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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히든 이벤트 (11/22)

10. 히든 이벤트

밀입국한 수인 마피아 조직들이 여자들의 실종에 개입한 증거가 드러났고, 황태자의 명령으로 이 사건은 수도의 론디니움 광역 경찰청의 조직범죄 수사대에서 전담하게 되었다. 에드워드와 카스텔의 장담대로 군기가 바짝 든 수사대원들이 사건을 꼼꼼히 파헤칠 뿐만 아니라, 기마대까지 동원되어 추적에 나섰다.

과연 바실리오의 정보가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곧 실링스 지구의 인적이 드문 버려진 땅에 폐허처럼 보이는 헛간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게다가 뱀 수인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헛간 주위를 밤낮으로 감시하고 있음이 마법사의 탐지 마법으로 드러났다. 남은 것은 노도처럼 들이닥쳐 범죄자들을 검거하고 잡혀간 여인들을 구출하는 일뿐이었다.

이브는 더럽혀져도 괜찮은 허름한 옷가지들을 걸치고 밖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 복잡한 심경 탓에 이브의 얼굴은 한껏 딱딱해져 있었다.

그간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에드워드가 건넨 책과 필사본만 들여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베르묄의 서재에서 찾아낸 책에는 누락된 부분들이 있었다. 심지어 원본으로 추정되는 책에는 게임에서도 본 적이 없는 구절이 담겨 있었다.

‘만약 에드워드가 이 세계가 게임 속 세상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거였다면 날 보고 이브라고 알은체할 게 아니라 누구냐고 물어봤겠지. 이브는 플레이어 캐릭터니까. 에드워드는 삶의 반복을 겪었을 뿐인 거야.’

이브는 허리에 찬 롱소드의 검집을 만지작거리며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삶의 반복이라니. 말도 안 되는 가설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이게 단순히 게임 속 세상이 아니라면……?’

그러나 제가 속한 이곳이 「이브를 위하여」와는 완전히 관계가 없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석에 이끌린 듯 마주치고 만 남자주인공들과 게임 속 NPC 캐릭터인 옥타비아의 존재를 설명할 길은 없었으니까.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이브는 애써 머리를 비우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로비 홀에는 미리 도착해 대기하고 있던 카스텔과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내려온 알베리크가 있었다. 카스텔은 로비 홀로 들어오는 이브를 발견하고는 순간 그녀에게 어떻게 인사해야 좋을지 몰라 조금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브는 배시시 웃으며 가볍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그제야 침착하게 그녀의 손끝을 잡고 입술이 닿지 않게 주의하며 손등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였다.

“일찍 오셨네요.”

“예. 혹시 모르니 조금 이르게 출발할까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준비하는 게 좋겠네요. 그러면 바로 갈까요.”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베리크의 배웅을 받아 바깥으로 나섰다. 현관 바로 앞 포치까지 나온 알베리크가 나직이 이브에게 말했다.

“……몸조심하십시오.”

“알겠어요. 거리가 제법 있으니 아마 늦을 거예요. 어쩌면 수습에 며칠 걸릴지도 모르고. 기다리지 마세요.”

“그건 알아서 하겠습니다.”

“고집은.”

스스럼없이 손윗사람의 뺨을 슬쩍 쓸고는 휙 몸을 돌려 마차로 향하는 이브의 뒷모습을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카스텔은 알베리크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멀찍이 대어져 있던 작은 짐마차에서 조그만 창을 통해 두 사람이 마차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던 인영이 곧 마부를 독촉해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 직후 카스텔과 이브를 태운 마차 역시 론디니움 중앙역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탄 열차는 론디니움을 벗어나 브리타니아 남단으로 향하는 열차였다. 실링스 지구는 켈버튼령 내에서 발전이 더딘 구역에 속했기에 기차역이 따로 없어 그와 인접한 구역인 새턴 지구에서 내려 말을 타고 이동해야만 했다.

두 사람은 사우스 새턴 역에서 내려 역사를 빠져나갔다. 론디니움과의 경계 바깥으로 나오니 수도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에도 사우스 새턴 역의 역사 근처는 센트럴시티의 역사와는 달리 개발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 주로 민가나 노동자들의 하숙소가 위치한지라 대로변조차도 상당히 한적했다. 물론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대라 노동자들이 모두 여기저기 일을 하러 떠난 탓도 있었겠지만.

두 사람은 밤 시간대에나 북적일 터인, 아직은 소슬한 거리를 날듯이 걸어 카스텔이 미리 준비시킨 마방에 도착했다. 말을 관리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이는 후줄근한 갈색 웨이스트코트를 걸친 젊은 청년이었다. 얼핏 평범한 자유민으로 보일 법한 차림새의 청년은 군기가 잔뜩 들어간 자세로 경례하고는 입을 열었다.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카스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은 후 사내의 말에 대꾸 없이 말의 고삐를 건네받았다. 그는 그대로 이브에게 시선을 돌렸다.

“속도를 내야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가시죠.”

젊은 남자는 이브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카스텔은 임무 수행 중 한가롭게 부하와 레이디에게 통성명을 시켜줄 정도로 넉살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이브는 굳이 게임의 공략 캐릭터가 아닌 남자에게까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청년의 호기심을 무시한 채 그대로 묵묵히 마사에서 말을 이끌고 마방을 빠져나왔다.

말 위에 오르기 전 이브에게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으려던 카스텔은 등자를 밟고 훌쩍 뛰어올라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안정적으로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이브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 역시 날래게 안장 위에 올랐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천천히 속도를 올리겠습니다.”

“알겠어요. 무리다 싶으면 소리칠게요.”

카스텔의 말의 함의를 빠르게 파악한 이브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남자는 이브의 말에 그녀 쪽은 돌아도 보지 않고 그대로 말을 출발시켰다. 손을 뻗어 천천히 덩치 큰 흑마의 목덜미 언저리를 쓰다듬어주던 이브 역시 말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며 슬쩍 발을 굴렀다.

