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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거친 황제와 불안한 대공과 그걸 지켜보는 귀족들 (13/22)

12. 거친 황제와 불안한 대공과 그걸 지켜보는 귀족들

“아! 씨발! 아! 또 죽었어! 씨발! 좃망겜! 아!”

주영은 다 마신 빈 맥주 캔을 집어 던지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같은 클럽 회원에게 「고수위」라며 추천받은 이 게임은 밸런스 패치가 형편없는 고난도 게임이었다.

수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개발자들이 평생 사람을 빡치게 만드는 연구만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지 같은 시나리오는 플레이어들의 혈압을 순식간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만들었다.

“아아악! 바레기 이 개새끼! 아아아아! 죽어! 죽어!”

모든 엔딩을 섭렵하고 드디어 개운한 마음으로 게임을 접기로 마음먹은 주영은 얼마 전 개발자의 SNS에 히든엔딩에 대한 단서가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직도 자신이 보지 못한 엔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단 게임을 시작하면 모든 엔딩을 보고, 모든 이벤트 페이지를 수집해야만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자는 성격 탓에 그녀는 히든엔딩을 보기 위해 다시금 게임기를 붙잡았다.

“야이! 야! 미친! 뭐라고? 널 사랑하고 있다고? 야 이 개 또라이야! 사랑하는데 팔다리는 왜 잘라! 그게 무슨 사랑이야! 이 미친 새끼! 미친놈아! 으아아아아!”

바레기의 배드엔딩을 본 주영은 눈이 뒤집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운 채 홀로 주먹과 발을 허공에 내지르며 분노를 마구 발산했다. 얼마 전 황태자 루트에서 강제로 태자궁에 끌려가 어쩌고저쩌고 당한 끝에 애를 가지고도 첩지를 받지 못해 그저 「태자의 쿠르티잔」 취급을 당하는 엔딩을 보고 빡이 친 나머지 주먹으로 벽을 후려갈겼다가 생긴 구멍이 아직 달력 뒤에 남아 있었다.

주영은 다시금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이 게임은 거지 같았다. 몹시 거지 같았다. 특히 남주들의 인성이 완전히 개차반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놈들이랑 연애를 해? 제정신인가? 연애가 아니라 심리 상담부터 먼저 받아야 하는 거 아냐?

심지어 「해피엔딩」이라고 준비된 엔딩들도 주옥같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걸 다 놔버리고 체념한 채 현실에 안주하는 게 무슨 해피엔딩이냐. 주영은 인정할 수 없었다.

만약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면 눈앞에 남주랍시고 이브를 괴롭히던 놈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1번부터 번호를 매겨 차례대로 연속 따귀를 갈겨주고 싶을 정도였다.

주영은 누워서 습~하, 습~하 하고 숨을 고르고는 다시 벌떡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거의 다 된 것 같았는데, 막판에 선택지를 삐끗해서 바레기 루트로 빠지고 말았다. 주영은 발버둥을 치느라 저만치 날아간 오징어 다리를 다시 주워 와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으며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이 거지 같은 게임은 난이도도 극악 수준으로 어려울뿐더러 세이브 기능마저 없었다. 오토메 게임인데도! 차라리 공포게임으로 출시되었다면 납득하기 쉬웠을 것이다. 게임 도중에는 자동 저장이 되지만, 엔딩을 보거나 게임오버를 당하게 되면 저장된 데이터들이 모두 사라졌다. 미친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다. 주영은 또 한 번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모조리 외운 지 오래인 게임의 선택지들을 이리저리 고르고, 대사들을 스킵해가면서 주영은 개발자의 SNS에 풀린 히든엔딩의 필수 조건들을 떠올렸다.

〔서재에서 잊힌 신에 대한 성서를 찾을 것.〕

〔모든 공략 캐릭터들과 한 번 이상 만날 것.〕

〔고대의 성 유물을 찾아낼 것.〕

〔「이브」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소원을 생각할 것.〕

조건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공략 캐릭터들과 한 번 이상 만날 것」 부분이었다. 일단 한번 마주치면 해당 캐릭터와 재회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심지어 두 번 이상 대화를 나누면 플래그가 선다. 플래그를 세우지 않으면서 공략 캐릭터 전원을 만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몇몇 캐릭터와는 러브라인을 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건 오토메 게임이니까 강제적으로 썸을 타게끔 만들어진 시스템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바레기는 아니야! 이 씹새끼! 인성파탄자 새끼!”

하필이면 플래그가 꽂혀도 작중 최악의 인성 쓰레기와 꽂히다니. 주영은 오징어 다리를 그의 살점인 것처럼 꼭꼭 씹으며 2D 캐릭터를 마구 욕했다.

바실리오와의 첫 만남은 수도에서 열리는 어느 가든파티에서 이루어진다. 그 가든파티는 점성술과 초자연 현상을 좋아하는 부인이 여는 야외 티파티로, 고대 성 유물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 파티이기 때문에 히든엔딩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이벤트였다. 말하자면, 그를 만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파티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쪽 지방의 지주이자 패트롤 준남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퉁명스러운 「이브」의 반응에도 눈부신 미소를 그리며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물론 패트롤 준남작의 정체는 바실리오 루치아노, 이스트 플루멘 뒷골목을 장악한 거대한 늑대 수인 조직의 우두머리였다. 반반한 낯짝과 잘 짜인 몸매로 귀족 여성들을 유혹해 다소 강압적인 방법으로 여인들을 괴롭히고, 어울려 놀다 버리는 것이 취미였던 그 저열한 사내는 제 플러팅에도 심드렁한 이브에게 호감을 느낀다.

“으 미친, 아랫도리 함부로 놀리고 다니는 새끼들이 제일 싫어. 분명 게임이라 수위는 어느 정도 조절했겠지만, 강제로도 많이 하고 다녔을 거야. 이 새끼 성격 보면 견적 딱 나오지.”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남자였다. 어차피 게임인데 이 정도까지 디테일을 살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현실감이 넘치는 망한 인성이었다.

아무튼, 이번에는 제대로 해야지. 주영은 다시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시작마다 커버에 적힌 제목이 달라지는 「성서」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개발자는 어째서 그걸 「성서」라고 이름 붙인 걸까, 주영은 의문을 품었다.

“잊힌 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적혀 있어도 어쨌든 쭉 읽어보면 마나에 대한 내용이잖아. 위대한 여신 마뉴스 레지나는 마법사들 주문에 맨날 나오는 「자연의 마나」고, 그들의 신도인 「사체르도스」는 마법사를 지칭하는 말 아닌가? 이게 왜 마법서가 아니고 성서야……? 비유법 그런 건가? 영문을 모르겠네.”

아직 히든엔딩을 깬 사람이 없는지 게임 관련 커뮤니티나 SNS에서도 이렇다 할 해석을 찾지는 못했다. 홀로 중얼중얼 혼잣말하던 주영은 오징어 다리 하나를 다시 입에 물고는 게임기를 조작했다.

눈알이 조금 뻑뻑했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했다. 흘긋 본 창밖은 어느새 어슴푸레하게 푸른빛으로 밝아오고 있었다. 밤을 새우고 말았구나, 생각하던 주영의 머릿속에 문득 오늘의 일정이 떠올랐다.

“아, 오늘 알베리크가 만찬회 간다고 했는데. 잣 됐다.”

그러다 문득 제 혼잣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주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알베리크라니 무슨 소리야. 그건 게임 캐릭터잖아.

그리고 그 순간 눈이 확 뜨였다.

“아 쉬발 쿰……!”

벌떡 몸을 일으킨 이브의 안색은 마치 악몽을 꾼 것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밤새 하던 게임이 배드엔딩으로 끝나는 꿈을 꾼 사람치고는 과한 반응이었다.

“와……. 개꿈이네.”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창밖은 여전히 캄캄한 채였다. 그러나 다시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멍하니 창문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이브는 그대로 침대 밖으로 빠져나가 제 짐 사이에서 작은 수첩을 가지고 와서는 다시 침대 위로 기어올랐다. 몸을 굼실굼실 움직여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꿈의 내용을 복기하며 수첩을 뒤적여 관련된 내용을 찾아 읽었다.

‘그래. 가든파티……. 거기서 버려진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얼굴을 비추면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고……. 거울은 단지 단서일 뿐이었어. 거울을 어찌어찌 잘 비춰서 각도를 맞추면 진짜 성물이 숨겨진 위치가 나오는 시스템이었는데.’

이미 성 유물이 숨겨진 장소는 알고 있으니 가든파티 이벤트는 생략해도 좋을 터였다. 게다가 원래는 그 장소에서 처음으로 바실리오를 마주쳤어야 했다. 여러모로 의미 없는 이벤트가 된 지금, 가든파티는 더는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게임의 순서를 어그러트려도 괜찮은 것인지 이브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브는 아직도 가든파티에 참석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실리오 그 개새끼가 바이퍼 놈들에게 정보랑 돈을 댔다고 했지. 바이퍼 놈들이 실패한 걸 놈도 알았을 텐데, 앞으로 어떻게 나오려나…….’

이브는 역시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속으로 되뇌며 놈이 한 번 더 허튼 수작질을 부리기 전에 손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우선은 만찬회가 더 급하니까.’

한참 동안 머릿속으로 원래 게임 속 만찬회 이벤트 시나리오를 정리한 이브는 다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았다. 다른 것보다도 잠을 설쳐 거칠어진 피부를 보고 쏟아낼 알베리크의 잔소리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브는 제 반걸음 앞에서 걷고 있는 알베리크의 뒷모습을 슬쩍 훔쳐보았다. 푸른빛으로 윤이 도는 새카만 프록코트는 질릴 정도로 남자의 얼굴과 잘 어우러졌다.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만큼 길게 늘어선 마차의 향연을 뚫고 글로리엄 궁에 도착한 두 사람은 궁성 내부로 들어서서는 담배를 태우는 신사들을 지나쳐 롱 갤러리를 가로질렀다. 물론 알베리크의 용무 때문이었다.

신과 천사들의 장엄한 모습을 그린 화려한 천장화는 마치 주제가 모두 이어지는 연작처럼 복도가 끝날 때까지 빈틈없이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게다가 한쪽 벽면은 줄줄이 색을 입히고 금박을 덧씌운 화려한 조각상들과 부조 장식, 한 세기 이전의 초상화들로 자랑스레 장식되어 있었으나 예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빠른 속도를 유지한 채 걸음을 재촉하는 알베리크 덕분에 감상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롱 갤러리와 연결되어 있는 문으로 빠져나가니 순식간에 사람들 수가 줄어들었다. 두 사람은 한산해진 복도를 지나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또 왼편으로 꺾어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으려니 저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칼리스토님.”

윤이 나는 굽슬굽슬한 복숭앗빛 머리카락을 대충 넘겨 정리한 칼리스토가 알베리크의 인사에 대충 고개를 까딱였다.

“들어가봐. 기다리신다.”

