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뜻밖의 조우 (9/22)

08. 뜻밖의 조우

수도로 올라온 다음 날, 이브는 저택까지 테일러를 불러 신체 치수를 재고 알베리크와 함께 연미복의 디자인과 원단을 고르느라 온종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지을 때는 언제고 테일러가 가져온 원단 번치북을 보는 그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해 보였다. 이브보다도 더 빠르게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원단과 색상, 셔츠의 칼라 형태를 파악해 테일러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는 알베리크의 모습은 무척이나 생기 있어 보였다.

‘하여튼 꾸미고 치장하는 거 엄청 좋아해.’

이브는 그날 처음으로 자신이 스프레드 칼라보다는 세미 스프레드나 클래식 칼라가, 일반 스탠딩 칼라보다는 굴곡이 져 있는 만다린 칼라가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한색보다는 난색이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알베리크의 주도하에 그녀의 정장이 순식간에 구체화되어 테일러의 디자인북에 담기게 되었다. 그녀는 연미복을 제외하고도 바지 정장만 일곱 벌을 맞추었다. 사실상 자신의 쇼핑이 아닌 알베리크의 쇼핑 같았다.

이리저리 샘플 의상을 갈아입어보며 인형놀이에 어울려주던 이브는 테일러가 돌아가고 난 이후에야 겨우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메리가 곁에서 신사복이 정말 잘 어울리신다며 꺅꺅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하루 종일 기가 빨려 순식간에 초췌해진 이브는 좀비 영화에서나 들을 법한 끄으으으, 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널브러져 있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나, 마차를 불러주겠어?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올 거야.”

“시간이 조금 늦지 않았나요……?”

“괜찮아. 검을 차고 있으니 별일 없을 거야.”

이브의 실력을 잘 모르는 안나는 염려의 기색을 내비쳤으나, 곧 마차를 부르러 내려갔다.

아직 날이 풀리려면 조금 멀었기 때문에 해가 지면 쌀쌀했다. 이브는 직접 클로젯을 열어 사용감이 있는 감색 재킷을 하나 꺼내 걸치고 검집대와 검을 챙겼다. 얇은 셔츠와 면바지, 재킷을 걸친 이브의 모습은 영락없는 중산층 평민처럼 보였다.

이브는 알베리크에게 잠시 센트럴시티에 나간다고 전언을 남긴 후 가문 마차를 타고 시티로 향했다. 역사 근처 번화가에서 내린 이브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작은 해크니 마차를 잡아탔다. 자신이 태운 사람이 남자인 줄 알았던 마부는 이브의 목소리를 듣고 잠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녀의 허리춤에 달린 장검을 보고는 별말 없이 그녀를 태우고 강 동쪽 공방 거리로 향했다.

공방 거리의 진입로에서 내려 삯을 치른 이브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처음이 힘들었지, 찾아가는 길을 알고 난 이후로는 길을 잃지 않았다. 이브는 날듯이 걸어 옥타비아의 낡은 마도구상점에 도착했다. 힘주어 열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냄새들이 코를 찔렀다. 이브는 장사를 할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이리저리 어지럽혀져 있는 상점 내부를 둘러보며 문을 닫았다.

“옥타비아! 나 왔다!”

이브는 크게 한번 소리친 후 카운터 앞에서 잠시 기다렸다. 카운터 안쪽 바닥에서 무언가 우당탕 하는 소음이 들리더니, 곧 바닥에 달린 문을 부술 듯이 열고 튀어나온 옥타비아가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아가씨! 오셨어요?”

“대칼리스토 마나 제어 마도구 곧 완성할 것 같다며?”

“앗, 그렇긴 한데요……. 마정석 용량이 안 맞는지 작동이 되다가 말다가 하더라고요. 조금 더 테스트를 거쳐야 할 것 같아요. 대신 그…… 그거…… 그거가 지금 최종 완성 단계인데……. 한번 보실래요?”

「그거」라는 대명사에 이브의 눈이 반짝였다. 옥타비아가 만든 어른의 장난감은 꽤 성능이 좋았다. 솔직히 저렴한 가격의 중국산 장난감보다도 훨씬 좋다고 평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껏해야 벨트에 장난감을 부착하는 페니반 정도를 생각한 이브에게, 작년 이맘때쯤 옥타비아가 직접 아이디어를 제안했었다.

―그냥 허리에 달 게 아니라, 직접 피부에 부착해서 감각을 연결하는 방식은 어떨까요?

―미쳤나 봐! 옥타비아, 그게 가능하겠어?

―아직은 이론뿐이지만 될 것 같아요……!

―성공만 하면 무조건 인센티브 따따블이야! 가즈아!

인센티브 따따블이 걸려 있는 「그것」의 최종 완성품이라니. 이브는 옥타비아를 재촉했다. 빨리빨리빨리! 성질 급한 K-소울이 이브를 애타게 만들었다. 이브의 재촉을 들으며 지하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옥타비아의 손에는 위엄 넘치는 크기와 현실감 있는 형태의 살굿빛 장난감이 들려 있었다.

“구조만 완성되면 외형은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으니까요, 일단은 이 정도 크기로 만들어봤어요.”

“이야……. 이건……. 결장까지도 들어가겠는데……?”

“네?”

“으흠, 큼.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이거 실험은 해본 거야?”

“일단 제 피부에 한번 연결해보긴 했는데, 실사용자는 아가씨니까 아무래도 세부적인 조절이 필요하거든요. 지금 한번 착용해서 맞춰보실래요?”

“좋아! 완전 좋아! 예스! 예에쓰!”

이브는 신나서 바지 여밈을 풀어젖혔다. 옥타비아는 의욕 만만인 이브에게 「그것」을 건네며 설명했다.

“부착 위치는 원하는 부위에 붙이시면 되고요, 피부에 강하게 밀착시킨 다음 여기 뿌리 가장 끝 부분에 작게 튀어나온 스위치를 누르시면 감각이 연결될 거예요. 해제를 원하시면 부착된 상태에서 스위치를 길게 3초 이상 누르시면 되고요.”

“어머, 어머어머. 이게 되네? 대박!”

“하……. 제 인생의 역작이에요. 이것 때문에 시체 해부를 얼마나 했는지. 덕분에 남자 몸이라면 질릴 정도로 본 것 같아요.”

“뭐?”

“네?”

“어, 어어……. 아냐, 아무것도.”

무슨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이브는 아랫배에 달린 「그것」에 정신이 팔려 옥타비아의 말을 대충 한 귀로 흘려버렸다. 시키는 대로 버튼을 누르고 내장된 마정석이 작동하기 시작하자 이브는 곧 마도구에 촉감이 연결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상용화하면 분명 변태 마나님들의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브는 조심스럽게 장난감을 손으로 살살 쥐었다가 떼어보았다. 과연, 약한 압력이 아랫배의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옥타비아는 이브의 감상에 따라 마법식을 이리저리 고쳐보며 즉석에서 마도구의 신경 연결 기능을 조절했다.

“안타깝게도 아직 성감이랑 연결을 시키지는 못했거든요. 그래도 온도랑 압력, 마찰 정도는 느낄 수 있어요.”

“아냐, 이게 어디야. 진짜 없는 게 생긴 기분이네.”

“완전히 실물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최최종 버전도 회로를 짜는 중이에요. 성감 부분은 조금 난해하지만 그래도 신경 연결에 성공했으니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아요.”

“미쳤다 진짜. 옥타비아, 너는 천재야! 세상에 너만큼 똑똑한 애는 본 적이 없어! 진짜 최고야……!”

“으헤헤헤!”

“으하하하하!”

이브는 장난감을 제거한 후 옷을 여미며 옥타비아를 마구 칭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기쁨에 찬 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것」의 개발은 대성공이었다.

한참 만에야 흥분을 가라앉힌 두 사람이 거액의 돈을 주고받으며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도구의 개발 진척 상황도 궁금하기는 했지만, 오늘은 다른 목적도 있었다.

“요즘 이 동네, 무슨 일 없어?”

“네? 무슨 일이라뇨?”

“그게, 우리 저택에서 일하는 애가 얼마 전에 공방 거리에 왔다가 실종됐다고 하더라고. 뭐 들은 거 없나 해서.”

“으음. 그런 일이라면 종종 일어나는 일이어서요……. 귀족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면 영양 상태도 좋고 생김새도 나쁘지 않은 여자겠네요?”

“그……으렇지. 으음, 맞아. 그랬던 것 같아.”

“그러면 인신매매일 가능성도 있겠네요. 요즘 갱단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거든요. 듣기로는 새로운 신생 패밀리가 생겼다는데, 이미 자기 구역이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뒤늦게 끼어든 거라 구역 싸움이 엄청 잦대요. 그런 놈들이 돈 긁어모을 때 주로 사고파는 게 약, 무기, 여자잖아요.”

“그건 그렇지……. 음. 근처에서 뭐, 사람이 죽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못 들었지?”

“네. 시체가 발견됐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어요.”

“그래도 주변 상인들이랑 교류는 하고 사는 모양이다?”

이브의 말에 옥타비아가 뒷머리를 긁으며 수줍게 웃었다.

