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왕자님과 왕가남
거울로 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브는 마침 귓가에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에 거울에서 시선을 떼었다.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까?”
“아, 네. 어때요?”
“……나쁘진 않군요.”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부름에 맞춤 정장을 기다릴 새도 없어 하는 수 없이 구입한 기성복이었지만, 저택의 손이 빠른 하녀 하나가 눈 깜짝할 새에 수선해준 터라 제법 몸에 잘 맞았다. 애초에 남성들과 크게 신장 차이가 나지 않는 탓에 수선할 부분이 거의 없기도 했지만.
이브가 목에 맨 크라바트가 어색한 듯 목덜미 언저리를 더듬고 있는데, 그 꼴을 지켜보던 알베리크가 성큼성큼 걸어 가까이 다가와서는 부드럽게 이브의 손을 걷어냈다. 이브가 눈만 껌뻑이고 있는 사이, 알베리크는 이브의 목에 걸린 크라바트의 모양을 다시 잡아주며 나직이 말했다.
“……마법사가 제값을 해 다행입니다.”
“그렇죠? 상처랑 멍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라고요.”
“부디, 조심 좀 하십시오.”
어려운 사람을 만나러 가야 했기에 하는 수 없이 얼굴과 목에 남은 생채기들을 지우기 위해 치료 전문 마법사를 불렀다. 팔다리가 잘린 것도,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고작 생채기 같은 걸로 비싼 마법사를 불렀느냐는 듯한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던 그 마법사는, 눈앞에 떨어지는 돈다발에 재빨리 서클을 열어 성심성의껏 이브의 상처를 돌보아주었다.
바실리오와 개싸움을 했던 그날 당일은 멍이 올라오기 전이라 잘 몰랐는데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몸, 특히 목덜미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목 위로 누가 봐도 남자의 손 모양대로 새카만 멍 자국이 올라와 있는 꼴을 보고 알베리크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기함을 했다. 그의 사색이 된 얼굴에 대고 차마 몸뚱이 쪽은 더 심각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라 감응자여도 주먹에 맞으면 멍이 들고, 칼에 찔리면 피를 흘린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아직도 그녀는 이 육신이 게임 속의 것이라는, 어딘가 현실에서 유리된 감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아무튼, 바실리오는 물몸인 것처럼 보였지만 보기보다 제법 주먹질이 매서웠던 모양이었다. 비록 바실리오의 늑골과 발목을 분질러놓기는 했지만, 술이 모두 깨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브의 몸도 만만치 않게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저는 부러진 곳은 없으니 이브는 씩씩하게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코피 안 터지고 뼈 안 부러지면 이긴 거지, 뭐.’
알베리크가 하도 난리를 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물론 정확한 디테일은 생략한 채) 이야기한 이브는, 결국 예상보다도 더 이르게 알베리크와 함께 황태자를 만나러 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루트가 뒤틀렸다면 뒤틀린 것이긴 하지만, 어쩐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회사 CEO에게 불려 가는 말단 사원이 된 듯한 느낌에 영 기분이 찝찝했다.
❖
알베리크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완전히 귀국해 영지와 수도를 오가게 되자 베르묄 부부는 마치 이브를 그에게 완전히 떠넘긴 것처럼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상류 계급의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베르묄 가문 역시 영지인 칼레스 외에도 다양한 지역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부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이 저택, 저 저택을 옮겨 다니며 한가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귀족의 삶이었다.
‘그 사람들은 차라리 사고 치지 않고 밖으로 떠돌면서 돈이나 쓰고 다니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라니 자기 부모에게도 가차 없네.’
부부가 밖으로 나도니 이상할 정도로 따라붙어 오던 백작부인의 감시도 사라졌다. 한번은 아델라이드 부인의 끈질긴 감시와 관리에 대해 은근슬쩍 알베리크에게 떠보듯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가 하, 하고 비웃는 숨소리를 터트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히 당신이 어디서 남자와 눈이라도 맞아 오는 게 아닐까 염려해 감시한 거겠지요. 아무리 볼품없어도 백작가의 레이디인 이상 막대한 지참금을 들려 보내야만 하는 것이 상류층의 상식이니 말입니다.
설마 그런 이유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이브에게는 무척 충격적인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조카딸 시집보낼 지참금이 아까워 10대 시절부터 다 큰 처녀가 될 때까지 남자를 만나지 못하도록 감시를 붙이는 친척 어른이라니. 역시 부유층 사람들은 어딘가 묘하게 음습한 구석이 있는 법이다.
아무튼 그것도 이브가 알베리크의 관리하에 들어갔다고 인식된 이후부터는 싹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백작님들은 언제쯤 오신대요? 소식 들은 것 없어요?”
“곧 시즌(사교기)이니 아마 이미 수도에 올라오셨을 겁니다. 한참 사교 모임 참석으로 바쁘실 테니 만찬회 당일에나 뵙겠지요.”
“엥…….”
“설마 베르묄의 수도 저택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한 겁니까?”
안전 지역에 자기 명의로 된 조막만 한 집 한 채 마련하기도 힘들었던 소시민의 영혼이 알베리크의 여유로운 비웃음에 발끈하고 말았다. 빈익빈 부익부라더니, 그 말이 맞았다. 이브는 일부러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그대로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는 잘 정돈된 궁성 중앙 진입로에 막 진입하고 있었다.
거대한 정문에 당도한 마차가 서서히 속력을 줄였다. 가문 문장을 달지 않은 마차인지라 잠시 신분 확인을 거친 후 마차는 바로 태자궁으로 향했다. 한두 번 방문한 것이 아닌 듯, 마부는 익숙하게 길을 찾아 말을 몰았다. 이브의 얼굴이 살짝 긴장으로 경직되었다.
‘플래그가 꽂혀서 제일 번거로운 건 칼리스토지만 그 외 부차적인 요소들을 고려했을 때 제일 골 아프고 대처하기 까다로운 건 황태자야. 부와 권력을 다 가진 미친놈이라니. 공략이 없으면 깨는 게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였지……. 게임 난이도도 최악이었는데 실물은 얼마나 무시무시할지 모르겠네.’
