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5월의 사냥회 (14/22)

13. 5월의 사냥회

“하하. 폐하께서도 매번 똑같은 수를 쓰시는군. 적당히 넘어가주는 것도 이젠 지친단 말이야.”

각지에 퍼진 세작들이 올려 보낸 보고서들을 들여다보던 에드워드가 마치 흥얼거리듯 즐거운 기색마저 엿보이는 나른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업무 보좌라는 명목으로 남자의 집무실에서 함께 귀족들의 동향을 살피던 알베리크가 서류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고 제 주군을 바라보았다.

에드워드는 입가에 걸린 비웃음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며 보고 있던 종이 뭉치들을 들어 내밀었고, 그 모습을 본 알베리크는 에드워드에 자리로 다가가 조심스레 서류를 받아 들고 그 자리에서 종이를 펄럭펄럭 넘기며 내용을 훑었다.

“상당히 노골적이군요.”

“조만간 카스타 후작이 씩씩대며 찾아오겠군. 미리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두어야겠어.”

제 조부를 마치 피 안 섞인 남처럼 부르는 황태자의 태도에도 별말 없던 알베리크가 서류의 마지막까지 훑어본 후 다시 그것을 에드워드에게로 돌려주며 혀를 찼다.

고작해야 얇은 종이 몇 장 안에는 2황자와 엘리자베스 비 측의 사람들이 내년 의회에서 통과시키려 추진 중인 새 법률 안건에 대해 입수한 기밀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이 법안은 특정 귀족과 그의 영지에 귀속된 평기사와 일반 병사들의 의무신고제도와 관련한 것으로, 국가에 적을 둔 군인이나 경찰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통해 다양한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대신 국가에 환난과 같은 비상상황이 발생할 경우 황명을 통해 동원령이 강제될 수 있다는 내용의 법안이었다.

충성 서약을 맺은 기사는 동원령을 거부할 권한이 있다는 조항이 있었으나 이미 선황 대에 들어 황족 이외의 사람이 기사에게서 충성 서약을 받는 것은 불법이 되었으니 사실상 귀족들의 병권을 약화시키겠다는 속셈이었다.

이 제도는 분명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사병을 가진 카스타 후작과, 그런 그를 외척으로 두고 있는 에드워드를 노린 덫이었다. 2황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야 문관 중심의 신귀족들로 이루어져 병력에 대해 아쉬울 것이 없었으나 에드워드의 사람들은 달랐다. 혈통과 정통성을 중요시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푸른 피의 귀족들이라면 오랜 역사에 걸맞게 제 사람으로 이루어진 기사단을 꾸리고 있기 마련이었다.

설사 통과가 되지 않더라도 황태자가 사익을 위해 공익을 저버리는 파렴치한이라는 이미지를 씌울 수 있었다. 직접적인 타격이야 없겠지마는 민심이 흔들릴 것은 자명했다. 레이놀드의 비호를 등에 업고 신나게 입방아를 찧어댈 몇몇 신문사들까지 생각한다면 에드워드로서는 상당히 귀찮은 수작질이 아닐 수 없었다.

“말이 좋아 폐하께서 큰 선심을 베풀어 각 가문의 사병들에게까지 복지를 확대한다는 거지, 사실상 사병제를 철폐하고 모조리 국가의 병력으로 흡수하겠다는 의미 아닙니까. 이 「비상상황」에 대한 설명이 두루뭉술한 것이 특히 걸리는군요.”

“등록을 강제한다는 건 각 귀족이 가진 병력 규모를 파악하겠다는 심보지. 이걸 한 번에 해치우려 하다니, 욕심도 많으시군.”

“통과될 리가 없는 안건입니다. 개인적으로 병력을 꾸리고 있는 귀족들의 반대가 어마어마할 텐데요.”

“글쎄. 요즘 둘째가 사냥 시즌을 마음껏 만끽하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다고 하던데. 게다가 어찌 되었든 취지는 나쁘지 않아. 아직도 일반 병사의 경우 제대로 된 계약서도 없이 반강제적으로 복속되길 종용받다가 가치가 떨어지면 별다른 보상조차 받지 못하고 내쫓기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평의원 쪽에서는 굳이 반대할 명분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걸세.”

그들로서는 귀족원의 콧대를 누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테지,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말을 이은 에드워드는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그의 태도는 마치 이미 그들이 추진하는 제도가 통과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보였다.

알베리크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가만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때때로 에드워드는 마치 미래를 보듯 아련한 눈빛을 하고 확신에 찬 말을 내뱉었다.

알베리크는 이 금발의 사내가 예언에 가까운 추측을 노래할 때면 모골이 송연해지고는 했다. 하지만 그의 예언이 적중하는 것을 보며 제 선택이 옳았다는 희열에 들뜨기도 했다.

칼리스토는 종종 에드워드를 보고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듯 보인다.」라고 평하고는 했다. 말마따나 에드워드는 전지의 능력을 갖추고서도 초연히 구는 구석이 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우가 열심히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손윗사람이 되어 느긋이 있을 수만은 없겠지. 초대장을 추가로 써야겠어.”

짧게 생각을 마무리 지은 에드워드가 종을 울려 시종을 불렀다. 그의 말에 곧 남자가 무슨 그림을 그리려는지 짐작한 알베리크가 조용히 물었다.

“중립파를 끌어들이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추밀원장이 중립파의 수장이지 않나. 요는 놈들을 물어뜯는 게 나만 아니면 된다는 거지.”

“발커레스 공작이 쉽게 초대에 응할는지요.”

“굳이 공작 본인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지. 그저 그의 이름만 빌려오면 그만이야. 마침 공작이 아끼는 막내 따님께서 근래 들어 사냥에 취미를 붙였다더군. 아멜리아 쪽의 사냥회에도 참석했다고 하니 내 체면을 보아서라도 친필로 작성한 초대장을 돌려보내진 않을 걸세.”

