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사냥의 밤 (16/22)

15. 사냥의 밤

윌리엄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이브는 확신하게 되었다. 근래 들어 계속 그녀의 뒤를 밟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신중에 신중을 기했음에도 이브는 강을 넘어오면서부터 마차의 뒤에 따라붙은 꼬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비단 이브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부름을 받고 궁성에 다녀온 알베리크 역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누군가 제 뒤를 밟는다며 이브에게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황태자의 기사가 수행하고 있음에도 버젓이 미행한다니, 보통 담력이 아니었다. 혹은 뒷배가 아주 든든한 세력이거나. 이브는 아마도 둘 다일 거라 추측하며 알베리크를 떠보았다.

“누구일 거라고 생각해요?”

“의심 가는 이들이야 많습니다만, 역시 가장 유력한 것은 레이놀드 황자 쪽이겠지요.”

“그렇다는 건 역시 잡아다 족쳐봐야 안다는 건가.”

“……부디 저택 밖에서는 말을 가려 하길 바랍니다.”

“에이, 당연히 밖에서는 안 이러죠.”

예절 교육을 핑계로 사람을 다 물린 알베리크는 아직 밀폐된 공간이 아닌 곳에서 이브에게 복종하는 것이 퍽 어색한 듯, 한 번씩 꽉 닫힌 응접실의 출입구를 바라보고는 했다.

이브는 짙푸른 색으로 염색된 가죽 목갑만을 목에 찬 채 제 발치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새하얀 나신의 알베리크의 턱 언저리를 간질여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가든파티 안 갈래요?”

“예?”

“혹시 마담 헬푸스 알아요? 시집가기 전 이름이 클레어랬나.”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전에 사냥터에서 마주친 레이디 카타리나께서 초대장을 구해다 주셨거든요.”

“……발커레스의 영애와 가까워진 모양이군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깥의 동향에 신경을 팔고 있던 알베리크가 어딘가 묘한 표정을 하고 이브를 올려다보았다. 이브는 그의 태도 변화에도 별말 없이 그저 슬쩍 웃어 보이며 남자의 가는 턱선을 살살 쓰다듬었다.

“듣기론 그 부인 취미가 꽤 고상하다더라고요.”

“당신이 초자연적 현상에 흥미가 있을 줄 몰랐는데 말입니다.”

“뭐,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정도면 한창 점성술 같은 데에 관심 둘 나이 아닌가요? 꽃잎 점이라든가.”

알베리크는 이브의 말을 듣자마자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저보다 나이 많은 남자를 발치에 무릎 꿇려놓고 짐승에게나 채우는 목줄을 채워 개나 고양이를 어르듯 귀여워하는 여자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러나 알베리크는 굳이 그녀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브는 그의 현명한 처사를 칭찬하듯 뺨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아무튼 이번 야외 파티에는 파트너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 같더라고요. 같이 갈 거죠?”

“꼭 나일 필요가 있습니까?”

“하하, 내가 파트너로 데리고 갈 남자가 너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그래요.”

‘공무로 바쁜 카스텔한테 같이 가자고 할 수도 없고, 그런 자리에 대공이나 황태자를 데려가는 건 정말 그냥 정신 나간 어그로짓이고. 날백수나 마찬가지인 얘가 제일 만만하지.’

이브는 속내를 속으로 꿀꺽 삼켰다. 비위를 맞추듯 말한 것과는 달리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고개를 옆으로 까딱, 움직이는 이브를 올려다본 알베리크는 어쩐지 수줍음을 타는 것처럼 뺨 언저리를 붉히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좋으라고 서비스한 건 맞는데, 지나치게 좋아하니까 어쩐지 기분이 좀 거시기하네.’

아무튼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이브는 슬슬 시작할까요? 하고 속삭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 틈엔가 그녀의 손에는 길고 얇은 등나무 회초리가 들려 있었다.

가든파티의 주최자인 클레어 헬푸스는 발커레스의 영애가 소개한 베르묄의 영애를 웃는 낯으로 반겼다.

윤이 흐르는 어두운 녹색 비로드 원단의 이브닝드레스를 제대로 갖춰 입은 레이디는 아무리 보아도 소문처럼 그리 난폭하거나 거칠게 굴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아직 스물 언저리의 나이임에도 짙은 색감의 원단이 어울리는 것이 신기하다는 감상뿐이었다.

제 나이에 어울리는 혈색 도는 붉은 뺨과 장밋빛 입술을 한 영애는 살가운 얼굴로 파티의 고상한 품격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클레어는 능숙한 태도로 주최자의 얼굴에 금칠하는 젊은 숙녀의 수완에 기분이 좋아져 호호 웃으며 그녀를 제 파티의 참관객들에게도 소개해주고 다녔다.

파티의 주최자인 부인이 직접 소개를 해주는 데다 인두로 지져 굽슬굽슬하게 꾸민 머리를, 목을 적당히 가리는 위치에서 말아 모양내어 묶고 드레스의 원단과 꼭 같은 재질의 보닛을 쓴 점잖은 레이디가 상냥하게 웃고 있는데도 그 앞에서 매몰차게 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데리고 온 파트너는 요즘 들어 결혼시장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베르묄의 소백작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베르묄의 레이디나 주최자인 부인을 통해 알베리크 베르묄 공자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 했다.

말하자면, 이벨린 베르묄은 다소 나쁜 편에 속했던 사교계에서의 평판에도 클레어 부인의 가든파티에 꽤나 성공적으로 적응했다는 이야기다.

