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비밀상점의 NPC (19/22)

18. 비밀상점의 NPC

이브는 어느 순간부터 알베리크가 어딘가 조급하게 군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에드워드와 관련된 이야기에는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면서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그녀와 티타임을 가지려고 애썼다. 제 부모에게 바깥나들이를 권하며 되도록 그들이 이브에게 접촉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저택의 시종들에게도 이브의 안위를 곧잘 묻고는 했기에 자연히 이브를 대하는 저택 사용인들의 태도 또한 극진해졌다.

게다가 밤놀이의 빈도는 줄었으나 한번 불이 붙으면 그는 자신의 육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 이상의 것을 원했다. 이브는 남자의 정신이 막다른 곳에 몰려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브는 알베리크의 가슴팍 위를 살살 쓰다듬었다. 얇은 셔츠 아래로 볼록 서 있는 유두의 말랑한 감촉과 함께 둥글게 연마가 되어 있는 단단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어디서 뭘 듣고 왔는지 알베리크는 여성용 귀걸이를 변형시켜 만든 듯한 바 형 피어싱을 가지고 와 이브에게 가슴을 뚫어주기를 요구했다. 남자가 너무 아파해서 결국 왼쪽 한쪽만 뚫고 말았지만.

그는 명백히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한계를 뛰어넘었음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이브가 주는 고통을 견뎌내려 애썼다. 알베리크의 반응을 보고 노련하게 수위를 조절했기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이브는 점점 이 관계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알베리크는 속죄를 위해 이브와의 관계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는 성욕의 해소가 목적이 아니라, 그저 벌을 받고 고통스럽기 위한 목적으로 이브와의 밤놀이에 임했다. 그 누구도 즐겁지 않은 밤이었다.

‘이쯤 되면 그냥 뭐, 멘탈 자위 도구인 거지. 슬슬 그만둬야 하나.’

남자가 욕망으로 들뜨지 않으니 자연히 이브 역시 태도가 건조해졌다. 괴롭히는 대로 휘둘리며 열에 들떠 울고 허덕이는 모습에 흥분하는 성욕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지금의 알베리크의 태도가 불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암체어 위에 다리를 활짝 벌리고 앉아 제 손을 핥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이브의 표정이 유난히 서늘했다. 앞섶이 풀어 헤쳐진 얇은 셔츠 자락 아래로 흰 가터벨트와 살갗이 비칠 정도로 얇은 흰색 여성용 스타킹을 신은 기다란 다리가 삐죽 나와 있었다.

무릎을 구부린 채로 다리를 벌리고 푹신한 암체어에 앉아 있던 남자는 다리를 오므리고 싶어 죽겠는 듯, 자꾸만 허벅지를 움찔대며 무릎을 조금씩 움직였다.

“다리 더 벌려.”

이브의 서늘한 명령에 알베리크는 흠칫 놀라 가운데로 모이던 무릎에 힘을 주어 벌렸다.

남자의 목 위로 둘린 붉은 끈은 등 뒤를 따라 내려가 뒤로 둘러진 양 손목과 연결되어 있었다. 손목을 제대로 위로 올리지 않으면 목이 졸리는 구조였기에 그는 마음대로 등을 구부릴 수도, 손을 내릴 수도 없었다.

불편한 자세가 한참 이어지고 있었다. 이브는 남자의 관자놀이 아래로 흐르는 땀방울을 보며 알베리크의 입 안에 들어간 손에 힘을 주어 목젖을 쿡 찔렀다.

“커헉, 헉……!”

“깔끔하게 핥아 먹어요. 자기가 싼 오물은 자기가 처리해야겠죠?”

간신히 구역감을 참아낸 알베리크는 다시금 혀를 세우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에 문 이브의 손가락을 손톱 끝까지 세심히 혀로 문질러 핥았다.

입 안에 씁쓰름하고 비릿한 정액의 불쾌한 잔향이 남은 것 같았으나 그는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턱을 더 열어 손을 더 깊숙이 삼키며 손가락의 살갗을 빨아들였다.

이브는 어느 정도 손에 남은 정액이 사라졌다 싶을 때쯤 남자의 머리채를 쥐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알베리크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가면 갈수록 변태가 되어가네.”