부드럽게 웃은 에드워드는 곧 시종이 준비한 향이 밴 고급 종이 위를 슬쩍 손끝으로 쓸어본 후 사금을 곱게 갈아 섞은 짙은 푸른빛 잉크에 펜촉을 담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종이 위에 한가득 장식적이고 유려한 글씨가 메워지고서야 에드워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자네와…… 이벨린 영애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어.”

만찬회가 있은 지 두 달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게임의 메인 이벤트 중 하나인 5월의 사냥회가 시작되었다.

혹독한 겨울이 작별을 고하고 꽃이 피는 봄날과 맞물리는 헌팅 시즌 무렵부터는 각자의 영지를 벗어나 수도로 올라온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말을 타고 산으로 들로 쏘다니기 마련이었다.

이브 역시 날이 풀리기 시작한 이래로 주에 한 번 이상은 꼭 수행인이라는 명목하에 알베리크의 사냥회 모임에 따라가 사격 솜씨가 형편없는 사촌을 대신해 여우며 토끼 따위를 잡았다.

기실 사냥회의 본질이란 총을 쏘고 동물을 잡는 것이 아닌, 겨우내 침체하였던 귀족들 간의 교류를 활발히 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데에 목적을 둔 신사들의 친목회나 다름이 없었다. 대부분의 신사는 사냥보다도 저들끼리 한적한 숲을 거닐며 정치와 경제, 사교계의 가십에 대해 떠들기를 더 즐기고는 했다.

그러나 명색이 「사냥회」인 만큼 말 옆구리에 마탄총에 맞아 죽은 동물을 서너 마리 정도는 꿰차고 있어야만 면이 살았다. 그 덕에 바쁘게 여우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은 귀족 어르신들이 아닌 그들의 수행원들이 되었다.

군벌 귀족들의 모임쯤 되면 직접 총을 쏘아 잡은 동물의 덩치와 수로 우열을 나누는 진지한 사냥회가 열린다고는 하지만 그런 모임은 소수였다. 대개는 알베리크처럼 대동한 이들이 대신 사냥을 하고, 그 결과물을 제 몫인 양 뽐내고는 했다.

이는 황태자가 주최하는 5월의 사냥회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조금 더 규모가 커지고, 참여하는 이들이 그와 가까운 위치의 귀족이라는 점 외에는 여느 사냥 모임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말하자면, 이브 역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알베리크의 수행을 위해 직접 말을 달려 동물의 뒤꽁무니를 쫓아 총을 쏘기 위해 참석해야만 했다는 의미였다.

“바지는 그렇다 쳐도, 액세서리조차 걸치지 않는 겁니까?”

“거추장스러워요. 애초에 가지고 있는 장신구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어쩐 일로 먼저 채비를 마치고 이브의 방을 찾은 알베리크가 이제 막 환복을 마치고 머리를 만지고 있는 이브의 모습을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위아래로 훑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단장을 도와주는 메이드가 모자를 쓸 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총총 땋아 내려주는 것을 거울을 통해 구경하던 이브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하니 그 말을 듣자마자 남자는 레이디스 메이드들에게 이브의 장신구들을 꺼내 오라고 지시를 했다.

알베리크는 하녀들이 들고 오는 보석을 보관하는 상자들의 개수에서부터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하더니 액세서리 함이 열리고 내용물들을 확인하면서부터는 냉기가 풀풀 흐를 정도로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과연, 이런 것들을 하고 나갔다가는 부끄러워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하겠군요.”

“오오. 막말.”

“당신이 장신구를 즐겨 패용하지 않아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패물의 수준이 이 정도로 형편없었을 줄이야.”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찬 알베리크가 집사장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러고는 패물들을 도로 돌려보내고는 메이드가 들고 있던 짙은 붉은빛의 타이를 넘겨받았다.

“이쪽으로.”

머리를 묶은 리본의 여밈을 확인한 메이드가 뒤로 물러서자 이브는 화장대에서 일어나 알베리크에게 다가갔다. 칼라 위로 리본이 둘리고 익숙한 손놀림 아래에서 긴 끈이 매듭지어졌다. 노트의 한가운데를 꾹 눌러 딤플까지 만들어내며 타이의 모양새를 매만진 알베리크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가 짙은 녹색의, 포켓이 큰 헌팅 슈트의 코트를 들고 가까이 다가와 이브가 코트에 팔을 꿰는 것을 도왔다.

새하얀 셔츠와 오금부터 폭이 좁아지는 흰색 바지,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검은색의 긴 부츠, 베이지색 베스트 위에 헌터 그린 컬러의 코트를 걸친 이브의 모습은 얼핏 사냥회에 참가하는 훌륭한 신사처럼 보였다. 어떻게 치마를 입고 말을 타는 불편한 짓을 사서 하겠냐고 고집을 부린 결과였다.

긴 청은색 머리를 곱게 땋아 왼쪽 어깨 앞으로 모아 늘어트렸다는 것만 빼면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차림새를 한 알베리크는 한숨이 나올 정도로 신사복이 잘 어울리는 이브의 모습에 무어라고 타박을 할까 입을 달싹이다가 곧 포기해버렸다.

허리 위를 벨트로 조이고 있는 이브의 머리 위에 톱해트가 얹혀졌다. 적당한 위치에 모자를 눌러씌운 알베리크가 반짝이는 헤이즐넛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슬슬 출발하지요.”

그러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을 돌려 이브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이브는 급하게 롱소드를 챙겨 벨트 위로 검집대를 채우면서 남자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쏜살같이 달려 황실에서 매입한 황궁 인근의 사냥터 부지인 로열 파크로 향했다.