미리 약속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대기하고 있던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바로 집무실로 올라갔다. 정식 절차를 밟은 알현이 아니라 비공식으로 잡은 사적인 약속이었기에 황태자를 만나기 위해 걸쳐야 하는 길고 복잡한 절차들은 모두 생략되었다.
태자궁의 궁인들은 모두 긴 시간 엄격한 교육을 거친 숙련된 전문직 종사자들이었기에 바지 정장을 갖춰 입은 이브를 보아도 별다른 내색 없이 손님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다. 솔직히 한두 명 정도는 흠칫 놀라며 자신을 흘끔흘끔 바라볼 줄 알았던 이브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예의 바른 태도를 보며 황태자 에드워드가 얼마나 깐깐하게 구는 상전일지 짐작해보았다.
오히려 이브가 기대하던 반응을 보인 것은 집무실을 지키고 서 있던 근위대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알베리크의 뒤에 서너 걸음 물러선 채 어두운 암녹색 프록코트와 짙은 갈색의 바지를 입은, 이제 갓 성년이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앳되어 보이는 인상의 여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그녀가 옆구리에 차고 있는 장검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브는 얼떨떨해 보이는 젊은 기사에게 검집대를 풀어 무기를 건네면서 윙크를 던졌다. 이런 식의 추파를 여성에게서 받아보는 것은 처음인 듯 검을 건네받는 기사의 표정이 조금 해괴하게 변했다. 그러는 사이에 두 사람의 방문을 알린 시종이 집무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딱 맞추어 왔군, 소백작.”
“전하를 뵙습니다. 간밤에 평안하셨습니까.”
“음, 별다른 일은 없었네. 레이디의 소개를 부탁하지.”
“이쪽은 제 종형제인 이벨린 베르묄입니다. 전하께 인사 올리십시오, 이벨린.”
“브리타니아의 준비된 광영을 뵙습니다. 이벨린 베르묄이 인사 올립니다.”
무릎을 교차하여 꿇는 여성들의 인사가 아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하는 이브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황태자 에드워드 베셀 랭커스터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인사에 화답했다.
“과연 듣던 대로 몹시 호방한 기개가 있군. 반갑네, 레이디 이벨린.”
“호방이라니요, 전하. 레이디에게는 욕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알베리크가 차가운 얼굴로 못마땅하다는 듯 제 의사를 피력했다. 황족을 대하는 태도치고는 상당히 불경한 태도였다. 이브는 배운 대로 시선을 위로 올리지 않게끔 주의하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알베리크의 말마따나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화답이었다. 불쾌해해도 되는 건가 그녀가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고개를 들게, 레이디 이벨린. 알렉, 자네는 어째 항상 내 의사를 곡해하여 듣는단 말이지. 순수한 칭찬이었네.”
“그러시다면야. 칭찬 감사히 받겠습니다.”
시선을 위로 올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이브가 곧바로 황태자와 시선을 마주치며 생글 미소 지었다. 랭커스터 황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꿀을 녹인 것 같은 화사한 금발과 화창한 가을 하늘 같은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과연, 걸어 다니는 조각상이라는 별명이 붙은 남자다웠다. 장인이 최고급 대리석을 혼신의 힘을 다해 깎아놓은 듯한 섬세한 콧날과 아름다운 이목구비,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도드라진 T존 같은 곳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시대와 유행을 뛰어넘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그의 미모는 뱃속에 구렁이가 900마리는 들어 있는 사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와 미친……. 아니, 저게……. 와……. 얼굴……. 와……. 무슨 일이야…….’
알베리크에게 단기간에 주입당한 예절 교육 덕분에 표정이나 자세는 완벽히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으나 이브의 머릿속은 감탄으로 가득 찼다.
까놓고 말해 이브의 취향은 단언컨대 수컷 냄새가 풍기는, 턱선이 잘 발달되어 인상이 진하고 탄탄한 근육질의 핫보디를 가진 옛 돌× 앤 가×나 모델 스타일의 남자였다. 예를 들자면 데이×드 ×디 같은.
그러나 황태자 에드워드의 얼굴은 취향과는 무관하게 누가 보아도 잘생김을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황태자 뒤쪽에서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카스텔의 외모가 조금 더 이브의 취향에 부합했으나, 자연스럽게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백열전구 500개 분량의 빛을 뿜어대고 있는 에드워드의 얼굴이었다.
이브는 홀려 들어가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았다.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얼굴이었다. 황제의 견제를 받느라 나이 스물이 한참 넘도록 장가는커녕 약혼조차 하지 못했다는 설정이라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저런 얼굴은 하루빨리 대를 이어 그 유전자를 길이길이 보전해야만 한다.
“짧은 수련 기간임에도 성취가 무척이나 훌륭하다는 보고는 받았다네.”
“과찬이십니다.”
“고효율 투자를 한 기분이 들어 무척이나 뿌듯하군. 그대가 전력이 된다면 나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테니.”
“아직 별 볼 일 없는 미흡한 실력입니다. 과한 기대를 받았다가 혹여 전하를 실망하게 해드릴까 저어됩니다.”
‘이 구렁이 새끼, 은근슬쩍 나를 자기네 편에 집어넣네? 내가 알베리크 쫄따구지, 네 쫄따구인 줄 알아?’
이브가 구겨지려는 표정을 펴가며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에드워드의 말을 받아쳤다. 황태자는 제 유려한 칭찬과 유혹에 겸양을 떨며 은근히 거리를 두는 이브의 태도를 기민하게 눈치채고는 작게 픽 웃음 지었다.
대충 인사치레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곧 집무실의 시종들과 기사들을 모두 밖으로 물렸다.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자리를 비웠고, 곧 넓은 집무실에는 네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사위가 조용해진 후에야 입을 열었다.
“대략 보고를 받기는 했으나, 영애의 입으로 다시 상황 설명을 듣고 싶군. 시두스의 대장 늑대와 충돌이 있었다고.”
“충돌이라기보다는 가벼운 접촉이 있었습니다.”
“하하, 그런가. 나 역시 그 젊은 우두머리를 알고 있네. 지독한 사내라더군. 그의 정체를 미리 알고 있었나?”
