머지를 상대하고 있는 윌리엄 쪽을 보고는 다시 눈앞의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브가 한눈을 파는 것을 보고 있음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묵묵히 정직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건 좀 위험할 거예요.”
이브는 갑작스럽게 씩 웃으며 경고의 말을 남긴 뒤 오라를 뽑아내 검 바깥에서 마치 폭탄처럼 터트렸다. 이전 생에서 익힌 요행으로, 살상력은 크지 않으나 상대를 깜짝 놀라게 만들어 위협을 하거나 거리를 벌릴 때 주로 애용하던 방법이었다.
쾅!
설마 오라가 터질 거라곤 미리 예상하지 못한 카스텔이 거센 폭발음에 놀라 본능적으로 뒤쪽으로 훌쩍 물러났다. 남자와의 거리와 뒤쪽에 있는 제단과의 거리를 한 번에 파악한 이브가 그대로 마체테를 바닥에 던진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단 쪽으로 달려갔다.
이브는 빠르게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왼손을 길게 그어 베어낸 후 아공간 주머니에서 수정을 꺼내 다친 손을 수정을 강하게 힘주어 쥐었다.
“안 돼! 막아!”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제단 앞까지 무사히 도착한 이브는 피로 얼룩진 수정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천장 위에 뚫려 있던 동그란 구멍 너머에서 강렬한 빛줄기가 터져 나왔다. 새하얀 빛은 마치 폭포수처럼 제단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브의 굳은 뺨을 타고 오색찬란한 빛의 방울들이 흘러내렸다.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찬연한 빛의 세례 속에서도 이브는 딱딱한 낯을 하고 정면을 응시했다. 찰나의 순간조차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빛의 조각들이 얽히며 허공에 어룽졌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파노라마처럼 일련의 장면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눈에서 핏물 섞인 눈물을 쏟아내는 여자가 있었다. 모진 고초를 겪은 듯 뺨이 움푹 팬 여자의 머리는 들쑥날쑥한 모양으로 아주 짧게 잘려나가 있었다. 여자는 이브였다. 이브였고 또한 자신이었다.
부른 배를 움켜쥐고 차라리 목숨을 거두어달라 울부짖는 여자를 빛 무리가 자애롭게 품어 안았다. 빛은 곧 깨질 것처럼 잔뜩 금이 간 영혼을 품에 안고 세계를, 차원을 유영했다. 마침내 당도한, 속박이 없는 세계에 품 안에 안긴 금이 간 영혼을 옮겨 심었다.
“아, 아…….”
손끝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지금껏 「게임」이라고 굳게 믿어왔던 기억의 단편들이 하나하나 입체감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면 속의 그림들이 구물구물 움직이며 주영을, 이브를 덮쳐왔다. 그것은, 그것은.
이브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렸다. 그녀는 분노에 휩싸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마침내 이브는 깨달았다. 게임 속 이벤트라고 여겨왔던 그 모든 것이 제가 겪었던 미래이자 과거였다.
주영은 이브가 된 것이 아니었다. 이브가 주영이 된 것이었다. 전후 관계가 다시 맞추어지기 시작하자 머릿속으로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시간의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들어 왔다.
조각내어 마음속 깊은 곳에 파묻어두었던 끔찍한 시간의 파편들이 모여 기억을 이루었다. 이브는 조각나 흩어졌던 기억의 퍼즐들이 짜맞추어 지는 것을 느꼈다. 수십 번씩 반복한 시간 속에서 매번 고통스럽게 울부짖던 자신의 기도 소리가 귓전을 쩡쩡 때렸다.
먹먹해진 귀 안으로 날카로운 이명이 들려왔다. 머리 안으로 송곳이 파고드는 듯한 고통이 이어졌다.
실은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이 세계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며 자신은 맥락 없이 이 세계에 빠진 것은 아닐 거라고, 이브는 자신을 이브라고 받아들였을 그 무렵부터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었다.
기억이 온전치 못했을 때도 그녀의 몸은 저를 상처 입혔던 「적」들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경계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이유 없이 찾아오곤 했던 영문 모를 분노의 뿌리를 찾았다.
