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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당신이 바라신다면(3권) (15/22)

14. 당신이 바라신다면

알베리크가 부상을 입은 탓에 외부 활동은 거의 올스톱이 되었다. 물론 다친 그날 바로 마법사를 불러 거금을 들여 회복 마법을 받기는 했지만, 눈으로 보이는 상처를 아물게 하였을 뿐 통증까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니 가능하다면 한 주 정도는 움직임을 자제하고 정양하라는 권고를 받은 탓에 이브는 덩달아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누리게 되었다.

근래 알베리크를 궁성으로 불러들이는 일이 잦았던 에드워드는 총애하는 측근의 부상 소식을 접하고는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사냥터 부지의 전면 수색을 명했다.

불똥이 튀는 것을 피하고자 이브는 환자의 핑계를 대며 일찌감치 사냥터에서 몸을 뺐다. 그 이후 소문에 의하면 늑대 수인뿐만 아니라 수인종 전반을 대상으로 상당히 강압적인 방식의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알베리크의 저택으로도 수사를 담당한 경관이 찾아온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피해 당사자인 알베리크와 독대를 했을 뿐,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이브에게서는 사정청취조차 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의 태도를 보며 이브는 이 수사의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알아챘다고 한들 이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토리는 이미 애초에 꼬일 대로 꼬여 있었고, 이브는 원작 스토리에 대한 집착을 놓기로 마음먹었다. 될 대로 되라지. 이브는 심드렁한 얼굴로 침대 위에서 한차례 몸을 뒤집었다.

이브는 일찌감치 운동할 때 입는 아일릿 셔츠와 면바지로 갈아입은 채 침대 위를 뒹굴고 있었다. 한가로워 보이는 그녀의 머릿속이야 이리저리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으나 보기에는 저택의 그 누구보다도 하릴없는 한량처럼 보였다.

멍하니 발끝을 까딱이며 누워 있기도 잠시, 손님의 방문을 알려오는 하인의 목소리에 그제야 미적이며 자리에서 일어선 이브는 손님을 후원으로 안내하라 지시한 후 검집대를 몸에 걸었다.

오늘은 카스텔에게 오라를 운용하는 법을 배우기로 약속을 잡은 날이었다. 아무리 술을 마시고 알딸딸한 상태에서 사고를 쳤다 한들 소드 마스터에게 배움을 청할 기회를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서로 미적지근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그날 밤 일을 없던 것으로 여기기는 했으나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눠야 하는 일은 그보다도 훨씬 심력을 잡아먹는 일이라 이브는 아침에 눈을 뜬 이후로 내내 「쪽팔리지 않다」며 자기최면을 걸어야 했다.

“어서 오세요, 카스텔 경. 그간 무사 평안하셨나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애.”

남자 역시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고 있건 간에 겉으로 보기에는 기억을 모조리 휘발시켜버린 것처럼 평소에 보던 얼굴과 별다를 바 없는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암묵적인 합의 끝에 그 밤의 사건은 대화 주제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브는 부러 가벼운 태도로 슬쩍 웃으며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일단은 가볍게 몸부터 풀까 하는데. 대련 괜찮으세요?”

“물론입니다.”

이브는 슬슬 몸의 관절 이곳저곳을 빙글빙글 돌리거나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몸을 풀었다. 남자는 몸을 예열하는 이브를 가만히 바라보며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검집에서 빼 들고 천천히 손목을 풀었다.

잠시 동안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이브가 이윽고 검을 빼 들면서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긴장이 서리기 시작했다.

“오십시오.”

“그럼 사양 않고……!”

발검을 한 카스텔의 자세에서 그가 오로지 방어만 할 생각임을 눈치챈 이브가 지체하지 않고 빠르게 쏘아져 들어갔다. 순식간에 쾅쾅쾅! 하고 도저히 쇠와 쇠가 맞부딪쳤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한 파열음이 연달아 세 차례 터져 나왔다.

눈 깜빡일 사이에 세 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마지막 합에서 서로를 강하게 밀어 튕겨냈다. 각자 뒤로 훌쩍 물러난 두 사람은 잠시 기세를 고른 후 다시금 자세를 낮추고 긴장을 끌어올렸다.

이브는 충격파가 저릿하게 올라오는 손목을 한 바퀴 빙글 돌려 검을 허공에 휘익 크게 휘두르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상대의 허점을 찾으려 눈을 굴렸다. 잠깐의 탐색을 끝낸 이브가 다시금 카스텔의 영역 안으로 바짝 파고들었다.

남자는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새파란 롱소드의 검격에도 차분한 표정으로 손목을 움직여 날 선 공격을 하나씩 걷어냈다. 이브의 검은 변칙적인 움직임이 많은 쾌검이었다. 검 끝이 좌상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가 싶으면 어느새 검로가 뒤틀려 우하단을 베어내려 이를 드러냈다. 하체를 노리는 칼의 진로를 막아내면 자연스럽게 검날이 휘돌아 뒤로 빠졌다가 다시 옆구리를 노리며 쇄도했다.

법칙이 없는 현란한 움직임 속에서도 이브의 하체는 흔들림 없이 정석적인 스텝을 밟고 있었다. 그는 이브의 보법에서 익숙한 여인의 흔적을 느끼고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검술을 배우며 겪었던 험난한 시간들을 떠올렸다. 이 스텝은 기사들에게 알음알음 전해지는 기본 스텝을 그녀가 보완해 만들어낸, 마거릿 고유의 보법이었다. 1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한 어머니였으나 그녀의 가르침만큼은 선명히 뇌리에 박혀 있었다.

아마 이 여자도 어린 시절의 자신 못지않게 혹독한 시간을 거쳤을 터였다. 뇌에 쑤셔 박힌 것처럼 자유자재로 스텝을 밟는 이브를 보며 카스텔은 그녀에게 짙은 동질감을 느꼈다.

몇 차례나 더 합을 나눈 이후 카스텔은 몸을 뒤로 훌쩍 물리고는 기세를 갈무리하며 그만, 하고 말했다. 이 이상 계속된다면 가벼운 대련이 아니게 된다.

“이제 슬슬 몸이 풀리려던 참인데요.”

“오늘 만남을 청한 목적이 대련은 아니지 않습니까.”

“음, 그건 그렇네요.”

이브는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고분고분 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카스텔 역시 검을 갈무리하며 이브의 공세에서 주의해야 할 부분을 짚어주었다. 진지하게 검로를 봐주는 카스텔의 목소리에 이브의 표정 역시 덩달아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검에 오라가 더해진다면 설사 눈으로 본다 한들 피할 수 없게 됩니다.”

“파훼법은 없나요?”

“함께 오라를 터트려 맞서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틈을 파고든 후 뒷날 베기로 빠르게 연계해서 허점을 노리면 어지간하면 당해내기 힘들 겁니다.”

“아하……. 아, 맞아. 궁금한 게 있었는데 말이에요.”

두 사람은 빠르게 검술을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두 사람 모두 스승이 같아 자세나 검격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화 주제가 효과적으로 오라를 운용하는 방법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두 사람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남자는 말로 마나가 움직이는 흐름에 대해 설명했으나 이브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잠깐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죄송합니다, 하고 짧게 사과를 한 후 조심스럽게 이브의 팔을 잡았다.

“검과 팔 사이에 이어진 길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몸 안에서 흐르는 용암을 가다듬어 잘게 뽑아내는 겁니다.”

“으음. 설명이 너무 추상적인 것 같지 않아요?”

카스텔의 손가락이 어깨를 지나 팔뚝을 가볍게 덧그리며 손목 안쪽을 짚어나갔다. 어쩐지 손이 지나간 자리가 간지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브는 최대한 남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브가 그의 인도에 따르며 천천히 몸속의 오라를 깨워 흘려보내기에 집중하고 있던 그때, 돌연 맑은 하늘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흠칫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물방울이 순식간에 그 수를 늘리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는 빗방울은 금세 굵은 폭우가 되어 쏟아져 내렸고, 굵어진 빗방울은 설마 비가 오는 건가 싶어 머뭇거리던 남녀의 머리 위로 가차 없이 떨어지며 몸을 적셨다.

“어우, 이게 무슨 난리야……! 일단 들어가요.”

짧은 시간 안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두 사람은 서둘러 저택으로 들어갔다. 이브는 시종들에게 남자가 갈아입을 만한 옷을 마련하라고 이른 후 어쩐지 어물거리는 태도의 카스텔을 샤워라도 하시라며 손님방으로 밀어 넣었다.

이브 역시 뜨거운 물로 차게 식은 몸을 데우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입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의복 대신 아이보리 색상의 가벼운 튜닉 원피스를 걸쳤다.

허리를 붉은 공단 끈으로 조여 묶은 후 어깨 위로 흰색 숄까지 마저 얹어준 메이드가 걱정스레 물었다.

“머리가 덜 말랐는데 괜찮으신가요?”

“어쩔 수 없지. 손님은 응접실로 모셨나?”

“네. 바로 차를 내오도록 했습니다.”

“서둘러야겠네. 머리는 이 정도면 됐어.”

라벤더 꽃 내음이 나는 향유를 발라 정리하고 별다른 기교 없이 느슨하게 꼬리를 하나로 모아 묶은 이브는 거울 너머로 비치는 여자의 모습을 슬쩍 확인하고는 실내화를 꿰어 신고 그대로 당당하게 침실을 박차고 나섰다.

침실과 개인 서재를 지나 응접실로 넘어간 이브는 마침 테이블에 찻잔과 소서를 내려놓는 시종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별일이 다 있네요.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질 줄은 몰랐어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괘념치 마십시오. 저도 막 나온 참입니다.”

두 사람은 찻잔이 다 채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차 시중을 드는 시종까지 물린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화의 주제는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하늘이 맑아 방심하고 있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꺼내며 이브는 손님의 옷매무새를 몰래 눈여겨보았다.

예기치 못한 폭우 탓에 젖어버린 옷을 계속 입고 있을 수는 없으니 남자는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은 듯 보였다. 그러나 저택의 사용인들이 준비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이즈의 옷도 그에게는 잘 맞지 않았는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의복의 천들이 팽팽히 당겨졌다.

특히나 가슴 부분은 도저히 잠기지 않았는지 베스트 아래의 셔츠 단추는 세 개 정도가 풀려 있었다. 평소 정복의 목 끝까지 단추를 꼭꼭 채우고 다니던 그를 떠올려보자면 멋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출된 모습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가슴과 팔뚝은 꼭 끼는 데 반해 허리께는 꽤 여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브는 남자의 몸 위로 역삼각형 모양의 도형을 그리는 상상을 하면서 실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하인들이 옷을 말리고 있으니 그때까지만 잠시 저와 차나 한잔하시죠. 아직 여쭤볼 것도 많이 남아 있고요.”