이브는 잠깐 고민했으나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를 알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강 동쪽에선 모를 수 없는 남자이지요.”
“그렇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겠나.”
이브는 곧바로 마치 군인이 보고를 올리듯 다소 딱딱한 목소리로 그날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설명했다. 사후 브리핑은 과거 팀장급 헌터가 되기 전까지 매일같이 해왔기 때문에 사건을 구두로 정리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평민 여자들의 실종을 인지한 후로 계속 강 동쪽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들었다는 말부터 시작해, 어쩌면 갱단과 연관된 사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제게 접근한 바실리오를 이용해 그녀들이 행방을 알아내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야기까지 꺼낸 이브가 말을 마무리했다.
물론 방으로 올라가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통편집했다. 그저 싸움박질을 조금 했다는 식으로 각색한 이브는 보고를 마무리 지었다. 이브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가던 알베리크는 마침내 이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잔소리에 시동을 걸었다.
“그는 2황자의 수족 중 하나입니다. 홀로 그를 상대하려는 생각은 무모했습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던데요. 뭘 깔짝거리면서 운동을 좀 한 것 같기는 한데, 싸워보니까 완전히 물몸이던데.”
“…….”
알베리크는 뒷골목의 질 나쁜 늑대 수인 패거리의 우두머리를 물몸이라고 부르며 무시하는 이브의 말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곧 포기하고 그녀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넘어갔다.
“이런 사건은 영애 개인이 나설 일이 아니네. 인원을 추려 납치된 것으로 추측되는 여성들을 추적하라고 지시를 내리도록 하지.”
“수사국은 믿을 수 없습니다. 고작 평민 여자들이 사라진 사건이라고 무시하는걸요.”
“글쎄. 황명이 떨어진다면 눈치가 보여서라도 대충 넘어갈 수는 없겠지. 정히 염려된다면 휘하의 기사를 추가로 배치하도록 하겠네.”
“기사요…….”
“국민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녹을 받는 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
기사라는 말에 카스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해외에서 유입된 이종족 갱단이 기승을 부린다는 보고는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 정도까지 무도한 자들일 줄 몰랐습니다. 제국 국민을 노예로 팔아넘기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새로 자리를 잡는 갱단이 돈을 모으는 방법이야 뭐…… 약과 무기 그리고 여자를 파는 일 외에 더 있나요.”
가만히 두 사람의 말을 듣던 알베리크가 입을 열었다.
“바이퍼라면, 질 나쁜 약을 유통하는 새로운 집단이라 이미 수사국에서도 주시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팔고 있었다는 것은…… 저희 쪽에서도 아직 입수하지 못한 정보입니다. 수인 갱단은 점조직으로 움직이니 움직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기에……. 과정이야 얼마나 무식했든지 간에 결과적으로는 공을 세운 일이 되었군요.”
“아, 잠깐. 중간에 내 욕이 자연스럽게 들어간 것 같은데요.”
알베리크는 그녀의 지적을 깔끔히 무시해버리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마침 전하께서도 대대적으로 이스트 플루멘의 암흑가를 정리하실 생각이 있으셨으니 이 사건의 수사는 갱단을 박멸하는 작전과 함께 진행될 겁니다.”
“안 돼요. 너무 늦어요. 곧 항구 도시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뉘앙스였다고요. 전하, 가능하다면 수색 작업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곤란하군. 이 사건은 곧 중앙 수사국에서 담당할 걸세.”
이브는 곤란하다는 말과는 달리 사르르 웃으며 대답하는 에드워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혼자서라도 남쪽으로 내려갈 마음을 굳혔다. 바실리오의 말마따나 배를 탄 후에는 너무 늦는다. 적어도 육로에 있을 때 들이닥쳐야 했다. 가라앉은 이브의 표정을 지켜보던 에드워드가 돌연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애는…… 수사국의 능력을 불신할 정도로 일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는가 보군.”
“…….”
“좋아. 그대는 그 자신감이 단지 만용이 아님을 증명해야 할 걸세.”
“증명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이브의 얼굴에는 패배에 대한 염려나 두려움이 없었다. 그녀의 호기에 가볍게 웃은 에드워드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곧 입을 열어 제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사내에게 말했다.
“어떤가, 카스텔 경. 마르그리트 경이 직접 사사하였으니 어찌 보면 사형제가 아닌가. 자네가 직접 그녀의 실력을 가늠해보겠나?”
“명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레이디 이벨린, 제국 최고의 소드 마스터와 검을 섞어볼 기회를 내리겠네. 받아들이겠나?”
“귀한 기회를 내려주심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하, 좋아. 그러면 바로 연무장으로 가도록 하지.”
까라면 까야지 씨발, 이라는 말을 돌리고 돌려 아름답게 치장해 말한 이브가 슬쩍 에드워드의 뒤편에 시립해 있는 카스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짙은 잿빛 머리카락을 짧게 다듬어 뒤로 넘긴, 딱딱한 인상의 사내였다. 너무 과하지 않게 잘 단련된 육체는 언뜻 보기에는 명성과 비교하면 조금 슬림한 것이 아닌가 싶은 구석이 있어 보였으나 이브는 그가 「벗기면 대단한」 몸매라는 것을 알아챘다.
카스텔의 몸은 우락부락 마구잡이로 벌크업 된 몸이 아니라 꾸준한 훈련으로 지방질을 걷어내고 한계까지 다듬어 만든 몸이었다.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매끄럽게 잘 빠진 훌륭한 근육질의 몸이 몇 겹의 천에 둘러싸여 있음을 직감한 이브가 자꾸만 방정맞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두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시선을 느낀 듯 그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카스텔과 이브의 시선이 잠시 얽히고, 카스텔과 이브는 서로 고개를 까딱하며 말 대신 몸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웃전의 배려가 부족한 탓에 두 사람은 제대로 통성명도 하지 못한 채였다.
‘미쳤다, 진짜. 따악 한 번만 벗겨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아, 쟤는 딱 왕가슴 재질인데……. 어떻게 한 번만…… 안 되려나……. 왕가슴…….’
