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가장 날것의 마음 (12/22)

11. 가장 날것의 마음

이브는 제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보며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부어라 마셔라 흥청망청 알코올을 위장으로 들이부은 탓에 중간 중간 안개가 낀 듯 흐릿하기는 했으나 그녀는 곧 사건의 시발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브는 무사히 사건을 마무리 지은 것을 자축하는 의미로 카스텔과 식사 약속을 잡았다. 비록 후작위를 이어받지는 못하지만 스무 해가 훌쩍 넘도록 귀족가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사내는 과연 배운 바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멋들어지게 그녀를 에스코트하여 훌륭한 식당에서 저녁을 대접했다.

식사는 무척이나 훌륭했다. 끝 맛이 깔끔한 수제 치즈를 곁들인 샐러드와 갓 구운 흰 빵을 시작으로 수도에서는 쉽게 맛보기 힘든 해산물을 넣은 매콤한 해물스튜, 버터와 함께 구운 가리비 관자, 허브와 소금으로 맛을 내고 와인과 버터를 끼얹어 속살이 붉은 기를 잃지 않을 정도로 재주 좋게 구워낸 채끝등심스테이크가 식사 타이밍에 맞추어 줄지어 식탁을 채웠다. 어느 것 하나 빠지는 요리가 없었다.

게다가 가니시로 나온, 버터와 함께 으깬 감자와 화이트와인으로 쪄낸 흰 아스파라거스는 가능한 한 가니시에는 손대지 않는다는 귀족식 테이블 매너를 완전히 잊게 할 정도로 맛있었다. 솔직히 이브는 식사하는 중에 카스텔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식음에 집중했다.

접시가 대여섯 번 정도 왔다 갔다 한 후, 이브는 후식으로 나온 크렘브륄레의 얇은 캐러멜 막을 디저트 스푼으로 톡톡 부수어 아래층의 바닐라 빈이 들어간 커스터드푸딩과 함께 퍼 먹으면서 식당의 이름을 꼭 기억해뒀다가 다음에 또 와야지 마음먹었다.

식사를 마무리 지은 두 사람은 함께 베르묄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에스코트까지 완벽하게 마친 카스텔을 붙잡은 것은 이브였다. 원래 큰 프로젝트를 끝낸 후 알코올로 위장을 청소하는 것은 주영의 오래된 습관이었고, 그녀는 결코 혼자 술을 마시는 법이 없었다.

딱 한 잔만 하고 가라는 이브의 간곡한 부탁과 구질구질한 협박에 조금 당황한 낯을 하면서도 결국 남자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순순히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때늦은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도 저택의 사용인들은 예에 어긋남 없이 손님을 맞았다. 잠깐 밥만 먹으러 갔다가 온다며 외출을 했던 이브가 카스텔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돌아와서는 남자를 바로 식당으로 데려갔다는 것을 보고받은 알베리크가 각을 맞추어 다린 웨이스트코트를 걸친 채 아래로 내려와 합석하게 되면서 세 사람의 술자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오라버니도 한잔하시게요?”

“……아닙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한들 듣지 않겠군요.”

알베리크는 이브의 얼굴을 보고 예절과 매너를 주제로 한바탕 잔소리를 쏘아붙이려는 얼굴을 하다가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카스텔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어째 면전에서 주의를 듣는 것보다 더 기분이 찝찝했다.

“마침 잘됐네요. 오라버니가 잠깐 손님 응대 좀 해주세요. 전 부탁한 게 제대로 왔는지 확인하고 올게요.”

이브는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물론 탈주의 주목적은 환복을 하는 것이었다. 이브는 제 방으로 올라가 뱀이 허물을 벗듯 훌러덩 입고 있던 코트와 베스트, 셔츠와 바지까지 모두 벗어 바닥 아무 데나 내팽개치고는 직접 옷장을 열어 가벼운 재질의 베이지 톤 실크 슈미즈를 꺼내 들었다.

이브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브의 방에서 대기 중이던 안나는 허리통이 넓은 슈미즈를 아래서부터 머리를 집어넣어 마구잡이로 팔을 쑤셔 넣는 이브의 과격한 모습에도 익숙하다는 듯, 어느새 밝은 연녹색 실크 리본을 양손으로 든 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녀의 기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브가 손을 목 뒤로 집어넣어 속으로 말려 들어간 머리카락을 드레스 바깥으로 끄집어내자 재빨리 이브의 뒤로 다가온 안나가 그녀의 허리에 폭넓은 리본을 둘러 허리 뒤쪽에서 매듭을 매주었다.

“가운도 걸치시겠어요?”

“아냐, 됐어. 굳이 가운까지야.”

이브는 팔꿈치 아래까지 내려오는 하늘하늘한 소맷단의 레이스를 만지작거리며 거울을 통해 넥 라인의 러플 칼라가 뒤집힌 곳이 없는지 확인을 마친 후 옷을 입느라 이리저리 헝클어진 머리를 보고는 높이 올려 묶었던 머리끈을 풀어버렸다.

“머리는 다시 만질까요?”

“아니. 괜찮아.”

“이대로 내려가시게요?”

이번에는 안나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고 말았다. 레이디뿐만 아니라 중간계층의 아가씨들조차도 가족들 앞에서는 단정한 헤어를 유지하는 것이 상식이었으나, 이 댁의 레이디는 그런 것은 개코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씩 웃을 뿐이었다.

안나의 동그래진 눈동자를 뒤로한 채 이브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조제프를 찾았다. 과연 그는 저택의 노련한 총책임자답게 이브의 다소 흐트러진 차림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이브의 물음에 대답했다.

“일곱 병 전부 깨진 것 없이 무사히 도착했나요?”

“예, 아가씨.”