“흐으, 하…….”

“자기 정액도 맛있게 빨아 먹고. 젖꼭지 이렇게 발딱 세우고 말이야.”

“아흐, 흐, 악!”

“아파?”

이브는 갑작스레 덜 아물었을 게 분명한 왼쪽 유두 근처를 힘주어 눌렀다. 남자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니 제법 고통이 심한 듯 보였다.

“엉덩이를 그렇게 맞았는데도 고작 구멍 조금 뚫은 게 더 아파요?”

이브의 손끝이 유륜 근처를 둥글게 덧그렸다. 알베리크는 턱을 덜덜 떨면서 공포에 질린 얼굴로 이브를 올려다보았다.

“또 퉁퉁 붓겠다. 마법사 부를까? 아니면 의사 선생님 불러서, 젖꼭지 고쳐달라고 할까?”

“으흐, 흐윽, 흣……! 시, 싫, 싫어…….”

“가슴에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하지? 아픈 거 좋아하는 변태 새끼라서 주인님이 뚫어주셨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흐응, 읏, 아! 싫……!”

“가슴에 여자 귀걸이 달아놓고 좋아하는 변태 새끼라서, 여자 속옷 입고 발로 밟히면 막 자지 세우는 변태 새끼라서 그렇다고 말씀드려야지.”

“시러, 흐, 하아! 아!”

이브의 손가락이 집요하게 볼록 솟은 선단을 툭툭 건들며 상처가 덜 아물어 예민한 살덩어리를 자극했다. 알베리크는 저릿한 통증이 가슴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금세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다리 더 벌려야지. 젖꼭지 고쳐주러 의사 선생님 오시면 스타킹 신고 자지 세우는 거 보여드려야지. 응?”

“흐으, 아파, 그만, 그만……! 아!”

“아파? 힘들어? 더 못 하겠어?”

이브가 살살 속삭이며 귓가에 숨을 훅 불어넣자 알베리크는 헐떡이며 울면서도 허리를 흠칫 떨었다.

“안아줄까?”

이브가 허벅지 안쪽을 슬슬 더듬으며 물었다. 얇은 스타킹 원단 한 겹 너머로 전해지는 손끝 온도가 무척이나 차갑다고 느껴졌다. 알베리크는 힘겹게 숨을 토해내며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한계까지 매질을 견디려 하는 알베리크를 보다 못한 이브는 요즈음 방향을 바꾸어 치욕을 주는 쪽으로 괴롭히는 방법을 바꾸었다. 오늘 강제로 입게 된 여성용 란제리처럼, 그가 싫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모욕적인 것들을 용케도 알아내 시키고는 했다.

놀이가 끝나고 나면 남자는 몸이 아니라 정신이 너덜너덜해지는 것을 느꼈다. 매질을 참는 것보다 다섯 배는 더 피곤하고 힘들었다.

그는 차분한 눈으로 제 목과 손목에 연결된 결박 끈을 풀어내고 있는 이브를 올려다보며,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지독한 「안전어」라고 생각했다.

이브는 단 한 번도 친애를 담은 다정한 스킨십을 하지 않았다. 결국 「안아달라」라는 안전어는 놀이에서 그녀가 절대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단어였다.

주지 않을 것을 제시하며 그리는 여자의 미소는 어찌나 달콤한지. 알베리크는 가슴에 돌덩이가 앉은 것처럼 속이 답답해져 그만 길게 숨을 내뱉고 말았다.

이윽고 정리를 마치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후 체벌실을 나온 두 사람은 알베리크의 침실로 향했다.

알베리크가 몸을 씻고 나오는 동안 제 방에 가서 손을 씻고 상처에 바르는 연고를 챙겨 온 이브는 어쩐지 가라앉은 얼굴로 욕실에서 나오는 남자의 손을 끌고 침대에 앉혀 마른 면포로 머리를 탈탈 말려주었다.

“……지금 뭐 합니까?”

“왜요?”

“……됐습니다.”

알베리크가 빈정거리기를 포기하고 입을 다물자 이브는 남자의 머리를 싹싹 비비고 툭툭 쳐서 물기를 털어낸 후, 알베리크를 그대로 뒤로 잡아당겨 침대에 눕혔다.