오로지 유희만을 목적으로 인공적으로 조성된 로열 파크의 언덕과 숲은 오랜 시간 황실에서 공들여 가꿔온 것으로, 한때 사냥터를 유지하는 데에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사치를 조장하는 사냥터를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적이 있었으나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강력한 황권을 앞세워 의회를 장악했던 선황 대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쑥 들어가면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이브는 알베리크에게서 로열 파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으면서도 뭐 얼마나 대단하기에 사치 때문에 사냥터를 없애자고 하나 하는 생각을 했으나 마차가 사냥터의 정문을 넘어가면서부터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사치와 향락 인정이요.’

파릇한 새순이 올라오는 시기에 걸맞게 봉긋하게 솟아오른 언덕들은 저마다 푸른 옷을 덧입고 있었고 언덕 너머로 보이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언뜻 수사슴의 뿔 같은 것이 보이는 듯했다.

게이트를 넘어온 지도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 가도 가도 언덕과 오래된 고목들의 향연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통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잘 가꾸어진 도로나 보기에 아름다울 정도로만 적당히 모양이 잡혀 우거져 있는 수풀, 인간이 손을 댄 듯 깔끔하게 모양이 잡혀 가지가 쳐진 나무는 이 넓은 공간이 사람의 손을 타 정돈되었음을 강력히 어필하고 있었다.

이브가 창 바깥을 슬쩍 내다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던 그때, 천천히 마차의 속도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이브를 반긴 것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윤슬이 수면 위를 뒤덮은 넓은 호수와 그 위를 유유자적 떠다니는 오리, 호숫가 근처를 장식하듯 심어진 쨍한 분홍빛의 철쭉이었다.

마차가 대기하는 곳에서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호숫가를 따라 연분홍빛 꽃망울을 틔워내고 있는 이름 모를 꽃나무들과 그 아래에 햇빛을 가리는 차양이 천막처럼 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통 대기소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죽여야 하는 쪽은 숙녀들이니 사냥터의 임시 대기소는 숙녀들의 입맛에 걸맞게 꾸며진다고는 하지만 이브는 이 정도로 대놓고 꽃놀이 판을 깔아주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간 알베리크를 따라다니며 보아온 사냥회의 분위기와는 천양지차였다.

이브는 단지 태양 빛을 막는 것만이 목적이 아닌 듯 섬세하게 무늬를 내어 짜인 차양 아래 상당히 본격적으로 갖추어진 티테이블과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고 있는 제복을 걸친 시종들을 바라보며 영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정말…… 많네요.”

“태자 전하께서 손수 주최하시는 사냥회이니 그럴 수밖에요.”

“으. 이게 다 뭐람. 극혐.”

“……슬슬 입을 다무는 게 좋겠군요. 주위에 귀가 많습니다.”

만찬회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있은 이후 이브는 한동안 귀족들이 모이는 곳에 가기만 하면 은근한 시선을 받았다.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목소리를 내어 여성임을 밝히는 순간 「저 여자구나.」 하는 눈빛으로 은근슬쩍 이브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는 것이었다.

의외인 것은 이브의 파격적인 행색이 독단적인 기행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두 황족 사내의 「취향」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타의 신사들처럼 웨이스트코트와 프록코트를 걸친, 사냥 실력이 출중한 중성적인 분위기의 여성이 아직 미혼인 황태자 전하와 대공 전하가 선호하는 스타일이라는 소문이 귀족가의 영애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돌기 시작하면서 올해 헌팅 시즌에는 바지 정장을 갖춰 입은 용감한 아가씨들이 종종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대다수의 영애는 승마용으로 만들어진, 외출용 드레스보다는 덜 펑퍼짐한 라인의 투피스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나 은근히 소문을 신경 쓴 듯 승마용 드레스 역시 레이스나 주름 장식을 최소한으로 써 깔끔하게 떨어지는 라인의 디자인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유행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히 치장한 귀한 신분의 여인들도 분명히 있었다. 이브의 시야에 「귀한 신분의 여인」이 잡힌 것은 순간이었다.

“아니, 저 사람은 여기 왜 온 거래요?”

“글쎄요. 전하께서도 분명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만…….”

이브는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소곤 알베리크에게 물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엘리자베스 비의 소생이자 황제가 가장 아끼는 셋째 딸이 담담한 얼굴로 제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어울리고 있었다.

거절을 염두에 두고 의례적으로 돌린 초대장이었다.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엘리자베스 비와 그녀의 아들은 불참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아멜리아 황녀가 초대에 응할 줄은 몰랐다며 알베리크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가 2황자를 지지하는 몇몇 가문의 레이디들과 근위 기사를 이끌고 참석했다는 것을 슬쩍 일러준 알베리크는 이내 사고 일으키지 말고 특별히 품행에 주의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이브를 떼놓고 가는 것이 영 불안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신사들이 모이는 임시 천막 쪽으로 가버렸다.

이브는 이미 이벤트의 시작부터 게임의 주요 스토리와는 백억 광년 정도 떨어지고 만 전개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브가 차양 안으로 발을 들이밀기 이전부터 그녀의 행적을 주시하던 숙녀들이 차양이 젖혀지는 순간부터는 슬그머니 부채를 펼쳐 들어 노골적인 호기심을 가렸다.

코르셋을 조여 버릇하지 않아 탄탄하게 떨어지는 허리선과 오랜 단련으로 다듬어진 쭉 뻗은 어깨, 일반적인 여성에 비해 머리 하나 정도 불쑥 솟아오른 키는 레이스와 러플, 실크로 만든 조화로 치장한 숙녀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그럼에도 이브의 낯 위에 무리에서 튀는 사람 특유의 불안감이나 긴장 따위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이브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나마 낯이 익은 숙녀와 눈을 마주치고는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이브와 시선을 마주친 밝은 금발과 녹색 머리를 가진 영애는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는 알베리크를 따라 사냥회를 오가다 보니 자연스레 안면을 익히게 된, 「같은 라인을 탄」 가문의 아가씨들 중 한 사람인 엘레스터 후작가의 레이디 클로디아였다.