“모두 식당에 가져다주세요. 와인은 괜찮은데 증류주들은 얼음 통에 담아 와야 해요. 글라스도 석 잔씩 준비해주시고요. 다들 식사는 했으니 곁들일 안주는 간단하게 과일이나 치즈 정도로만 부탁할게요. 아, 술은 번거롭게 한 병씩 가지고 올 필요 없이 한 번에 전부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

그에게 주문을 마친 이브가 희희낙락한 얼굴로 식당의 문을 다시 열었을 때, 긴 정찬 테이블에 마주 본 채 어색한 기색으로 앉아 있던 두 남자가 조금 화색을 띠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곧 그녀의 차림새를 보고 얼떨떨해했다. 탐스럽게 목 아래로 늘어진 우윳빛 홍차색의 머리카락을 보며 알베리크의 표정이 민망하다는 기색으로 일그러졌다.

“머리 꼴이 그게 뭡니까?”

“왜요. 기다릴까 봐 잽싸게 왔더니만.”

이브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본 적이 없었던 데다 생전 처음 여성의 풀어 헤친 머리를 본 카스텔의 반응 역시 당혹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달싹이다가 곧 다물어버렸다. 함께 임무를 수행했던 짧은 시간 안에 이브가 타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타입의 사람임을 빠르게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 이브는 알베리크의 타박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와 자연스레 상석에 털썩 엉덩이를 뭉개고 앉았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식당의 문이 열리고 손에 무언가 한 아름 든 시종들이 차례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긴 테이블이 하나둘 접시와 잔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먹음직스러운 치즈와 염장하여 말린 돼지 뒷다리를 얇게 썬 생햄,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썰어낸 과일들이 보기에 좋게 플레이팅된 접시들이 놓이자 이브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알베리크와 카스텔은 테이블이 채워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시종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술병이 네 병을 넘어가면서부터 조금씩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기 시작했다.

알베리크는 참을성 있게 입을 다물고 허리를 세운 자세로 가만히 상차림을 바라보다가, 테이블의 세팅을 마치고 조제프를 제외한 시종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후에야 이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술로 자살이라도 할 생각입니까? 왜, 아예 저택 지붕에서 뛰어내리지 그럽니까.”

“술로 어떻게 자살을 해요. 이렇게 마셔도 안 죽어요. 나 참, 과장은.”

“영애. 제 생각에도 조금 과한 것 같습니다만…….”

“에이. 약한 소리 하신다. 제가 해봐서 아는데, 마시면 어떻게든 들어가요. 조제프, 일단 화이트와인부터 한 잔씩 따라줘요.”

모두 그동안 이브가 수도를 이리저리 쏘다니며 찾은 가장 제 취향에 맞는 술들이었다. 이브는 쪼르르 소리와 함께 잔을 채우는 연한 황금빛 액체를 황홀한 기색으로 바라보다가, 건배를 종용했다.

‘아쉽게도 위하여! 같은 건배사를 붙이는 문화는 아니지만……. 짠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자자, 다들 잔 드시고. 멋지게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온 절 위해 건배해주세요.”

한 사람은 마지못해 그리고 한 사람은 비교적 담담한 기색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떠올릴 수 있었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이브는 알코올로 위장을 씻어내기 시작한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더듬더듬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건배를 하고……. 존나 달리다가……. 조제프까지 내보내고 죽어라 마셨지. 그러다가 알베리크가 먼저 기절했던가……?’

그래도 제법 오래 따라붙는다 싶던 알베리크가 결국 먼저 술에 취해 그대로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잠들어버렸다. 잠든 것인지 쓰러진 것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이브는 쿵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진 그의 몸을 슬쩍 확인하고는 혀를 쯧쯧 차면서 짙은 호박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버번을 꼴딱 삼켰다. 그러나 그런 이브의 눈 역시 희미하게 풀려 있었다.

“어휴, 저 약골……. 오래 버틴다 했지.”

얼음도 없이 잔에 깔린 위스키를 홀짝홀짝 마시는 이브의 얼굴은 겉보기에는 여전히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멀끔한 얼굴을 바라보던 카스텔이 평소보다도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작게 물었다.

“영애. 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알베리크 공자를 대하는 영애의 태도가…… 사촌 동생이라기에는 거리감이 일반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나요?”

“어떻게 하면 짧은 시일 내에 그렇게 친밀한 유대 관계를 쌓을 수 있는 겁니까?”

“옉?”

둘이 무슨 사이냐고 물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던 이브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이브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하마터면 눈이 옹이구멍이냐고 물을 뻔했다. 휙 고개를 돌려 바라본 카스텔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무심하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두 분이 무척 친밀해 보여 부럽습니다. 제게는 나이 차가 조금 나는 동생이 있는데…….”

비록 입 밖으로 꺼내는 말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이브는 감정 한 톨 담기지 않은 무뚝뚝한 낯을 하고 횡설수설하는 카스텔을 바라보며 그가 취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주는 대로 넙죽넙죽 잘 받아 마시기에 이 정도는 괜찮은 줄 알고 페이스 조절 없이 마구 잔을 채워주었더니 결국 취해버린 모양이었다.

‘소드 마스터도 이 정도로 마시면 취하는구나. 하긴 독에 중독도 되고 칼에 찔리면 과다출혈로 죽기도 하는데 술이라고 별수 있겠어.’

물론 오라를 써서 술기운을 날리는 방법도 있다고 듣기는 들었으나, 술을 마시는 내내 절대 그런 아까운 짓은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해두었더니 정말 꼼수 한번 부릴 생각하지 않고 정직하게 받아 마신 모양이었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카스텔이 세 사람 중 가장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이브는 정말 소드 마스터의 취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이브는 턱을 괸 채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이복동생과의 거리감에 대해 종알대는 남자를 물끄러미 감상하다가 빈 잔에 마지막 남은 위스키를 탈탈 털어 부어주었다.

카스텔은 유리잔에 호박색 액체가 채워지자 곧장 입을 다물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 물끄러미 위스키를 내려다보다가 단숨에 그것을 비워버렸다. 퍽 호쾌한 원샷이었다. 이브는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동생분이 어쨌는데요?”

“……예, 아. 동생이.”

카스텔의 눈꺼풀이 천천히 끔뻑 감겼다 떠졌다. 이브의 목소리를 듣고 말을 이어나가려던 그가 갑자기 입술을 달싹이며 멈칫하더니 이브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제게 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이고…….”