“아뇨, 그게……. 가게 보안을 위해서 이 일대는 죄다 도청하고 있거든요.”

“뭐……?”

“헤헤헤.”

“그…… 범죄는 안 돼. 알았지?”

“그럼요! 나쁜 일에 쓰지는 않아요.”

이브는 다시금 철저히 옥타비아에게 주의를 준 후 잘 포장된 「그것」을 허리춤에 매단 내부 확장 마도구,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고 밖으로 나왔다.

‘갱이라. 그러고 보니 서브남 중 하나가 뒷골목 암흑가 조직 두목이었지. 걔 이름이 뭐더라……. 하도 인성이 개차반이라 바레기라고만 불러서 풀네임은 도통 기억이 안 나네.’

「이브를 위하여」의 쓰레기 서열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성이 개파탄 난 그는 잔인하고 난폭한 성격에 걸맞게 이브를 대하는 태도 역시 문제가 무척 많은 남자였다.

배드엔딩으로 빠지면 양 팔다리가 잘린 채 평생 그의 노리개가 되고, 그나마 그의 사랑을 받아주어도 마약에 강제로 중독되어 폐인이 된다. 잔혹하기로 치면 황태자보다도 질이 훨씬 나빴다. 차라리 깔끔하게 죽이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잘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터지고 빻은 성격 탓에 막판에 메인남주에서 제외되고 칼리스토와 비중이 바뀌었다는 개발자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있었다.

여자를 믿지 못하는 바레기는 이브를 마약에 중독시켜 약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구차하게 매달리는 폐인 상태로 만들고 나서야 이브를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러워했다. 엔딩 외에도 플레이 도중 툭툭 튀어나오는 그의 이기적이고 잔인한 성정에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몇 번이나 게임기를 집어 던질 뻔하지 않았던가. 이 게임을 피폐물로 만드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세운 그는, 명실상부한 개쓰레기 인성파탄자였다.

“아, 바레기 이름이 뭐더라. 바……. 바……. 바……기볼레……는 아니고.”

이브는 떠오르지 않는 이름을 생각해내려 머리를 쥐어짜며 발을 옮겼다.

뒷골목에서 정보를 얻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왕도라고 한다면 사람이 모이는 술집에서 주정뱅이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이다. 이브는 온갖 매체에서 다루던 왁자지껄한 펍, 술에 취해 떠들어대는 남자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골목골목을 돌아 걸었다.

멀지 않은 곳에 규모 작은 펍이 모여 있는 거리가 보였다. 대로 바깥이 아닌 골목 안쪽의 술집들은 대체로 노동자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한 잔씩 걸치는, 이주 노동자들과 토박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오래된 가게들이 많았다.

이브는 챙겨 온 회갈색 플랫캡을 꺼내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끝을 잡고 돌돌 말아 올려서 모자 안으로 꾹꾹 밀어 넣으며 모자를 썼다. 허리와 어깨를 펴고 낡은 모자를 눌러쓴 이브의 모습은, 패용한 검 때문에 변복을 한 기사처럼은 보일지언정 결코 20대의 숙녀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브는 사람이 모여 있는 술집 하나를 골라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순식간에 안쪽에서 고여 있던 시끄러운 말소리들이 터져 나와 이브의 귀를 자극했다. 허름한 복장을 한 사내들이 모여 앉아 서로 목청을 높여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 동쪽에서나 들을 수 있는 구수한 노동자 계급 특유의 억양이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이브는 구석진 벽감 아래, 두 사람이 간신히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앉아 베스톨렌 페일에일 한 잔을 시키고 슬쩍 모자의 챙을 고쳐 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탁자 때문에 허리 아래로는 잘 보이지 않으니 자연히 롱소드의 존재도 희미해졌다. 술집 그 누구도 나이 어린 얼뜨기 소년처럼 보이는 이브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브가 비워낸 맥주잔이 두 잔을 넘어갈 무렵, 펍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내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한 무리의 젊은 노동자들 목소리가 특히나 컸다. 세 남자 모두가 만취한 듯 살갗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제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모두가 익숙하다는 듯 그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강 동쪽의 구석진 펍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는 것처럼.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이브는 남자들의 기본적인 신상을 대강 파악하고는 맥주잔을 들고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4인석의 비어 있는 의자로 엉덩이를 뭉개고 앉았다.

“이야, 헨리 형님! 이런 데서 만나네.”

“어엉? 헨리, 너 아는 꼬마여?”

“그으…… 누구더라.”

“뭐야. 너무하네, 형님. 형님네 공장 심부름 하고 있잖아.”

“아아……. 그으…… 필리입, 필리파?”

“맞아!”

“어어, 필립 너 술 마셔도 되는 나이던가아?”

“으하하! 그게 뭐가 대수야! 꼬마야, 마셔! 마셔!”

낯선 이의 갑작스러운 난입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사고가 마비된 주정뱅이 노동자들은 이브의 낡고 허름한 복장과 정제되지 않은 거친 억양, 소년의 것을 흉내 낸 듯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대충 저들의 동료라고 인식한 듯 다시금 소리를 높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브의 넉살과 얼큰하게 취한 술꾼들의 높은 텐션이 한껏 어우러져 오래 지나지 않아 이브는 사내들과 맥주잔을 네댓 번 정도 마주치며 자연스레 그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이브는 베르묄 집안에 들어오기 전 고아원에서 들었던, 공장 심부름꾼으로 취직했던 고아원의 나이 많은 소년들이 거들먹거리며 하던 이야기들을 대화 적재적소에 써먹으면서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보냈다.

“그래서 우리 누나가 엄청 불평한단 말이야. 갑자기 밤중에 싸우는 소리가 자꾸 들린다면서.”

“그런 건 우리 같은 인간들이 신경 쓸 일이 아냐. 마피아나 갱들 구역 다툼일 테니까.”

“역시 그렇지?”

“시이발, 고아 먹어도 시원찮을 뱀 새끼들이 꾸역꾸역 동쪽으로 기어들어 오니까 이 사달이 나는 거 아녀! 입국을 아예 금지시켜야 한다니까!”

“저 새끼 또 지랄이네.”

“냅둬. 늑대라서 예민한갑지. 털 짐승들은 파충류랑은 사이가 영, 그렇잖아.”

“무슨 뱀?”

이브는 순진한 낯을 한 채 천천히 미끼를 드리웠다. 사내들은 소식이 느린 어린 심부름꾼에게 마치 거창한 비밀을 이야기하듯 목소리를 낮추며 유난을 떨었다. 물론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소리는 충분히 컸기에 이브는 딱히 귀를 기울이는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었지만, 대충 장단을 맞춰주며 이브 역시 몸을 앞으로 숙여 은밀한 이야기를 듣는 듯한 시늉을 냈다.

“이번에 엑세트라에서 내전이 벌어졌잖냐. 전쟁을 피해 뱀 수인들이 잔뜩 들어왔다고.”

“밑바닥 놈들이랑 같이 질 나쁜 놈들도 같이 흘러들어 온 모양이여.”

“듣기로는 제법 몸집이 큰 뱀 패밀리들이 똬리 튼 지역이 시두스 패밀리 구역이랑 겹친다대.”

“그 미끈한 새끼들은 상도덕이라는 걸 모르니까! 예미날, 고약한 새끼들……!”

이브는 늑대 귀가 쫑긋 솟아 있는 수인 사내의 욕설이 터짐과 동시에 주변에서 몇몇 수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고개를 주억이며 동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펍은 늑대 수인들의 구역이거나, 그들이 관리하는 사업장인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도 수인 사내의 입에서 뱀 수인과 그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는 범죄 집단에 대한 욕설이 한참이나 쏟아졌다. 이브는 하하 웃으며 그가 중언부언 늘어놓는 험담에서 쓸 만한 정보를 추려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해나갔다.

한참 수다가 이어진 끝에 결국 과음을 한 수인 사내가 고꾸라지며 술자리가 파장에 이르렀다. 사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로 돌아온 이브는 빈 맥주잔으로 시선을 내리며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임 속에서는 뱀 수인들의 이야기는 물론, 여자들이 납치되는 사건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 이브 자신이 이 사건을 파고든다면 앞으로의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브는 피해를 본 여자들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갱단의 주도로 벌어진 사건이 맞는다면 누군가 입김이 센 자의 개입이 있지 않는 이상 사건의 조사는 흐지부지될 것이 자명했다. 이브는 이 사건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눈을 감고서도 그려볼 수 있었다.

그 순간, 비어 있던 이브의 맞은편 자리에 누군가가 털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머릿속에 늘어놓았던 생각들을 빠르게 갈무리한 이브가 고개를 들어 테이블 건너를 바라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 핏빛 눈동자, 짙은 피부색, 강하게 도드라진 턱선, 높은 콧대, 깊이 파인 아이 홀. 이브는 이렇게 생긴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본 적 있다기보다는 「알고 있었다」.

“혼자 왔나?”

“글쎄.”

“일행은 없는 것 같은데. 자리 좀 빌리지.”

“좋을 대로.”

짧게 말을 주고받은 이브와 남자는 동시에 에일을 시키고는 입을 다물었다. 서로를 탐색하는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둘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안주도 없이 엄청 마셔대던데, 또 마시는 건가?”