나른한 인상의 여자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못 한 채 황태자와 그의 기사는 앞서 걸음을 옮겼다. 이브는 집무실을 나서면서 검을 돌려받았고, 그 와중에 또 한 번 근위대 기사에게 짓궂은 표정으로 윙크를 날렸다가 알베리크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이벨린, 당신…….”
“아니, 왜 하필 그 타이밍에 뒤를 돌아보세요……!”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작은 목소리로 이브에게 주의를 준 알베리크가 다시 몸을 돌렸다. 이브는 검집대를 몸에 채우며 입술을 조금 삐죽였다. 요즘 부쩍 알베리크의 잔소리가 는 것처럼 느껴졌다. 돈 나올 구멍 만드느라 땅 사들이고 여기저기 투자하는 일이 제법 스트레스였던 모양이지, 하고 그가 앙알대는 원인을 짐작해본 이브는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태자궁 후원 방향에는 큰 연무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연무장을 지나야 후원으로 넘어가는 길로 접어들 수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황태자의 호위를 담당하는 카스텔과 근위대 기사들을 위해 정원을 일부 갈아엎어 따로 마련해준 시설인 듯 보였다. 카스텔에 대한 황태자의 총애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배려였다.
어느새 근위 기사들과 시종들이 에드워드와 알베리크의 주변에 자리 잡았다.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제 복장에 날아와 꽂히는 것을 느끼며 이브는 속으로 픽 웃었다. 이브는 걸치고 있던 프록코트와 그 안에 걸치고 있던 베스트까지 벗어 곁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건네고는 카스텔이 기다리고 있는 연무장 한복판까지 걸어 들어갔다.
그는 정복 차림 그대로 제복 코트까지 꼭 여민 채였다. 한 겹 정도는 벗어도 되는데…… 하고 아쉬워한 이브는 애써 속내를 숨기며 먼저 인사를 했다.
“제가 아직 오라 사용에 미숙해서 검기는 쓰지 않고 검만 섞었으면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영애께서 편하실 대로.”
“그러면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십시오.”
이브와 카스텔은 동시에 검을 빼 들었다. 예기가 검집을 빠져나오며 날카로운 곡성을 흘렸다.
두 사람 다 한 손 반 길이의 그립을 가진 롱소드를 주력으로 다루었다. 이브는 검 손잡이를 단단히 쥐어 잡으며 빠르게 전략을 구상했다. 본격적으로 단련한 남성 기사를 힘으로 이기기는 어려울 터였다. 최대한 신속하게 치고 들어가야 했다. 이브의 몸에서 천천히 날카로운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갑니다!”
기합처럼 터져 나온 외침과 동시에 이브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카스텔은 당황하지 않고 검을 들어 목을 방어했다. 언제 여기까지 치고 들어왔는지 눈 깜짝할 새에 짓쳐들어온 이브의 검날이 사내의 검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두 날붙이가 맞부딪치는 강렬한 소리가 폭발음처럼 터져 나왔다.
이브는 마치 막힐 줄 알았다는 듯이 빠르게 검을 회수해 물 흐르듯 유연하게 다음 목표 지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스텔은 순식간에 빗장뼈와 명치, 옆구리의 전광혈을 노리며 파고들어 오는 롱소드의 궤적을 차분히 하나씩 걷어냈다. 카앙, 캉, 카앙! 하는 귀가 얼얼한 쇳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멀찍이서 그 광경을 보는 이들마저도 마치 화약이 내는 폭발음 같은 강렬한 쇳소리에 귀를 막을 정도였다. 두 검수의 격렬한 공방을 바라보고 있던 에드워드가 의중을 알아보기 힘든, 미묘한 표정으로 알베리크에게 나직이 말을 건네었다.
“재작년 여름 초입 무렵에 처음 검을 쥐었다고 했던가.”
“예, 맞습니다.”
“물론 카스텔 경이 많이 봐주고 있겠지만, 내 보기엔 크게 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말 베르묄에서 미리부터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우고 있던 게 아닌가?”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미 보고를 올렸겠지요.”
“그렇군.”
알베리크의 답을 들은 에드워드가 입을 다물고 다시 묵묵히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연무장에 깔린 흙먼지가 두 사람의 격한 움직임에 풀풀 흩날리며 얼핏 사람들의 시야를 가렸다. 어쩐지 더욱 긴장감이 고조되는 듯한 분위기에 검을 나누는 둘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콰앙!
그그그극!
계속해서 들어오는 공격을 막기만 하던 카스텔이 돌연 기세를 바꾸어 공격적인 움직임으로 검을 휘둘러왔다. 이브는 이것이 일종의 테스트임을 깨닫고는 호기롭게 검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가 힘으로 내리눌러왔다. 둔중한 검과 사내의 무게를 받아내는 이브의 미간이 얼핏 좁혀졌다.
“제법.”
검과 검이 맞닿은 곳에서 끄그극 하는, 쇠 긁히는 괴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표정을 자세히 살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남자는 이브가 공격을 흘려내지 않고 힘으로 맞받아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에 괜히 기분이 상한 이브가 사납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거세게 검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이브의 검이 빠르고 신속하게 찔러 들어왔다. 독기가 잔뜩 오른 독사가 이를 드러내고 달려드는 모양새였다.
이브의 머릿속에 마거릿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다. 더 빠르게, 하체에 힘을 실어서, 날카롭지만 유연하게. 이브의 검격이 점점 더 매서워졌다. 검을 휘두르고 있는 와중에도 그녀는 성장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콰앙! 캉!
두 사람의 기세가 맹렬하게 휘몰아치며 얽혔다. 상단으로 치고 들어오는 검 끝을 막아냈나 싶으면 어느새 은빛 궤적이 허리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단의 공격을 걷어내면 단단한 쇠붙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검의 흐름을 타고 올라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시각각 다변하는 유려한 연계식이였다. 눈이 아닌, 기운으로 읽어내야 할 정도로 날렵하게 쇄도하는 빠르기와 좀처럼 예측하기 힘든 변환식에 카스텔은 딱딱한 낯 위로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피워 올렸다.