그의 대답을 끝으로 술자리는 파장에 이르렀다. 이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을 받고 식당으로 들어온 몇몇 시종이 안색을 숨기지 못하고 저들끼리 슬쩍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보였으나, 이브는 일부러 못 본 척하고는 테이블의 정리와 만취한 두 남성의 처리를 명령했다.

알베리크는 키가 큰 사내종의 등에 업혀 제 방으로 실려 갔다. 문제는 카스텔이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니, 그러니까…… 취하셨으니까 댁으로 가셔야 한다니까요?”

“저는 괜찮습니다.”

“환장하겠네.”

그는 멀쩡한 얼굴을 해서는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떡이 되어 있었다. 알베리크처럼 아예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면 더 처리하기가 편했으련만. 저택의 시종들은 감히 기사 나리의 몸에 손을 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한 기색으로 그 근처에서 모여 있을 뿐이었다.

이브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가, 돌연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카스텔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놀란 것은 시종들이었다. 이브는 그들에게 생긋 웃어 보이며 손가락을 펴 입가에 가져다 대어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후, 뺨을 맞아 조금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온 카스텔의 턱을 잡아서 들어 올렸다. 이미 이브의 상태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었던 짓을 술기운을 빌어 서슴없이 저지른 이브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카스텔 경. 괜찮으세요?”

“아, 영애. 괜찮습니다.”

“일어서실 수 있으시겠어요?”

“예.”

카스텔은 순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취한 사람의 몸놀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브는 혹시 몰라 카스텔의 왼팔을 잡고 부축하며 시종에게 물었다.

“손님이 쉬었다 가셔야 할 것 같은데, 정리해둔 손님방이 있나?”

“네, 아가씨. 2층 서쪽 손님방을 정리해두었습니다.”

“안내해주게.”

메이드 한 사람이 앞서서 그녀에게 길 안내를 했고, 이브는 그녀의 뒤를 따라 카스텔을 부축해 식당을 나섰다. 잠깐 놀랄 만한 일이 있기는 했으나 별다른 큰일 없이 조용히 정리되는 듯한 분위기에 시종들은 저마다 시선을 나누며 몰래 한숨을 삼키고는 술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카스텔을 붙든 채 계단을 올라온 이브는 게스트룸 문 앞에서 메이드를 보내고 얌전히 제 부축을 받으며 걸어온 카스텔을 손님방에 딸린 욕실로 집어넣었다.

“자. 이제 세수랑 양치하고 나오세요.”

“예.”

“어우. 팔은 걷고 씻어야죠.”

꼬박꼬박 대답은 잘하는 듯했으나 어딘가 고장 난 인형처럼 구는 남자를 그냥 두고 방으로 갈 정도로 양심에 털이 나지는 않았기에, 이브는 직접 카스텔의 양 소매를 돌돌 말아 걷어주었다.

심지어 술에 취한 그가 세수를 하다가 세면대에 코를 박고 죽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결국 욕실에서 떠나지 않은 채 카스텔이 씻는 것을 거들어주기까지 했다.

이브의 지시대로 얼굴에 물을 끼얹고 기계적으로 얼굴을 문지른 남자는 턱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멀뚱히 서 있다가 마른 면포를 찾아온 이브가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하는 소리를 하며 물에 젖은 뺨을 우악스레 닦아주는 손길에 나른히 눈을 감았다.

고양이 세수를 하듯 먼지만 닦아낸 정도로 간단히 소세를 마치고 다시 이브가 이끄는 대로 밖으로 따라 나온 카스텔은 이브가 어깨를 누르자 순순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자. 이제 여기서 푹 쉬시고 내일 집에 가시는 거예요. 아셨죠?”

“네.”

대답은 잘하네, 하고 중얼거리며 이브는 저도 모르게 침대에 앉아 있는 남자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얌전히 이브의 손길에 머리를 맡기고 있던 남자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갑작스럽게 손을 올려 이브의 손목을 잡아챘다.

함부로 머리를 만져 기분이 나빴나 싶어 이브가 사과하려던 그때, 카스텔이 그녀의 손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마치 독백을 읊듯 말했다.

“영애를 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네?”

“당신은…… 거칠고 제멋대로인 데다 상식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음. 제가 좀 그렇죠.”

“지금껏 제게 이렇게 무도하게 군 여성도, 아랫사람을 부리듯 자연스레 명령을 내리는 여성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분 나쁘셨어요?”

술이 들어가니 취중 진담이라도 하는 듯한 기세였다. 이브는 어디 한번 지껄여봐라 하는 표정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술기운을 틈타 불쾌한 감정을 토로한다니, 생각보다 속이 좁은 남자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던 참이었다.

“아닙니다.”

“예?”

“기분이, 정말 이상하게.”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한 듯 그의 입술이 한차례 달싹이다가 굳게 다물어졌다. 이브는 참을성 있게 가만히 서서 그의 입이 다시 열리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심장 안쪽이, 간지럽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명령을 내리고, 당신을 마구 휘두르면 심장이 간지럽다고요?”

“당신이 이상한 요구를 해도 모두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역시, 이상합니다. 남자가 한 톤 더 소리를 죽인 채 중얼거렸다. 이브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소리 내 웃지 않도록 입 안으로 혀를 한번 질근 깨물고는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뭐든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내가 이상해진 것인지, 당신이 나를 이상하게 만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카스텔.”

이브는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부드럽게 남자의 턱을 감싸 위로 치켜들었다. 이리저리 흐트러지던 잿빛의 눈동자가 서서히 이브의 반짝이는 녹갈색 눈과 마주쳤다.

“그 무엇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건 그냥, 그런 거예요.”

“예.”

“내 말을 어디까지 들어줄 수 있을지 궁금하지는 않아요?”

“……조금.”