이브는 과연 이렇게 붐비는 날 의아할 정도로 복도가 한산하다 했네, 하고 생각했다. 이곳은 황제의 영역이므로 황태자라 할지라도 제 맘대로 호위를 늘릴 수 없었던 까닭에 칼리스토의 마법으로 휴게실을 은폐해 보호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이것 역시 관례에 어긋나지만, 대놓고 뒤따르는 기사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브가 슬쩍 시선을 알베리크의 등에 고정한 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문득 강한 힘이 제 팔을 움켜쥐는 것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

“너는 잠깐 나 좀 봐.”

불에 델 듯한 눈빛이었다.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보복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브는 문을 열려다 말고 뒤에서 들려오는 날 선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알베리크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들어가서 볼일 보고 나와요.”

잠깐 이브의 뺀질거리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알베리크가 작게 한숨을 쉬며 사고 치지 마십시오, 하고 중얼거리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칼리스토는 잠시 감각을 열어 주변에 듣는 귀가 없는지를 확인하고는 이브의 팔을 쥐어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드러냈다.

“너.”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하, 지금 그게…….”

“평생 아는 척 안 할 줄 알았더니. 그렇게 꽁지가 빠지게 내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뭐 하자는 거야?”

“…….”

“그러고 보니 어떻게든 내게 복수하고 말 거라고 이를 갈면서 도망쳤다며? 그런 것치곤 꽤 오래 잠잠하더라?”

칼리스토는 이브의 뻔뻔스러울 정도의 대꾸에 기가 찬 듯 보였다. 이브의 귀에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브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칼리스토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이브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잠시 동안 그 어떤 대화 없이 오로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상대의 속내를 읽었다.

보랏빛 눈동자 안쪽에 숨겨진 감정은 용암처럼 타오르는 분노와 치욕 그리고 희미한 욕망이었다.

이브의 눈 안에서 그 어떤 감정의 실마리도 찾지 못한 듯, 남자는 결국 일그러진 표정으로 간신히 입을 떼고 말문을 열었다.

“너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왜. 뭐.”

“너 때문에!”

순식간에 감정이 북받친 듯 칼리스토의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그러다가 문 너머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의식한 듯 빠르게 입을 닫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너 때문이야. 그 기억이 날 좀먹고 있다고……. 제기랄, 이 무뢰배 같은 계집……!”

“그 기억?”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작은 소리로 비난을 토해내는 칼리스토의 귓가 언저리가 화르르 뜨겁게 타올랐다. 이브는 기민하게 그가 무엇에 대한 불만을 이토록 열정적으로 토로하는지를 깨달았고, 곧 순식간에 포식자의 눈빛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아하.”

어느새 칼리스토의 몸이 두꺼운 문짝 위로 밀려났다. 남자의 몸 위로 바짝 다가선 이브는 제 허벅다리를 그의 다리 사이에 끼우고는 몸을 밀착시키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게 그렇게 좋았어?”

“이, 닥……!”

“조용히 하는 게 좋을걸. 문 뒤에서 귀한 분이 담소를 나누고 계시잖아.”

“이 비열한…….”

그녀는 마치 숨통을 노리고 이를 박아 넣으려 다가오는 짐승과 같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집요한 시선에 칼리스토의 안색이 눈에 띄게 파리해졌다. 이브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피하는 남자의 턱을 틀어쥐고는 힘주어 제 쪽을 바라보게 잡아 돌렸다.

그날은 한 사람이 누워 있었던 탓에 제대로 키를 비교할 수 없어 몰랐지만 이브의 키는 성인의 모습을 한 칼리스토와 시선의 위치가 엇비슷했다. 새삼스럽게 이브의 박력에 기가 질린 칼리스토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훅, 하고 바람을 불듯 작게 소곤대는 소리가 적나라한 단어를 담은 채 내뱉어졌다.

“뒷구멍 후벼준 게 그렇게 좋았니?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한시도 날 잊지 못할 정도로?”

“이, 익……!”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뭘까, 응? 그냥 엉덩이 쑤셔준 게 끝내주게 좋았다고 별점 다섯 개짜리 후기 남기러 온 건 아닐 테고.”

“미친, 개소리를!”

“쉬이…….”

이브가 시선을 돌려 남자의 뒤를 슬쩍 쳐다보았다. 칼리스토는 등 뒤로 딱딱하게 닿아오는 문을 의식하며 입을 다물었다. 불꽃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매서운 눈빛은 여전했으나 이런 시선 따위는 이브에게 아기 고양이가 부리는 애교조차 되지 못했다.

“아, 또 괴롭힘 당하고 싶어서 이러는구나. 그렇지?”

“하……!”

“나랑 또 놀고 싶으면 욕을 하고 화를 낼 게 아니라.”

이브의 시선이 남자의 것과 얽혔다. 아랫입술의 부드러운 살갗 위를 거친 손끝이 서두르지 않고 부드럽게 매만졌다.

“내 발밑에 무릎 꿇고 앉아서 귀엽게 조르고 매달려야지.”

칼리스토는 가슴 한쪽에서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심장 아래로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묵직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이브의 팔을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치워버렸다. 제 팔을 집어 던지다시피 밀치고는 재빠르게 품속을 빠져나간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슬쩍 입맛을 다신 이브는 자세를 바꾸어 좀 전의 칼리스토처럼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문을 지키는 모양새로 섰다.

‘어휴. 저거, 저거 인성질 하는 것 보소.’

제 인성에 대한 문제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린 채 괜히 남자의 인성을 지적하며 잠시 대기하고 있으려니 오래 지나지 않아 알베리크가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칼리스토의 행방을 물었으나, 뛰쳐나간 남자는 어디로 간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이브는 어깨만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보나 마나 당신이 그분의 심사를 득득 긁어댔겠지요.”

“틀린 말은 아닌데, 영 듣기가 그러네요.”

“갑시다. 그 남자가 휴게실에 있다는군요.”

이브의 대꾸에 골치가 다 아프다는 듯한 표정을 슬쩍 내비친 알베리크가 고개를 내저으며 안경을 고쳐 쓰고는 이브를 이끌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브에게 주어진 명령은 윌리엄 랭커스터가 오늘 하루 누구를 만나는지 관찰하는 일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2황자의 사람과 접촉을 하는지를 감시하는 일이었지만.

이브는 그걸 왜 나한테 시키느냐고 입술을 댓 발 내밀고 투덜거렸으나 알베리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제시한 「수고비」의 액수를 듣고는 이내 빠르게 태세를 바꿨다.

이브 외에도 몰래 남자의 행적을 주시하는 자들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이미 황태자를 보필하는 기사로 적을 올린 이들이었기에 함부로 뒤를 밟다가 오히려 꼬리가 밟힐 위험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브는 정체가 발각될 염려 없이 그를 감시할 수 있는 인력이었다.

설사 그녀가 남자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들, 그들은 귀족가의 레이디가 품위 없이 남의 뒤를 밟을 거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허를 찌르는 작전이라 볼 수 있었다.

규모가 큰 남성용 휴게실로 들어서는 이브의 시선이 빠르게 실내를 훑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반적인 당구대치고는 과하게 화려한, 물결치는 장식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 짙은 고동색의 빌리어드 테이블이었다. 이미 몇몇 신사들이 긴 큐대를 가지고 테이블 위에 놓인 공을 치며 한창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금색 자수가 놓인 짙은 와인색 파티션을 등진 채 놓여 있는 긴 소파가 있었다. 소파와 근처 카우치 쪽에 몇몇의 신사들이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반걸음 앞서 걷고 있던 알베리크는 다른 곳에는 볼일이 없다는 듯 곧장 그쪽으로 향했다.

“오오. 홀랜드 남작 아닌가. 이쪽으로 오게.”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장년의 사내가 알베리크를 알아보고는 그의 임시 작위를 입에 담으며 알은체했다. 그러자 눈치껏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서서 자리를 비워주었다. 차가운 얼굴을 잘 갈무리한 알베리크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입니다, 파이먼 후작님. 지난번 레이디 맥밀런의 플로럴 쇼 이후로 뵙지 못했지요. 그사이 신수가 훤해지셨습니다.”

“하하하! 별소리를 다 하는군.”

알베리크는 소파 근처에 서서 한담을 나누고 있던 다른 신사들에게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주고받은 후 파이먼 후작의 오른편에 앉았다. 후작이 황태자파의 큰손 중 하나라는 것을 언뜻 귀띔받아 알고 있던 이브는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알베리크 쪽을 흘끔 보았다.

이브는 고생하네, 하고 생각하며 마치 공기처럼 알베리크의 뒤를 지키고 있다가 그가 소파에 앉자 소파 뒷자리로 돌아가 시립했다.

“그나저나 이 친구는……?”

“아.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제 경호를 맡아주고 있는 아이입니다.”

“그렇군.”

후작은 머리 위에 눌러쓴 톱해트를 슬쩍 앞으로 기울여 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알베리크의 동행인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으나, 그는 알베리크를 상당히 신임하고 있는 듯 이내 어련히 알베리크가 알아서 할까 하는 얼굴로 대답하고는 관심을 거두었다.

브리타니아의 귀족들은 머리를 길게 길러 윤기 나게 관리하는 것으로 여유와 부귀를 어필하고는 했기에 남녀를 불문하고 긴 머리를 자랑하는 이들이 많았다.

시대가 바뀌며 젊은 신사들 사이에서 짧게 다듬은 머리가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오랜 전통을 가진 가문이나 나이 지긋한 귀족들은 아직도 머리를 등허리 아래까지 길게 기르는 것을 선호하고는 했다. 그 탓에 이브의 날갯죽지 언저리까지 오는 머리카락만으로는 그녀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한눈에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검을 다루느라 매일같이 단련한 탄탄한 육체 위에 베스트와 프록코트를 걸치고 타이를 매니 근처의 신사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배가 나오고 키가 작은 사내들보다 훨씬 자세가 바르고 맵시가 있어 흘끔 그녀의 바르고 곧은 어깨선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브가 별다른 제지 없이 남성용 휴게실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돈 좀 있는 치들의 경호를 하는 것은 이브에게도 익숙한 일이었다. 이브는 제게 슬며시 들러붙는 몇몇의 시선을 깔끔히 무시하며 뒷짐을 지고 얼굴을 딱딱하게 유지한 채 「네놈들의 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을 강력하게 어필하듯 시선을 흩트리고 눈알을 굴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른 쪽 신사 무리 사이에 조용히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윌리엄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원작과는 백억 만년 정도 떨어진 태도였다. 게임의 플레이어들이 윌키코모리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홀로 있기를 좋아하는 남자가 저렇게 권력의 냄새를 좇는 하이에나 같은 치들의 치댐을 받아주고 있다니, 캐붕도 이런 캐붕이 없었다.

대화가 무르익자 신사들은 너도나도 품에서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담배 케이스를 꺼내 다시금 궐련을 한 개비씩 꺼내 들기 시작했다. 짧은 물부리에 궐련을 끼우기도 하고, 품속에서 파이프를 꺼내어 무는 이들도 있었다.

한 해 전 옥타비아를 통해 얻은 담배를 피워보았던 이브는 정제된 타르의 맛이 나지 않는 심심한 막궐련의 맛에 종종 담배를 태우던 이전 삶의 버릇을 완전히 끊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제 앞에서 시시덕대며 코와 입으로 연기를 뻐끔뻐끔 뱉어내고 있는 남자들을 내심 아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 말보로 한 갑만 있어도 저놈들 다 뒤집어질 텐데.’