“……저 개새끼들을 다 죽였어야 했는데.”
짓눌린 어금니 사이로 분노에 차 벌벌 떨리는 목소리가 핏물을 머금고 흘러나왔다. 뜨겁게 달군 돌을 삼킨 듯 배 안이 들끓었다. 눈앞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브는 손을 들어 뺨 아래로 떨어진 액체를 문질러 닦아냈다. 흐릿하게 붉은 물이 든 눈물이 양 뺨을 적시고 있었다.
“제기랄, 놓아라! 이거 놔!”
이명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자 주위 소음이 고막에 닿았다. 이브는 차게 식은 얼굴로 뒤를 돌았다.
빛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본 에드워드가 기사들이 검을 섞고 있는 전장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이브를 향해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윌리엄이 붙들어 막았다. 반쯤 미쳐 악 소리를 지르는 에드워드와, 황태자에게로 달려와 윌리엄을 저지하는 카스텔의 모습이 보였다.
“개판이네.”
이브가 난장판이 된 본당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이브는 미련 없이 다시 몸을 돌렸다. 이브는 뺨을 적신 붉은 눈물을 옷소매로 대충 슥슥 비벼 닦아낸 후 물줄기처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는 아름다운 빛줄기를 향해 손가락을 가져갔다.
손끝이 빛 멍울과 닿기 바로 직전, 누군가 그녀의 등 뒤에서 허리를 거칠게 뒤로 당겨 안았다. 이브는 고개를 내려 제 허리를 강하게 조인 두 팔을 바라보았다. 누군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이브가 남자의 팔을 붙들고 떼어내려 힘을 주었다.
“가지 마. 제발, 가지 마라.”
“이거 안 놔?”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다. 제발, 이브……! 나만 두고 가지 마, 제발.”
“지랄하지 말고 빨리 놔라, 뒈지게 두들겨 맞기 전에.”
“또 그렇게 가버리면 나는? 네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라고?”
“네가 좆같은 세상에서 좆같이 살건 말건 나랑 무슨 상관이야?”
“웃기지 마. 몇 번이고 다시 시간을 돌리고 말 테다. 몇 번이고, 이 지옥을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한다고 해도! 반드시 너를 다시 되찾을 거다!”
떼어내도 자꾸만 달라붙어 오는 남자의 끈질김에 팔을 부러트려버릴까 고민하던 이브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내가 사라지고 나서부터는 네가 시간을 돌린 거구나.”
“그래. 신의 권능을 흉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마법사 수백 명을 갈아 넣었지. 네가 어린 소녀가 될 때까지, 이 세계에서 도망가기 이전의 시간까지……!”
이브가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자리에 섰다. 에드워드는 제 몸을 떨어트리려던 이브가 얌전해진 틈을 타 더욱 강하게 힘을 주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고 목덜미께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 안식을 그렇게까지 방해하고 싶으셨나요?”
이브의 목소리가 마치 노래하듯 울렸다. 말투와 억양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그녀의 목소리는 에드워드의 오랜 기억 속 이브의 것 그대로였다. 돌아왔다. 그녀가, 제 품으로 돌아왔다.
이 모습을 되찾고자 그동안 저답지 않게 친절을 베풀며 그녀의 뿌리와 관련된 책들을 넘겨주지 않았던가. 이제 됐다. 에드워드의 바람대로 이브는 세계를 떠나기 전에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대로 그녀를 제 곁에 묶어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에드워드는 이브의 허리를 감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사랑한다 하지 않았나.”
“전하의 사랑이 제게 무슨 가치가 있는지요?”
“결국 그대는 나를 연민하였잖아, 그대가! 감히, 이 나를!”
“그렇다면 차라리 끝까지 증오할 것을 그랬네요.”
가느다랗게 속삭인 이브가 천천히 남자의 손등 위를 쓰다듬었다. 에드워드는 눈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자의 허리를 강하게 옥죄었던 팔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네가 주는 안식을 내 어찌 잊겠나. 부디 나를 가엾게 여겨다오. 동정이라 해도 좋다. 내 곁에 남아다오. 제발, 이브.”