“……알겠습니다.”

“얼마 전 에드워드 전하께서 주최하신 사냥회 이야기 들으셨나요?”

“예. 소백작께서 크게 다치신 게 아니라 다행입니다.”

“그때 제가 찻잔을 쪼갰다는 이야기는요?”

“……찻잔을, 말입니까?”

이브는 한쪽에 놓아둔 티스푼을 들고 천천히 오라를 밀어 넣었다. 작은 티스푼 주위로 금빛 빛 무리가 일렁거렸다.

“요렇게 해서 뎅겅 반으로 동강을 냈죠.”

뿌듯해 보이는 이브의 표정을 본 카스텔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려는 헛웃음을 참기 위해 손을 올려 입가 언저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그냥 웃으셔도 돼요.”

“……아닙니다.”

“그런데 티스푼에 오라를 씌우는 게 오히려 더 어렵더라고요. 크기가 작아서 그런가……?”

이브의 말마따나 티스푼을 덮은 빛 무리는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사르르 사그라졌다. 카스텔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이브에게서 티스푼을 넘겨받아 그녀가 했던 것처럼 티스푼 위로 오라를 덮었다.

누군가 검술에 조예가 깊은 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오라 낭비라고 기함했을지도 모르나, 아무튼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둘뿐이었다.

이브는 어렵지 않게 안정적으로 오라를 씌우는 카스텔을 보며 눈을 빛냈다.

“오. 잠깐 봐도……?”

“그러십시오.”

이브는 카스텔이 흔쾌히 허락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옮겨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곧이어 이브의 손가락이 카스텔의 소매 안쪽 손목을 감싸듯 둘렸다.

체내를 흐르는 카스텔 특유의 무형의 기운을 느끼며 이브는 그가 오라를 움직이는 감각을 따라가기 위해 집중했다.

창 바깥으로 대지를 적시는 청량한 빗소리가 들려왔다. 카스텔은 제 손목 안을 더듬는 따스한 체온을 따라 천천히 눈을 굴렸다.

물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촉촉한 머리카락이 미처 묶이지 못하고 이브의 얼굴 옆으로 흘러 내려와 있었다. 잔잔한 들숨과 날숨 소리, 미약하게 코끝을 간질이는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점점 그의 신경을 잠식해 들어갔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오라의 유속에 집중하던 이브가 마력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느끼고는 돌연 시선을 올려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덜그럭. 카스텔은 마치 고장 난 것처럼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남자는 숨을 들이켜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보였다.

적막 가운데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 중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카스텔이었다.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엇.”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카스텔이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이브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자의 손을 콱 움켜쥐었다.

“벌써 가시려고요? 아직 비가 많이 오는데요.”

남자는 마치 발에 아교를 바른 듯 바닥에 못 박혀 움직이지 못했다. 고작해야 손을 붙잡혔을 뿐인데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꿈질대는 손가락의 감촉을 이브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화르르 열이 올라 목 뒷덜미까지 붉어진 것이 눈에 선명히 담겼다. 이브는 그 와중에도 악착같이 얼굴 위에서 표정을 지운 사내가 신기할 정도였다.

또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목 끝까지 올라온 것을 차마 뱉어내지 못하는 남자를, 이브는 끈질기게 버티고서 기다렸다.

결국 지독한 침묵을 깬 카스텔이 그간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죄를 토해내고 말았다.

“……그날의 손길, 아니…… 발길이 잊히지 않습니다.”

“저런.”

“도저히…… 이런 파렴치한 마음을 품고 레이디를 뵐 자신이 없습니다.”

모두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하고 작게 덧붙인 남자가 괴로운 고해를 마치고 간신히 깊이 숨을 내쉬었다. 한숨처럼 흘러나오는 죄책감을 기민하게 눈치챈 이브가 입술 끝을 삐죽이 들어 올렸다.

“잊히지 않는다면 더 강한 기억으로 덮어버리는 건 어때요?”

강한 힘이 카스텔을 잡아당겼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남자의 몸이 속절없이 무너져 의자에 처박히고, 이브가 그 위로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올라타 앉았다.

허벅다리 위로 올라탄 이브가 카스텔을 마주 본 채 장의자의 등받이를 양손으로 붙들어 그 사이로 남자를 가두었다. 카스텔은 강렬한 열기를 띠고 마치 노려보듯 저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시선이 마치 육식동물의 그것과 같다고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남자는 위에서 찍어 누르는 지배에 약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이브는 연한 살을 골라 이를 박아 넣는 포식자가 되어 남자의 입술에 다디단 독액을 흘려 넣었다.

이브는 거리낄 것 없이 몸을 숙여 남자의 아랫입술을 이로 물었다. 지끈한 통증이 앞섰으나 곧이어 입 안으로 건너오는 혀의 능란한 움직임에 카스텔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녀의 숨결 아래에서 이리저리 휘둘렸다.

“하, 흐으…….”

연무장을 스무 바퀴씩 돌아도 지칠 것 같지 않은 괴물 같은 체력의 사내가, 고작해야 혀가 섞이는 진한 입맞춤만으로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브는 양손을 남자의 귓가로 가져가 그의 귀 위를 덮었다. 잇새로 빠져나가는 숨소리와 젖은 살이 짓뭉개지는 질척한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카스텔의 머리를 꽝꽝 울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카스텔의 입술 위에서 떨어져 나간 이브는 피가 몰린 듯 붉어진 아랫입술을 한 번 더 약하게 깨문 후 그대로 아래로 내려가 턱선을 타고 입술을 지분거렸다. 귓가 언저리와 목덜미 위의 얇은 살갗 위를 이로 물고 입술을 파묻어 쪽쪽대는 낯선 감각에 카스텔은 두려울 정도로 배가 땅겨와 한차례 몸을 떨었다.

깔고 앉은 허벅다리 한쪽에서 모른 척하려야 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한 변화를 느낀 이브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쪽 손을 열어 숨을 불어넣듯 작게 속삭였다.

“앉은 자리가 너무 불편하네요. 혹시 바지에 뭐 넣어오셨어요?”

“죄송, 합니다…….”

“아하하, 죄송할 건 아니지.”

카스텔은 목을 꺾어 이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침내 그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여자에게 자신이 지독하게 홀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자신조차도 감정의 연원을 알지 못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녀에게 심장을 바치는 것은 그저 응당 일어나야 할 일이라는 것처럼.

도무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원인 없는 결과에 카스텔은 혼란스러웠다.

“더 예쁨 받고 싶어요?”

순간 남자를 구슬리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나른한 말소리와 함께 깨달음은 벼락처럼 찾아왔고, 남자는 이 같은 일을 운명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것을 운명이라 부른다면 하찮은 인간은 그저 신의 인도 앞에 순응할 뿐이었다. 카스텔은 우물우물 이어지던 고민을 마무리하고 홀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흥이 오른 이브는 카스텔의 손을 잡고 응접실과 서재 너머로 연결된 침실로 들어갔다.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남자는 이브 몰래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었다.

“이제 못 물러요. 알죠?”

“……압니다.”

타이밍 좋게 이브가 쐐기를 박았다. 남자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브는 신이 나 죽겠다는 얼굴로 명령했다.

“그럼, 벗어봐요.”

그렇게 툭 내뱉은 이브는 남자를 버려두고 홀로 침대 근처로 가 모서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다리까지 꼰 채 발끝을 까딱이는 이브의 기대 어린 시선을 애써 피하는 남자의 목 뒷덜미와 귀 언저리가 벌겋게 익어 있었다.

카스텔은 이브의 지시대로 스스로 옷의 여밈을 풀어 헤쳤다. 온몸을 핥듯 끈적하게 닿아오는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상체에 걸쳐진 천들을 모조리 걷어낸 남자는 시선을 아래로 처박고 간신히 부끄러움을 삼켰다.

‘야 이 씨, 인간적으로 브라는 내가 아니라 네가 차야 하는 거 아니냐?’

이브는 떡 벌어진 어깨와 단단하게 잡힌 가슴근육, 그 아래로 내려갈수록 잘록하게 떨어지는 허리와 요철이 두드러지는 복근을 찬찬히 훑어 내리다가 허벅지를 틈 없이 조이고 있는 하의를 보며 말했다.

“아래도 벗어야죠. 내가 도와줘야 할까요?”

“아닙니다.”

덤덤하게 대꾸하는 말끝이 조금 떨리고 있는 것을 이브는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카스텔은 길게 숨을 내쉬며 바지 여밈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를 악물고 턱을 당기며 묵묵히 다리를 감싼 의복을 마저 벗어 내렸다.

사이즈가 하나 작은 탓에 도르르 말려 벗겨진 바지와 속옷을 단정히 뒤집은 남자는 옷가지들을 양손에 쥐고 손을 앞으로 모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그의 움직임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던 이브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그때였다.

이브는 가벼운 걸음으로 카스텔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서 옷을 빼내 뒤쪽 아무 데로나 휙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일부러 남자와 시선을 마주치면서 그의 양팔을 손으로 잡고 등 뒤로 돌렸다. 마치 이브가 그를 품 안 가득 껴안은 것 같은 자세였다.

“자, 이대로 양손 꼭 잡으세요. 내가 명령할 때까지 놓으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한 이브는 남자의 다리 사이에 제 발을 끼워 넣어 툭툭 치며 다리를 벌린 자세를 잡도록 만든 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찬찬히 그의 나신 곳곳을 살피고 더듬기 시작했다.

목 빗장과 이어지는 쇄골을 따라 돌덩이처럼 단단한 어깨와 팔뚝까지. 길고 가는 손가락이 마치 가볍게 장난을 치듯 이곳저곳을 문지르고 톡톡 튕기며 잘 다듬어진 육신이 자아내는 완곡한 곡선들을 덧그려나갔다.

이브는 마치 신화 속 영웅을 모사한 동상처럼 탄탄하게 짜인 복부의 근육 위에 손을 대보았다. 남자는 잔뜩 긴장했는지 손가락이 닿는 부분마다 움찔움찔 움직이며 반응했다. 움찔대는 배꼽 근처를 둥글게 덧그리던 이브의 손이 다시 위쪽으로 올라갔다.