과연 카스텔은 말했던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속도를 올려가며 말을 몰았다. 그는 능숙하게 고삐를 쥔 손을 움직이며 말의 움직임을 제어하면서도 기감을 펼쳐 뒤쪽에서 따라붙고 있는 이브의 기척을 느꼈다. 여유가 있다고 판단한 카스텔은 말을 재촉해 도로에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내며 거리를 내달렸다.

길을 지나던 행인들은 키가 큰 흑마가 속도를 내어 도로 위를 달리는 것을 보면서도 여상한 얼굴을 하고 저들이 갈 길을 가기에 바빴다. 수도와 가까운 외곽 지역은 사건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만큼 새턴 사람들에게 있어 새카만 말을 타고 바쁘게 오가는 기마순찰대는 낯선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말을 달리며 나아가니 어느 순간 주변 풍경에 민가보다 너른 평야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친 바람을 정면으로 받으며 두 사람은 더욱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브는 몸을 낮추며 앞선 말과 어느 정도 여유 거리를 둔 채 말을 독촉했다.

제대로 된 승마는 이번 생에서 처음 배워보았다. 헌터였을 적에도 간혹 운이 좋아 테이밍이 완료된 네발짐승 형태의 마수를 대여해 타고 던전에 들어간 적이 있기는 했지만, 마거릿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말을 부리는 기마술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만 해도 마거릿은 그저 이브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단순히 말 위에 올라 구보와 속보를 하는 정도에서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브는 말과의 상성이 무척 좋았다. 신체를 움직이는 데에 탁월한 센스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말 역시 그녀의 지시에 순종하며 마치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추어온 기수처럼 따랐다.

승마를 배운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이브는 말 위에서 창이나 봉을 가지고 적을 상대하는 방법을 배웠다. 마거릿 역시 창술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었기에 깊이가 있는 수업은 아니었지만, 기본기를 배운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이브는 자신도 대체 무슨 연유로 말들이 저를 따르는지 알 수 없었다. 다리를 크림에 폭 담근 듯한 흰 무늬를 가진, 알베리크의 갈색 말뿐만 아니라 승마를 배우기 위해 구해온 털 결 고운 유백색의 말, 지금 자신이 타고 있는 덩치 큰 새카만 흑마까지 지금껏 접한 모든 말들이 양순한 강아지처럼 그녀를 따랐다.

생각해보면 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동물이 그녀를 좋아하기는 했다. 이전 생의 기억을 떠올리기 전, 그러니까 열세 살 이전 무렵에도 이브는 길거리의 동물들에게 퍽 쉽게 호의를 얻고는 했다.

‘나 참. 디×니 프린세스냐고…….’

이런저런 딴생각들을 하면서도 몸은 착실히 말을 몰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어느 순간 앞서가던 카스텔이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브 역시 해가 지평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온통 짙은 붉은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충 이쯤이면 도착할 때가 되었지 생각하고는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어 속도를 떨어트렸다. 이윽고 카스텔과 이브는 한갓진 헛간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여자들이 잡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버려진 농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구역의 양 목장이었다. 헛간 한쪽에 말을 매어둔 두 사람은 바로 헛간 안으로 들어섰다.

여럿이 뭉쳐 이동하면 수도에 퍼져 있는 바이퍼 패거리의 하수인들이 냄새를 맡을지도 몰랐다. 결국, 수사대원들은 저마다 각자 루트를 달리하여 목초지의 헛간으로 모이게 되었다. 이브는 헛간 안의 인원들을 빠르게 훑었다.

푸른 경찰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총 여섯 명이었다. 적갈색 머리를 가진 마법사가 둘, 20대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셋 그리고 30대 중후반대로 보이는 오라 감응자가 하나. 아마 저 사내가 이 팀의 우두머리일 터였다.

“오셨습니까.”

“두 명이 비는군.”

카스텔은 바로 거수경례를 올리는 남자들을 보며 맞경례로 인사를 받고는 바로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선회하는 루트로 오는 팀입니다. 저희 팀과 출발 시각이 엇비슷했으니 아마도 곧 도착할 겁니다.”

“남은 인원이 도착하는 대로 사전 브리핑을 시작하지.”

직속 상사도 아닌 카스텔의 자연스러운 하대에도 그들은 전혀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젊은 청년들은 그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제국 제일의 소드 마스터……. 완전 남자들의 아이돌이네. 걸그룹 못지않은 인기인데?’

그러던 와중 카스텔에게 퍽 친근한 듯 말을 붙이는 이가 있었다. 헛간에 모여 있는 사람 중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녹갈색 눈을 한 사내였다.

“이 친구가 말씀하신 단원입니까?”

“그렇소.”

“반갑소. 조직범죄 수사대 소속 글렌 테일러 경사요. 이쪽은 우리 팀원들이오.”

“반갑습니다. 이브 테루안느입니다.”

사전에 이브는 카스텔의 부하인 것으로 입을 맞추어둔지라 이브는 귀족 아가씨의 이름이 아닌, 본래의 이름을 꺼내었다. 이브의 목소리를 듣자 헛간에 모여 있던 사내들의 낯빛이 조금 바뀌었다. 이브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글렌 경사 역시 조금 놀란 것 같은 기색이었다.

“아……. 여기사시군.”

“예.”

“괜찮겠소? 범죄자를 제압하는 일은 만만히 볼 게 아니오. 놈들은 상당히 거칠 텐데.”

“괜찮습니다.”

이브는 글렌 경사의 염려에 가볍게 응수하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사내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이브의 안위나 실력 그 자체에 대한 것보다도 그녀를 「돌보아야 하는」 상황에 대한 걱정에 가까웠다. 그들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여 이브는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숨기며 허리를 펴고 곧게 섰다.

