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더블룹 오 (17/22)

16. 더블룹 오

향유 범벅이 되어 쿨쩍대는 젖은 살의 마찰음이 덩치 큰 사내의 둔부 안쪽에서 난잡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브는 다소 심드렁한 얼굴로 빳빳이 선 페니스를 내려다보았다. 맑은 액이 선단에서 줄줄 새어 나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는 모습은 색정적이기까지 했으나 그녀는 그다지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듯 무덤덤해 보였다.

“큿, 으흐……!”

“질질 싸고 있네. 이 악물고 노려보던 것치곤 상당히 자제심 없는 자지야. 안 그래?”

“읏……. 크, 흐윽……!”

“열심히 참으려고 노력하는 게 가상하긴 한데, 아까부터 계속 할딱할딱 울고 있는 거 알지?”

손목이 구속구에 단단히 잡힌 상태로 다리를 이브의 어깨 위에 걸치고 아래를 훤히 드러낸 사내가 굴욕적이라는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이브의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한번 다쳤던 발목이 퉁퉁 부어 힘없이 꺾여 있었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즐거운 추억을 되살려보자며 이브가 그의 발목을 도로 비틀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때 기분 좋았지? 혹시 그 뒤에 혼자 손가락도 넣어봤니? 어땠어, 기분 좋았어?”

“개, 흑, 개소리를……!”

“지금 후장으로 느끼는 게 누군데 앙탈이야.”

“흐, 우윽…….”

쿡쿡 웃은 이브는 바실리오의 구멍 안에 들어간 손가락을 구부려 긁듯이 찌르며 배 앞쪽을 자극했다. 그의 몸이 파르르 떨며 전율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아닌 척 새침을 떨고 있었으나 남자의 몸은 이전에 배웠던 쾌감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였지? 여기 찔러주면 좋아서 자지러졌잖아.”

“아, 하으! 흣, 그으, 아아……! 그만!”

“얇은 손가락 하나 들어갔을 뿐인데. 완전히 녹진녹진 녹아서는……. 사실 더 기대하고 있는 거 아냐? 전처럼 굵고 단단한 걸로 마구 쑤셔주기를 바라고 있지?”

“으응, 읏……! 기다, 기다려! 그읏, 그만! 아, 아흐, 흐읏……!”

“더는 소리 참을 생각은 없나 보네? 기분 좋아서 마구 앙앙 울고 있잖아. 하하……. 남자의 몸뚱이란, 이렇게 다루기 쉬워서야.”

꾹꾹 안쪽을 후벼 파며 짓눌러오는 손가락의 자극이 몸의 기억을 일깨우며 사내의 감각을 배려 없이 헤집었다. 배 안에서 꿈틀대는 자극에 뇌가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가는 한숨 섞인 신음과 교성을 끝끝내 붙잡을 수가 없었다.

“으흐, 흐윽……! 안, 돼……! 그만, 제발……! 아흐, 흣……!”

“어때? 손가락으로 안쪽 기분 좋은 곳 만져져서 갈 것 같아? 엉덩이 구멍 발씬대고 있는 거 느껴져? 아까부터 허리 마구 흔들고 있잖아. 내 손가락으로 자위라도 하듯이.”

“아니, 아닛……! 흐으, 흐응, 으웃!”

“앞쪽도 만져줬으면 좋겠어? 까딱까딱 움직이고 있네? 다른 사람도 보고 있는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렇게 엉덩이나 흔들어대고 말이야.”

“하, 흐으……! 아으, 아아……! 싫, 아니, 아, 아으!”

돌연 격렬하던 손끝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었다. 기둥 중간에 정액이 틀어막혀진 채 자극이 멈추고 말았다. 남자의 허리가 도달하지 못한 안타까운 쾌감에 움찔움찔 떨리고 있었다.

“수컷이니, 알파니 거들먹대면서 으스대봤자 넌 어차피 엉덩이로 손가락 쑤셔지면 좋아서 발발 떠는 작은 강아지에 불과해. 네 부하들이 알면 얼마나 경멸할까? 응? 공중변소라도 되는 거 아냐? 후장으로 받아먹는 데에 맛 들여서, 아무 막대기나 좋다고 마구 구멍에 넣고 쑤시는 남창이 될지도 모르겠네.”

“흣……! 아, 미친! 다, 닥쳐!”

“어떤 늑대가 먹잇감으로 전락한 네 꼴을 보고 널 따르려고 할까?”

“우으, 흑……! 그만, 아응, 읏, 아아……!”