“뭐가 맛있는지 잘 몰라서. 추천해줄래?”

“구운 소시지가 괜찮지. 질 좋은 고기를 쓰거든.”

“그럼 그걸로 한번 시켜봐. 자리 빌려준 값은 그걸로 퉁치지.”

이브의 말에 큭큭, 소리 내어 가볍게 웃은 그는 구운 소시지, 튀긴 감자를 주문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짙은 황금색 에일이 울퉁불퉁한 질 나쁜 유리잔에 담겨 나왔다. 이브는 거리낌 없이 맥주를 목 뒤로 넘겼다. 기포의 청량감과 함께 오렌지 껍질에서 맡을 수 있는 시트러스 향과 기분 좋은 소나무 향 같은 것들이 올라왔다. 다른 데에 신경을 팔며 마실 때와는 달리 맥주의 맛과 향이 혀를 기분 좋게 자극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잔을 내려놓으며 크으, 하고 아저씨 같은 감탄사를 뱉은 이브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술 위에 묻은 흰 거품을 옷소매로 쓱 닦아냈다. 남자 역시 크게 한 모금을 넘기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뒤이어 테이블에 놓이는 소시지와 감자튀김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는 이브를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검은, 오래 배웠나?”

“어엉?”

“허리에 차고 있잖아. 롱소드.”

“아, 이거. 오래는 무슨, 한 2년 배웠지. 아직 애송이 수준이야.”

이브는 솔직히 대답하며 함께 나온 포크와 나이프로 거침없이 소시지를 잘랐다. 나이프를 들이대자마자 육즙이 터져 나오는 붉은 소시지를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자른 이브가 나이프를 내려놓고 곧바로 하나를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생각보다 더 맛이 괜찮았다. 이브는 재빨리 에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소시지를 입에 넣었다. 기름진 소시지와 상큼할 정도로 청량한 맥주는 환상의 조합을 자랑하고 있었다.

“집에서 굶기기라도 하는 건가?”

“무슨 헛소리야?”

“이렇게 잘 먹는 아가씨는 본 적이 없어서.”

“보통 다들 이 정도는 먹어. 이 양반 이거, 여자를 진득하니 만나본 적이 없으시고만?”

“으음.”

바실리오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에일 잔을 들었다. 이브 역시 픽 웃으며 잔을 비웠다. 한동안 말없이 술과 안주를 축내고 있던 두 사람이 에일 잔을 한 잔씩 더 시켰을 무렵이었다.

“이름이 뭐야?”

“바스카라고 불러줘.”

“그거 말고, 진짜 이름.”

“음, 진짜 이름 맞는데. 레이디들에게만 알려주는 애칭이지.”

이브는 자신을 바스카라고 소개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말문을 뗐다.

“강 동쪽 지역에서 내가 아는 여자애가 사라졌어. 갱단에 의한 인신매매일 가능성이 크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그 아는 여자가 창녀라면 죽었을 거고, 자유민이라면 인신매매가 맞겠지.”

“확신해?”

“8할 정도.”

“흐응…….”

뒷골목 거대 마피아 집단의 두목이 8할이라고 말했으면 정말 높은 확률이었다. 이브는 마리아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안나를 달랠 때만 하더라도 별일 없을 거라고 말은 했으나 마리아가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사내가 인신매매가 맞을 거라고 확신하는 순간, 이브는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빠르게 에일을 벌컥벌컥 들이켠 후 다시 물었다.

“다 알고 왔지?”

그 물음에 바스카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려 보였다. 어둠 속에 잠기면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흑표범 같은 사내가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이브는 맥주를 들이켜며 정보를 재촉했다. 바스카는 잠시 입을 다물고 주변의 소음을 가늠해보는 듯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술집의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그는 입을 열었다.

“요즈음 갑작스럽게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는 패밀리가 있어. 엑세트라 출신 뱀 수인들이 만든 바이퍼 패밀리라고. 놈들이 최근 인간 여자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돌더군. 항구를 통해 수출한다던가.”

“인신매매를 국제적으로? 미쳤나 보네.”

“제국 내에서 매매하는 것보단 외국으로 넘기는 게 돈이 더 되거든. 게다가 아직은 선박이 육로보다 상대적으로 밀수하기가 쉽기도 하고. 특히 인간을 실어 나를 때 말이지. 바닥을 이중으로 만들어도 배의 크기가 크다면 그리 크게 티가 나지도 않고.”

“대체 무슨 목적으로 여자들을 해외로 팔아넘기는 거래?”

“목적이야 여러 가지지만, 「제국산」 여자는 자국 여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아름답고 고분고분할 거라는…… 그런 편견 아닌 편견 같은 게 있다더군. 상등품 취급을 받는다나.”

인간에게 산지를 낙인찍어 품질을 논하는 이들이 여기에도 존재했다. 흉내 내지 않아도 구역질이 절로 올라왔다. 이브가 벌레를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모욕감이 역한 냄새를 풍기며 목 위로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너도 사람을 팔아본 적 있어?”

남은 맥주를 단숨에 비워낸 이브가 쏘아내듯 질문을 던졌다. 바스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내 윗대야 어땠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어엿한 금융기업이라서. 약이나 사람같이 위험한 품목엔 손대지 않아.”

“고리대 돈놀이도 질이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적어도 불법은 아니지.”

이브의 표정이 착잡함으로 물들었다. 그런 그녀를 즐거운 듯 바라보던 바스카가 맥주를 한 잔씩 더 시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목표한 수량을 모으면 바로 서쪽 항구 도시로 향하겠지. 배가 뜬 다음은 늦어. 육지에 있을 때 잡아야 할 거야.”

“짐작되는 날짜라도 있어?”

“한 달을 넘기진 않겠지.”

“위치는?”

“하하, 바닥까지 털어갈 생각인가?”

“그 바이퍼라는 패밀리, 너희 단체랑 반목하는 그룹이잖아. 손 안대고 코 풀 기회 아닌가?”

바스카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뱀과 늑대가 상극이라는 사실은 이브도 잘 알고 있었다. 이브는 심드렁한 표정을 꾸며내며 말을 이었다.

“이쪽에서 사람 풀어서 찾아도 결국은 찾게 되어 있어. 네게 협조를 구하는 건 조금 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일일 뿐이야. 정보를 제공할 생각이 없다면 여기까지 하지.”

“성격이 급하군, 아가씨.”

“이브라고 불러.”

“좋아. 이브. 바이퍼라는 단서를 주었지만 생각보다 찾기 힘들 거야. 제법 본격적으로 덩치를 키워나가고 있어서 놈들이 관리하는 지역도 꽤 수가 되거든.”

“그래서?”

“켈버튼 중동부, 실링스의 옛 지구 농지에 유령이 나온다는 폐헛간 부지가 있어. 원래는 양을 키우고 밀을 재배하던 땅이었는데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서 결국 폐허가 되었다고 하더군. 마지막 주인이 드넓은 농지의 밀들을 모두 불태우고 자살을 했다나 뭐라나.”

“쓸데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워.”

“유령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에 약한 지주의 손자가 결국 그 땅을 팔아치우고 말았지. 누가 사들였는지는 대충 알겠지?”

“켈버튼이면 론디니움에서도 그리 멀지 않네. 여기서 대상을 물색해 납치해서 바로 아래로 내려간 거구나.”

이 남자는 이미 이브가 누굴 찾고 있는지,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범인은 누구인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얼마나 이브 혹은 베르묄 가문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순수하게 힘과 금전의 논리로 움직이는 사내가 이렇게 순순히 정보를 제공한 것은 그들의 적대 세력을 손 안 대고 치워버릴 좋은 기회이기 때문일 터였다. 게다가 먼저 선뜻 정보를 털어놓은 후 무슨 대가를 요구할지 알 수 없었다.

꼭두각시가 된 듯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 순간 이브가 주문하지 않은 에일 잔이 새로이 놓였다. 이브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니 바스카는 손바닥을 내보이며 마시라는 듯 손짓했다. 이브는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에일 잔을 거칠게 잡아채 맥주를 목 뒤로 쏟아붓듯이 마셔댔다. 순간 혀에 닿아오는 액체에서 이전까지는 느낄 수 없었던 미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여긴 자주 오는가 봐?”

“이쪽에서 관리하는 사업장이다 보니, 아무래도.”

“으흠.”

이브의 손이 울퉁불퉁한 저급 유리잔의 표면을 더듬었다. 추천 메뉴를 조금의 지체도 없이 턱 내놓은 것을 보면 거짓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곳에서 무슨 수작을 벌인다고 해도 이브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이브의 입에서 돌연 킥킥,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어디에도 긴장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나 마셔댔는지 혀가 풀린 이브를 둘러메듯 부축한 바스카가 펍 위로 연결되어 있는 여관방으로 올라갔다. 여전히 이브는 중언부언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그의 부축을 받아 비틀비틀 걸었다.

“아, 에바라고. 이 거지 같은 십망겜. 사지절단 엔딩이 말이 돼? 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아니 아무리 피폐물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여주인공 팔다리를 자를 생각을 하냐고오오! 그게 무슨 게임이야 멘탈 고문이지 스으발! 개발자는 입이 있으면 지껄여봐라!”