비록 방향은 완전히 달랐지만, 제가 알고 있던 어머니의 묵직한 검격이 변칙적인 움직임 안에 녹아 있었다.
마거릿의 검은 강력한 힘을 기반으로 한 패검과 중검이었다. 덩치가 큰 사내들도 저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마거릿의 투핸드소드를 받아내기 무척이나 버거워했다. 반면에 레이디 이벨린은 몸에 짜인 근육만 보더라도 쾌검을 구사하는 검사임을 알 수 있었다.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사제의 조합은 상상치도 못한 절묘한 방식으로 아름답게 꽃을 피워냈다.
성향이 정반대인 제 어머니가 이브의 잠재력을 단기간에 여기까지 끌어냈다는 것이 무척이나 놀라웠다. 카스텔은 이브의 재능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마거릿이 수년 전 마지막에 만났던 때보다도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 이브의 신형이 다시 빠르게 흩어졌다. 카스텔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예기가 흘러들어 오는 방향을 검면으로 받아쳤다. 그러나 응당 느껴져야 할 무게가 닿아오지 않았다. 카스텔은 순간적으로 목덜미에 돋아오는 소름에 저도 모르게 검에 오라를 둘러 재빨리 목 뒤로 닿아오는 살기를 베어냈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콰앙!
단단히 연마한 쇳덩어리가 순두부처럼 잘려나갔다. 폭발음이 터짐과 동시에 마치 안개처럼 살갗 위로 스며들던 형태 없는 희뿌연 살기가 공중에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이브는 재빠르게 검을 내던져 버리고 카스텔이 폭발적인 기세로 뿌린 검기를 피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제법 꼴사나운 모습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잘려나간 검과 함께 목이 베였을 터였다.
노도와 같은 오라의 방출로 인해 잔뜩 일었던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브는 어느새 땀범벅이 되어 얼굴에 흙먼지를 묻힌 채 연무장 바닥에 무릎을 대고 헐떡이고 있었다. 저 멀리에는 반으로 동강이 난 검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손속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은 카스텔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카스텔이 급히 검을 검집에 쑤셔 넣고 이브에게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영애?”
“으, 검기 쓰지 말자고 했잖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 실수입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후, 괜찮아요. 빨리 몸을 빼내서. 그보다 지금 놀라서 그런지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데, 좀 일으켜주실래요?”
카스텔은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이브의 상태를 확인하다가, 그녀의 요청에 조금 머뭇거리더니 손을 뻗어 이브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이브는 슬쩍 몸을 기대어 부축받는 척하면서 은근히 남자의 가슴께를 짚었다. 지방과 근육이 훌륭한 비율로 혼합된 완벽한 감촉이 천 위로도 충분히 느껴졌다.
‘크으으! 크으으으으! 고뤄치! 이거지이! 이 그립감! 이 부피감! 최고최고! 당신의 왕가슴에 A++ 1등급을 드립니다!’
음흉한 표정을 숨기며 일부러 에구구, 하고 앓는 소리를 내는 이브를 보던 사내가 어두운 안색으로 다시 한 번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설마 거기서 그렇게 공격이 들어올 줄 몰랐습니다.”
“괜찮아요. 오히려 여기까지 카스텔 경을 몰아붙였다는 방증인 것 같아 기쁜걸요. 아,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으시지요?”
“물론입니다. 그보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손이 떨리는 것 같은데.”
“아. 하하! 경께서 힘이 워낙에 세셔서 받아내느라 근육이 긴장했나 봐요.”
카스텔이 당황해 이브의 손이 어디를 만지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멀찍이서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던 황태자와 알베리크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근위대와 시종들이 우르르 서두르는 기색으로 이쪽으로 몰려왔다.
“괜찮은가, 영애?”
“이벨린, 괜찮습니까?”
“아 넵. 괜찮습니다. 조금 근육이 놀란 것뿐입니다. 훈련 중에 이런 일이야 허다하죠. 저는 아무렇지 않으니 두 분께서도 걱정하지 마세요.”
“면목 없습니다. 오라를 사용하지 않는 대련이었건만……. 제 부주의로 인한 실수였습니다.”
“에이, 아니에요. 그만큼 제 기습이 유효했다는 거겠죠.”
“놀라울 정도로 기척을 잘 숨기시더군요. 그러나 제가 영애께 실례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놀라움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것치고는 무척이나 덤덤하고 묵묵한 얼굴이었으나, 이브는 그의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고는 정말 놀랐다는 것을 눈치챘다.
뼛속까지 기사로 길러진 사내였다. 아무리 같은 검사라고는 해도 여성에게 제 실수로 위해를 끼칠 뻔했다는 사실이 그의 기사도 정신과 죄책감을 한껏 자극한 모양이었다.
이브는 그런 그의 태도에 웃음기를 지우고 단호히 말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경. 검수에게 이 정도 해프닝은 우스운 일 아니겠습니까? 혹 여기 계신 다른 기사분들께도 훈련 도중 일어난 실수에 이 정도까지 과하게 사과를 하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뼈가 박혀 있는 이브의 물음에 카스텔은 그녀가 기분이 상한 포인트를 빠르게 짚어내고는 진솔한 태도로 사과했다. 역시, 게임 속 남주들 중 그나마 가장 인성이 제대로 된 남캐다운 조신함이었다. 이브는 빠른 사과에 다시 밝게 웃어 보였다.
“정 그렇게 죄송하시면, 다음에 식사나 한 끼 대접하시죠.”
“……영애께서 원하시는 날짜를 알려주시면 최대한 시간을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없으십니까?”
이브는 가볍게 던진 농담에 심각한 얼굴로 대답하는 카스텔을 보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내리눌렀다. 그 순간,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 우선은 실내로 자리를 옮기도록 할까. 옷차림이 많이 흐트러졌으니 매무새도 다시 만져야겠군, 영애.”
에드워드가 고혹적일 정도로 아름답게 눈을 휘며 웃어 보이더니 왼팔을 내밀었다.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단정하고 자연스러운 에스코트 자세에 이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카스텔에게서 떨어져 허둥지둥 제 몸을 툭툭 털어 흙먼지를 털어냈다.