“잠……!”

“아까 너무 아파하던데. 덧난 거 아니에요? 곪기라도 했으면 진짜 사람 불러야 할지도 몰라. 애써 뚫은 거 다시 빼야 한다고요.”

“이벨, 이브, 잠깐……!”

“어허. 살짝만 보고 놔줄게. 한 번만 벗어봐.”

“기다려, 기다려요! 이벨린!”

이브는 손을 내저으며 저항하는 남자를, 양 손목을 한 손으로 모아 잡는 것으로 간단히 제압한 후 바스 가운의 앞섶을 훌떡 젖혔다. 이리저리 만져진 바람에 붉게 부어오른 유두는 다행히도 약간 부풀어 오른 것을 제외하면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이브는 알베리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가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무시하며 그 위에 연고를 발랐다. 약이 묻어 질척한 손가락이 닿자마자 알베리크의 몸이 움칫 떨렸다.

한참 싫다며 발버둥을 치던 남자는 결국 몸을 축 늘어트리며 반항을 포기해버렸다. 약을 바르고 그 위에 후후 바람을 분 이브가 다시 앞섶을 여며준 후 아 착하다, 하는 등의 소리를 하며 남자의 머리를 도닥도닥 토닥여주었다.

알베리크의 황당하다는 얼굴이 점차 나른하게 풀렸다. 이브는 결 좋은 푸른 기 도는 은발을 쓰다듬으며 남자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이브의 토닥임을 받던 남자가 결국 한참 만에야 입술을 꾹 깨물고는 누워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 거기서 기다리세요.”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흘러내린 안경을 제대로 고쳐 쓴 후, 알베리크는 드레스룸으로 건너가 나이트 파자마와 가운을 걸친 채 나왔다. 그리고는 이브와 함께 침실과 연결된 서재로 향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장식함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그것을 열어 안에 있던 것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이브는 그의 뒤에서 멀뚱히 알베리크의 기행을 바라보며 지금 뭐 하자는 건가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베리크는 이브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당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저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잘 모르겠습니다.”

“에드워드요?”

“……그분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당신도 알 겁니다.”

알베리크가 뒤를 돌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이브를 곧게 바라보았다. 이브는 그의 손에 들린 것에 집중했다.

“이것은 부르군트의 자유민 신분증입니다. 이건 모레 출발하는 기차표, 이건 열흘 뒤에 펠랑시에로 떠나는 배편입니다. 어디로 가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만약 서쪽으로 간다면 베이셔 영지에서 나이팅게일 서점을 찾으세요. 서점 주인인 헨젤 페이서라는 남자가 출국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겁니다.”

“언제부터 준비한 거예요?”

“……영지에 내려올 때부터 당신을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나보고 지금 도망가라고? 이렇게 갑자기?”

물론 일이 틀어지면 튀어버릴 생각을 한 것은 맞지만, 생각지도 못한 도움에 이브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혹시 자신이 잠결에 잠꼬대로 탈주 계획을 말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가만히 제 손가락 끝을 더듬으며 주저하던 알베리크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분께 고모님의 목걸이를 찾아 몰래 전한 것은 납니다. 그때는 그 목걸이를 왜 원하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만, 아마도 전하께선 처음부터 당신을 알고 계셨겠지요.”

“……아.”

엘베르가 레이디 로잘린의 친자임을 주장하는 증거물은 로잘린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어린 시절 초상화가 담긴 로켓 목걸이였다. 이브는 게임 속에서 보았던 「이브의 몰락」에 남자주인공 모두가 가담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측근이라고는 하나 그분은 제게도 모든 것을 공유하는 분은 아닙니다. 다만 일이 돌아가는 추이를 보며 그분의 의도를 짐작할 뿐이지요.”

“의도요?”

“……처음 제게 말씀하신 것과 다르더군요. 어쩌면 당신이 생각보다 더 큰 일에 휘말리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신분이 몰락하는 정도라면 제 선에서 당신을 감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베리크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추측을 섣불리 입에 담는 대신 이브와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속삭였다.

“가세요. 가능한 한 멀리 가십시오. 부르군트를 넘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바다를 건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예요?”