“당신을 동정한 것은 내 생애 가장 후회되는 일입니다.”
이브는 나긋한 걸음으로 남자의 품을 빠져나갔다. 천천히 등을 돌려 에드워드를 마주 본 이브가 지금껏 단 한 번도 지어 보인 적이 없었던 자애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정히 남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에드워드의 몸이 아래로 무너졌다. 남자는 먼지로 뒤덮인 더러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그녀의 다리에 손을 뻗어 바지 자락을 꼭 붙든 채 눈물을 쏟아냈다. 흙먼지 위로 뜨거운 물방울이 후드득 쏟아지며 흐릿한 자국을 만들어냈다.
“저는 이제 방법을 찾았습니다. 당신이 수십 번 시간을 돌리면 저는 수백 번을, 수백 번 시간을 돌린다면 저는 수천 번 이 세계를 떠날 겁니다.”
“이브, 이브. 아, 아아. 가면, 가면 안 돼. 제발.”
“설령 전하께서 제게 자유를 약속한다 한들 제가 어찌 전하를 믿겠습니까? 지난 세월 오로지 내 인생을 망가트리기 위해 살아온 당신을요.”
“나는, 나는.”
“제가 만일 이곳에 머무른다면. 그대, 인간의 아들께서는 제게 무엇을 해줄 수 있습니까?”
“그대가 바라는 모든 것을.”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브가 미소 지으며 남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천천히 결을 따라 쓰다듬었다. 마치 세례를 내리는 것 같은 자세로 이브가 속삭였다.
“이 자리에서 죽어주세요. 그리하시면 믿겠습니다.”
“……아아.”
“반드시 시간은 뒤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결국, 우리는 다시 만나겠지요. 그러니 지금 죽어주세요.”
이브는 멍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에드워드 앞에, 그녀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던 피 묻은 단검을 던졌다. 눈물이 가득 차 희뿌옇게 흐트러졌던 눈동자가 희열에 차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 목숨으로 그대를 이 세계에 묶어둘 수 있는가?”
“언제 재회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곳에 있겠습니다.”
눈물과 먼지로 얼룩져 있음에도 아름다운 조각상 같은 얼굴 위로 점차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멍울이 터져 피어오르는 꽃처럼 입술 끝을 활짝 올리며 화사하게 웃어 보인 남자가 이내 바닥을 더듬어 단검의 손잡이를 집어 들었다.
이미 두 사람만의 세계였다. 강렬한 빛이 신전 안을 메우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서로를 견제하며 이브가 있는 방향을 주시하던 이들이 단검을 들어 제 목을 겨누는 황태자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가장 먼저 몸을 날려 에드워드의 움직임을 저지한 것은 사내의 측근이자 놀이 형제였던 카스텔이었다. 융통성 없는 검사가 제 무기도 바닥에 내던진 채 마치 화살처럼 쏘아져 달려와서는 에드워드의 등 뒤에서 그의 손목을 잡아 결박하며 움직임을 제압했다.
벌써 한차례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 에드워드의 목 줄기에 붉은 실선이 생기고 말았다. 카스텔이 이브에게 소리쳤다.
“영애, 대체! 뭘 하시는 겁니까!”
“마지막이요. 모두에게 어울리는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지금껏 그가 보아온 이브가 아니었다. 고작 머리카락이 사내처럼 짧게 다듬어진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무가치한 무기질이나 하찮은 미물을 내려다보는 듯한 초연한 시선 안에는 겹겹이 쌓인 지독한 피로와 미약한 분노가 뒤얽혀 있었다. 카스텔은 도무지 그녀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놔라, 카스텔. 놔. 내가, 내가 죽어야 한다. 죽어야…….”
카스텔의 저지 때문에 단검을 떨어트린 에드워드는 카스텔의 방해를 피해 목 위의 살갗을 손톱을 세워 억지로 헤집었다. 길게 베인 상처 위로 새빨간 피가 배어 나와 옷깃을 잔뜩 더럽히고 있었다. 그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한쪽에서 이 장소의 모든 사람들을 한 번에 제압하기 위한 광역 마법을 준비하다가 갑작스러운 상황을 목격하고 몸이 굳어 있던 칼리스토가 뒤늦게 경악한 얼굴로 에드워드에게 달려왔다. 남자는 에드워드의 상처를 회복시키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대었으나 황태자는 마치 짐승처럼 몸을 뒤틀며 도움의 손길을 거부했다.