그녀의 혼잣말 7할 이상은 알아듣지도 못할 단어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바스카는 3층의 가장 넓은 방 안으로 들어가 어깨에 두르고 있던 이브의 팔을 풀어 침대 위로 던지듯이 눕혔다.

“이렇게까지 겁을 상실했을 줄이야.”

잘 교육받은 귀족가의 영애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품위 없고 수더분한 여자였다. 그냥 길에서 마주쳤다면 시선조차 주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털털하고 격 없어 보일지라도 그녀는 그 푸른 피의 일원이었다. 고귀한 피를 가진 순진한 귀족 처녀를 제 마음대로 휘둘러 엉엉 울릴 생각에 사내는 꽤나 들뜬 기색이었다.

애초에 오늘 그가 외출을 감행한 목적은 이벨린 베르묄이 외출을 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강 동쪽으로 향하는 그녀의 움직임을 포착한 끄나풀들이 재빠르게 그녀의 행적을 알렸고, 그간 그녀의 꼬리를 밟는 것조차 힘들었던 그는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반쯤은 변덕을 부리는 마음으로 직접 몸을 움직이게 되었다.

처음엔 황태자와 베르묄 소공자가 그렇게 꼭꼭 숨긴 여자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약점을 잡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가볍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지만.

그는 먼저 이브의 무기를 풀어 저 멀리 던져버리고는 재킷을 벗겼다. 이런 평민들이나 입을 법한 구질구질한 것을 잘도 구했다는 생각을 하며 벗긴 외투를 침대 바닥 아무 데로나 내던졌다. 바스카, 바실리오는 그대로 이브의 몸 위에 올라타 제 먹빛 코트도 벗어 저만치 던져버린 후 제 셔츠 단추를 하나둘 끌러 내리며 앞섶을 풀어 헤쳤다. 잘 짜인 가슴근육이 흰 셔츠 안에서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뭐야.”

목덜미 근처에서 움직이는 셔츠 자락 때문에 간지러움을 느꼈는지 약간 정신을 차린 이브가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제 목 근처에서 조끼의 단추를 모두 끌러내고는 셔츠 여밈에 손을 대고 있던 사내의 멱살을 와락 틀어쥐었다. 바실리오는 그녀에게 상냥한 척 웃어 보이며 속삭였다.

“긴장 풀어, 아가씨.”

“너어…….”

“얌전히 있으면 아프게는 하지 않을 테니까.”

바실리오는 이브의 턱을 틀어쥐고는 그대로 그녀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파묻었다. 순식간의 도톰한 살덩이들이 맞물리고 짙은 한숨이 서로의 혀를 자극했다. 바실리오는 이브의 옷을 한 꺼풀씩 벗겨나가며 이브의 입술을 머금었다.

바실리오의 예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입술을 맞이하는 이브의 태도가 여타 아가씨들의 반응과는 크게 달랐다는 점이다. 이브는 울거나 소리 지르지 않았다. 그를 밀쳐내려 안간힘을 쓰지도,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지도 않았다.

이브는 술이나 약에 취한 멍한 표정이 아닌, 어딘가 여유 있는 느긋한 얼굴로 손을 뻗어 바실리오의 머리채를 휘감아 당겼다. 그녀의 혀는 적극적일 정도로 남자의 입 안을 자극하고 있었다. 명백히 이브의 움직임은 입을 맞추는 법을 알고 있는 여자의 그것이었다.

적극적일 정도로 성큼 다가오는 이브의 태도에 단숨에 두 사람의 포지션이 뒤바뀌었다. 어쩐지 다급할 정도로 몰아치는 입맞춤이었다. 이가 이에 닿기도 했고, 입술이 제대로 맞물리지 않아 영 엉뚱한 곳을 머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이브의 혀는 착실히 상대의 말랑한 살덩어리를 물고 휘감았다.

바실리오는 혀뿌리를 아플 정도로 당기던 그녀의 혀가 돌연 입천장을 간질이며 부드럽게 자극하는 것을 느끼다가 새삼스럽게 제 입천장이 꽤나 민감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흣, 후우…….”

“하아…….”

잠시 두 사람의 입술이 얇은 은사를 사이에 두고 질척한 촉,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바실리오는 어느새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어 제가 그녀의 아래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얼떨떨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브가 타액으로 젖어 촉촉한 바실리오의 아랫입술을 한번 핥아 올린 후 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입 안에서 욕설을 웅얼거렸다.

그녀의 능숙한 리드에 바실리오가 당황한 낯을 숨기며 나직이 속삭였다.

“하아……. 한두 번 놀아본 솜씨가 아닌데.”

“하하, 이 좆만 한 새끼가. 아가릴 함부로 놀리네.”

바실리오의 배 위에 걸터앉아 있던 이브가 눈을 접어 웃었다. 부드러운 웃음과는 전혀 딴판인 원색적인 욕설에 바실리오가 잠깐 제 귀를 의심하고 있던 찰나였다. 돌연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뺨에 불벼락처럼 단단한 주먹이 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컥, 커헉……!”

“이 씹새끼, 술에 약을 타? 너 나 기절시켜서 뭐 하려고 했냐?”

“이런, 미친……!”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약 먹여 떡 된 여자 데리고 뭐 하려고 했냐고. 섹스는 멀쩡한 정신으로 서로의 의사를 충분히 물은 후에 시작해야 한다고 너거 애비가 안 알려주디?”

이브가 맛이 간 눈빛으로 무차별적인 주먹질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그의 뺨과 광대, 입가가 찢어지고 새빨갛게 물들었다. 무자비한 폭행에 질겁한 바실리오가 욕설을 내뱉으며 발버둥을 치고 이브의 손목을 억세게 잡아 눌렀다. 이브는 우습다는 듯이 남자의 손아귀를 팔을 휘둘러 털어버린 후 재빨리 그의 머리채를 잡고 쥐어 뜯어버릴 듯이 옆으로 꺾었다.

“이 새끼가……? 야, 너 나랑 자고 싶어서 이 지랄 떤 거 아냐? 그런데 왜 이렇게 반항이 심해? 좆같게 굴지 마, 기분 개 같으니까.”

이브는 술에 약을 탔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것을 삼켰다. 그녀가 가진 각종 패시브 스킬 중 하나가 독 저항 패시브 스킬이었기에, 이브는 결코 허접한 마비약 따위에 중독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전 삶에서 각성한 신체능력 중 하나였고, 이브가 된 이후로 자각한 능력이기도 했다. 알코올을 독으로 치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아주 유용한 능력이었다.

알코올은 독으로 치지 않는 패시브 스킬 덕분에 이브는 주영이었을 때부터 술만 마셨다 하면 눈이 뒤집혀 미쳐 날뛰었고, 술을 마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미친개가 미친개 했다며 수군대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의외로 알코올에 약했다. 그것도 아주 안 좋은 방향으로.

“와, 머리 어지러운 것 봐. 대체 얼마나 술을 퍼먹인 거야? 말해봐. 내가 얼마나 먹었어?”

“시, 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개새끼야, 네가 먹였으니까 알겠지. 그럼 술에 꼴은 내가 알겠냐?”

짜악, 짜악! 그 와중에도 이브의 손은 쉬지 않고 바실리오의 뺨을 제법 아프게 후려쳤다. 그는 이를 악물고는 간신히 이브의 손을 뿌리쳐 그녀를 밀쳤다. 침대 옆으로 밀려 나동그라진 이브는 취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빨리 몸을 일으켜 그대로 침대 밖으로 벗어나는 바실리오의 등을 강하게 발로 후려 찼다.

뻐억, 하고 강렬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진 바실리오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졌다. 이브는 침대 아래로 내려가 그대로 제법 뾰족한 구두코로 바실리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는 발길질에 결국 바실리오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커, 흑! 커허, 크흣……!”

“씨발, 이게 어디서 등을 보여. 야, 한번 하자며. 개새끼야.”

“미친, 크윽…….”

“하하하! 뚫린 입이라고.”

이브는 본능적으로 앞으로 기어서라도 도망치려는 바실리오의 머리채를 강하게 휘감아 잡고 뒤로 거세게 잡아당겼다. 덩치가 큰 사내라 그런가 생각하던 것만큼 마구 휘두르기는 힘들었지만, 그럭저럭 제압할 정도는 되었다. 이브는 그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은 채 다시 발을 들어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퍼억,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돌연 남자가 번개같이 이브의 다리를 걸었다. 술을 마신 상태라 균형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이브의 몸이 손쉽게 바닥을 굴렀다. 두 사람은 바닥을 구르며 서로 주먹을 내지르고, 발을 뻗어 걷어찼다. 이브와 바실리오의 몸뚱이가 이리저리 엉켜 마구잡이로 서로를 두들기고 할퀴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난전이었다.

겨우 고지를 점한 바실리오가 흉흉한 살기를 드러내며 이브의 배 위에 올라타 앉았다. 그는 커다란 손아귀로 그녀의 목을 조르며 반대편 손으로는 그녀의 뺨을 한 차례 때렸다. 이브는 얼굴 위로 떨어지는 통증과 목이 졸리는 고통을 참으며 남자의 손을 떼어내려고 노력하는 대신 주먹을 휘둘러 바실리오의 갈비뼈 부근을 강하게 후려쳤다. 목 위를 죄어오던 강한 압박감이 약해졌다. 이브는 그대로 후려쳤던 옆구리에 한 번 더 주먹을 내질렀다.