이브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꼭 제가 살기를 구구히 바라는 사람처럼 굴었다.

“나라고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명백히 충성을 맹세한 분을 배신하는 행위니까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알베리크의 푸른 눈이 울렁이고 있었다. 이브는 남자의 뒷말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다만 당신이, 나는, 당신을.”

남자는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그는 차마 목 끝까지 차오른 것을 뱉어낼 수 없었다. 알베리크는 울컥 올라온 감정을 토해내는 대신 목 뒤로 삼켰다. 그는 혀끝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내가 염치없는 말을 하게 두지 마십시오. 당신이 비웃지 않아도 그럴 주제가 못 된다는 것은 나도 압니다.”

두 사람의 입이 다물어졌다.

애절한 고백의 현장에서 이브는 어색해 죽을 것만 같은 감정을 애써 갈무리했다. 저렇게 절절한 얼굴로 네가 좋아서 네가 무사했으면 좋겠어, 하고 말하는데 거기에 대고 왜 안 하던 짓을 하느냐고 물을 정도로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처음부터 잘해줬으면 덧나냐고. 왜 뒤지게 투닥거리다가 갑자기 뒷북치면서 후회하는 서브남주같이 구는 거냐고, 사람 어색하게……!’

지옥의 침묵 가운데에서 이브가 홀로 어색한 심정을 필사적으로 숨긴 채 먹먹한 표정을 꾸며내고 있을 무렵, 닫혀 있는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브는 서둘러 알베리크가 건넨 물건들을 항상 허리에 차고 다니는 아공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들어오세요.”

감정을 빠르게 갈무리한 알베리크가 평소와 같이 서늘한 표정으로 사용인의 출입을 허락했다. 문이 열리자 컨트리하우스의 시종장이 두 사람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후 알베리크에게 편지를 건넸다.

“주인어른께서 보내셨습니다.”

해가 진 이후임에도 사용인이 주인의 공간에 찾아올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을 인지한 알베리크는 편지를 받아 든 후 시종장을 물리고 서재에 장식된 편지 칼을 꺼내 편지를 납봉한 왁스 아래를 베었다.

선 채로 빠르게 편지를 읽어나가던 알베리크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편지를 모두 읽어 내린 그는 초조한 낯빛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왜요?”

“백작님과 백작부인께서 오실 겁니다. 「레이디 로잘린의 친자」와 함께.”

“네?”

“그자가 어찌 알고 두 분이 계신 별장으로 먼저 찾아간 모양입니다. 두 분은 본인들이 초대한 손님의 동행이라고 착각하고 계신 모양이지만요.”

“와……. 머리 좀 썼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라면서 로잘린 고모님의 목걸이를 보여줬다는군요.”

“「그」 목걸이요?”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그 남자는 당신이 어머니의 이름을 더럽혔다며 법정 싸움을 불사하겠다고 화를 냈다고 하는군요. 두 분께서 일단은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자고 달랬다고는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우선 함께 저택으로 돌아온다고 하십니다.”

이브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싶은 마음뿐이었다. 굳이 이 집안에 알박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엘베르는 사기꾼이었지만, 자신 역시 결백하지 않았다. 정말 피가 섞인 사람들도 아니니 적당한 시기에 물러나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빨리 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편지를 보낼 때쯤 출발하신다고 하셨으니 아마도 도착까지 보름은 걸릴 겁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별장에 데리고 간 사용인 수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 인원이 마차를 타고 이동하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요.”

구 귀족들의 돈 지랄이라는 말을 제법 유려하게 돌려 말한 알베리크는 이브가 빨리 저택을 떠나도록 채근했다.

“먼저 연락하진 않겠습니다. 어디로 갈지 제게 말하지 마십시오.”

“괜찮겠어요?”

“……죽이시진 않을 겁니다. 어쨌든 저는 그분께 아직 쓸모가 남은 사람이니.”

알베리크는 몰래 도주를 준비했으면서도 이미 이브의 등을 떠민 이가 저라는 사실을 들킬 거라고 확신하듯 굴었다. 이브는 담담히 말하는 알베리크의 표정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굳이 뭉개고 앉아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그날 새벽 동이 터오기 전 사위가 새카만 그림자에 잠식해 들어간 시간, 어둠을 틈타 이브는 베르묄 저택을 빠져나왔다.