남자의 육체는 전반적으로 이브의 취향에 크게 부합하는 편이었으나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아보자면 한 손으로 다 가려지지 않는 묵직한 가슴근육이 단연 매력적이라 평할 만했다.

이브는 양손을 펼쳐 남자의 두 가슴 아래를 받치듯 들어 올려 가운데로 모아보았다가, 가볍게 마사지를 하듯 주물렀다. 손가락 아래로 느껴지는 탄력 역시 막연히 상상하던 것 그 이상이었다.

이브의 손가락이 유륜과 안으로 묻혀 있던 돌기 위를 천천히 간질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조금씩 단단해지기 시작한 가슴 돌기를 엄지와 검지로 쥐고 힘을 뺀 채 뭉개듯 돌리니 카스텔의 목 안쪽으로 숨을 참는 듯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말, 생각하던 것 이상이네요.”

혼잣말처럼 툭 튀어나온 목소리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대꾸를 하면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딱히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이브는 그의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 위에서 손을 뗀 후 남자의 뒤로 돌아갔다.

카스텔은 보이지 않는 끈에 양 손목을 결박당한 것처럼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있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팔 근육이 무척 딱딱했다. 이브가 손가락을 들어 쿡 찔러보았으나 조금도 안으로 눌리지가 않았다.

손이 모여 있는 까닭에 등 위로 견갑골이 도드라지게 솟았다. 이브는 목선 위로 선 승모근과 그 아래에 솟아오른 날개뼈 그리고 그 안쪽 오목하게 들어간 등줄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살가죽 아래에 있을 척추의 개수를 세듯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던 손끝이 돌연 기세를 바꾸어 둥그런 둔부를 거칠게 콱 움켜쥐었다.

이브는 손바닥 아래로 파득, 하고 흠칫하는 움직임을 느끼며 킥킥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란 듯 금세 엉덩이가 단단해졌다. 잔뜩 조이고 있는 엉덩이를 양손으로 억지로 쥐어 뭉개듯 주무르며 이브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힘 빼세요.”

적당히 눈요기를 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귀여워해줄 때가 되었다. 이브의 손길이 앞선 것에 비해 끈적하게 닿아오는 것을 느낀 카스텔이 서로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튜닉 안에 받쳐 입었던 속바지며 속옷 따위를 발목에 걸친 채 베개에 기대고서 반쯤 누워 있던 이브가 슬쩍 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안대로 눈 위를 가린 채 헐떡이는 숨을 가늘게 뱉으며 이브의 발끝을 입에 물고는 마치 달콤한 크림을 맛보는 것처럼 정성껏 핥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너무 참을성이 없는 거 아닌가요? 벌써 몇 번째 싸는 건지 모르겠네.”

“후, 흐윽……. 죄송, 합니다.”

남자가 핥고 있지 않은 반대편 발은 그의 고간 위에 얹어진 채 질척한 백탁액 범벅이 되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카스텔은 제가 핥던 발을 내려놓고는 손을 더듬거려 반대편 발을 찾아 조심스럽게 위로 들어 입을 맞추었다.

그는 자신이 사출해낸 정액이 입 안에 들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브의 발을 게걸스레 핥아 올렸다. 이브가 그녀의 발을 더럽힌 오물을, 오물의 주인이 직접 입으로 치우기를 바랐으니까. 그뿐이었다.

“자꾸 허락 없이 질질 싸네요, 곤란하게. 아무래도 경에게는 교육이 좀 필요하겠어요.”

다리에 걸린 속옷들을 마저 휙 내던져버린 이브는 손을 뻗어 침대 헤드에 올려두었던 아공간 주머니를 쥐었다. 그 안에서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부드러운 송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은색의 정조대였다.

사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금방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는 성기를 내려다본 이브가 그리 다정하지 않은 손길로 음낭 뒤를 둘러 끈을 꾹 조여 고정했다. 세심하지 않은 움직임에 되레 남자의 숨소리가 다소 거칠어졌다.

“하, 흐읏, 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쉬야는 가려서 해야죠, 카스텔 경. 아무 데나 질질 싸고 다니면 그게 길거리 똥개랑 다를 게 뭐죠?”

기둥 위를 바짝 조여 파고드는 부드러운 가죽끈의 감각이 남자의 신경 끝을 간질였다. 가죽끈의 불편한 압박감은 이브의 적나라한 조롱과 함께 남자의 성감을 북돋웠다.

“대신 좆을 만지지 않아도 기분 좋게 되는 법을 알려줄 테니까요. 울지는 말아요.”

이브는 허리를 굽혀 남자의 콧잔등에 가볍게 입 맞추고는 사려 깊은 주인인 척 굴었다. 얼굴 근처로 바짝 다가온 숨소리에 눈이 가려진 남자는 순간 호흡을 멈추었다.

“예뻐해준다고 했잖아요. 잔뜩 귀여워해줄게. 엉엉 울면서 그만해달라고 빌 때까지.”

코끝에 달콤한 숨결이 앉았다가 금방 사라졌다. 이브는 카스텔이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는 모습을 보며 주머니에서 장갑과 향유를 꺼냈다.

“여건만 된다면 덩치 큰 개를 한번 꼭 키워보고 싶었거든.”

이브는 산업이 빨리 발전해야 이런저런 도구들도 개발을 할 텐데,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남자의 몸을 뒤로 밀어 눕히고는 라벤더 향을 미약하게 머금은 오일을 손 위에 뿌려 문질렀다.

“자, 뒤돌아 누워볼까요?”

이브는 제 말에 긴장한 얼굴로 등을 돌려 누운 카스텔의 하체 근처에 바짝 달라붙어 앉아 오일을 잔뜩 묻힌 손을 볼기 사이로 밀어 넣었다.

“일단 감도나 한번 보자고요. 여기 남자들은 왜인진 모르겠는데 다들 뒤로 잘 느끼는 것 같더라고.”

“잠, 영애, 그런……!”

“영애가 아니라 그냥 이름 불러도 된다니까.”

말을 마친 이브가 곧바로 중지를 뒷문 안으로 꾸욱 밀어 넣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불쾌한 침입에 남자의 얼굴빛이 희게 질린 듯도 싶었다. 카스텔은 평생 가지고 있던 상식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제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며 약하게 반항하는 남자의 반응을 즐거운 얼굴로 관찰하던 이브는 안으로 깊이 쑤셔 넣은 손가락을 움직여 배 앞쪽을 향해 내벽을 꾹꾹 짓눌렀다.

“으흐, 흐윽……! 제발, 이런 건……! 아핫……!”

“기분 좋아요?”

“이상, 합니다. 제발, 그만……!”

평생토록 무언가 들어올 리가 없다고 믿은 곳으로 이물질이 파고들자 카스텔은 완전히 평정심을 잃은 듯 고개까지 도리질 쳤다.

이브는 그런 그의 움직임을 가볍게 무시하며 안쪽 근육을 풀듯이 쑤석대던 손가락의 개수를 늘려나갔다. 질척이는 마찰음과 카스텔의 이물감을 참으려 애쓰는 앓는 소리가 뒤얽혔다.

전립선이 있을 만한 위치를 찾아 구멍 안의 살덩어리들을 문지르고 짓이기기를 한참, 더 깊게 밀어 넣은 손가락이 안쪽 어느 위치를 비비자 남자의 복부 근육이 움찔 수축했다.

순간 손가락을 쿡 조이듯 베어 문 뒷입의 반응이 무척 반가웠다. 이브가 지체 않고 반응이 강하게 온 지점을 힘주어 짓쑤셨다. 카스텔의 허벅지와 배가 흠칫 떨며 단단히 움츠러들었다.

“흐, 하아……!”

“여기? 여기 기분 좋아요?”

“그…… 아으, 흑!”

‘피폐물이긴 하지만 19금 야겜 장르라 그런가, 이 동네 남자들 묘하게 감도가 좋단 말이야.’

게임 속에서는 쓸 일도 없었던 뒷구멍이 다소 거칠게 쑤셔지고 있음에도 어렵지 않게 쾌감을 느끼는 남자를, 잔뜩 흥이 올라 들뜬 얼굴로 내려다보던 이브가 예고 없이 손가락을 바깥으로 뽑았다. 쯔걱, 하는 소리와 함께 빠져나온 손은 질척한 기름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브는 손을 멀찍이 뻗어 허공에 한번 휙 털어낸 후 기름병을 열어 다시 손 위에 부었다. 뒤이어 투명한 수정을 다듬어 만든 비즈 플러그를 손에 쥐고는 향유가 든 손으로 장난감을 굴리듯 문질렀다.

불쾌할 정도로 굼실굼실 움직이던 이물감이 사라지자 카스텔의 숨소리가 비교적 안정적이게 가라앉았다. 이브는 남자가 긴장을 빼고 배 안쪽에 힘을 풀기를 기다렸다가 오일 범벅이 된 둥그런 장난감의 선단을 남자의 뒷구멍에 밀어 넣어주었다. 손가락이 빠져나가 굳게 다물렸던 입구가 매끈한 비즈의 침입에 어렵지 않게 입을 열었다.

“힘 더 빼고. 숨 깊게 쉬어요.”

“흐, 후으……! 이상, 이상합……! 응, 읏……!”

“고작 이 정도로 약한 소리 하지 말아요. 칼로 창자를 쑤시는 것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기껏해야 뒷구멍에 장난감 쑤시는 걸로 낑낑대요?”

솜씨가 좋다는 장인을 소개받아 직접 그림까지 그려가며 주문한 플러그는 엉덩이 바깥으로 나오는 부분에 길게 짐승 꼬리처럼 털이 달려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부분은 둥그런 비즈가 알알이 길게 이어져 있는 모양새였다.

장벽 안쪽 전립선이 충분히 짓눌려 자극되고도 남을 정도로 두꺼운 데다 부드럽게 이어진 곡선은 과하게 내벽을 찌르지 않는 형태였기에 오래 안에 품고 있어도 크게 몸이 상하지는 않을 만한 디자인이었다.

전까지는 그나마 그럭저럭 여유 있게 숨을 고르던 카스텔은 결국 비즈 플러그의 두꺼운 부분이 끊이지 않고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았다.

형태의 특성상 굵은 부분 이후에는 다시 두께가 얇아지기에 배에 힘을 주면 플러그는 바깥으로 밀려나기는커녕 안으로 밀려서 들어왔다. 작게 헐떡이며 저도 모르게 뒤를 움찔움찔 조여대던 남자는 힘을 줄수록 둥그런 알들이 안으로 파고들며 불쾌할 정도로 정확하게 기분 좋은 지점을 짓누른다는 사실을 빠르게 깨닫고는 질린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하, 흐윽……!”