남자의 눈이 다시 느릿하게 아래로 감겼다가 뜨였다. 평소 짓던 표정과 다른 점이 없는 딱딱한 얼굴임에도 어딘가 모를 나른함이 엿보였다. 술기운 탓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제 부드러운 속내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그의 모습이 마치 맹수의 날카로운 송곳니 앞에 무방비하게 여린 목덜미를 드러내놓고 있는 사슴처럼 보였다.

평생을 억지로 감정 표현을 억압당한 채 제 군주를 모시는 일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학습해온 남자는 알코올의 힘을 빌려 단단한 이성의 벽을 내려놓고서야 간신히 속엣말을 정제되지 못한 표현으로나마 내비칠 수 있었다. 원래의 이브였다면 분명 이 서투른 남자를 다정하게 보듬어주었겠지.

이브는 슬쩍 힘을 주어 카스텔의 손에서 제 손목을 빼내었다. 남자는 순순히 그녀가 제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이브는 그대로 한 걸음, 두 걸음 서두르지 않고 뒷걸음질 쳤다. 열 걸음을 걸어 거리를 물린 이브가 한쪽 손을 살짝 뻗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쪽으로 올 수 있겠어요?”

그러자 멀뚱히 그녀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카스텔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일어섰다. 그가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이브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이어졌다.

“무릎을 꿇고 네발로요. 짐승처럼 무릎으로 기어와 봐요.”

그는 제 고막을 파고든 목소리에 잠시 멈칫하며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기울었다. 사내의 두 무릎이 바닥에 깔린 카펫에 닿는 순간 이브는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입술을 혀로 적셨다.

카스텔은 이브가 말한 대로 착실하게 몸을 낮추어 네발짐승처럼 바닥을 기며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한 발짝 그가 다가올 때마다 이브의 눈동자가 별이라도 박은 듯 기대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리고 마침내 사내가 이브의 발치까지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브의 길쭉하니 섬세한 손가락이 천천히 남자의 머리 위에 올려졌다. 손가락은 머리카락 사이사이 두피를 문지르듯 파고들더니, 그대로 아래로 내려가 그의 뺨을 더듬어가며 툭 도드라져 각이 진 날카로운 턱선을 손으로 덧그리듯 쓰다듬었다. 남자의 눈이 느릿느릿 감기고 그의 고개가 마치 기대기라도 하듯 이브의 손바닥 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었다.

길이 든 집짐승을 쓰다듬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심지어 제가 길들인 적도 없는 짐승이 눈앞에 있는 이가 이로운지 해로운지 구분도 하지 못하고 그저 머리를 들이밀고 치대고 있었다.

결국 이브는 가장 합당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굴 보는 걸까. 내게서 누구의 모습을 바라는 거지?’

그리고 이브는 오래 지나지 않아 이 남자가 대가 세고 성정이 강직한 여검사의 모습을 저에게서 보고 만 것이라 판단했다. 살면서 그가 가장 온기를 나누어 받길 원했던 여자의 모습을.

‘남자들은 다들 엄마 같은 여자를 찾는다더니.’

빠르게 사내의 순종을 이해한 이브는 입꼬리를 슬쩍 비틀어 올렸다. 차려진 밥상을 마다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엄마든 뭐든, 이렇게까지 귀염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바라는 대로 예뻐해주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잔혹한 처사일 것이었다.

‘12첩 반상을 차려놓고 제발 잡숴주십사 애걸복걸을 하는데 이걸 어떻게 걷어차요! 너어 이 요오망한 왕가슴 같으니라고……!’

이브는 속으로 수십 명의 이브가 환호를 지르며 물개 박수를 치는 심상 풍경을 떠올리면서도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마구 휘둘러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자 카스텔은 다시금 눈을 떠 위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잠시 진지하게 그녀의 물음을 생각하는 듯 보이던 남자가 곧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내가 당신에게 명령하고, 지배해주었으면 해요?”

그는 또 곰곰이 이브의 말을 되새기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가 바라신다면.”

반응이 한 박자 느린 것은 아마도 술기운 때문이겠지, 하고 짐작한 이브가 여전히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대답하는 카스텔을 내려다보며 술에 취한 기색이라고는 요만큼도 비치지 않는 남자의 뺨을 손가락 바깥 부분으로 슬슬 쓰다듬었다.

“제법 귀엽게 구네.”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개구지게 키득키득 웃은 이브가 근처에 있던 티테이블로 가서 1인용 암체어를 질질 끌고 원래 서 있던 자리로 가지고 와 앉았다.

발치까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오는 슈미즈의 치맛단이 의자에 앉는 바람에 위로 딸려 올라가 발목이 훤히 드러났다. 자연스레 그 아래로 바지 정장을 입었을 때 신었던 어두운 회갈색 구두의 구두코가 삐죽 튀어나왔다.

예에 크게 어긋난 착장이었다. 치렁치렁 풀어 헤친 머리카락과 화장기 없는 민얼굴, 크지 않게 부푼 퍼프소매의 실크 슈미즈와 갈색의 정장 구두는 명백히 부조화를 이루고 있음에도 그것을 걸친 이브의 당당한 미소가 기묘할 정도로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여자의 모습은, 마치 자유라는 단어를 인간의 형태로 형상화한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카스텔은 어쩐지 그녀가 자신을 옥죄고 있는 억압에서 해방시켜줄 초월적이고 전능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브가 의자에 앉아 다리를 뻗자 뾰족한 구두코의 선단이 남자의 몸 위에 닿았다. 카스텔은 술에 취해 감각이 둔해진 건지, 아니면 그저 그녀의 모든 행위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건지 모를 담담한 얼굴로 가만히 이브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는 채였다.

구두 끝이 카스텔의 단단한 턱을 치켜들듯 턱 아래를 받쳐 들어 밀어 올리다가 천천히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곧 단단한 가죽신은 남자의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와 살갗을 꾹꾹 밀어내듯 장난스레 짓누르다가 가볍게 돌기가 있을 언저리를 구둣바닥으로 짓이기듯 좌우로 문질렀다.