“아 그…… 땀이. 아니, 제가 흙바닥을 굴러서…….”
“이런. 내가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쓰는 예민한 사내로 보였다니. 부끄럽군.”
“아닙, 아닙니다. 가시죠!”
웃는 얼굴로 조곤조곤 「좋은 말 할 때 내 부축을 받아라.」라고 말하는 에드워드를 보며 이브는 그의 붉은 제복 위에 얌전히 오른손을 얹었다.
‘으. 성격 하고는. 싫어하니까 더 좋아하는 것 봐, 또라이 같은 놈……’
에드워드는 영 어색하다는 얼굴로 에스코트를 받는, 흙투성이 아가씨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뻗어 이브의 오른쪽 뺨에 묻은 흙먼지를 손가락 바깥 부분으로 슬쩍 닦아내 주었다.
마치 소중한 것을 대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행동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일순 숨을 죽이고 눈을 굴렸다. 물론, 이브를 포함해서.
‘허에에엥? 허미? 례? 으잉? 왓더?’
“자, 가지.”
모두를 충격의 도가니에 밀어 넣은 에드워드는 자연스레 이브를 에스코트하여 태자궁 안으로 들어갔다. 얼결에 그의 팔에 딸려가면서 이브는 연신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웠다.
‘아니? 이게? 왜? 대체? 무슨 일이죠? 캐붕인데? 이거 완전 캐붕인데? 야 개발자! 개발자 나오라 그래!’
그의 뒤를 따르는 시중인들과 알베리크, 카스텔의 반응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수하는 짧게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가 황급히 주인의 뒤를 따랐다.
❖
급한 대로 빈방에서 궁인들의 도움을 받아 젖은 면포로 몸 곳곳의 땀을 닦아내고, 궁의 남성 시종들이 입는 밋밋한 흰색의 새 코튼 셔츠 하나를 빌려 갈아입은 이브가 손 씻는 볼에 담겨온 물에 손과 얼굴을 헹궈내며 생각했다.
‘미쳤나 본데? 뭐지? 게임이 3차원으로 옮겨지면서 버그라도 걸렸나? 님은 빙썅왕자였잖아요! 왜 갑자기 친한 척인데!?’
게임 내에서 바레기 버금가는 인성질을 보여주는 에드워드 황태자의 팬 별명은 빙썅왕자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왕자는 아니나 태자보다는 왕자 쪽이 어감이 좋아 붙은 별명이었다.
적나라한 단어에서 예상할 수 있듯 그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말을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남자였다. 바실리오가 이 게임을 피폐 고어물로 만드는 역할을 담당했다면, 에드워드는 게임을 29금 능욕물로 만드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낯 뜨거운 단어들을 쏟아내며 「이브」에게 모욕을 주던 에드워드의 말솜씨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능란했다.
‘그 얼굴로 구멍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저질스러운 섹드립을 쳤단 말이지……. 하여튼 잘 배운 새끼들이 더하다니까…….’
이브가 기억하는 게임 속의 에드워드는 다정한 얼굴을 꾸며낼지언정 눈빛만큼은 북풍보다도 더 한랭한 캐릭터였다. 게임 속의 이브가 잔뜩 괴롭힘을 당하다 고통에 겨워 그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을라치면 매섭게 그녀의 손을 쳐내며 오물 취급을 해댔다.
‘이브가 다가가는 건 그렇게 칠색 팔색을 했으면서도 한 번씩 새카맣게 다 죽은 얼굴을 하고 지하감옥에 내려와서 끌어안고 있다가 돌아가기도 했지……. 하여튼 종잡을 수 없단 말이야……. 설마 게임에서도 안 나온 뒷이야기나 비밀 설정 같은 게 있는 거 아냐? 그랬단 봐, 내가 진짜 개발자 놈들 죽이고 천국 간다.’
에드워드의 루트는 기본적으로 능욕물의 도식을 따랐다. 대충 홀딱 벗겨져 차마 어디에 말도 못 할 이런저런 일들을 당한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개는 아니지, 미친놈아.”
“예?”
“아, 아뇨. 아무것도.”
이브의 혼잣말에 얼굴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이브에게 마른 면포를 건네던 여인이 반문했다. 이브는 하하 웃으며 얼버무리고는 면포로 얼굴과 턱을 타고 흘러내린 물기를 닦았다.
‘그래도 집착 키워드 때문에 그런가, 막 엑스트라 캐릭터 여럿 상대하고 그런 장면은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에드워드는 멀쩡한 듯 굴면서도 이브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보면 눈이 뒤집혀서 날뛰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친동기처럼 함께 자란 카스텔이 이브에게 신경을 쓰는 것마저 두고 보지 못해 결국 함정을 파 그를 죽여버리지 않았던가. 이해하기 힘들 수준의 집착이었다.
그런 에드워드를 끝까지 밀어내면, 에드워드는 이브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지금은 거의 사장되다시피 한 노예 낙인을 찍어 그녀를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해버린다.
그러나 에드워드를 받아들인다고 한들 그리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비통한 얼굴을 한 채 지하에 내려온 에드워드를 맞이하는 분기점에서 말없이 안아 위로한다는 선택지를 고르면 에드워드의 애첩이 되는 노멀엔딩으로 빠진다. 그날부터 에드워드는 더는 이브에게 피임약을 먹이지 않고, 곧 이브는 그의 아이를 가진 채 별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브에게 첩지를 내리지 않는다. 이브는 태자의 쿠르티잔이라고 불리며, 그저 장소가 감옥에서 별궁으로 바뀐 것뿐인 감금 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
‘웃긴 건 아이를 가진 후부터 오히려 방문이 뜸해졌었어. 그러다 황제를 등에 업은 황녀의 계략에 빠져 순식간에 몰락했고, 「이브」는 황태자의 아이를 가진 정부였기 때문에 처형당했지……. 아이만 없었어도 살 수 있었을 거야. 계승권 문제 때문에 죽였을 게 분명하니까. 사생아라고는 해도 엄연히 황가의 핏줄이니 살려둘 수는 없었겠지. 스토리 한번 개똥 같네, 정말. 이 미친 피폐 쌉망겜…….’
