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캣파이트 (18/22)

17. 캣파이트

알베리크는 티테이블 맞은편에서 어딘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우유를 탄 찻잔을 티스푼으로 휘적휘적 젓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궁에 넣었던 알현을 거절하는 답신을 받은 것이 불쾌했던 모양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살기등등한 얼굴로 저택을 나섰다가 다음 날 몸에 맞지도 않는 옷으로 환복한 채 돌아온 날, 이브는 무슨 생각인지 당당하게 태자궁에 알현 신청을 넣었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녀의 청은 친필도 아닌 기계식 타자기로 타이핑된 편지와 함께 거절당했다.

“이렇게 되면 역시 잠입을…….”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이브에게 알베리크가 말을 걸었다.

“정신 나간 소리 집어치우십시오.”

“이럴 때만 비싼 척 굴고. 완전 비겁한 새끼.”

“당신, 황족 모독죄라는 게 존재한다는 건 압니까? 어떻게 지금껏 당신이 불경죄로 고발당하지 않았는지 신기하군요.”

알베리크는 가슴 언저리에 손을 올려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티켓을 천 위로 더듬었다. 이걸 정말 건네주어도 괜찮은 걸까, 하는 불안감이 치밀어 올라왔으나 명령에 불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내 알베리크는 속이 쓰리다는 얼굴로 재킷 안주머니에서 붉은색 봉투를 하나 꺼냈다. 남자는 테이블 위에 그것을 내려놓고는 이브의 앞으로 쓱 밀어냈다.

“이게 뭔데요?”

“오페라 관람권입니다. 국립예술극단에서 주최하는 극이라고 하더군요.”

이브는 왜 이딴 걸 저에게 주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순순히 그것을 집어 들어 봉투 안을 살폈다. 비싼 재질의 부드러운 종이 위로 금박 장식이 찍힌 티켓을 꺼내 앞뒤로 찬찬히 훑어본 이브는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이번에도 「정부」 루트로 가보시겠다.”

“무슨 의미입니까?”

“댁이 모시는 분이 나랑 밀회를 즐기는 연인 흉내를 내보겠다고 작정했다는 의미예요.”

“…….”

“절대 떳떳한 경로로는 만나주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인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누굴 바보로 알아요? 데이트 신청을 그따위로 오만상을 찌푸리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보나 마나 다른 사람 심부름이겠지.”

에드워드의 초대라는 사실을 어떻게 눈치챘느냐는 물음에 이브는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뀌며 티켓이 구겨지지 않도록 봉투 안에 넣고 그것을 따로 챙겼다.

“아무래도 그 양반이 나름대로 그리고 있는 그림이 있는 모양인데.”

에드워드가 바라는 대로 이끌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브는 티켓에 적힌 날짜와 시간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를 자극할 만한 좋은 방법을 떠올린 이브의 얼굴 위로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알베리크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이브가 짓고 있는 웃음이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아챘다. 보통 저 얼굴을 하는 이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리한 주문을 하고는 했다.

이브가 음험한 흉계를 꾸미고 있구나 하고 짐작한 그는 제게 초대권을 전달하라고 지시한 사내에게 경고의 말을 전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어쩐지 거부감이 불쑥 치밀어 결국 그냥 못 본 척하기로 했다.

알베리크는 근래 들어 계속 저조해 보이던 이브의 기분이 이런 일로나마 조금 풀린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헤네시아 극장은 올해로 110주년을 맞이한 센트럴시티의 명물이었다. 「극은 계속되어야 한다.」라는 극장의 창립자이자 극작가 헤네시아 젠니움의 유지에 따라 전쟁이 한창일 시기에도 공연을 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을 만큼, 브리타니아 공연예술계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거대한 유백색의 석조건물은 물결무늬 기둥이 줄지어 있는 긴 주랑과 건물 안팎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천사상 그리고 지붕 꼭대기에 세워진 일곱 영웅들의 조각상으로 더없이 화려하게 꾸며져 오랜 시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그 아름다움을 칭송받았다.

‘완전 바로크 양식 오페라 하우스 스타일이네.’

이브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허리를 펴 웅장한 고전미를 뽐내고 있는 유백색의 석조건물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곁에서 에스코트하기 위해 팔을 내주고 있던 남자가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사람 사는 데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

“하하.”

이브의 짧은 감상에 남색 머리를 뒤로 길게 늘여 묶은 남자가 가볍게 동의를 표하고는 눈을 접어 웃으며 이브의 팔을 이끌었다.

“가시지요, 레이디.”

모자에 장식된 레이스를 아래로 늘어트려 신부의 베일처럼 얼굴 대부분을 가린 이브는 희끄무레한 레이스 너머로 시선이 꽂히는 것을 느끼며 붉은 연지가 발린 입술의 끝을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제 머리카락 색처럼 빛을 받을 때마다 푸른빛으로 반짝이며 빛나는, 어두운 감청색 프록코트로 몸을 감싼 윌리엄의 모습은 어쩐지 평소 사교계에 얼굴을 비칠 때보다도 훨씬 들뜬 듯 보였다.

남자의 정체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은 자연히 그의 곁에서 에스코트를 받고 있는 이브의 정체를 궁금해했고, 이브는 마치 먹이를 던져주듯 일부러 윌리엄과 몸을 밀착시키며 아주 친밀한 관계의 사람인 척 굴었다.

목 위로 올라오는 하이칼라와 그 아래로 떨어지는 레이스도, 발끝 아래로 치렁치렁 늘어지는 짙은 적포도줏빛 치맛자락도, 허리를 조이기 위해 입은 검은 새틴 코르셋도, 엉덩이를 부풀리기 위해 뒤로 조여 맨 고래 뼈 속치마도 모두 불편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제 마음먹은 대로 움직인다고 믿는 어떤 노란색 머리통을 엿 먹이기 위해서라면 감수할 가치가 있는 불편함이었다. 이브는 틈 없이 몸을 조이고 있는 새틴 재질의 상의 위를 까만 레이스 장갑을 낀 손으로 매만지며 제 존재를 알아차린 남자가 얼마나 구겨진 표정을 지을지 기대했다.