피로 얼룩진 남자의 흰 목깃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브가 작게 중얼거렸다.
“진작 그를 말리지 그랬어. 너희 모두가 공범이야. 너희 모두가 이브의 인생을 진창에 처박았지.”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브는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에드워드와 시선을 마주쳤다. 남자의 확장된 동공을 바라본 이브가 경쾌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억양이 또다시 바뀌었다. 평소 쓰는 노동자들 특유의 다소 거친 말투와 억양이었다.
“정 그렇다면 제안을 바꿀게.”
“아아, 이브, 이브…….”
“일평생 내 발닦개로 살아.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평생 내게 지은 죄에 대해 속죄하면서 내 노예로 사는 거야. 내가 시키는 건 뭐든 하면서 말이야. 할 수 있겠어?”
“뭐든 하겠다. 그대가 곁에 있어준다면, 뭐든지.”
입매를 비틀어 픽 비웃음을 터트린 이브가 남자의 흐트러진 금발 위에 손을 올렸다.
“이로써 우리의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 마뉴스 레지나여. 바라건대, 이 사내의 일생이 제게 복속됨을 허락하소서.”
이브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마나를 공명시키지도, 발아래 제 마나를 일으킬 공간을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그러나 본디 마법이란, 날카로운 발톱도 송곳니도 가지지 못한 연약한 인간을 가엾게 여긴 신이 나누어준 권능의 일부였다. 마법을 일으키는 주문은 여신에게 올리던 기도였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환상적인 일들은 신이 허락한 기적이었다.
본능적으로 읊은 기도가 시동어가 되어, 그녀의 손아래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너, 지금……!”
“대마법사라더니, 허명은 아니군.”
이 장소에서 오로지 칼리스토만이 그녀가 행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채고 경악에 차 소리 질렀다. 에드워드의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 반듯한 이마 위로 마치 상처가 생겼다가 나은 흔적처럼 희미한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졌다. 그러나 곧 시간이 지나며 그마저도 살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브는 그대로 영차, 하고 허리를 세워 일어섰다. 뒤로 돌아선 이브가 곧게 뻗어져 나온 빛의 기둥 위로 손을 대고 「소원」을 빌었다.
진정으로 이브가 행복해질 수 있는 소원. 그녀는 히든 루트의 조건을 되새겨보았다. 비록 의도적으로 왜곡되어 심어진 대체된 기억이었으나 이는 신에게 제대로 된 소원을 빌어야만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브 자신이 스스로에게 남긴 단서나 마찬가지였다.
“더는 이 땅에서 시간이 반복되는 일이 없게 해주세요.”
길었던 고민을 끝내고 마침내 이브는 과거의 자신이 가장 원했던 그리고 앞으로의 자신이 가장 바랄 소원을 소리 내 읊었다.
그러자 마치 화답을 하듯 빛의 기둥이 한순간에 몸집을 불렸다. 눈을 뜰 수조차 없을 정도로 환한 빛이 신전의 본당 안을 가득 채웠다. 모든 사람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빛 무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느새 바깥은 해가 져 있었다. 빛이 사라진 본당 내부는 칠흑처럼 어두운 그림자에 파묻혔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하고 모두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로지 이브만이 돔 위에 뚫린 동그란 구멍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조금씩 어둠 사이로 사물을 식별할 즈음이 되고 나서야 이브는 고개를 돌렸다.
“아, 배고프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음에도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 자신이 본 게 무엇인가 얼떨떨한 얼굴로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홀로 표표히 움직이던 이브가 본당 입구를 빠져나가려다 말고 뒤를 돌았다.
“뭐 해요, 다들? 게임은 다 끝났어.”
그토록 바랐던 엔딩의 순간이었다. 이브가 후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