글렌 경사는 잠깐 말없이 이브의 손 쪽을 바라보다가 곧 몸을 돌려 간단히 팀원들을 소개해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브는 그들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에 팀장인 경사를 제외하면 나머지 사람들의 이름은 한 귀로 흘러들어 와 한 귀로 빠져나갔다. 마법사들 역시 머리가 조금 더 불그죽죽한 쪽이 직급이 높다는 것 정도만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그렇게 각자 통성명을 한 직후 헛간의 바깥에서 일정한 리듬을 가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가에 서 있던 대원 하나가 노크 소리를 듣고는 문틈으로 바깥을 확인한 후 그대로 문을 열어주었다.

푸른 제복을 어두운색 오버코트로 가린 두 남성이 문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카스텔을 발견하고 경례를 했다. 제국의 광역 경찰청은 전쟁 이후 군에서 갈라져 나온 단체였기에 군인이나 기사와는 궤를 달리하는 집단임에도 그들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카스텔에게 예우를 갖추었다. 소드 마스터에 대한 존경과 경애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였다.

추가로 도착한 대원들과 빠르게 인사를 나눈 후 본격적인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나무 상자를 겹겹이 쌓아 급조한 테이블 위에 이 근방의 지형이 모사된 지도가 펼쳐졌다.

“놈들이 지키고 있는 헛간은 총 세 채입니다. 우리가 있는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장소에 이렇게 삼각형을 그리듯 떨어져 있습니다.”

“어느 쪽 건물에 피해자들이 감금되어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한 건가?”

“건물 안까지는 탐지 마법이 먹히지가 않습니다. 수시로 수인들이 오가며 헛간 부지의 반경 8미터 정도의 구역을 순찰하고 있는 것까지는 확인했습니다만, 납치 피해자들의 위치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또한 건물 입구에 알람 마법이나 혹은 해당 마법진을 새긴 마도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정면 돌파는 피해야 합니다.”

“정황상 알람 마법에 차폐 마법까지 걸려 있다는 건가.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군.”

이브는 조금 의아했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단순히 납치한 여자들을 가둬두기 위해 마련한 장치치고는 상당히 과했다. 이 정도의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패거리였나 하는 생각을 하는 찰나, 카스텔이 글렌 경사를 향해 물었다.

“바이퍼는 신생 마피아 집단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만큼 이번 거래가 큰 건이지 않나 추측 중입니다. 놈들도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 아닐까요.”

경사의 대답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카스텔이 말없이 진행을 독촉했다. 굽슬굽슬한, 탁하고 어두운 빛의 적갈색 머리를 한 마법사 대원이 카스텔의 시선을 받고는 재빨리 말을 이어나갔다.

“저와 제이드 경장님이 각 대원에게 은신, 차폐 마법을 걸어드릴 겁니다. 하지만 인원이 많기 때문에 지속 시간은 오래가지 않을 겁니다.”

“지속 시간은?”

“길어야 10분 내외입니다. 목표 지점에 도착해서 잠입까지 하는 시간을 고려한다면 조금 아슬아슬할 겁니다.”

“투입 루트는 지붕 위 다락의 창문입니다. 건물이 지어진 지 오래된 데다 주인이 없는 폐건물이어서 건축물 신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내부 설계도는 구하지 못했지만, 비슷한 연도에 지어진 근처 농지나 목초지의 헛간 건물 형태가 지금 이 건물의 형태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목표물 역시 비슷한 구조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말에 이브는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이 모여 있는 헛간의 건물은 경사가 가파른 세모꼴에 가까운 아치형 지붕을 올린, 천장이 무척 높은 목조건물이었다. 지붕과 가까운 다락 쪽에 좁은 2층 공간이 있고, 그 아래로 긴 사다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헛간의 1층은 막힌 곳 없이 일체형으로 뚫려 있어 곳곳에 놓인 건초 더미나 나무 상자,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 외에는 몸을 숨길 만한 엄폐물조차 없었다.

이브의 표정이 점점 미묘하게 변했다. 만일 이런 곳에서 별다른 준비도 없이 다수에게 둘러싸인다면 완전히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터였다.

“헛간에서 빠져나가는 루트는 여기 난 길 하나뿐인가요?”

이브가 지도 위를 손으로 짚으며 묻자 사위가 잠시 조용해졌다. 누가 대답해야 할지 몰라 대원들이 서로 눈을 굴리다가 마법사 한 사람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 지도를 보시면……. 네, 네. 이쪽으로 길이 하나 나 있습니다. 이대로 쭉 가다 보면 양 갈래 길이 나오는데, 하나는 그대로 남하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켈버튼령 서쪽 지역으로 빠지는 길입니다. 반대편에 다른 길도 하나 있기는 한데 여긴 오래전에 마을에서 막아뒀다는군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브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미리 정해두었던 듯 빠르게 팀이 정해졌다. 헛간이 총 세 채였기 때문에 돌격대 역시 세 팀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브는 글렌 경사 그리고 카스텔과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섬광탄이오. 멀지 않은 곳에 기마순찰대가 길목을 막고 대기 중이라오. 위기 상황 시에 안전핀을 뽑고 던져 터트리면 바로 위치가 추적되니 바로 던지시오.”

이브는 출발 직전 경사로부터 섬광탄을 받았다. 몸통에 작게 마나회로와 함께 마법진이 새겨진 것이 보였다. 아마도 충격을 받으면 위치를 전송하는 방식의 마법이 걸려 있을 터였다. 손바닥 반만 한 길이의 섬광탄을 슬쩍 이리저리 뒤집어 확인한 이브는 그것을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해는 지평선 너머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야음을 틈타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헛간 가까이까지 소리 없이 말을 달려 도착한 일행들은 말을 잘 숨겨둔 뒤 서로 수신호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사전에 계획한 대로 주위를 감시하는 수인들의 눈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글렌 경사는 이브를 상당히 걱정한 모양이었으나 그녀가 적갈색 칠이 벗겨져 군데군데 탁한 나무 색이 드러난 헛간의 벽을 마치 거미처럼 능숙하게 기어오르는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그녀의 뒤를 따라 나무 벽의 틈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벽을 타고 올랐다.