“와, 사람 엄청 많네. 인사하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쉿. 누가 듣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 인원은 그리 많은 축에 끼지 않습니다.”

이브의 청에 파트너이자 보호자로 함께 야외 파티에 참석하게 된 알베리크가 샴페인 잔으로 입가를 가리며 작게 속삭였다.

남자는 이브의 모습을 슬쩍 훑었다. 허리 뒤로 버슬을 착용해 풍성한 라인으로 떨어지는 주름이 잔뜩 잡힌 드레스와 목 위를 덮는 드레스 위로 살짝 흔들리고 있는 그린 사파이어를 보며 내심 흡족해한 알베리크가 샴페인 잔을 기울여 살짝 입술을 적셨다.

함께 초대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카타리나 영애의 면을 생각해서라도 이번 가든파티에는 「제대로 된」 레이디의 복식을 갖추어야만 했다. 이브는 거지 같은 나라라고 별의별 욕을 하면서도 무척 오랜만에 코르셋을 차고 허리를 조였다.

이브가 치장을 거의 마쳐갈 즈음 드레스룸에 들어온 알베리크는 직접 그녀의 목에 녹색 사파이어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남자는 이브의 목에 걸린 알 굵은 녹색 사파이어를 보며 속으로 스스로의 안목을 칭찬했다.

“그나저나 누굴 찾는 것 같은데, 누굽니까?”

“음, 안 왔더라고요. 신경 쓰지 말아요.”

이브는 송치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도 요령 좋게 버터를 바른 빵을 돌돌 말아 한입에 쑥 집어넣으며 말했다. 저쪽에서 입술 화장이 지워지거나 장갑이 더러워질까 비스킷이나 조금 먹고 마는 몇몇 레이디들의 모습과는 상당히 비교되는 장면이었다.

“코르셋 조금만 조이길 잘했지. 안 그랬으면 온종일 쫄쫄 굶을 뻔했다고요. 진짜 이놈의 코르셋 언젠간 내가 다 불태워 없애버릴 거야.”

한참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온 탓에 어두웠던 안색이 빵 몇 조각이 들어가면서부터 다시 밝게 피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입 안에 빵을 쏙쏙 넣어 빠르게 먹어치운 이브는 알베리크가 건네는 샴페인으로 목을 축인 후에 완전히 쌩쌩해진 얼굴로 말했다.

“자, 그러면 잠깐 꽃 좀 따고 올 테니까 혼자 잘 놀고 있어요.”

“……제발.”

“아이고, 이놈의 입방정.”

끝까지 너스레를 떨며 사라지는 이브의 뒷모습을 탐탁잖다는 듯 지켜보던 알베리크는 클레어 부인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 오는 것을 보고 아직 소개해줄 사람이 더 남아 있던가, 하고 질려 하면서도 조용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한편 시종의 안내를 받아 저택 내 여성용 휴게실에 안내를 받은 이브는 먼저 휴게실로 와서 화장을 고치고 있던 카타리나를 보았다.

거울을 통해 이브와 눈을 마주친 카타리나가 눈을 휘며 웃어 보이더니 몸을 돌려 먼저 말을 걸었다.

“아까는 사람이 많아 제대로 안부도 못 여쭸네요. 그간 별일 없으셨죠?”

“그럼요.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초대장을 받을 수 있도록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그날 그렇게 몸을 던져가며 도와주셨는데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닌걸요.”

“아, 화장 계속하세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이브는 사냥회 사건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타리나 공녀로부터 보내진 편지를 떠올렸다. 알베리크를 지키면서 겸사겸사 그녀의 앞을 함께 막아선 것뿐이었지만 카타리나는 이브의 선행에 꽤 크게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원래부터 무술이나 사냥에 큰 관심이 있었던지 그녀는 이브에게 간단한 호신술을 알려줄 수 없겠느냐는 청을 넌지시 건넬 정도였다. 일반적인 레이디라면 모욕으로 받아들일 법도 했으나 이브는 카타리나가 순수하게 체술에 대한 호기심으로 청한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편지가 몇 번 오가며 두 사람은 제법 가까워졌다. 원래 게임에서는 다른 루트를 통해 가든파티에 참석하게 되지만, 공작가 공녀의 이름을 빌려 파티에 초대받는 것만큼 간편한 방법은 없었기에 이브는 얄팍한 관계를 빌미로 청을 올렸다.

카타리나 영애는 흔쾌히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그녀를 위해 초대장을 받아다 주었다. 큰 호감 없이는 받을 수 없는 호의였기에 정작 요청한 이브조차도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이브는 제 말을 듣고는 웃으며 양해를 구한 후 다시 뺨 위로 얇게 분을 덧바르는 카타리나를 보며 말했다.

“그날 댁에 돌아가신 후 공작 전하와 공자들께서 크게 놀라셨다지요?”

“정말 크게 혼이 났답니다. 호위도 많이 붙지 않은 상태에서 겁도 없이 혼자 돌아다녔다며 엄청 화를 내셨어요. 그래도 영애와 다른 분들의 도움으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아 무사히 넘어갔지만요. 어딘가 생채기라도 났으면 시즌에도 꼼짝없이 영지에만 처박혀 있어야 할 뻔했다니까요.”

부러 과장해서 투정을 부리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이브가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다 큰 레이디가 사냥회를 다니면서 조금 다칠 수도 있지요. 어린아이도 아닌데 모두 너무 과보호하시는군요.”