에드워드가 보낸 티켓은 VIP를 위한 박스석이었다. 굳이 정면 자리가 아닌 모서리 위치의 외따로 떨어진 측면 자리를 예매한 남자의 의도가 훤히 보여 이브는 피식 웃었다.

에드워드가 잡은 좌석의 맞은편에 있는 박스석은 이미 누군가 예매한 좌석이었지만 자리의 주인은 대공이 보낸 심부름꾼에게 기꺼이 그 표를 양보했다. 불과 어제저녁의 일이었다.

밝은 금발을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깔끔히 뒤로 넘겨 단장한 에드워드는 극이 시작할 시간이 거의 가까워져 오는데도 제자리에 안내되어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제 자리 건너편에 남녀 두 사람이 안내를 받아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에드워드는 무심히 그 모습을 보아 넘기며 박스석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어쩐지 거슬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남자는 일어서려던 몸을 다시 낮추어 자리에 앉고는 건너편 자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얼굴을 정확히 식별할 수 있을 만한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맞은편 자리에 앉아 제 옆에 있는 여자의 뺨을 만지고 있는 사내가 윌리엄 대공임을 알아챘다.

에드워드는 지체하지 않고 좌석 바깥에 서 있던 수하를 불러들였다. 윌리엄과 함께 온 이가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곧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제 쪽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챈 듯, 대공의 곁에서 남자와 찰싹 달라붙어 있던 정체 모를 여자가 에드워드를 향해 손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극보다 더 재미있는 구경을 준비했군.”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는 여자였다. 티켓을 주면 득달같이 달려와 멱살을 붙잡고 흔들며 화를 낼 거로 생각했지, 이런 식으로 깜찍하게 굴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까운 대공과의 거리감이었다. 모든 반복을 뒤져보아도 이브와 저 남자가 이 시기에 이 정도로 친밀했던 기억은 없었다.

어느덧 천장에서 밝게 빛을 쏘아내던 조명이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극장 안에 한 줄기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며 무대 위를 비추었다.

막이 올랐다.

에드워드는 기꺼운 마음으로 푹신한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오로지 저를 위해 준비된 연극을 관람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밤, 무대에 오른 극은 극작가 헤네시아 젠니움이 헤네시아 극장에서 가장 처음 선보였던 『레이디 펠레시스의 죽음』이었다. 가상의 인물인 펠레시스 백작부인의 장례식으로 시작해 그녀가 죽기 전날부터 천천히 과거의 사건을 되짚어가며 죽음의 원인을 조명하는 치정 신파극이었다.

치정극을 고상하지 못하다고 여기던 사회 풍조에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불꽃에 몸을 던지는 부나방처럼 격정적으로 사랑을 노래하는 연인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레이디 펠레시스의 죽음』을 감상하러 온 젊은 연인들 중 몇몇 이들은 간혹 열정적인 사랑의 노래에 깊이 이입하여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가벼운 스킨십을 나누기도 했다.

“응, 흐으, 아…….”

“쉬이. 누가 듣겠다.”

“누, 읏……! 흐윽, 이브…….”

그렇다고 해서 이처럼 대놓고 성교에 가까운 신체적 접촉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기분 좋아? 잔뜩 젖었네.”

“흐, 읏, 아……. 거기, 으읏.”

윌리엄은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브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녀의 허리를 강한 힘으로 끌어안고 잘게 파드득 몸을 떨었다.

상반신 아래로 드리워진 난간 덕분에 건너편에서는 허리 아래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나, 누군가 바지춤을 풀어 헤쳐 배 위까지 올라붙은 성기를 드러내고 있는 제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공포가 남자의 입 안을 바짝 마르게 만들었다.

이브는 윌리엄의 등 뒤로 한쪽 팔을 둘러 꼭 껴안은 채 다른 손으로는 남자의 다리 사이에 잔뜩 성이 나 힘줄이 도드라진 성기를 쥐고 느긋하게 문질렀다.

어둠 속에서 얼핏 보기에는 그저 과하게 서로를 껴안고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처럼 보일 법한 자세였으나 주의 깊게 살핀다면 이상한 점을 눈치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배덕감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음에도 윌리엄은 그저 이브에게 매달려 그녀가 주는 쾌감에 몸을 맡겼다.

질감이 오돌토돌한 레이스의 미세한 요철이 붉게 달아오른 민감한 성기 끝을 간질였다. 레이스가 씌워진 손가락이 귀두 끝 요도구 위를 힘주어 문지를 때마다 남자의 입술에서 삼키지 못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하, 흑…….”

그러다 도저히 참기 힘들 정도로 성감이 치밀어 오를 때면, 윌리엄은 이브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얇은 베일 속으로 손을 뻗었다. 이브는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고개를 들어 제 얼굴 위로 떨어지는 남자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윌리엄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혀로 휘감아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과 함께 삼켰다. 한참 서로의 입 속을 헤집으며 상대의 숨결을 탐닉하던 혀가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이브는 성기를 쥐고 있지 않은 쪽의 손으로 남자의 잔뜩 열이 올라 새빨개진 눈가 언저리와 뺨 위를 더듬었다.

조명이라고는 무대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가 전부인 어두운 극장 안이었다. 희미한 불빛이 날렵하게 뻗은 코와 길고 풍성한 속눈썹, 아래로 처져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우수에 젖은 눈매에 떨어지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자꾸만 절정 직전 이브의 손가락이 구멍을 틀어막고 강제로 사출을 막는 바람에 성감이 쌓일 대로 쌓인 윌리엄은 결국 눈물까지 고인 눈동자로 마치 허락을 구하듯 애절하게 이브를 바라보았다.

이브는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잔뜩 울상을 짓는 윌리엄의 얼굴을 보며 입가에 길게 호선을 그려 보이고 이내 타액으로 젖은 남자의 입술을 엄지로 문질러 닦아주었다. 남자의 입술이 이브의 연지를 몰래 훔쳐낸 듯 붉게 번져 있었다.