배웅은 없었다. 이브 역시 떠난다는 말 없이 저택을 나왔다. 옥타비아에게서 갈취했던 아공간 주머니 덕에 짐은 아주 단출히 꾸며졌다.

그동안 고민하며 생각해둔 바가 있었던 이브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기차에서 내린 이브는 다른 노동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한번 어깨를 돌리며 구겨졌던 몸을 폈다.

아이보리치고는 탁한 빛의 셔츠와 고동색 바지, 바지와 같은 천으로 만든 헐렁한 조끼와 목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짧게 친 짙은 갈색 머리는 이브를 평범한 강 동쪽 노동자계층의 청년으로 보이게끔 하였다.

물을 들여 어둡게 만든 머리칼 위로 덮어쓴 밝은 회갈색 육각모의 캡을 슬쩍 들었다가 다시 모양을 잡아 쓴 이브는 품속에 챙겨둔 단검의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천천히 움직였다.

이브는 오랜 시간 삼등석 입석에서 다른 노동자들과 뒤엉켜 새벽 기차를 타고 론디니움으로 올라와 중앙역에서 쏟아지는 노동자들의 물결에 섞여 금방 모습을 감추었다.

역에서 나오다가 뉴스보이 캡을 눌러쓴 나이 어린 소년들이 파는 일간지를 발견한 이브가 신문을 하나 산 후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빠른 걸음으로 다리를 건넜다. 이런 행색으로 마차를 타는 것은 오히려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브는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강 동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스트 플루멘의 모두가 걸음을 재촉하는 시간이었다. 짤따랗게 발목이 다 드러날 정도로 낡은 바지를 걸친 채 옆구리에 신문지를 끼고 바쁘게 걷는 이브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공방 거리 중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가장 구석진 블록에 위치한 옥타비아의 마도구상점이었다.

마침 아침이라고 청소를 하고 있던 모양인지 긴 먼지떨이를 들고 선반 위를 털던 옥타비아가 덜컹거리며 열리는 입구 쪽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어머,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이브는 제가 열고 들어온 문을 다시 닫으며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과는 영 동떨어진 말을 주워섬겼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어. 하지만 네가 있어서, 이 장소가 있어서 난 이게 게임이라고 믿었거든. 순진하게 말이야.”

“네?”

작은 목소리였다. 잘 알아듣지 못한 듯 옥타비아가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브는 빠른 걸음으로 옥타비아에게 다가가 대뜸 그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만일 정말 이게 게임이 아니라면, 그 대사들이 단순히 게임 커맨드가 아니라면.’

“넌 도대체 뭐야. 너, 누구야.”

이브가 감정 없는 눈으로 옥타비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제게 쏟아지는 질릴 정도의 살기에도 옥타비아는 별다른 반응 없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다 돌연, 그녀는 어이없을 정도로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일단 안에서 대화할까요?”

옥타비아가 가리킨 곳은 카운터 뒤쪽의, 언제나 옥타비아가 비밀스럽게 가려두고 있던 작업실이었다.

“개수작 부리지 마.”

“아래로 내려가서 다 설명해드릴게요.”

차분히 대답하는 옥타비아를 노려보던 이브는 그녀의 뒤로 돌아가 입을 틀어막고 양 손목을 결박한 채 거칠게 밀어붙였다. 옥타비아는 중심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며 카운터 뒤로 돌아갔다.

아무리 그래도 양손을 쓰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옥타비아가 이브를 돌아보자 이브는 옥타비아의 손목 대신 허리를 휘감고 발로 문을 걷어차 연 후 구멍 안으로 펄쩍 뛰어들었다.

발소리도 내지 않은 채 사람을 안고 바닥으로 뛰어내린 이브는 보기보다 아래가 꽤 깊다는 것을 알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옥타비아의 작업장은 지하실에 마련된 것치고 매우 밝았다. 형광등을 켜둔 것처럼 밝은 실내를 천천히 둘러본 이브의 시선이 곧 한 곳에서 멈추었다.