“제 말이 그 말이거든요! 다들 너무 과하세요.”

그녀의 말을 받아 이브 역시 연극을 하듯 과장된 말투와 목소리로 말했고, 카타리나는 옳다구나 대꾸하며 약간 진심을 담아 씩씩댔다. 깔깔대며 농을 주고받던 이브는 휴게실 바깥의 동향까지 살핀 후 듣는 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분위기를 조금 바꾸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날, 어딘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진 않으셨나요?”

마침 입술의 연지를 바르던 카타리나가 조용히 몸을 돌려 이브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지금부터 나오는 대화가 진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으나 결국 입술을 슬쩍 앙다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실은 다들 격앙된 분위기 같아서 말을 꺼내진 못했지만요.”

“네.”

“어쩐지 사람을 해하려고 습격한 것 같진 않았어요.”

이브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카타리나의 추측은 정확히 그녀가 느낀 바와 같았다. 이브는 천천히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수사가 진행 중이니까요. 아직 괴한들의 목적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니 영애께서도 한동안은 조심하세요.”

“레이디 이벨린도 몸조심하세요.”

그리고는 카타리나가 머뭇거리며 작게 덧붙였다.

“그런데, 제가 들은 소문이 있는데 말이에요.”

“무슨 소문이요?”

“그, 정쟁이 점차 심화하면서 벌어진 일이 아닌가 하는…….”

카타리나는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꼬리를 흐렸다. 이브는 손을 내저어 그녀의 말을 저지했다. 아무리 그래도 밖에서 이런 주제로 말을 꺼내는 것은 위험했다.

카타리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글쎄요. 수사가 진행되면 곧 꼬리가 밟히겠지요. 그나저나 요즘 사건 조사 때문인지 오라버니께서 궁성에 왕래가 잦아 걱정이에요. 별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그렇군요. 저희 큰 오라버니께서도 부쩍 황궁에 걸음을 자주 하셔요. 저는 정말 괜찮은데도 말이에요. 남들 눈에 과보호받는 막내딸로 보일까 걱정이네요.”

“소중한 여동생의 일이니 발 벗고 나서실 수밖에요.”

“게다가 현장에서 죽은 수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지요. 이미 범인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 셈이네요.”

“늑대 수인이었다고 들었어요. 듣기로는 수인들이 지내는 구역 전반에 걸쳐 수사가 진행된다고 하는 것 같았어요. 경관님들께서 아주 샅샅이 파헤치고 계시니 수사가 마무리 지어질 날도 머지않았을 테지요.”

“하루빨리 범인들이 밝혀져야 할 텐데요. 무서워서 외출할 수가 있어야지요.”

두 사람은 뒤이어 적당한 말을 주워섬기며 눈짓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나누었음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후 영양가 없는 한담을 조금 더 나눈 후 화장을 마친 카타리나가 먼저 휴게실을 떠났다. 이브는 휴게실 한쪽에 마련된 화장대에 앉아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벌써 저 집 소공작이랑 누가 접촉을 했구나. 누군가 수작질을 벌인 건 맞는 것 같은데. 어느 쪽이냐가 문제군.’

그러던 와중 허벅지 한쪽에서 드르륵 하고 진동이 느껴졌다. 얼마 전 옥타비아에게서 추가로 갈취해 윌리엄과 나누어 가진 통신기가 부르르 떨며 연락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브는 드레스 주머니를 뒤져 통신기기를 꺼내 버튼을 조작했다.

“어.”

그리고 통신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를 들으며 이브의 얼굴이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 용건은 길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새끼들을 한번 조져봐야 할 것 같은데. 아냐, 그건 나 혼자 해. 일단 알겠어. 다시 연락할게.”

이브는 서늘한 음색으로 딱딱하게 답변한 후 다시 버튼을 조작해 통신기의 수신을 종료시켰다.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브가 입술을 힘껏 짓씹었다.

“아무것도 없다고? 말도 안 돼.”

가든파티가 문제가 아니었다. 대체 이 루트는 어디까지 삐걱대며 어긋날 셈인가. 이야기가 점차 수렁으로 빠지고 있었다.

파티에서 돌아온 직후 가볍게 샤워를 마친 이브는 곧바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번에는 바지를 찾는 이브를 보며 저택의 사람들은 으레 그러했듯 그녀가 강 동쪽으로 가는구나 짐작했다.

볼일을 보러 갔다가 돌아온 이브가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채로 갑자기 귀가를 종용하기에, 얼떨떨한 상태로 그녀와 일찍 저택으로 돌아온 알베리크는 셔츠 위에 가볍게 조끼만을 걸친 채 모자를 눌러쓰는 이브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그녀를 붙잡았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다녀와서 설명할게요.”

“뭘 하려고 그런…… 그런 칼을.”

알베리크는 이브가 항시 들고 다니던 롱소드가 아닌, 날 위로 새카만 가죽이 둘둘 말린 마체테를 보며 말했다. 무기에 대해 정통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 칼이 기사들이 쓰는 종류의 무기가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누굴 좀 만나야 해서.”

“대체 누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 좀 바쁘니까 다녀와서 이야기해요.”

딱딱하게 굳어 미약하게 살기를 흘리는 이브의 기세에 눌린 알베리크가 저도 모르게 손을 떼고 한 걸음 주춤 물러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브는 알베리크를 꽤 많이 봐주고 있었던지라 그는 한 번도 이브가 이 정도로 화가 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저를 향한 분노가 아님에도, 순간적으로 남자의 얼굴이 공포로 질렸다.