단단하게 단련된 검사의 신체 여기저기가 손도 아닌 구둣발에 짓밟히고 희롱당하고 있었다. 구두를 신은 발은 능청스러울 정도로 음탕한 목적만을 가지고 사내의 몸을 더듬고 자극했다. 딱딱한 가죽 구두만이 그에게 닿는 전부였으나 카스텔은 배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영문 모를 기이한 열감을 느꼈다.

이윽고 이브의 구두가 남자의 허벅지 어딘가, 미묘한 두께감이 있는 위치에 다다랐다. 그 자극만큼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참아낼 수 없었던 모양인지 카스텔의 몸이 한차례 움찔 튀었다.

그녀의 발은 서두르지 않았다. 판판한 신발 바닥이 민감한 샅 위를 느긋하게 문지르는 움직임에, 카스텔은 결국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주먹 쥔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예민하고 민감한 급소 위를 이브의 발이 꾹꾹 짓이기고 뭉갰다. 참아내기 어렵거나 깜짝 놀랄 정도로 강한 고통은 아니었으나 은근한 둔통과 이따금 찌릿하게 올라오는 자극에 남자의 육신은 솔직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읏.”

“기분 좋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하하! 가랑이 사이를 이렇게 부풀리고도 잘 모르겠다고요?”

작게 튀어 나간 한숨과도 같은 앓는 소리에 바지를 부풀리고 있는 남자의 추태를 즐겁게 감상하고 있던 이브가 그의 사타구니 위에서 발을 뗐다. 순식간에 사라진 무게감과 통증에 남자의 눈이 두어 번 느리게 깜빡였다.

“신발, 벗겨줘요.”

남자는 코앞까지 들이밀어 진 이브의 발을 보고도 별다른 거리낌 없이 그녀의 발목을 가볍게 쥐고 발뒤꿈치부터 구두를 벗겼다. 양쪽의 신을 벗긴 카스텔은 이윽고 양말과 삭스 가터까지 벗기라는 그녀의 지시에 양순한 태도로 따랐다. 다른 부분의 살갗과는 달리 햇볕에 타지 않아 희게 반짝이는 부드러운 발등이 그대로 드러났다.

“입 맞춰요.”

즐거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브가 말했다. 카스텔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표정을 한 채로 조심스럽게 왼발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발등 위에 입술 끝을 가져다 댔다.

발바닥에 닿은 손가락 끝으로 부르트고 거칠어진 살갗이 만져졌다. 발의 주인이 하루도 쉼 없이 단련했다는 증거가 손끝 피부 너머로 느껴지자 사내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둥그런 발등 위에 가볍게 닿은 입술이 어쩐지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조금 더 깊게. 혀가 닿아도 괜찮아요.”

그 말에 순순히 입술을 더 깊이 파묻었다가 뗀 남자가 굽혔던 허리를 펴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이브의 표정은 썩 만족스러운 기색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남자의 멱살이 틀어 잡히고, 위쪽으로 끌어 올려졌다. 잠깐 놀라기는 했으나 이내 카스텔은 이브의 손길에 따라 저항 없이 상체를 위로 일으켰다.

이브는 발등과 닿았던 사내의 입술에 거리낌 없이 제 입을 파묻었다. 이브의 입술은 실온에 잘 녹은 버터처럼 부드럽게 카스텔의 아랫입술을 감싸 물었다. 혀를 나누지 않고 온전히 얇은 피부와 피부가 만나는, 베어 물고 쪼아 먹는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사내는 아랫입술을 머금고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가 다시 잘게 합을 맞추어오는 키스 세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움찔거렸다. 그의 양손은 허공에 떠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우물쭈물하다가 제 멱살을 틀어쥔 이브의 손목 위에 내려앉았다.

입맞춤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입술 위를 쪼듯이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가 떨어진 이브가 남자를 위해 굽혔던 허리를 일으켜 세우고 거세게 틀어쥐었던 셔츠 자락을 놓아주었다.

“이렇게 입술 살로 물듯이, 약하게 빨아 당기면서. 할 수 있겠어요?”

“해보겠습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과는 달리 남자의 눈가와 뺨에 붉은 기가 어렸다. 그러나 그가 드러내는 미묘한 수줍음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긴 이브는 다시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다리를 뻗어 발끝을 까딱였다.

카스텔은 다시금 그녀의 발을 감싸 쥐고는 그녀가 시범을 보였던 움직임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며 허리를 굽혔다. 발등 위로 조심스러운 입맞춤이 잘게 떨어졌다.

“그대로 맛을 보듯이 다리 위로 올라와요. 천천히, 조금씩.”

어설프지만 그럭저럭 입맞춤 흉내를 내는 남자의 움직임에 이브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살살 물듯이 파고드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정강이를 타고 무릎까지 올라왔다. 말랑한 무게감이 위로 올라올수록 다리를 덮고 있던 치맛자락 역시 조금씩 위로 말려 올라왔다.

“혀를 내고 핥아봐요.”

약하게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카스텔은 저항 없이 이브의 말에 따라 혀를 내어 동그란 무릎 위를 핥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무릎 약간 위쪽에서 허벅지 바깥쪽으로 길게 난 상흔을 발견했다.

무릎에서 혀를 뗀 남자가 눈치를 보는 듯이 이브를 향해 시선을 올리며 눈을 맞추더니, 곧 도로 고개를 아래로 내려 흐릿하게 남은 상처의 흔적을 따라 입술을 파묻고 물기 어린 잔마찰음을 내며 입을 맞추어나갔다. 이브는 그가 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탁한 회색빛의 머리카락을 슬슬 쓰다듬었다.

“아주 오랜만에 진검을 잡은 날 실수해서 낸 상처예요.”

“노력의 흔적이군요.”

“맞아요. 난 노력하는 사람이죠. 게다가 천재이기까지 하거든요.”

“노력하는 것 역시 재능이라면.”

그답지 않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은근슬쩍 농을 건넨 남자가 물끄러미 흐릿한 상흔을 내려다보며 손끝으로 문질렀다.