아무튼 이브가 서 있던 자리는 서서히 너구리굴이 되어가고 있었다. 알베리크 역시 사교용으로 궐련을 태우는지 저택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담배 케이스를 꺼내 옆자리에서 불을 빌려 궐련에 불을 붙였다.

다시금 무리의 사이에서 한담이 이어졌다. 이번에 새로 담배를 마는 특허를 개발한 회사에 관한 이야기나 담뱃잎을 재배하는 농장에 관한 이야기들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그러던 중 알베리크의 뒤쪽에서 갑작스럽게 불쑥 이브의 손이 뻗어져 나왔다.

남자의 근처에 서 있던 사내가 대화에 집중하느라 담배의 끝에 매달려 있던 불티를 잘못 털어 알베리크 쪽으로 튕겨내고 말았다. 하마터면 알베리크의 허벅다리 위로 떨어질 뻔한 불티를 재빨리 손으로 잡아챈 이브는 다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뒷짐을 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경계를 섰다.

“어이쿠. 미안합니다, 소백작.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군요.”

“……아닙니다. 별일이 없었으니 괜찮습니다.”

내 허벅지에 무슨 일이 있었다면 괜찮지 않을 뻔했다는 알베리크의 부드러운 응수에 사과를 건넨 사내가 몹시 민망해했다. 주변의 신사들은 하나같이 은근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이브의 날렵한 움직임에 감탄했다.

“흐음. 아주 실력이 있는 친구로군.”

“무척 민첩한 움직임이군요.”

이브는 알베리크의 등 뒤에 서 있어 그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알베리크가 내심 혀를 찼으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눈에 띄는 일은 없도록 해야 했기에 알베리크는 이브를 칭찬하는 신사들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잠시 웃어 보이고는 이브에게로 향하려는 대화의 흐름을 간단히 잡아채어 다시 자신이 원하는 주제로 돌려버렸다. 그 틈을 타 이브는 뒷짐을 진 손을 몰래 등 뒤에서 툭툭 털었다.

한참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오가던 그때, 저쪽 무리에서 윌리엄이 인사를 나누며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움직임이 보였다. 그것을 빠르게 눈치챈 알베리크가 이브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브는 정중한 자세로 허리를 굽혀 알베리크의 얼굴 근처로 귀를 가져다 댔다. 그녀의 귓가로 무언가 속삭이는 소리가 흘러들어 오고, 그녀는 작게 예, 하고 대답하는 시늉을 하며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등 뒤로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묻는 다른 사내의 목소리에 심부름을 시켰노라고 대답하는 알베리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을 완전히 죽인 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거리를 두고 윌리엄과 그의 수행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황제궁의 볼거리 중 하나인 후원이었다. 윌리엄은 정원 입구에서 제 수행원에게 작게 무어라고 이야기를 한 후 홀로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구석이 없는 정원은 중앙의 산책로와 거대한 분수대를 기준으로 좌우로 완벽히 대칭인 형태로 다듬어져 있었다. 이제 막 꽃이 피어오를 시기였기에 각이 지게 깎여나간 정원수들은 푸르른 녹색으로 화사하게 빛났다.

만찬회가 시작하기엔 이른 시간인지라 궁의 안은 물론이고 후원에도 사람들은 제법 많았다. 그러나 중근세 시기를 모티프로 한 서양풍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에서 흔히 클리셰처럼 묘사되는 「불장난 중인」 연인들의 모습은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게임 배경이 프랑스 궁정이었으면 가능성이 좀 있었을지도.’

이브는 쩝, 입맛을 다시며 윌리엄이 향하는 방향을 눈여겨보며 자연스럽게 그가 들어간 진입로가 아닌, 멀찍이 떨어진 방향의 산책로로 후원에 들어섰다.

계획도시의 정갈하게 다듬어진 정사각형 블럭을 닮은 깔끔한 정원은 나무의 키가 제법 커 시야를 얼핏 가려주면서도 정확히 구획이 나누어져 있어 자세히 살피면 방향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브는 주위의 발걸음 소리와 기척을 따라 산책을 하는 척 몇 번씩 커브를 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아.”

“엇.”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그대는 일전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베르묄 백작가의 이벨린입니다.”

“하하하, 태도가 제법 딱딱해졌군. 반갑네.”

그야 정식으로 「대공」의 직위로 소개받은 이상 이전처럼 무례하게 대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브는 정중히 굽혔던 허리를 도로 펴며 슬쩍 눈을 굴렸다.

“산책을 즐기시는 중이셨군요. 전하의 사색을 방해한 듯하여 송구스럽습니다.”

“괜찮네. 그보다 자네도 홀로 산책 중인가?”

“아 옙. 그러면 즐거운 시간 되시길…….”

윌리엄은 저를 어려워하는 듯한 얼굴로 눈을 도르르 굴리며 도망치려는 기색을 내비치는 낯익은 영애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는 짐짓 짓궂은 표정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이왕 이리 만났으니 말동무나 좀 해주게. 말도 좀 편하게 하고. 누가 잡아먹는다던가?”

“예에? 아 옙.”

윌리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녹갈색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러나 이내 이브는 머쓱한 듯 시선을 피하며 마지못한 목소리로 요청에 응답했다.

“저어, 혹시 따로 약속이 잡힌 것은 아니셨는지…….”

“음?”

“전하께서는 아직 젊고 헌앙하시니 뭐, 이런 곳에서 아리따운 레이디와의 만남을 약속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말이에요. 혹여 제가 눈치 없이 구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리따운 레이디라. 이미 만나지 않았나?”

“윽, 아, 아니.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왕창 구긴 채 이상한 개구리 울음소리 같은 것을 입 밖으로 낸 이브가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며 입을 다물었다. 전혀 속내를 갈무리하지 못하는 신선한 반응에 윌리엄은 참지 못하고 푸하, 작게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캐붕이요, 선생님! 지금 그거 완전 캐붕! NG, NG!’

아래로 길게 뻗은 속눈썹이 떨리며 우울해 보일 법한 내려간 눈꼬리가 따듯한 웃음기를 머금고 화사하게 호선을 그렸다. 게임 일러스트로 볼 때는 음울하고 퇴폐적인 구석이 있는, 싸늘한 인상의 미남이었건만 지금 제 곁에서 눈을 접고 웃는 남자의 분위기는 차라리 덩치 큰 개 쪽에 가까웠다.

“영애는 다른 레이디들과는 다르게…….”

“아, 그러지 마세요. 너는 다른 여자들이랑은 달라, 하는 식의 말. 저 그 멘트 진짜 싫어합니다.”

“하하, 그런가. 미안하게 되었네.”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어디서 머리라도 다친 것 같다고.”

이브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좋다고 까르르 웃어대는 남자를 보며 개그 코드가 참 독특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은 정처 없이 길이 보이는 대로 왼쪽으로 돌았다가 직진했다가 하며 계속 말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곳에선 그대처럼 검을 쥔 여인을 찾기가 힘들어서 말이야.”

“이곳……? 아, 수도에서 말이죠? 근위대 기사단에도 그렇고 군에도 여기사나 여군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 수가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죠. 그래도 눈여겨 잘 찾아보시면 아예 없진 않을걸요?”

“음. 그런가.”

“북부의 변방을 지키는 정예병 중에는 그래도 여군이 꽤 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하하. 그렇지.”

어쩐지 남자는 매 대답마다 어물쩍 대충 넘어가고 있었다. 어딘가 위화감을 감지한 이브는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께서는 사격의 대가라고 들었는데, 초여름에 있을 사냥회에는 참석하시나요?”

“사실 이번 만찬회도 이례적인 일인지라, 사냥회가 있을 시기까지 수도에 남아 있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군.”

“그러시군요. 저는 총은 조금 어려워서 말이에요. 손맛도 잘 모르겠고. 차라리 단도를 가지고 다니다가 던지는 거라면 잘할 수 있는데.”

“가죽이 상하지 않나.”

“그러니까요. 아니면 돌을 던져서 맞춘다거나.”

“그건…… 꽤 볼 만하겠군.”

시시껄렁한 한담을 위장한 채 이런저런 총기와 사냥에 관련된 질문을 추가로 덧붙여보았으나 남자는 역시 부드럽게 웃으며 이리저리 말을 돌렸다. 아주 어릴 때부터 총을 다루며 사냥회에서 우승을 휩쓸고는 했었다는 캐릭터 설정이 무색할 정도로 얌전한 태도였다.

‘요상하네? 일반적인 귀족 놈팡이들의 비대한 자아라면 이쯤에서 자기 자랑을 한번 정도는 쫘악 읊을 때가 됐는데…….’

차게 가라앉는 눈빛을 갈무리하며 이브는 슬며시 걸음을 옮기며 모르는 척 일부러 방향을 한쪽으로 유도했다. 어느덧 두 사람의 발길이 황제궁과 이어진 별궁 쪽 산책로로 향했다.

이 남자가 정말 「윌리엄 휴 랭커스터」가 맞는다면 이 산책로 근처는 쳐다도 보지 않을 것이었다.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다. 스무 걸음, 열 걸음, 다섯 걸음. 이윽고 산책로의 초입에 발을 내디딘 순간 이브는 확신했다.

제 곁에서 윌리엄의 껍질을 둘러쓰고 있는 이 사내는 여태 이브가, 주영이 게임을 하며 익히 보아온 캐릭터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리저리 오가던 시시껄렁한 한담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이 둘을 제외하고는 감히 그 누구도 이 산책로에 발 디딜 생각을 하지 못한 듯, 윌리엄의 일거수일투족을 몰래 눈여겨보던 감시자들의 시선 역시 사라져 있었다.

오로지 황제궁을 통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별궁은 아주 오래전, 선황이 아들에게서 빼앗은 여자가 자신을 닮은 어린 아들과 함께 기거했던 공간이었다. 감정에 휘둘린 처사가 아닌, 오로지 정치적인 결정이었기에 늙은 사내의 처사는 몹시 냉랭하고 잔혹했다.

선황은 딸뻘인 여자에게서 손주뻘인 자식을 하나 보고는 그대로 모자를 별궁에 가두다시피 처박아놓고 방치했다. 연인을 빼앗긴 아들이 헛된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두 남녀를 철저히 짓밟아 뭉갠 것이었다. 결국 이어지는 수치를 이기지 못한 헤스티아 비는 어린 아들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반쯤 실성한 채 유폐된 별궁의 산책로에서 스스로 목을 그어 자결했다.

후에 보위에 오른 프레데리크 3세는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 별궁을 틀어막고 그 누구도 손대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미친 사내의 용암처럼 들끓는 분노는 길목을 지키는 자가 따로 없어도 자연히 그 별궁을 황성 부지의 가장 비밀스러운 금지로 만들었다.

그 누구도 아닌 윌리엄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이 사내가 정말 윌리엄이라면, 어린 시절 제 어머니와 함께 유폐되었던 별궁과 그녀의 핏물이 배인 산책로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갈 리가 없었다.

게임 속에서 어머니의 최후가 트라우마가 되어 오랜 시간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설명까지 붙어 있지 않았던가. 남자의 캐릭터 설정을 상기한 이브의 얼굴이 차게 식어갔다.