“……몸조심하시기를.”

알베리크는 이브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살갗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브는 감정 없는 냉랭한 눈으로 희게 질린 남자의 얼굴을 힐긋 보고는 대답 없이 저택 밖으로 나섰다.

마차를 타고 강을 건넌 이브는 강 동쪽에서 다시 마차를 갈아탔다. 잘 정비된 수도나 강 서쪽 지역과는 달리 동쪽 지역은 계획 없이 그때그때 세워진 건물들 때문에 길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서쪽 지역만을 주로 다니는 마부에게 강 동쪽의 길 안내를 맡길 수는 없었다.

이브는 작은 소형 마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나마 한번 대로변 정리가 들어간 공방 거리와 달리 몇 블록 더 떨어진 안쪽 여관과 펍, 규모 작은 커피 하우스들이 있는 구역은 혼잡하기 짝이 없어 초행길인 외부인은 길을 헤매기 십상이었다.

이브 역시 자주 왕래하던 구역 외에는 영 길이 익숙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후 어찌어찌 기억을 더듬어 주변을 빙빙 맴돌던 이브는 겨우 눈에 익은 간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전 기억 속의 펍과는 다르게 위층 여관 건물의 창문은 모두 불이 꺼져 어두컴컴했고, 펍의 입구에는 덩치가 산만한 사내 둘이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비켜.”

짧게 명령조로 툭 내뱉는 이브의 말에 험상궂은 남자 둘이 잠깐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혀를 한번 차고 문 앞에서 두어 걸음 좌우로 떨어졌다. 이브는 그들을 스쳐 지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펍 안은 흉험하게 생긴 수인들로 가득했다. 이미 이브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 모든 것이 완벽히 갖추어져 있었다.

게다가 마치 일부러 마련해둔 무대처럼 그들의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만이 앉아 있는 사람 없이 비워져 있었다. 그녀는 그곳이 자신을 위한 특별석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짐승이 목을 울리듯 웃은 이브는 곧 긴장감 없이 휘파람을 휘휘 불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작게 모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다×베이더의 등장을 알리는 「임페리얼 마치」였다. 당연히 이 공간 안 그 누구도 노랫가락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대접이 형편없네. 맥주라도 내와야 하는 거 아닌가?”

오래 묵은 목제 테이블 앞에 앉은 이브가 턱을 괸 채 느긋한 목소리로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을 읊었다. 테이블까지 걸어오며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시두스의 젊은 두목은 이 장소에 없는 듯 보였다.

“아, 이 집 맥주 정말 내 취향이었는데.”

이브는 입맛을 쩝 다시며 천천히 품 안에서 쇠 징이 박힌 반장갑을 꺼내 양손에 끼웠다. 그것이 마치 신호탄이라도 된 듯 펍의 수인들이 조용히 각자 허리춤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슬슬 시작할까? 개 사냥은 오랜만이네.”

“크륵, 아가씨.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막 뱉는구먼.”

“죽이진 마라. 보스께서 쓸 데가 있으신단다.”

“어린 계집 하나 잡는 데 굳이 우리까지 나설 일 있나?”

새카만 털을 가진 털 짐승과 짐승 귀가 달린 인간이 서로 킬킬대며 시시덕댔다. 수인들의 수는 어림잡아 서른이 조금 안 되었다. 얕잡아 보였나 싶은 생각에 이브가 사납게 웃었다.

바야흐로 사냥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난전이 될 거라고 예감한 탓에 오늘 이브가 챙긴 무기는 롱소드가 아닌 마체테였다.

오지를 탐험하는 탐사대들이 나뭇가지나 질긴 덩굴 따위를 자르기 위해 들고 다닌다고 「정글도」라는 별칭이 붙은 그것은 강한 철로 제련하여 강도와 탄성이 대단히 높은, 일종의 공구였다. 물론 살을 도려내고 뼈를 쪼개기에 알맞은 무기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브는 테이블을 등 뒤에 두고 일어서서는 무거운 먹빛의 마체테를 손안에서 한 바퀴 빙글 돌려 잡았다. 대거보다는 훨씬 크고 길었지만 어쨌든 사용하는 방법은 엇비슷했다.

마체테는 베어내는 용도로 쓰이기보다는 찌르고 부수기 위해 드는 무기에 가까웠다. 별다른 기교 없이 순수한 힘만으로 인간의 뼈보다도 단단한 나무를 부수듯 잘라낼 수 있는 묵직한 검이 이브의 손아귀에 틀어 잡혀 요요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개를 사냥하기에 딱 적합한 무기였다.

“덤벼, 이 개새끼들.”

우유를 탄 홍차 빛깔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질끈 묶은,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까 싶은 젊은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호기로운 단어였다. 그녀의 도발에 펍 안 모두가 그르렁대며 흉흉한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순간 오른쪽 뒤편에서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이브는 그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마체테를 휘둘러 제 옆구리를 파고드는 팔뚝을 후려쳤다. 뼈가 박살이 나는 듯한 우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진 비명이 모두의 고막을 뒤흔들었다.

“크악!”

“한 놈씩 덤비면 재미없는데. 계속 꼬리 만 개처럼 눈치만 볼 거야? 한꺼번에 덤벼.”

“씨발, 쳐!”

“죽여!”

동료의 괴로운 신음성이 방아쇠가 된 듯, 이브의 주변에 있던 늑대들이 그녀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덤벼들었다.