소리 없이 순식간에 지붕 위로 올라선 세 사람은 지붕 처마 근처에 작게 난 다락의 창을 조심스럽게 열어보려고 했다. 물론, 당연하다는 듯 창은 열리지 않았다. 이브는 품에서 대거를 꺼내 카스텔에게 건네고는 손가락으로 유리 위에 동그랗게 원을 그렸다.

그녀의 몸짓에 카스텔은 빠르게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거에 검기를 씌워 우둘투둘 불투명한 저급 유리를 베어냈다. 동그랗게 잘려나간 창의 조각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빼낸 카스텔이 이브에게 대거를 돌려준 후 잘려나간 틈 안으로 손을 넣어 창문의 자물쇠를 밀어 올렸다.

오래 기름칠을 하지 않아 창문의 경첩이 삐걱대는 불유쾌한 소음을 내며 조금씩 열렸다. 혹여 누군가 소음을 듣게 될까 봐 아주 조금씩 창문을 연 탓에 세 사람이 창 너머로 들어간 것은 상당히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헛간의 다락은 이브가 목을 살짝 비틀어야 천장에 닿지 않고 설 수 있을 정도로 낮은 공간이었다. 게다가 버려진 지 상당히 오래된 듯 건물의 상태가 무척이나 나빠 삐걱이는 소리가 나지 않게 움직이려면 무척이나 주의 깊게 발을 내디뎌야 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카스텔이 아래로 내려가는 사다리를 찾아 조심스럽게 움직이다가 돌연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사다리 아래 1층이 무장을 한 수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저마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거나 킬킬대고 웃는 등 긴장감 없는 분위기이기는 했으나 서른이 넘어가는 뱀 수인들의 수는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사다리가 연결된 틈새로 아래를 내려다본 이브가 작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함정이에요.”

나머지 두 사람 역시 이브의 말에 동의하는 듯 침음성을 삼켰다. 물론 무장을 한 뱀 수인들이 위협이 되어서는 아니었다. 이 정도의 규모가 함정을 파고 대기하고 있다는 것은 곧 수사 진행 상황이 어디선가 새어 나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조져보죠. 저 중에 여자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놈이 한 놈 정도는 있겠죠.”

이브는 태연히 험악한 말을 툭 뱉으며 허리춤에 찬 롱소드를 검집에서 끄집어냈다. 스르릉, 차가운 금속성 마찰음 소리를 들은 카스텔이 차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분명 현장을 지휘하는 우두머리가 있을 겁니다.”

“다른 두 곳도 함정일 텐데. 이쪽에 머리가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네요.”

휘하의 기사단원에게 하는 말치고는 격식이 있는 카스텔의 어투에 글렌 경사의 표정이 다소 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려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었다.

세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신호한 후, 사다리를 타지 않고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일반인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높이였으나 오라 감응자들에게 이 정도 높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바닥에 착지한 이브가 자세를 가누기 무섭게 곧바로 근처 나무 상자에 걸터앉아 있던 뱀 머리를 한 사내의 목을 향해 롱소드를 휘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내의 목이 반절 정도 잘려나가고 길게 베어진 상처 사이에서 붉은 피가 마치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끈적한 피 냄새에 삽시간에 헛간 안의 모두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 검신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이브가 제게 꽂혀오는 수십 쌍의 시선에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야. 여기 대가리 누구냐? 좋은 말 할 때 나와!”

타이밍 좋게 은신 마법이 해제된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이목을 끈 이브의 뒷모습을 보며 카스텔은 당혹스러운 듯 슬쩍 미간을 좁혔고 글렌 경사는 날카롭게 벼려진 주변 공기에 뒤늦게 허리춤의 검을 빼 들었다.

“이런, 미친……!”

“뭐 해! 죽여!”

당황한 것은 두 사람뿐만 아니라 적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뚝 떨어져 무심한 얼굴로 동료의 목을 베어낸 검사를 보는 수인들의 표정은 황당함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사납게 일그러졌다.

탕!

어디선가 욕지거리와 함께 총이 발포되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움직임을 감지한 이브가 재빨리 몸을 뒤틀어 탄알을 피했고, 눈먼 탄알은 그대로 이브를 지나 드러난 살갗이 비늘로 뒤덮여 있는 사내의 이마에 정통으로 쑤셔 박혔다.

“꺼윽!”

탄알에 맞은 사내가 마치 감전이라도 된 양 갑작스럽게 몸을 발발 떨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것이 신호탄이 된 듯, 주변의 뱀 수인들이 그대로 세 사람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덮쳐오기 시작했다.

‘마탄? 신생 조직이 이 비싼 마탄총으로 무장을 했다고? 에반데.’

이브는 머리 위로 짓쳐들어오는 묵직한 도끼를 간단한 스텝을 밟아 슬쩍 회피하며 생각했다.

긴 롱소드의 은빛 검날이 유려하게 궤적을 남기며 휘둘러지고, 붉은 핏물들이 검격을 뒤잇듯 금속의 흐름을 따라 흩뿌려졌다. 이브의 움직임에 맞추어 괴로운 신음성과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저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칼과 쏘아지는 탄알들을 마치 물살을 따라 흐르는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피해낸 이브가 몸을 낮추어 바닥을 훑었다. 인간의 살갗과 근육을 써는 감촉이 잘 벼려진 검날을 통해 손끝으로 느껴졌다.

“크아악!”

“아아아악!”

“제기랄! 고작 세 놈이라고!”

“죽어어어!”

사방팔방에서 욕설과 고함소리가 뒤얽혀 들려왔다. 다른 두 사람도 어련히 잘 썰고 있겠거니 생각한 이브는 옆에서 들이닥치는 사내의 목을 단칼에 베어 넘기며 주변을 살폈다. 과연, 이 난전에 끼지 않고 뒤로 몸을 물린 이가 하나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가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느낀 이브가 날듯이 달려 나갔다.