이브와 윌리엄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서늘하게 식은 공기를 읽은 듯 윌리엄 역시 온몸의 근육을 당기며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이유는 몰랐으나 그는 분위기가 순식간에 급변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남자는 슬그머니 이브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브는 그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에 피식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그녀의 몸이 번개처럼 쏘아져 나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브의 신형이 화살처럼 튕겨 나가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는 남자의 중단부를 노리고 발을 휘둘렀다.

윌리엄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침착한 태도로 팔뚝으로 이브의 공격을 비껴 막아내며 그대로 그녀의 발목을 향해 날카로운 기세로 손날을 세워 후려쳤다.

이브는 독이 오른 뱀처럼 뻗쳐오는 남자의 손을 피해 몸을 휘돌리고는 재빠르게 몸을 낮추어 이번에는 남자의 다리를 노리고 걷어찼다. 윌리엄은 순식간에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슬쩍 혀를 차며 이브의 다리를 마주 걷어차려 몸을 놀렸다.

뻐억!

두 사람의 다리가 허공에서 강하게 맞부딪치고는 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서로의 얼굴에 「제법인데?」 하는 기색이 설핏 스쳐 지나갔다.

마치 간을 보듯 이브의 공격이 점차 빠르고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마거릿에게 배운 체술 위주로 가볍게 시작했던 공격은 점점 노골적으로 피 냄새를 피워내기 시작했다. 살상을 목적으로 한 그 움직임들은 이브가 이전 삶에서 경험으로 체득한 기술이었다.

남자 역시 그녀의 체술에서 살기를 느낀 듯 미간을 좁히며 이브의 공격을 받아내었다. 퍽, 퍼억 하는 육체와 육체가 마주 닿는 것치고는 과격한 타격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윌리엄」은 제대로 된 검술이나 체술을 익힌 적이 없다. 황위에 오른 형제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황제에게 목숨을 빚진 황족이었기에. 그는 그저 총기를 다루는 것 따위의 잡기술을 익히는 데서 그쳤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는 공식적인 대공 윌리엄에 대한 설정값이었다. 응당 그는 체술 따위는 몰라야만 했다.

사납게 남자를 몰아치던 이브는 돌연 기세를 갈무리하며 뒤로 훌쩍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윌리엄은 이브의 매서운 주먹에 옆구리 공격을 허용하고 말아 분명 상당히 시큰거릴 텐데도 별다른 기색을 내비치지 않은 채 자세를 낮추고 뒤이어질 공격에 대비했다.

귀족 양반이 스포츠 삼아 그냥저냥 배운 수준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몇 년 가지고 익힐 수 있는 움직임은 더더욱 아니었다. 남자는 피가 튀는 전투에 익숙한 싸움꾼이었다. 이브의 눈빛이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움직임이 익숙했다. 정확히는 이브와 합을 나누는 모양새가 무척이나 눈에 익었다. 그녀가 시도한 관절기는 이 세계에서 배운 체술이 아니었음에도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무리 없이 그녀의 공격을 걷어내고 빠르게 반격을 시도했다.

단순히 기감이 발달해 빠르게 반응을 한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오랜 시간 합을 맞춰온 상대와 대련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윌리엄 역시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듯 이쪽을 강하게 경계하고 있는 와중에도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영애, 그 체술은.”

“당신 누구야. 윌리엄 본인이 맞긴 해?”

이브는 윌리엄의 말허리를 썩둑 잘라내고는 제 궁금증부터 던졌다. 이브의 물음에 윌리엄이 한쪽 눈을 설핏 찡그리고는 날카롭게 받아쳤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백작 영애가 맞나? 완전히 강 동쪽 폭력배들이나 다름없군.”

“너, 일이 년 배운 수준이 아니잖아. 당신 뭐 하는 작자야?”

“누가 할 소릴.”

“그거, 누가 가르쳐줬어?”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네 스승이 누구지?”

두 사람의 표정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서로의 머리가 빠르게 팽팽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매섭게 상대방을 탐색하는 시선이 오고 갔다. 이윽고 정제되지 못한 추측이 목구멍 바깥으로 나오기 직전, 돌연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전하!”

두 사람은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에 금테 안경을 쓴, 윌리엄의 보좌관이었다.

“아니, 대체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곧 만찬회가 시작할 텐데!”

“……세드릭.”

“꼴이 그게 뭡니까! 세상에! 이 주름! 뭘 하신 겁니까!”

거의 비명처럼 내질러진 목소리에 이브와 윌리엄이 얼결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잽싸게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뭘 하고 계셨길래! 아, 이쪽은……. 크흠.”

“전에도 뵈었지요. 이벨린 베르묄이에요.”

“반갑습니다, 영애. 세드릭 랜서입니다. 그나저나 영애께서는 어쩌다…….”

“아, 우연히 전하와 마주친 김에 말동무가 되어달라 청하셔서……. 잠깐 산책을 한다는 게 너무 깊이 들어온 모양이네요. 전하께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저를 잡아주시다가 자세가 잘못 엉켜 제가 그만 전하의 옷을 상하게 하고 말았지 뭔가요. 레이디를 부축하다 생긴 일이니 부디 참작 부탁드려요.”

“……돌부리요?”

“예.”

“일단은, 크흠. 알겠습니다. 자, 두 분 이쪽으로 오시죠.”

이브의 필사적인 변명에 세드릭의 눈이 가늘어졌으나, 그는 윌리엄을 향해 「나중에 봅시다.」 하는 의미가 담긴 시선을 한번 던지고는 가타부타 말을 더 얹지 않고 몸을 돌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산책로에서 벗어나 황제궁의 후원이 가까워졌다. 타인의 기척들이 느껴지기 시작하자 이브는 두 사내에게 작별을 고했다.

“……조만간 또 볼 일이 있을 것 같군.”

“글쎄요. 그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서로 경계가 뒤섞인 인사말을 가볍게 나눈 두 사람은 마치 탐색이라도 하듯 잠시 눈을 마주친 후 헤어졌다.

멀어지는 이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윌리엄도 천천히 몸을 움직여 가까이 있는 궁성의 출입구로 들어섰다. 이동하는 내내 입을 다물고 굳은 얼굴을 유지한 채 만찬회가 열리는 대연회장에 들어서기 전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미리 배정받아둔 휴게실로 향한 윌리엄과 세드릭은 개인 휴게실의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눈치챈 것 같아.”

“뭘 말입니까?”

“나한테 윌리엄이 맞긴 하느냐고 묻던데.”

“……그 영애가요?”

윌리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겉옷을 벗어 세드릭에게 그것을 건넸다. 옷을 받아 들며 보좌관은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대체 두 분은 거기서 뭘 하신 겁니까? 거긴 또 왜 간 거고요. 별관 쪽은 얼씬도 하지 말라고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순간 헷갈렸어. 평범한 산책 코스인 줄만 알고.”

“중간에 자리를 비운 제 불찰입니다.”

“뭘 했는지는…… 일단은 비밀로 해둘까.”

“전하.”

“……어쩌면 「나」를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

윌리엄이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에 세드릭은 바늘에 찔린 사람처럼 흠칫 놀란 표정을 짓고는 이내 주위를 돌아보았다. 휴게실 안을 지키고 있는 것은 그의 사람들뿐이었지만 윌리엄이 저도 모르게 꺼내고 만 주제는 측근 중에서도 아주 가까운 이들이 아니면 알아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요.”

“그러지.”

윌리엄 역시 아차 하는 얼굴로 빠르게 주제를 바꾸어버렸다. 그는 이브와 관련된 다른 대화 주제를 입에 담았다.

“아. 이벨린 베르묄에 대해 추가로 조사하라고 지시한 건은 어떻게 됐지?”

“전에 올린 보고서 내용과 크게 다를 것은 없습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쭉 자라다가 열세 살 무렵 백작가에서 인지를 하고 데려왔다더군요. 그 후로는 쭉 백작령의 컨트리하우스에서 자랐습니다. 가끔가다 수도로 올라오기는 했다는데 그마저도 열흘 안팎의 짧은 기간이었답니다.”

“음.”

“그런데 한 가지 추가로 발견한 게 있다고 합니다.”

“뭐지?”

“레이디 로잘린이 세상을 뜬 것이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사원의 정보에 따르면 그녀가 낳은 아이가 사내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지?”

“당시 아이를 받은 조산사입니다. 그러나 조산사의 증언 이외에 추가 물증은 없습니다. 또한, 조산사 역시 진짜 레이디 로잘린의 아이를 받았는지는 확증할 수 없습니다.”

“말뿐인 주장이라.”

휴게실에 놓인 푹신한 1인용 카우치에 앉아 몸을 깊이 묻은 채 피곤한 안색을 한 윌리엄이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단은 자세히 확인해두도록.”

“알겠습니다.”

결말부터 말하자면 만찬회는 완전히 망했다. 물론 이브의 잘못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브의 포지션은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 쪽이었다.

‘씨발…….’

식전주가 돌 때만 해도 이브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자잘한 기포가 구슬처럼 뽀그르르 올라오는 황금빛의 가벼운 샴페인은 황실에서 주최하는 만찬회에서 제공할 정도로 값비싼 빈티지임이 무색하지 않게 훌륭한 풍미를 자랑하며 이브의 혀를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입맛에 맞는 술을 맛보고는 눈을 빛내며 알베리크에게 소곤소곤 「이 샴페인 이름 뭔지 알아요?」 하고 물었다가 네 용돈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비웃음만 들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은근히 이브를 견제하는 뭐시기 백작 가문의 아가씨가 총대를 메고 이브의 여성스럽지 못한 옷차림을 지적할 때까지도 사실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브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뉘예, 뉘예. 님들은 고상한 전통의 수호자이시고 저는 어디서 툭 튀어나와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망둥이 같은 존재입니다요.」라는 말을 고상하게 포장하여 되돌려주어 연분홍빛 실크 드레스를 갖춰 입은 백작 영애의 고운 얼굴을 와그작 구기는 데에 성공했을 정도였다.

문제는 대공과 황가의 일원들이 입장한 이후부터였다. 윌리엄은 입장할 때부터 이브를 눈여겨보듯 지그시 시선을 던져 순간 주위의 귀족들이 눈을 빛내게 하더니, 배정된 자리에 앉고부터는 대놓고 흘긋흘긋 이브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사실 이것도 그 이후에 벌어진 일에 비하면 그렇게 큰 문제라고 볼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하고 작게 속삭이던 알베리크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와 그의 총희가 홀에 도착했다. 모든 귀족들이 기립해 황제를 맞이했고 뒤이어 황태자 에드워드와 그의 이복동생들이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와 함께 홀 안으로 들어섰다.

가운데 넓게 비워진 길을 따라 대연회장의 가장 안쪽, 가로로 길게 놓인 황족들의 자리가 차례대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테이블의 정가운데 상석에 황제가 자리를 잡았고 그 오른편에 에드워드와 2황자가, 왼편에는 엘리자베스 비와 막내 황녀가 각자의 좌석에 착석했다.