“하지만 그래도 이게 좋지? 뒷구멍 푹푹 파여서 전립선 마구 문질러지고 자지 빳빳이 서는 거. 이제 그냥 앞만 주물러주는 거로는 갈 수 없을걸?”

킥킥 비웃은 이브의 손가락이 느긋하게 구멍 안을 들락거리며 여유롭게 피스톤질을 하다가 천천히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살집이 있는 짙은 캐러멜색 엉덩이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따라 흔들렸다.

“엉엉 울면서 애원해볼래? 울고불고 매달리면서 싸게 해달라고 빌어봐. 혹시 알아? 구멍 마구 쑤셔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면 내 마음이 좀 약해져서 싸게 해줄지도 모르지.”

“으흐, 큭……. 제발, 그만…….”

“전에 기분 좋았던 거 잊지 않았지? 굵은 장난감으로 배꼽 아래까지 푹푹 쑤셔지던 거. 내벽 안쪽부터 해서 마구 긁히고 장벽 안이 바깥으로 딸려 나올 것 같이 거세게 박히는데도 좆 벌떡 세우고 사정했잖아. 기억나?”

“크, 흐으…….”

“이것 봐. 엉덩이 흔들리는 거. 지금이라도 순순히 이야기하면 기분 좋게 해줄게. 어때?”

바실리오가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절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강경한 태도에 이브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공간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진 끝에 이브의 손에 들린 것은 비밀스러운 회원제 숍에서 솜씨 좋은 장인을 소개받아 특수 주문으로 손에 넣은 장난감이었다.

이브는 바실리오의 다리를 내려놓고 한쪽에 치워두었던 향유 병을 가지고 와 구불구불한 장난감의 두꺼운 부분 위에 듬뿍 붓고 엄지로 슬슬 쓸며 표면에 기름을 고루 발랐다.

상아를 통째로 깎아 만든 우윳빛 장난감은 꼭 그녀의 기억 속 전립선 자극 도구인 아네로스의 모양과 닮아 있었다. 장난감은 둥글게 말린 손잡이 부분마저도 아름다운 꽃이 음각되어 있어 마치 장인이 조각한 장식품처럼 보일 정도였다.

고통에는 한계가 있다. 일정 수준이 지나면 고통도 결국은 무뎌진다. 하지만 쾌락에는 한계가 없었다. 특히나 뒤를 쑤셔 얻는 전립선 자극은 사정을 하지 않고도 극상의 쾌감을 느낄 수 있었기에 체력을 쏙쏙 뽑아 먹으면서도 육체에는 큰 해가 가지 않았다.

질릴 때까지 느끼다 보면 쾌락은 곧 괴로움이 된다. 개미가 신경을 갉아 먹는 간지러운 열락에 빠져, 느끼고 싶지 않다고 오열하며 울부짖어도 뒷구멍을 열어 극점을 달게 만지고 쑤셔주면 결국 손쉽게 느껴버리고 마는 것이 사내의 몸이었다.

파정 직전까지 괴롭히다가 욕망이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에 멈추기를 반복하며 절정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쾌감을 조절해주면 곧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아붙여져 결국엔 함락되고 말 터였다.

이브는 그의 입이 너무 늦지 않게 열리기를 바라며 장난감을 천천히 사내의 비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하, 흐으……! 아, 뭐, 뭐 하는……!”

“쫄기는. 장난감일 뿐이야. 고작해야 손가락 두어 개 정도 굵기라고.”

“무, 무슨, 아……! 흐윽, 읏……!”

“옳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 무네? 엉덩이 힘 줄 때마다 안쪽 꾹꾹 눌려져서 기분 좋지?”

“흐, 하아……! 아, 크흣……. 으응…….”

‘정확한 모양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온종일 고민했는데, 다행히 얼추 비슷하게 기능하는 것 같네.’

이브는 팔을 둘러 오싹오싹 소름이 돋은 바실리오의 등줄기를 손가락으로 덧그리듯 살살 쓰다듬다가 아래로 내려가 둥그런 둔부 위를 슬쩍 매만졌다. 간지럽게 살갗을 훑는 감각에 그의 둔부 근육이 단단히 조여들었다. 그때마다 사내의 입에서는 참지 못하고 토해내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흐, 이, 이런, 아! 아으, 무슨 짓을……!”

“그냥 작은 장난감일 뿐이라니까…….”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킬킬 웃은 이브는 바실리오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가 놓아주었다. 그는 마치 공포에 질린 것처럼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브의 손이 엉덩이 구멍 안에 틀어박힌 장난감의 손잡이 부분을 잡고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구멍 안의 내벽을 구불구불하게 생긴 도톰한 장난감이 마구 비비고 짓이겨댔다. 곧 바실리오는 숫제 울음을 터트리듯 교성을 내질렀다.