그녀의 주위로는 동그랗게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솟아오른 볼러해트를 쓰고 승마용 드레스와 끈으로 가볍게 조인 밸모럴 부츠를 갖춘 레이디들이 조르르 모여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부채를 살랑이고 있었다. 몇몇은 얼추 얼굴을 알아보았으나 몇몇은 전혀 마주친 적이 없는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가문의 위치가 더 높은 클로디아 쪽에서 먼저 알은체를 하며 이브를 불렀다.

“평안하셨나요. 레이디 이벨린.”

“그간 평안하셨는지, 레이디 클로디아.”

“자아. 어서 이쪽으로 와 앉으세요. 영애와의 인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이 많답니다.”

후작가의 아가씨가 부르시는데 사교계 짬도 안 찬 그녀가 거절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이브는 얼굴에 접대용 미소를 그려 보이며 어느샌가 시종이 채워놓은 빈 의자에 가서 자리를 채웠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곧 차 시중을 드는 메이드가 이브의 앞에도 우유와 설탕을 듬뿍 넣은 밀크티를 한 잔 놓아주었다.

언뜻 등 뒤로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이브는 어김없이 구경거리가 되고는 했으니, 이브는 여상한 태도로 그 모든 시선들을 무시해버렸다.

이브는 이 시간이 지나면 뇌에서 휘발되어버릴 아가씨들의 이름과 가문을 소개받으며 얌전히 웃어 보였다. 어떤 사람은 호의적인 미소를 마주 건네었고 또 어떤 사람은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이브를 위아래로 훑었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익숙한 반응이었다.

이브는 홀짝홀짝 컵 속의 홍차를 비워가며 가벼운 한담을 이어나갔다. 지루한 시간이었으나 굳이 깽판을 칠 이유는 없었다.

“레이디 이벨린은 신사분들과 더 안쪽으로 사냥을 나가신다지요? 오늘도 사냥에 직접 참가하시나요?”

“아, 네. 보잘것없는 재주지만 오라버니께서 좋게 봐주신 덕에 함께 사냥을 즐기는 것을 허락받았답니다.”

“어머나, 대단하네요!”

그리고 그 순간 그리 떨어지지 않은 무리에서 부러 들으라는 듯 조금 힘을 실은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의 공자께서 들인 사냥개가 제 몫을 다 하고 있는 모양이지요?”

“소백작께서 안목이 뛰어나시군요. 비록 혈통은 어디 내놓아 자랑하기 부끄러운 잡종이지만 집 지키는 개로는 쓸 만하다 들었어요.”

“호호. 주워 기른 값은 하는군요. 하지만 들개란 언제 이를 드러낼지 모르는 족속들이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네요.”

이브와 함께 대화를 나누던 영애들의 반응이 반 박자 정도 주춤하는 것이 모두가 그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이브는 생각 없이 드러내놓고 모욕을 주는 저열함에 내심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게임에서 이브가 들었던 욕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네. 게임에선 대놓고 운 좋게 귀한 집에 들어와 귀족 남자 하나 물어서 팔자 피려는 창녀 취급을 해댔었지…….’

이브는 게임 속에서 주어졌던 선택지의 그 어느 것도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지도, 비웃음을 머금으며 맞서서 모욕을 던지지도, 분노를 삭이며 침묵하지도 않았다.

“어머나.”

이브의 입에서 연기를 하듯 작위적인 감탄사가 튀어나옴과 동시에, 그녀가 쥔 티스푼이 어느새 텅 빈 찻잔과 소서를 마치 푸딩을 가르듯 깔끔하게 반으로 동강을 내버렸다. 눈앞에서 이브가 펼치는 진기명기 차력쇼를 목격한 레이디들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제가 오라를 발현한 지 얼마 안 되어 이렇게 힘 조절에 미숙하답니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려 대단히 송구스럽네요. 부디 레이디들께서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길 바라요.”

스푼을 감싸고 일렁이던 희미한 금색 빛 무리가 사르르 잦아들었다. 영애들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지거나 말거나 이브는 별 대단할 것 없다는 태도로 시종을 불러 파편 하나 흘리지 않고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 찻잔과 컵 받침을 치워달라 부탁했다.

노골적인 무력시위에 주어는 불분명하나 분명 이브를 목표로 쏘아졌던 날 선 말들이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이브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겁을 먹은 듯 어딘가 조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찻잔을 새로 내오는 메이드에게 다정히 웃어 보였다.

“품행에 주의하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벌써 소문이 돌았어요?”

“당신이 찻잔을 쪼개고 정확히 3분 뒤부터 신사들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당신 말고 또 어떤 레이디가 찻잔을 두 동강 낼 수 있겠습니까?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더군요.”

“아니, 걔네가 먼저 나더러 사냥개니 잡종이니 비꽜다니까요. 뺨을 친 것도 아니고 꼴랑 컵 하나 부순 걸 가지고 야단들이람.”

“하긴. 당신이 가녀린 아가씨들 뺨을 쳤다간 턱이 나갔겠군요. 그래요, 아주 잘하셨습니다.”

“오라버니 너 지금 나 욕한 거지.”

두 사람은 황실에서 사냥회에 참가한 손님들에게 제공한 말 위에 오른 채 쑥덕이며 투닥댔다. 공평성을 위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가 있기야 했으나 이브는 주최자 놈께서 내가 이렇게 호탕하게 돈을 쓴다고 자랑하려는 수작질이라는 사실을 빠르게 간파했다.

알베리크는 성격이 유순한 갈색 수말 위에서 이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을 몰며 모호한 표정을 한 채 나긋하게 쏘아붙였다.

“충분히 대화로 대처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귀찮잖아요. 주먹이 더 가까운데 굳이 번거롭게 입을 놀려야 할까요?”

“당신에 대한 소문에 무식한 데다 폭력적이고 충동적이라는 평가가 덧붙겠군요. 혼수를 준비할 일이 없어졌으니 백작님께서 염려를 더시겠습니다.”