“죽을, 것…… 같아…….”

잔뜩 흥분해 달뜬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간신히 사정감을 참아낸 남자가 떨리는 한숨을 내뱉고는 이브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귀 뒤와 턱선, 뺨 근처에 입술을 대고 지분거렸다.

“힘들어?”

“조금. 그래도…… 읏, 좋아.”

마치 혼잣말을 하듯 연이어 좋아,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브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옷 더럽히면 안 되잖아.”

“흐윽, 응, 윽……. 아…….”

“엄청 쳐다보네.”

“큭, 으흑, 흣.”

주어를 빼고 말했으나 윌리엄은 이브가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듣고는 웃음을 삼켰다. 보지 않아도 불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순간 이브의 손이 구멍을 막은 채 귀두 모양을 따라 둥글게 문질렀다. 남자는 비명처럼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혀를 짓씹어가며 억지로 삼킨 뒤 이브를 안고 있는 손에 더욱 힘주어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슬슬 막 내려갈 것 같은데. 다음 인터미션에 싸게 해줄게.”

“누나, 아…….”

“호칭 제대로 해야지.”

남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이브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울컥 새어 나온 선액을 머금어 축축해진 레이스가 기둥 전체를 쥐고 문지르고 있었다. 빠르지 않은 움직임에 감질이 나서 죽을 것만 같았다.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허리를 잘게 퉁겼고, 그럴 때마다 이브는 기둥을 힘주어 꾹 잡으며 남자의 감각에 쾌감 대신 고통을 안겼다. 그러나 고통마저 이미 쾌락이 된 듯, 윌리엄은 아픔을 토로하는 대신 흥분해 잘게 할딱였다.

“제발, 흐윽, 흐, 제발…….”

“조금만 더 참아. 소리 죽이고.”

이브는 참으라는 말이 무색하게 마치 당장에라도 남자가 사정하기를 바라는 듯 힘주어 성기를 쥐고 문질렀다.

무대 위의 배우들이 소리를 지르듯 노래하며 격렬하게 언쟁하고 있었다. 불협화음처럼 귀를 찌르는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극장의 높은 천장 위까지 타고 올라왔다. 템포는 점점 빨라지고, 숨 가쁜 리듬을 따라 단조 음으로 내지르는 여주인공의 목소리에 발맞추듯 악기의 현을 가로지르는 활의 움직임이 격정적으로 움직였다.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마침내 단말마와 같은 소프라노의 비명과 함께 남자의 잔뜩 억눌린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브는 제 손 안 가득 쏘아진 파정의 흔적을 흘깃 내려다보고는 사정의 여운에 잠겨 잘게 몸을 떨면서도 제게 몸을 기대오는 남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고, 극장 안을 온통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가득 메웠다. 뒤이어 무대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서서히 사그라지고 사방은 온통 무거운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 틈을 타 잽싸게 장갑을 벗은 이브는 드레스 주머니에 넣어왔던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물에 적셔두었던 손수건을 꺼내 질척한 손을 닦아냈다.

이내 막이 내려가고 천장 위의 조명들이 천천히 은은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의복을 단정히 여미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굴었다.

아래층에서는 일반석에 자리 잡은 관객들이 극의 감상을 서로 나누는 듯 약간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아주 차분하고 조용했다. 이브는 빈 가죽 주머니 하나에 질척해진 장갑과 손을 닦았던 손수건을 돌돌 말아 넣고 입구를 꽉 여몄다.

윌리엄은 그것을 받아다 챙긴 후 제 품에서 검정색 실크 장갑을 꺼내 이브의 손에 새로 씌워주었다. 미리 말을 맞춰두기라도 한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아, 손 씻고 싶다.”

“미안해요. 물 가져오라고 할까?”

두 사람은 소곤소곤 속삭이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주위를 살폈다. 분명 좌석에 앉을 때만 해도 근처 박스석은 만석이었다. 그러나 1부가 끝나고 막간 휴식 시간이 되어 다시 주변을 살피자 박스석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하하. 상당히 무리를 하셨나 본데.”

“뭐야, 2층 위쪽부터 죄다 쫓아낸 거야? 저거 완전 미친놈 아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선 이브가 난간 근처까지 가 주위를 돌아보는데, 갑자기 두 사람의 좌석 밖에서 약간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입구 앞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차마 막아서지 못한 듯 소란의 주인공이 새빨간 카펫 위를 저벅저벅 밟으며 좌석 안으로 불쑥 난입했다.

“이런 곳에서 숙부를 뵐 줄은 몰랐습니다.”

“……전하. 기별도 없이 무슨 일이십니까.”

“눈이 마주쳤으니 인사를 드리는 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리 막무가내로 쳐들어오는 게 인사라니. 무례하시군요.”

어딘가 신경질적인 느낌으로 웃은 에드워드는 정색한 얼굴로 대놓고 면박을 주는 윌리엄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브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군, 영애.”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

“초대권을 보낸 것 같은데, 받지 못했나?”

“물론 전해 받기는 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선약이 있어서요.”

그렇게 말한 이브가 보란 듯이 걸음을 옮겨 윌리엄의 곁에 가 섰다. 윌리엄은 이브의 장단에 맞추어 제 쪽으로 오는 이브에게 손을 뻗어 손끝을 가볍게 쥐고는 퍽 다정하게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초대를 거절하는 서신을 보내고 싶어도 황성으로 보내는 연락은 받아주시지 않으셔서요.”

이브는 천연덕스럽게 입맞춤을 받아넘기며 가벼운 태도로 웃어 보였다. 이브는 저와 마주 웃고 있는 에드워드의 눈썹이 슬쩍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는 광대가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이브를 볼 때는 꿀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윌리엄이 게임 속에서나 보았던 것처럼 싸늘한 얼굴로 남자에게 축객령을 건넸다.

“돌아가주십시오. 보시다시피 사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라.”

“하하.”

“정 이 자리가 좋다면 우리가 나가드리지.”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에드워드는 이브의 손을 놓지 않고 있는 젊은 대공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얼어붙을 듯한 눈빛으로 차갑게 웃어 보이며 이브에게 말했다.