“흐윽, 흐……. 하, 안, 안 돼……! 누르, 면……! 으응, 흣……!”

“기분 좋다고? 여기? 이렇게 문질러줘?”

“아하, 핫, 하아……! 살, 살려……! 이상, 이상해, 하윽…….”

이브는 슬쩍 남자의 몸에서 손을 떼고 그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졌다. 바실리오는 몸의 근육이 움찔움찔 움츠러들 때마다 척추 끝부터 전기가 오르는 것 같은 아릿한 쾌감이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몸에 힘을 빼려고 노력해도 아릿한 감각이 자꾸만 저절로 뒤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쾌감이었다.

이브는 슬쩍 주변을 돌아보다 벽에 장식처럼 걸려 있는 길이가 긴 채찍을 발견했다. 집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채찍을 집어 든 이브가 채찍의 손잡이를 쥐고 긴 꼬리를 두어 번 손에 휘감아 핑, 소리가 날 정도로 팽팽히 잡아당겨봤다.

곧 채찍이 이브의 손아래에서 허공을 갈랐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짜악, 하고 살갗을 후려치는 마찰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바실리오의 입에서 고통과 쾌감이 이리저리 뒤얽힌 신음이 새어 나왔다.

피부를 찢어발기는 듯한 통증에 무의식적으로 몸에 힘을 주게 되면 비문 안으로 삽입된 두툼한 장난감의 돌기가 그의 기분 좋은 곳을 자비 없이 쿠욱 쿡 짓눌러왔다.

“흐, 으흑……!”

게다가 한쪽 발목이 분질러져 몸의 무게를 다리 하나로만 버텨야 했다. 이미 한차례 이브에게 두들겨 맞은 데다 채찍질을 당하고, 체력 소모가 심한 드라이 오르가즘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으니 곧 한계일 거라고 이브는 예상했다.

살을 찢는 채찍질이 이어졌다. 한계 없이 내리치는 매질은 말 그대로 고문에 불과했다. 조금씩 바실리오의 몸에 멍과 생채기들이 생겨나더니 급기야 피가 튀기 시작했다.

몸 여기저기에 뱀이 기어간 것처럼 길게 상처를 입었음에도 남자의 성기는 여전히 꼿꼿이 힘이 들어간 상태로 묽은 선액을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감도가 좋은 몸을 타고났는지, 고작해야 한번 개발을 해주었을 뿐인데도 그의 뒷구멍은 뒤를 후비는 자극에서 쉽게 쾌감을 얻었다.

“타고났네, 타고났어.”

길게는 반년을 넘게 길들여야 뒤로 성감을 자극받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몸은 정말 쉬운 편에 속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뒤가 따이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던 이브가 채찍질을 잠시 멈추고는 눈을 까뒤집고 기절하기 직전인 바실리오에게 물었다.

“죽을 것 같지? 힘들어서 슬슬 기절 직전일 텐데.”

“흐, 하아……. 으흣, 흐윽…….”

“네 뇌가 더는 못 하겠다고 거부해도 몸은 뒤를 찌르면 찌르는 대로 쾌감을 느낄 거야. 아파 죽겠는데도 좆은 계속 서 있는 거 보여?”

“읏……. 제발, 그만…….”

“게다가 사정을 하면 끝나는 일반적인 오르가즘과는 메커니즘이 완전히 달라서. 아, 이런 이야기해도 잘 모르려나. 아무튼, 대충 요약하자면 영원히 자지로 싸지도 못하고 쾌락에 절여져 엉엉 울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이야기야.”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바실리오의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브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 무슨 괴물이나 악마 따위를 보는 듯한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꺾였다는 것을 확신한 이브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위로 올라갔다. 그의 뇌 안에 공포와 두려움이 심어진 이상, 사내는 길이 든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될 터였다. 강 동쪽 뒷골목을 호령하던 늑대 수인 우두머리의 말로치고는 퍽 볼품없는 꼬락서니였다.

“네가 내 물건 손댔어? 내 물건 어쨌어?”

“아으, 아……. 몰, 몰라……. 으읏…….”

“윌리엄을 따라갔잖아. 첼셔 지구의 폐교회. 거기서 너희 꼬리를 봤다던데.”

“으, 흐으……. 그건, 그냥 미행이었어. 아, 제발……! 난, 난 정말 아무것도……!”