“하하! 평생 날 끼고 살고 싶다는 고백을 이렇게 돌려 하시네?”

“……말을 맙시다.”

개회식이 있고서도 한참 동안 신사들과 어울려 사회생활 아닌 사회생활을 하던 알베리크가 사슴을 잡겠다며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이후, 두 사람은 사냥할 생각이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느긋한 태도로 여유를 부리며 너른 언덕 위를 말 위에 올라 구보하며 돌아다녔다.

“이제 슬슬 실토하시죠.”

“뭘 말입니까?”

“누굴 그렇게 찾고 있어요? 만날 사람이라도 있어요?”

“사람이 아니라 사슴을 찾고 있지요.”

알베리크는 뻔뻔한 태도로 대꾸하며 고삐를 당겨 말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한쪽 손에 쥐인 마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브가 목소리를 낮추고는 나른한 음색으로 달게 속삭였다.

“사슴엔 별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 그냥 사냥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저쪽 떡갈나무 숲 안쪽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져볼래요? 외져서 아무도 안 올 것 같은데.”

“미쳤습니까?”

“입에 재갈을 물고 네발로 기면서 말 흉내를 내면 등 위를 채찍으로 때려줄게요. 어때요?”

“재고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로군요.”

알베리크는 뺨을 붉게 물들이며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 이브는 싸늘하게 쏘아붙이는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양 볼이 흥분으로 상기된 것을 보며 짓궂게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긴 한데, 어째 반응이 격렬하네요.”

“부디 바깥에선 그 입을 좀 조심하길 바랍니다.”

알베리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브를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매서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 보였다. 그러던 그때 이브는 두 사람이 오던 반대 방향에서 사람들의 기척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옆 안장 위에 두 다리를 모으고 옆으로 앉아 몰이꾼 역할의 호위 서넛을 데리고 천천히 이동하던 묘령의 아가씨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어두운 감색의 투피스 드레스를 차려입고 갈색의 긴 총열을 가진 라이플형 마탄총을 든 레이디는 맞은편에서 속도를 줄이며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말의 고삐를 쥐고 있던 호위에게 무어라고 말을 건넸다.

이윽고 양측의 일행들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마주 섰다. 이미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 알베리크 쪽에서 슬쩍 시선을 마주쳤다.

말 위의 소녀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생글 웃자 알베리크는 살짝 모자를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먼저 입을 열어 운을 뗀 것은 역시 레이디 쪽이었다.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신사분?”

“베르묄의 알베리크입니다.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아아. 베르묄의 소백작님이시군요.”

“홀랜드 남작으로 불러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홀랜드 남작님. 그쪽 레이디는……?”

숨을 죽이고 예절 교본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두 남녀의 깍듯한 대화를 지켜보던 이벨린이 제게 시선이 와닿는 것을 느끼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만나뵈어 반가워요. 이벨린 베르묄입니다.”

“아하……. 반가워요, 영애. 카타리나 발커레스예요.”

카타리나라고 저를 소개한, 밝은 적금발을 곱게 땋은 아가씨는 이브가 제 이름을 밝히는 것을 보며 반짝 눈을 빛냈다. 베르묄의 이벨린이라는 숙녀의 존재는 요즈음 아가씨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대화 주제였으니 카타리나 역시 그녀에 대해 모를 수 없었다.

“오라를 발현하셨다고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부드러운 회갈색 머리를 가진, 남복을 하는 베르묄 백작가의 레이디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카타리나는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말을 붙여왔다. 소문에 대해 직접 거론을 하며 웃는, 저보다 몇 살은 어려보이는 카타리나의 말간 낯빛에서 경멸이나 무시 같은 불쾌한 감정을 발견하지 못한 이브는 순순히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별것 아닌 재주랍니다. 아직 수련의 깊이가 얕아 어디 보이기 부끄러운 수준이에요.”

“세상에! 전 대륙을 통틀어 오라 마스터가 스물 남짓이라는 걸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게다가 오라 감응만 해도 뼈를 깎는 수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들었어요. 별것 아닌 재주라니, 영애께선 겸양이 과하시네요……!”

얌전히 겸양을 떠는 이브의 말에 되레 흥분한 것은 카타리나 쪽이었다. 손수 마탄을 장전한 사냥용 라이플을 쥐고 말 위에 오른 모습을 보아하니 총이나 사냥뿐만 아니라 검술에도 관심이 많은 아가씨인 모양이라고 생각한 이브가 허허 웃으면서 슬쩍 알베리크 쪽을 흘끗거렸다.

남자는 어딘가로 이동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조용히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슬쩍 한쪽으로 비켜나 있었다. 남자의 태도가 어쩐지 이 아가씨와의 수다를 장려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인지라 이브는 시선을 거두고는 카타리나에게 집중했다.

‘뭐지. 발커레스면 중립파 대가리 아닌가.’

물론 이브는 탐스러운 적금발을 인두로 지지고 총총 땋아 등 뒤로 늘어트린, 이 사랑스러운 분위기의 열예닐곱 먹은 숙녀를 게임 속에서 본 적은 없었다.

순전히 지난 시간 동안 알베리크가 예절 교육 시간에 귀족 연감과 현 귀족들의 권력구조에 대해 이브의 머릿속에 강제로 때려 박아주었기에 떠올릴 수 있었던 정보값이었다.

‘아니 뭐, 이 아가씨랑 대화해도 나쁠 건 없지. 나쁠 건 없는데…….’

어쩐지 묘하게 등골이 오싹한 것이 뒤통수가 당겨오는 기분이었다. 본능 단위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예감에 이브는 남몰래 몸의 근육을 팽팽히 당기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브는 적당히 신경을 분산시켜가며 스몰토크를 나누고 있던 그때, 카타리나가 오던 방향에서 또 한 무리의 일행이 그들 무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역시 사냥용 마탄총은 첼시 앤 프레데카사에서 제조한 르누아르 라인의 헌팅 라이플이 최고죠.”