“컥, 크흑……!”

바실리오는 믿기지 않는 강렬한 통증에도 이를 깨물며 억지로 고통 섞인 신음을 참아낼 뿐,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러나 이브는 목을 조이는 힘이 많이 약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브는 다시 한 번 그의 갈비뼈 위로 강하게 주먹을 메다꽂았다. 뼈가 부러졌다는 확신이 든 순간, 바실리오의 몸이 나가떨어졌다.

“끄, 흑……. 미, 친……!”

“커흑, 콜록, 컥……! 이런 개새끼, 넌 뒤졌어.”

이브가 콜록콜록, 밭은기침을 토해내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이브는 발을 들어 두세 차례 바실리오의 몸을 콱콱 짓밟고 거세게 발길질했다. 이브가 발을 움직일 때마다 끅끅 넘어가는 앓는 소리가 발아래에서 터져 나왔다. 이브의 얼굴이 폭력에서 기인한 쾌감과 희열로 물들었다. 그녀의 안에서 이성을 잃은 짐승이 난폭하게 날뛰고 있었다.

“이 좆같은 새끼…….”

이브는 혀를 굴려 이에 긁혀 찢어진 입 안쪽의 연한 살을 더듬어보고는 그대로 핏물 섞인 침을 바닥에 탁 뱉었다. 입가가 조금 찢어진 것 같지만, 상관없었다. 이브는 다시 남자의 복부를 있는 힘껏 발로 걷어찼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바실리오의 몸이 한차례 굴렀다. 숨이 턱 막히는 고통에 그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한바탕 뒹구느라 어느 정도 이성이 돌아온 이브가 조금 전보다는 멀쩡해 보이는 걸음으로 바실리오에게로 다가갔다. 남자는 지독한 통증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씨발, 숙녀 얼굴에 상처를 내놨네? 너 이 새끼, 이거 어쩔 거야? 엉?”

“숙…… 씨발, 숙녀 같은 소리……. 큭…….”

“하하하, 이 개새끼가.”

이브는 억지로 웃는 소리를 흉내 내고는 바실리오의 다리를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발목을 쥔 이브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낀 그의 낯이 조금 질린 듯 보였다.

“무슨……!”

“발목 하나로 퉁칠게. 공평하지?”

“씹, 웃기지……!”

이브는 그대로 손에 힘을 주어 남자의 발목을 꺾었다. 이런 건 요령이 필요했다. 한 점을 노리고 단숨에 발목 관절을 뒤틀어 분지른 이브의 무자비한 손속에도 바실리오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목을 울리며 고통 섞인 울음을 억지로 삼켜냈다.

끙끙 앓는 소리를 흘리면서도 큰 비명 한번 지르지 않는 남자의 인내심에 이브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눈을 빛냈다. 그가 얼마나 더 참아낼 수 있을지 무척 기대가 되었다.

바실리오의 발목 관절을 완전히 비틀어놓은 이브는 헐떡이고 있는 바실리오의 멱살을 쥐고 강제로 옷을 좌우로 잡아 뜯었다. 미처 다 풀지 못한 셔츠 단추 몇 개가 투둑, 떨어져 나갔다. 그대로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이브가 바실리오의 등 위에 무릎을 꿇어 체중으로 짓이긴 상태에서 셔츠를 몸뚱이 위에서 벗겨 내렸다.

“큭, 무슨, 무슨 짓을……!”

“네 소원대로 이제부터 섹스할 거거든? 어때, 기대되지 않아?”

이브는 여상한 태도로 말하며 몸을 낮추어 무릎으로 바실리오의 등허리를 내리눌렀다. 곧이어 이브는 얇은 허리띠를 풀어 긴 가죽으로 그의 손목을 뒤로 돌려 강하게 옭아맸다. 그녀의 손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틀거리는 바실리오의 반항을, 목 뒷덜미를 짓누르는 것으로 손쉽게 제압한 이브는 그대로 반대편 손을 몸 앞으로 쑤셔 넣어 그의 바지 여밈을 풀어 헤쳤다. 오래 걸리지 않아 바실리오의 하체에서 바지와 속옷이 모두 벗겨져 무릎 아래까지 내려가버렸다.

“큭. 이런 씹, 정신 나간 년이……!”

“아 새끼……. 시끄러워 죽겠네.”

이브는 벗겨낸 그의 셔츠를 대충 구깃구깃 뭉쳐 바실리오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완전히 사로잡힌 짐승 꼴이 되어 바닥에 얼굴이 짓눌린 바실리오의 낯에 희미하게 불안감과 공포, 흥분이 이리저리 뒤얽혀 떠올랐다.

“그냥 강제로 박아 넣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너 같은 새끼한텐 뒤로 느껴서 질질 싸는 게 더 쪽팔리고 부끄러운 일이겠지?”

이브가 달아오른 얼굴로 희열에 들떠 중얼거렸다. 이브는 허리춤에 매어놓았던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휘적대더니 곧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그녀의 손에는 화학약물을 입혀 코팅 처리를 한 얇은 아마포 장갑과 머릿기름으로 쓰라고 메이드에게 받았던 향유가 들려 있었다.

“반항하면 반대편 다리도 부술 거야. 얌전히 있어야 해, 알았지?”

부드럽게 속삭인 이브가 바실리오의 몸 아래로 내려가 다리를 벌리고 그의 오금 위에 엉덩이를 내려 걸터앉았다. 어느새 오른손에 장갑을 착용한 이브가 유리로 만들어진 향유 병의 뚜껑을 열고 살짝 향기를 맡아본 후 그대로 그것을 오른손 위에 넉넉히 부었다. 미세한 장미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브는 바실리오가 알아듣지 못할 가락을 흥얼대며 주먹을 쥐고 손가락끼리 서로 문질러 최대한 고루 기름이 묻도록 했다.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간 향유는 바실리오의 둔부 위로 뚝뚝 떨어졌다.

몇 번이고 바실리오가 꿈틀거리며 몸을 뒤틀려고 시도했으나 부러진 갈비뼈와 뒤로 묶인 손 때문에 상체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듯 보였다. 이브는 바실리오가 날뛸 것을 대비해 몸을 약간 일으켜 그의 등을 짓누르며 동시에 엉덩이 골 사이로 천천히 중지를 밀어 넣었다.

“윽! 크, 으욱!”

바실리오가 화들짝 놀라 고함치는 듯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입 안 가득 천이 물려 있어 웅얼거리는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브에게는 처음 핑거링을 당하며 팔짝 뛰는 남자들의 반응이란 퍽 익숙한 것이었다. 강하게 다물려 있던 뒷구멍을 강제로 열어 파고들어 간 손가락은 힘이 들어가 움찔대고 있는 내벽의 안을 빙글 굴리며 더듬어나갔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이물감에 당황한 바실리오의 몸이 마구잡이로 움직였다. 이브는 더욱 강하게 그의 등을 내리누르며 구멍 안을 꾹꾹 마사지하듯 누르고 비벼가며 자극했다. 그때마다 남자의 몸이 반쯤 일어나 펄떡이다가 다시 바닥에 강제로 처박혔다.

“으훅, 흐…… 크으……!”

“대충 여기쯤이었는데…….”

이브가 이리저리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어느 지점을 강하게 문지르자, 순간 아래에 깔린 남자의 움직임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브는 긴가민가하며 제가 쑤신 지점을 문지르고 굴리며 괴롭혀대기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바실리오의 허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남자 몸 안에는 전립선이라는 게 있어서, 이렇게 후장 안을 쑤시고 문질러주면 자지러지게 좋다고 하더라고. 어때? 좋아?”

“흑……! 끄으, 크훅…….”

입 밖으로 간신히 숨을 토하는 소리만이 들렸다. 향유가 잔뜩 발려 미끈미끈한 장갑이 찔걱찔걱 젖은 소리를 내며 어렵지 않게 안과 밖을 오갔다. 꾹 다물려 있던 근육이 마사지를 받아 점점 부드럽게 풀리고 있었다. 푹푹 쑤셔오는 손가락이 안쪽 기분 좋은 곳을 긁고 지나갈 때마다 바실리오의 숨소리가 한층 거칠어졌다.

몸속 어딘가에 있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작은 버튼이 마구 짓눌리며 강제로 성감이 끌어올려지는 감각이 남자를 엄습해왔다. 배 안쪽 깊은 곳이 아릿한 쾌감을 품고 등허리의 척추를 간질이는 것 같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바실리오는 바닥에 짓눌려져 있는 성기가 발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충격적인 일이었다.

끅끅 하고 숨 넘어가는 소리에도 이브는 손가락을 안에 푹 찔러 넣고 바실리오의 허리를 파드득 떨게끔 만드는 극점을 찾아 뭉근히 문질러주었다. 어느새 뒤를 파고든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나 있었다. 한 번도 외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근육이 우물우물 힘겹게 이브의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얇은 리넨 장갑 너머로 따듯하고 부드러운 내벽이 손가락을 물어오는 것이 전해졌다.