이브는 흉흉한 짐승의 살기에 아드레날린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본디 이브는 대련이나 대결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냥꾼이었고, 싸움꾼이었다. 당연히 이브의 검은 살육과 사냥을 할 때 가장 빛났다.

이브가 묵직한 마체테를 크게 휘둘러 목 근처로 쇄도하는 날카로운 단검을 쳐냈다. 검날을 쳐낸 막칼이 물 흐르듯 움직여 무기를 잃은 손목을 강하게 후려쳤다. 어두운 잿빛 털이 북슬북슬하게 난 수인의 손목이 기괴한 방향으로 뒤틀렸다.

“끄아악!”

“제길, 잡아! 무기를 뺏으라고, 씹새들아!”

“죽어어어!”

늑대 머리를 한 수인과 머리 위에 귀가 달린 사내가 동시에 이브의 팔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브는 자세를 낮추고 한 번에 날을 휘둘러 두 사람의 무릎뼈를 으깨듯 베어버렸다. 새빨간 피가 눈앞에서 퍽 터져 나왔다.

“아악!”

“잡아! 잡으라고!”

“고작 계집 하나다!”

“이 쥐새끼 같은 년!”

“크르, 크아아!”

이브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피부로 느끼며 좇았다. 빈틈이 보이면 마체테의 날 끝을 박아 넣어 깨부수었다. 살과 뼈가 한 번에 두 동강이 나 허공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신체 부위가 날아다니고 핏물이 이리저리 튀었다.

눈에 피가 튀지 않게 몸을 뒤로 물린 이브가 뒤쪽에서 짓쳐들어오는 살기에 허리를 숙였다. 이브를 노리고 들어오던 길이가 긴 검의 날이 이브의 앞으로 달려들던 늑대의 가슴에 처박혔다. 이브는 땅을 짚어 완전히 자세를 낮추고 다리를 휘둘러 뒤에서 파고드는 짐승의 발목을 걸어 넘어트리고는 그대로 튕기듯 일어서며 묵직한 칼날로 늑대의 목뼈를 박살냈다.

쉴 틈은 없었다.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장검과 대거의 날이 이브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브는 뺨에 튄 핏방울을 닦아낼 새도 없이 묵직한 막칼을 휘둘러 날붙이들을 쳐내고, 주먹과 발끝을 상대의 급소에 무자비하게 꽂아 넣었다. 칼날이 번쩍번쩍 빛을 반사시킬 때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끔찍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금방 무력화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여자의 재주가 만만치 않았다. 펍의 한쪽 벽에서 일의 추이를 지켜보던 늑대 수인 하나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펍을 나섰다.

순식간에 서 있는 이들보다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 바닥과 벽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의 몸에 온통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튀어 엉망이었다.

이브는 마체테를 크게 휘둘러 칼날에 맺힌 핏방울을 털어냈다. 난투가 벌어졌던 펍 안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녀를 둘러싼 수인들은 저마다 무기를 들이대고 빈틈을 노리기만 할 뿐, 공격을 시도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이브는 입꼬리를 뒤틀어 웃으며 빈정거렸다.

“보기보다 신중하네, 친구들. 내일 아침까지 그러고 있을래?”

그러나 이브의 도발에도 수인들은 저마다 슬쩍 눈을 마주치며 날붙이를 이브에게 향할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죽은 자들은 그저 이브의 힘을 빼놓기 위해 준비된 어중이떠중이였다. 이브는 이 다섯 마리의 수인들만이 「진짜」라는 것을 빠르게 깨달았다. 그들은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펍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 밥버러지 새끼들. 여자 하나 처리하는 데 이렇게 질질 끌다니.”

“오랜만이네, 바스카. 잘 지냈어?”

“……한 번에 덮쳐. 구속구부터 채운다.”

“하하. 제법 용기가 가상하네. 찾아다닐 수고를 덜어서 나야 기쁘다만.”

바실리오는 이브의 알은체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은 채 품에서 금속 재질의 은색 목갑을 꺼냈다. 이브는 그것이 마법사나 오라를 다루는 검사를 무력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나 구속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동안 그녀가 오라 감응자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 같았다.

곧이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기세가 달라진 늑대들이 서로 연계하여 이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빈틈을 노리고 찔러든 마체테의 날은 두꺼운 손도끼에 의해 가로막히고, 그 순간 옆구리를 향해 날카로운 손톱이 파고들었다. 어지간한 칼보다도 날카로운 손톱을 피해 몸을 뒤로 물리면 뒤에서 쇠몽둥이가 머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둔기를 마체테의 검 면으로 받아쳐 옆으로 흘리면 그녀의 다리를 향해 발이 걸려왔다. 무리 지어 사냥하는 짐승답게 손발이 척척 맞았다.

이브는 얽혀오는 손들을 내치며 눈앞에서 들이쳐 오는 적의 목을 베어 넘기고 고통에 차 비명을 지르는 늑대의 머리통 위로 칼날을 박아 넣었다. 죽은 늑대의 팔을 잡아 그대로 한 바퀴 돌자 시체의 가슴에 불쑥, 검 끝이 툭 삐져나왔다. 동료의 시신을 칼로 후빈 늑대가 주춤하는 사이에 이브는 그대로 시체를 발로 걷어차 그 뒤의 남자까지 한 번에 저 멀리로 날려버렸다.