“구라 치는 거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게 만들어줄 거야. 정말 너 아니야?”

“우읏……. 응, 그만, 제발……. 이제 더는, 못, 못 하겠…… 으읏, 흐으……!”

생리적으로 새어 나온 눈물로 엉망이 된 바실리오의 얼굴을 쳐다보던 이브가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바실리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구멍 안을 잔뜩 메운 구불구불한 모양의 장난감을 쥐고 빙글 돌려 부드럽게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남자의 얼굴에 약한 안도감이 비치기도 잠시, 그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대체 뭘……! 내가 아니라고! 씨발, 모른다고 했잖아!”

“그래, 네가 쓸모없다는 사실은 잘 알겠어.”

그의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얼굴을 코앞에서 지켜본 이브가 즐거운 듯 눈을 휘며 웃었다. 이브의 손에 들린 타원형의 둥그스름한 새알 같은 것이 순식간에 남자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다시 아네로스의 모양을 흉내 내 만든 우윳빛의 장난감이 바실리오의 뒷문을 열었다.

굵은 앞머리가 찔걱찔걱 하는 소리를 내며 젖은 살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자 저도 모르게 움츠러든 근육의 움직임 탓에 나머지 뒷부분은 저절로 이브의 손에서 빠져나가 구멍 안으로 처박혔다.

“싫……! 흐, 히잇, 힉……!”

“별 쓸모도 없는데 지은 죄는 또 엄청 많잖아. 천벌 받는다 생각하고 조금만 더 힘내봐. 응?”

“하으, 아……! 너, 거짓, 거짓말을……!”

“난 네가 솔직히 말한다고 고문을 멈춰주겠다고는 말한 적은 없는데. 보기보다 순진하시네.”

“응, 흐으, 찢어, 죽일 테다!”

“아직 힘이 남아도는가 봐? 어쩔 수 없지.”

이브가 새알 모양 장난감과 함께 꺼낸 작은 컨트롤러를 엄지로 꾹꾹 눌러 자극했다. 곧 바실리오의 몸이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파드득 강하게 경련해대기 시작했다.

“히, 아하악! 아! 흐응, 으흑! 실, 시럿, 아아! 하아, 아악!”

“그래. 날 죽일 때까지 어디 한번 잘 버텨봐.”

완전히 눈이 뒤집혀 숨도 쉬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고 침을 흘려대는 꼴이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그의 배 안에 들어찬 손가락 두 개 굵기의 알약 모양 장난감은 한 해 전, 진동 로터가 가지고 싶어져 옥타비아와 장기간의 논의 끝에 개발에 성공한 무선 로터였다.

“아직 개발 단계라서 진동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장난감이랑 너, 둘 중 누가 먼저 나가떨어질지 기대가 되네.”

질척하게 향유 범벅이 된 장갑을 거꾸로 말아 벗어버리며 이브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로터는 프로토 타입이라 진동이 10분도 채 가지 않아 장시간 가지고 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지금 바실리오의 상태라면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지는 않았다.

“후우. 그럼 잠깐 쉴까?”

장갑을 벗어든 이브가 몸을 빙글 돌리며 등 뒤에 있던 관객에게 말했다. 몸을 돌리기가 무섭게 잔뜩 비웃음을 걸고 있던 입가의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윌리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고문실을 빠져나와 윌리엄에게 손수 손님방까지 안내받은 이브는 사용인의 시중까지 모두 물리고 혼자 샤워를 마쳤다. 몸에 튀었던 핏물이 흐르는 물에 섞여 배수구 아래로 빠져나갔다.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물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으나 이브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현장에서 걸린 유력 용의자는 결백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다음으로 혐의가 짙은 두 번째 용의자 역시 심문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용의자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다.

‘게다가 신분이 깡패라고. 황족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일이 개같이 돌아갔다. 면포를 든 채 물기도 닦지 않고 욕실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이브는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흠칫 정신을 차렸다.

“누구지?”

“나야. 너무 안 나오길래.”

“다 했어. 금방 나가.”

문 너머로 윌리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브는 대충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머리에 면포를 감은 채 욕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 콜록, 아니, 대체.”

“여자 몸 처음 봐? 뭘 그렇게 유난을 떨어.”

이브는 심드렁한 얼굴로 욕실을 빠져나와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검은색 면바지와 부드러운 소재의 튜닉 셔츠를 집어 들어 몸에 걸쳤다. 기성복으로 보이는 셔츠와 바지는 말아 접을 필요 없이 이브의 몸에 얼추 맞았다.