“레이디 이벨린. 지금 따라오면 그대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답을 주지.”

“……제가 뭘 궁금해하는지는 알고 계신가요?”

에드워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브는 말없이 의뭉스럽게 웃고 있는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찬 이브가 고개를 돌렸다.

윌리엄은 제 쪽을 바라보는 이브의 의도를 기민하게 눈치채고는 적당히 「대공」 행세를 하며 이브에게 물었다.

“……갈 텐가?”

“미안해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내 기쁨이오.”

이브가 허리를 굽혀 남자의 머리칼을 젖히며 이마와 콧잔등 위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윌리엄 역시 손을 올려 이브의 뺨 언저리를 감싸 쥐고는 떨어지려는 그녀의 입술을 따라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럼 다음에.”

윌리엄은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으나 결국 웃으며 깔끔하게 떨어져나갔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에드워드는 제 쪽으로 다가오는 이브에게 손을 뻗어 에스코트하려는 듯 팔을 내밀었다.

이브는 살갑게 웃던 표정을 말끔하게 지워내고는 심드렁한 얼굴로 에드워드의 오른팔 위에 제 손을 슬쩍 올렸다.

드러내놓고 귀찮아하는 이브의 태도에도 에드워드는 예법서에 본보기로 나올 법한 품위 있는 자세를 유지한 채 그녀를 이끌었다.

짧은 막간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관람석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 밖으로 나섰다. 이브는 한참 극이 상영 중인 시간인지라 텅 비어 있는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를 지나 극장 중앙계단을 내려오면서 이 남자가 무슨 꿍꿍이일지를 고민해보았다.

이브가 유사시를 대비해 긴 치마를 걷어 허벅지에 찬 홀스터에서 권총을 뽑아 드는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으로 돌리고 있을 무렵, 미리 이야기해둔 듯 에드워드는 이브와 함께 마부가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에드워드의 손을 잡고 마차 위에 올라 정방향 좌석에 앉은 이브는 맞은편에 앉아 마부에게 출발을 지시하는 남자에게 물었다.

“어딜 가는 거죠?”

“시간이 늦지 않았나. 정숙한 레이디는 귀가할 시간이지.”

“허.”

이 시간대에 예매표를 끊어 보낸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이브는 얼굴을 가리던 모자를 벗어 앉은 자리 옆에 두고 흐트러진 머리를 슬슬 매만졌다.

“이제 슬슬 말씀해보세요. 뭘 알려주실 수 있는지.”

“전에 성처녀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지. 어째서 성녀의 기록물이 남아 있을 수 있었는지는 알고 있나?”

“그걸 알 수 있었다면 애초에 성녀에 대해 물어보지도 않았겠죠.”

“음. 그렇다면 황실의 가계에 성녀의 피가 섞였다는 것도 모르겠군.”

“……예?”

에드워드는 한순간 얼이 빠진 이브의 얼굴을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바라보았다. 오롯이 제 쪽을 향하는 이브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는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가로등의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있었다.

“신이 정성껏 빚어 만들어낸 피조물에게 홀린 사내가 비단 나뿐만은 아니라는 의미지.”

“무슨 소리이신지…….”

“어쩌면 이 지독히 불쾌한 감정은 선조에게서 유래한 병일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읊조린 남자는 이브가 채 무어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황가의 일원이 된 성처녀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유물이 있다네.”

“그렇습니까.”

“겉보기엔 볼품없어 보이는 골동품 같아 보이더군. 티 없이 맑은 수정이긴 하지만 말이야, 장식이 그렇게 낡아빠져서야 고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순간 이브의 신형이 빠르게 남자에게로 쏘아졌다. 범인의 동체시력으로는 좇을 수도 없을 정도로 날랜 움직임에 에드워드는 억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이브의 손아귀에 목이 꿰여 마차 등받이에 파묻혔다.

“크, 컥!”

“너야?”

남자는 새파란 살기를 줄기줄기 쏟아내는 이브의 얼굴을 보며 목이 졸리는 와중에도 희열에 들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커흑, 컥!”

“개새끼야. 너일 줄 알았어.”

“그, 크흑, 그렇게 쉽게 속내를 드러내면 안 돼, 이브.”

이브는 목을 짓눌리고 있으면서도 작은 소리로 속을 긁는 남자를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대로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다는 듯 손끝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물건 어디 있어?”

“후후, 크, 흑…….”

“네가 대체 나하고 뭘 하고 싶은 건진 모르겠는데.”

“큭, 솔직하게?”

남자는 숨을 쉬기 곤란할 정도로 목을 짓누르는 이브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려 손가락 끝을 하나하나 잡고 힘을 주었다.

애초에 이 자리에서 남자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이브는 이를 갈면서도 에드워드의 목 위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그대야말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내가 뭐?”

이브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힐난의 기색을 읽고 미간을 찌푸렸다. 에드워드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붉어진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나른하게 웃었다.

남자는 제 몸 위에 허리를 굽히고 있던 이브의 허리로 팔을 둘러 바짝 당겨 안았다. 얼결에 에드워드의 무릎 위에 올라탄 모양새가 된 이브가 그의 머리통을 밀어내려 했으나, 그보다 앞서 이브의 목덜미 근처에 얼굴을 묻은 에드워드는 목깃 언저리에서 얼핏 느껴지는 단향목 향기에 부드럽게 웃었다.

“너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라고?”

“…….”

“온몸에서 그 작자 냄새가 이렇게 진동을 하는데?”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내가 누구랑 뭘 하든 그쪽이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내가 그대를 사랑하잖아. 응?”

“이게 대체 뭘 처먹고 이렇게 돌아버린 거야? 네가 날 사랑하면 나는 그냥 아 예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여야 해?”

이브는 인상을 와락 구기고는 처음 의도한 대로 남자의 머리통을 밀어내며 그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에드워드는 제 옆으로 쑥 빠져나가는 이브를 보며 후후, 소리 내 웃더니 품에서 손바닥 반만 한 유리병을 꺼냈다.