이물감을 느낀 몸이 저도 모르게 배에 힘을 줄 때마다 뒤를 파고든 이물질의 형태가 민감한 내벽 너머로 선연히 느껴졌다. 발가락이 절로 곱아드는 생경한 감각에 남자는 허리를 파르르 떨었다.

이브의 말마따나 앞을 만지지 않아도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분 좋은 성감이 아닌, 쥐어짜 강제로 끄집어내는 고약한 종류의 쾌락이었다.

뒷구멍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눈앞에서 스파크가 번쩍번쩍 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남자는 어느새 자신이 허리를 뒤틀며 신음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허벅지 안쪽을 달달 떨어가며 힘겹게 헐떡였다.

“하으, 읏, 하윽! 아, 이상, 제발, 어떻게 좀……!”

“이상해요? 아닐 텐데.”

“흐으, 영, 영애……! 아학, 하으!”

“이상한데 이렇게 물을 질질 흘려요? 언제부터 이상한 게 기분 좋다는 말이 됐나?”

이브는 킥킥 웃으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사내를 조롱했다. 사정할 수 없도록 꾹 조여진 성기는 애달플 정도로 새빨갛게 익어 선단에서 투명한 물을 뚝뚝 흘려대고 있었다.

이브는 엎드려 웅크린 채로 헐떡이는 남자의 볼기를 두어 차례 정도 짝짝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살갗 바깥에서 전해지는 자극에 저도 모르게 뒤를 조이고 만 카스텔이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척추를 타고 오르는 쾌감에 전율했다.

“자, 착하지. 무릎 세워서 엉덩이 들어요.”

“흐으, 하아…….”

지독한 쾌감 속에서도 남자는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어 무릎을 딛고 하체를 들어 올렸다. 이브는 작은 달걀만 한 것을 여섯 개나 먹어치운 탐욕스러운 구멍 위를 손끝으로 살살 덧그리다가 아래로 길게 처진 검은색 짐승 털을 한 손으로 휘어잡고는 그대로 바깥으로 힘주어 잡아당겼다.

“아! 아흐, 하앗! 응, 아, 싫, 시이, 하으윽……!”

퐁, 퐁 하고 작은 달걀만 한 비즈들이 알알이 엉덩이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쿨쩍쿨쩍 젖은 살과 미끈한 수정이 마찰하는 강렬한 감각에 카스텔의 허리가 둥글게 말리더니 퍼드덕 감전된 것처럼 날뛰었다.

마치 누군가 보는 자리에서 배설하고 만 것만 같은 끔찍한 감각이었다. 외설적인 장면을 보이고 있다는 수치심과 두꺼운 알이 전립선을 짓누르며 스치고 지나가는 쾌감, 배 속의 이물질이 바깥으로 사출되는 배변감이 한데 뒤섞여 인지감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머릿속에 들어와 뇌를 주물러 곤죽으로 만드는 것 같은 강렬한 공포가 남자를 엄습해왔다. 두 눈을 감고 있음에도 눈앞이 하얗게 그리고 검게 점멸하고 있었다.

“세상에. 경, 방금 완전히 절정까지 갔어요. 느꼈어요? 앞을 만지지도 않았고 싸지도 않았는데 간 거라고요.”

이브는 별것 하지도 않았는데 첫 경험에 드라이라니 정말 대단한 재능이라며 떠들었으나 카스텔의 귀에 그녀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남자는 제가 느낀 것이 공포인지 쾌감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공포도 쾌감도 그에게는 모두 낯선 감정이었기에 그 둘을 구분하려는 노력은 부질없는 발버둥에 불과했다.

이브는 녹진하게 풀어진 구멍 안으로 바깥으로 빠져나왔던 알 서너 개를 다시 꾹꾹 눌러 집어넣었다. 남자의 허리가 움찔거리기는 했으나 동그란 비즈는 별다른 저항감 없이 밀어 넣는 대로 밀려서 들어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카스텔의 엉덩이 사이로 길게 늘어진 짐승 꼬리만이 보이게 되었다.

“이런, 이런 건, 정상이…….”

“쉿. 여기 봐요, 카스텔 경.”

겨우 정신을 차린 카스텔이 자리에서 버둥거리며 일어서 앉았다. 남자는 희게 질린 얼굴로 생경한 감각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다.

이브는 그런 그의 양 뺨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제 쪽으로 당겼다. 조금 더 짓누르면 완전히 꺾이고 말 터였다. 물론 그것도 재미있겠지만, 굳이 그를 못 쓰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가벼운 드롭이었다. 카스텔의 정신을 잠식한 불안과 번민을 한눈에 알아본 이브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진짜 귀여워. 정말 잘했어요. 너무 예뻐요. 지금 경이 얼마나 예쁘게 흐느낀 줄 알아요? 진짜 너무 예뻐.”

이브는 혀끝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부드럽게 웃으며 남자를 상냥하게 도닥였다. 이브의 입술이 안대 아래로 드러난 남자의 뺨과 코끝을 가볍게 간질였다. 안대 밑에서 짙은 회색의 속눈썹이 나비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리감겼다.

“잘하고 있어요. 이상하지 않아요. 이런 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봐요, 당신이 사정도 하지 않고 간 걸 보고…….”

이브는 카스텔의 손을 단단히 쥐고 제 네글리제 안으로 밀어 넣었다. 흠칫하는 기색은 있었으나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그녀가 이끄는 대로 이브의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이브 자신의 속옷을 벗어버린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아무런 방해물 없이 숱 적은 수풀 아래 갈라진 틈으로 남자의 손을 인도하는 데에 성공한 이브가 그 사이에 고여 있던 맑은 애액을 그의 손으로 문질러 닦아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나른히 웃었다.

“나도 이렇게 됐잖아.”

그리고는 다시 다리 사이에서 남자의 손을 끄집어내고 뒤이어 그의 귀에 걸린 안대를 벗겨냈다. 갑작스럽게 밝아진 시야에 적응하지 못하고 잠시 멍한 눈빛으로 이브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한참 만에야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제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릿한 듯도 하고, 달콤한 듯도 한 풋내가 그의 감각에 불을 지폈다. 제 머리 위에 군림하듯 올라탄 여자의 육신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흥분케 만들었다는 기묘한 희열과 만족감이 마치 기름이 끓듯 끓어올랐다.

“……이런 걸로 ……기분이 좋으십니까?”

“더할 나위 없이요.”

뿌듯하게 웃은 이브는 남자의 눈 속에서 몽롱한 희열을 발견하고는 슬그머니 장갑을 빼 한쪽에 던져놓은 다음 손을 뒤로 뻗어 아까 따로 빼두었던 목갑을 잡았다.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움직임을 좇으려는 찰나, 이브는 반대편 손으로 남자의 눈가 언저리를 매만지더니 마치 짐승을 다독이듯 뺨과 귓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브의 부드러운 손길에 카스텔의 표정이 마치 홀린 듯 어딘가 모르게 나른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를 노려 이브는 조심스럽게 남자의 목 위로 검은색 가죽 목갑을 채웠다.

“오늘 하루뿐이어도 좋아요. 제 강아지가 되어주세요. 당신처럼 예쁘고, 말 잘 듣고, 귀여운 개가 가지고 싶었어.”

“……그.”

“고민돼요? 그러면 일단 테스트나 한번 해볼래요?”

강아지 테스트, 라고 작게 덧붙인 이브가 목갑에 달린 둥그런 고리에 긴 목줄을 채웠다. 그러고는 줄을 길게 늘어트리고는 침대 바깥으로 내려섰다. 카스텔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이브가 손에 쥔 목줄의 손잡이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

“착하지, 이리 온.”

다시금 남자에게 번민이 찾아왔다. 그는 갈등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멍청히 자리에 앉아 있었고, 이브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기다렸다.

“괜찮아요. 무서워하지 말아요. 자, 이리로 와요.”

카스텔은 강제로 폭압적인 방법을 이용해 꿇릴 수 없는 사람이었고, 즐거운 놀이를 위해서는 그러면 안 됐다. 이브는 사탕으로 아이를 꾀듯 나긋하고 상냥하게 웃으며 다시 목줄을 살짝 당겼다.

결국 평생 그 자리에 붙박여 있을 것 같았던 남자의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엉거주춤 침대의 모서리까지 기어온 카스텔이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섰다. 그리고 그가 이브에게로 한 걸음을 뗐을 때, 이브가 손을 들어 보이며 남자를 제지했다.

“강아지잖아요. 개가 두 발로 걷나요?”

스스로. 어디까지나 저 스스로 몸을 굽혀 복종해야만 했다. 이브는 다정하고 상냥한 선생님 행세를 하며 조곤조곤 남자의 행동을 교정해주었다.

갈등은 길지 않았다. 남자는 어색한 몸짓으로, 그러나 본인의 의지로 무릎을 꿇고 허리를 내렸다. 발아래로 복종을 선택한 남자의 정수리가 보였다. 머리끝이 쭈뼛 설 만큼 오싹한 쾌감이 이브의 신경을 달궜다.

산책을 하듯 이브의 발이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주춤거리며 어색하게 움직이던 카스텔 역시 침실을 한 바퀴 돌았을 때에는 얼추 이브와 걸음을 맞출 정도로 네발로 기는 데에 익숙해졌다.

카스텔은 배 안을 간질이는 장난감이 걸음을 뗄 때마다 장벽을 짓눌러오는 통에 움직이는 내내 잘게 허리를 떨며 헐떡이기는 했으나 결국 이브가 이끄는 대로 침실 일주를 마쳤다.

다시 침대 근처로 돌아온 이브가 쪼그리고 앉아 카스텔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남자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고, 그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 하고 요동쳤다.

잿빛 눈동자 속은 혼란, 희열, 쾌락 같은 것들이 마구 뒤엉켜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가엾게도. 싸고 싶은가 보다. 그렇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죽끈으로 힘껏 조여진, 아파 보일 정도로 잔뜩 부풀어 오른 성기가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뒤를 자극당하면서 차곡차곡 쌓인 성감이 밖으로 분출되지 못하고 끈적끈적한 선액만을 대신 줄줄 흘리고 있었다.

“하하. 귀여워라. 좋아요, 제대로 혀 쓰는 거 배우면 오줌 싸게 해줄게.”