“허리가 좀 크네. 벨트 없어?”

“내 건 클 텐데. 하나 사 오라고 할까?”

“됐어. 질질 흐르진 않으니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이브는 침대 위에 대자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예민하게 벼려진 감각은 차가운 물로 온몸을 적셨음에도 쉬이 누그러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나 구속구 때문인지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잠깐 몸을 움직인 것에 비해 예민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마치 쉬지도 않고 일주일을 꼬박 던전 뺑뺑이에 할애했을 때처럼 짜증이 솟구쳤다.

피곤할 정도로 민감해진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이브는 치밀어 오르는 스트레스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지끈대며 울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이를 갈았다.

“저 개새끼. 죽여버릴 수도 없고.”

“신경 쓰이면 그냥 죽여요.”

“죽여도 괜찮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래. 안 그랬으면 진작에 모가지 땄지.”

무심한 어조로 대꾸하던 이브는 돌연 제 근처 침대에 누군가 올라타는 움직임을 느끼고 눈을 떴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제 위로 올라탄 윌리엄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그녀를 달래듯 속삭였다.

“지금 올라왔지.”

“까불지 말고 가라. 놀아줄 기분 아니니까.”

“힘들잖아요. 내가 도와줄게.”

“귀찮게. 저리 안 꺼져?”

“이제 같이 일하는 사이도 아닌데 굳이 밀어낼 이유가 또 있어?”

이브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남자가 선호였을 시절, 그의 고백을 단칼에 거절한 이브가 이유라고 내건 것이 「사내 연애는 하지 않는다.」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제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제법 납득할 만한 설득에 이브가 슬쩍 말을 꺼냈다.

“……나 내가 넣어.”

“응, 알아요. 혜선 누나가 선배 SM 하는 거 말해줬어.”

“뭐?”

“다들 일단 자빠트리고 보라고 하길래, 공부했다고.”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 아래로 처진 눈꼬리를 화사하게 휜 남자가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이브는 나도 모르게 아우팅을 당했을 줄이야, 역시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구나 하고 생각하고는 이내 제 쪽으로 허리를 숙여 바짝 다가오는 윌리엄의 길고 부드러운 머리채를 한 손 가득 휘감았다. 미처 손에 담기지 못하고 흘러내린 짙은 남색 머리카락 사이로 은은한 비누 향기 같은 것이 배어 나왔다.

“질질 짜도 안 봐줄 건데 괜찮겠어?”

“선배가 주는 건 뭐든 좋아. 울게 해줘요.”

“……아양 떠는 실력이 좀 늘었다?”

“엄청 후회했거든. 동기들 말처럼 한번 들이대보기라도 할 걸 싶어서.”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남자는 이브의 눈 속에서 약한 갈등을 보고는 지체하지 않고 먼저 고개를 숙여 이브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살갗이 짧게 서로 마주 닿았다가 살며시 떨어졌다. 이브는 눈꼬리를 담뿍 휘며 웃는 그의 얼굴에서 별안간 희미한 향수를 느꼈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일단 한 번만 해봐요. 나 진짜 잘할 자신 있어.”

“애교 좀 더 떨어봐. 잘하면 넘어갈 것 같으니까.”

“으음……. 누나, 나 처음이야……?”

“으하하! 이 미친 새끼! 멘트 선정이 왜 그따위야?”

“주인님, 제 미개발 구멍 쑤셔주세요.”

“미쳤나 봐, 이 또라이 새끼!”

“음란한, 큭, 몸이라 죄송합니다.”

이브는 참지 못하고 파하학 웃음을 터트리며 윌리엄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었고, 그 역시 제 얼굴을 덮는 이브의 손등을 겹쳐 잡으며 소리 내 웃어버렸다. 한참 킬킬대며 배를 잡고 웃은 이브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 윌리엄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진짜 생각 있으면 나중에. 지금은 타이밍이 그러네.”

그러자 남자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브의 몸 위에서 내려가 그녀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나저나, 사냥회 때 습격한 건 안 물어봐?”

“그건 쟤 아냐.”

“현장에서 나온 시체가 늑대 수인이었잖아.”

“늑대 수인이 쟤네 따까리들만 있겠냐.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이야. 걸리면 종족 전체가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에 어떻게 그렇게 대놓고 겉으로 보기에 티가 확 나는 수인을 밀어 넣겠어.”

“……늑대 수인이 범인이어야 하기 때문에?”