그 순간, 높이 올려 묶은 머리채 꽁지가 누군가에 의해 잡아당겨졌다. 이브는 팔을 뒤로 휘둘렀으나 마체테의 날이 어딘가에 닿기도 전에 몸이 강하게 당겨져 뒤로 나동그라졌다.

알베리크가 레이디라면 항시 긴 머리를 아름답게 가꿔야 하네, 어쩌네 하며 말리던 잔소리 따위는 그냥 무시하고 미리 머리카락을 자를걸, 하는 후회가 쏟아졌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빨리! 눌러!”

“무기 저리 던져버려! 씨발, 무슨 여자가……!”

“다리! 다리 잡아!”

“제기랄, 가만히 있어!”

그녀가 넘어지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늑대들이 허겁지겁 달려들어 이브의 팔다리를 잡아 바닥에 내리눌러 억류했다. 펄떡펄떡 날뛰는 그녀의 거센 힘에 그들은 인상을 구기며 욕설을 지껄였다.

“날 건들지 말았어야지, 아가씨.”

“큭. 떼로 덤비는 주제에 혓바닥이 기네……!”

“언제까지 여유롭게 나불댈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죽도록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이, 씹……!”

“어쩐지 여자 치고 힘이 좋더라니, 오라 감응자였군. 구속구를 찬 다음에도 날뛸 수 있는지 어디 볼까?”

바실리오가 부하에게 구속구를 던지자 그것을 받아 챈 사내가 곧장 서늘한 쇠붙이를 이브의 목에 채웠다. 이브는 차가운 금속 재질의 목갑이 목 위를 단단히 조이는 것을 느끼며 입꼬리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일반인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뭐?”

“오라 감응자는 뭐 근육에도 오라를 둘러서 괴물 같은 힘을 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수인들은 이브의 목에 구속구가 채워지는 걸 보며 안심한 듯 팔다리를 누르는 손에서 슬쩍 힘을 뺐다. 이브는 사지를 짓누르는 힘이 느슨해진 것을 느끼고는 빠르게 다리를 비틀어 발목을 쥐고 있는 손에서 벗어나 허리를 틀며 단숨에 하체 근처에 있던 늑대 머리통을 거세게 걷어찼다.

뻐억!

“끄윽……!”

“젠장, 뭐야!”

“뭐긴 뭐야. 발차기지.”

이브는 그대로 바닥을 걷어차 몸을 한계까지 접은 뒤 왼편에서 그녀의 팔을 잡고 있던 남자의 목에 다리를 걸었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목이 졸린 남자는 황급히 팔을 누르고 있던 손을 떼고 목에 감긴 다리를 떼어내려고 애썼다.

이브는 그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자유로워진 왼손을 땅으로 짚은 채 다리를 휘둘러 허벅지의 힘으로 목이 휘감긴 남자를 저편으로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그 근처에 내던져져 있던, 주인 모를 짧은 대거를 주워 오른팔을 잡고 있던 남자의 팔을 거세게 그었다. 피가 튐과 동시에 그가 짧게 신음성을 흘리며 움츠러들었다.

“이런 씹! 구속구 제대로 채운 거 맞아?”

“마, 맞습니다! 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껏 오라를 써서 싸웠다고 착각하고 있는가 본데, 나 아직 오라 쓴 적 없거든? 그 말인즉슨…….”

재빠르게 몸을 굴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이브는 단검을 한번 위로 던졌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단검을 역수로 잡아챈 후 자세를 낮추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니들은 이제 뒈졌다고 복창해야 한다는 소리지. 원래 내 전공은 개싸움이거든.”

말을 마치자마자 이브가 나무 의자와 테이블을 잽싸게 밟고 뛰어올랐다. 덩치가 무척 큰, 완전한 늑대의 모습에 가까운 털 짐승이 손톱을 휘둘러 그녀를 막아내려고 했으나 손톱이 채 닿기도 전에 이브의 검날이 먼저 짐승의 털가죽을 훑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늑대의 턱 아래로 피 보라가 터져 나왔다.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간다고 느낀 듯 바실리오의 안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브는 잽싸게 다음 목표물의 주먹질을 팔로 걷어낸 후 사내의 명치를 무릎으로 올려 찍었다.

그러던 와중 펍의 문이 벌컥 열렸다. 바실리오와 남은 늑대 몇몇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뭐야. 나 혼자 한다고 했잖아.”

“화려하게도 해드셨네.”

뒤로 제 수행원 두엇만을 대동한 채 평범한 노동자들이나 입을 법한 후줄근한 셔츠와 바지만을 덜렁 걸친 윌리엄이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온 김에 쟤나 좀 잡아라. 튈 각 세우고 있던데.”

이브의 턱짓을 본 윌리엄이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추레한 행색의, 노동자들이나 쓸법한 육각모를 꾹 눌러쓴 윌리엄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지 못한 바실리오가 쯧 하고 혀를 차며 윌리엄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권투를 배운 것처럼 보이는 몸놀림이었으나, 오랜 시간 그보다 더 매서운 몬스터들을 사냥해오던 전직 헌터에게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법한 움직임이었다. 가볍게 바실리오의 움직임을 제압하고 그를 바닥에 메다꽂은 윌리엄은 순식간에 늑대들의 젊은 두목을 사로잡았다.

“아, 이 개새끼들. 사람 힘 빼게 하네.”