작업대 곁에 놓인 많은 책장에는 무수한 장서가 꽂혀 있었다. 비교적 최근의 것부터 시작해 제작 시기가 언제일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것까지. 그 정도는 연구에 심취한 마법사라면 일반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왼편에 따로 마련된,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장소로 보이는 제단은 어떻게 보아도 종교의 냄새가 풀풀 풍겼다.

“마법사는 신을 믿지 않는 거 아니었나?”

이브는 제단 가장 높은 곳에 놓인, 오래되어 손때가 묻은 나무 조각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이브는 살면서 저런 형태의 조각상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거짓된 신을 믿지 않는 거지만요. 여신께선 거짓된 신의 신자에게는 권능을 내려주시지 않으니 말이에요.”

이브가 슬쩍 떼어낸 손 사이로 옥타비아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흘러나왔다.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였다. 여신, 거짓된 신, 권능.

이브는 천천히 옥타비아의 입 위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냈다. 그러나 곧 품을 뒤져 단검을 꺼내 들고는 그것을 옥타비아의 목에 겨누었다.

옥타비아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살기와 목덜미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날카로운 날붙이의 감촉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현존하는 마법은 모두 이름이 지워진 여신의 사제들이 쓰던 권능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은 알고 계신가요?”

“……대충.”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우리」는 오랜 시간 철저히 짓밟혔어요. 권력을 가진 자들은 믿음마저 사유화하려 들었죠. 그러나 신에 대한 경애와 숭앙은 짓밟는다고 사라지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에요. 우리는 아래로, 아래로,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갔어요.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을 때까지.”

“그러니까, 네가.”

이브는 옥타비아가 쏟아내듯 말하는 말의 홍수 속에서 두통을 느꼈다. 게임에서 본 적 없던 NPC 캐릭터의 비밀 설정이 마치 폭죽처럼 뻥뻥 터지고 있었다.

“마뉴스 레지나의 종들은 할렘가에 숨어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왔어요. 그리고 가장 나이 어린 딸들에게만 비밀스럽게 신의 말씀을 전했지요. 제 어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의 어머니까지 모두가 여신의 종이었어요.”

“대체 그렇게까지 해서 얻는 게 뭐길래.”

“신께서는 결국 이렇게 기적과 함께 찾아오시니까요. 가장 낮은 곳에 임한 따님이시여.”

“그건.”

이브는 천천히 옥타비아의 목 위에 겨누었던 칼을 거두었다. 목덜미에 닿아오던 서늘한 감각이 사라진 것을 느낀 옥타비아가 이브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후 등을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제게 예언의 말씀이 내려진 것은 당신이 걸음을 하시기 1년도 더 전이었어요. 그날 제게 축복처럼 마르지 않는 지식과 함께 신의 딸에 대한 예언이 내려왔답니다. 신께서는 언제,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두 말씀해주셨어요. 대사를 외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신께서 우리를 굽어살피고 계심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뜻깊은 만남이었지요.”

‘아, 나 도믿맨이랑은 잘 안 맞는데…….’

이브는 옥타비아의 얼굴에서 익숙한 종교인의 향기를 느끼고 시선을 흐렸다.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차마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옥타비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신의 화신을 모시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신의 종들이 누리는 가장 큰 영예요, 영광이에요. 저를 알아보지 못하신다 하더라도 좋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제 정체를 눈치채고 찾아와주실 줄이야. 저는 더 훗날의 일일 거로 생각했거든요.”

“그……. 하, 그래. 내가 성녀고, 네가 여신의 사제라고 치자. 대체 신이 내게 바라는 게 뭐야?”

이브는 딴죽을 걸 마음조차 들지 않아 한숨을 푹 내쉬고는 머리를 짚었다. 옥타비아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이브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존재함이요.”

“그건 또 뭔 헛소리야…….”

“신의 딸은 신과 세계를 잇는 매개예요. 따님이 존재하심으로 신께서는 이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어요.”

‘아 설정 진짜……. 갑자기 분위기 메시아? 장난 까냐? 설마 이래서 게임의 형태로 이브가 「죽었다가 부활한」 거냐고. 아 예수님 엔딩은 많이 오반데.’