자신을 방해하는 이들을 찌르고 베며 빠르게 접근해오는, 마치 동화 속에서 묘사되는 괴물 같은 모습의 검사를 보며 다소 질린 듯한 표정을 한 사내가 자리를 피하려 등을 돌렸다.

“어딜……!”

이브는 옆에서 끼어드는 막칼을 막아냄과 동시에 검날을 비틀어 옆으로 흘리면서 허리춤에서 카스텔에게 돌려받았던 대거를 빼내어 잽싸게 집어 던졌다. 쏜살같이 날아간 단검의 날 끝이 수인 사내의 날갯죽지 아래를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신형이 무너지는 것을 확인한 이브의 입꼬리가 잔혹하게 호선을 그리며 뒤틀렸다.

“이런 씹, 꺼져! 이 잡몹들!”

이브는 눈앞의 수인의 배에 거세게 검날을 찔러 넣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뒤이어 제 앞을 막은 뱀 머리 사내의 배에 쑤셔 박았던 롱소드를 한껏 뒤틀고는 남자의 몸뚱이를 발로 차 거친 몸짓으로 검을 빼냈다. 일말의 동정조차 없는 잔혹하고 건조한 손속에 이브를 둘러싸고 있던 수인들에게서 조금씩 머뭇거리는 기색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은 이브가 빠르게 몸을 날려 저를 둘러싼 인파를 단번에 헤치고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달려가는 속도를 그대로 실어 단검에 꿰뚫린 채 겨우 몸을 일으키고 있는 수인 사내를 냅다 발로 걷어차버렸다.

퍼억!

“끄흑……!”

“어딜 튀려고? 너 오늘 날 제대로 잡은 줄 알아라, 이 이족보행 파충류 새끼야.”

두꺼운 몸집의 사내가 이브의 발길질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결국 데굴데굴 굴렀다. 이브가 우두머리를 잡았다는 것을 알아챈 카스텔과 글렌 경사가 빠르게 몸을 날려 그녀의 근처에서 다가오는 뱀 수인들을 베어 넘기며 견제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곁눈질로 슬쩍 확인한 이브가 다시 시선을 돌리며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일단 죽도록 처맞다 보면 뭐라도 말하고 싶어질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카스텔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우드득 우득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오라를 씌운 검으로 달려드는 수인의 목을 단칼에 베어냈다. 이브가 남자에게 고문 아닌 고문을 하는 것을 한 번씩 흘끔흘끔 훔쳐보던 글렌 경사가 곁에서 전방을 경계하고 있는 카스텔에게 슬쩍 물었다.

“어째 제가 근무할 적에는 본 적 없는 생신참을 데려오셨나 했더니……. 이런 일을 전문으로 교육받은 기사인가 봅니다? 대체 누가 가르친 겁니까? 헤네스 경? 마틴 경?”

“……신경 끄시오, 글렌 경.”

“경이라니요, 기사단에서 나온 지가 언제인데.”

퍽 넉살 좋게 말을 붙인 글렌 경사가 옆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을 빠르게 쳐내는 틈을 타 카스텔이 그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한편, 저는 모르는 일이라고 뻔뻔한 얼굴로 발뺌하던 뱀 수인 사내는 이브의 주먹이 집중적으로 안면을 강타하기 시작하면서 태연하던 표정을 무너트리더니 결국 깨지고 부러진 이 서너 개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서야 두려움에 퍼렇게 질린 얼굴로 그녀의 물음에 더듬더듬 답하기 시작했다.

“뭐?”

“께흑, 디…… 딧길로……. 헤 시간 저네…….”

“뒷길? 거기 막힌 지 오래된 길 아냐? 구라 치다 걸리면 손목 날아간다.”

“길, 기를, 쿨럭, 몰래 티워뒀흡니다…….”

이가 듬성듬성 빠져 발음이 새기는 했으나 영 이해하기 힘든 수준은 아니었다. 이브는 이를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갈았다. 그녀는 남자의 멱살을 우악스레 쥐어 잡은 채로 탈탈 털며 다시 물었다.

“목적지는?”

“흐, 헤르, 헤르만…….”

항구 도시 페르만은 그나마 가장 빠르게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루트였다. 페르만으로 향했다면 뒷길로 주욱 돌아 아래쪽에서 길을 막고 있는 기마순찰대의 눈을 피해 북쪽으로 올라간 뒤 추적을 따돌렸다는 확신이 든 다음 서쪽으로 길을 돌릴 것이 분명했다. 이브는 두어 번 정도 더 남자의 뺨을 짝짝 때려가며 진실 여부를 물은 후에 이브에게 목이 졸리다시피 멱살을 잡힌 사내가 거짓이 아님을 몇 번이고 반복해 답한 후에야 그를 놓아주었다.

이 주위를 감시하고 있는 인력들도 있을 터였다. 그들의 시선도 피했다면 역시 마차에도 헛간에 건 것과 비슷한 은폐 혹은 차폐 마법이 걸려 있을 것이었다. 빠르게 생각을 마친 이브가 손에 들려 있던 남자를 바닥에 집어 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목적지는 페르만! 세 시간 전 뒷길로 빠져나갔답니다! 바로 추적하겠습니다!”

이브는 수인 사내를 두들겨 패느라 검집에 꽂아놓았던 롱소드를 다시 빼 들고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베어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닌, 단순히 견제용으로 휘둘렀기에 검식은 단조로웠으나 그녀의 검에서 들려오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보는 것만큼 만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한차례 접전이 있었기에 앞을 막는 이들의 수가 상당히 줄어 있었다. 이브는 어렵지 않게 길을 뚫고 나가 헛간의 문을 막고 서 있던 남자의 목에 롱소드의 날로 바람구멍을 내버린 후 그대로 자물쇠를 부수며 닫혀 있던 문을 박차고 나갔다. 뒤쪽에서 카스텔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는 했지만, 한가하게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거리가 너무 벌어져 있었다.