윌리엄은 제 수하들을 시켜 바실리오를 포박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의 보스가 붙잡힌 후에야 살아남은 두엇의 늑대들이 주춤대며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브는 기세가 사그라진 그들을 바라보다가 흘끗 사방을 훑어보았다. 박살이 난 가구의 파편과 시체, 부상자 그리고 핏물로 펍의 내부는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바실리오를 사로잡은 윌리엄의 수행원들은 독기가 빠진 남은 잔당들을 처리했다. 이브는 손을 털며 늑대 수인들의 목에서 핏물이 터져 나오는 장면을 무감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제 쪽으로 다가오는 윌리엄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

“어어. 별거 없데. 이 정돈 껌이지.”

“목에 그건 뭐야?”

“아. 마나 구속구. 나 검기 쓰잖아. 어떻게 알았는지 이 새끼들이 준비를 아주 단단히 해왔더라고. 좀 개목걸이 같지 않냐?”

픽 웃은 이브가 부러 가볍게 농담조로 말하자 어느새 바짝 다가온 윌리엄이 이브의 목 위로 채워진 금속 구속구를 더듬으며 애수에 젖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새끼들 손톱부터 뽑고 시작해야겠네.”

“이 새끼, 급발진 무슨 일이야.”

“우리 집 올래요? 고문실도 있는데. 도구들도 다 빌려줄게.”

“너는 무슨 고문실 빌려준다는 말을 라면 먹고 가라는 대사처럼 쓰냐.”

이브는 어쩐지 제 목을 끈적하게 더듬어오는 윌리엄의 손을 가볍게 쳐내며 고개를 돌렸다. 과하게 가까워 보이는 두 사람을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던 듯 늑대 수인을 모두 베어낸 후에도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수행원들이 보였다.

“일단 저택으로 안내해. 고문은 생각한 게 있으니까.”

주위를 휘적휘적 둘러보던 이브는 한쪽에 처박힌 마체테를 주워 들었다. 무기를 챙긴 이브는 결박을 풀기 위해 꿈틀대고 있는 바실리오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가 강하게 발길질을 해 복부 언저리를 거세게 걷어찼다.

뻐억!

“커헉! 큭!”

“꽤 재미있는 짓을 했더라, 너. 기대해도 좋아.”

“큭. 후회, 할 텐데.”

“아직도 입 놀릴 여유가 있어?”

그때 윌리엄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이브는 들끓는 감정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하며 길게 숨을 뱉었고, 그사이에 남자가 데려온 수행원들이 바실리오를 기절시킨 후 펍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그를 실었다.

“그나저나 오늘 바로 칠 거란 건 어떻게 알고 따라왔대?”

“우리가 한두 해 본 것도 아닌데 그 정도야.”

“구라 치지 마. 저택에 사람 심어놨지?”

윌리엄은 부드럽게 웃고는 이브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끝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이브 역시 추궁하기를 멈추고 순순히 에스코트를 받으며 펍 밖으로 나섰다.

피 냄새가 진동하던 밀폐된 공간을 빠져나오니 상쾌한 공기가 뺨을 간질였다.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던 분노가 조금씩 온도를 낮추며 식어가고 있었다.

이브의 상태는 전투를 마친 각성자의 전형적인 표본처럼 보였다. 한계까지 열린 감각 탓에 사방에서 전해져 오는 정보들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윌리엄은 민감한 상태의 이브에게 심문을 맡겨도 좋을지 고민하면서도 그녀를 마차에 태워 제 저택으로 안내했다.

마차에 오른 이브는 간간이 창밖을 보며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마차는 강 서쪽 지역 중에서도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필레지움 중심부로 막 들어선 참이었다.

수도 저택임에도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3층짜리 대저택은 일반적인 수도 저택 부지 두 개를 합친 것보다도 훨씬 넓은 땅을 차지한 채 우뚝 서 있었다.

마부의 신원을 바로 알아본 듯 별다른 지체 없이 정문이 열리고, 앞마당을 지나 저택 중앙 대문 앞에 다다르고서야 마차가 멈췄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윌리엄의 수행원이 마차의 문을 열어주자 남자가 먼저 내려 이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쭈.”

이브는 픽 비웃음을 내보이고는 기꺼이 윌리엄의 손을 붙잡아 마차 아래로 훌쩍 내려왔다. 저 뒤쪽 짐칸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또 다른 수행원 하나가 어깨에 못 보던 길쭉한 자루를 하나 짊어지고 내렸다.

“식사는 했나?”

사용인들의 시선을 인식한 듯 윌리엄은 편하게 말을 내려놓았다.

“심문부터 준비해주시지요.”

“아직 저녁 식사 전인 것 같던데.”

“……전하.”

윌리엄은 공손한 말투와는 달리 눈에서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냉랭한 이브의 얼굴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한 후 뒤에서 따르던 수행원에게 「짐」을 지하에 가져다 두라고 명령했다.

“가지.”

남자는 어느새 이브의 손을 놓고 허리에 팔을 감아 당겨 안으며 바짝 밀착시켰다. 이브는 웃는 얼굴로 아주 미세하게 입술을 열어 작게 속삭였다.

“끕츠즈 므르.”

그러나 윌리엄은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브는 한 대 칠까 잠시 망설였으나, 오랜만에 본 후배가 거는 장난질을 관대한 마음으로 넘어가주기로 했다.

윌리엄의 안내를 받아 저택의 지하로 내려온 이브는 식자재 창고를 지나면서도 대체 왜 고문실 옆에 음식물을 두는 거냐고 투덜거렸다. 비밀 장치를 건드려 문을 연 윌리엄은 비어 있는 철창 서너 개를 지나 길 끝에 있는 두꺼운 철문을 열었다.