바실리오는 강제적으로 뇌에 꽂혀오는 끔찍할 정도의 쾌감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눈치였다. 언제나 모두의 위에서 군림하던 알파 수컷이 자신보다도 체구가 작은 여인의 몸 아래 뭉개져 뒷구멍으로 전해지는 감각에 흥분을 느끼고 있다는 이 상황이 그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몸은 착실히 이브가 주는 쾌감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뒤를 자극당해 앞을 세우는 경험은 겪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성기가 부풀어 오를수록 몸 아래에 짓눌려지고 있는 압박감이 묘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더 이상 그는 아무런 생각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으! 으흐, 크……! 흐욱……. 흐……. 후으…….”

“쌀 것 같아? 이런, 안 되는데.”

뒤를 쑤셔지며 목구멍이 졸린 듯 억눌린 숨소리를 뱉어내는 바실리오의 뒤통수를 흘끗 한번 본 이브는 내벽이 강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끼고는 살짝 손을 뺐다가 다시 안으로 꾸물꾸물 집어넣었다.

어느새 구멍 안을 쑤시는 손가락이 세 개가 되어 있었다. 이브의 손가락이 가위질하듯 그의 배 안을 강제로 벌렸다가, 추삽질을 하며 연한 내벽의 살을 거칠게 긁기도 하며 자극해나갔다.

한참 공을 들인 끝에 바실리오의 몸이 녹진히 풀린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이미 반항할 의지를 잃은 채 움찔움찔 뒤를 조여대며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덜덜 떨고 있었다.

“짐승 새끼들은 감이 좋아. 누가 피식자고 누가 포식자인지 인간보다도 더 빠르게 파악하고 꼬리를 말잖아.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갈고닦은 본능 같은 거겠지.”

“후우, 흐우……. 크르…….”

“그런 의미에서 너는 참 열성 잡종답다고 해야 할지……. 상황 파악도, 주제 파악도 못 하고. 하긴 말만 늑대 수인이지, 사실 노팅도 못하는 반편이에게 뭘 바라겠어. 안 그래?”

이브가 남자의 상처를 푹푹 후벼 파는 말을 내뱉으며 킥킥 비웃음을 흘렸다. 미친 또라이에게도 사연이 있는 게임답게 바실리오에게도 삐뚤어질 수밖에 없었던 뒷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동정의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이브는 게임을 하며 알게 된 그의 약점을 무기 삼아 남자를 조롱했다.

“이 잡종 똥개만도 못한 새끼가. 애비 잘 만나 인생 날로 먹은 주제에 모가지가 상당히 뻣뻣해, 응? 네가 전 보스의 유일한 아들이 아니었다면 네 똘마니들이 널 섬겼을 것 같아?”

“크흐……! 크윽! 흐욱……!”

“좆도 아닌 게 어디서 이를 드러내? 넌 진짜 오늘 뒤졌다고 복창해라. 뒤지게 따먹어줄게, 기대해.”

남자가 가장 치부로 여기는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까발린 이브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이브의 손가락이 둔부 사이의 뒷문 안에서 찌걱 소리를 내며 스르르 빠져나왔다.

곧이어 질척하게 젖은 리넨 장갑을 벗어 뒤쪽으로 던진 이브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신경접속형 모조성기를 꺼내 들었다. 이브는 제 바지 여밈을 풀어 헤쳐 배꼽에서 한 뼘 정도 더 내려간 도톰한 둔덕 위로 모조성기를 부착하고는 버튼을 꾹 눌렀다. 알딸딸한 상태여서 그런지 마도구로 느껴지는 감촉이 마도구상점에서 느꼈던 것보다 한층 더 강렬하게 와닿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도 곧 엉엉 울게 만들어줄 테니까.”

술기운이 잔뜩 퍼져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인 이브가 몸을 움직여 모조성기에 남아 있던 향유를 듬뿍 뿌렸다. 다시금 약한 꽃 내음이 얼핏 맡아졌으나 그것을 느낄 새도 없이 천천히 묵직한 모조성기가 바실리오의 둔부 위를 문질렀다.

“크……! 으욱! 웃! 흐우……!”

“와아……. 씨발, 이거 진짜 꼴린다…….”

이브가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허리 아래에 달린 것을 부드러운 살 위에 문질렀다. 마치 제 피부인 듯 모조성기 바깥에서 느껴지는 감촉들이 여과 없이 이브의 뇌로 전해졌다. 이브는 잔뜩 치밀어 오르는 기대와 흥분에 가늘게 허리를 떨며 모조성기의 선단을 구멍 위에 맞추어 느릿하게 비볐다.

조금 전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는지 바실리오의 몸이 다시 거세게 푸드덕대기 시작했다. 강한 반항에 잠깐 인상을 쓴 이브가 주저 없이 장난감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다물려 있는 뒷문 안쪽으로 꾸욱 밀어 넣었다.

“읏, 좁아……. 힘 풀어, 새끼야……!”

“컥, 흐으……!”

“으 미친. 힘 빼, 착하지? 뒤에 힘 빼라고.”

고작해야 선단 앞머리가 한 마디 정도 들어갔을 뿐이다. 생각보다도 더 강한 압박감이 신경을 타고 전달되는 느낌에 이브는 인상을 마구 구기며 남자의 엉덩이를 매섭게 내려쳤다.

짜악, 짝 하는 마찰음이 연이어 터지자 움찔움찔하고 모조성기를 강하게 죄어오던 근육이 힘을 주었다 풀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이브는 타이밍을 잘 맞추어 그의 몸에서 약간 힘이 빠졌을 때 강하게 허리를 안으로 박아 넣었다.

“……!”

이브는 제 아래에 깔린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불편한 자세, 불편한 위치에서 굵고 단단한 모조성기를 뿌리까지 받아들인 바실리오의 몸이 쪼개질 것만 같은 고통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몇 번 쑤시다 보면 기분 좋아지겠지……. 아니면 말고.”

이브는 남자의 몸 위에 타고 오른 채 그의 머리통을 바닥에 짓누르며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들어 올렸다. 이브의 강압적인 손길로 인해 딱딱한 맨바닥에 얼굴을 꾸깃꾸깃하게 짓눌린 남자는 엉덩이만을 추켜올린 채로 이브를 받아들였다.

몸으로 쏟아지는 고통에 그는 저도 모르게 눈에서 후드득 굵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남자의 눈 흰자는 핏줄이 다 터져 온 눈이 빨갛게 보일 정도였다. 그가 느끼는 것은 오로지 고통과 모욕감 그리고 원인 모를 괴로운 쾌감뿐이었다.

“잘 받아먹으면 한 번 정도는 자지 만져서 싸게 해줄게. 그전까지는 뒤로만 싸는 거야. 알겠지?”

지독할 정도로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바실리오는 질끈 두 눈을 감아버렸다. 이곳은 완벽한 지옥이었다.

“아, 크웃, 아! 하아……!”

“하……. 절경이네. 어때? 좋아?”

“읏, 흐으……! 아! 아윽!”

이브의 허리가 앞으로 퍽 치받쳐 들어갈 때마다 남자의 입 안에서 달뜬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바실리오의 입을 막고 있던 셔츠는 어느새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바실리오는 뒤에서 거대하고, 굵고, 묵직한 것이 구멍 바깥으로 빠져나갈 때마다 제 안쪽 내벽의 살들이 지익 딸려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다시 그것이 강하게 쾅! 하고 배 안을 짓이기며 들이칠 때마다 뱃가죽이 뚫려버릴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불로 달군 쇠방망이 같은 것으로 뒤를 쑤셔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남자의 성기는 배 위까지 꼿꼿이 올라붙어 마치 눈물을 흘리듯 투명한 액체를 바닥에 뚝뚝 흘려대고 있었다. 거대한 맹수에게 산 채로 씹혀 잡아먹히는 것 같은 본능적인 두려움이 기이하게도 쾌감이 되어 다가왔다.

순간, 다시금 두꺼운 모조성기가 그의 내장 안쪽으로 쿵, 거세게 밀려들어 왔다. 바실리오는 차가운 바닥에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며 짐승처럼 흐느꼈다. 느끼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뒷구멍을 강제로 여는 그 폭압에 흥분하고 있었다. 평생을 무리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는 알파 수컷으로 살아온 남자에게는 고역스러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찔걱찔걱 하고 젖은 살을 마구 문지르는 마찰음과 쾌락에 잠겨 헐떡이는 낮은 음역의 허스키한 목소리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사내의 몸 깊은 안쪽에서 계속해서 문질러져 끈적해진 향유와 몸 안에서 배어 나온 장액이 이리저리 뒤섞여 구멍과 장난감이 맞물린 비좁은 틈새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두꺼운 것이 안을 마구 문지르고 쑤시며 내벽을 긁어대는 통에 기분 좋은 부분이 자꾸만 자극되어 성기가 꺼떡여댔다. 고통스러울 정도의 쾌감이었다.

“잔뜩 섰네? 오늘 처음 만난 여자한테 뒷구멍 쑤셔지면서 발기한 소감이 어때? 응?”