이브가 또 이 미친 자가 뭘 하려고 저러나 싶어 가만히 남자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에드워드가 유리병의 뚜껑을 여는 것이 보였다.

안에 든 것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었다. 이브가 그 내용물을 알아챌 수 있었던 이유는, 에드워드가 그녀의 머리 위로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내용물을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유리병 어딘가에 마법식이 새겨져 있었던 듯, 조그만 유리병 안에 담긴 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와 이브의 머리 위를 적셨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살갗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차가운 물이 이브의 머리카락 위를 적시고 떨어졌다. 머리카락 아래로 흐른 물이 뺨을 타고 내려와 어깨와 옷자락 위로 뚝뚝 떨어졌다.

이브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남자의 기행을 그대로 받았다. 에드워드는 싸늘한 얼굴로 제 쪽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달콤하게 웃어 보이며 속삭였다.

“그런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 영애.”

“충고 감사합니다만, 제가 그 충고를 굳이 수용할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깜짝 놀라게 해주려던 의도라면 성공했네. 하지만 이런 감정은 불유쾌하기만 할 뿐이니 앞으로는 지양토록 하게.”

“불쾌하셨다니 대단한 영광입니다.”

“천박하게 굴지 말게. 숙녀라면 항시 정숙하게 행동해야지.”

“지랄, 진짜.”

에드워드는 턱 아래로 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저열한 욕설을 씹어뱉는 이브를,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다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물에 젖어 뺨 위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성녀 이야기는 참일세. 그대가 믿는 것은 차치하고 말이야.”

“목걸이는 어쨌습니까?”

“조만간 다시 연락하지.”

“목걸이 어쨌냐고.”

“그대는 다만 내가 원할 때 나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군.”

“개새끼야.”

이브의 욕지거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마차가 멈추어 섰다. 남자의 어깨너머로 창밖을 힐끗 본 이브는 어느새 마차가 베르묄가의 수도 저택에 도착했음을 알아채고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쓱 쓸어 얼굴 아래로 늘어졌던 젖은 잔머리들을 깔끔하게 뒤로 넘겨버렸다.

마차의 문을 연 마부는 언뜻 스치듯 본 적이 있는 에드워드의 호위 기사였다. 마부 제복으로 변복을 한 채 주인을 모시던 기사는 익숙한 남자 대신 물에 젖은 채로 마차 안에서 폴짝 뛰어내리는 장신의 여성을 보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어주던 풋맨 역시 가문의 아가씨가 물에 젖은 채 치마를 한 움큼 잡아 들어 올리며 발을 쾅쾅 굴러 걸어오는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저택 앞에 인장이 없는 마차가 도착했음을 보고받은 듯 1층으로 내려오던 알베리크는 로비 홀을 가로지르는 이브의 몰골을 보고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뒤따르던 시종장에게 하녀 몇을 일러 목욕물을 준비시키라고 지시를 내린 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극은 즐거웠느냐 물으려 했는데, 딱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군요.”

“처음엔 좀 재미있었는데, 끝은 완전 쓰레기 같았어요.”

“그렇습니까.”

“하도 이를 악물었더니 턱이 다 얼얼하네요. 씻고 뭐 좀 먹고 싶은데, 적당히 알아서 준비 좀 시켜주세요.”

“식사는…….”

“당연히 안 했죠. 시간 보면 알잖아요. 뱃가죽이 등에 붙겠어요.”

가벼운 어조로 툭 내뱉은 이브는 이내 입 안으로 중얼중얼 질 낮은 욕을 웅얼거리며 씩씩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엄청나게 화가 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딱히 안색이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기에 약간 안심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알베리크는 다른 시종을 불러 식당에 기별을 넣고는 이브를 뒤따라 위로 올라갔다.

극장에서의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베리크는 갑작스럽게 짐을 싸 영지로 향했다. 그는 제 부모에게도 편지를 보내 수도를 떠나 아래 지방에 있는 베르묄 가문의 여름 별장에서 시간을 보낼 것을 권유했다.

아직 사교 시즌이었으나 슬슬 꿩 사냥철이었으니 베르묄 부부는 별 의심 없이 알베리크의 권유대로 근교에 숲이 아름답게 우거진 여름 별장으로 향했다.

보호자 없이 미혼의 여성이 수도에 홀로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브는 제 의사와는 무관하게 알베리크의 손에 이끌려 영지의 컨트리하우스로 돌아왔다.

한동안 알베리크는 이리저리 바빠 보였다. 따로 이브를 부르는 일도 없이 온종일 집무실에 처박혀 있다가 갑자기 외출복을 입고 나와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그동안 이브는 어떻게 에드워드에게서 성 유물에 대한 정보를 빼 올 수 있을까 골몰했다. 그러나 딱히 방법이 나오지는 않았다. 빌어먹게도 남자는 너무나 철두철미했다.

이브는 이따금 윌리엄에게 연락을 취하며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좋을지를 홀로 고민했다.

그러면서 루트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이 나라를 떠날까 생각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국경 너머로 가 신분을 바꾸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 위에 앉아 트레이에 놓인 샌드위치를 먹으면서도 이름을 갈아치우고 그간 모은 돈으로 이웃나라에 땅을 사서 농사나 지을까 생각하던 이브는 마침 하녀가 가져다준 신문을 받아 들고 빈 접시를 정리하던 하녀에게 물었다.

“어제 오라버니는 언제 들어오셨지?”

“자정이 다 되어 오셨습니다.”

“공사가 다망하시네.”

느긋하게 찻잔에 담긴 허브티를 후후 불어 한 김 식힌 다음 한 모금 머금으며 신문의 첫 장을 펼쳐 든 이브는 그만 입 안에 있는 것을 풉 뿜어버리고 말았다.

“푸, 컥! 으, 케헥!”

“어머, 아가씨! 괜찮으세요?”

“괜, 콜록! 괜찮, 켁!”