이브는 목줄을 쥔 채로 침대 위에 올라와 줄을 잡아당겼다. 뒷덜미가 불편할 정도로 강하게 죄어오자 남자는 순순히 침대에 올라 바닥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릎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베개를 등 뒤에 쌓아 반쯤 눕듯 앉은 이브가 힘주어 목줄을 바짝 당겼다. 카스텔은 거의 처박히듯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미 본 적이 있는 광경이었다. 과음한 끝에 이성을 잃고 본능만 남아 여체를 탐했던 그 밤의 기억이 인지의 바닥 저 아래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입만 써서 해봐요. 손은 아까처럼 등 뒤로 돌려서 서로 잡고.”

이브가 짓궂게 웃으며 내린 지시에 카스텔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듯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말하는 대로 손을 등 뒤로 두른 후 허리를 숙여 허벅다리를 덮고 있던 옷자락을 입술로 물어 위로 올려 들추었다.

애액이 흘러내려 투명하게 번들거리는 허벅다리 사이를 열 오른 눈으로 내려다보던 카스텔이 슬쩍 눈을 굴려 이브를 바라보았다. 이브는 등을 베개에 파묻은 채 팔꿈치를 베개에 걸치며 입을 벙긋거렸다.

‘핥아요.’

소리 없는 지시가 떨어졌고, 남자는 마른 입술을 혀를 내어 축이고는 몸을 바짝 낮추어 도톰한 둔덕 위에 입을 맞추었다. 질척하니 새어 나온 음액이 카스텔의 마른 입술을 적셨다. 남자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불꽃이 펑 튀는 것 같은 기이한 환상을 보았다.

이브는 다리 사이로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각에 집중했다. 카스텔은 정말 개가 된 것처럼 혀를 내어 이브의 샅 안쪽을 삭삭 훑으며 핥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벌려준 채 조금씩 혀의 움직임을 교정해나갔다. 핥아라, 이로 긁어라, 혀로 굴려라, 입술을 모아 빨아라, 혀를 뾰족하게 세워 넣어라 등등. 명령조로 떨어지는 수많은 지시에 카스텔은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브의 지시대로 작은 음핵을 이로 긁고, 입술을 모아 쪽 소리가 날 정도로 빨아 당기니 구멍 안에서 또 울컥, 맑은 물이 새어 나왔다. 남자는 그것을 혀로 받아 목 안쪽으로 삼켰다. 혀와 목 안이 마비되듯 저릿해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카스텔은 한참 전부터 자신이 침대 시트 위에서 허리를 흔들며 다리 사이를 문지르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열락의 불이 당겨지고 그의 사고는 멈추어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된 지 오래였다. 그저 본능만이 남은 사내는 어떻게든 제게 찾아온 쾌락을 좇아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제가 개가 되어달라고 하긴 했는데, 이 정도로 훌륭하게 개새끼가 되어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네요.”

이브의 조롱이 건네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브는 움찔대는 엉덩이와 앞뒤로 잘게 흔들리는 허리를 보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발정 난 개새끼가 다 됐네. 누가 네 멋대로 엉덩이 흔들어도 좋다고 했지요?”

“흐, 하아, 죄, 죄송합니다.”

사실 카스텔의 머리에는 말의 내용까지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남자는 흐리멍덩해진 사고로 간신히 이브가 저를 탓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차리고 잘못을 빌기 위해 제 몸을 바짝 낮추었다.

카스텔의 입술이 이브의 허벅지 안쪽을 더듬으며 입을 맞추고 살결을 핥아 올렸다. 애타게 제 살갗을 핥고 빠는 남자가 마치 어떻게든 귀염을 받으려 애쓰는 개처럼 보여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용, 서를. 흐으, 부디…….”

“아하하! 재롱이 퍽 귀엽긴 하네요.”

“하아, 흣, 아…….”

“좋아요. 개처럼 발라당 누워볼까요? 다리 활짝 벌려서 부끄러운 곳 전부 저에게 보여주세요.”

곧 카스텔의 자세가 바뀌었다. 등을 대고 누워 다리를 벌려 오금을 붙잡고 있는 남자의 적나라한 자세를 보며 그의 곁에 앉아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던 이브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국 남겨도 돼요?”

“……원하시는 대로.”

“어디에 남길 줄 알고?”

제가 바라던 대답을 들어서인지 크게 뿌듯한 미소를 입가에 건 이브가 허리를 낮추어 카스텔의 가슴 위로 입을 가져다 댔다. 마치 쥐어짜듯 가슴을 단단히 틀어쥔 이브는 살갗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한 후 이를 세워 유륜 바깥쪽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크, 흣!”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강렬한 통증에 카스텔의 몸이 펄쩍 뛰었다. 사정 봐주지 않고 힘주어 살갗을 물어뜯은 이브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떼고 제가 잇자국을 남긴 자리 위로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잘게 입을 맞추었다.

“미안. 피 나네요.”

송곳니가 닿은 부위에서 옅게 피가 묻어났다. 그러나 깊은 상처가 아니라 오래 지나지 않아 금방 아물 터였다. 이브는 멍 자국으로 남게 될 짓눌린 흔적들을 손가락으로 살짝 더듬었다가 만족스레 웃었다.

‘튼튼하니까 조금 거칠게 대해도 잘 버텨서 좋네.’

흥이 오른 듯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자리를 옮겨 앉은 이브는 남자의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고통 섞인 신음을 뱉으면서도 남자는 다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였다.

“꼬리 빼줄 테니까 엉덩이에 힘 풀고. 숨 길게 내쉬어요.”

이브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쪽 손으로 남자의 아랫배를 슬슬 문지르며 아프지 않게 꾹꾹 눌렀다. 배 위를 마사지하듯 움직이는 손길에 잠깐 긴장하고 있던 근육이 천천히 힘을 빼고 풀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긴 꼬리를 붙들고 있던 이브가 손아귀에 힘을 주고 단숨에 그것을 뿌리까지 바깥으로 끄집어 빼냈다. 배 위에 얹어진 손바닥 아래로 남자의 복부 근육이 강하게 수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둑에서 물이 터져 나오듯 입 밖으로 쏟아졌다.

“흐, 하앗! 아! 하악! 그, 만, 힉, 흐윽!”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이브로서는 알지 못했다. 튼튼한 사내니 조금쯤은 다쳐도 괜찮을 거라는 마음으로 거칠게 장난감을 뽑아낸 이브는 동그란 알들이 줄지어 빠져나와 미처 조여들지 못하고 뻥 뚫린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어둡고 습한 구멍 안에서는 윤활제로 사용한 기름이 번들번들한 액과 뒤섞여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천천히 뻐끔대며 개폐를 반복하던 구멍이 조금씩 크기를 줄여나갔다.

남자의 음부는 비록 연이어 끄집어지는 장난감에 잔뜩 쓸려서 붉게 부어오른 감은 있었으나 피가 비치는 기색은 없었다. 이브는 맨손으로 부드러운 회음과 도톰하게 부어오른 구멍 위의 살들을 살살 덧그리듯 더듬어보았다. 부들부들한 회음부와 부어올라 말랑말랑해진 살덩어리는 기름으로 온통 미끈거렸고, 마찰열이 올라 따끈하게 익어 있었다.

“하, 흐윽, 흐…….이제, 제발…….”

“기절도 안 했네. 잘 버텼어요. 정말 잘했으니까 상으로 오줌 싸게 해줄게요.”

킥킥 짓궂게 웃은 이브가 혈관이 솟아 꺼떡이는 남성기의 기둥을 쥐고 고환 뒤를 강하게 조이고 있던 정조대의 여밈을 풀어주었다. 기둥 전체를 감싸고 있던 끈까지 모두 제거되자 한계까지 조여들어 고통 받고 있던 양물에서 울컥울컥 선액이 새어 나왔다.

카스텔은 정말 간신히 다리를 붙들고 있는 듯 보였다. 이브는 그런 그의 양 발목을 잡고 더욱 바짝 바닥으로 짓누르며 남자의 고간과 뒤 허벅지 위로 허리를 내려 앉아버렸다.

위에서 누르는 힘으로 인해 카스텔의 몸은 거의 반으로 접히다시피 짓눌려 있었다. 배가 눌릴 정도로 불편한 자세에 남자는 작게 앓는 소리를 냈지만, 이브는 크게 개의치 않는 얼굴로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타고 앉은 엉덩이와 회음의 맨살 아래로 기름과 선액으로 범벅이 되어 질척한 남자의 성기가 언뜻 스쳤다. 이브는 조금씩 밭은 숨을 내쉬기 시작한 남자에게 살살 속삭였다.

“자, 이 자세 유지하면서 다리 꼭 붙들고 있어요. 다리 놓으면 엉덩이 때릴 거야.”

이브는 단단히 주의를 준 후 카스텔의 다리를 누르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가 자신이 시킨 대로 힘주어 오금 아래를 붙들고 있는 것을 확인한 이브는 그대로 남자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어 그의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기분 좋게 해줄 테니까 다리 잘 잡고 있어요.”

카스텔은 흐릿한 시야 가운데 이브의 입꼬리가 바짝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미소라기보다는 차라리 맹수가 이를 드러내는 것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때, 남자의 목을 덮고 있던 이브의 손에 체중이 실렸다.

“크, 흐윽, 컥……!”

“쉬이. 착하지.”

이브는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앞뒤로 움직여 배꼽까지 올라붙은 남자의 성기 위를 맨살로 문질러주면서 동시에 그의 숨통을 힘껏 조이기 시작했다. 턱 아래 목과 연결된 부분 전체가 콱 틀어막혀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뼈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 숨이 틀어막힌 공포, 성기를 문질러오는 젖은 점막에서 기인한 쾌락이 한데 뒤엉켰다. 카스텔의 뇌는 무엇이 더 강렬하다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컥, 크, 끄윽, 끄…….흑!”

“죽지 않아요. 죽을 만큼 기분 좋을 뿐. 곧 쌀 것 같지 않아? 쾌감에 집중해요.”

숨통이 강하게 조여진 탓에 카스텔의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브는 슬슬 허리를 흔들면서도 남자의 상태를 냉철한 시선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다리를 붙들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지고, 끄륵 하고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때에 돌연 목 위를 짓누르고 있던 힘이 스륵 빠져나갔다.

“커, 커헉! 컥!”