“영애께서 고전적인 멋을 아시네요. 지금 들고 계신 라이플도 C&F사의 커스텀 르누아르 모델이죠?”

“맞아요! 커스텀이 일절 들어가지 않은 클래식 르누아르를 좋아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아무래도 저는 튜닝한 마이건을 더 좋아해서요.”

“확실히 블랙우드 보디는 기존 클래식 라인의 웜우드 보디보다 묵직한 맛이 있죠. 튜닝이 정말 잘됐네요.”

이브는 천천히 다가오는 무리와의 거리를 재면서도 열심히 카타리나 영애의 심미안을 칭찬했다.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며 까르르 웃는 카타리나의 뒤쪽으로 어느덧 한 무리의 신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길이 겹쳤군. 즐거운 한담을 방해하게 되어 미안하게 되었소, 레이디들.”

“어머나.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모자를 들어 올리며 부드럽게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이는 이브가 이번 사냥회에서 한번은 반드시 마주치게 될 거라 예상한 대공 윌리엄이었다. 기껏해야 수행원 서너 명만을 대동한 모습이 어째 귀족들 무리를 견디지 못하고 따로 슬쩍 몸을 뺀 것처럼 보였다.

‘으음. 사냥회 이벤트는 윌리엄이랑 안면 트는 첫 이벤트였으니까 오늘 한번 정도는 마주치지 않을까 싶긴 했지. 무울론 스토리는 이미 난장판이 되긴 했지만.’

윌리엄은 그 자리에서 줄줄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조용히 웃었고, 그 모습을 보며 이브는 또 속으로 「선생님 캐붕이요!」를 외쳤다.

그러다 이브는 윌리엄과 가볍게 인사말을 나누는 알베리크의 안색이 묘하게 흐려진 것을 보았다. 아무리 알베리크가 가면을 뒤집어쓰는 「귀족적인」 사회생활에 이골이 나 있다 한들, 밤놀이 때마다 그의 안색을 보고 놀이를 지속할지 멈출지를 결정하는 주인 된 도리로서는 미세한 변화도 민감하게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마주친 세 무리의 사람들은 저마다 화기애애하게 서로의 신분을 밝히며 인사를 나누었고, 어딘가 찜찜함을 느끼면서도 이브는 그간의 예절 교육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부드럽고 유려하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심심하다 느껴질 정도로 색채를 가미하지 않은, 오로지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사냥용 슈트를 갖춰 입은 윌리엄은 전신에 잡스러운 털 한 오라기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흑마 위에 올라탄 채였다.

하나로 묶여 등 뒤로 길게 흐르는 그의 남색 머리카락 쪽에 시선을 한번 준 이브는 남자의 승마 자세가 꽤 잘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윌리엄 속에 들어앉은 저 정체 모를 남자가 제법 귀족티를 내려고 노력하는구나 생각했다.

“……영애?”

“예? 아, 예. 레이디 카타리나.”

“레이디 이벨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아하하하. 그게…….”

그리고 그 순간, 이브는 수풀이 우거진 방향에서 쏘아져 오는 살기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이브는 무어라고 말을 하는 대신 번개 같은 속도로 발검해 그대로 제 쪽으로 날아오는 것을 걷어냈다.

“꺄아악!”

“제길! 뒤로 피하세요!”

이브는 베고 나서야 그것이 화살이라는 것을 알았다. 화살이라니, 이 시대엔 상당히 고전적인 스타일의 습격이었다. 그러나 뒤가 밟힐 위험이 적다는 점에서는 비교적 안전한 무기이기도 했다.

반으로 동강이 나 바닥에 떨어진 살을 흘깃 확인한 이브는 롱소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가벼운 인사말이 오가던 평화로운 사냥터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이었기에 누군가 소란을 알아차린다 한들 한발 늦을 터였다.

발커레스 공작 영애의 호위 몇과 대공의 호위들 역시 기세를 올리며 저마다 지니고 있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마탄총과 검으로 무장한 이들이 앞으로 나서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가늠하는 사이에 이브는 슬쩍 뒤쪽으로 빠졌다.

말을 다루는 것이 익숙한 호위들은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말 위에서 전투태세를 가다듬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살기를 느끼고 흥분한 말 위에서 떨어질 위험이 있었기에 말에서 내려 사방을 경계했다.

이브 역시 말에서 내려 뒤쪽으로 빠진 카타리나의 수행원에게 말고삐를 맡긴 후 카타리나와 함께 후위로 빠진 알베리크에게 눈짓으로 괜찮은지 안위를 물었다. 이브는 조금 희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보고서야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윌리엄 대공이 후위로 빠지지 않은 채 추가로 있을 공격을 대비하도록 제 수행인들을 지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슨 명령을 내린 것인지 그의 수행원 하나가 빠른 속도로 왔던 방향으로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바로 습격이 이어질 것 같군. 모두 준비하게.”

짙어지는 살기를 느낀 듯 윌리엄의 침착한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이브는 앞으로 나서는 대신 후위로 빠져 알베리크와 카타리나의 앞을 막아서듯 지키고 섰다. 첫 화살이 동쪽에서 날아왔다고 해서 습격자들이 모두 동쪽에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온다.”

날카로운 긴장이 팽팽히 당겨진 끝에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핑, 핑 하고 활시위가 극한까지 당겨졌다가 튕겨지는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수풀이 드리워진 저쪽과는 달리 이쪽은 엄폐물조차 없는 잘 닦인 길 위에 노출되어 있었다. 지형상으로는 완벽히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 탓인지 제 쪽으로 날아온 눈먼 화살을 빠르게 쳐낸 윌리엄이 인상을 찌푸리며 무언가 생각하듯 수풀 너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브는 간간이 앞쪽에서 놓친 살들을 베어내며 점점 어딘가 콕 짚어 말하기 힘든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돌연 지금까지 화살이 날아오던 방향이 아닌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이브는 살기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곧바로 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기척이 있던 방향으로 빠르게 집어 던졌다.