미치광이라는 소문이 무색하게 황제는 차분히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축사를 읊었다. 낮게 가라앉은 장년인의 목소리가 너무나 정상인의 그것으로 들렸기에 이브는 순간 제가 알고 있는 황제의 캐릭터 설정이 잘못된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의심은 괜한 것이었다.

촤악!

끔찍한 소음과 동시에 연회장을 메운 좌중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담담한 얼굴을 한 에드워드의 뺨을 타고 피처럼 붉은 와인이 긴 꼬리를 남기며 미끄러져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턱 아래로 고여 떨어진 와인은 에드워드가 입고 있는 붉은색 예복을 적시며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짙은 얼룩을 만들었다.

“감히 네깟 게.”

에드워드는 황제의 노기 어린 목소리에도 별다른 대꾸 없이 찬찬히 눈을 한번 깜빡였다. 긴 속눈썹에 맺혀 있던 붉은 물방울이 그 작은 움직임에 맞추어 파르르 떨리다가 결국 아래로 똑 떨어지고 말았다.

“고작해야 계집 하나 때문에.”

순식간의 주위의 시선이 이브에게로 향했다. 이브는 뺨에 와 박히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잘라낸 고깃덩어리를 재빨리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수십 차례 버터를 끼얹은 듯 짙은 풍미가 코끝을 간질였지만 안타깝게도 이브는 제가 지금 육즙이 툭 터지는 훌륭한 스테이크를 씹는 것인지 모래를 씹어 삼키는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 만큼 앉은 자리가 불편했다.

‘미친놈들이. 싸울 거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싸울 것이지, 나를 보긴 왜 봐? 내가 뭘 어쨌다고? 완전 또라이들 아냐?’

잘 숙성된 레드와인이 에드워드의 머리꼭지 위에 들이부어진 이유는 별것도 아니었다.

계속해서 이브를 신경 쓰고 있는 윌리엄의 시선을 기민하게 알아챈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후원에서 퍽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나 보군요, 제 사람과.」 하고 영역표시 아닌 영역표시를 하면서 두 사내의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진 탓이었다.

이전의 「이브」를 알고 있던 에드워드야 그렇다 치지만 대공 윌리엄이 상당히 예민한 태도로 그의 말에 대꾸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브는 원치 않게 두 남자의 기 싸움에 말려들고 말았다.

알베리크를 중히 쓰는 황태자의 입김과 가문의 조상들이 이룩한 명성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베르묄 가문의 지정석은 상석과 제법 가까웠다. 그 말인즉슨 그녀의 주변에 앉은 귀족들은 아름답게 포장된 날 선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가 중간 중간 누구에게 시선을 주는지 오래 지나지 않아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두 남자의 대화가 길어지는 기색이 비치자 갑자기 돌아버린 황제가 급발진을 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에 채워진 값비싼 귀부와인을 제 장자의 머리 위로 쏟아버렸다.

불가해할 정도의 과민한 반응이었다. 주위의 귀족들이 천천히 커트러리를 접시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식사를 이어나가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두십시오. 형님께서 나서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보다 못해 황제의 폭언을 말리는 윌리엄의 목소리로 인하여 폭탄에 불이 점화되었다.

순간 연회 홀에 있는 모두가 헉,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야! 미친, 야! 그거 완전 지뢰라고! 아이고, 저 미친놈이 스토리 다 망친다! 아이고오!’

대공의 예상치 못한 말에 화다닥 놀라 혀를 씹은 것은 이브뿐만이 아니었다. 황제가 제가 모시는 주인에게 술을 끼얹어도 아무렇지 않게 숭어 살을 썰던 알베리크마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긴장으로 바짝 얼어붙었다.

“누가.”

한참 만에야 지옥 바닥을 긁는 듯한 괴악한 목소리가 미친 황제의 입 새로 흘러나왔다. 나이 든 사내는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이를 악물고 말했다.

“누가 네 형님이냐.”

친부에게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와인 세례를 받고서도 석상처럼 멀끔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에드워드조차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살짝 아미를 좁힌 채 윌리엄이 앉은 방향을 쳐다보았다.

핵폭탄의 기폭 버튼을 제 손으로 누르고 말았다는 사실을 주위의 분위기로 깨달은 남자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표정이 없는 윌리엄의 얼굴은 차갑고 서늘하기 그지없어 얼핏 황제의 분노조차 무심하게 흘려 넘긴 것처럼 보였다.

“내가 왜! 어째서 내가 네 형제냐고 물었다! 왜!”

잔잔히 덩치를 키워가던 불꽃이 순식간에 거세게 타올랐다. 광인의 분노는 마치 활화산처럼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식기가 부서지는 소리, 유리잔이 조각나는 소리, 은빛 커트러리가 홀의 대리석 바닥에 마구잡이로 내동댕이쳐져 나는 금속음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폐, 폐하! 고정하십……!”

“폐하……!”

모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이 든 황제의 난동을 그저 아연히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위세가 대단한 엘리자베스 비만이 차분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에게 언질을 받은 듯 아멜리아 황녀 역시 식사를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옥체에 무리가 가실까 저어됩니다.”

“폐하. 제가 모시겠습니다.”

눈이 풀린 채 미처 언어가 되지 못한 악다구니를 내지르며 잡히는 모든 것들을 마구잡이로 내던지고 있던 황제가 제 팔을 슬며시 붙들어오는 두 여인의 얼굴을 보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살얼음이 낀 호수처럼 아슬아슬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실핏줄이 모두 터져 붉어진 눈을 번뜩이며 사위를 돌아본 사내가 곧 부드럽게 제 팔을 붙든 딸에게 체중을 조금 싣고는 천천히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브는 얼핏 황제를 부축하는 아멜리아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시선이 언뜻 스쳤으나 황녀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황제가 아멜리아 황녀를 곁에 끼고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싸늘한 정적만이 감도는 연회장의 분위기는 지옥과 다름없었다. 이미 오래전 연주를 멈춘 악단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연주를 재개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냅킨으로 얼굴을 닦아낸 후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긴 에드워드가 얼굴만 보아서는 방금 막 부당한 폭력을 당했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고아한 미소를 띤 채 사과와 함께 연회를 계속해서 이어갈 것을 주문했다.

에드워드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악단이 잔잔한 합주곡을 연주해내기 시작했고, 차게 얼어 있던 사람들은 간신히 미소 비슷한 것을 머금고 수저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분위기는 파탄이 난 지 오래였다. 와인이 들이부어진 탓에 환복과 소세를 하기 위해 빠르게 퇴장한 에드워드를 대신해 엘리자베스 비와 2황자가 만찬회를 마저 진행했다.

그러나 아무리 총첩이라고는 하나 황후도 아닌 후비의 진행은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몇몇 귀족들 탓에 연회장의 분위기는 더는 전과 같이 부드럽게 흘러가지는 못했다.

한참 후에야 환복을 마치고 돌아온 에드워드가 다시 귀족들을 다독였으나 이미 얼음물이 한차례 끼얹어진 후였다. 궁의 시종들이 바쁘게 정돈한 식탁 위에서 다시금 식사를 이어나가는 에드워드의 얼굴은 와인 세례를 받기 이전과 같이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으나 그 상황에서 넉살 좋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은 황태자 본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게임의 주요 이벤트 중 하나가 완전히 개판이 난 채로 끝나고 말았다. 물론 이브는 제 삶을 원작의 흐름대로 이끌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이 정도로 난장판이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차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간혹 이쪽을 흘끔대는 윌리엄의 시선을 피하며 디저트로 나온 애프리코트 셔벗을 디저트 스푼으로 왕창 떠 입 안으로 쑤셔 넣은 이브는 긴 한숨을 애써 삼켰다.

그러니까, 만찬회는 완전히 망했다. 손쓸 도리 없이.

“대공이 돌아버렸다더니, 허튼 소문이 아니었군.”

만찬 연회가 끝나기 무섭게 에드워드의 개인 집무실로 불려 온 알베리크와 이브는 집무실의 손님맞이용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에드워드에게 예를 올렸다.

대충 두 사람의 인사를 받은 에드워드가 적당히 앉으라는 듯 손짓을 한 후, 그답지 않게 슬쩍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황제를 자극하기 위해 아주 안달이 난 것처럼 굴던데. 대체 무슨 수작이지.”

“그자 보좌관의 표정을 보셨습니까?”

“보다마다. 아주 종잇장보다 더 새하얗게 질려 있더군.”

윌리엄이 「돌아버린」 이유에 대해 추측하고 있는 두 남자에게 차마 대공의 알맹이가 바꿔치기되어 그런 것 같다고 말할 수 없었던 이브는 조용히 차 시중을 드는 메이드가 찻잔을 채워주는 모습만 지켜볼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브가 홍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 올려 마악 입에 가져다 댄 찰나, 에드워드의 시선이 이브에게로 향했다.

“영애가 내게 해줄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예?”

“본인은 감시를 명령했지, 접촉하라고는 하지 않았네.”

“……대공을 찾던 도중 우연히 마주친 김에 가볍게 누군가를 만날 일정은 없는지 떠보고 헤어지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자가 놔주지 않았고.”

“예.”

물론 거짓말이다. 「우연히」 마주쳤다는 대목부터 모든 것이. 만남부터 시작해 남자가 자신을 붙잡을 것까지 계산해 움직였다. 그가 어째서 「캐릭터 설정」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했던 이브는 그 남자에게 의심을 사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해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명령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해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내 보이는 이브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푸른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쪽 별궁과 이어지는 산책로까지 들어갔다던데,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

이브는 침착하게 손에 쥔 찻잔을 기울여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정원 근처에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은 이브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키가 큰 가로수가 우거진 산책로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감시자가 본 것은 산책로에 진입하는 것까지였으리라.

“별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사냥회에 참석하시는지나 마탄총을 다루는 법에 관해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을 뿐입니다. 이브가 담담한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리다가 에드워드의 뒤편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카스텔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의식적으로, 혹은 필사적으로 그를 모르는 척하고 있던 이브의 눈가 근육이 밀려드는 민망한 감정 탓에 순간적으로 미약하게 파르르 떨렸다. 자연스레 눈동자를 굴려 이브의 시선을 피한 카스텔의 뒷목 역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집요하게 이브를 뜯어보고 있던 에드워드가 이브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칠 리 없었다. 감정 없는 자기 인형처럼 물끄러미 이브의 얼굴을 관찰하던 에드워드가 돌연 살포시 눈매를 접으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잠시 따라오게.”

그러고는 다짜고짜 일대일 면담을 청했다. 이전에 있었던 개인 면담 시간에 무슨 일이 터졌는지를 기억하고 있던 이브에게는 달갑지 않은 요청이 아닐 수 없었다. 알베리크의 표정이 걱정으로 설핏 굳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기분이 더럽다는 이유만으로 황태자씩이나 되는 남자의 명령에 불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브는 때려도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 부위들을 속으로 되새기면서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스텔 경, 자네는 자리를 지키게.”

뒤를 따르려는 시종들과 기사까지 모두 물린 채 두 사람은 집무실에서 멀지 않은 빈방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목련이 활짝 핀 꽃나무와 여인이 그려진 초상화였다.

“앉게.”