그리고 숨이 돌아오는 바로 그때, 귀두 끝 선단 안쪽에서 백탁액이 쏘아져 나왔다. 이브는 남자의 목 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는 허벅지 위에서 흐트러진 옷자락을 걷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힘차게 쏘아진 사출액이 남자의 배와 가슴 위까지 튀어 살갗 위를 적셨다. 그러나 카스텔은 파정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모자란 숨을 들이쉬기 위해 가쁘게 헐떡이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의 가슴이 바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브가 그의 하체 위에서 허리를 들어 몸을 일으키자 카스텔의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허겁지겁 숨쉬기에 여념이 없던 카스텔의 눈빛이 몽롱하니 흐릿해졌다. 남자는 「당신 정말 소질 있네.」 하고 속삭이며 제 뺨을 더듬어오는 이브의 웃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는 곧 스르륵 눈을 감아버렸다.

침대 한복판에서 축 늘어진 남자의 뒤처리를 해주는 것은 상당히 고역이었다. 데리고 놀 때는 좋았는데, 기절해버린 남자의 무게가 상상 이상이었던 까닭이다.

물을 받아 온 이브는 면포에 물을 적셔서 카스텔의 몸 위를 닦아냈다. 신기하게도 남자는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소질이 있다고 해야 할지, 악착같다고 해야 할지, 생각하며 이브는 늘어진 남자의 몸을 이리저리 굴려 이불 안으로 밀어 넣고, 이런저런 액체들로 더럽혀진 이불보를 걷었다.

옷장에서 긴 바스 가운을 가지고 온 이브가 일단 남자의 몸 위에 그것을 덮어준 후 다른 방에서 이불을 가져와야겠다고 마음먹은 찰나 어딘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브는 들어올 때 꽉 닫아둔 침실 문이 미세한 틈을 두고 벌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문 너머 사람의 기척을 감지해냈다.

문 틈 사이로 인기척을 느낀 이브는 주체하지 않고 서재와 연결된 중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 앞에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알베리크가 있었다.

이브는 아마도 문 틈새로 자신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덜미를 붙들린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집에 웬 쥐새끼가 있나, 했네.”

“…….”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사람까지 다 물리고 과년한 처자 방을 몰래 훔쳐봤을까?”

알베리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낭패 어린 낯빛으로 바닥 언저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브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브는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턱,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남자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제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왜 그래요, 오라버니?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여기까지 찾아오신 거 아닌가요?”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것처럼 거친 손속과는 달리 남자에게 건네는 말은 한없이 부드럽고 상냥했다. 알베리크는 상냥하게 웃고 있는 이브의 손에 목이 틀어 잡힌 채 그대로 방 안으로 질질 끌려갔다.

그대로 침대 근처까지 알베리크를 끌고 간 이브는 내동댕이치듯 그의 멱을 쥔 손을 놓았다.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주저앉은 알베리크의 뒷머리를 강하게 움켜쥔 이브가 그의 머리를 뒤로 꺾어 침대 위를 보게 하였다.

여전히, 이브의 목소리는 우유크림처럼 달고 부드러웠다.

“이런 게 보고 싶었던 거잖아요?”

침대 위는 쓰고 던져둔 장난감과 속옷 따위를 아직 정리하지 않은 탓에 난잡하게 흐트러져 정사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고개를 돌리려는 알베리크의 턱을 틀어쥐고 강하게 고정시키며 이브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꽤 한참 전부터 구경하던 것 같던데. 어때요? 당신이랑은 이런 것까진 잘 안 하잖아.”

“읏……!”

“발정했어? 다른 남자가 내 발밑에서 개처럼 네발로 기는 걸 보면서 자지라도 세웠니?”

“그, 만…….”

“쟤가 내 밑 핥는 거 보면서 혼자 자지 만지고 놀았어? 응? 말해봐. 대체 훔쳐보면서 뭘 한 거야?”

“으웃, 흐윽…….”

사실 놀이에 신경을 쓰고 있느라 알베리크가 언제부터 거기에 서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이브는 대충 넘겨짚으며 그를 떠보았다. 알베리크는 이브의 물음에 제대로 대꾸조차 못하고 말을 흐렸다.

이브는 턱을 부수지 않게 주의하며 힘주어 잡고 대답을 종용하듯 좌우로 흔들었다. 알베리크의 시선은 여전히 침대 위에 붙박여 있었다.

곧 이브는 알베리크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흥분해 들뜬 모습은 아니었다. 이브는 의아한 마음에 남자의 턱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의 눈이 깜빡이며 속눈썹 아래로 투명한 물방울이 한 방울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아니, 뭘 잘했다고 울어요?”

“흑, 우읏…….”

“뭐야, 진짜. 왜 우는 거야? 왜 울어요? 돌겠네, 정말.”

몰래 개인적인 공간을 엿본 남자에게 크게 주의를 줄 생각이었던 이브는 이미 호되게 혼난 사람처럼 서러운 얼굴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알베리크의 선 가는 얼굴을 보고는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브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혀를 차며 물었다.

“왜 우는데. 뭐가 문젠데?”

“나는, 읏, 그게, 그…….”

알베리크는 이브의 날 선 독촉에도 더듬거리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울먹였고, 그의 턱과 머리칼에서 손을 뗀 이브는 복잡한 얼굴로 제 머리를 긁적이다가 남자가 아직 환자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결국 살기까지 완전히 거둔 후 알베리크의 뺨 언저리를 손으로 문질거리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뭘 잘했다고 질질 짜고 있어요. 뚝 해요, 뚝.”

“그, 제가.”

“어어. 네가.”

“제가 더,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뭘요?”

“……그.”

울음을 참느라 중간 중간 허리를 툭툭 끊어먹으며 말을 잇는 알베리크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던 이브의 눈이 번쩍 빛이 날 정도로 크게 뜨였다.

“……설마, 질투했어?”

“…….”

“웬일이야. 진짜? 내가 쟤만 예뻐해서 질투했니? 진짜? 정말?”

“……저는 이제 당신이 말한 대로 함부로 다른 사람을 건들지 않습니다.”

“어어. 그래서?”

“제게는 당신뿐이니까. 그, 러니까.”

이브는 집요하게 알베리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알베리크의 뺨은 숫제 불에 달군 것처럼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남자는 귓불까지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우물우물 주저하며 말을 마쳤다.

“나를, 더 신경 써주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다시금 남자의 눈동자에서 물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제 입으로 말하고도 부끄럽고 서러운지 알베리크는 빨갛게 익은 뺨을 하고선 입술을 앙다문 채 이브의 시선을 피했다.

“사람 안 때린다고 예뻐해달라니, 오라버니 너 양심이 있어?”

“…….”

“아무튼, 뭐. 재고해볼게요. 난 우리 사이에 있는 게 그저 계약서상의 신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라버닌 아니었나 봐?”

“당신은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내가 어떻게 사람의 감정을 예측할 수 있었겠어요.”

“……그래요. 내가 졌습니다. 내가, 당신의 개가 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그대가 명하신다면 구둣발이라도 핥을 테니.”

알베리크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마치 백기를 든 사람처럼 힘없이 속삭였다. 꽤나 노골적인 단어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치고 남자의 표정은 한없이 처량해 보였다.

이브는 알베리크의 항복 선언을 들으며 입꼬리를 삐죽 들어 올렸다. 하도 두들겨 맞아서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니라면, 이 남자가 제게 목매는 이유는 원작의 강제력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나 투닥댔으면서,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얘가 나한테 버리지 말라고 이딴 식으로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겠어.’

“진심이에요? 못 물러주는데.”

“이런 주제로 당신과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이브는 입가에 걸린 비웃음을 지우는 대신 뒤로 몇 걸음 물려 두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었다.

알베리크는 몇 발짝 떨어져 제 쪽으로 손을 까딱이는 이브를 보다가, 침대 위에 죽은 듯 늘어진 사내를 한번 흘깃 쳐다보고는 말없이 몸을 굽혀 바닥에 손과 무릎을 대고 네발로 섰다.

이브는 소리도 내지 않고 제 쪽으로 기어온 알베리크의 순종적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발치에 도착해서야 움직임을 멈추고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를 하고 있는 그에게로 손을 뻗어 그의 뺨과 턱선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하긴, 알베리크 네가 개새끼처럼 네발로 기는 거 하난 참 잘하지.”

상냥한 이브의 조롱에도 남자는 별 대꾸 없이 가만히 그녀의 손길에 제 뺨을 맡겼다. 만일 이곳이 지옥이라면, 이처럼 달콤한 지옥은 두 번 다시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좋아요. 개가 되겠다니, 개처럼 다뤄줘야지.”

그렇게 말한 이브는 제 발로 개가 되겠다며 굴종한 알베리크의 목에 목줄을 채워 작은 개인 서재 안을 질질 끌고 다니며 한참을 놀아주었다.

누가 그녀의 공간 안으로 들어와 굴욕적이 모습을 들키게 될까 두려워 덜덜 떨면서도 폭압적인 이브의 손아래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아래를 바짝 세우던 알베리크는 두꺼운 양장 책으로 볼기를 맞으며 두 차례나 사정하고서야 간신히 목줄을 벗는 것을 허락받았다.

질척해진 속옷 안쪽이 불쾌하게 다리 사이를 적셨으나 옷 속의 사정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동시에 배 안이 찌릿할 정도로 황홀했다. 알베리크는 파리한 힘줄이 돋은 이브의 흰 발등 위로 입을 맞추며 관대한 주인에게 예를 올렸다.

“감, 흐읏, 감사합니다…….”

“이제 일어서도 좋아요.”

휘청이며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알베리크를 이끌어 서재의 마호가니 책상 위에 앉힌 이브는 남자의 뺨 위를 더듬으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준 후 붉게 짓무른 눈가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눈치껏 굴어요. 어떻게 해야 예쁨 받을 수 있을지 잘 생각해서 행동하란 말이야.”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어쩐지 목 뒷덜미의 솜털이 비쭉 서는 것 같은 공포를 느낀 알베리크는 저도 모르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 질 녘이 다 되어서야 눈을 뜬 카스텔은 옷매무새를 단장한 채 웃으며 제게 바싹 마른 옷을 건네는 이브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급히 옷을 꿰어 입은 후 바쁘게 저택을 빠져나갔다.

응접실의 창밖으로 저택의 정문을 빠져나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브에게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는 이브에게 발신인을 알 수 없는 방문 카드가 왔다고 말했다.

어느 나라의 말인지조차 알 수 없는 정체 모를 언어가 적힌 카드를 아가씨에게 건네도 좋을지 고민하던 시종장은 그녀에게 직접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고, 그의 말을 모두 들은 이브는 일단 카드를 달라고 요청해 그 뒷면을 확인했다.