“흐, 우윽……! 그만, 좀……!”

“아……. 네 구멍 엄청 조인다……. 기분 좋은가 보네? 나도 기분 좋아. 뜨겁고, 부드럽고. 이런 느낌이구나.”

몸 안 깊은 곳을 향해 푹푹 찍어 올리는 허리 짓에 이를 득득 갈던 바실리오는 참지 못하고 다시 한숨 섞인 신음을 흘려내고 말았다. 기분 좋은 극점만을 요령 좋게 후비고 문지르는 움직임은 그녀가 한두 번 남자의 뒤를 탐한 게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제 뒤에 올라탄 여자는 솜씨가 좋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큿, 흐윽……! 아! 잠, 아……! 안 돼……!”

이브는 잠깐 여유가 생길 때면 살기를 흘려대다가도 엉덩이를 쑤셔주면 곧 꼬리를 말고 버둥대며 울부짖는 남자의 추태가 우스웠다. 전립선이 강하게 짓이겨질 때마다 그는 머리를 비운 채 무의식적으로 울음소리만을 토해냈다.

점점 이브의 허리 짓이 빠르고 깊어졌다. 바실리오의 허벅지 근육이 잔뜩 긴장해 단단해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곧. 이브는 짓궂게 웃고는 그의 허벅지 안쪽 약한 살을 쓰다듬어주며 그의 몸 안으로 파고드는 행위를 이어나갔다. 살갗이 서로 강하게 맞부딪쳐 철썩이는 소리와 흥분에 잠긴 한숨 소리, 달뜬 울음소리가 방 안을 후덥지근하게 달궜다.

“아아, 하윽! 아! 으응, 읏……!”

“갈 것 같아? 네 앞 좀 봐, 터질 것 같네.”

“후으……. 흣, 아닛, 응, 으욱……! 아니, 야……! 아! 아아!”

“남자란 참 불쌍한 동물이야……. 싫다고 엉엉 울면서도 전립선 꾹꾹 만져지는 것만으로도 흐물흐물 녹아버리고 말이지. 치태도 이런 치태가 없어.”

“흐응, 아! 아흐……!”

“이렇게, 후우……. 이렇게 쑤셔 박으면 좋아서 질질 싸는 주제에. 개새끼처럼 자빠져서 엉덩이 구멍으로 교미당하고 있는 게 그렇게 좋아? 응?”

“후, 흐으……! 응, 크, 흐윽……!”

“좋아 죽겠나 보네. 침까지 질질 흘리고 있잖아, 더럽게.”

이브의 조롱을 들은 사내가 몸을 바르작대며 무슨 말을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볼이 바닥에 짓눌린 탓에 잘 알아듣지는 못했다. 이브는 기분 좋게 웃으며 허리를 더욱 강하게 안으로 처박았다. 순간, 남자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허리가 파드득 휘었다. 곧이어 마도구를 통해 구멍 안쪽 내벽이 경련하듯 움찔대며 강하게 조여드는 감각이 전해져왔다. 이브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던 속도를 늦추며 아래로 고개를 기울였다. 바닥에 잔뜩 흩뿌려진 백탁액이 보였다.

“보여? 바닥에 네가 싸지른 거. 앞은 한 번도 만져준 적 없는데 후장으로만 간 거야. 대단하지 않아? 뒷구멍으로 좆 받는 데에 재능이 있네.”

“흣, 아……. 하아…….”

“너, 거칠게 다루면 다룰수록 자지 세우는 거 알아?”

이브가 달게 속삭이더니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로 한번 정액을 토해내 숨을 쌕쌕 고르고 있던 바실리오의 뒷머리를 한 움큼 틀어쥐었다. 그는 반항하려는 듯 잠시 몸을 뒤틀었으나 결국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그들이 굴러떨어지기 전 입을 맞추었던 침대 위였다.

“실은 네 안에 잠재되어 있었던 거지. 누군가 너보다 더 강한 사람에게 힘으로 제압당해 난폭하게 다뤄지고 엉망진창으로 범해지고 싶은 판타지가.”

“개, 읏, 개 같은 소릴…….”

“아까부터 목조를 때마다 뒤가 엄청 조이던데, 못 느꼈어? 내가 마구 엉덩이 안을 괴롭힐 때마다 자지가 꺼떡거리던 건? 엉덩이에 힘 안 풀어서 찰싹찰싹 후려 맞을 때마다 앙앙 우는 소리 내던데. 의식 못 하고 있었지?”

“큭…….”

“어때? 한 번 더 해볼까? 장난감으로 뒷구멍 푹푹 쑤셔서, 또 죽을 만큼 기분 좋게 만들어줄게.”

바실리오의 얼굴이 분노와 치욕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그러나 갈비뼈 두 대가 금이 가고, 발목뼈가 으스러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몸이라도 성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바실리오의 얼굴에 절망과 체념의 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순간, 이브의 입술이 깊게 호선을 그렸다.

남자는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잃은 후에야 이브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참을 다리 아래에서 흔들리던 바실리오가 정신을 잃고 늘어지는 것을 확인한 이브는 입맛을 다시며 그의 몸 안에서 빠져나왔다.

대충 제 물건들을 정리해 챙긴 이브가 풀어 헤쳤던 셔츠의 단추를 다시 제대로 채우고, 바지의 앞섶을 단정히 여몄다. 침대 위에 기절한 듯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는 짙은 피부색의 남자를 흘긋 보다가 바실리오가 저쪽 바닥 구석에 내팽개쳤던 제 재킷을 집어 들었다. 옷을 탁탁 털어 먼지를 털어내고 그것을 주섬주섬 꿰어 입고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그냥 풀어두면 분명 후폭풍 장난 아닐 텐데.’

술에 취해 있을 때는 눈앞에 보이는 게 없어서 조금 과하게 날뛰는 게 문제였다. 마구잡이로 주변에 피해를 주는 편은 아니었지만, 공격이 들어온다고 한번 인식하면 상대를 봐주지 않고 두들겨 패고는 했다. 고쳐야 하는 나쁜 버릇 중 하나였다.

‘옛날에도 약해빠진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덤벼드는 바람에 깽값 여러 번 물었지……. 어휴.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난 어떻게 죽었다 살아나도 이러고 사냐.’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퉁퉁 부어 있는 남자의 발목을 바라보며 이브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저지른 일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한 여자를 건드리는 쪽이 나쁜 거지. 이브는 이건 정당방위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브로서는 그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면 가질수록 좋았다. 이왕이면 그녀를 보며 질색하고 기겁하면 금상첨화였다.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를 깔아뭉개고 폭력으로 힘의 우위를 뇌에 쑤셔 박은 것은 그 탓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그의 인성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때마다 이렇게 그를 엉망진창으로 짓뭉개는 상상을 하고는 했었다. 그가 이브와 다른 약한 이들을 힘으로 억압했던 것처럼.

그와 똑같은 수준의 저급한 사람이 된다고 해도 좋았다.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제게로 쏟아지는 폭력에 당황스러워하던 바실리오의 얼굴을 볼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이 성미 더러운 남자가 품을 원한과 뒤끝이었다. 분명 엄청 구질구질하고 귀찮게 굴겠지. 이브를 죽이지 못해 안달할 남자의 미래가 눈앞에 선히 보였다.

러브라인과 플래그를 박살 낸 건 좋았는데, 너무 과하게 박살낸 나머지 남자의 갈비뼈와 발모가지까지 박살내고 말았다. 항상 생각하던 말이지만, 이렇게까지 하려던 건 아니었다.

‘아니 그냥, 조금만…… 묶어놓고 때리면 기가 죽을 줄 알았지…….’

결국 마지막까지 쥐어짜지는 동안에도 바실리오는 헐떡대면서 이브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래 봤자 눈물 콧물 타액으로 엉망이 된 얼굴이라 그리 위엄은 없었지만. 그래도 마도구를 처음으로 개시했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러웠다. 천재 발명가의 발명품답게 신경접속형 어른의 장난감 마도구는 무척이나 훌륭했다.

이브는 밤새 느꼈던 몸 안의 부드럽고 말랑한 촉감과 따뜻한 온기, 오물대는 근육의 움직임을 떠올리고는 가볍게 전율했다. 허리야 조금 뻐근하긴 해도 몸의 부담도 전무하다시피 한 데다 이성적인 시각으로 몸 아래에 깔려 엉망으로 망가지고 있는 남자를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기절할 때까지 한 건 심했나? 아니, 근데 저 새낀 덩치도 크고 근육도 붙은 게 튼튼하게 생겨가지고 어째 하룻밤도 못 버티고 나가떨어지냐? 이거 완전 헬스 근육이구만, 헬스 근육.’