“아무튼, 하…… 그, 뭐냐. 말이 다 안 나오네. 그럼 혹시 여신을 만나는 방법 같은 거 알아?”

“수정을 찾으려고 하셨죠?”

“어? 어어. 목걸이 얘긴 안 했던 것 같은데.”

“교회에 있던 것은 가짜예요. 예언을 듣고 미리 바꿔두었습니다. 진짜는 여기 있어요.”

이브는 옥타비아가 제 주머니를 뒤지며 건네는 손바닥 반만 한 투명한 수정을 보며 순간 눈을 의심했다. 줄에 걸려 있지는 않았지만, 이브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제가 찾던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잠깐. 너 이걸 이렇게? 어? 가지고 있었다고?”

“틈을 봐서 슬쩍 전해드릴 생각이었어요. 먼저 알아채시고 찾아와주셔서 제 예상보다 전달이 빨랐지만요.”

“어허, 허허. 허허허. 나 대체 뭐 한 거니? 그럼 그 쌩쑈를 대체 왜 한 거냐고.”

이브는 허무한 얼굴로 영혼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수정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물까지 맞아가며 에드워드를 만났던 과거가 떠올랐다. 삽질했다는 생각에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았다.

옥타비아는 여전히 만면에 신실한 종교인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브의 질문에 답했다.

“수정은 말하자면 당신의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확성기에 불과해요. 진짜 여신을 부르는 도구는 화신인 당신의 혈액이에요.”

“피? 나 참. 종교단체 아니랄까 봐 진짜 갖가지 사이비 짓을 다 시키네.”

이브가 중얼거리는 불경한 단어에도 옥타비아는 마치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을 마무리 지었다.

“수정에 피를 몇 방울 떨어트리는 것으로 의식은 끝난답니다. 신께서 따님의 부름을 듣고 응답을 주실 거예요.”

“어 아무튼. 진짜…… 막판에 이런 큰 비밀을 터트리고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고맙다?”

“가세요. 당신이 알고 있는 곳으로. 이 이야기를 끝내야 하지 않겠어요?”

옥타비아가 건네주는 수정을 받아 든 이브가 손을 찌르는 커팅된 수정의 감촉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이야기의 끝에 뭐가 있는지 넌 알아?”

“글쎄요. 신께서 바란 제 역할은 여기까지이기 때문에.”

“꼭 사라질 것같이 군다?”

“「엔딩」이 찾아오면, 「비밀상점」도 「NPC」도 필요 없어지지요.”

‘컥. 아니, 이렇게 갑자기 메타 발언이 훅 치고 들어오네.’

이브가 예상치 못한 발언에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옥타비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경배하는 자의 애티튜드에 이브는 저도 모르게 몸을 단정히 세워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언젠가 또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당신을 모신 일은 제 일생의 영광이었어요.”

“어어……. 갑자기 이렇게 이별이라니 좀 당황스럽네.”

“이별은 잠시랍니다. 따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저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이브가 떠나기 직전 옥타비아는 아차차, 하는 말과 함께 분홍색 알이 걸린 목걸이를 건넸다. 그간 연구를 거듭했던 칼리스토의 추적 마법을 피할 수 있는 아이템이 드디어 완성되었다며 쥐여 준 그녀는 웃는 얼굴로 이브를 배웅했다.

이브는 얼떨떨한 얼굴로 옥타비아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연이은 작별에도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이 타이밍에 쏟아지는 메타 발언이라니, 이게 진짜 게임이었으면 제작비와 시간문제상 막판에 설정 때려 부은 망겜이라고 쌍욕 먹었겠는데.’

이브는 짧아진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목에 목걸이를 걸어 옷자락 안으로 그것을 숨겼다. 알이 작아 목에 걸어도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어떤 원리로 마법을 피할 수 있는지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능력을 믿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 까짓거. 한번 가보자고. 수십 번도 더 본 엔딩이잖아. 새삼스러울 게 뭐 있어.”

옥타비아가 말한 「알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역시 엔딩을 볼 수 있는, 북부 프로이카령 대삼림 안 어딘가에 있을 폐허가 된 옛 신의 신전뿐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기차 한번 원 없이 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이브는 기차를 타기 위해 센트럴시티의 중앙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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