이브는 게임에 대한 신랄한 욕설을 퍼부으며 베스트와 코트를 다시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이브가 안내를 받아 황태자의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에는, 방 안에 미묘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는 상태였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드워드 혼자 방실방실 웃고 있는 것이 보나 마나 직장 상사의 갑질이었을 것이었다. 이브의 짐작은 그리 틀리지만도 않았다.
“마침 당사자가 오는군.”
“예? 저 말입니까?”
“아닐세. 이쪽으로 와서 앉게.”
이브는 에드워드의 손짓에 집무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차분한 월넛 프레임 장의자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각자의 앞에 김이 올라오고 있는 홍차가 담긴, 금색 도료로 장식된 투명한 쪽빛의 찻잔이 한 잔씩 놓여 있었다. 이브가 찻잔이 놓인 빈자리에 앉자마자 알베리크의 시선이 닿아오기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알베리크가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 제일의 소드 마스터에게서 지금 당장 기사단에 편입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는 극찬을 받아내다니. 짧은 기간 동안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군, 영애.”
“모든 것이 전하의 은덕이지요.”
“영애는 별도의 임시 수색대에 편입하는 것으로 하지. 단, 카스텔 경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네.”
“카스텔 경이 수사에 참여하시는 겁니까?”
“영애 덕분에 카스텔 경이 오랜만에 외근을 나가게 되었군.”
이브는 흘긋 카스텔이 앉은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남자의 얼굴은 표정 없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저 때문에 번거롭게…….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입니다.”
“명에 따를 뿐입니다.”
“영애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그대도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것이 공평하지 않겠나.”
“예? 부탁이라니, 그냥 하명하시면 따르겠습니다.”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르고 있기는 한 것 같으나 이브는 어쩐지 뱃속이 차갑게 식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선은 수색에 참여하는 것을 허가받았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한 이브는 잠자코 뒤이어질 에드워드의 말을 기다렸다.
“자, 그러면……. 영애, 잠시 자리를 옮기지 않겠나?”
“예? 아, 예. 알겠습니다.”
남자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이브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하니 알베리크가 어딘가 불안한 듯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발 예의 없이 굴지 말고 품위 있게 행동하라는 잔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브는 그에게 슬쩍 웃어 보인 후 에드워드의 에스코트를 받아 집무실을 나섰다.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기자 몇 걸음 뒤에서 기사 두엇이 따라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가는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내 서재로 간다네. 조용히 이야기하기엔 안성맞춤이지. 영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라면…….”
“비밀일세. 하나 그대도 좋아할 거라고 내 장담하지.”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물으니 에드워드 역시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중정을 끼고 왼편으로 돌았다. 도착해서 확인한 그의 서재는 집무실과 연결된 작은 공간이 아닌, 개별적인 위치에 존재하고 있는 방 세 개 정도 크기의 널따란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기사들과 서재를 관리하는 사서는 여인과 단둘이 남겠다는 주군의 명령에 다소 낯설어하면서도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고, 곧 서재는 텅 비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브는 별생각이 없었다. 여차하면 한 대 쳐서 기절시키자는, 상당히 불경한 생각마저 품고 있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네. 이리로.”
에드워드는 부드럽게 이브를 이끌고 서재 구석진 곳까지 걸어 들어갔다. 본궁도 아닌, 태자궁에 딸린 서재치고는 상당히 본격적인 규모라 이브는 예법에 어긋난다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장서가 잔뜩 꽂혀 있는 키가 큰 책장들을 둘러보았다.
“책을 좋아하는가?”
“아, 예. 책은 사치품이니까요. 쉽게 가질 수 없으니 기회만 생기면 닥치는 대로 읽었었습니다.”
“아아. 그렇지. 어린 시절은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그 돈이면 음식을 사는 편이 나았으니, 가지고 싶다고 쉽사리 턱턱 사들일 수는 없었지요.”
비단 이브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주영 역시 앎의 빈곤을 느끼던 유년시절을 겪지 않았던가. 어렸던 그녀가 가질 수 있었던 책이라 해봐야 학교에서 나누어주는 교과서,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는 선생님들이 몇 권씩 들려주는 문제집, 폐지를 줍던 할머니의 눈에 띈 버려진 책 따위가 전부였다.
입을 다물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이브의 얼굴을 바라보던 에드워드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브는 움직임이 멎는 것을 느끼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브가 팔을 내리자 에드워드는 서재의 가장 안쪽에서 익숙한 듯이 책 몇 권을 꾹꾹 뒤로 밀어 넣었다. 이브는 그 모습에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니, 여기 애들은 왜 이렇게 서재에 비밀 공간 만드는 걸 좋아한대?’
물론 알베리크의 밀실처럼 은밀한 목적을 가진 공간은 아닌 듯, 드러난 밀실 안에는 책장과 몇 권의 책들이 보였으나 이브는 괜히 흰 눈으로 에드워드를 바라봤다. 이런 걸 제게 보여주는 저의가 무엇인지 의심이라도 하는 듯한 이브의 미묘한 표정을 본 에드워드가 눈을 휘며 웃었다.
“정히 의심스럽다면 거기 있게. 물건만 가지고 나오도록 하지.”
그는 정말로 다른 의사는 없었다는 것처럼 비밀스러운 서재에서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나왔다. 다시 밀실의 문이 닫히고, 에드워드가 이브에게 손에 들린 책을 건넸다. 아무런 제목도 쓰이지 않은 코발트블루 색상의 양장 서적이었다. 각 모서리에는 금장마저 둘러져 있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음에도 무척이나 귀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확인해보게.”
그 자리에서 읽어보라는 남자의 독촉에 이브는 순순히 책을 펼쳐 들었다. 안에 쓰인 글들을 읽어나가던 이브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뜨였다가, 곧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이브는 이 책을 알고 있었다.
“이게, 대체…….”
“아, 역시……!”