내용을 확인한 이브는 그것을 태운 후 저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잘못 온 카드가 아니겠느냐 하고 태연히 웃어 보였다.

시종장을 돌려보낸 이브는 입이 무겁고, 제게 특히나 충성심을 드러내는 하녀 몇을 불러 누군가 머물렀던 흔적이 역력한 제 침실을 청소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방을 환기하고 이불보를 걷어 가는 것을 보던 이브는 홀로 튜닉 원피스를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후줄근한 셔츠와 짙은 갈색 면바지에 서스펜더까지 착용한 이브는 옷장 한쪽에 처박아두었던 짙은 회갈색 캡을 꺼내 머리에 꾹 눌러썼다.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모자 안으로 밀어 넣은 이브는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복도에서 느껴지는 기척들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그대로 창문을 통해 조심스럽게 저택을 빠져나왔다.

합승 대형 마차까지 이용해가며 마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얽혀 있는 복잡한 골목을 지나 도착한 곳은 한갓진 골목의 3층짜리 석조건물이었다.

이브는 카드에 적힌 대로 곧장 위로 올라갔다. 마치 폐업한 가게처럼 보이는 2층의 먼지 쌓인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서니 후줄근한 문짝과는 달리 아늑한 카페테리아처럼 꾸며놓은 인테리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던 듯, 다갈색 소파에 앉아 있던 윌리엄이 인기척을 느끼고는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에 앉은 이브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밖에서 보기에 장사는 안 하는 것처럼 보이던데,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대?”

“음, 애당초 이런 목적으로 사들인 장소라.”

“……오.”

“편하게 말해도 돼요. 여기서 일하는 친구는 귀가 들리지 않으니까. 아, 마실 것 좀 드려요?”

“그렇다면 사양 않고. 그냥 홍차 있는 거 아무거나 줘.”

이브가 테이블에 턱을 괴며 말하자 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윌리엄의 손짓에 다가온 나이 지긋한 사내가 그의 지시를 받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음료를 내 올 것을 지시한 윌리엄의 얼굴에서 어딘가 주저하는 기색을 본 이브는 말없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가, 잠시 후 음료가 테이블에 놓이고 나서야 먼저 입을 열었다.

“맨날 따라다니는 남자는?”

“아, 세드릭.”

윌리엄의 긴 손가락 끝이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윌리엄이 애매한 웃음을 입가에 걸며 이브에게 물었다.

“「이 사람」 집안 사정은 좀 알아요?”

“대충.”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처음 보좌관이 설명하는 걸 들었을 때만 해도 가진 거 없이 외진 영지로 쫓겨난 천덕꾸러기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치고는 이 사람의 기반이 상당히 튼튼하더란 말이야. 선배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하. 그 「형님」, 정말 무서운 인간이더라고요. 막 화내고 칼부림하면서 미친 사람인 척 구는 거, 그거 다 연기였어.”

주어도 명확하지 않았고, 말의 흐름 역시 논리적으로 흐르지 않았음에도 이브는 그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빠르게 깨달았다.

“황, 아니. 그으. 그 양반이?”

“미치지 않았어요. 완전히 제정신이라고. 앞에선 변덕스럽게 날뛰고 뒤에서는 음험하게 자기 사람들을 부리고 있던데. 「대공」의 기반도 다 그자가 마련해준 거였고.”

“하. 어쩐지, 딸을 후계자로 올릴 때부터 미친 사람치곤 수완이 좋다 싶기는 했지. 아무튼, 그건 그렇고. 그래서 그 보좌관은?”

“세드릭은 「형님」 쪽 사람이라 떼어놓고 왔어요. 제 밑에 있는 사람 중에 몇 명은 알아요. 내용물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거.”

“……혹시 평소에도 그 사람을 형님이라고 불러?”

“가끔.”

“그래서 전에 말실수를 한 거였군.”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이브는 어렵게 입을 열어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들을 하나씩 꺼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너도 모른다고 했지. 그, 마지막에…… 죽었던 기억은 있어?”

“……던전 보스한테 배를 뚫렸던 것까지는 기억나요. 그날 선배 외근이었고. 혜선 누나가 울었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에 있어요.”

“아. 그래, 맞아. 너 수습해서 나온 게 혜선이였거든. 정말 참된 동기 사랑이었지.”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진짜 무서웠어. 누나가 제일 보고 싶었고.”

윌리엄, 혹은 선호. 무어라 불러야 좋을지 모를 남자의 손이 제 쪽으로 뻗어 나와 테이블 위에 주먹을 쥔 채 올려두었던 이브의 손등 위를 덮었다.

같은 분장의 혜선이나 선호 그리고 몇몇 바로 아래 기수의 후배들은 직속 선배인 주영을 잘 따르고는 했다. 딱히 잘해준 기억도 없는데 선배, 선배 하고 졸졸 따르는 후배들이 기특해서 잔기술 몇 가지를 가르쳐주기도 했었다.

특히 선호, 눈앞의 남자는 업무시간을 제외한 때에는 그녀에게 편하게 치대곤 했던 몇 안 되는 후배 중 하나였다. 던전 안에서는 꼬박꼬박 팀장님, 하고 극존칭을 쓰다가도 임무를 마치는 순간 선배니, 누나니 하고 살살 웃으며 한잔하러 가자고 꾀고는 했다. 그리운 추억이었다.

‘그렇게 편하게 굴다가 고백도 해버리고 말이야. 새끼가 빠져가지고.’

이브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제 손등을 덮고 있던 큰 손을 옆으로 치웠다. 남자는 가벼운 거절에도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브에게 물었다.

“선배는 언제 그렇게 됐는데?”

“너 그렇게 가고 얼마 안 돼서……. 언제쯤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네. 물에 빠졌어.”

“물?”

“나 물속성 던전은 쥐약이잖아. 근데 길드장, 그 개새끼가.”

“또 그냥 억지로 밀어붙였구나.”

“거기다 하필 들어갔더니 등급이 바뀌는 유동형 던전이더라고. 난리도 아니었지. C급이 순식간에 A급 던전으로 바뀌고, 보스는 히드라였고, 베이스캠프 개박살 나고, 화염 계열 에스퍼는 어디 잘못 맞았는지 기절했고. 그 와중에 막내 끌려가는 거 보고 눈 돌아가서 앞뒤 생각 안 하고 어그로 끌다가 못 피해서 뭐, 물에 질질 끌려가서. 음. 그렇게 됐지.”

이브는 점점 안색이 흐려지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뒷말을 대충 얼버무렸다.

“사인은 차치하고,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야.”

그렇게 말을 뱉은 이브의 표정이 점차 심각해지는 것을 본 윌리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신 조작 가능성은?”

“나 특수 스킬 저항 패시브 있잖아.”

“S랭크 이상은 먹히잖아요.”

“하지만 그 정도의 실력자가 나나 너한테 이런 공을 들여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잖아. 뭐가 거슬리면 차라리 깔끔하게 죽였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남자가 입을 다물고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둘은 한참이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보았으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자를 추려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두 사람이 겪은 지난 시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현상은 인간이 스킬로 만들어낼 수 있는 환상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었다. 믿어지지는 않았으나 이것은 인력으로 이루어진 상황이 아님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난 진짜 내가 돌아버린 줄 알았거든. 죽어가면서 무슨 환각 같은 거 보는 줄 알고 눈뜨고 한 반년 넘게 정신 나간 상태로 살았어요. 물건 같은 거 다 집어 던지고 소리 지르고. 그러다가 발작 일으켜서 숨 몇 번 넘어가기도 하고.”

“……그러냐. 고생했네.”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이게 진짜 환각인 건 아닐까 하고. 뇌가 죽어가면서 보고 싶은 걸 보여주는 건 아닌지.”

“야. 넌 무슨, 죽을 때 회사 상사 얼굴을 보고 싶어 해.”

“……그냥 상사 아니고 누나잖아.”

“뭐래. 징그럽게.”

남자의 말을 가볍게 농담처럼 툭 받아친 이브는 찻잔을 들어 차 한 모금을 목 뒤로 넘겼다.

새로운 육신에서 눈을 뜨고서도 한참 동안 변해버린 환경을 계속해서 밀어냈다는 윌리엄의 이야기를 들은 이브는 이제야 겨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억지로나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더는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브는 「이브를 위하여」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속으로 그와 공유할 정보들을 몇 가지 추려내고서야 이브는 찻잔에서 입술을 떼었다.

“일단 짚이는 데가 있긴 해.”

이브는 지금껏 접한 정보들을 가지고 나름대로 추측한 결괏값을 떠올렸다.

“어쩌면, 내가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을지도 몰라.”

“대단한 사람?”

“너 내 각성 스킬 기억나?”

“대충은요. 전투 스킬은 별로 없었고 대부분 패시브뿐이었다는 것 정도로만.”

“그래. 덕분에 레벨만 맞으면 특수 속성 던전은 속성 안 가리고 참여할 수 있는 건 좋았지.”

“그런데 그게 갑자기 왜?”

“내가 요즘 조사하고 있는 게 있거든. 여신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옛날이야기인데.”

이윽고 이브가 후줄근한 외투의 포켓 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작은 종잇조각을 끼워 넣어 표시를 해둔 페이지를 펼쳐 든 이브가 그 안의 내용을 차분히 읽어 내렸다.

“신의 화신들은 제각기 두각을 드러내는 분야는 달랐으나 시대를 막론하고 일정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떠한 독에도 중독되지 않았고, 상처의 수복이 빨랐으며 정신력이 굳건해 마력을 동반한 그 어떤 저주에도 침습되지 않았다. 또한 병들고 지친 자들과 분노에 잠식된 삿된 존재들을 끌어당기는 힘 그리고 여신의 이름으로 축복을 내려 어둠의 씨앗을 치유하는 힘이 있었다.”

“……잠깐.”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설정 아니냐.”

“맨 마지막 건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독 저항, 특수회복, 저주저항, 세뇌저항, 매혹저항, 매혹. 이거 다 전에 가지고 있던 패시브거든. 그리고 남들한텐 말 안 했던 스킬 중에 아무리 감정을 받아도 스킬 설명 부분이 깨져서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던 스킬이 하나 있었는데, 그 스킬 이름이 「여신의 축복」이었어.”

“……대체 그거 뭐야. 판타지 영화? 「반×의 제왕」?”

“모르겠다, 나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에드워드 그 개새낀 또 뭣 하러 이런 걸 던져줘서 사람 골 아프게 만드는 지.”