에드워드는 자연스럽게 응접실의 장의자로 이브를 이끌었다. 별다른 저항 없이 남자가 이끄는 대로 의자에 앉은 이브는 건너편으로 넘어가지 않고 제 옆에 앉는 남자의 무례한 태도에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거리 좀 두시죠. 사람 불편하게.”

이브는 주위에 지켜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가 무섭게 방만한 태도로 짜증을 내며 엉덩이를 움직여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런 이브를 보며 피식 웃은 에드워드가 나른한 눈웃음을 띠어 보이며 대답했다.

“새삼스럽게 내외를 하는군.”

“내외가 아니라 매너입니다, 매너.”

“예의를 따지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날뛰었다고 들었는데.”

또 무슨 개소리로 시비를 걸 작정인가 싶어 가시를 세운 채 에드워드를 노려보고 있는 와중에, 남자는 여전히 느긋한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사건을 무사히 해결했다고 들었네. 용케 말을 달려 마차를 잡았다고.”

“아 뭐. 예.”

“검술의 경지가 꽤 훌륭했다더군.”

이브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남자의 말에 가물가물하게나마 의심하고 있던 가정이 확신이 되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꾸려진 수사대의 인원이 사건의 규모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이유, 볼품없는 수사대의 규모에 비하자면 터무니없이 거물인 카스텔이 직접 이브와 함께 움직인 이유. 설마 했지만, 그들은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시험 결과가 만족스러우셨나 보죠?”

“글쎄.”

정답이라고 말하는 듯 에드워드의 눈웃음이 조금 더 깊어졌다. 이브는 명화 속의 성녀처럼 고귀하게 빛나는 남자의 미소에 구역감을 느꼈다.

이브는 먼 산을 보며 짜증 섞인 얼굴로 길게 한숨을 쉬고는, 제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황태자를 돌아다보았다. 이브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을 떠보기보다는 새로운 정보를 묻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생각하며 주제를 돌렸다.

“이왕 이렇게 자리를 만든 거, 뭐 좀 물어봅시다.”

“음.”

에드워드가 질문을 허락한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이브는 새로운 주제로 화제를 돌리기 위해 천천히 푸른 양장 커버의 책을 떠올렸다.

“이름을 잊은 신과 마법 주문에 종종 등장하는 자연의 마나 말입니다. 동일한 표기로 기재가 되어 있던데, 우연은 아니죠?”

“그걸 가장 처음 물을 거라 예상은 했네. 어디 볼까……. 마법사의 뿌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나?”

“아뇨. 마법 쪽은 따로 공부한 게 없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지금은 알고 있는 이들이 아주 적지만 실은 현대의 마법사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의 기원은 고대로부터 존재해왔던 창조신의 사제라네. 본디 신을 모시는 사제들만이 창조모신의 은총으로 자연의 마나와 인간 본연의 마나를 이어 이치에 맞지 않은 현상을 인세에 펼쳐낼 수 있었지. 지금에야 마법사들 스스로도 그들의 뿌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네만, 그럼에도 사제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애쓴 탓에 몇몇 주문에는 신과 사제를 지칭하는 단어가 남아 있네.”

“사체르도스…….”

“맞아. 고대어로 사제라는 의미지. 제법 직관적인 명명이 아닌가.”

“그러면 마뉴스 레지나라는 명칭도 따로 의미가 있겠군요.”

이브의 물음에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선율처럼 물 흐르듯 이어졌다.

“위대한 여신. 이름이 잊힌 탓에 고유한 이름 없이 그저 여신으로 불리고 있지만, 신화의 시대부터 전해지는 유일한 신의 흔적이라네.”

“그러면, 지금 사람들이 믿고 있는 유일신 데우스는 뭐죠?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줄 정도로 권능이 강력한 신이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사람들에게서 잊힌 게 말이 안 되는데요.”

“교회에서 믿는 유일신은…… 말하자면, 그건 가짜라네.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의 존재이지.”

이브는 순간 제 청력을 의심했다. 그녀는 주영에서 이브가 된 이후로 어린 소녀의 자아를 유지한 채 13년을 넘게 교회에서 자랐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여 년의 시간 동안 세뇌에 가깝도록 배워왔던 유일신의 신성성과 강요되다시피 안겨진 신앙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이 영토를 다스리던 나의 선조가 칭제하기 이전 시대의 일일세. 고대 신의 사제들은 개개인이 마치 전능자로 보일 정도로 훌륭한 권능을 뽐냈지. 모든 백성이 신의 사제들을 따랐어. 신을 믿는 이들은 결국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사제들을 맹신하기 시작했네.”

“아……. 그건, 위험했네요.”

짧은 설명에도 이브는 바로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대강 짐작했다. 왕이라는 절대 군주가 존재하는 국가에서 백성들의 신임을 얻는 또 다른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왕권의 붕괴와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래. 왕을 위시로 한 지배층들은 불안에 빠졌지. 두려움은 곧 분노로 바뀌었고, 그들은 신전을 축출하기로 마음먹었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더군. 각 지역의 신화나 전설 따위를 짜깁기해 새로운 신과 신을 위한 경전을 만들고 그것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과 시간, 사람을 들였지.”

“으음…….”

“그뿐만 아니라 창조신의 신격을 깎아내렸어. 신의 사제들을 악신을 모시는 삿된 존재로 몰아붙였지. 그들을 악마의 수족이라 부르며 탄압하고 죽여 신전의 재물을 갈취했네.”

“엄청난 권능을 가졌다면서요? 쉽게 죽어주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마법사와 검사를 제압할 때 쓰는 마나 구속구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알고 있나?”

돌연 남자에게서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 질문 아닌 질문에 이브는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마나 구속구의 핵심 역할을 하는 마나 동결석의 발견이 신살 계획의 시발점이었네. 동결석에 신의 은총을 받은 영령석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제들을 제압했지. 영령석과 닿는 순간 신성력의 기반이 되는 마나를 쓸 수 없으니 여신의 사제들은 악마와 사통한 자들이라 몰리기에 딱 좋았어. 그렇게 신의 사제들은 침몰하였고, 여신의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네.”

“엄청나네요.”

‘지구의 마녀사냥이랑 결이 비슷하네. 누명을 씌워 죽인 후 재물을 빼앗았다는 것까지.’

이브는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노골적일 정도로 욕심과 이익관계에 기반을 둔 탄압이었다. 인간의 악의에 질린 이브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브의 불편해하는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드워드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럼에도 사제들이 모두 다 멸절한 것은 아니었네. 몸을 숨기고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지. 신의 이름을 숨기고 몰래 제자를 들여 마법을 전수한 자들도 있었어.”

“그 정도의 대규모 탄압이 자행되었다면 분명 왕족이나 귀족에게 붙은 사제들도 있었겠네요.”

“물론이지. 신을 배반하고 왕에게 복속키를 맹세한 이들도 있었네. 왕은 그들의 힘을 빌려 의도적으로 신의 이름을 지우고 단지 신의 권능만을 빌려 와 마법을 부릴 수 있게 하였네. 사장되기에는 아까운 힘이 분명했으니. 마법을 학문의 한 종류로 만들어 교육시설을 설립했고, 그것이 마탑의 시초가 되었네. 그렇게 몇 세기가 지나 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사라지고 말았지.”

퍽 담백한 서술이었으나 이브는 남자의 말 속에서 어렵지 않게 짙은 피 냄새를 맡았다. 각자의 신념과 이익을 좇은 인간들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을 터였다. 입 안의 혀가 텁텁했다.

“기록물도 모두 없앴을 게 분명한데, 그러면 제게 주신 책은 어쩌다 얻게 된 겁니까?”

“물론 대부분의 기록물들은 불태워졌지.”

“대부분, 이라고요.”

“제 손으로 무엇을 지웠는지, 배제해야 할 존재가 무엇인지 적확히 인지해야만 후손들이 계속해서 경각심을 가질 것이 아닌가. 황가의 계승권자에게만 대대로 열람이 허락되는 금서가 몇 권 있다네. 그대가 받은 고대신의 성서 역시 그중 하나고.”

“금서인데 이렇게 막 함부로 내돌려도 되는 겁니까?”

“하하. 철로 이루어진 기차가 철로 이루어진 길을 달리는 시대일세. 만일 신의 이름이 돌아온다 한들 더는 황족들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을 걸세.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면 신이 아닌 재물의 힘을 경계해야 함이 마땅하겠지.”

아마도 남자의 반응을 보건대 근래 들어 관리가 소홀해진 틈을 타 임의로 책을 빼돌린 모양이었다. 혹여 불똥이 튈까 걱정이 되기 시작한 이브는 빨리 그 성서라는 물건을 도로 반납하거나, 아예 불태워 증거를 인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전에 성처녀가 어쩌고 하셨던 것 같은데. 주셨던 성서에는 그 부분에 대해 대충 언급만 하고 지나갔더라고요.”

“음.”

“한 세기에 한 명씩 신이 인세에 내려 보내는 화신이라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대체 왜 그걸 언급하셨던 겁니까?”

이브의 질문에 에드워드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곧 남자의 긴 속눈썹이 도로 들어 올려지고, 푸른 눈동자가 이브에게로 향했다.

“성녀라는 것은 대대로 가장 비천한 자로 태어나 가장 고귀한 삶을 사는 운명을 가졌다고 떠받들어진 존재지. 신의 이름이 영광되었을 무렵에는 화신의 현신에 대한 계시를 받은 사제들이 성녀를 찾아와 신이 인간을 굽어살피고 있다는 증거로 내보이고는 했네. 그 말마따나 성녀는 대단한 권능을 보인 사제들조차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인지 밖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더군.”

“인간의 인지 밖의 능력이요?”

“시간을 되돌려 앞날을 예지하거나, 상처를 치유하거나, 삿된 인간과 오염된 토지를 축복하여 정화를 시킨다거나. 그 밖에도 신의 축복을 받은 덕에 대대로 무력이나 마법적 재능이 탁월했다고도 전해지더군.”

감정 없는 얼굴로 혼잣말하듯 작게 속삭이던 에드워드가 말을 마치고는 다시금 사르르 눈꼬리를 접어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그대의 오라비 편에 조만간 책 하나를 더 보내겠네. 성녀에 대한 기록물이지.”

“아니, 그렇게까지 번거롭게……. 그냥 말로 설명해주시면 참 감사할 텐데요.”

“그걸 읽어야 다시금 나와의 만남을 기다릴 것이 아닌가.”

“어차피 전하께서 부르시면 꼼짝없이 불려 와야 하는 처지입니다만.”

이브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대답을 마침과 동시에 에드워드의 몸이 바짝 가까이 다가왔다. 에드워드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반항의 낌새 없이 제 곁에 얌전히 앉아 있는 이브를 보며 만족스러운 듯 소리 없이 미소를 그렸다.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앉은 남자는 길이가 짧아 뒤로 묶이지 못하고 귓가 언저리에 남은 귀밑머리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윌리엄, 그 작자가 그리 신경이 쓰이나?”

“뭐라고요?”

“숨기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그대가 일부러 그자에게 접근한 것을 알아.”

얼핏 애정 비슷한 감정을 담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던 에드워드가 손가락을 옮겨 말랑한 귓불과 귓가 언저리를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달게 속삭였다.

“게다가, 기어코 내 기사를 함락시키고 말았다지?”