선선한 밤바람이 격렬한 움직임으로 달구어진 뺨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이브는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으며 올 때 말을 숨겨두었던 장소로 뛰어갔다. 키가 큰 흑마는 새카만 눈동자를 굴리며 다급하게 달려온 이브에게 순순히 제 등을 내주었다.

“빨리 가야 해. 부탁할게.”

이브는 지체 없이 훌쩍 뛰어올라 안장에 앉은 후 흑마의 목덜미 부근을 툭툭 두들기듯 쓰다듬어주며 중얼거렸다. 고삐를 쥔 이브가 말에게 신호를 주자 흑마 역시 별다른 투정 없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한껏 기감을 돋운 이브의 감각에 근처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걸렸으나, 말은 빠르게 방해꾼들을 스쳐 지나갔다.

따라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음속 한군데에서 검게 피어올랐으나, 이브는 이를 악물고 말을 채근했다. 승마를 배운 기간이 짧은 것치고는 훌륭한 실력이었으나 제 역량 이상으로 말을 달리는 것은 이브에게도 퍽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나마 장애물이 많은 산길이 아니라 목초지 인근의 평지였고, 이브 본인이 밤눈이 밝은 데다 말이 기수를 믿고 순종했기에 사위가 어두운 와중에도 속도를 내서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밤중에 달빛만을 의지한 채 전속력으로 말을 모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벌써 실수로 말에서 튕겨져 나갈 뻔한 것도 세 번째였다.

빠르게 길을 달려 나가는 와중에도 안력을 돋워 바닥에 난 미세한 마차 바퀴 자국을 찾아내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이브는 말이 지친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이 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이 지쳐버릴 터였다. 물론, 이브 본인의 체력이 고갈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더 가다가 말을 멈추어야 하나 생각하던 무렵 멀지 않은 곳에서 지금껏 듣지 못한 소음이 들려왔다.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소리 사이로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와 정확히 알아듣기는 힘들지만 웅성대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이브의 예민한 귀에 포착되었다.

“조금만 더 힘내!”

이브는 이를 악문 채 혼잣말을 하듯 흑마를 독려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크기가 큰 짐마차 두 대와 작은 2인승 마차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말의 속도를 늦추며 가까이 다가간 이브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수인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누군가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 쓰러진 이들도 적지 않았다.

농지 인근을 감시하던 기마순찰대 인력인가 싶었으나 공격을 퍼붓고 있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은 제복이 아니었다. 사람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가고서야 이브는 수인들을 도륙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윌리엄? 님이 왜 여기서 나와?’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이 얼굴을 물들였지만 우선 가장 급한 일을 해결해야 했다. 이브는 싸움이 벌어진 지근거리에 다다르자마자 복부에 힘을 주고 냅다 고함을 버럭 질렀다.

“이 개새끼들아! 너넨 다 뒤졌어!”

순식간에 시선을 끄는 데 성공한 이브가 뛰어오르다시피 말을 박차고 바닥으로 착지했다. 얼핏 보아하니 윌리엄 편에서 그를 돕는 인원이 둘 정도 더 있었다. 반면 마차로 접근하는 길을 막아선 채 포진해 있는 수인들은 행동불능이 된 이들을 제외하더라도 스무 명 남짓이 남아 있었다.

‘뭐야. 대공 놈, 생각보다 되게 잘 싸우잖아? 다른 두 사람도 기사처럼 보이는데 전혀 밀리지가 않네? 총을 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원래 피지컬이 저렇게 괜찮았나……?’

오히려 한바탕 격하게 몸을 움직인 후 쉴 틈도 없이 말을 달려왔기에 이브 쪽이야말로 컨디션이 완벽하지 않았다. 이브는 빠르게 끝내버릴 심산으로 롱소드를 빠르게 발검해 지체 없이 가장 가까이 있던 사내에게 달려들어 목을 베어냈다.

먼저 수인들을 상대하고 있던 사내들 역시 이브가 참전하는 것을 보고 조금 의외라는 듯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슬쩍 보다가, 다시 각자의 싸움에 집중했다.

머릿수가 많다 한들 습격을 고려하지는 않았던 듯, 마차를 지키는 수인들의 수준은 오히려 헛간에 모여 있던 이들보다도 형편없었다. 어쩌면 이미 싸움질에 능숙했던 놈들은 모두 바닥에 나자빠진 뒤인지도 몰랐다.

이브는 빠르게 주위 상황을 파악하며 수인의 배를 발로 거세게 걷어차 명치께에 쑤셔 박았던 롱소드를 거칠게 빼냈다. 그와 동시에 오른편에서 도끼날이 정직한 궤적을 그리며 그녀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꽂혔다.

이브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롱소드를 휘둘러 아래에서 위로 도끼를 쳐내버렸다. 어지간한 근력이 없고서야 위에서 꽂히는 공격을 아래에서 받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수인 사내의 한쪽 눈에 순식간에 날이 예리한 단검이 쑤셔 박혔다.

“크아아악!”

“아, 미안. 한 방에 보내줄게.”

그다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이브의 검날이 비틀대는 남자의 목을 단숨에 베었다. 뱀 수인 특유의 향이 강하지 않은 핏물이 살갗 바깥으로 팍 터져 나왔다. 이브는 뺨에 점점이 핏물이 튀어 묻는 것을 느꼈으나 여유롭게 얼굴을 닦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조금씩 허벅지가 무거워지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순간 뒤쪽으로 기척이 느껴졌다. 이브는 재빨리 쓰러진 뱀 수인의 얼굴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는, 몸을 뒤로 돌림과 동시에 단검을 냅다 내던졌다. 작은 단검과 막칼이 격렬한 파열음처럼 들리는 쇳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혔다가 튕겨져 나갔다. 수인 사내가 흐트러진 칼을 다시 추스르며 손잡이를 고쳐 쥐는 동안 이브의 발이 강하게 남자의 비어 있는 옆구리를 걷어찼다.