이브가 짜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가볍게 욕설을 뱉었다. 익숙한 이름에 윌리엄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고 보니 황제 쪽 장남이 누나 귀찮게 하는 것 같던데. 무슨 사이인지 물어봐도 돼요?”

“별건 아니고. 이상하게 나한테 질척대는 애들이 좀 있는데, 그중 하나야.”

“애「들」이요…….”

“어어. 뭐, 몇 명 좀 있어.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이상하게 구는 남자들이. 별로 대수로운 관계는 아니고.”

하여튼 그중에도 에드워드 그놈이 제일 미친놈이야, 하고 중얼거린 이브는 원래라면 그 미친놈 중 하나가 될 운명을 가지고 있었던 남자의 얼굴을 슬쩍 훑어보았다.

내용물이 달라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게임에서 본 것과는 달리 인상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특히나 이브를 보고 「주영」을 떠올리는 듯 양순한 표정을 지어 보일 때는 정말로 무슨 순박한 강아지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브는 제 감상을 털어내며 턱을 괴고 앉아 티포트를 들고 다 식어 조금 뜨뜻한 온기만이 남아 있는 홍차를 찻잔에 쪼르르 따랐다.

“그렇단 이야긴 별로 걱정할 문제는 아니란 거네.”

“음. 그렇지, 아마?”

“……그 아마는 또 뭐예요?”

“그게, 실은 이미 일을 좀 쳐서.”

“설마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네 어쩌네 하면서 먼저 선빵 치고 쓱싹 해버린 건 아니지?”

“팬 건 딱 한 명밖에 없어. 아, 아닌가……. 볼기짝 두들긴 것도 팼다고 봐야 하나?”

“하……. 내가 성질 좀 죽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결국 범죄의 길로…….”

“뭐 인마?”

“팬 건, 이라면 다른 것도 했다는 소리네요. 선배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그으러니까……. 애들 볼기짝 몇 대 좀 때려줬고, 묶어놓고 조금 귀여워도 해줬고.”

“폭행에 강간? 이거 완전 강력범 아냐?”

“아니, 너는 말을 그렇게 노빠꾸로 필터링 없이 하냐. 그냥 조금 정 떨어지라고 몇 대 쥐어박은 거지. 그리고 합의하에 하기도 했거든? 그건 강간 아니거든?”

“말을 맙시다…….”

이브의 당당한 주장에 저쪽에서 골 아프다는 한숨을 내뱉었다. 이브가 찻잔을 기울였다. 윌리엄 역시 한 김 식어 뜨뜻미지근해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잠깐의 침묵을 지켰다.

커피를 목 뒤로 넘기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시선으로 찬찬히 이브의 머리 위부터 훑어 내리던 윌리엄이 한참 만에야 잔을 소서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 남자들이 왜 갑자기 선배한테 미쳐서 눈이 돌아갔는지는 알 것 같기도 해요.”

“뭐?”

“선배인 거 모르고 있었을 때도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거든.”

“구체적으로 설명해봐. 어떤 느낌이었는데?”

“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시선이 가고, 같은 공간에 있으면 유난히 존재감이 두드러진다고 해야 할까. 가까이 붙어 있으면 어딘가 모르게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다가도 누그러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안정감이 느껴져서 그런지 계속 곁에 두고 싶어져요. 아마도 이런 묘한 느낌 때문에 점점 관심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싶은데. 이게 그 축복인가 뭔가 하는 스킬 효과 아닌가?”

“뭐야, 그거. 기분 나빠.”

“구체적으로 설명하라며. 말을 해줘도 난리야.”

아랫입술을 삐죽이며 툴툴대는 윌리엄의 설정 붕괴급 표정을 보며 뭐 인마? 콱 씨 하고 대꾸하면서도 이브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의 추측대로 이게 스킬 효과의 일종이자 「화신」의 능력 중 하나라면 그렇게 질색을 하고 도망쳤던 칼리스토가 「잊을 수 없었다.」며 제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에드워드의 과도한 집착 증세 역시 단순히 이브가 시간의 반복마다 다른 행동 양상을 보였기 때문에 발현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술에 취해 마음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제게 몸을 내맡긴 카스텔이나, 매정할 정도로 농락을 일삼는 이브를 끊어내지 못하고 점점 애정을 갈구하듯 매달려오는 알베리크의 태도 역시 대충이나마 설명이 가능했다.

‘내가 무슨 델리만쥬냐. 어디에 있든 존재감이 두드러지고 냄새에 홀려서 먹고 싶어지게.’

골치 아프다는 표정도 잠시였다. 이브는 턱을 괴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뗐다.

“아무튼 내가 할 일이 좀 있는데…… 너, 나 좀 도와줘야겠다.”

“뭔데요?”

“네 밑에 있는 입 무거운 사람 몇 명만 좀 쓰자. 알베리크는 에드워드 놈 사람이라 나 혼자 몰래 움직이기가 좀 까다로워서.”

“사건 은폐는 폭행까지야. 귀족이나 황족 시해는 나도 못 묻어요.”

“미친, 그런 거 아냐 인마. 내가 뭘 좀 찾을 게 있는데 그것 좀 대신 찾아봐주라.”

“……그 정도라면.”

“좋아.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일단 다시 말투부터 되돌려놔. 윌리엄 얼굴로 자꾸 누나, 누나 하니까 좀 징그럽다, 야.”

“……!”

이브가 진지한 얼굴로 꺼낸 말을 듣자마자 윌리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선호일 때는 누나, 하고 부를 때마다 귀여워해줬으면서 껍데기가 바뀌자 가차 없이 돌변한 이브의 반응에 남자의 표정이 배신감으로 짙게 물들었다.

“너랑 나랑 껍데기 나이 차가 얼만 줄 알기나 해? 자그마치 일곱이야, 일곱. 완전 아저씨라고.”

“뭐라고요? 아저씨?”

“물론 윌리엄이 얼굴만큼은 끝내주는 미인이 맞긴 한데, 암만 잘생겨도 누나 소리는 연하한테 들어야 제맛이지. 무슨 플레이하는 것도 아니고, 낼모레 서른한테 누나 소리 들어도 하나도 안 반가워.”

“너무한 거 아니야? 선배 지금 회춘했다고 유세야?”

“어휴, 전하. 말씀 낮추시지요.”

“영애 정말 싸가지 없고 짜증 나는군.”

“뭐, 이 새끼야?”

윌리엄은 티포트를 들고 집어 던지는 시늉을 하는 이브를 건성으로 말렸다. 하도 부산스럽게 투닥거리는 바람에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제 할 일을 하던 은신처의 담당자가 두 사람의 허물없는 모습을 슬쩍 곁눈질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한참 동안 더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조만간 다시 만날 약속을 잡고 헤어졌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이브의 표정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브는 어둡게 침잠한 눈으로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더럽게 유치하긴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내가 신의 화신이라고 쳐. 개연성이고 합리적 이유고 다 떠나서, 내가 성녀 나부랭이라서 이브의 세계로 끌려온 거라고 치자고. 그 게임은 뭐, 베타테스트라든가 그런 용도였다고 하고. 그러면 선호 쟤는 대체 왜 여기 딸려 온 건데? 설마 쟤도 게임 플레이어인가?’

이브는 그녀를 이 세계로 떠민 이의 의도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이의 피륙을 둘러쓴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동료를 다시 만난 것은 어찌 보면 기쁜 일이었으나, 그녀는 어쩐지 아끼던 팀원의 안식을 제가 방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유쾌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등받이 깊이 몸을 파묻고 고개를 뒤로 젖힌 이브가 복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길게 숨을 내뱉었다. 원작의 루트를 따른다고 한들 신을 만날 수는 있는 걸까. 더 이상 이 세계는 단순히 게임 속의 세계가 아니게 되었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이정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한편, 이브가 일어난 뒤에도 윌리엄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이브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남자를 모시러 온 측근 호위도, 보좌관도 사색에 빠진 남자에게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윌리엄」의 이름을 받아들이기로 한 남자, 유선호는 지독할 정도로 매력적인 그 여자를 떠올렸다.

이벨린, 이브……. 그리고 그전에 주영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여자.

곁에 있음에도 곧 사라져버릴 것처럼 어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다니던 그 사람. 항상 아득히 먼 어딘가를 바라보며 그녀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를 내내 그리워하던 사람.

유선호의 기억 속 여자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책임감이 강했고, 어리고 약한 것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물러졌다. 비록 다소 까칠하고 변덕이 심한 데다 난폭하기까지 해 미친개니 뭐니 하는 별명으로 불리고는 했지만, 그녀는 제 영역 안의 사람들만큼은 부드럽고 세심하게 챙기고는 했다.

다정한 그녀는 자기 품에 들어온 모두를 소중히 여겼다. 그 애정의 편린을 맛본 이들 모두가 중독되어 그녀의 유일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할 정도로. 선호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곧 깨달았다. 주영은 모두를 소중히 여기지만 그들 모두가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다. 주영에게는 그 누구도 중요하지 않았다. 멀어지면 아쉽지만, 그저 그뿐일.

눈물이 날 정도로 다정하고, 잔인할 정도로 무정한 여자. 그는 언제나 그녀의 초연한 눈빛을 볼 때면 울고 싶어지곤 했다.

유선호는 그녀의 단 하나뿐인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존재. 모두가 그 자리를 놓고 발버둥을 쳤다.

숨이 끊어진 이후에도, 생애를 하나 뛰어넘어서까지 그 자리를 두고 다투게 된 남자는 생각했다. 그에게 이것은 죽음 이후 찾아온 두 번째 기회나 다름없다고.

어쩌면 이렇게 지독할 정도로 달콤한 고통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이것이 신의 뜻이라면. 이번에는 절대. 절대로.

그러나 뒤이어지지 못한 다짐이 이내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처럼 흐트러져 사라져버렸다. 남자가 돌연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그렸다.

“가지.”

한참 만에야 생각을 정리하고 일어선 남자가 수행원들을 앞장세웠다. 확신한 이상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역시 형님을 보내드려야겠어.”

“예?”

“계집이라고 불렀잖아.”

“……네?”

감히, 하고 작게 덧붙인 윌리엄이 제게 갈색 가죽 장갑을 건네다 말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세드릭을 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장남과 약속을 잡게.”

“공식적으로 말입니까?”

“농담하는 건가?”

“아, 아아. 예. 알겠습니다.”

웃으면서 서늘하게 목소리를 가라앉히는 윌리엄의 대꾸에 세드릭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오래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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