“아주 일부러 늑대가 범인입네 하고 동네방네 흔적을 남겨놨던데. 그렇게 쇼를 해서 얻을 이익이 대체 뭐가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던 이브가 팔꿈치를 침대에 짚어 머리를 괴고는 윌리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남자는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아보았다.

“너는 네가 아는 거나 좀 털어봐. 황제가 미치지 않았다는 건 어쩌다 알게 된 거야?”

“음. 내가 회까닥하기 전까지는 황제랑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더라고. 대부분은 불태웠지만 서신 같은 게 몇 개 남아 있었는데 그쪽에서 뭔가 권유하고 이쪽에서는 자꾸 거절하고. 뭐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오간 것 같았어. 소문처럼 완전 맛이 갔다면 그런 식으로 오랜 시간 연락을 취하진 않았겠지.”

“허……. 남들 앞에선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굴더니, 호박씨 까는 솜씨가 장난 아닌데.”

“거기다가 요즘 들어 아멜리아 황녀 쪽에서도 한 번씩 사람을 보내고 있고. 물론 만나주지는 않았지만.”

“……영지에 혹시 사병이 있지는 않던?”

“뭐야, 어떻게 알았어?”

“규모는?”

“일개 여단 규모던데. 말은 기사단이라고 하는데 그냥 평범한 기사단은 아닌 것 같더라고. 기사단 단장은 그 검기? 같은 거 쓰는 사람이고.”

수도의 알짜배기 땅에 지어진 으리으리한 저택, 한두 해 만에 키울 수 없는 사병의 규모, 비밀스럽게 주고받는 연락. 이브는 머리를 굴려 퍼즐의 피스를 짜 맞추었다.

“황제가 너를 다음 황제로 만들고 싶었나 보다, 야.”

“……설마.”

‘그러네. 게임상에선 윌리엄이 죽거나 은둔하거나 하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아멜리아를 세운 거였어. 나이도 어린 애를 중앙이랑 거리가 먼 영지로 대공 작위까지 내려서 올려 보낸 것 자체가 그냥 보기 싫어서 치운 게 아니라 정쟁에 말려들지 않게 하려고 그런 거였겠네. 둘째는 큰아들 손으로 죽이고, 첫째는 자기가 죽여서 싹 정리하고 다시 불러들일 속셈이었겠지.’

오랜 시간 마치 그를 없는 사람인 척 대해놓고는 이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뒤를 봐주고 있었다니, 보통 음험한 작자가 아니었다.

“2황자네 외가야 솔직히 누가 황제가 되든 다 외척이 될 테니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테고. 하지만 엘리자베스 비도 합의한 사항인지는 확실하지 않네……. 그래, 아멜리아 황녀가 찾아온다고? 뭐라고 하면서 사람을 보내디?”

“별 이야기는 없었고……. 그냥 차나 한잔하자면서.”

“다음에 또 찾으면 한번 만나봐. 무슨 말 하는지 들어보고 나도 좀 알려줘.”

“알겠어요.”

‘그 집 둘째만 불쌍하게 됐네. 어쩌다 친탁을 해서 아빠 눈 밖에 났을까 몰라.’

머리를 괸 채 다른 곳을 바라보며 새로 접한 정보들을 머리로 정리하고 있던 이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윌리엄이 슬쩍 그녀의 다른 쪽 손을 슬그머니 쥐고 제 입술 쪽으로 끌어와 손가락 끝에 쪽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선배 머리 굴리는 거 죽이게 섹시해.”

“그만해라. 슬슬 느끼해지려고 하니까.”

“옙.”

“그나저나 저택에 마법사도 있어? 목에 찬 것 좀 빼고 싶은데.”

“아. 그러고 보니 저녁도 아직이잖아. 그거 빼고 밥 먹어요, 우리.”

살살 눈을 휘며 웃던 윌리엄이 돌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사람을 부르기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바깥으로 나갔다. 이브는 자꾸 밥, 밥 하면서 식사에 목숨을 거는 남자를 보며 아무리 껍데기가 바뀌어도 알맹이는 여전히 한국인이 맞는구나 싶었다.

이브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서다가 머리를 완전히 말리지 않아 아직도 머리카락이 축축한 것을 알고 혀를 찼다.

욕실을 뒤져 마른 면포를 찾아 머리를 탈탈 털어 물기를 빼던 이브는 곧 응접실 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침실 바닥에 놓인 실내화에 발을 꿰고 응접실로 나갔다.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던 윌리엄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손에 들려 있던 연한 장밋빛 숄을 이브의 어깨에 걸쳐주며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미안. 저택에 여자 속옷은 없더라고.”