‘아하, 이런 데에 약하시고만. 마거릿님 때문인가. 남자 못지않게 단련하고, 노력하고,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우는 드센 성격의……. 뭐 그런 데서 연민과 호감을 느끼는 타입? 마마보이 기질도 정도껏이어야지.’

생각해보면 게임 속 이브 역시 대차고 매사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황태자나 다른 남자주인공들의 폭압과 모욕에도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었다. 굳이 꿰맞추어보자면 마거릿님의 모습과 얼핏 닮아 보이기도 했다.

게임 속에서 남자가 품었던 개연성 부족한 연정의 뿌리를 드디어 알아낸 것만 같아 이브는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 상처 구경은 그만해요.”

이브는 의자 앞쪽으로 엉덩이를 빼고는 무릎 위까지 걷어 올려진 치맛자락을 안쪽으로 조금 더 끌어당기며 말했다. 바지에서 치마로 갈아입은 탓에 드로어즈조차 받쳐 입지 않았기에 치맛단 안쪽으로 반들반들한 허벅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쪽으로 더 들어와봐요. 이번엔 허벅지 안쪽에 입을 맞춰줘요.”

카스텔은 조금 머뭇대면서도 이브가 이끄는 대로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매사 진지한 남자의 표정은 여자의 허벅다리 안쪽을 애무할 때조차 여전했다. 이브는 허벅지 안쪽으로 닿아오는 마시멜로처럼 말랑한 얇은 피부의 감각에 집중하며 나른한 음색으로 지시했다.

달고 끈적한, 귀를 간질이는 은근한 목소리는 카스텔을 마치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순종하도록 만들었다. 남자의 얼굴은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허벅지 안으로 파고든 끝에 가장 안쪽 도톰한 둔덕을 가리고 있는 얇은 천 한 겹 위까지 다다랐다.

이브는 짓궂음 반, 희열 반으로 잔뜩 얼룩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손은 양순한 털 짐승을 쓰다듬듯 남자의 머리카락 위를 더듬고 있는 채였다.

“속옷 위로 입 맞춰요.”

“…….”

카스텔의 얼굴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슬쩍 들렸다. 남자는 이브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곧 다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난처한 듯 약간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었으나 곧 흰 면 속옷 위로 그의 피부가 슬그머니 닿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브의 지시는 점차 노골적일 정도로 난잡해지기 시작했다. 카스텔은 얼핏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 미간을 좁히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혀를 내어 천 위로 둥그런 둔덕을 핥고 배운 대로 조심스레 이를 세우지 않으며 여린 살갗을 베어 물었다. 어느새 길고 탄력 있는 다리 하나가 그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다.

“벗겨볼래요?”

순간 이브의 다리 사이에 파고든 머리통이 눈에 띌 정도로 움찔 튀어 올랐다.

‘아, 귀 빨개졌다.’

이브는 카스텔의 어깨에 올린 쪽의 발을 까딱이며 실실 웃고는 조금 더 은밀하게 속삭였다.

“왜. 못 하겠어?”

주저하는 기색은 있었으나 곧 이브의 치마 속으로 더듬더듬 손이 파고들었다. 금세 남자의 타액으로 축축해진 속옷이 발끝 바깥으로 사라지고, 희미한 체모 아래 지금껏 그가 천 위로 정성껏 적신 여성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브의 팔이 앞으로 뻗어져 나가 카스텔의 뒤통수를 가볍게 잡아 누르듯 당겼다. 남자는 그녀의 행동이 지시하는 바를 뒤늦게 깨닫고는 한차례 꿀꺽 침을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첫 마주침은 짧은 입맞춤이었다. 살갗끼리의 부드러운 접촉 이후 그의 입술이 조금 더 용기 내 안쪽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기꺼이 다리를 열어 침입을 도운 이브가 한층 더 나른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혀로 부드럽게 쓸어 올려요. 작은 돌기가……. 아, 거기. 으음……. 입술을 묻고 빨거나 살살 이를 세워서 긁어봐요. 너무 힘주지 말고 천천히……. 옳지.”

카스텔은 이브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신경 써서 그녀의 아래를 혀로 훑기 시작했다. 한쪽 손은 어깨에 올라온 다리가 미끄러져 떨어지기라도 할까 허벅다리를 감아 붙들고, 다른 손은 음부의 바깥 피부를 손가락으로 활짝 열고 있는 채였다. 다리 사이에 파묻힌 남자의 표정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한층 진지해졌다.

마치 잼을 핥는 개처럼 붉은 점막 안을 핥아 올리던 그의 혀가 이브의 지시대로 음핵을 찾았다. 작은 돌기 위를 정성스레 둥글리듯 혀로 문지르다가 그 위에 입술을 대고 빨아올리자 머리 위에서 작게 한숨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카스텔은 이브를 만족시키려 애쓰면서 흘긋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좀 전과 별다를 바 없는 평온한 표정이 시야에 잡혔다. 어쩐지 그다지 들뜬 기색이 아닌 듯 보이는 이브의 얼굴에 카스텔의 안색이 슬그머니 기가 죽은 듯 가라앉았다.

남자가 본 바대로, 이브는 크게 쾌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흥분으로 이어지지 못한 간질간질한 감각만이 살며시 척추 언저리에서 머물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려던 이브는 결국 김이 샜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아다라 그런가, 영…… 시원찮네.’

카스텔의 노력을 짧은 문장으로 평가한 이브는 지체하지 않고 그 감상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 나이 먹도록 뭐 했어요? 진짜 더럽게 못 하네.”

“……죄송합니다.”

“됐어요. 얼굴 치워도 좋아요.”

카스텔이 이브의 다리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자 이브는 허리를 도로 곧게 펴며 구깃구깃 접혀 있던 자세를 풀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금세 이브의 얼굴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애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카스텔의 바지춤은 아까보다도 훨씬 두툼하게 부풀어 있었다. 제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남자의 가운데 다리를 발견한 이브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대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 여자 밑 핥으면서 세운 거야? 만지지도 않고? 진짜 변태 아냐, 이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변태인 게 죄송할 일은 아니지. 바지나 좀 벗어볼래요? 자세히 보게.”