서로의 공격이 엇갈렸다. 상대가 암기를 날리기 전 공격을 저지하는 데에 실패한 이브가 이를 악물며 롱소드를 휘둘렀으나 날아온 화살은 세 대였고, 대응이 늦어진 탓에 이브가 걷어낸 것은 두 대에 그쳤다.

“큭……!”

레이디 카타리나의 곁에서 주위를 경계하던 알베리크가 그들 방향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레이디의 앞을 막아섰다. 남자의 허벅다리를 길게 찢고 지나간 화살은 붉은 핏자국을 남기며 땅에 박혔다.

“이런, 씹.”

“남작님!”

정체 모를 이들에게 습격을 당하는 일들은 두 사람이 수도에 올라올 때마다 종종 있었던 이벤트였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습격이 있을 때마다 이브와 알베리크는 암살자들이 2황자파에서 보낸 살수의 짓이라는 사실을 대충 눈치챘다.

그러나 그동안 이브의 헌신 아닌 헌신과 지독하게 몸을 사려오던 알베리크의 노력 덕분에 남자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오늘의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었다.

“저 젓가락 같은 게 나서긴 왜 나서서……!”

이브는 입 안으로 욕설을 웅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계약했으니 남자를 지키는 것은 이브의 일이었다. 이브는 다시금 남아 있는 기척을 향해 빠르게 남은 단검을 집어 던지고는 알베리크에게 다가갔다.

반쯤 몸이 무너진 남자의 곁에서 새파래진 얼굴로 그를 부축하는 카타리나의 얼굴에 죄책감이 가득 얼룩져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화살이 스치고 지나간 상처가 얕지 않았다.

“괜찮아요?”

“괜찮, 읏……!”

“아닌데.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어떡하죠? 피, 피가……!”

“저는 괜찮습니다.”

이브는 남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상처를 살폈다. 장갑을 벗어 손가락 바깥 방향으로 상처를 쓸어 피를 묻힌 이브가 그것을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자 환자 본인과 그를 부축하던 레이디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곧바로 땅에 피 섞인 침을 퉤 뱉어낸 이브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알베리크의 허벅지 위를 강하게 짓누르며 당부했다.

“크윽!”

“엄살 피우지 말고 꾹 누르고 있어요. 다행히 촉에 독이 발려 있진 않았나 보네요. 상처가 좀 크긴 한데 일단 피만 멎으면 괜찮을 거예요. 돌아가면 바로 마법사를 부르죠.”

일방적으로 말을 마친 이브가 흉흉한 기세로 안광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알베리크가 손수건으로 제 허벅지를 누르며 물었다.

“뭘 하려고…….”

“뭔가 이상해요. 한 놈 잡아서 조져봐야겠어.”

듣는 귀가 있는 자리에서 험한 말을 툭 내뱉은 이브를 보며 알베리크는 그녀가 단단히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감히 내 무사고 20년 경력에 똥칠을 했겠다.”

“잠깐, 이벨린.”

“어떤 새끼들인진 모르겠지만 다 뒤졌어.”

이브는 알베리크가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수행원에게 맡겼던 제 말고삐를 도로 넘겨받아 말 위로 훌쩍 올라탔다.

앞쪽에서 공격에 응수하고만 있던 윌리엄과 그의 수행원들이 당황한 기색을 한 것도 그때였다. 마침 쏟아지는 화살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던 찰나였다.

“기다리시오! 영애!”

“레이디, 대체 뭘 하시는……!”

이브는 남자들의 만류를 뒤로한 채 거리낄 것 없이 말을 독촉해 빠르게 동쪽으로 달려 나갔다. 수풀 너머 안쪽에서 살기가 흩어지며 기척이 뒤로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브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이 쓰애끼들 보게……? 도망을 가?’

나무가 우거진 구역으로 들어서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사냥을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된 장소였기에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이브는 제 뜻에 따라 속도를 올리는 말의 목덜미를 두드려주며 자세를 더욱 낮추었다.

“이벨린 영애!”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윌리엄이 그녀의 뒤를 따라 말을 달리고 있었다. 이브는 무심한 눈빛으로 흘깃 뒤쪽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해 빠르게 도망치는 인기척을 뒤쫓았다.

힘껏 말을 독촉했으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습격자들은 사냥터의 지형을 꿰고 있는 듯 요리조리 쥐새끼처럼 달아났다. 황실 전용 사냥터가 초행인 이브로서는 삽시간에 바뀌는 지형과 구조에 말을 달리다 말고 중간 중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산 채로 잡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브는 망설이지 않고 허벅다리에 매달아둔 작은 가죽 검집대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단검을 손에 쥔 이브는 그대로 어깨를 당겨 깔끔한 폼으로 그것을 냅다 던졌다.

퍼억!

어딘가 딱딱한 곳에 단검이 힘껏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브는 쳇, 하고 혀를 차며 속도를 낮추었다. 이 이상 따라붙는 것은 무의미했다.

괴한들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한 이브가 말을 멈춰 세우고는 아래로 내려서서 단검이 박힌 곳을 찾아 근처를 헤집었다.

“대체, 멈추라고 그렇게 소리를 쳤는데……!”

“뭐 하러 오신 겁니까?”

윌리엄은 제 말을 뚝 자르고 용건을 묻는 이브의 태도에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남자가 말에서 내리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이브는 신경 쓰지 않고 나무 둥치들을 살피며 두리번거렸다.

“놈들이 뭐 하는 놈들인 줄 알고 혼자 따라가나? 위험하지 않나!”

“이리 와보세요.”

“하……. 그래, 개가 짖는다 이거군.”

“아니, 이리 와보시라니까.”