이브는 입 안으로 별걸 다 신경 쓴다,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순순히 숄을 받아 앞을 여몄다. 그러면서 어딘가 모르게 엄청나게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는, 갈색 로브를 걸친 마법사에게 슬쩍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알이 큰 안경을 쓰고 칙칙한 적갈색 머리카락을 목옆으로 길게 늘어트려 하나로 땋은 여자가 이브의 목 인사에 엉겁결에 함께 인사를 한 후 이브의 곁에서 그녀에게 치대고 있는 고용주를 못 본 척하며 이브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구속구만 제거하면 될까요?”

“다른 데 다친 덴 없나?”

“괜찮아요. 구속구만 빼주세요.”

그렇게 말한 이브는 윌리엄을 지나쳐 가장 가까운 거리의 소파에 앉았다. 마법사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추측하기를 포기한 듯 이브가 앉은 자리로 가까이 다가왔다.

윌리엄은 이브의 대각선 자리에 앉더니 이내 이브의 목을 살피는 마법사를 마치 감시하듯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 양산형 모델이네요. 이런 건 바깥에 시동어가 적혀 있어서 제거하기 쉽죠.”

“입만 놀리지 말고 빨리 했으면 좋겠는데.”

“아 예…….”

어딘가 신경질적으로 구는 고용주의 가시 돋친 목소리에 여자가 눈을 흐리며 서클을 열고 집중했다. 마법사가 아닌 이들은 알아듣지 못할 시동어가 들려왔다. 이브는 붉게 터져 나온 빛 무리가 사그라질 무렵이 되어서야 목 언저리가 가벼워졌음을 깨달았다.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검사분인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런 걸…….”

“세실, 일하러 온 거 아니었나.”

“아 예…….”

윌리엄은 냉랭한 얼굴로 가볍게 이어지려던 스몰토크를 매서운 태도로 싹둑 잘라버렸다.

‘캐릭터 설정 이럴 때만 지키지 말라고…….’

“그리고 치료를 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전에 침묵의 서약이 가능할까요?”

“어차피 저는 대공 전하께 매인 몸이라 서약은 필요가…….”

“말이 길군.”

“아 예…….”

이브는 갑자기 「북부 대공」 콘셉트에 몰입하고 있는 윌리엄을 슬쩍 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흐린 눈을 하고서 고용주에게 욕을 하지 않기 위해 머리에 힘을 주고 있는 마법사에게 말을 건넸다.

“계약금이 필요하면 따로 낼게요.”

“아닙니다. 계약금이라뇨. 음, 그러면 디테일은 어떻게 붙이실 생각이시죠?”

그녀의 말에 이브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법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침묵의 서약에 집어넣을 조항을 조율해나갔다. 서약 사항이 정리되자 마법사는 능란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이브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마법사 지인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뭐, 그렇죠.”

“그러면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마법사가 앉은 자리에서 자신의 몸 주위에 작은 서클을 열었다. 밝게 타오르는 붉은빛 가운데 그녀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마뉴스 레지나의 충실한 종, 사체르도스 세실 피오나가 이 시간 이후부터 계약자가 원하는 시간까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영원토록 함구할 것을 맹세합니다. 우리의 침묵을 기쁘게 여기시고, 빠른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법사의 기도를 듣는 이브의 표정이 묘해졌다. 언제 들어도 직장 상사에게 결재 처리를 부탁하는 회사원 같은 느낌의 주문이었다. 5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마법사의 서클이 갑작스레 꽃망울을 틔우듯 빛 무리를 흐드러지게 피워내더니 곧 천천히 사그라졌다.

“어머. 이게 왜 이러지?”

“예?”

“원래 마법사의 맹세, 약속, 서약 부류의 마법은 이렇게 금방 수리되는 게 아니거든요. 이상하네…….”

“그, 주문 끝에 빨리 확인해달라는 말은 그래서 넣는 건가요?”

“맞아요. 자연의 마나에게 기원하는 말을 언령의 형태로 집어넣는 거죠. 첨언을 붙이느냐 붙이지 않느냐에 따라 또 성공 여부가 달라지기도 해요.”

“실패하는 때도 있어요?”

“가끔은요. 하지만 대개는 성공하는 편이에요. 아주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이브의 표정이 다시 미묘해졌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의 형태를 한 자연의 마나가 올라오는 서류에 도장을 쾅쾅 찍어 결재 처리를 해주는 듯한 이미지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망상이라고 치부한 이브는 대충 잡담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환자는 「아래층」에 있어요.”

“아래……. 헉.”