푸른 눈동자가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순식간에 술기운을 빌어 저지르고 만, 그 밤의 열기 어린 기억들이 뇌를 마구 헤집으며 인지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브는 설마 이 타이밍에 이 주제를 꺼낼 줄 몰랐다는 듯 딱딱하게 낯을 굳혔다.

남자의 목소리가 끈적한 당밀처럼 이브의 귓가에 달라붙어왔다.

“그대 발치에 무릎을 꿇리고 사정없이 짓밟았다 들었네만.”

“그 남자는 도대체가……. 사생활이라는 게 없대요? 다 불었구나, 아주.”

“카스텔 경에게 충성이라는 단어를 제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 어쩔 수 없네.”

아, 씨발. 민망함에 괜히 작게 욕설을 내뱉고 만 이브의 곁으로 한 뼘 더 가까이 다가온 에드워드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보지 않아도 눈앞에 선연히 보이는 듯했다. 싱글싱글 즐거운 듯 웃으며 답을 종용하는 주군과 대단히 어색한 낯으로 제 수치를 낱낱이 고해다 바치는 기사의 모습이.

“그리고 치맛자락을 들쳐 다리 사이 샘을 맛보게 해주었다고.”

“왜, 너도 네발로 기면서 내 가랑이 핥고 싶어서 이래?”

“게다가 카스텔 경뿐만이 아니던데.”

“하.”

“칼리스토 랑그라다의 「구멍」은 쓸 만하던가? 알베리크 베르묄의 볼기짝은? 그는 비쩍 말라서 그다지 때릴 만한 곳이 많지 않을 것 같던데.”

이브는 순식간에 찡그렸던 표정을 풀고 무감한 눈빛으로 에드워드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코앞까지 바짝 다가와 붙은 사내가 재주 좋게 얼굴 위에서 욕망을 지워내고는 마치 새하얀 목련꽃처럼 순진무구하게 웃어 보였다.

“그 셋 말고도 더 있나?”

“글쎄. 궁금해?”

“어디 보자……. 대공과도 몸을 섞었나? 아니면 그럴 계획인가? 그 남자와 단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지? 밤의 약속을 잡았나?”

“기억하고 있다며. 무슨 이야기를 했을 것 같아?”

“청혼이라도 하던가?”

“글쎄.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닌 거 알지 않나?”

“……그대는 매번 두 번 없는 언행으로 나를 즐겁게 해주었지. 이번엔, 그래. 당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다는 계획인가 보군.”

갑작스럽게 영 다른 주제를 사근사근 속삭이며 에드워드의 몸이 틈 없이 바짝 다가왔다. 짙푸른 눈동자가 푸르게 얼룩진 녹갈색 홍채를 찌를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브의 시선은 여전히 무가치한 것을 바라보듯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썩 유쾌하지 않아. 마치 따돌려지는 기분이야.”

“대체 무엇으로부터?”

“글쎄. 어쩌면 나도 노리갯감으로서의 자질이 있을 것 같지 않나?”

“하……! 그 남자들이 내게 농락당했다는 자각은 있는가 봐? 그런데도 이렇게 질투를 해? 꼴같잖게.”

“……그러고 보니 시두스의 대장 늑대를 만났다고 했지. 그자는? 그 사내도 그대 앞에서 다리를 벌렸나?”

“적당히 하시지요. 언사가 지나치십니다.”

투기가 아니라고는 대답하지 않는 사내를 보며 쯧, 하고 혀를 찬 이브가 가볍게 남자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려 했다. 그녀는 더는 이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이끌어나갈 생각이 없었다.

“지금껏 그대가 자라는 것만을 고대해왔어. 자비를 베푸는 마음으로 오랜 기간 그대를 풀어주었지. 자유라면 누릴 만큼 누렸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리저리 굴러먹는 짓은 그만두고 슬슬 내게 오는 게 어떤가.”

그와 동시에 에드워드의 몸이 이브를 덮쳐왔다. 이브는 몸 위로 쏟아지는 무게감에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눈을 두어 번 깜빡깜빡 떴다가 감으니 어느새 등 뒤로 푹신한 쿠션의 감촉이 느껴졌다.

귀 뒤 그리고 목덜미로 이어지는 목 빗장 어딘가에 부드러운 살갗의 감촉이 잘게 떨어지는 것이 얇은 피부를 타고 전해져 왔다. 마치 개나 고양이가 몸 위를 타고 올라와 냄새를 맡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막 던지시는군요.”

“네가 원하기에 검을 배우도록 허락해주었고, 사내를 만나도 그저 가벼운 장난질에 그칠 뿐 씨를 받지는 않았기에 묵인해주었어. 하지만 누군가를 마음에 품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네가 증오하고 사랑해야 할 이는 오로지 나뿐이야.”

에드워드는 이브의 목 뒤 여린 살결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그녀의 살갗 바로 위에서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확신에 찬 말투로 작게 속삭였다.

“네가 가장 미워하는 건 나잖아.”

“…….”

“그러니 날 가장 예뻐해야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이브가 입가에 잔혹할 정도로 냉랭한 미소를 그렸다. 이브는 거침없이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제 쪽으로 휙 끌어당겼다. 별다른 저항 없이 남자의 얼굴이 코앞까지 딸려왔다. 살갗이 닿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간격만을 남겨두고 이브가 흉흉한 눈빛을 숨기지 않은 채 이를 드러내며 그르렁 목을 울렸다.

“까불지 마. 누굴 어떻게 휘두를지는 내가 정해.”

“하하.”

“예쁨 받고 싶으면 먼저 홀딱 벗고 개처럼 네발로 기면서 애원이라도 해보시든가. 사정 봐가면서 상대할 생각 따윈 요만큼도 없으니까.”

“으음, 어쩌면 정말로 내게 노리개의 소질이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런 것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은걸.”

‘짖는구나, 짖어.’

질린다는 표정을 한 이브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즐겁게 웃던 에드워드가 제 멱을 쥔 이브의 손을 풀어내며 이브의 목덜미 언저리에 뺨을 파묻었다. 이브는 제 목덜미에 쪽쪽 입을 맞춰대는 남자의 존재를 무시하며 유독 에드워드가 윌리엄의 존재에 예민하게 구는 이유가 무엇일까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럭저럭 사랑의 형태를 띠고 임출육을 하는 엔딩을 본 게 대공 루트뿐이라는 게 원인인 것 같았다.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제삼자가 보기에는 충분히 해피엔딩으로 보일 수 있겠다 싶었다.

고민을 마친 이브가 남자를 떠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내가 그를 사랑했다고 생각해?”

“글쎄. 하지만 행복해 보이더군.”

“날개가 잘린 채 새장에 갇혀 사랑을 강제당하는 게 행복해 보였다고? 그 눈알은 장식이야?”

“설사 행복하지 않았대도 상관없다. 네가 다른 사내의 씨를 받고 아이를 낳아 그자의 곁에 남기를 마음먹었다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니.”

“……역겨워.”

“내 곁에 있었을 때는 스스로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도망치기를 원했으면서, 불공평하잖아. 그자도 제 것을 빼앗기는 고통을 겪어봐야지.”

“쓰레기 새끼.”

“그래서 그랬어. 죽일 수밖에 없었어. 너도, 놈의 새끼도.”

잔잔히 흘러나오는 고해에 이브의 눈가 언저리가 파르르 떨렸다. 게임의 엔딩이 끝인 줄 알았건만 그 뒤에도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진 모양이었다. 대공 루트의 해피엔딩은 이브가 윌리엄을 빼닮은, 어두운 빛깔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아이를 낳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니까, 이브가 알고 있기로는 에드워드가 그 루트에서 파고들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보가 조금 더 필요했다. 이브는 점차 이 세계가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의 세계라는 확신을 잃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알고 있는 이 세계의 이야기를 더 캐내볼 필요가 있었다.

“네가 그랬어?”

“그대가 죽어버린 직후, 다시 시곗바늘이 되돌아가 버리는 바람에 그자의 비통해하는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왜?”

“말했잖나. 나만 빼앗기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아이는 잘못이 없잖아.”

“네 태에서 태어난 것이 죄라면 죄일까. 그대도 내 아이를 죽이지 않았나. 그러니 그리함이 공평한 일이지.”

이브는 인상을 찌푸리며 게임 속의 줄거리를 주섬주섬 떠올려보았다. 「이브」가 에드워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죽이는 루트가 있던가. 아니, 애초에 그 아이가 태어났던 적이나 있었던가.

그녀가 모르는 루트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남자의 「기억」이 이브의 인지 너머까지 확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이브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브는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의 말을 이해한 척 말을 꾸며 대꾸했다.

“내가? 농담이겠지. 그게 어떻게 내가 죽인 거야.”

“떠났잖아, 그대가. 아이와 나, 그대의 육신마저 버리고 말이야.”

남자는 자꾸만 이브가 「떠났다」고 주장했다. 이브는 무언가 꼬리가 잡힐 듯 말 듯 한 기분에 초조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짜증을 내는 척 싸늘하게 툭 내뱉었다.

“……그래서 뭘 원하는 건데.”

“방황은 이쯤 하고 내게로 와. 자유는 누릴 만큼 누리지 않았나. 존재하는 모든 부귀영화를 네게 안겨주겠다.”

“글쎄. 남이 쥐여 주는 영화가 다 무슨 소용이야. 결국 진짜 내 권력도 아닌데. 게다가 시간이 반복되는 걸 기억하고 있다면 너 곧 실각하는 거 알지? 목이 뎅겅. 뭘 믿고 그런 남자를 만나?”

“흠……. 황후의 자리를 원하는 건가. 아주 옛날 일이라 그대는 기억하지 못하나 본데, 보위에 올라본 적이 없는 건 아니야. 권력에 정점에 선들 자꾸만 시간이 돌아가니 영 재미가 없어져 곧 그만두었지. 그러나 그대가 원한다면 황제가 되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 곁에 그대의 자리를 마련해주지.”

“이해력이 떨어지시네. 누가 주는 권력이 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사내에게 빌려 오는 권력 따위, 신기루밖에 더 되겠어? 그깟 건 이쪽에서 사양이야.”

“하하. 현명하군.”

“원하는 게 있다면 스스로 손에 넣어야지. 부귀영화든, 권력이든.”

이브의 단호한 거절을 들은 에드워드의 눈동자는 얼핏 녹색 빛을 띠고 새파랗게 빛났다. 부드러운 웃음 사이로 정염과 탐욕이 넘쳐나 뚝뚝 흐르고 있었다.

이브는 기꺼이 제 위로 올라탄 남자의 긴 목 위를 부드럽게 더듬었다. 그렇게 원한다니 쥐고 흔들어줄 수밖에. 그리하여 바닥까지 끌어내려 진창에 처박아주리라. 이브는 사내가 희열에 차 스스로 기쁘게 제 벌거벗은 육신을 불구덩이 안으로 내던지게끔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필요하다면 이 목을 쳐서라도.”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낮게 목을 울리는 이브에게서는 두려움이나 공포로 보이는 감정은 한 톨도 비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턱과 목 아래의 살갗을 더듬는 긴 손가락이 조금씩 숨통을 죄어오고 있음을 알아챘다. 서서히 죄어드는 압박감에도 남자가 내보이는 표정은 뿌듯한 미소뿐이었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대체 무엇을 주어야 이토록 사랑스러운 너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사람 말을 개코로 아네, 이 또라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삼켜버리고 싶어. 사람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대라면 분명 달고 향기로울 테지.”