이브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책으로 떨구었던 시선을 다시 올려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환희에 차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반짝일 정도로 환한 웃음에 이브가 흠칫하고 저도 모르게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수정을 깎아 만든 조각상 같은 얼굴이 마치 생명을 얻은 듯 작게 홍조를 띤 채 들뜬 듯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이 아릴 지경이라 결국 이브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러자 에드워드는 성큼성큼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혀 들어오더니 급기야 이브의 허리를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역시 이번엔 그대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이브.”
“예?”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불쾌해진 이브가 남자의 팔을 떼어내려 움직이던 찰나, 그의 목소리에 그만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에드워드는 이브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버린 것을 느끼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 이브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크게 자랐군. 이 정도까지 클 수 있었던 걸까. 너는 언제나 내 예상을 벗어난단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기억하고 있잖나. 잊힌 신,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허락한 신의 은총, 마지막 성처녀……. 그리고 이 책을 말이야.”
“…….”
“보고 싶었어. 정말이야. 그대를 다시 만나기만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몰라.”
에드워드의 부드러운 입술이 목 빗장 근처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브는 고장이 난 머리를 억지로 굴려가며 상황을 정리해보려 애썼다.
에드워드는 그녀를 이벨린이 아닌 이브라고 불렀다. 마치 그녀에게서 몰락한 영애의 이름을 빼앗고 그녀를 태자궁 지하에 처박았던, 게임 속에서 보았던 그날처럼.
이브는 황급히 에드워드를 밀쳐내고 두어 걸음 훌쩍 물러섰다. 순식간에 거리를 물린 이브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에드워드는 꽃같이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무엇을 알고 있지?”
“글쎄. 네가 날 죽이겠다고 울부짖던 것……?”
에드워드가 이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나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용서하지 않겠다고 저주를 퍼부었지. 부른 배를 보며 끔찍하다고 울고불고 소리 질렀고, 아이를 떼려고 수일간 단식을 한 적도 있었어. 수십 번씩 도망치려고 시도한 것도 기억나. 아, 한번은 카스텔과 외국으로 도피하려던 적도 있었군. 그 남자는 안 그래 보여도 속이 말랑한 사내니까, 쉽게 넘어갔겠지……. 그래, 네가 사촌 오라비에게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를 한 것도 기억이 나는군. 칼리스토가 네 시신을 숨기기도 했고, 대공 윌리엄이 네게 구혼한 적도 있었어. 시두스의 늑대가 네 사지를 찢어 죽였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지.”
모두 게임의 내용이었다. 그가 알 리 없는. 이브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게임 캐릭터가 게임기 안에서 말을 걸어오는 듯한 정체불명의 공포가 이브의 신경을 자극했다.
게임이 단지 게임이 아니게 되어간다.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은 정말로 「삶」이었던가.
이브는 허튼소리를 하지 않으려 애쓰며 억지로 기세를 억누른 채 에드워드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결국 도망친 감상이 어떻던가? 나를 버리고 떠나서 행복했나?”
“좆 까. 버려? 떠나? 개소리하네. 먼저 사람 폐인으로 만든 게 누군데? 피해자인 척 굴지 마.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냐?”
“하하하! 정말이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군. 그마저도 나를 기쁘게 하지만.”
“지랄 염병을 떨고 앉았네. 그걸 다 기억하고 있으면서, 양심이 있다면 나한테 알은척하면 안 되는 거 아냐? 평생 참회하는 마음으로 죽은 듯 지냈어야지. 지금 이러는 거 기만 떠는 것밖에 안 돼, 이 역겨운 새끼야.”
“기만이라고 해도 좋아. 보고 싶었어. 그대가 그리웠어. 수십, 수백 번씩 반복되는 이 지옥 속에서 오로지 그대만이 살아 움직였잖아. 그러니 내가 어찌 그대를 바라지 않을 수 있겠나.”
돌연, 에드워드의 기세가 송곳처럼 날카로워졌다. 그의 안색에 음울한 살기가 언뜻 비쳤다가 사라졌다.
“비록 나를 이 지옥에 떠민 것이 그대라고 할지라도 말이야.”
“하……. 어처구니가 없네, 정말. 책임 전가하지 마. 역겨우니까.”
“베르묄 저에서 그대가 얻은 것은 그 책의 필사본이야. 원본은 그쪽. 일부러 누락시킨 내용도 있으니 가지고 가서 읽어보게.”
“뭐?”
“그 후에 다시 이야기하지. 이제 슬슬 돌아가볼까?”
에드워드가 감정을 깔끔히 갈무리하고는 언제 미련이 뚝뚝 넘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느냐는 듯이 표정을 정리했다. 담담하게 미소 지은 채 왼팔을 건네는 사내의 얼굴을 보며 이브는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난감해하고 있었다.
“아, 영애.”
“……뭐야, 또.”
“평대는 또 신선한 경험이군. 둘만 있을 때는 말을 낮추어도 좋아. 그대에게는 특별히 허락하도록 하지.”
“으……. 변태 새끼…….”
결국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이브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들릴 듯 말 듯 작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즐거운 듯 다시 한 번 하하, 하고 웃은 에드워드가 이브의 오른팔 아래에 일부러 제 왼팔을 끼워 에스코트하는 시늉을 하더니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듣는 귀가 있을 땐 조심하게. 황족 모독죄로 붙잡혀 가면 어쩌나.”
“염병, 진짜…….”
“후후…….”
이브는 말없이 사내의 인도에 따르며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솔직히 지난 2년간 남자 주인공들과의 관계도 많이 바뀌었으니 굳이 히든엔딩의 흐름을 좇을 이유가 있느냐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냥 단순히 게임의 루트를 박살 낸 정도가 아니었다.
‘갑자기 분위기 회귀? 사실 알고 보니 루프물이었습니다? 뭐 이런 전개가 다 있어! 개발자 내가 조리돌려버리고 만다. 아니,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이런 게 어디 있냐고! 게임에서는 나오지도 않았던 비밀 설정 같은 거 유저 몰래 캐릭터한테 부여하고 그러는 게 어디 있어, 이 미친 망겜!’
이런저런 생각들로 복잡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는 이브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푸른빛의 책을 한 번씩 슬쩍 바라본 에드워드가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