뻐억!

“끄흑!”

“내 앞에서 빈틈을 보여?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지? 이 새끼가 빠져가지고. 그래서 악당질 해먹겠어?”

이브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비꼬는 어조로 툭 뱉고는 남자가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다시 몸을 휘돌려 반대편 허리께를 걷어찼다. 마치 묵직한 쇳덩어리에 후려 맞는 것 같은 둔중한 통증에 사내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말고 몸을 구부리며 고통스럽게 꺽꺽댔다.

뒤편에서 우연히 그녀가 수인을 두들겨 패는 모습을 목격한 윌리엄의 표정이 한순간 멍하니 혼란스러운 듯 흐트러졌다.

“……선배?”

남자의 혼잣말은 시끄러운 쇳소리와 고통으로 얼룩진 비명 소리에 파묻혔다. 이브가 발로 작신작신 밟던 남자의 목에 칼을 꽂은 후 다시 몸을 돌려 주위를 살폈을 때에는 이미 그의 시선은 사라지고 없는 채였다.

이브는 괜히 귓가가 가려워 대충 한 손으로 귀 언저리를 벅벅 털어내며 칼을 허공에서 휘둘러 핏물을 떨구어냈다.

“이, 이, 씨발! 무기 내려! 무기 내리라고!”

회까닥 뒤집힌 목소리가 끽끽 울렸다. 이브는 쇳소리가 섞인 듣기 싫은 고함소리에 인상을 쓰며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마차에서 여자 하나를 억지로 끄집어낸 뱀 머리의 수인이 아담한 키의 젊은 여자를 우악스럽게 붙든 채 그녀의 목에 단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여자들 구하러 온 거 다 알아! 시, 씨발……! 가까이 오지 마! 죽여버릴 거야! 이년 죽는다!”

어딘가 어눌한 발음으로 협박을 시도하는 남자의 노란 눈알은 완전히 맛이 간 것처럼 보였다. 이브는 작게 츳, 하고 혀를 차며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정신을 놓고 달려드는 놈들을 무차별적으로 썰어댔더니 남은 수인의 수는 몇 없었다. 줄어드는 동료의 수에 위기감을 느낀 놈이 주제에 머리를 굴려 인질을 잡은 듯했다.

“저 또라이 새끼가…….”

이브는 잔뜩 미간을 좁히면서도 롱소드를 바닥을 향해 늘어트린 채 이를 갈았다. 순식간에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졌다. 얼마 남지 않은 수인들이 그들을 향해 무기를 들이민 채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어쩔 수 없지.”

“아니, 어쩔 수 없긴 뭐가 어쩔 수 없어요! 허튼수작 부리면 니들부터 뒤질 줄 알아요!”

소곤소곤 저들끼리 속삭이는 소리가 이브의 귓가를 간질이고, 순간 화를 참지 못한 이브가 작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말았다.

“그러면 이대로 다 같이 자살이라도 하자는 건가?”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이브는 다시 쯧, 하고 혀를 차며 검지로 손에 쥐고 있던 검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생각에 잠긴 그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윌리엄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손가락을 향했다가 다시 얼굴 쪽으로 올라갔다.

순간, 무언가를 감지한 이브의 동공이 빠르게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졌다. 짐승처럼 기민하게 무언가에 반응한 이브가 돌연 후우, 하고 한숨 쉬듯 웃음을 짓더니 배에 힘을 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 이놈 새끼들 봐라? 너희 여기 계신 이분이 어떤 분이신 줄 알고! 가암히!”

손바닥을 펼쳐 공손히 윌리엄을 가리키며 왁왁 소리 지르는 이브를 보며 윌리엄과 그를 호위하듯 양쪽에 서 있던 남자들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무슨…….”

“잠깐……!”

“야! 이 무엄한 새끼들아! 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너 내가 딱 기억했어! 어? 아주 그냥 확 그냥 막 그냥!”

성공적인 어그로였다. 근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브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윌리엄 쪽을 향해 또르르 굴러갔다.

“염병! 저 새끼가 뭐 하는 새낀데!”

이브와 윌리엄 일행을 둘러싸고 있던 수인 중 하나가 으르렁대며 소리쳤다. 그 말에 모두가 의혹을 담은 시선으로 다시 이브를 바라보았다.

“어허! 감히 새끼라니! 너어는 진짜 오늘 인생 종 친 줄 알아. 이분이 어떤 분이신데! 무례한 새끼! 이분이 어떤 분이냐면! 바로!”

윌리엄과 그의 호위들마저도 긴장한 얼굴로 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박자 뜸을 들인 이브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크게 소리쳤다.

“아, 뭐 해요! 이 정도 판 깔아줬으면 빨리 나오라고!”

그 소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마차 쪽에서 여자를 인질로 잡고 있던 수인 사내의 목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꺾였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날이 시퍼렇게 선 단검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죽어라 말을 달려온 듯 옷 이곳저곳에 흙먼지가 묻어 있는 채로 카스텔이 사과했다. 그가 인질로 붙잡혀 있던 여성을 안전하게 다시 마차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을 확인한 이브가 시선을 돌리고는 얼떨떨한 표정을 한 수인들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이분이 뭐 하는 새끼신지 내가 알 게 뭐야.”

그렇게 이브의 상큼한 마무리가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몇 남지 않았던 수인들은 금방 제압당했다. 산 채로 붙잡아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갔는지 심문을 해야 한다는 카스텔의 말에 이브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검집에 검을 쑤셔 넣은 후 맨손으로 수인들을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왕복 일곱 번씩 뺨을 휘갈겨 맞은 수인이 피거품을 물며 꼬르륵 정신을 놓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브가 산뜻하게 웃으며 몸을 폈다. 그녀의 뒤편에서는 카스텔과 윌리엄 대공이 이브가 부츠의 굽으로 수인 사내를 작신작신 짓이기는 것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찌 전하께서 이런 곳에 계시는지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 같군.”