“…….”

순순히 하의의 여밈으로 향하는 카스텔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를 조롱하는 이브의 짓궂은 목소리가 마치 폭죽처럼 귓가에서 펑펑 터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랫배 그리고 더 안쪽의 근육이 바짝 조여드는 알 수 없는 쾌감이 남자의 신경을 바짝바짝 태우고 있었다.

카스텔은 곧 이브의 목소리에 고분고분 순종할수록, 이브의 목소리가 그를 매도하고 희롱할수록 허벅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배 안쪽과 척추 근처가 찌릿하게 울린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결국 그녀의 바람대로 스스로 바지춤을 풀어 헤치고, 속옷마저 약간 아래로 내려 은밀한 살갗을 드러낸 카스텔은 날카로운 시선이 배 아래에 꽂혀오는 것을 느끼며 가볍게 전율했다. 원하는 바를 성취해냈을 때의 쾌감과는 궤가 다른 희열이 그의 뇌를 자극했다.

“그냥 좀 서다 만 것도 아니고, 바짝 세웠네. 조금만 만져줘도 바로 가겠는데?”

키득키득 터져 나오는 비웃음이 카스텔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의 고개가 저절로 슬그머니 시선을 비껴 이브의 발치를 향해 떨구어졌다.

곧 그의 시야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이브가 다리를 풀고 바깥에 드러난 맨발을 자신에게로 가까이 들이미는 것이 보였다. 희고 길쭉한 발이 바지춤 사이로 바짝 솟아 있는 성기 위에 안착했다.

이브는 발바닥의 얇은 살 너머로 두근두근 맥박 치는 살덩어리의 온기를 느꼈다. 이 남자는 소질이 있었다. 그는 까다로운 명령을 받고, 지독한 모욕을 들으면서도 기쁨과 쾌감을 느끼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이브는 성기를 맨발로 짓이겨지면서도 뺨을 붉히며 잘게 파르르 떠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아랫입술을 축였다.

“기분 좋아?”

“읏, 흐윽…….”

“한참 어린 여자 보지나 빨면서 세우더니, 이젠 발로 밟는 걸로 싸는 거야?”

“하, 아……. 죄송, 죄송합…….”

“하하. 변태 새끼. 어어, 손 움직이지 마. 양손 뒤로 해서 서로 붙잡고 있어요. 풀면 혼낼 거예요.”

저도 모르게 꿈질꿈질 이브의 발목을 쥐려고 움직이는 카스텔의 손을 본 이브가 짐짓 엄격한 척 목소리를 깔며 지시했다. 남자는 작게 헐떡이면서도 그녀의 말에 움찔하고는 팔을 뒤로 둘러 양손을 맞붙들었다. 이브의 발가락이 귀두 끝 선단을 문질렀을 때는 하마터면 손을 놓칠 뻔했으나 그는 턱을 당겨 물며 서로 얽어 맞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입 벌려봐요.”

술기운과 성기를 자극하는 쾌감이 마구잡이로 얽혀 소용돌이치며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고 있는 그때, 이브가 부드럽게 속삭여왔다.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새도 없이 명령에 익숙해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뜨거운 한숨 소리가 새어 나오던 카스텔의 입이 작게 열렸고, 이브의 긴 손가락이 마치 뱀처럼 교묘히 그 틈을 파고들었다.

“흑, 흐으…….”

“빨아봐. 사탕 빨듯이. 혀로 핥아도 좋고.”

성기 끄트머리에서는 어느새 투명한 선액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카스텔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다섯 해가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어린 여인의 발아래에 짓이겨지면서 흥분해 헐떡이는 것은 변태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느꼈다. 흐리멍덩한 머릿속 어딘가에서 치욕과 민망함이 고개를 들었으나, 그것들은 곧 밀려오는 쾌락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다.

애써 입 안에 들어온 검지를 혀로 감아 빨고 문지르듯 핥던 카스텔은 곧 허벅지 안쪽과 복부의 근육이 바짝 긴장해 팽팽히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조금 더 강하게 자극받는다면 결국 참지 못하고 실례를 범할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이브의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나더니 지체 없이 입 안 깊숙한 곳으로 쑥 밀고 들어왔다. 혀뿌리와 입천장 안을 자비 없이 푹푹 쑤시며 자극하는 손가락에 카스텔은 생리적인 구역감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집요하게 그를 따라와 마치 강제로 구토라도 시키려는 듯 여린 입 안쪽 점막을 마구잡이로 유린했다. 남자의 목 안에서 간헐적으로 끄륵, 끅 하고 목이 짓눌리는 고통에 젖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진 그 순간, 카스텔은 허리를 파르르 떨며 잘게 경련했다. 숨이 틀어막히고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괴로움 속에서도 발로 성기를 끈질기게 자극당한 탓에 희뿌연 정액을 토해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삽시간에 남자의 배와 성기 그리고 이브의 발이 질척한 백탁액으로 젖어 번들거렸다.

그제야 이브는 숨통을 막고 있던 손가락을 기꺼이 입 밖으로 꺼내주었다. 급격히 가라앉는 구역감과 목 안쪽에서 터져 나오는 기침에 그는 정신 차리지 못하고 생리적으로 샘솟고 만 눈물을 후드득 떨구며 콜록거렸다.

“컥, 콜록, 커헉……. 크흑……!”

“엄살 피우지 마요. 칼에 찔려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사람이.”

이브는 몸을 말고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컥컥 소리 내며 침을 흘리는 남자의 치태를 즐거운 기색으로 내려다보면서 또 뭘 시켜볼까 천천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음 놀이를 몇 가지 떠올린 이브는 어느새 남자의 기침 소리가 잦아든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용해지기는 했는데, 너무 조용했다. 귀로 들려오는 숨소리가 어쩐지 색색 고르게 들려오고 있었다.

“……잠깐. 카스텔 경. 카스텔? 야. 인마!”

이브는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엎드려 몸을 말고 있는 남자를 흔들었다.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표정은 지극히 평화로워 보였다.