신경질을 버럭 내는 윌리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이브가 키가 큰 백송 아래로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잔뜩 얼굴을 구긴 채 이브가 있는 곳까지 다가간 윌리엄은 그제야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았다.

땅에서 무언가를 주워든 이브가 뒤를 돌아 윌리엄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짙은 회색빛을 띠는 뻣뻣한 털 몇 가닥이었다.

“이게 뭐 같으세요?”

“짐승 털 아닌가.”

“전하께서 보시기에도 그렇죠?”

사람의 머리카락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금 더 빳빳하고 결이 거친, 짐승의 털이었다.

“사람을 베었는데 짐승 털이 나왔네요.”

“……이곳에서 자생하는 짐승이 아니겠나.”

“그 머리 좋아 보이는 보좌관이 황실 사냥터에서 키우는 동물은 흰 털 혹은 검은 털 짐승뿐이라고 알려주지 않던가요?”

이브는 가슴께에 달린 포켓을 열어 주워 든 털을 그 안에 넣었다.

“돌아가죠.”

“그전에 할 말이 있다.”

다시 말 위로 오르려는 이브를 제지한 남자가 어딘가 복잡 미묘한 얼굴을 하고 그녀에게 다가섰다.

“일전의 그 체술. 어디서 익힌 거지?”

“……그걸 제가 꼭 대답해드릴 의무는 없지요.”

“……그건 내 사수가 나랑 내 동기들한테만 가르쳐준 실전용 체술이었어. 내 사수의 선배가 평범한 일반인이 아닌 특별한 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해 기존의 무술들을 조금씩 뜯어고쳐 완성한 기술이라고 했지.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고 있지?”

“뭐?”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등을 돌린 이브의 몸이 움칫, 멈추었다.

윌리엄은 멈추지 않고 천천히 이브와 거리를 좁혀나갔다.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씩 물기를 머금고 떨리기 시작했다.

“목표물을 포획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부 파편이라도 떼어 채취하는 건 헌터들 특유의 습관이지. 아주 작은 단서라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너.”

“제발.”

이브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몸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지척까지 다가오고서야 움직임을 멈춘 윌리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제발, 모르는 척하지 마요.”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선배.”

“아 이런, 씨발.”

단숨에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거리가 사라졌다. 마치 달려들듯 단숨에 이브에게로 파고든 윌리엄은 숨을 조이듯 양팔로 강하게 이브를 얽고 힘주어 안았다.

아니, 안았다기보다는 차라리 매달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이브는 숨이 막힐 정도로 제 몸 위로 매달리는 남자의 몸짓에서 간절함, 혹은 필사적인 무언가를 읽었다.

“……진짜냐고.”

“선, 선배…….”

“울지 마. 사내 새끼가 아무 데서나 질질 짜는 거 아니라고 했지.”

“보고, 보고 싶었……!”

말을 제대로 마치지도 못한 채 남자의 잇새로 짓눌린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목덜미 언저리로 미지근한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브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유선호.”

“으, 흐으……. 흑…….”

“미치겠네. 너 여기가 어디라고 따라와, 이 미친 새끼야.”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과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는 생각 따위를 하며 이브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자의 등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울음소리를 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남자의 절박함과 서러움 따위를 받아준 이브는 덜덜 떨리던 윌리엄의 몸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는 것을 느끼며 손을 들어 남자의 양 뺨을 잡고 제 몸 위에서 떼어냈다.

“어휴, 눈물 콧물 질질 짜는 것 좀 봐. 드럽게 못생겼네. 그만 좀 울고,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봐.”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요.”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야? 그것도 기억 안 나?”

“2년쯤……. 된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정신을 차려보니까 이렇게…….”

“일단 알겠다.”

말 그대로 상상도 못 한 정체였다. 이브는 예상 밖의 정보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눈물도 좀 닦고. 일단은 돌아가자.”

“……응.”

“감정 제대로 추슬러. 사람들 앞에서 이상하게 굴지 말고.”

“네.”

“언제부터 눈치챈 거야?”

“계속 의심은 하다가……. 저번에, 싸움 걸었을 때 80퍼센트 정도.”

두 사람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서로 본인의 말 위로 올라탔다. 옷소매로 슥슥 얼굴을 훔친 윌리엄은 어딘가 모르게 이브의 눈치를 보는 기색으로 그녀의 곁에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일단 돌아가면 이거 수습부터 하고, 나중에 따로 시간 빼서 만나자. 당장 여기서 말하기엔 좀 이야기가 길 것 같으니까.”

“네.”

“하…….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으니 금방 두 사람을 따라오던 윌리엄의 수행원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브가 습격자들을 쫓아간 이후로 다행히 2차 습격은 없었다는 말과 함께, 근처에서 시신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브와 윌리엄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윌리엄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장 가까이 있던 사내에게 물었다.

“시체의 신원은?”

“미상입니다. 소속을 나타내는 표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선은 어떻게 사냥터에 침입해 들어왔는지 파악 중입니다.”

“……수인인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두 주종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브는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줄곧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늑대 수인이죠?”

“……예, 맞습니다.”

남자의 수행원은 갑작스럽게 끼어들어 묻는 이브의 말에 크게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수긍에 이브의 표정이 차게 가라앉았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윌리엄의 지시로 사건 장소에서의 수습은 어찌어찌 처리가 되고, 이브는 알베리크가 사냥터 초입의 대기소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윌리엄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작별을 고하는 남자의 눈빛이 어딘가 애절해 보이기는 했으나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장소에서 무려 대공 전하의 등을 두들겨 달래줄 수는 없었기에, 이브는 울먹이는 눈빛 공격을 가볍게 씹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환자를 챙기고, 사건 보고와 함께 귀가 의사를 밝히는 등 이런저런 처리를 하려면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등 쪽으로 달라붙는 시선이 간지럽다고 느끼며 이브는 기억을 되짚어가며 대기소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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