마법사는 고문실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듯, 어렵지 않게 이브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자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윌리엄은 저를 바라보는 세실의 불안한 표정을 깔끔히 무시하며 의아한 얼굴로 이브에게 물었다.

“고쳐주게?”

“죽으면 곤란해요.”

“음.”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고문실의 위치까지 알고 있었는지 마법사는 앞장서 걸으며 지하 식자재 창고에 붙어 있는 비밀 문을 열었다.

차가운 철문 앞에 도달한 이브가 문을 열려는 마법사의 움직임을 멈춰 세우고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마법사는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뒤쪽으로 물러섰다.

무거운 철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바실리오는 체력을 바닥까지 소진한 듯 축 늘어져서 조금의 미동도 없이 기절해 있었다.

이브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코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대본 후,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미 오래전에 진동이 멎어 있었는지 내실 안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남자의 상태를 확인한 이브가 다시 밖으로 나가 마법사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밀실에 발을 디딘 순간 세실은 헛숨을 들이키며 놀란 감정을 갈무리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이브는 친절한 음색으로 상냥하게 말해주었다.

“쓰레기 같은 새끼예요. 여자 여럿 울렸죠.”

“확실히 여자 여럿 울릴 만한 게 있기는 하네요…….”

“대충 적당히 얼굴과 몸의 상처들을 치료해주시고…… 아아, 발목은 내버려두세요.”

“빠르게 처치하지 않으면 영구적인 장애가 남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을까요?”

“하하, 목숨만 붙어 있으면 아무래도 좋아요. 시작하세요.”

자비 없는 이브의 말에 세실의 안색이 언뜻 희게 질렸다. 일단 서클을 연 마법사는 치유 마법을 행하면서도 계속 간간히 바실리오의 발목을 흘끔거렸다. 이브가 감정 없는 얼굴로 붉은빛에 휩싸여 서서히 상처를 수복해나가고 있는 바실리오를 지켜보고 있는 그때, 그녀의 곁으로 살짝 다가온 윌리엄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다리는 왜?”

“이 정도 하자는 만들어놔야 무리로 돌아가서도 계속 빌빌거릴 거 아냐. 약한 개체가 됐으니 더 이상 저 남자를 보스로 모시려 드는 놈들은 없을걸.”

“음. 그렇겠지.”

“패밀리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을 쳐야지. 침략전쟁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 내실이 단단한 나라보다는 내전으로 개판 된 나라를 먹는 게 더 쉬운 것처럼. 반쪽짜리 수인인 주제에 혈통을 내세워 보스 자리를 물려받았으니 아마 패밀리 내에서도 불만이 상당했을걸. 젊은 보스의 장애는 트리거일 뿐이야.”

“반쪽이라니?”

“인간 여자와의 혼혈이거든. 아까 봤지? 흥분해서 발딱 세우고서도 노팅은 안 했잖아.”

“노팅이라면……. 개가 교접하면서 부풀리는 그거?”

윌리엄이 가물가물한 기억 속의 지식을 끄집어내자 이브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맞아. 아직까진 자신의 핏줄이 완전하지 않다는 걸 잘 숨기고는 있지만, 쟤한테 불만을 품고 있던 원로들이 그의 문제를 지적하고 넘어지면 머지않아 피바람이 불게 될 거야.”

“한동안은 저들끼리 싸우느라 외부에 신경을 쓸 여력도 없겠군.”

“뭐. 그렇지.”

팔짱을 낀 채 죽은 듯 늘어진 채 천천히 상처를 회복하고 있는 바실리오를 바라보며 이브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대로 내버려두다가 한 며칠 지나서 대충 이스트 플루멘 외곽 지역에 버려두면 늑대들이 알아서 찾아가겠지. 고문은 해도 상관없는데 죽이지는 마. 내가 돌아가고 나서도 중간 중간 들러서 한 번씩 진짜 아무것도 가져간 게 없는지 확인 좀 해주고.”

“……둘째가 아쉬워하겠어. 꽤 긴밀하게 지내는 것 같았는데.”

“어쩌겠어, 자꾸 귀찮게 깔짝거리는데. 일일이 신경 쓸 여유는 없어. 한 번에 박살을 내줘야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깊은 밤이 돌아왔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어둡고 외진 굴다리 아래에 머리에 면포 자루가 씌워진 채 양손과 발이 묶인 남자가 작은 마차에서 내던져졌다. 정신을 잃은 듯 미동도 않는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바깥으로 밀어낸 마차 속의 사람은 길게 지체하지 않고 차분히 마부를 독촉해 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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