긴 남색 머리를 한데 모아 묶은 남자가 머쓱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아래로 처진 눈꼬리를 휘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실은 수도에 내려올 때마다 변복하고 플루멘 동쪽을 다니는 것이 작은 취미였네만…….”

뒤이어진 대공의 변에 따르자면, 놈들에게 납치를 당한 여자 중 윌리엄이 평소 잠행을 하며 친분을 쌓은 단골 가게의 딸이 있다는 것이었다. 따로 그녀의 뒤를 쫓던 와중 뒷골목의 수인 마피아들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그는 슬쩍 미안한 듯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우연히 수사대의 수사 내용에 대해 언질을 받게 되었다네. 그런데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는 차이가 있어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따로 움직이게 된 걸세.”

“차이가 있다고 하심은…….”

“늑대와 뱀은 상극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두스 패밀리와 손을 잡은 듯한 정황이 포착되었네. 시두스 패밀리에서 미리 빼돌린 수사의 진척 상황과 마탄총 따위의 마도구들을 바이퍼 패밀리 쪽으로 지원하고 있더군.”

“따로 언질을 주셨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글쎄.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갔는지 모르는 이상 온전히 경찰들만을 믿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부드럽게 받아치는 목소리는 기묘한 불신을 내포하고 있었다. 카스텔은 입을 꾹 다문 채 한 걸음 물러섰다. 아무리 수사에 마구잡이로 개입했다고 한들 황족을 추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아버리지 않았던가.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혹 수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참고인 조서 작성에 협조를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경. 내가 경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어라고 생각하나?”

“……알겠습니다.”

카스텔의 얼굴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었으나, 그는 별다른 반발 없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갑에게 갑질을 당하고 있는 직장인을 몇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남 일 보듯 지켜보며 이브는 몰래 고개를 저었다.

‘어휴, 불쌍하다 불쌍해. 나는 절대 황궁 쪽엔 취직하지 말아야지.’

“그나저나.”

윌리엄의 고개가 반쯤 돌아 이브를 향했다. 이브는 갑작스럽게 제게 와 꽂히는 시선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다가 그의 신분을 제대로 소개받았음을 떠올리고는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더러운 신분제 세상.

“고개를 들게. 우리 구면이지 않은가.”

“아, 감사합니다. 그…… 오랜만에 뵙습니다.”

“역시, 기억하고 있었군.”

“말씨가 굉장히 세련되어지셔서 몰라뵈었습니다.”

“이런.”

민망하다는 듯 하하, 하고 소리 내어 꽃망울 터지듯 흐드러지게 웃은 사내가 얼굴에 웃음기를 잃지 않은 채 재차 입을 열었다.

“기사가 되었을 줄 몰랐군. 하기야, 실력을 보면 충분히 기사 서품을 받을 만도 하지.”

“……네. 감사합니다.”

이브는 슬쩍 카스텔의 눈치를 보며 꾸벅 인사했다. 북부의 얼음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차가워야 하는 남자가 친근하게 말을 붙여오는 상황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못 볼 꼴을 보고 있는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굉장히 찜찜하고 불편했다.

이브는 마침 제가 터트린 섬광탄을 신호 삼아 달려온 기마대원들이 막 도착한 것을 보고 슬금슬금 몸을 물렸다.

“그러면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마치 불편한 상사를 피해 도망치는 모양새를 한 이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윌리엄이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

“저 아가씨의 이름은?”

“베르묄 백작의 조카딸인 이벨린 베르묄입니다.”

“아아.”

어차피 거짓을 고한다 하더라도 대공가에서 부리는 정보원들 실력이면 하루 안에 그녀의 신분이 들통날 터였다. 카스텔은 순순히 이브의 이름을 고했다. 윌리엄은 이제 가서 일 보라는 태도로 그를 물린 후 한참을 서서 마차 근처에서 여자들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 이브를 지켜보았다.

“신경이 쓰이십니까.”

“최대한…… 알아낼 수 있는 데까지 알아봐.”

“예.”

어느새 그의 뒤쪽으로 접근한 수하가 낮은 소리로 묻자, 윌리엄은 언제 허허롭게 웃었느냐는 듯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조용히 하명했다. 그러나 차갑게 굳은 표정과는 달리, 그의 시선은 어딘가 혼란스러운 듯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그럴 리 없지…….”

마리아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의사에게 한동안은 정양에 힘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는데도 그녀는 몸을 움직이고 싶어 야단이 난 것처럼 굴었다.

이브의 강력한 주장으로 마리아는 저택에서 그대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이브는 고작 이런 사고로 피해자가 일자리를 잃어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다른 하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이브에게 인사를 하러 온 그녀는 이브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펑 터트리고 말았다.

“아, 아가씨이…….”

“다행이야, 마리아. 몸 성히 돌아와서.”

“으허어엉……!”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평민 여자들이 사라진 사건이 이렇게 빠르게 해결되었을 리 없었을 거라며 마리아가 꺽꺽 소리 내어 울었고, 그 옆에서 안나와 다른 메이드들도 저마다 새빨갛게 눈시울을 붉히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알고 보니 잡혀간 여자 중에는 저택에서 일하는 다른 메이드의 여동생도 있었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런 형태의 비극들은 그녀들에게 있어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동안 모두가 겁에 질려 숨을 죽이고 또 누구에게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쳐올지 몰라 불안에 떨었다.

이브는 펑펑 눈물을 쏟으며 어린애처럼 소리 내 우는 마리아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여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들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 행운에는 이브 자신의 힘과 인맥이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사는 세계가 뒤바뀌어도 여전히 사람 사는 세상은 거기서 거기였다. 사건은 해피엔딩으로 끝난 듯했으나, 혀끝이 무척이나 쓰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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