다행히 찻물은 신문에 가로막혀 종이를 조금 적셨을 뿐이었다. 간신히 기침을 삼킨 이브는 물에 젖어 얼룩덜룩해진 신문을 잔뜩 구겨진 얼굴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레이놀드 2황자, 황제 암살 기도? 뭐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신문의 헤드라이트는 분명 의심할 여지 없이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려 했다는 내용의 문구였다. 평범한 서민 가문에서 일어나도 끔찍하다고 여길 법한 사건이었다. 하물며 황가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 세간의 이목이 모일 법도 했다.

“황실이 이걸 신문에 싣게 그냥 내버려뒀다고?”

마치 질 나쁜 농담 같았다. 3류 지라시 주간지도 아니고 정론지 중 하나인 『로열 브라이튼』지에 이렇게 대서특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미리 말을 맞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브는 즉시 하인들에게 구할 수 있는 오늘 자의 신문은 모두 구해 오라고 지시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이브는 제 침대 위에 하인들이 사 온 신문들을 늘어놓았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같이 1면에다 황실에서 일어난 비극을 다루고 있었다.

‘그야 1면감이긴 한데, 신문사들이 황실의 허락 없이는 이 정도로 대범하게 굴 수 없었을 거야. 에드워드 이 미친 새끼.’

한동안 알베리크가 바빠 보인다 싶었다. 이브는 이런 음험한 짓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정도로 열심히 일했겠지, 하며 침착하게 신문 하나하나의 논조를 모두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모든 기사는 제대로 된 정황 제시 없이 그저 이름 모를 「황제의 측근」이나 「의료관계자」의 말을 근거로 들며 황제의 둘째 아들이 제대로 된 봉지를 내리지 않으려 하는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독을 먹였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궁성의 민원관리 행정처 담당자는 이 같은 일은 사실무근이라고 답변했으나 이미 전날 정무회의에 황제 프레데리크 3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으며……라니, 말만 들어보면 황실은 사건을 묻기 위해 모르쇠로 일관하는데 시민의 알 권리를 주창하는 기자들이 몸을 던져가며 진실을 파헤치는 것처럼 보이네.’

이브는 방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자정에 들어왔다고 했으니 알베리크도 슬슬 일어나 활동할 시간이었다. 이브는 별다른 치장 없이 가벼운 베이지색 모슬린 드레스만을 걸친 채 하녀도 대동하지 않고 알베리크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 막 씻고 나온 듯 하인의 시중을 받아 면포로 머리를 말리고 있던 알베리크가 방 주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벌컥 열리는 문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놀란 시종에게 다시 머리를 말리라고 지시했다. 이브가 무슨 일로 이렇게 들이닥쳤는지 짐작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글쎄요. 당신이 왜 그걸 알아야 합니까?”

“당연히 알아야죠. 일 잘못되면 오라버니만 죽는 게 아니잖아요.”

이브는 알베리크의 서늘한 태도에 픽 웃으며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의 대화가 평범한 대화는 아니라고 판단한 듯 알베리크의 머리를 말리고 있던 사내종의 손이 조금씩 떨렸다.

“……나가서 응접실에 티테이블을 준비시키십시오.”

시종은 완곡한 축객령에 급히 허리를 숙이고는 알베리크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엄청 심약한 사람을 시종으로 쓰네요. 불쌍하게.”

“……겁이 많은 쪽이 다루기 편합니다. 어차피 중요한 일에 쓰이는 사람도 아니고.”

이브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알베리크가 앉은 자리 곁에 놓여 있는 마른 면포를 하나 들어 남자의 긴 머리카락 위를 덮었다.

“그동안 엄청 바빠 보이더니, 이런 작당들을 하고 있었어요?”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암살 기도는 당연히 날조일 테고. 황제는 어떻게 됐어요? 완전히 보냈어요?”

“발고하면 더 볼 것도 없이 불경죄로 처벌될 만한 발언이군요.”

“너도 그렇고 에드워드도 그렇고, 왜 다들 묻는 말에 한 번에 대답을 안 할까? 사람 인내심 테스트하는 것도 아니고.”

이브는 과장된 태도로 한숨을 푹 내쉬며 마른 면포로 알베리크의 긴 머리를 툭툭 토닥이며 물기를 말렸다. 얼핏 다정한 남매간의 모습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알베리크는 얼핏 목덜미에 스치는 이브의 손이 마치 칼날이라도 되는 듯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말했죠? 눈치껏 굴라고. 예쁨 받고 싶으면 잘 생각해서 처신해요.”

“…….”

“볼 거라곤 예쁘장한 얼굴뿐인데, 상하지 않게 관리 잘하고요. 눈 밑이 다 까매졌네.”

이브의 손가락 끝이 남자의 눈가 근처에 작게 찍힌 점을 툭 건드렸다. 이브는 딱딱하게 굳은 알베리크의 표정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본 후 뺨 언저리를 슬쩍 쓰다듬고 그의 방 밖으로 나왔다.

적당히 알베리크를 찔러보고 나온 이브는 도로 제 방으로 들어가 근처에 듣는 귀가 없음을 살핀 후에 윌리엄과 연결된 양방향 통신구를 꺼내 들었다.

지정된 번호를 입력하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통신구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통화 가능해?”

―음. 신문 봤구나.

“너도 알고 있었어?”

―이제 알아보고 있었어. 선배 내려가고 나서 나도 바로 영지로 올라왔거든.

“뒷배도 없이 신문사들이 단체로 미쳐 날뛸 리도 없고. 무슨 일이야?”

―짐작하고 있겠지만, 완전히 날조지. 황제는 이미 그제 밤부터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반역에 대한 증거가 줄줄 쏟아졌다는데. 엘리자베스 비까지 엮여서 구류 중이고. 내달 안으로 재판이 열릴 거라는데 아마 제대로 된 재판은 아닐 거야. 다들 입 맞춰놓고 졸속으로 처리해버릴 거라고 봐야지.

“미친놈들……. 너는 괜찮아?”