“이거 순 양심 없는 새끼 아냐! 야! 나는 이제 뭐 좀 해보려는데! 너 혼자만 한 발 빼고 잠들면 다냐? 야! 일어나!”

이브의 날 선 폭언에도 이미 남자의 자아는 반절 넘게 꿈속 세계로 빠진 지 오래였다. 강제로 상체를 일으켜 세워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병든 닭처럼 고개를 꾸벅꾸벅 아래로 처박는 남자를 몹시 빡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이브가 길게 한숨을 쉬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시바. 어쩐지 무드 있게 시작하나 했다. 첫 끗발이 개끗발이라더니…….”

결국 이브는 입으로 이생과 이전 생에서 배운 모든 욕설을 총동원하여 중얼중얼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기절이라도 한 듯 잠이 든 남자를 끙끙대며 어깨 위에 걸쳐 부축해 침대 위로 집어 던진 후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던 속옷을 집어 들어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쟤랑 다시 뭘 하면 내가 개다, 개.”

이브는 들개처럼 으르렁대며 손님방을 빠져나왔다. 늦은 밤, 제 방을 찾아 복도를 거니는 아가씨의 표정이 흡사 야차와 같았으나 사용인들은 모두 각자의 침실로 돌아간 탓에 그녀의 살기등등한 얼굴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으아아악! 이런 미친! 미친년아, 이 미친년아! 아아악! 아아아아악!”

다음 날 아침, 이브를 깨우러 2층으로 내려온 메이드들은 침실 문 안쪽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아가씨의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서둘러 노크를 했다. 그러나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이브의 거친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뭐? 차려진 밥상? 순 또라이 아냐 이거! 아아아아! 제발! 게임이면 세이브 로드 시스템 정도는 달란 말이야! 나 돌아갈래애액! 아아아악! 미친! 미친! 그런 걸 대체 왜 시키냐고! 정 꼴리면 뽀뽀나 좀 하고 말 것이지! 돌았냐, 나 새끼! 죽어! 진짜 죽어! 코 박고 죽어!”

곧이어 푹신한 무언가를 두들기는 것 같은 푹푹 소리가 들렸다.

“아,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안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금 노크했다. 그러자 안쪽에서 들려오던 고함이 일시에 뚝 멎었다. 한참 만에야 문 안에서 들어오라는 승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서서 확인한 아가씨의 꼴은 가관이었다.

“그, 혹시 어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끄읍…….”

이리저리 헝클어져 새집을 이루고 있는 머리 꼬락서니와 빨갛게 충혈한 흰자가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으나 안나는 노련한 레이디스 메이드답게 애써 웃으면서 모시는 아가씨의 바람에 따라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손님도 오셨는데, 아침 식사는 아래층 식당에서 하실 건가요?”

“손님……. 그래. 손님은? 손님 깨셨어?”

“아직 일어나셨다는 전달은 못 받았어요.”

“일단 목욕! 목욕부터! 안나, 옷 좀 챙겨줘! 가벼운 모닝 드레스면 돼. 빨리 입을 수 있는 거. 단추 많은 거 말고!”

이브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는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욕실로 사라졌다. 안나는 아침부터 기운찬 아가씨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그녀가 잘 때 입는 잠옷이 아닌 어제 챙겨 입었던 슈미즈를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나의 의혹을 뒤로하고 잽싸게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고 다급히 밖으로 나선 이브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가 이리저리 쥐고 휘두른 탓에 구깃구깃 구겨지고 더럽혀진 옷들을 애써 깔끔하게 다듬어 입은 카스텔이었다.

혹시 모르니 확인을 해야 했다. 이브는 지진이 나려는 동공을 애써 수습하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제발, 이 남자가 술에 취하면 기억이 사라지는 휘발성 메모리의 소유자이길.

“좋은 아침이에요, 카스텔 경. 요리사가 해장이 될 만한 식사를 준비해두었다는데 혹 아침 들고 가지 않으시겠어요?”

정신이 없어 어째 어미가 조금 어색했으나 사소한 어법을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초조하게 남자의 반응을 탐색하는 이브의 눈에 자신을 발견한 카스텔의 안색이 눈에 띄게 딱딱하게 굳더니, 곧 눈가며 뺨이며 얼굴 이곳저곳이 발그레하게 물드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 그, 식, 사는.”

심지어 말을 더듬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카스텔 비텔스바흐가.

만일 용이 살아 있는 신화의 시대였다면 드래곤을 열댓 마리도 죽였을 거라며 칭송받는 제국 제일의 소드 마스터가 마치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버벅대는 모습은 살면서 한번 볼까 말까 한 모습이었다.

다른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면 아마 이브도 팝콘을 입에 쑤셔 넣으며 낄낄대고 감상했을 정도로 희귀한 일이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고장 난 원인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브 자신이었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입술을 뻐끔대며 말을 고르다가 이제는 숫제 화가 난 사람처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힘겹게 사과를 토해낸 후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도망치듯 1층으로 내려간 남자의 뒷모습에 이브는 한참을 서서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씨발. 좆 됐다.”

“무슨 일입니까?”

“악!”

뒤쪽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물음에 이브는 화들짝 놀라며 펄쩍 뛰어올랐다. 가장 조금 마시고 제일 먼저 쓰러진 알베리크가 살짝 초췌해진 낯으로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뭡니까. 그 돼지 멱따는 소리는.”

“아뇨, 아무것도.”

“카스텔 경이 가셨습니까?”

“그으, 네. 급한 일이 있으시다고.”

“제게 기별도 없이 떠나신 걸 보니 무척 급한 일인 모양이군요. 그럴 분이 아닌데.”

“아하하……. 그러게요. 해장하고 가시라니까 그럴 여유도 없어 보이시더라고요.”

하.하.하 하고 인위적으로 웃는 수상한 그녀의 태도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알베리크는 곧 언제는 이브가 멀쩡했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녀에게서 신경을 끄고 식당을 향해 내려갔다.

아하하하. 하하하. 여전히 공허한 웃음만이 이브의 입에서 흘러나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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