남자는 대화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맛이 가 있었다. 그러나 고작해야 맛이 간 성인 남자가 제 몸 위에 올라타 욕망을 드러내는 것 정도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이브는 더 이상 그가 알고 있던 「이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도리 없이 무력하게 남자들에게 휘둘리고 억압당하는 가냘프고 연약한 먹잇감이 아니었다.

이브는 이전 생에서 기나긴 단련을 통해 스스로 영혼 깊이 새긴 포식자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은 제게 있어 해로운 것들을 모두 짓밟고 물어뜯으며 성장했다. 이브는, 주영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역전했다. 언제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은 자신이어야 했다. 고지를 점한 이브의 입술선이 지독할 만치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손끝을 타고 오르는, 날카로운 쇳날이 고깃덩이를 뚫고 가르는 감각을 떠올렸다. 새빨갛게 흩뿌려지는 생명의 파편과 쇠의 냄새를 닮은 비린내를 떠올렸다.

구겨지고 찌그러진 철판은 긴 시간에 걸쳐 쉼 없이 녹아내리고 두들겨져 마침내 날이 파르랗게 선 검이 되는 데 성공했다. 이브는 그녀를 짓밟고 삶과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모든 이들을 베고 찌를 무기가 되었다.

“너, 상당히 너그러운 척 굴고 있는데 말이야.”

이브의 손끝이 나무를 타고 오르는 뱀처럼 소리 없이 에드워드의 몸을 훑고 올라갔다. 옷자락 위를 더듬어오는 손가락의 서늘한 감촉에 에드워드는 말없이 이브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살면서 너 같은 놈들 많이 봤거든. 상대를 자기 입맛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자신하는 얼간이 새끼들.”

이브의 손가락이 남자의 턱선을 덧그리듯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이내 살며시 턱 아래 연약한 목 위를 간질이듯 쓸어내렸다. 그녀의 다른 쪽 손은 누워 있는 에드워드의 가슴 정중앙을 정확히 짚은 채 서서히 무게를 싣고 있었다.

“상황을 컨트롤하는 척 실컷 여유 부리다 자기 생각대로 일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눈치채면 그 순간부터 아주 추한 몰골로 강짜를 부려대더란 말이야.”

정말 보기 추하거든, 하고 작게 덧붙인 이브가 상냥하게 눈꼬리를 휘며 웃어 보였다. 날 선 목소리와는 상반된 나긋한 웃음은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과거의 혹은 미래의 이브가 보이던 미소와 닮아 있었다.

손가락 끝이 남자의 턱과 목이 이어지는 언저리의, 숨길이 통하는 혈 자리를 찾아 지그시 힘을 더하기 시작했다. 이브의 다정한 웃음에 취해 있던 에드워드는 뒤늦게야 숨을 쉬는 것이 점차 곤란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크, 흣…….”

“어디까지 내려가야 네가 추하게 발버둥 칠지 좀 궁금하기는 하네.”

에드워드의 손이 다급하게 이브의 손목을 위를 잡았다. 그러나 서서히 숨통을 죄기 시작한 그녀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에드워드의 손아귀에 잡힌 이브의 손목 언저리가 희게 변했으나 그녀의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미동도 없이 남자의 목 위를 조이는 이브의 표정은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이렇게 죽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 그렇지?”

이브는 티가 나지 않는 방법으로 숨통을 조이는 방법을 알았다. 굳이 손 전체를 쓰며 목 위에 짙푸른 멍을 만들어내지 않고도, 두 손가락만으로 얼마든지 기도를 압박할 수 있었다.

이브의 손가락 끝이 설골의 양옆을 아슬아슬하게 힘을 주어 짓누르는 통에 극심한 통증이 목 위에서 번졌다. 그러나 더욱 에드워드를 괴롭히는 것은 제대로 숨이 들이쉬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남자의 다리가 이브를 떨어트리기 위해 버둥거렸으나 그 위에 올라타 앉은 이브는 그의 가여운 반항을 완벽히 무시한 채 제 할 일에 집중했다.

남자의 목 안에서 끅, 하고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끄, 컥……!”

“설마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게 될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나 봐. 얼마나 나를 우습게 본 건지.”

이브는 차가운 어조로 중얼거리며 차분히 손아래에서 짓밟히고 있는 먹잇감을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온통 물감이 번진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가 아래로 점차 짙푸른 색이 번져가고, 녹색으로 빛나던 푸른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흐리멍덩하게 흐려져 있었다.

제 손목을 틀어쥔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돌연 고통스럽게 아미를 찌푸리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서 희미한 황홀경이 스쳐 지나갔다.

흐트러진 눈동자에 언뜻 쾌감이 비추어지는 것을 알아챈 이브가 빠르게 손에서 힘을 빼고 숨을 쉬는 것을 허락했다. 드디어 기도를 타고 흘러들어 오는 공기를 맛본 에드워드의 입 안에서 연신 괴로움에 찬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커흑, 콜록, 컥! 커헉……!”

“숨 다 쉬었어?”

자연적인 반응으로 새어 나온 눈물 안쪽으로, 에드워드의 눈 흰자위가 언뜻언뜻 붉게 번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브는 담담한 얼굴로 웃어 보이며 남자의 턱을 틀어쥐었다. 얼마든지 다시금 목 줄기를 쥐고 짓누를 기세였다. 눈꼬리를 타고 길게 흐르는 눈물을 내려다보며 이브가 여상히 중얼거렸다.

“진짜 짐승 같은 새끼네. 이 와중에도 아래가 섰잖아.”

“큭, 하하, 크흑…….”

목이 조여드는 고통과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공포 속에서 머리를 쳐든 것은 분명 흥분이 뒤섞인 쾌락이었다. 제 의지 밖에서 아래를 세우고 만 육체의 반응에 에드워드는 영문을 몰랐으나 결국 이 역시 이브가 의도한 것으로 판단하고는 콜록대며 기침을 토해내면서도 즐거워 웃어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크흑, 이 자리에서 죽이지 그랬나.”

“마음 같아선 정말 그러고 싶지만.”

이브는 장난을 치듯 슬쩍 목덜미 위를 손으로 덮어 숨이 과하게 조이지 않을 정도로만 짓누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 있었다는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았잖아.”

“그, 크흣……!”

불편한 압박감에도 에드워드의 표정은 크게 불쾌한 기색이 아니었다. 기대한 반응이 나오지 않아 내심 실망한 이브가 입맛을 다시며 남자의 몸 위에서 떨어져 나왔다.

턱 아래에 붉게 남은 작은 흔적은 가까이서 턱을 들어 올려 살피지 않는 이상은 잘 눈에 띄지 않을 터였다. 그마저도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 금방 사라질 자국이었다.

몸을 일으켜 건너편 의자로 자리를 옮겨 앉은 이브가 다리를 꼰 채 조용히 눈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는 에드워드를 지켜보았다.

‘이 정도 무례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는 건가? 대체 얼마나 돌아 있는 거야, 저 자식.’

차라리 자길 죽일 뻔했다며 길길이 날뛰고 화를 냈더라면 이해했으련만, 드러내놓고 살기를 뿌리는 이브의 태도에도 에드워드는 그저 황홀해할 뿐이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의 「너그러운」 반응에 이브의 표정이 차게 가라앉았다.

쿨럭대는 기침 소리가 점차 멎었고,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가라앉았다. 이브도 에드워드도 굳이 속에 품은 말을 바깥으로 꺼내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남자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조용히 제복의 목깃을 단정히 정리했다. 길고 흰 손가락이 옷깃 위를 정갈히 훑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던 이브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윌리엄과의 인연은 끝났어.”

“음?”

“그 남자는 더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알맹이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왜 「이브」를 괴롭힌 자의 껍데기를 둘러썼느냐고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이브가 삐딱하게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말했다.

“떠볼 거 다 떠봤으면 이제 일어납시다.”

“아직 조금 더 남았네만.”

“에이, 씨.”

“뭐. 그건 차후의 즐거움으로 남겨두기로 할까.”

이브가 구겼던 옷깃을 마저 정리한 에드워드가 산뜻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이 목련의 방에 들어온 지도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집무실에 남겨두고 온 이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방 밖을 나서기 직전, 이브는 에스코트하기 위해 제 팔 아래로 팔을 밀어 넣는 에드워드의 팔을 쓰윽 밀어내고는 마치 호위를 서듯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단호한 그녀의 태도에 에드워드의 표정이 즐거움으로 반짝반짝 물들었다.

에드워드에게 있어 그녀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마약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독배요, 입으로 넘겨주는 모든 것이 극독이었다. 그러나 이는 지금껏 없었던 극상의 쾌감이기도 했다.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희열의 정체를 빠르게 감지해냈다.

기실 고통과 쾌락은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바깥의 자극으로 말미암은 육신의 반응 따위는 어찌 되어도 좋았다. 목을 졸리면서도 에드워드는 이브가 제 시선을 피하는 일 없이 직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하고 말았다. 그녀의 눈이 온전히 저를 담는 그때에서야 그는 마침내 저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

수도 없는 반복 가운데 단 한 번, 그녀가 저를 담았던 적이 있었다. 발목에 쇠사슬을 단 채로 온갖 고초를 겪어 해쓱해져 있으면서도 그녀는 말간 녹갈색의 부드러운 눈동자로 분노도, 증오도 아닌 의미 모를 감정을 품은 채 남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 본 적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날 이후 오랜 시간 스스로 맹세한 약속을 어기고 이브를 품어 씨를 뿌렸다. 모든 생을 통틀어 딱 한 번 저지른 일탈이었다. 그럼에도 이브를 가질 수는 없었다. 마치 자유를 되찾은 종달새처럼, 그녀는 평소처럼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리 날아가버렸다.

그 이후 다시 이브를 되찾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던가. 닥치는 대로 「신」에 대한 이야기들을 긁어모았던, 이제는 흘러가버린 미래의 시간을 떠올리던 남자는 이윽고 그 기억을 뇌리에서 털어내버렸다.

드디어 에드워드는 다시금 구원을 맛보았다. 그녀는 삼키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는 달고 향기로운 독이었다. 비록 혀가 마비되고 목에서 피를 토하다 종래에 숨이 끊어져 죽는대도 좋았다. 남자에게는 그 모든 것이 희망이었다.

침을 삼킨 순간 목 안쪽, 혀가 끝나는 언저리에서 따끔한 통증이 잘게 일었다. 불쾌한 압박감과 이물감이 계속해서 감각의 끝에 얼쩡대며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여전히 그의 숨통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에드워드는 의식적으로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그의 명령을 받고 바깥에 물러나 있던 기사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익숙하다는 듯 느긋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꽃처럼 만개한 웃음을 그려 보였다.

그녀가 원한다면 가벼운 장난에 장단을 맞추어 주는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드워드의 입가에 띄워진 자기로 빚은 인형 같은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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