―나야 둘째랑은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낌새가 안 좋아서 미리 영지로 올라와 문 닫고 있었어. 선배 쪽도 그래서 간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한 윌리엄은 재판이 열리는 대로 다시 수도로 사람을 보내 일이 흘러가는 추이를 봐주겠다고 약속했다. 윌리엄과 몸조심하라는 인사를 나눈 이브는 통화를 종료한 후 골치가 다 아프다는 얼굴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자기가 당한 방법으로 보내버리다니. 성격이 더럽다, 더럽다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더러울 줄은 몰랐지.’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황제 시해 미수범으로 몰리는 것은 황태자 에드워드였다. 그것도 프레데리크 3세 본인의 자작극이었다.

광폭한 폭군처럼 굴며 기회를 엿보던 황제는 황후 사후 본격적으로 제 피를 이은 적장자를 자리에서 밀어내려 갖은 수를 썼다. 애당초 그녀와 한 약속은 그녀의 태에서 본 사내아이를 「황태자」로 삼는 것까지였으니.

그러나 에드워드는 어린 나이일 때부터 사람을 쓰는 수완이 대단했을 뿐 아니라 정통성과 든든한 외척을 가지고 있었다. 에드워드를 깎아내려 폐태자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자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황제는 자신의 목숨마저 담보 삼아 장자를 찍어내기로 마음먹었다.

에드워드는 독을 마신 당사자가 직접 지목한 범인이었다. 만들어진 증거와 증인들 사이에서 그는 조용히 짓지 않은 죄를 시인했다. 에드워드의 루트에서 몇 번이고 읽었던 스크립트였다. 이브가 그의 마지막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엔딩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니 시기 역시 원래 사건이 일어나는 것보다 몇 해는 일렀다.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잖아. 능구렁이 캐릭터면서도 뭘 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죽여라 하고 목을 내놓는 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야 했었지만, 그냥 개발비 부족한 게임업계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용두사미 엔딩이라고 생각했지.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갑자기 다 죽여 모드로 바뀐 거냐고?’

곧 이브는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과거의 기억에 흠칫 놀랐다.

‘황후의 자리가 어쩌고 했었지. 이 새끼, 설마 진심인가……?’

추측이 사실이라면 남자의 모든 행동은 끔찍할 정도로 일방적인 집착에서 기인한다는 의미였다. 잠시 침묵하던 이브는 진지하게 부르군트로 출국할 방법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세드릭은 통신구의 전원을 누르고는 새카만 오버코트의 이너포켓에 통신구를 집어넣는 윌리엄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시는 모습, 잘 보았습니다.”

“하하. 뭘 또 그렇게까지 칭찬을 하고 그러나.”

“거, 혹시나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정보 조사는 무조건 아랫사람을 시키는 게 버릇이 된 사람이야. 직접 알아볼 리가 없지. 들킨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아닐 테고. 뭐가 문제지?”

천연덕스럽게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 제 주인을 보며 세드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해 전, 큰 병을 앓았던 사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 깨어났다.

언제나 우울한 얼굴로 운명을 저주하며 그림자 아래서 살아가길 선택한 사내는 열병에 녹아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낯선 이는 침실의 집기를 부수고 저를 만류하는 이들을 집어 던지며 으르렁댔다. 기어코 누군가를 찔러 피를 보고야 말 것 같은 새파랗게 날이 선 날붙이 같은 눈동자를, 세드릭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세드릭이 황제의 밀서를 받고 북부의 프로이카령으로 향한 지 올해로 딱 10년째였다. 젊다 못해 어린 대공은 뼈가 덜 여문 소년시절부터 말수가 적고 음침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과의 교류 없이 저택에 처박혀 홀로 라이플을 만지는 데에 취미를 붙인 그 사내는 감시를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대상이었지만 썩 정이 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 고작 단 두 해 만에 저택의 사람들을 휘어잡아 굴복시킬 수 있을 만한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길들지 않았던 짐승처럼 굴던 사내가 안정을 되찾고 영 어색한 옷을 입은 사람처럼 굴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는 어림잡아 기십 명의 의사와 마법사가 대공저를 찾았다. 그중 절반은 기억상실이라는 진단을, 나머지 절반은 정신분열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아주 간혹 악마나 유령 같은 초자연적 존재를 원인으로 짚었던 돌팔이들도 있기야 했으나, 그런 자들은 이후 입을 함부로 놀린 죗값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의외롭게도 세드릭은 극소수의 돌팔이들이 내놓은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세드릭은 남자가 발작을 일으키며 「나는 윌리엄이 아니야.」 하고 수십 수백 번을 외친, 기원을 모를 언어를 잊지 않았다.

「그자」는 스스로 말한 대로 윌리엄은 물론이고 이 세상 그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 온 존재였다. 간혹 그 남자가 읊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언어를 한 번이라도 들어보았다면 누구라도 세드릭의 판단에 동조할 터였다.

그러나 그는 윌리엄의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숙주의 알맹이를 잡아먹고 껍데기를 빼앗은 악마나, 수백 년 전 프로이카의 대삼림에서 처형당한 살인자의 영혼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짐승처럼 굴던 사내는 곧 어수룩하고 순진한 청년처럼 행동하더니, 이윽고 윌리엄의 껍데기를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윌리엄을 「대공」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세드릭과 감시자들이 사내에게 쏟아부은 지식들은 「그자」가 손쉽게 사람들을 손에 쥐고 흔들 무기가 되었다.

언제든지 상대의 급소를 노릴 준비가 되어 있는 도살자의 영혼을 가지고서야 마침내 프로이카의 공작 「윌리엄 휴 랭커스터」는 완성품이 되었다. 영지의 모두가 사납고 냉철한, 칼날과 같이 예리하게 벼려진 사내에게 매료되었다.

모두가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손에 피를 묻히고 거짓과 위선을 입에 올리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자야말로 진정한 북부의 주인이라고 믿었다. 이 얼마나 「랭커스터」의 이름과 어울리는 사내인가.

세드릭이 제가 모시는 주인에게 프레데리크 3세의 밀서를 전달하기 시작한 지는 반년도 더 넘었다. 그 역시 이 피비린내 풍기는 사내에게 빠져든 지 오래였다.

“중요한 분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중요해. 중요하니까 그딴 광대 짓까지 한 것 아니겠어.”