떡 벌어진 어깨와 잘 짜인 복근이 나름대로 몸을 단련했음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실전으로 만든 몸이라기보다는 운동 삼아 체술을 익히며 만든 몸이라는 게 대충 눈에 보였다. 하기야 오랜 역사를 가진 암흑가 단체의 두목이 직접 나서서 몸을 쓸 일이 뭐 있겠느냐마는. 이래서 도련님들은 안 된다는 거였다. 이브의 마음속에서 바실리오는 순식간에 알베리크와 동급의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브는 정신을 잃은 남자의 곁에 앉아 식은땀에 푹 찌든 새카만 머리카락을 슬쩍 옆으로 넘겨보았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의 남자가 눈을 감고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생긴 건 참 다부지게 생겨서는 의외로 우는 얼굴이 색기가 있었다. 이렇게 센 척하는 사내들일수록 사흘 밤낮 할 것 없이 뒤로만 잔뜩 예쁨 받으면 결국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다 내던지고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마련이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조금 더 오랜 시간 공들여 괴롭혀줬을 텐데. 이브는 미약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도 몸을 일으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지금 바로 출발한다고 해도 알베리크의 잔소리를 피할 수는 없을 듯싶었다.

이브는 마지막으로 검집대를 허리에 차고 옷매무새를 정돈한 후, 스스로의 타액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쓰고 버린 걸레처럼 구겨져 있는 남자에게 안녕, 하고 들리지 않을 인사를 남긴 다음 방을 나왔다.

펍과 연결된 1층으로 내려온 이브는 바실리오에게 전할 메시지를 남겼다. 적당히 고운 말로 돌려 표현했지만 대충 요약하자면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그땐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메시지였다.

메시지를 전달받고 팔짝팔짝 뛸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깔깔 웃은 이브는 밖으로 나가 한참을 헤맨 끝에 작은 경마차를 잡아탈 수 있었다. 시간이 늦어 걱정했으나 아저씨, 따따블! 하고 외치기가 무섭게 마차가 이브의 눈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돈의 위력을 다시금 실감하며 이브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해가 뜨기 직전, 새벽 시간에야 저택에 귀가한 이브는 직접 문을 열어주는 집사장의 걱정이 담긴 무거운 눈빛에 한 번 찔끔하고, 이브가 귀가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홀로 나와 묵묵히 매서운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는 알베리크의 눈빛에 또 한 번 찔끔했다.

잠들지 않고 계속 그녀를 기다린 듯 피부가 꽤나 거칠어진 그가 한참이나 말없이 이브를 바라보았고, 그의 질책이 서린 눈초리에 이브는 결국 지레 찔려 아, 미안하다고!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외박 안 할게요! 하고 자진 납세를 했다. 이브의 알맹이야 어찌 생겨먹었든 간에 그들에게 있어 이브는 남성 보호자의 「보호」가 필요한 시집도 안 간 처녀였다.

“……아예 밖에서 자고 해가 다 뜬 후에나 들어오지 그랬습니까?”

“아니, 그러려던 건 아니고요……. 그냥 딱 한 잔만 한다는 게…….”

“한 잔? 그러고 보니 어디서 술 냄새가 진동을 하네요.”

계단을 내려온 알베리크가 이브의 몸 언저리에서 잠시 술 냄새를 맡는 듯하다가, 약하게 인상을 쓰며 물었다.

“이건 또 뭡니까, 향수?”

“아……. 그게, 어…….”

그가 맡은 것은 향유의 냄새였다. 옷에 튄 것인지, 묻은 것인지 미약하게 나는 장미 향을 용케 잡아낸 알베리크가 평소의 능글대던 태도는 어디 가고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브에게 재차 물었다. 그의 얼굴빛이 상당히 차갑게 식어 있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온 겁니까?”

“그냥 그……. 맥주도 좀 마시고……. 사람도 좀 만나고 그랬죠, 뭐.”

“사람이요? 누굴 만났습니까? 당신이 수도에 아는 사람이 있던가요?”

“아니 그게……. 뭐예요! 사람을 방구석 폐인 취급을 하고. 나도 나름대로 쌓아둔 인간관계가 있거든요?”

어쩐지 외박하고 온 남편 잡는 아내처럼 구는 알베리크의 예민한 모습에 이브는 그만 저도 모르게 더듬대며 거짓말을 했다. 알베리크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무언가를 가늠하듯 물끄러미 이브를 보았다.

“……한 번은 속아 드리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귀가가 늦는다면 미리 연락을 하세요.”

“예엡…….”

역시나지만, 통할 리가 없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그대로 쌩하니 위로 올라가버렸다. 이브는 잠깐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시두스의 늑대이자 제1부대의 우두머리인 카포(지부장) 그레고리오 살레르노는 젊은 보스의 은밀한 부름을 받고 그의 집무실로 들어선 순간 숨을 들이켜며 호흡을 멈추었다. 어울리지 않게 까탈스러운 성격 탓에 언제나 깔끔히 정돈되어 있던 두목의 집무실은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부름을 받기 전 보스의 오른팔인 도미니코에게 언뜻 그의 심기가 무척이나 사나우니 허튼소리는 하지 말고 예, 예 하고 대답만 하고 나오라는 언질을 듣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을 줄 몰랐다.

“씨발, 으아아악!”

심지어 현재진행형이었을 줄이야. 두목의 짐승 같은 으르렁대는 소리와 유리 장식장이 와장창 깨부수어지는 고약한 소음이 그의 귀를 강하게 때렸다. 도미니코가 꽤나 어렵게 공수해온, 한 세기 정도 전에 유명한 장인이 만들었다던 앤티크 유리장은 순식간에 쓰레기가 되었다.

“개, 씨발! 개 같은, 죽여버리겠어!”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미친놈이 저 또라이를 자극했을까. 그레고리오는 뒷짐 진 자세로 묵묵히 보스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면서도 내심 뱃속이 차게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연이어 짐승 우는 소리와 수위 높은 욕설, 집기들이 이리저리 아작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만에야 보스, 바실리오가 숨을 헐떡이며 난장판이 된 집무실 안에서 그나마 멀쩡한 원목 책상 위에 기대앉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딘가 불편한 듯 몸을 움찔대더니,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마구 발로 걷어찼다.

“분명 알고 있었어. 어떻게? 그 개 같은 년이, 알고 있었다고.”

바실리오는 혼잣말을 중얼중얼 입 안으로 웅얼대면서 눈으로 줄기줄기 붉은 살기를 흘려대고 있었다. 그레고리오의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갑작스럽게 휙, 바실리오의 얼굴이 제 부하를 향해 돌아갔다. 그레고리오는 겁먹은 것을 티 내지 않으려 표정 관리에 애쓰면서 입 안의 혀를 몰래 깨물었다.

“이벨린 베르묄에 대한 건 작은 단서 하나 빠트리지 말고 조사해. 애들 붙여서 뭘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도 철저하게 감시해. 그 년, 뭔가 있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바이퍼 새끼들 영역, 거래처 뭐든 간에 죄다 파악해서 올려. 모레 그쪽 헤드를 친다.”

“예? 하지만…….”

입을 열기가 무섭게 덩치 큰 사내의 얼굴로 두꺼운 양장커버 책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레고리오는 뒷짐 진 자세 그대로 눈을 꾹 감고 그것을 그대로 이마로 받아냈다. 책 모서리에 찍힌 눈썹 위에 금세 붉은 피가 비쳤다.

“내가 두 번 말해야 하나?”

바실리오의 목 안에서 그르릉, 하고 낮은 목 울음소리가 울렸다.

바이퍼는 요즈음 갑작스럽게 몸집을 불리고 있는 신생 조직이었다. 근거지가 겹치는 경우가 많은 데다 늑대와는 상성이 좋지 않은 뱀 집단이라 조금 골치 아프긴 했어도, 주로 다루는 품목이 달라 아직은 시두스에서 눈을 감아주고 있었다. 물론 규모가 더 커진다면 가차 없이 사냥에 나서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었다.

시두스처럼 유서 깊은 조직이 작은 규모의 피라미 단체에 이를 드러내보았자 면만 상할 뿐이다. 구역 싸움도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상대를 해주는 법이었다. 간혹 잔챙이들이 뭣 모르고 기어오를 때마다 「병사」들 선에서 정리하는 일은 있어도 두목이 나서서 그들의 업장을 건드리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스가 원하는 일이었다. 그레고리오는 어느새 얼굴을 타고 흐르는 피를 무시하며 허리를 숙이고 예, 하고 짧게 대답하고는 사내의 축객령을 들으며 문밖으로 나섰다.

문 앞에는 도미니코가 새카맣게 죽은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다. 두꺼운 문이 닫히고, 곧이어 다시 문 안쪽에서 와장창 하고 무언가 박살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저러시는지 선생도 모르는 거요?”

“하……. 대체 어딜 가서 뭘 했는지 늑골 두 대랑 발목 관절이 다 뭉개져서 왔더라고요. 얼굴에도 두들겨 맞은 흔적이 역력했다고요. 세상에, 대체 어떤 간 큰 새끼가 저 미친놈을 쥐어 패놓은 건지……!”

“맞, 맞았다고? 보스가?”

“예, 아주 죽사발이 났습니다. 그 새벽에 치료 마법사를 공수해 오느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죠.”

“허어…….”

“그 누구냐……. 귀족 집안 아가씨 하나 찔러보고 온다고 신나서 나가더니만, 나가서 대체 누굴 만나 뭘 한 건지 원…….”

다시금 두꺼운 문 안에서 절규에 가까운, 분노에 찬 괴성이 들려왔다. 사내의 두 부하들이 질린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보스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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