“야, 이건 너무 본격적인데.”

“내 취향은 아니야.”

두 사람은 소곤소곤 속삭이며 철문 너머 횃불이 걸려 있는 고문실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벽에 붙박여 있는 손목 구속구에 양손이 걸린 채 힘없이 바닥으로 늘어진 바실리오였다.

기절한 바실리오를 고문실에 걸어놓고 이런저런 기괴한 형태의 날붙이들을 꺼내 한쪽 테이블에 세팅해두고 있던 윌리엄의 수하가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윌리엄은 적당히 정리하고 이만 나가보라며 축객령을 내렸다.

“마법으로 형광등도 만드는 시대에 횃불? 클래식하네.”

“내 취향 아니라니까.”

고문실 안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에야 이브가 윌리엄의 팔을 제 허리에서 떼어내며 빈정거렸다. 윌리엄은 팔짱을 끼며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그는 이브의 말대로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게 둘 생각인지 한쪽 벽에 기대어 섰다.

입을 다문 이브는 구속구에 손목이 붙들린 채 시체처럼 축 처진 바실리오의 비루한 꼴을 차갑게 내려다보다가 허리춤에 걸어둔 검집대에서 길이가 짧은 단검을 꺼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남자의 몸에서 옷가지들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의아함을 느꼈는지 윌리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을 던졌다.

“……고문할 거라며?”

“어. 성고문.”

“미쳤나 봐…….”

이브는 뒤에 서 있는 남자가 질색하는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곧 바실리오를 완전히 나체로 만든 후에 이브는 손을 위로 치켜들어 매서운 기세로 바실리오의 뺨 위를 내리쳤다. 짜악 짝,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수차례 밀실 안에 퍼졌다. 대여섯 번의 따귀 끝에야 겨우 바실리오의 눈이 가물거리며 뜨였다.

“읏…….”

“안녕, 바스카. 정신이 들어?”

“……끅, 크윽.”

“꽤 뒤끝이 있더라, 너. 졸졸 쫓아다니는 게 여간 거슬려야 말이야.”

“원, 쿨럭! 원하는 게, 뭐야.”

“에이, 아마추어같이 왜 이래. 다 알고 왔어요, 손님.”

바실리오가 어이없다는 듯 끄륵, 하고 피 거품 끓는 소리로 기묘한 웃음을 토해냈다.

“네가 바이퍼 쪽에 돈 찔러줬다며? 이 양아치 새끼야.”

“하. 그래서?”

“그래서는 뭔 그래서야. 덕분에 내 기분이 좆같으니까 처맞아야 한다는 거지.”

“고작, 큭. 고작 그딴 이유로 날 건드려?”

“물론 이것뿐만은 아니지. 여기저기 꼬리가 참 많더라? 뒤에 저 양반도 따라다니고, 우리 집 약골도 따라다니고, 또 누굴 따라 다녔으려나. 혹시 취미가 스토킹이야?”

남자는 아무런 대꾸 없이 입 안을 굴려 피 섞인 침을 바닥에 탁 뱉었다.

“우리 일은 솔직히 네 자업자득이었잖아. 먼저 술에 약 탄 게 누군데. 한번 따먹을 수 있으면 좋고, 약점 잡아 흔들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런 심보 아니었나? 원한을 품어야 하는 사람은 내 쪽 아냐?”

이브가 생긋 웃었다. 약을 탔다는 그녀의 말에 순간 뒤쪽에서 미약한 살기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입매를 잔뜩 뒤틀어 웃고 있던 이브가 그대로 바실리오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위협하듯 으르렁거렸다.

“하하, 이런 개 좆같은 새끼.”

짜악!

강렬한 파열음이 터졌다. 이브는 휙 돌아간 바실리오의 뺨을 강하게 쥐어 잡아 도로 제 쪽으로 돌리며 씹어 뱉듯이 말했다.

“너 같은 새끼들 하는 짓이 다 똑같지. 이 쓰레기 새끼.”

“…….”

“그래. 그렇게 계속 한마디도 하지 마. 내가 물어도 끝까지 아가리 닥치고 있으라고. 그래야 오래 괴롭힐 맛이 나지. 쉽게 무너지면 용서 안 해. 간단히 입 열면 그땐 진짜 죽여버릴 거야.”

사로잡힌 사냥감을 내려다보는 이브의 눈빛은 새파란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사냥은 끝났다. 남은 것은 짐승을 도축하는 일뿐이었다.

이브는 잔뜩 피가 튄 조끼를 벗어 저만치 집어 던진 후 셔츠의 손목 단추를 끌러 둘둘 말아 올렸다. 그리고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여 약물을 입힌 장갑을 꺼내 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위생이고 나발이고 그냥 확 병균 감염으로 보내버리고 싶었으나, 이 쓰레기도 나름대로는 남자 주인공이었기에 그녀가 혹여 그를 죽여버리면 이야기가 어떻게 비틀릴지 몰랐다. 이브는 혀를 차며 장갑을 양손에 끼고 바실리오의 뺨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이제부터 나는 딱 하나만 물어볼 거야.”

“…….”

“내 물건 가져간 게 너냐?”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새빨갛게 살의를 불태우며 이브를 지그시 노려볼 뿐이었다.

“물론 내게 원한이 있는 만큼 순순히 말해주고 싶지는 않겠지. 부디 끝까지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당연하게도 그는 말이 없었다. 이브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리며 위로 슬쩍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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