“……예. 알겠습니다.”

세드릭은 하려던 말을 꿀떡 삼켰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시종이 주인의 걸음을 알렸다.

“전하께서 드십니다.”

윌리엄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접실로 들어선 에드워드가 자리에 서서 고개를 까딱이는 윌리엄을 보며 아름다운 얼굴을 움직여 부드럽게 미소를 보였다.

“손님을 오래 기다리시게 해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바쁘시단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서로 공대를 하며 빙글 웃어 보이던 두 남성은 자리에 앉아 각자의 찻잔을 받고 시중을 들던 시종과 측근들을 모두 물린 후에야 다시금 입을 뗐다.

“수완이 대단하더군요. 약간 돕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 빠를 줄 몰랐는데.”

“별말씀을. 다 숙부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그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직 숨은 붙어 있습니다만 아마도 이제 곧.”

에드워드의 말을 듣고서야 윌리엄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훈훈한 김과 함께 올라오는 향을 맡았다. 만족스럽게 웃은 남자는 곁에 두었던 서류 뭉치들을 들어 응접실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에드워드는 팔을 뻗어 서류를 제 쪽으로 가지고 와 한 장씩 팔랑팔랑 넘기며 훑었다. 종이의 마지막 장까지 모두 살펴본 후에야 에드워드는 고개를 들고 가볍게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서로의 뜻이 일치하니 일이 빨라져 좋기는 했습니다만. 어쩐 연유로 프레데리크 3세의 목을 원하신 것인지 여쭈어도 됩니까?”

“그건 태자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에드워드는 제 몫의 찻잔을 들었다. 찻물로 가볍게 입술만 적신 그는 본격적으로 칼을 벼리기 시작했다.

“그런 자리에 다 오시고, 솔직히 놀랐습니다. 그녀도 숙부께서 저와 뜻을 함께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글쎄.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시든지. 아, 레이디 이벨린은 전하를 지독하게 싫어하니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하하. 주인 만난 개처럼 구시는 모습이 퍽 재미있긴 했지만, 황실의 일원으로서 체통을 잃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적나라한 단어에도 흥분하는 기색 없이 조용히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머금어 삼킨 윌리엄이 이내 안면 가득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차분하게 에드워드의 말을 받아쳤다.

“그 여자 바짓가랑이 붙들고 구질구질하게 구는 게 누군데 개가 어쩌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군.”

“어차피 당신도 그 여자가 데리고 노는 장난감일 뿐이지.”

“그래, 넌 그 장난감조차 될 수 없고 말이야.”

“…….”

“잠깐의 관심이라도 얻어보려고 자꾸 헛수작 부리며 발버둥 치는 꼬락서니가 웃기기는 하지만.”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새파란 눈동자로 이쪽을 노려보면서도 입가에 건 웃음만은 지우지 않고 있는 에드워드를 바라보는 윌리엄의 표정이 일순간 서늘하게 굳었다.

“안 될 것 같으면 꺼져. 귀찮게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싫다는 여자한테 질척대면서 지저분하게 구는 건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가정교육이지?”

“아하하, 대공의 말버릇이 그 정도로 험악할 줄 몰랐습니다. 강 동쪽에 자주 걸음을 하신다더니 교양은 강 아래에 버려두고 건너오신 모양이군요.”

“험악한 게 말버릇만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모쪼록 제가 더는 험하게 굴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두 남자는 서로가 저를 무척 거슬린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얼굴 보는 일은 이걸로 끝냈으면 좋겠군요. 조카님을 알현한 날은 영 입맛이 떨어져서 말입니다.”

“하하, 이런 우연한 일이. 마침 저 역시 최근 식사를 넘기기 어려운 날이 잦던 참입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추후의 연락은 인편이나 서신으로 부탁하지요.”

윌리엄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몸소 응접실의 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세드릭이 그의 뒤를 따르며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길 안내를 하겠다며 따라붙는 시종까지 모두 물리고 보좌관과 둘이서 궁성 복도를 걸었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아 윌리엄의 불퉁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저 여우 새끼, 마음 같아선 한 대 치고 싶은데.”

“쉿쉿……! 아직 태자궁입니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라. 꼭 전해졌으면 좋겠네.”

세드릭은 주위를 슬쩍 돌아보며 주의를 주었다. 윌리엄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느른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준비물은?”

“대기 완료입니다.”

“됐어,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끝났으니 슬슬 올라갈 채비를 하지.”

“아, 그리고 전에 말씀하셨던 건 말입니다.”

로비홀을 빠져나오며 작게 속삭이는 세드릭의 목소리에 윌리엄이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 사기꾼 말입니다.”

“아아. 그래.”

“아무래도 말씀하신 이름은 가명 같습니다. 정보가 너무 적어 탐색이 어렵습니다.”

“흠. 그러면 그때 그 조산사는? 찾았나?”

“흔적을 좇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사람의 손을 탄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정보가 오염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곤란하게 됐군.”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윌리엄의 목소리는 상당히 가벼웠다. 윌리엄이 아주 작은 소리로 명령했다.

“장남이 연루된 증거를 찾아. 분명 그놈 짓일 테니까. 사기꾼 역시 이미 놈의 손에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높지.”

“……곧 제위에 오를 후계자의 뒤를 캐는 것은 위험부담이 상당합니다만.”

“우리 쪽에서 찾지 못했다는 것부터 이상하긴 했지. 속행하게.”

“아니, 이 정도까지 심력을 쓰실 일입니까?”

“음. 좋아하는 사람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잘 못 들었습니다?”

“농일세. 가지.”

세드릭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가 급히 다리를 놀려 윌리엄의 곁으로 바짝 붙었다.

“잠시만요, 전하. 진심이십니까? 약혼식을 준비할까요? 아니지, 일단 청혼서부터 보낼까요?”

“헛소릴 다 하는군. 갑자기 돌아버린 건가?”

“아니, 전하? 전하?”

윌리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세드릭의 다급한 부름을 흘려 넘기고는 궁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에게 너그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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